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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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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방덕은 후한 말, 삼국 시대 위나라의 장수이다. 량주 남안군 환도현 출신으로, 젊은 시절 마등을 섬기며 강족과 저족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웠다. 202년에는 마초의 부장으로 종요를 도와 곽원을 격파하고 중랑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마초를 따라 동관 전투와 기성 전투에서 패배한 후 조조에게 항복했다. 조조 휘하에서 번성 전투에 참여하여 관우와 싸우다 포로가 되었으나 항복을 거부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충절을 기려 조조와 조비는 그에게 후한 예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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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덕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번성 전투에서의 방덕 ([[청나라]] 삽화)
번성 전투에서의 방덕 (청나라 삽화)
이름방덕
본명방더 (龐悳)
영명 (令明)
시호장후 (壯侯)
작위관문정후 (關門亭侯)
생년미상
사망년도219년
출생지량주남안군 환도현
사망지샹양판청구
소속후한
주군마등마초 → 장로 → 조조
친척방유 (사촌)
자녀방회
기타 세 아들
관직 및 직위
초기 관직양주종사
초기 직위교위, 중랑장
최종 직위입의장군
경력
202년마등 휘하에서 가솔 장군 (中郎將)
불명종사 (從事)
주요 전투
관련 전투번성 전투
기타 정보
로마자 표기Pang De
추가 정보
별칭방령명 (龐令明)

2. 생애

방덕은 젊어서부터 에서 종사(從事)로 근무하였다. 초평 연간, 강인과 저인들의 반란을 마등의 지휘 하에 진압하고 여러 공을 세워 교위(校尉)에 이르렀다.[1]

202년(건안 7년) 조조원담, 원상 형제를 위군 여양현(黎陽縣)에서 정벌할 때, 원담·원상 형제는 곽원고간에게 하동군을 공격하게 했다. 마등은 조조를 지원하여 장남 마초사례교위 종요에게 파견하였고, 방덕도 마초의 부장으로 참전하였다. 평양현(平陽縣)에서 선봉으로 싸워 곽원의 머리를 베었으나, 그가 곽원인지는 몰랐다. 전투 후, 곽원의 머리를 동개에서 꺼내자 종요가 통곡하였는데, 곽원이 종요의 생질이었기 때문이다. 방덕이 사과하자 종요는 ‘곽원이 비록 생질이었어도 나라의 적이었다’며 사과할 일이 아니라 하였다.[35][2][29] 이 공으로 중랑장이 되고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다.[3]

이후 마등을 따라 허난성 뤄닝현 요현(殽縣)에서 발생한 장백기의 반란을 진압했다. 방덕은 항상 적진으로 직접 돌격했기 때문에 마등의 군대에서 용맹함으로 명성을 얻었다.[4]

208년[36], 마등이 위위가 되어 조정으로 들어가자, 방덕은 관서에 남은 마초에게 속하였다.[36][5] 211년, 마초군이 동관 전투에서 조조에게 패하고 212년 혹은 213년[37] 기성 전투(冀城―)마저 패배하여 마초는 한중의 장로에게로 도주하였고 방덕도 이를 따라갔다.[37][6]

214년, 마초는 장로를 떠나 촉의 유비에게로 향했는데,[38] 방덕은 한중에 남았다. 215년, 한중을 정복한 조조에게 귀순하였다. 조조도 그 용명을 들어왔던 터라 관직은 입의장군(立義將군)을, 작위는 관문정후(關門亭侯)를, 식읍은 300호를 주었다.[7]

218년 남양군 완현(宛縣)에서 후음(侯音)과 위개(衛開)가 반기를 들자 조인과 함께 토벌하였다. 219년 이들을 처단한 후 번성(樊城)으로 내려와 관우에 맞섰다. 사촌 형 방유(龐柔)가 촉나라에 있었으므로[35] 번성의 장수들은 방덕을 의심하였다. 이에 방덕은 국가로부터 받은 은혜를 목숨바쳐 갚을 것이며, 올해 안에 관우를 죽이지 못하면 자신이 관우에게 죽을 것이라고 소리쳤다. 이후 관우와 직접 겨뤄 그 이마화살을 맞추었다. 당시 방덕은 백마를 타고 다녔으므로 관우군은 백마장군이라 부르며 두려워하였다.

