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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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학의》는 조선 후기 실학자인 박제가가 청나라의 문물을 수용하여 조선 사회의 개혁을 주장한 책이다. 박제가는 서얼 출신으로 학문적 열정을 쏟았으며, 연암 박지원과의 만남을 통해 북학파를 형성하고 청나라 사행 경험을 통해 북학 사상을 심화했다. 《북학의》는 내편과 외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내편에서는 수레, 벽돌 등 실생활과 관련된 기술 개혁을, 외편에서는 농업, 상업, 무역, 과거 제도 등 사회 제도 전반에 걸친 개혁 방안과 경제 발전을 위한 정책을 제시했다. 특히 상업 발달과 소비를 장려하는 중상주의적 경제 정책을 강조했으며, 이는 근대 경제학 이론과도 유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지나친 중국 문명 숭상과 현실 적용의 어려움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북학의》는 북학파의 성장과 실학 사상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으며, 조선 후기 사회 개혁 논의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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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학의 | |
---|---|
개요 | |
제목 | 북학의(北學議) |
저자 | 박제가 |
유형 | 실학 서적 |
분야 | 북학 |
내용 | |
구성 | 〈북학의서(北學議序)〉·〈질정(質正)〉상·하·〈치농(治農)〉·〈양정(養程)〉·〈수공(修工)〉·〈이용(利用)〉·〈후생(厚生)〉의 8편으로 구성됨. |
주요 내용 | 청나라의 문물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 상공업 발전과 기술 혁신 강조 소비를 장려하고, 수레와 배의 이용을 확대할 것을 주장 과거 제도의 개혁과 인재 등용의 공정성 확보 강조 백성들의 생활 개선과 국가 재정 확충을 위한 방안 제시 |
특징 | 청나라의 발전된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조선의 현실을 개혁하고자 하는 실학사상을 담고 있음. 기존의 중화사상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보여줌.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구체적인 정책 제안을 담고 있어 실용적인 성격이 강함. |
저술 배경 | |
시대적 배경 | 18세기 후반, 조선 사회는 영조와 정조 시대를 거치면서 사회 경제적으로 큰 변화를 겪고 있었음. |
저술 동기 | 박제가는 청나라를 방문한 후,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함. |
의의와 평가 | |
의의 | 조선 후기 실학 사상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침. 북학파의 형성에 기여함. 조선 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함. |
평가 | 당시 사회의 지배적인 이념이었던 성리학적 가치관에 대한 도전으로 평가받음. 조선 사회의 개혁과 발전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한 점에서 높이 평가받음. |
참고 문헌 | |
관련 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2. 박제가의 생애와 사상적 배경
박제가는 스승인 박지원의 영향을 받아 북학 사상을 형성하였다. 박지원은 박제가가 연경(지금의 베이징)에서 보고 배운 것을 상세히 기록하도록 격려하였다.[1] 박제가는 "이용과 후생은 한 가지라도 갖춰지지 못하면 위로는 정덕을 해치는 폐단을 낳는다"고 보았으며, "지금 백성들의 생활은 날이 갈수록 궁핍해지고 국가 재정은 날이 갈수록 고갈되는데 사대부는 팔짱 낀 채 보기만 하면서 구제하지도 않는가?"라고 비판하며 사대부의 역할을 강조하였다.[1]
2. 1. 청나라 사행 경험과 북학 사상의 심화
박제가는 연경(지금의 베이징)에서 농사, 누에치기, 가축 기르기, 성곽 축조, 집 짓기, 배와 수레 제작부터 기와, 인장, 붓, 자를 제작하는 것까지 직접 보고 배웠다.[1] 그는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북학의》를 저술하였다.[1]《북학의》는 서명응, 박지원, 박제가 자신의 서문과 함께 내(內)ㆍ외(外) 2편으로 구성되어 있다.[1] 박제가의 스승인 박지원은 서문에서 박제가가 연경에서 보고 배운 것들을 상세히 기록했다고 전한다.[1] 박제가는 서문에서 "저들의 풍속 가운데 본국에서 시행하여 일상생활을 편리하게 할 만한 것은 눈에 띄는 대로 글로 기록했고, 그것을 시행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 그렇지 않음으로서 생기는 폐단을 첨부해 하나의 학설을 만들었다"고 밝혔다.[1] 또한 《맹자(孟子)》의 진량의 말을 인용하여 책의 제목을 지었다고 설명하며, 이용과 후생이 갖춰지지 않으면 백성의 생활이 궁핍해지고 국가 재정이 고갈된다고 주장했다.[1] 그는 사대부들이 백성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강조했다.[1]
