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작 전쟁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백작 전쟁은 1534년부터 1536년까지 덴마크에서 일어난 내전으로, 덴마크 왕위 계승, 종교 개혁, 경제적 변화 등 복합적인 요인으로 발발했다. 크리스토퍼 백작의 봉기로 시작되어, 크리스티안 3세의 즉위와 반격, 주요 전투를 거쳐 1536년 코펜하겐 함락으로 종결되었다. 이 전쟁의 결과로 덴마크는 왕정 절대주의가 강화되고 노르웨이를 병합했으며, 한자 동맹의 쇠퇴와 스웨덴의 부상을 초래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백작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
| 분쟁 개요 | |
| 명칭 | "" (덴마크어) |
| 별칭 | "백작 전쟁" () |
| 시기 | 1534년 5월 – 1536년 7월 29일 |
| 장소 | 덴마크 |
| 결과 | 프로테스탄트의 승리 |
| 지리적 변화 | 덴마크의 프로테스탄트 통합 덴마크-노르웨이 형성 시작 |
| 교전 세력 | |
| 가톨릭 진영 | 크리스티안 2세 휘하의 가톨릭 세력 |
| 구성 세력 (가톨릭) | 스카니아 말뫼 코펜하겐 셸란섬 |
| 지원 세력 (가톨릭) | 올덴부르크 백국 뤼베크 자유시 노르웨이 귀족 합스부르크 네덜란드 잉글랜드 |
| 프로테스탄트 진영 | 크리스티안 3세 휘하의 프로테스탄트 세력 |
| 구성 세력 (프로테스탄트) |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유틀란트 퓐섬 |
| 지원 세력 (프로테스탄트) | 스웨덴 프로이센 공국 노르웨이 귀족 헬데르스 공국 |
| 지휘관 및 지도자 | |
| 가톨릭 진영 | 크리스티안 2세 스키페르 클레멘트 요르겐 코크 크리스토페르 폰 올덴부르크 |
| 프로테스탄트 진영 | 크리스티안 3세 닐스 브로크 요한 란차우 홀게르 로센크란츠 페데르 스크람 구스타브 1세 바사 라스 스파레 몬스 소메 요한 페인 |
| 주요 전투 | |
2. 배경
16세기 초, 덴마크는 칼마르 동맹의 주도권을 놓고 스웨덴과 갈등을 겪었다. 크리스티안 2세는 스톡홀름 대학살을 일으켜 스웨덴을 굴복시키려 했으나, 이는 오히려 스웨덴의 독립을 초래하여 칼마르 동맹이 붕괴되는 결과를 낳았다.
덴마크 내부에서는 왕권 강화와 귀족 세력 견제를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었다. 크리스티안 2세는 농민과 시민 계층의 지지를 얻어 귀족 세력을 억압하려 했으나, 결국 귀족들에게 축출당하고 유폐되었다.
종교 개혁의 영향으로 덴마크 내에서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의 갈등이 고조되었다. 프레데리크 1세는 프로테스탄트를 용인하는 정책을 펼쳤으나, 가톨릭 주교들은 이에 반발했다.
경제적으로는 한자 동맹이 쇠퇴하고 네덜란드가 부상하면서 덴마크의 경제적 주도권이 약화되었다. 한자 동맹의 중심 도시였던 뤼베크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백작 전쟁에 개입하게 되었다.
당시 조선은 명나라의 책봉을 받는 조공국이었고, 일본은 전국시대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덴마크의 백작 전쟁은 유럽 내부의 권력 투쟁과 종교 갈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사건으로,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 그러나 이 전쟁을 통해 덴마크가 절대 왕정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이후 조선이 겪게 될 중앙 집권화 과정과 비교해 볼 수 있다.