조인은 방덕에게 번성 북쪽 10 리 지점에 별도 진영을 세우도록 명령했다. 당시 10일 이상 폭우가 쏟아져 한수가 범람하여 수위가 5~6 까지 이르렀다. 방덕과 부하들은 둑 위로 피했다. 관우는 해병대를 이끌고 번성을 공격하며 전함에서 둑으로 화살을 쏘았다. 방덕도 응사하니 빗나가는 것이 없었다. 방덕의 동료인 동형동초가 관우에게 항복하려 하자, 방덕은 그 자리에서 그들을 처형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관우군의 공격은 거세지고 화살은 떨어져 육박전이 벌어졌다. 방덕은 성하에게 “훌륭한 장수는 죽음을 겁내 피하지 않으며 열사는 절개를 꺾어 목숨을 구하지 않는다. 오늘이 내가 죽을 날이다.”라고 하였다. 치열한 전투 속에서도 기상은 굳건했으나 물은 불어나고 장병들은 거의 투항하였다. 방덕은 작은 배로 조인에게 돌아가려 했지만 거친 물살에 배가 뒤집혔다. 과 화살을 잃고 전복된 배에 매달려 있다가 관우에게 사로잡혔다.

관우가 “그대의 형이 한중에 있소. 내 그대를 장수로 삼으려 하는데 왜 항복하지 않았소?”라고 묻자, 방덕은 꿇지 않고 “애송이! 무슨 항복이냐!? 조조는 백만 명을 거느리고 그 위엄이 천하에 진동하는데 용렬한 유비가 어찌 대적하겠는가! 나라의 귀신이 될지언정 적의 장수는 되지 않는다!”라 하고 의연히 최후를 맞았다.

조조는 방덕의 죽음에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 220년(연강 원년) 조비가 위나라 왕위를 잇고 장후(壯侯)란 시호를 내렸으며, 방회 등 아들 네 명을 관내후(關內侯)에 봉하고 식읍 100호를 주었다.

2. 1. 초기 생애와 군 경력

젊어서부터 에서 종사(從事)로 근무하였다. 초평 연간, 강인(羌人)과 저인(氐人)들의 반란을 마등의 지휘 하에 진압하고 수차례 공을 세워 교위(校尉)에 이르렀다.[1]

202년(건안 7년) 조조원담·원상 형제를 위군 여양현(黎陽縣)에서 정벌할 때, 원담·원상 형제는 곽원고간에게 하동군을 공격하게 했다. 마등은 조조를 지원하여 장남 마초사례교위 종요에게 파견하였고, 방덕도 마초의 부장으로 참전하였다. 평양현(平陽縣)에서 선봉으로 싸워 곽원의 머리를 베었으나, 그가 곽원인지는 몰랐다. 전투 후, 곽원의 머리를 동개에서 꺼내자 종요가 통곡하였다. 곽원이 종요의 생질이었기 때문이다. 방덕이 사과하자 종요는 ‘곽원이 비록 생질이었어도 나라의 적이었다’며 사과할 일이 아니라 하였다.[35][2][29] 이 공으로 중랑장이 되고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다.[3]

이후 마등을 따라 허난성 뤄닝현 요현(殽縣)에서 발생한 장백기의 반란을 진압했다. 방덕은 항상 적진으로 직접 돌격했기 때문에 마등의 군대에서 용맹함으로 명성을 얻었다.[4]

2. 2. 마등, 마초와의 관계

방덕은 젊어서부터 에서 종사(從事)로 근무하였다. 초평 연간, 마등의 지휘 아래 강인(羌人)과 저인(氐人)들을 토벌하고 여러 차례 공을 세워 교위(校尉)에 임명되었다.[35]