3. 《북학의》의 구성과 주요 내용
《북학의》는 박지원과 서명응, 그리고 저자인 박제가 자신이 쓴 서문과 함께 내(內)ㆍ외(外) 2편으로 나뉜다. 박지원의 서문에 따르면 박제가는 연경(북경)에서 농사, 누에치기, 가축 기르기, 성곽 축조, 집 짓기, 배와 수레 제작부터 기와, 인장, 붓, 자를 제작하는 것까지 일일이 눈여겨보고 마음으로 따져보면서, 눈으로 알 수 없으면 꼭 물어보고 마음으로 따져서 이상한 것은 반드시 배웠다고 한다. 박제가는 서문에서 "저들의 풍속 가운데 본국에서 시행하여 일상생활을 편리하게 할 만한 것은 눈에 띄는 대로 글로 기록했고, 그것을 시행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 그렇지 않음으로서 생기는 폐단을 첨부해 하나의 학설을 만들었다. 그리고 《맹자》에 나오는 진량의 말을 인용해 책의 이름을 지었다"고 밝히며, "이용과 후생은 한 가지라도 갖춰지지 못하면 위로는 정덕을 해치는 폐단을 낳는다", "지금 백성들의 생활이 날이 갈 수록 곤궁해지고 국가 재정은 날이 갈수록 고갈되는데 사대부는 팔짱 낀 채 보기만 하면서 구제하지도 않는가?"라며, 백성을 위해 사대부들이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나설 것을 강조한다.
내편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구와 시설에 대한 개혁론을 39개 항목으로, 외편은 농업 기술 개량, 상업 진흥, 대외 무역 등 제도 개혁과 경제 발전 방안을 17개 항목으로 제시한다.[1]
박제가는 성리학의 농본억말(農本抑末) 정책을 반대하며 적극적인 상업 장려와 생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경제란 우물 같은 것으로 계속 써주지 않으면 말라버린다.", "쓸 줄 모르면 만들 줄도 모르고, 만들 줄을 모르면 민생은 나날이 곤궁해질 것이다."라는 대목에서 검약이나 소비 억제보다는 적극적인 소비 활동을 통해 생산을 증대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근대 경제학 이론과도 흡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1] 또한 청나라와 통상하여 국력을 기른 뒤 여러 나라와도 통상할 것을 주장했는데, 이는 당시 북학파들의 주된 의론이었다.[1]
3. 1. 내편: 실생활과 관련된 기술 개혁
박제가는 실생활과 관련된 다양한 분야에서 청나라의 선진 기술을 도입하여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개혁하고자 했다. 그는 《북학의》 내편에서 수레(車)·선박(船)·성(城)·벽돌(○)·기와(瓦)·옹기(甕)·대나무 소쿠리(簞)·궁실(宮室)·창호(窓戶)·섬돌(階○)·도로(道路)·교량(橋梁)·가축 사육(畜牧)·소(牛)·말(馬)·나귀(驢)·말안장(鞍)·여물통(槽)·시정(市井)·상인(商賈)·은(銀)·돈(錢)·철(鐵)·재목(材木)·여복(女服)·장희(場戱)·한어(漢語)·통역(譯)·약(藥)·장(醬)·인장(印)·모직(氈)·당보(塘報)·종이(紙)·활(弓)·총과 화살(銃矢)·자(尺)·문방구(文房之具)·고동서화(古董書·) 등 39개 항목에 걸쳐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기구와 시설에 대한 개혁론을 제시했다.특히 가난한 백성을 구제할 방안으로 상업 발달에 따른 유통 경제를 활성화할 수 있는 교통수단인 '수레' 사용과 규격화된 크기의 '벽돌' 이용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했고, 실제로 자신이 직접 벽돌 만드는 기술을 연구해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3. 2. 외편: 제도 개혁과 경제 발전 방안
박제가는 외편에서 농업 기술 개량, 국내 상업 진흥, 대외 무역의 이점을 설파하며 사회 제도 전반의 개혁과 경제 발전을 주장했다. 특히 농업, 상업, 무역, 과거 제도 등 17개 항목에 걸쳐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했다.[1]- 농업: 농업 기술 개량과 더불어, 분(糞, 거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상과(桑菓) 재배 기술을 논했다. 농잠총론(農蠶總論)에서는 양잠 기술 발전에 대한 종합적인 논의를 제시했다.[1]
- 상업: 성리학의 농본억말(農本抑末) 정책을 비판하고, 적극적인 상업 장려와 생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경제란 우물 같은 것으로 계속 써주지 않으면 말라버린다"라는 비유를 통해 소비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적극적인 소비 활동을 통한 생산 증대를 주장했다. 이는 근대 경제학 이론과도 유사한 점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1]
- 무역: 청나라와의 통상을 통해 국력을 기르고, 더 나아가 여러 나라와 통상할 것을 주장했다. 이는 당시 북학파의 주요 주장이기도 했다.[1]
