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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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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형필은 일제강점기 한국 문화재 수집가이자 교육자이다. 1906년 서울에서 태어나 와세다 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춘곡 고희동, 위창 오세창과의 교류를 통해 문화재 수집을 시작했다. 1932년부터 사비를 들여 한국 고미술품을 수집했으며, 1938년에는 사립미술관 보화각을 설립했다. 1940년 보성고보를 인수하고, 1945년 보성중학교 교장을 겸임했으며, 1960년에는 고고미술을 발간했다. 1962년 사망 후 대한민국 문화훈장과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으며, 그의 가옥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간송미술관은 그의 수집품을 전시하며, 훈민정음 해례본과 고려청자 등 주요 문화재 수집 및 보존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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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간송 전형필 선생
원어 이름全鎣弼
출생일1906년 7월 29일
출생지한성부 연화방
사망일1962년 1월 26일
사망지서울특별시
국적대한민국
간송(澗松), 지산(芝山), 취설재(翠雪齋), 옥정연재(玉井硏齋)
학력 및 직업
학력와세다 대학 법학부
직업교육자
문화재 수집가
문화재 보존가
저술가
경력
경력고고미술동인회 회장
활동 기간1930년 ~ 1962년
가족 관계
자녀전성우(장남)
전영우(차남)
친척전인건(손자)
김광균(사돈)
기타 정보
장르고고문화재미술학

2. 생애

1906년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1926년 휘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 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했다.[4] 그의 부친은 서울특별시 종로 일대에서 큰 상권을 형성하여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다.[5]

1932년, 일제강점기라는 어려운 시기에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사재를 털어 고미술품 수집에 나섰다.[6] 이러한 결심에는 독립운동가이자 서화가인 오세창과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7] 그는 수집한 문화재의 가치를 연구하기 위해 북단장(北壇莊)을 마련했으며, 1938년에는 이곳에 한국 최초의 사립 미술관인 보화각(葆華閣)을 건립하여 문화재 보존과 연구의 기틀을 다졌다.[8][9]

1940년, 그는 현재 서울특별시 송파구에 위치한 보성고등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했으며, 이후 한국 최초의 미술사 연구 단체인 동인회(고고미술동인회)를 조직했다. 이 단체는 오늘날 한국미술사학회의 모태가 되었다.[10]

1962년 세상을 떠난 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11] 그가 세운 보화각은 1966년 한국민족미술연구소로 개편되었고, 1971년부터는 간송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재개관하여 그가 평생 수집한 소중한 문화재들을 연구하고 대중에게 선보이고 있다.[11]

2. 1. 어린 시절과 교육

1906년 서울 한성부(현 종로구)에서 전영기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천뢰(天賚), 호(號)는 간송(澗松), 지산(芝山), 취설재(翠雪齋)이다. 그의 증조부는 중군(中軍, 西班, 정3품) 전계훈(全啓勳)이며, 작은아버지 전명기는 내부주사(內部主事) 및 참서관(參書官)을 지냈다. 전형필의 집안은 증조부 때부터 배우개(지금의 종로4가)를 중심으로 종로 일대의 상권을 장악한 대부호 가문이었으며[20], 부친 대에는 종로 거리에 점포를 확장하여 막대한 재산을 소유했다.[5]

작은아버지 전명기가 후손을 얻지 못하자, 당시의 관례에 따라 그의 양자로 입적되었다.[20] 학창 시절에는 외사촌형인 월탄 박종화(月灘 朴鍾和)와 교류하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본래 국문학을 전공하고자 했으나, 부친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법학을 공부하게 되었다.[20]

학력
연도내용
1921년어의동 공립보통학교 졸업[20]
1926년휘문고등보통학교 (현 휘문고등학교) 졸업[20][4]
1926년 이후와세다 대학 법학부 진학[20][4]


2. 2. 막대한 유산 상속과 문화재 수집 결심

전형필은 1906년 서울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종로 일대에서 점포를 운영하며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5] 휘문고등학교를 1926년에 졸업하고[4] 일본 와세다 대학교 법학과에 진학했다.[4]