202년(건안 7년), 조조원담·원상 형제를 정벌하고자 위군 여양현(黎陽縣)으로 북상하였다. 원담·원상 형제는 곽원고간에게 하동군을 공격하게 하였다. 마등은 조조를 지원하여 아들 마초사례교위 종요에게 파견하였고, 방덕도 마초의 부장으로 참전하였다. 평양현(平陽縣)에서 선봉으로 싸워 곽원의 머리를 베었으나, 자신이 죽인 사람이 곽원인지는 몰랐다. 전투 후 종요의 부하들이 곽원의 머리 없는 시신을 발견하였고 얼마 후 방덕은 종요를 만나 곽원의 머리를 그의 앞에 던졌다. 종요는 곽원의 머리를 보고 울었는데, 곽원이 그의 외조카였기 때문이다. 방덕은 즉시 종요에게 사과했고, 종요는 "곽원이 비록 생질이었어도 나라의 적이었다"며 사과할 일이 아니라고 답했다.[35][2] 이 공으로 중랑장이 되고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다.[35][3] 이후 마등이 홍농군에서 장백기(張白騎)를 격파할 때도 종군하여 공을 세웠다.[35]

208년[36], 마등이 위위가 되어 조정으로 들어가자, 방덕은 관서에 남은 마초에게 속하였다.[36][5] 211년, 마초군이 동관 전투에서 조조에게 패하고 212년 혹은 213년[37] 기성 전투(冀城―)마저 패배하여 마초는 한중의 장로에게로 도주하였고 방덕도 이를 따라갔다.[37][6] 214년, 마초는 장로를 떠나 촉의 유비에게로 향했는데,[38] 방덕은 한중에 남았다. 215년, 한중을 정복한 조조에게 귀순하였다. 조조도 그 용명을 들어왔던 터라 관직은 입의장군(立義將군)을, 작위는 관문정후(關門亭侯)를, 식읍은 300호를 주었다.[7]

태평어람』에 인용된 부현의 『승여마부』에 따르면, 마초가 소씨의 보루를 함락했을 때 준마 100여 필을 얻었다. 마초를 비롯한 모두가 살찐 말을 차지하려고 다투는 가운데, 방덕은 누런 털에 입 주위가 검고, 보기에도 흉한 말을 선택하려 하여 비웃음을 샀다. 그 후 위남에서의 전투에서 그 말은 번개처럼 질주하여 따라잡을 수 없었고, 이로 인해 모두에게 인정받았다고 한다.[33]

2. 3. 조조에게 귀순

214년 마초가 장로를 떠나 유비에게 항할 때,[38] 방덕은 한중에 남았다. 215년 한중을 정복한 조조에게 귀순하였는데, 조조도 그의 용맹함을 들어왔던 터라 입의장군(立義將軍)으로 임명하고, 작위는 관문정후(關門亭侯)로, 식읍은 300호를 주었다.[7]

2. 4. 번성 전투와 죽음

218년 남양군 완현(宛縣)에서 후음(侯音)과 위개(衛開)가 반기를 들자 조인과 함께 토벌하였다. 219년 이들을 처단한 후 번성(樊城)으로 내려와 관우에 맞섰다. 사촌 형 방유(龐柔)가 촉나라에 있었으므로[35] 번성의 장수들은 방덕을 의심하였다. 이에 방덕은 국가로부터 받은 은혜를 목숨바쳐 갚을 것이며, 올해 안에 관우를 죽이지 못하면 자신이 관우에게 죽을 것이라고 소리쳤다. 이후 관우와 직접 겨뤄 그 이마화살을 맞추었다. 당시 방덕은 백마를 타고 다녔으므로 관우군은 백마장군이라 부르며 두려워하였다.

조인은 방덕에게 번성 북쪽 10 리 지점에 별도 진영을 세우도록 명령했다. 당시 10일 이상 폭우가 쏟아져 한수가 범람하여 수위가 5~6 까지 이르렀다. 방덕과 부하들은 둑 위로 피했다. 관우는 해병대를 이끌고 번성을 공격하며 전함에서 둑으로 화살을 쏘았다. 방덕도 응사하니 빗나가는 것이 없었다. 방덕의 동료인 동형동초가 관우에게 항복하려 하자, 방덕은 그 자리에서 그들을 처형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관우군의 공격은 거세지고 화살은 떨어져 육박전이 벌어졌다. 방덕은 성하에게 “훌륭한 장수는 죽음을 겁내 피하지 않으며 열사는 절개를 꺾어 목숨을 구하지 않는다. 오늘이 내가 죽을 날이다.”라고 하였다. 치열한 전투 속에서도 기상은 굳건했으나 물은 불어나고 장병들은 거의 투항하였다. 방덕은 작은 배로 조인에게 돌아가려 했지만 거친 물살에 배가 뒤집혔다. 과 화살을 잃고 전복된 배에 매달려 있다가 관우에게 사로잡혔다.