- 과거 제도: 과거론(科擧論)을 통해 과거 제도의 개혁을 주장했다.[1]
- 기타: 관론(官論), 녹제(祿制), 재부론(財賦論) 등 다양한 사회 제도 개혁 방안을 제시했다. 또한, 통강남절강상박의(通江南浙江商舶議)를 통해 강남, 절강 지역과의 해상 무역을 제안했으며, 병론(兵論)과 장론(葬論)을 통해 국방과 장례 제도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1]
박제가는 북학을 '생활과 백성에 직결된 학문'이라 정의하며, 가난한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방안으로 상업 발달에 따른 유통 경제 활성화를 강조했다. 이를 위해 교통수단인 수레의 사용과 규격화된 크기의 벽돌 이용을 강조했으며, 실제로 벽돌 제조 기술을 연구해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1]
4. 《북학의》의 핵심 주장과 현대적 의의
《북학의》는 박지원과 박제가 자신이 쓴 서문과 함께 내(內)·외(外) 2편으로 나뉜다. 박지원이 쓴 서문에 따르면 박제가는 연경(燕京)에서 농사, 누에치기, 가축 기르기, 성곽 축조, 집 짓기, 배와 수레 제작부터 기와, 인장, 붓, 자를 제작하는 것까지 일일이 눈여겨보고 마음으로 따져보면서, 눈으로 알 수 없으면 꼭 물어보고 마음으로 따져서 이상한 것은 반드시 배웠다고 한다. 박제가는 서문에서 "저들의 풍속 가운데 본국에서 시행하여 일상생활을 편리하게 할 만한 것은 눈에 띄는 대로 글로 기록했고, 그것을 시행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 그렇지 않음으로서 생기는 폐단을 첨부해 하나의 학설을 만들었다. 그리고 《맹자(孟子)》에 나오는 진량의 말을 인용해 책의 이름을 지었다"고 말하며, "이용과 후생은 한 가지라도 갖춰지지 못하면 위로는 정덕을 해치는 폐단을 낳는다", "지금 백성들의 생활이 날이 갈수록 곤궁해지고 국가 재정은 날이 갈수록 고갈되는데 사대부는 팔짱 낀 채 보기만 하면서 구제하지도 않는가?"라며, 백성을 위해 사대부들이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나설 것을 강조한다.
4. 1. 중상주의 경제 정책과 소비 장려
박제가는 성리학에서 강조하던 농본억말(農本抑末)과 같은 상업 억제 정책을 반대하며, 적극적인 상업 장려와 그 바탕이 되는 생산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특히 "경제란 우물 같은 것으로 계속 써주지 않으면 말라버린다.", "쓸 줄 모르면 만들 줄도 모르고, 만들 줄을 모르면 민생은 나날이 곤궁해질 것이다."라는 대목에서는 전통 시대의 미덕이었던 검약이나 소비 억제보다는 오히려 지금보다 훨씬 적극적인 소비 활동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적극적인 소비를 통해 생산을 증대시키자는 그의 사상은 근대 경제학 이론과도 흡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청과 통상하여 국력을 기른 뒤 여러 나라와도 통상할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는데, 이는 당시 북학파들의 주된 의론이기도 했다.4. 2. 수레와 벽돌 사용의 강조
박제가는 가난한 백성을 구제할 방안으로 상업 발달에 따른 유통 경제를 활성화할 수 있는 교통 수단인 '수레'의 사용과 규격화된 크기의 '벽돌' 이용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했고, 실제로 자신이 직접 벽돌 만드는 기술을 연구해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성리학에서 강조하던 농본억말(農本抑末)과 같은 상업 억제 정책을 반대하며 적극적인 상업 장려와 그 바탕이 되는 생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4. 3. 상업 발달과 유통 경제 활성화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상업 억제 정책을 반대하고 적극적인 상업 장려와 생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경제란 우물 같은 것으로 계속 써주지 않으면 말라버린다.", "쓸 줄 모르면 만들 줄도 모르고, 만들 줄을 모르면 민생은 날이 갈수록 곤궁해질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검약이나 소비 억제보다는 적극적인 소비 활동을 통해 생산을 증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근대 경제학 이론과도 흡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또한, 가난한 백성을 구제할 방안으로 상업 발달에 따른 유통 경제를 활성화할 수 있는 교통수단인 '수레' 사용과 규격화된 크기의 '벽돌' 이용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했고, 실제로 직접 벽돌 만드는 기술을 연구해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더욱이 청과 통상하여 국력을 기른 뒤 여러 나라와도 통상할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는데, 이는 당시 북학파들의 주된 의론이기도 했다.