2. 1. 칼마르 동맹의 붕괴와 스웨덴의 독립
1397년, 마르그레테 1세의 주도로 칼마르 동맹이 결성되면서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지역은 덴마크 왕이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에리크 7세 치세 하에 중앙 집권화를 꾀하는 덴마크와 자립을 목표로 하는 스웨덴의 대립이 격화되었다.[13] 크리스토퍼 3세가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사망하자, 덴마크 왕국 참사회는 크리스티안 1세를 선출하는 한편, 스웨덴 왕국 참사회는 옥센셰르나 가문을 옹립하여 양측의 대립은 더욱 커졌다. 크리스티안 1세, 그리고 그의 후계자 한스는 왕권 강화와 칼마르 동맹 유지를 위해 스웨덴에 대한 출병을 반복했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13] 한스의 뒤를 이은 크리스티안 2세는 1520년 11월 스톡홀름 공략에 성공했지만, 반대파를 숙청한 '''스톡홀름의 피바다''' 사건으로 인해,[13][14] 1523년 구스타브 바사의 지휘 하에 스웨덴이 독립하고, 칼마르 동맹은 붕괴되었다.[14]
2. 2. 덴마크 내부의 권력 갈등
1533년 프레데리크 1세가 사망한 후, 윌란 귀족들은 그의 아들 크리스티안 3세를 국왕으로 추대했다. 한편, 크리스토퍼 백작은 크리스티안 2세의 석방을 요구하며 새로운 국왕에 대항하는 봉기를 조직했다. 그는 뤼베크, 올덴부르크 및 메클렌부르크의 군대의 지원을 받아 셸란, 스코네 귀족들과 코펜하겐 및 말뫼와 같은 도시와 함께 봉기했다.[9]1523년 크리스티안 2세는 농민과 시민 계층의 지지를 바탕으로 귀족 세력을 견제하려 했으나, 귀족들의 반발로 실패하고 폐위되었다. 귀족들은 그의 숙부인 프레데리크 1세를 왕으로 추대하였고, 프레데리크 1세는 왕권 제한을 승인하였다.[15]
1534년 폭력 사태가 시작되었는데, 크리스티안 2세의 측근이었던 사략선 선장 클레멘트 안데르센은 크리스토퍼 백작의 요청에 따라 벤쉬셀과 노르윌란의 농민들을 동원하여 귀족들에게 대항하도록 선동했다. 반란의 중심지는 올보르였다. 윌란 북부와 서부에서는 다수의 영지가 불탔다. 1534년 8월 10일, 크리스토퍼 백작은 크리스티안 2세를 위한 스코네를 받아들였다. 그 달 전, 크리스토퍼는 링스테드에서 셸란 의회에 의해 크리스티안 2세를 위한 섭정으로 선포되었다.[10]
2. 3. 종교 개혁의 영향
마르틴 루터가 1517년에 95개조 반박문을 제출하고 종교 개혁을 실시하면서 프로테스탄트의 가르침이 북유럽 국가에도 미치게 되었다.[16] 가톨릭 주교들은 프레데리크 1세에게 프로테스탄트 포교 금지를 요구했고, 프레데리크 1세는 표면적으로는 요구를 받아들였다.[16] 그러나 그의 아들 고토프 공 크리스티안(후의 크리스티안 3세)은 프로테스탄트였고, 한스 타우센을 비호하는 등 프로테스탄트를 용인했다.[16] 1526년부터 1527년에 걸쳐 프레데리크 1세는 덴마크 국교회의 실질적인 성립이라고 할 수 있는 조건을 주교들에게 인정받았으며, 덴마크 국내에서는 완만하지만 종교 개혁이 진행되었다.[16]2. 4. 경제적 변화
한자 동맹의 쇠퇴와 네덜란드의 부상은 덴마크의 경제적 상황을 악화시켰다. 한자 동맹의 맹주였던 뤼베크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 동맹의 주도권을 회복하고자 백작 전쟁에 개입하였다.[16]3. 전개
닐스 브로크와 홀게르 로젠크란츠가 이끄는 귀족 군대는 1534년 10월 16일 스벤스트루프 전투에서 패배했다. 크리스티안 3세는 뤼베크와 평화를 맺어 반군에 맞서 싸울 병력을 확보했다. 요한 란차우가 이끄는 왕실군은 스키퍼 클레멘트가 이끄는 농민군을 올보르까지 추격했고, 농민군은 도시 요새로 피신했다.[11]
1534년 12월 18일, 란차우의 군대가 도시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최소 2,000명이 도시 공격과 약탈로 목숨을 잃었다. 스키퍼 클레멘트는 심한 부상을 입었지만 탈출했으나, 며칠 후 스토르보르데의 한 농민에게 발견되어 란차우에게 넘겨졌다. 스키퍼 클레멘트는 비보르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536년에 처형되었다.[11]
구스타브 바사는 크리스티안 3세를 지원하기 위해 스웨덴 군대를 보냈는데, 이 군대는 로슈울트에서 스카니아를 침공하여 붸 마을로 진격하면서 Gønge|괴잉에sv 지역 전체를 약탈하고 불태우고 학살했다. 이후 스웨덴 군대는 할란드를 침공하여 불과 칼로 파괴했다. 일부 스카니아 귀족들은 스웨덴 편에 섰지만, 헬싱보리 성의 티게 크라베는 크리스토퍼 백작을 지지했다.