1930년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전형필은[22] 상속받은 막대한 재산을 바탕으로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 상황 속에서 우리 문화재를 지키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삼았다. 그는 문화재 수집과 보존이 자신이 할 수 있는 독립운동이라 생각했으며,[22] 일본 등으로 우리 문화재가 유출되는 것을 막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6]

이러한 결심에는 휘문고등보통학교 시절 스승이었던 춘곡 고희동독립운동가 위창 오세창의 영향이 컸다.[7]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민족주의자였던 고희동은 전형필의 고교 시절 미술 교사였다. 오세창과는 1928년, 고희동의 소개로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이후 그를 자주 만나며 민족문화 수호의 중요성을 깨닫고 서화와 골동품에 대한 감식안을 키울 수 있었다. 오세창은 한학의 대가이자 한국 서화의 역사를 정리한 '근역서화징'의 저자이기도 했다.

1932년 전형필은 서울특별시 관훈동에 있던 고서점 한남서림을 인수하며 본격적으로 문화재 수집에 나섰다.[22] 1934년에는 서울 성북동에 북단장(北壇莊)을 마련하여 수집 활동의 기반을 다졌으며,[20] 이곳에서 고미술품의 가치를 연구하기도 했다.[8] 마침내 1938년, 33세가 되던 해에 북단장 안에 한국 최초의 사립 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을 세워 소장품들을 보존, 연구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20][8][9] 1940년경에는 김태준을 통해 민족의 귀중한 문화유산인 《훈민정음 해례본》을 입수하는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20]

2. 3. 보화각 설립과 문화재 보존 활동

1930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전형필은 막대한 재산을 바탕으로 조선의 중요 문화재를 수집하기 시작했다.[22] 그는 문화재 수집과 보존을 자신이 할 수 있는 독립운동의 한 방법으로 여겼다.[6]

문화재 보존에 대한 그의 관심에는 휘문고등보통학교 시절 스승이었던 고희동독립운동가 오세창의 영향이 컸다.[7]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민족주의자였던 고희동은 전형필의 고교 시절 미술 교사였다. 1928년 여름 방학 때 일본에서 잠시 귀국했을 때 고희동의 소개로 오세창을 만났고, 이후 그를 자주 만나며 민족 문화 수호의 중요성을 깨닫고 서화와 골동품에 대한 감식안을 길렀다. 오세창은 한학의 대가이며 민족 미술의 대계를 정리한 '근역서화징'의 저자이기도 했다.

1932년에는 서울특별시 관훈동에 있던 고서점 한남서림을 인수하여, 우리 문화재가 국외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본격적으로 문화재를 사들였다. 그의 최우선 목표는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 유물을 보존하는 것이었다.[6] 1934년에는 서울 성북동에 북단장(北壇莊) 부지를 마련하고 고미술품의 가치를 연구하며[8][9] 더욱 체계적으로 문화재를 수집했다.

1938년, 33세의 나이로 북단장 안에 한국 최초의 사립 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을 설립하여 수집한 문화재들을 보존, 연구할 기반을 마련했다.[20][8][9] 1940년경에는 김태준을 통해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을 입수하여 지켜냈다.

보화각은 훗날 1966년 한국민족미술연구소로 개편되었고, 1971년부터는 간송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재개관하여 전형필이 수집한 문화재들을 대중에게 선보이고 있다.[11]

2. 4. 교육 활동 및 기타 활동

1940년 보성고보를 인수하였으며[23], 1945년에는 1년 동안 보성중학교 교장을 맡았다.