5. 《북학의》에 대한 비판과 한계
박제가는 중국 문명을 지나치게 찬양하여,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균형 감각을 유지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2] 네 차례에 걸친 중국 사행 이후 박제가는 중국에 대한 선망이 지나쳐 조선에 대한 완전한 부정을 드러냈다. 그는 조선에 대해 거의 일방적이기까지 한 비하는 중국의 선진 문화를 수용하지 못하면 '보잘것없는' 조선은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논리로까지 비약했다. 더욱이 "본래 사용하는 우리 말을 버리고 중국어를 써야만 '오랑캐'라 불리는 신세를 면할 수 있다"[2]고까지 외치는 대목에서는 '북학의 선구자'로서뿐 아니라 '극단적인 중국 신봉자'라는 이미지를 덧씌우기에 충분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5. 1. 지나친 중국 중심주의
박제가는 중국 문명을 지나치게 찬양하여,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균형 감각을 유지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2] 네 차례에 걸친 중국 사행 이후 박제가는 중국에 대한 선망이 지나쳐 조선에 대한 완전한 부정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북학의》 곳곳에는 중국 문화에 대한 칭찬과 함께 우리 것에 대한 불만이 가득 나열되어 있다.- "우리 나라의 자기는 너무 거칠다"(자瓷편)
- "우리 나라는 1천 호가 사는 마을에서도 반듯해서 살 만한 집이 한 채도 없다"(궁실宮室편)
- "우리 나라의 의술은 정말 믿을 수 없다"(약藥편)
조선에 대해 거의 일방적이기까지 한 비하는 중국의 선진문화를 수용하지 못하면 '보잘것없는' 조선은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논리로까지 비약된다. 더욱이 "본래 사용하는 우리 말을 버리고 중국어를 써야만 '오랑캐'라 불리는 신세를 면할 수 있다"[2]고까지 외치는 대목에서는 '북학의 선구자'로서뿐 아니라 '극단적인 중국 신봉자'라는 이미지를 덧씌우기에 충분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2]
5. 2. 현실 적용의 어려움
박제가는 당시 조선 사회가 외국 문화에 대해 문을 굳게 닫고, 지식인들은 성리학에만 몰두하여 백성들의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북경 사행 경험을 바탕으로 《북학의》를 저술하여 조선 백성들의 빈곤 해결책을 제시했다.《북학의》는 근대 유럽의 중상주의 경제 사상과 유사한 주장들을 담고 있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국내 상업 및 외국 무역 장려
- 수입 금지, 수출 장려
- 은의 해외 유출 금지
- 물가 평준화
- 대량 생산 및 제품 규격 규제
- 전국적 시장 확대
- 농공상업에 대한 국가적 후원 강화
서명응은 《북학의》 서문에서 이 책이 현실에 적용될지는 미지수이나 참고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고, 박지원은 박제가의 북학 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북학의》는 '북학'이라는 학문이 조선의 시대 사상으로 자리 잡는 기반이 되었다. 박지원, 홍대용, 이덕무 등 북학파 학자들은 청나라 사행 경험을 바탕으로 폐쇄적인 사회를 개방하고 이용후생을 통해 백성들의 생활 안정과 부국강병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건축 자재로 벽돌을 사용하고, 수레와 배를 적극 활용하며, 한복을 개량하고, 대외 무역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사농공상 직업 서열을 ভেঙে 상공업 진흥을 추구했다.