1535년 1월, 스웨덴군과 귀족 군대가 헬싱보리에 진격했다. 위르겐 코크 휘하의 뤼베크와 말뫼 주민으로 구성된 군대가 성 밖에서 참호를 구축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티게 크라베는 갑자기 성의 대포로 수비군에게 포격을 가했고, 그 후 성을 스웨덴군에게 개방하여 헬싱보리에 불을 질러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이로써 순드 동쪽의 덴마크는 크리스토퍼 백작에게서 빼앗겼다.
올보르 전투에서 승리한 후, 란차우는 군대를 퓐으로 이동시켰다. 1535년 6월 11일, 외크스네비에르 전투에서 크리스토퍼 백작의 나머지 군대는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코펜하겐과 말뫼는 1536년까지 버텼지만, 몇 달간의 포위 공격 끝에 항복했다. 이로써 백작 전쟁은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12]
3. 1. 크리스토퍼 백작의 봉기
프레데릭 1세가 1533년에 사망하자, 윌란 귀족들은 그의 아들 크리스티안 3세를 국왕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뤼베크의 지원을 받은 크리스토퍼 백작은 폐위된 크리스티안 2세의 복위를 요구하며 봉기를 일으켰다.[9] 그는 셸란, 스코네 귀족들과 코펜하겐, 말뫼 등의 도시와 연합하여 봉기했다.[9]1534년, 크리스티안 2세의 측근이었던 사략선 선장 클레멘트 안데르센은 크리스토퍼 백작의 요청으로 벤쉬셀과 노르윌란의 농민들을 선동하여 귀족에 대항하게 했다. 반란의 중심지는 올보르였으며, 윌란 북부와 서부의 많은 영지가 불탔다. 1534년 8월 10일, 크리스토퍼 백작은 스코네에서 크리스티안 2세를 위해 통치할 것을 승인받았다. 그 전달, 크리스토퍼는 링스테드에서 셸란 의회에 의해 크리스티안 2세를 위한 섭정으로 선포되었다.[10]
1533년 4월, 프레데리크 1세가 사망하자 6월에 제후 회의가 개최되었다. 궁정 장관 모겐스 괴예(en)는 프레데리크 1세의 아들인 고토르프 공 크리스티안(후의 크리스티안 3세)의 즉위를 주장했지만, 가톨릭 성직자들은 프로테스탄트인 크리스티안 3세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말뫼 시장 외르겐 코크(da, 프로테스탄트) 등 소수만이 모겐스 괴예를 지지하여 국왕 결정은 연기되었다. 뤼베크는 한자동맹의 특권을 인정받고자 했으나, 왕국 참사원은 국왕 부재를 이유로 거부하고 네덜란드, 슐레스비히 공국, 홀슈타인 공국과의 동맹을 결정했다. 말뫼 시장 외르겐 코크는 귀족 독재 정치에 반발하여 뤼베크, 코펜하겐과 함께 크리스티안 2세의 복위를 꾀하고, 크리스토퍼 백작에게 봉기를 촉구했다.[17]
1534년 1월, 말뫼에서는 대주교의 명령으로 루터교 설교자가 추방된 것에 대한 소란이 발생했다. 4월에 크리스토퍼 백작은 뤼베크의 용병 지원을 받아 홀슈타인을 공격했고, 코펜하겐, 말뫼, 셸란 섬, 스코네는 크리스토퍼 백작을 지지하며 백작 전쟁이 시작되었다.[17]
크리스토퍼 백작은 윌란 반도 세력 확보를 위해 크리스티안 2세의 부하였던 선원 클레멘트(en)를 이용했다. 선원 클레멘트는 벤쉬셀과 윌란 반도 북부 농민들에게 귀족에 대항하여 봉기하도록 선동했다. 반란의 중심지는 올보르였고, 윌란 반도 북부 및 서부 장원은 농민 봉기로 불탔다. 1534년 8월 10일, 크리스토퍼 백작은 크리스티안 2세가 스코네를 지배하는 것을 승인했다. 한 달 전, 크리스토퍼 백작은 셸란 섬의 링스테드에서 셸란 섬 의회에 의해 크리스티안 2세의 대리인으로 환영받았다.[18]
한편, 궁정 장관 모겐스 괴예는 윌란 반도 귀족들을 설득했다. 7월 4일 류에서 왕국 참사회가 개최되어 크리스티안 3세의 즉위를 승인했고, 8월 18일 크리스티안 3세는 호르센스에서 국왕으로 즉위했다.[17]
3. 2. 크리스티안 3세의 즉위와 반격

프레데릭 1세가 1533년에 사망한 후, 윌란 귀족들은 그의 아들 크리스티안 3세를 국왕으로 추대했다.[9] 같은 해 6월에 열린 제후 회의에서 궁정 장관 모겐스 괴예(en)는 크리스티안 3세의 즉위를 주장했지만, 크리스티안 3세가 프로테스탄트였기 때문에 가톨릭 성직자들에게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말뫼 시장 외르겐 코크(da) 등 소수만이 모겐스 괴예를 지지하여 국왕 결정은 연기되었다.[17]