1960년에는 이전부터 그를 돕던 김상기, 김원룡, 최순우, 진홍섭, 홍사준(전 부여박물관장) 등과 함께 '고고미술 동인회'를 만들고 《고고미술(考古美術)》이란 동인지를 발간하기도 했다. 현재 한국미술사학회의 전신인 고고미술동인회는 한국 최초의 미술사학회이다.[10]

2. 5. 한국 전쟁과 문화재 수호

한국 전쟁 중, 북한 당국은 간송 미술관의 모든 자산을 강탈하려 시도했다. 이러한 위협 때문에 전형필은 잠시라도 서울을 떠날 수 없었다. 수도 서울의 지배권이 여러 차례 바뀌는 혼란 속에서도, 전형필과 그의 동료, 친구들은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전형필 자신도 폭격의 위험 속에서 서울에 남아 문화재를 지켰다.

2. 6. 사망과 추모

1962년 1월,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8월 15일 대한민국 문화포장이 추서되었고, 1964년에는 대한민국 문화훈장 동백장이 추서되었다.[20] 2014년 10월에는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에 추서되었다.[24] 또한 문화재청은 그의 업적을 기려 2012년 12월 14일 서울 방학동 전형필 가옥을 등록문화재 제521호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24]

1966년 그가 설립한 보화각은 유족과 지인들에 의해 한국민족미술연구소와 간송미술관으로 개편되었다. 이는 전형필이 수집한 문화재들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정리하기 위함이었다. 간송미술관은 1971년 봄 '겸재전'(謙齋展)을 시작으로 2014년 가을까지 매년 두 차례씩 소장품 무료 일반 공개 전시를 열었다. 현재는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설립되어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간송문화전을 열어 더 많은 대중에게 간송 컬렉션을 선보이고 있다.

3. 주요 수집품 및 관련 일화

간송미술관은 가장 많은 수의 국보를 소장하고 있다. 특히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국보 제70호)은 전형필의 대표적인 수집품으로 꼽힌다.[12] 이 외에도 해외로 반출될 뻔한 수많은 고려청자를 지켜내는 등, 그의 문화재 수집 활동에는 다양한 일화가 전해진다.

3. 1. 훈민정음 해례본

훈민정음 해례본 수집에 얽힌 일화는 전형필의 문화재 수호 의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1940년[14] 경상북도 안동의 광산 김씨 종가에서 보관되어 오던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었다. 이 해례본은 본래 세종이 여진족 정벌의 공을 세운 광산 김씨 문중에 하사한 가보였다고 전해진다.[14]

당시 이 집안의 사위였던 이용준이 집안의 다른 서책들과 함께 해례본을 몰래 빼돌려 자신의 집에서 보관하고 있었다. 이후 1942년, 이용준은 김태준을 통해 전형필에게 해례본 판매 의사를 전달했다. 이용준은 판매가로 당시 시세로 좋은 기와집 한 채 값인 천 원을 제시했으나, 문화재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는 것으로 알려진 전형필은 금액이 너무 적다고 판단하여 기와집 열 채 값에 해당하는 만 원을 지불했다.[15] 전형필은 중개 역할을 한 김태준에게도 수고비로 천 원을 별도로 주었다고 한다. 해례본을 판매한 이용준과 중개한 김태준은 사회주의자로, 판매 대금을 사회주의 운동 자금으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광복 후 김태준은 일련의 사건으로 체포되어 사형당했고, 이용준은 월북했다.

전형필이 해례본을 구입할 당시 일제 강점기 말기로, 일본 당국은 한글 교육을 억압하고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등 민족 문화 말살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15] 이러한 상황에서 전형필은 해례본의 존재가 알려질 경우 일본 당국에 압수될 것을 우려하여 해례본을 비밀리에 보관했다.