관우가 “그대의 형이 한중에 있소. 내 그대를 장수로 삼으려 하는데 왜 항복하지 않았소?”라고 묻자, 방덕은 꿇지 않고 “애송이! 무슨 항복이냐!? 조조는 백만 명을 거느리고 그 위엄이 천하에 진동하는데 용렬한 유비가 어찌 대적하겠는가! 나라의 귀신이 될지언정 적의 장수는 되지 않는다!”라 하고 의연히 최후를 맞았다.

조조는 방덕의 죽음에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다. 220년(연강 원년) 조비가 위나라 왕위를 잇고 장후(壯侯)란 시호를 내렸으며, 방회 등 아들 네 명을 관내후(關內侯)에 봉하고 식읍 100호를 주었다.

2. 5. 사후

방덕은 작은 배를 이용해 조인에게 돌아가려 했지만 거친 물살에 배가 뒤집히고 말았다. 과 화살도 잃고 전복된 배에 매달려 있다가 관우에게 잡혔다. 관우가 “경의 형이 한중에 있소. 내 경을 장수로 삼게 하려 했는데 왜 일찍 항복하지 않았소?”라고 묻자, 방덕은 꿇지 않고 꼿꼿이 선 채로 “애송이야! 무슨 항복을 운운하느냐!? 조조는 백만 명을 거느리고 그 위엄이 천하에 진동하는데 용렬한 재주뿐인 유비가 어떻게 대적하겠는냐! 나라의 귀신이 될지언정 적의 장수는 되지 않는다!”라 하고 의연히 최후를 맞았다.[1] 조조는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고 방덕의 자식 둘을 열후(列侯)에 봉했다.[1] 220년 (연강 원년) 조비는 방덕에게 장후(壯侯)란 시호를 내리고, 방회 등 아들 네 명을 관내후(關內侯)에 봉하고 식읍 100호를 붙여주었다.[1]

3. 평가

방덕은 매 전투마다 적을 물리쳐 그 용맹이 마등군에서 으뜸이었으며, 그 명성은 조조에게도 알려질 정도였다. 조비는 시호를 내리며 '옛날에 선진(先軫)과 왕촉(王蠋)이 자신을 희생하며 지조를 지킨 것을 아름답게 여겼다. 방덕은 과의하여 역경을 딛고 명성을 떨쳤으며 그 절의까지 드높였다'라고 하였다. 진수는 방덕이 목숨을 내놓고 적에게 호통쳤다며 주가의 절개를 지녔다고 평하였다.[39] 진수가 저술한 삼국지는 방덕이 관우에 대한 저항을, 죽음을 무릅쓰고 항우에 맞선 유방의 신하 주가에 비유했다.

부현과 서진의 역사가이자 정치가에 따르면, 동관 전투(또는 위남 전투) 전에 마초와 방덕이 수백 마리의 말이 있는 마구간에 들이닥쳤다고 한다.[18] 방덕은 질 낮은 말을, 마초는 가장 좋은 말을 골랐는데, 이 때문에 방덕은 비웃음을 샀다고 한다. 하지만 방덕의 말은 동관 전투에서 가장 빨리 달렸다고 한다.[18]

롱시현 誌와 산시 통지(산시 誌)에 따르면, 이광과 관우와의 번성 전투에서 용맹함을 칭송받은 방덕, 두 중국 전사의 용맹함을 기리는 "백마 장군 사당"이 치산산 정상에 있다고 한다.[19][20]

4.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소설삼국지연의》에서 방덕은 마초 해몽으로 처음 등장한다. 마초가 꾼 불길한 꿈을 통해 허도에 간 마등 일행이 변을 당할 것을 예견하고, 마대가 돌아와 그 비보를 전한다.[24] 이후 마초를 따라 조조에게 복수하기 위한 전투에 나선다. 장안이 견고하여 고전하던 중, 방덕은 장안의 식수와 땔감이 부족하다는 점을 이용한 계책을 낸다. 마초가 군을 물리는 척하자 군수 종요성문을 열어 땔감과 식수를 구하려 하고, 방덕은 그 틈을 타 성안으로 잠입한다. 닷새 후, 마초군이 다시 공격하자 종요는 수비 태세를 갖추고, 그의 가공의 동생 종진(鍾進)이 서문을 담당한다. 방덕은 한밤중에 종진을 습격하여 죽이고 서문을 열어 마초와 한수군이 장안을 함락시키는데 기여한다.