7월 4일 류에서 왕국 참사회가 개최되어 크리스티안 3세의 즉위를 승인했고, 8월 18일 크리스티안 3세는 호르센스에서 국왕으로 즉위했다.[17]
3. 3. 주요 전투
백작 전쟁 기간 동안 여러 차례의 주요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명 | 날짜 | 위치 | 결과 |
|---|---|---|---|
| 스벤스트루프 전투 | 1534년 10월 16일 | 스벤스트루프 | 크리스토퍼 백작 측 승리 |
| 올보르 전투 | 1534년 12월 18일 | 올보르 | 크리스티안 3세 측 승리, 스키퍼 클레멘트 처형 |
| 헬싱보리 전투 | 1535년 1월 | 헬싱보리 | 크리스티안 3세와 구스타브 바사 연합군 승리 |
| 외크스네비에르 전투 | 1535년 6월 11일 | 외크스네비에르 | 크리스티안 3세 군대 승리 |
| 코펜하겐 포위전 | 1535년 7월 29일 – 1536년 2월 14일 | 코펜하겐 | 크리스티안 3세 측 승리 |
| 리틀 벨트 해전 | 1535년 6월 16일 | 리틀 벨트 | |
| 본홀름 해전 (1535년) | 1535년 7월 9일 | 본홀름 | |
| 헬리게를리 전투 | 1536년 8월 5일 | 불명 |
크리스티안 3세는 뤼베크와 평화를 맺어 병력을 확보했고, 요한 란차우가 이끄는 왕실군은 농민 반란군을 올보르까지 몰아붙였다. 스키퍼 클레멘트가 이끄는 농민군은 도시 요새로 피신했으나, 란차우 군대에 의해 함락되었다.[11]
스웨덴의 구스타브 바사 왕은 크리스티안 3세를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스웨덴군은 할란드를 침공하여 파괴적인 약탈을 자행했다. 헬싱보리에서는 뤼베크와 말뫼 연합군이 성 밖에 참호를 구축했지만, 티게 크라베가 성문을 열어 스웨덴군이 도시를 점령하게 했다.[12]
코펜하겐과 말뫼는 1536년까지 저항했지만, 결국 항복하면서 백작 전쟁은 막을 내렸다.[12]
3. 3. 1. 스벤스트루프 전투 (1534년 10월 16일)
닐스 브로크와 홀게르 로젠크란츠가 이끄는 귀족 군대는 1534년 10월 16일 스벤스트루프 전투에서 크리스토퍼 백작 측에 패배했다.[11]3. 3. 2. 올보르 전투 (1534년 12월 18일)
요한 란차우가 이끄는 크리스티안 3세의 군대는 뤼베크와의 평화로 병력을 확보하여 반군을 진압할 수 있었다. 왕실군은 스키퍼 클레멘트가 이끄는 농민군을 올보르까지 추격했고, 농민군은 도시 요새로 피신했다.[11]1534년 12월 18일, 란차우의 군대는 올보르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 과정에서 최소 2,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스키퍼 클레멘트는 중상을 입었지만 탈출했으나, 며칠 후 스토르보르데의 한 농민에게 발견되어 란차우에게 넘겨졌다. 스키퍼 클레멘트는 비보르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536년에 처형되었다.[11]
3. 3. 3. 헬싱보리 전투 (1535년 1월)
1535년 1월, 스웨덴군과 귀족 군대가 헬싱보리로 진격했다. 위르겐 코크 휘하의 뤼베크와 말뫼 주민으로 구성된 군대가 성 밖에 참호를 구축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티게 크라베는 갑자기 성의 대포로 수비군에게 포격을 가했고, 그 후 성을 스웨덴군에게 개방하여 헬싱보리에 불을 질러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이로써 순드 동쪽의 덴마크는 크리스토퍼 백작에게서 빼앗겼다. 크리스토퍼 백작은 외레순 해협을 잃고 코펜하겐으로 철수했고, 전장은 셸란 섬, 퓐 섬으로 옮겨졌다.[12]3. 3. 4. 외크스네비에르 전투 (1535년 6월 11일)
요한 란차우가 이끄는 크리스티안 3세 군대는 1535년 6월 11일 외크스네비에르 전투에서 크리스토퍼 백작의 군대를 결정적으로 격파했다.[12][17]4. 결과
분쟁 이후, 귀족들은 정략 결혼을 통해 갈등을 봉합했다. 스코네의 유력 가문인 빌레 가문은 덴마크 가톨릭 주교 8명 중 7명과 혈연 관계를 맺고 있었고, 국참의회에 6명의 가족 구성원을 두었으며, 덴마크와 노르웨이 전역에 성을 소유할 정도로 강력했다.