광복 이후, 전형필은 비로소 해례본의 존재를 국문학계에 알리고 영인본을 제작하여 배포함으로써 그 내용을 세상에 공개했다.[25][16] 이를 통해 오랫동안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었던 한글 창제 원리가 명확히 밝혀지게 되었다. 전형필이 수호한 이 훈민정음 해례본은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으며,[26][12] 1997년 10월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26] 그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현재 이 해례본은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12]

3. 2. 고려청자

고려 시대, 특히 12세기 이후 제작된 고려청자는 한국의 가장 귀중한 문화유산 중 하나로 여겨진다. 그러나 많은 양의 도자기가 특별한 통제 없이 해외로 반출되는 안타까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형필은 한반도 밖으로 반출된 작품들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17]

전형필의 노력은 당시 고려청자 22점을 소유하고 있던 영국인 변호사 존 개츠비에게까지 닿았다. 전형필은 개츠비로부터 국보고려청자 20점을 40만에 사들였는데, 원래 개츠비가 제시한 가격은 50만 이상이었다. 거래 과정은 쉽지 않았으나, 존 개츠비는 전형필의 문화재 사랑과 한국 예술 작품을 지키려는 노력에 감동하여, 결국 20점을 40만에 넘겨주고 고국으로 돌려보내는 데 동의했다. 나머지 2점은 개츠비 자신이 소장하기로 했다.[17] 이 일화는 전형필의 문화재에 대한 깊은 애정과 수호 의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4. 수상


  • 1962년 대한민국 문화포장 추서
  • 1964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동백장 추서
  • 2014년 금관문화훈장 추서

참조

[1] 웹사이트 Kansong Art Museum https://archive.toda[...] Seoul Metropolitan Government
[2] 웹사이트 Meet the "four friends" at Gansong Art Museum http://www.koreaawar[...]
[3] 웹사이트 Gansong Art Museum https://archive.toda[...] Seoul Metropolitan Government
[4] Live Journal Live Journal http://samedi.livejo[...]
[5] 서적 서울 이런곳 와보셨나요? 100/ Have you visited these places in Seoul? 100 2008
[6] 웹사이트 Korea's Top three museum https://archive.toda[...] 2013-02-01
[7] 서적 한국미술 100년 The Centennial of Korean art 2006
[8] 서적 서울 이런곳 와보셨나요? 100/ Did you visit these places in Seoul? 100 2008
[9] 웹사이트 Museums in Seoul, Korea http://traveltips.us[...] USA Today
[10] 뉴스 “발로 뛴 사진 120만 장 모아 한국미술사연구 집대성할 것” http://news.naver.co[...] Shindong-a, Monthly magazine 2013-01-25
[11] 웹사이트 Gansong art museum http://www.visitkore[...] Visitkorea.or.kr
[12] 웹사이트 Hunmin Jeongeum, UNESCO's Memory of the World http://english.visit[...]
[13] 웹사이트 A-must-visit if you are in Seoul http://londonkoreanl[...]
[14] 서적 다시 책이다 Once again, the book 2007
[15] 웹사이트 Livejournal: Gansong Art Museum http://samedi.livejo[...]
[16] 서적 조선평전 2011
[17] 웹사이트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eb.archive.[...] 2013-02-01
[18] 웹사이트 간송미술문화재단의 설립취지 http://kansong.org/f[...] 간송미술문화재단
[19] 웹사이트 훈민정음 [訓民正音] (두산백과) https://terms.naver.[...] 네이버 지식백과
[20] 서적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19 https://terms.naver.[...] 웅진출판 1991
[21] 웹사이트 간송 전형필의 문화재 사랑과 훈민정음 해례본 (0분 38초) https://ko.wikipedia[...] 국립한글박물관
[22] 저널 '[김은주의 시선] 전형필의 문화유산 지키기'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17-07-27
[23] 웹사이트 '[간송미술문화재단] 보성 중학교 인수과 훈민정음 구입' http://kansong.org/k[...] 간송미술문화재단
[24] 웹사이트 전형필 [全鎣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s://terms.naver.[...] 네이버 지식백과
[25] 웹사이트 훈민정음 해례본 - 한글의 창제 목적과 원리를 밝히다 (위대한 문화유산, 이진명, 간송미술문화재단) https://terms.naver.[...] 네이버 지식백과
[26] 웹사이트 훈민정음 [訓民正音] (두산백과) https://terms.naver.[...]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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