동관 전투에서도 활약한 방덕은 한수가 위남(渭南)을 공격할 때 선봉을 맡지만, 이는 조조의 함정이었다. 위급한 상황에서도 조인의 가공의 부장 조영(曹永)을 죽이고 포위된 한수를 구출한다.

결국 패배하고 양주에서 쫓겨난 마초를 따라 한중의 장로에게 의탁한다. 이후 병을 얻어 마초와 헤어져 한중에 남게 된다. 조조가 한중을 침공하여 양평관을 함락하고 남정현(南鄭縣)에 이르자, 염포의 추천으로 조조에 맞선다. 조조는 방덕의 용맹을 알고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자 장합, 하후연, 서황, 허저에게 번갈아 싸우게 하고 지치면 생포하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가후의 계책으로 양송에게 뇌물을 주어 방덕을 모함하게 한다. 장로는 분노하여 방덕을 죽이려 하지만 염포의 간언으로 공을 세우지 못하면 처형하겠다고 다그친다. 방덕은 조조에게 달려들다 함정에 빠져 사로잡히고, 그대로 조조에게 귀순한다. 이후 유수구(濡須口)에서 진무를 죽이고, 한중 공방전에서는 위연으로부터 조조를 구한다.

번성 구원군의 선봉을 자원한 방덕은 자신을 의심하는 이들에게 을 짜고 전장에 나가 자신이 죽으면 그 시체를, 관우를 죽이면 그 머리를 담겠다며 필사의 각오를 보인다. 전초전에서 관평과 30합을 겨루었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고, 관우와는 100여 합을 겨루어도 승부가 나지 않았다. 다음 날, 50여 합 만에 거짓으로 패하는 척하다 화살을 쏘아 관우의 왼을 맞히고 뒤쫓지만, 큰 공을 세울까 시기한 대장 우금이 방덕을 철수시킨다. 우금은 골짜기인 증구천(罾口川)에 주둔하며 방덕의 진로를 막는다. 결국 관우의 수공에 당해 번성 구원군은 궤멸되고, 방덕은 주창이 뗏목을 타고 와 방덕의 를 뒤집어 물에 빠진 방덕을 사로잡는 것으로 묘사된다. 방덕은 관우에게 항복하지 않고 처형된다.

right 화가 商喜|상희중국어의 『관우금장도(關羽擒將圖)』 (고궁박물원 소장)]]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방덕은 마등 사후 조조에게 복수하려는 마초를 충실히 따르며 참모 역할을 한다. 장로에게 의탁한 마초가 유비와 싸우기 위해 익주로 출진할 때 병으로 동행하지 못하고, 마초가 유비에게 항복한 후에도 한중에 남아 있는다.

조조의 한중 공격 때 장로의 군사로 출진하여 하후연·허저와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인다. 조조는 방덕을 아껴 양송을 매수하여 장로와 이간질시켜 방덕이 조조에게 귀순하게 만든다.

이후 손권과의 전투에서 부장 진무를 일기토 끝에 물리치는 무공을 세운다.

번성 구원에 자원한 방덕은, 마초가 촉의 오호장군이 되었고 형 방유가 익주에서 벼슬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우금에게 의심을 받는다. 방덕은 조조에게 "어리석은 형수를 술김에 죽여 형에게 원한을 샀고,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맹세했으니, 은의는 끊어졌습니다. 또한 옛 주인 마초는, 무용은 있지만 무모하여, 병사들은 패배하고 세력도 잃어버려 홀몸으로 촉으로 달아났고, 지금은 저와 다른 주군을 섬기고 있으니, 이전의 충의는 이미 끊어졌습니다."라고 말하며 충성을 강조한다.[25]

관우 정벌전에서 방덕은 자신에게 향한 의혹을 풀기 위해 싸움 전에 자신의 관을 준비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관우를 쳐부수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조조는 이를 칭찬한다.