빌레 가문은 가톨릭과의 종교적 연관성에도 불구하고, 스톡홀름의 피바다로 유명한 클라우스 빌레가 구스타브 바사의 사촌과, 루터교로 개종한 브라헤 가문과의 결혼 동맹을 통해 가문을 보호했다. 클라우스 빌레는 딸 베아테를 오테 브라헤와 결혼시켜 티코 브라헤의 할아버지가 되었다.
농민 봉기의 결과, 많은 사람들이 국왕과 귀족에게 막대한 뇌물을 바쳐야 했다. 백작 전쟁으로 절정에 달했던 농민들의 불만은 더욱 악화되었고, 귀족들은 더욱 단결했다. 크리스티안 3세의 통치는 덴마크의 왕정 절대주의를 가져왔고, 농민 계급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크리스티안 3세는 1537년 노르웨이를 침공하여 칼마르 동맹에서 동등한 왕국이었던 노르웨이를 괴뢰 왕국 덴마크-노르웨이로 덴마크에 편입시켰다. 노르웨이의 가톨릭 성직자들은 크리스티안 3세의 통제하에 있는 사제들로 교체되었다.
당시 덴마크인들이 인식하지 못한 중요한 결과는 스웨덴 군대의 스코네 진입이었다. 덴마크 국왕의 요청으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왔지만, 이는 스웨덴이 이 영토를 차지하려는 열망을 자극했고, 1658년 스웨덴에 최종적으로 할양될 때까지 전쟁으로 이어졌다.
백작 전쟁은 한자 동맹의 쇠퇴를 가속화시켰고, 덴마크와 스웨덴은 발트 해, 북해의 패권을 놓고 충돌하는 "숙적(arvefjende)" 관계가 되었다. 양국은 50년 휴전 조약을 맺었지만, 북방 7년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북유럽에는 일시적인 평화가 찾아왔다.[22]
4. 1. 덴마크의 종교 개혁
크리스티안 3세는 백작 전쟁에서 승리한 후 덴마크의 종교 개혁과 왕권 강화를 추진했다. 1536년 8월 12일, 크리스티안 3세는 가톨릭 주교 전원을 체포했고, 10월에는 성직자를 배제한 제후 회의를 개최하여 교회령 몰수와 왕령 귀속, 귀족 특권 유지를 승인받았다.[23] 몰수된 교회령은 왕령으로 귀속되어 왕실 재정은 전쟁 전의 2배로 확대되었으며, 이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토 부흥의 재원이 되었다.[23]1537년 교회법을 제정하고, 1550년 덴마크어 성서인 『크리스티안 3세 흠정역 성서』를 발행하는 등 종교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24][25]

4. 2. 왕권 강화와 절대 왕정 수립
크리스티안 3세는 백작 전쟁 이후 귀족 세력을 억압하고 왕권을 강화하여 덴마크를 중앙 집권적인 절대 왕정 국가로 만들었다. 그는 1536년 8월 12일 가톨릭 주교 전원을 체포하고, 10월에는 성직자를 배제한 제후 회의를 개최하여 교회령 몰수 및 왕령으로의 귀속, 귀족 특권 유지를 승인받았다.[23] 몰수한 교회 재산은 왕실 재정 확충에 기여했고, 왕령은 국토의 약 절반을 차지하며 전쟁 전의 2배까지 확대되어 백작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토 부흥의 재원이 되었다.[23]1537년에는 교회법을 제정하고, 1550년에는 덴마크어 성서인 『크리스티안 3세 흠정역 성서』를 발행하는 등 종교 개혁을 추진했다.[24][25] 이러한 개혁은 덴마크의 왕권 강화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4. 3. 노르웨이의 종속
크리스티안 3세의 즉위 헌장에 따라, 노르웨이는 덴마크의 일개 속주로 전락했고, 덴마크-노르웨이 연합 왕국이 수립되었다. 노르웨이, 페로 제도, 아이슬란드에서는 덴마크에서와 마찬가지로 위로부터의 종교 개혁이 강제적으로 시행되었다.[26][27]4. 4. 한자 동맹의 몰락과 스웨덴의 부상