장군은 우금, 부장은 방덕이 되지만 둘의 사이는 험악하여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다. 방덕이 관우의 왼팔에 화살을 맞히는 등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었지만, 우금은 자신의 체면을 잃을까 두려워 철수를 명령한다. 우금의 방해는 계속되었고, 결국 관우의 수공에 대패한다. 방덕은 주창에게 사로잡히고, 우금은 항복하지만 방덕은 충의를 굽히지 않아 관우에게 처형된다.

『삼국지연의』를 편찬한 모종강은 방덕이 주체적으로 항복을 선택한 것처럼 묘사를 바꿨다.[26] 모종강은 방덕을 비판적으로 평가했는데, 이는 촉한에 귀순한 마초를 배신하고 조조에게 붙은 점, 관우와 대립한 점이 영향을 미쳤다.[27] 마초를 배신한 것은 촉한에 대한 배신으로 이어지고, 관우나 제갈량과 적대 관계에 있던 인물은 『삼국지연의』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5. 가계

방회는 방덕의 아들이다. 방덕이 죽은 후, 그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공헌을 기리기 위해 열후 작위를 받았다. 조비가 황위에 오르자, 방덕의 네 아들 각각에게 관내후 작위를 하사하고, 각자에게 식읍 100호를 내렸다.[21] 방덕의 아들들 중 이름이 역사에 기록된 것은 방회뿐이다.

방회는 성격이 아버지를 닮았으며, 조위에서 장군으로 복무했다. 그가 오른 최고위는 중위장군이었다. 그는 또한 열후로 봉해졌다.[22] 《촉기》에 따르면, 263년 위나라의 경쟁 국가인 촉한 정벌에 참여했다. 촉한이 멸망한 후, 방회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관우의 가족과 후손을 모두 죽였다.[23]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18
[2] 서적 Weilue annotation in Sanguozhi vol. 18
[3] 서적 Sanguozhi vol. 18
[4] 서적 三國志集解 65卷 https://books.google[...] 藝文印書館 1955
[5] 서적 Sanguozhi vol. 18
[6] 서적 Sanguozhi vol. 18
[7] 서적 Sanguozhi vol. 18
[8] 서적 三國誌三十列傳 讀三國志也能如三國演義一樣輕鬆 https://books.google[...] 谷月社 2015
[9] 서적 Weilue annotation in Sanguozhi vol. 18
[10] 서적 Sanguozhi vol. 18
[11] 백과사전 Pang De 龐悳 http://www.chinaknow[...] Ulrich Theobald
[12] 서적 Sanguozhi vol. 18
[13] 서적 Sanguozhi vol. 18
[14] 서적 Sanguozhi vol. 18
[15] 서적 Sanguozhi vol. 18
[16] 서적 Shu J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18
[17] 서적 Pei Songzhi's annotation in Sanguozhi vol. 18
[18] Wikisource 太平御覽·卷897Taiping Yulan·Volume 897
[19] 서적 中华名联:名声追踪风景、生活 https://books.google[...] EIJING BOOK CO. INC. 2018
[20] 서적 Shanxi tong zhi Volume 15 https://books.google[...] the Bavarian State Library 1811
[21] 서적 Sanguozhi vol. 18
[22] 서적 Sanguozhi vol. 18
[23] 서적 Shu J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36
[24] 서적 Sanguo Yanyi ch. 58
[25] 서적 曹操3:铜雀春深 Volume 3 https://books.google[...] 百花洲文艺出版社 2019
[26] 서적 Sanguo Yanyi ch. 74
[27] 서적 Sanguo Yanyi ch. 70
[28] 서적 『三国志』巻1武帝紀
[29] 서적 『三国志』巻18龐徳伝注引『魏略』
[30] 서적 『三国志』巻36馬超伝注引『典略』
[31] 서적 『三国志』巻17于禁伝
[32] 서적 『三国志』巻4斉王紀
[33] Wikisource 『太平御覧』巻897獣部九
[34] 문서 《삼국지》방덕전에서는 狟道(환도)라 하였으나 《[[한서]]》28권下 [[지리]] 제8下 [[천수군]]과 《[[속한지]]》23권 군국 제5 [[한양군]]을 따른다.
[35] 문서 어환(魚豢), 《[[위략]]》 ; [[배송지]] 주석, 《삼국지》18권 위서 제18 방덕에서 인용
[36] 서적 자치통감
[37] 서적 삼국지
[38] 간행물 전략
[39] 서적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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