백작 전쟁은 한자 동맹의 쇠퇴를 가속화시켰다. 전쟁 이후, 덴마크와 스웨덴은 발트 해와 북해의 패권을 두고 경쟁하는 관계가 되었다. 양국은 16세기 중반 이후 "숙적(arvefjende)"이라 불릴 정도로 대립했으나, 크리스티안 3세와 구스타브 1세 통치 시기에는 양국 모두 국내 기반 강화에 집중하여 50년간의 휴전 조약이 체결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인 평화였을 뿐, 북방 7년 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북유럽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22]백작 전쟁의 중요한 결과 중 하나는 스웨덴 군대가 스코네 지역에 진입한 것이다. 비록 덴마크 국왕의 요청으로 반란 진압을 위해 온 것이었지만, 이는 스웨덴이 이 지역에 대한 야심을 품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스코네 지역은 1658년 로스킬레 조약을 통해 스웨덴에 할양될 때까지 덴마크와 스웨덴 간의 잦은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백작 전쟁 이후, 크리스티안 3세는 덴마크와 그 지배 지역(노르웨이, 페로 제도, 아이슬란드)에서 종교 개혁과 왕권 강화를 추진했다. 1536년 8월, 크리스티안 3세는 가톨릭 주교 전원을 체포하고, 교회령을 몰수하여 왕령으로 귀속시켰다. 이를 통해 왕령은 국토의 약 절반을 차지하게 되었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토를 부흥시키는 재원으로 사용되었다.[23] 1537년에는 교회법이 제정되었고, 1550년에는 덴마크어 성서인 『크리스티안 3세 흠정역 성서』가 발행되는 등 종교 개혁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24][25]
노르웨이는 덴마크의 속주로 전락하여 덴마크-노르웨이 연합 왕국이 되었고, 페로 제도와 아이슬란드와 마찬가지로 위로부터의 종교 개혁이 이루어졌다.[26][27]
5. 대중 문화에서의 백작 전쟁
폴 앤더슨의 소설 시간의 복도는 백작 전쟁 직후의 윌란 반도를 배경으로, 시간 여행자가 겪는 모험을 그리고 있다.[1]
참조
[1]
문서
[2]
서적
Berättelser ur svenska historien
https://books.google[...]
F. & G. Beijers Förlag
[3]
문서
[4]
간행물
Danske Konger
https://web.archive.[...]
[5]
간행물
Danmark Historien
http://www.danmarksh[...]
Aarhus Universitet
[6]
웹사이트
Christian 3
https://snl.no/Chris[...]
Store norske leksikon
2016-08-15
[7]
웹사이트
Wolfgang von Utenhof
http://denstoredansk[...]
Den Store Danske, Gyldendal. Hentet 19. juni 2018
2018-06-01
[8]
웹사이트
Johan Rantzau
http://denstoredansk[...]
Dansk Biografisk Leksikon, 3. udg., Gyldendal 1979-84
2011-07-18
[9]
간행물
Danmarks historie
https://web.archive.[...]
Roennebech
[10]
간행물
Danmarks historie
https://web.archive.[...]
Roennebech
[11]
웹인용
Grevens Fejde, borgerkrig 1534-1536
http://graenseforeni[...]
2011-07-19
[12]
웹사이트
Grevensfejde
http://www.bricksite[...]
2016-10-11
[13]
문서
[14]
문서
[15]
문서
[16]
문서
[17]
문서
[18]
웹사이트
Grevens Fejde 1534-1536
https://web.archive.[...]
Erik F. Rønnebech
2010-10-11
[19]
문서
[20]
웹사이트
Grevens Fejde, borgerkrig 1534-1536
https://web.archive.[...]
Grænseforeningen
2010-10-11
[21]
문서
[22]
문서
[23]
문서
[24]
문서
[25]
문서
[26]
문서
[27]
문서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