그러나 박제가는 중국 문명을 지나치게 찬양하여 균형 감각을 잃었다는 평가도 받는다. 그는 중국 사행 후 중국에 대한 선망이 지나쳐 조선을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북학의》에는 "우리나라 자기는 너무 거칠다", "우리나라 1천 호 마을에 살 만한 집이 없다", "우리나라 의술은 믿을 수 없다" 등 중국 문화 칭찬과 조선에 대한 불만이 가득하다. 그는 조선이 중국 선진문화를 수용하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고 주장했으며, "우리말을 버리고 중국어를 써야 오랑캐 신세를 면한다"[2]고까지 말해 '극단적 중국 신봉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6. 《북학의》가 조선 사회에 미친 영향
《북학의》는 조선 사회에 긍정적, 부정적 영향을 모두 미쳤다. 박제가의 스승이었던 박지원은 저자의 적극적인 북학 정신을 높이 평가했고, 서명응은 "이 책이 채택되어 현실에서 쓰일 수 있을지 없을지는 정녕 알 수 없겠지만, 우리 조정에서 모범이 될 책을 편찬할 때에 저 솔개나 개미가 미래를 예견하는 구실을 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라며 이 책에 대한 기대를 드러냈다.[2]
《북학의》는 원본 외에도 여러 필사본이 있으며, 1947년 금융조합연합회에서 진소본(進疏本)을 번역, 간행하고, 1961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한국사료총서(韓國史料叢書)》 제12로 《정유집(貞蕤集)ㆍ부(附) 북학의(北學議)》를 간행하였다. 북한에서도 영인본 및 번역본이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학의》의 다양한 출판본은 다음과 같다.
출판 연도 | 출판사 (또는 저자) | 번역 (또는 저자) | 비고 |
---|---|---|---|
1985년 | 다락원 | 김용덕 | 다락원문고명저다이제스트 6 |
1989년 | 을유문화사 | 을유문고 51 | |
1991년 | 여강출판사 | 홍희유 | 북한 국역본 |
1992년 | 한길사 | 이익성 | 북학의, 실학사상독본 8 |
1994년 | 을유문화사 | 이익성 | |
2003년 | 돌베개 | 안대회 | |
2003년 | 서해문집 | 박정주 | 시대를 아파한 조선 선비의 청국 기행, 오래된 책방01 |
2004년 | 범우사 | 김승일 | 범우문고 145 |
2007년 | 삼성출판사 | 김교빈 | 박제가의 북학의 |
2008년 | 태동출판사 | 드림아이 | 만화로 읽는 동양철학 16(북학의) |
2009년 | 주니어김영사 | 곽은우 | 만화 박제가 북학의 |
2010년 | 두산동아편집부 | ||
2011년 | 을유문화사 | 이익성 |
6. 1. 북학파의 성장과 실학 사상의 발전
박제가가 살던 당시 조선 사회는 성리학 일변도의 학문 풍조 속에서 지식인들이 공리공론만 일삼으며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다. 박제가는 북경 사행을 통해 《북학의》를 저술하여 조선 백성들의 빈곤을 해결할 수 있는 대책을 제시했다. 《북학의》는 국내 상업 및 외국 무역 장려, 수입 금지, 수출 장려, 은의 해외 유출 금지, 물가 평준화, 대량 생산, 제품 규격 규제, 전국적 시장 확대, 농공상업에 대한 국가적 후원 강화 등 근대 유럽의 중상주의 경제 사상과 비슷한 경향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2]《북학의》는 이후 '북학'이라는 학문이 조선에서 하나의 시대 사상으로서 자리잡는 기반이 되었다. 박지원, 홍대용, 이덕무 등 '북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학자 그룹들은 청나라 사행에서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폐쇄적인 사회의 문을 열어 이용후생을 통한 백성들의 생활 안정과 부국강병을 외쳤다. 건축 자재로서 벽돌 사용, 교통 수단으로서 수레와 배 적극 이용, 한복 개량, 대외 무역 확대 등의 주장은 당시 사농공상으로 서열화되어 있던 직업의 귀천을 최대한 배제하면서 상공업을 진흥시키자는 생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2]
하지만 박제가는 지나치게 중국 문명을 찬양한 나머지 균형 감각을 유지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네 차례에 걸친 중국 사행 이후 박제가는 중국에 대한 선망이 지나쳐 조선에 대한 완전한 부정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자기는 너무 거칠다", "우리나라는 1천 호가 사는 마을에서도 반듯해서 살 만한 집이 한 채도 없다", "우리나라의 의술은 정말 믿을 수 없다" 등 《북학의》 곳곳에는 중국 문화에 대한 칭찬과 함께 우리 것에 대한 불만이 가득 나열되어 있다. 더욱이 "본래 사용하는 우리말을 버리고 중국어를 써야만 '오랑캐'라 불리는 신세를 면할 수 있다"[2]고까지 외치는 대목에서는 '북학의 선구자'로서뿐 아니라 '극단적인 중국 신봉자'라는 이미지를 덧씌우기에 충분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2]
6. 2. 조선 후기 사회 개혁 논의에 미친 영향
《북학의》는 '북학'이라는 학문이 조선에서 하나의 시대 사상으로 자리 잡는 기반이 되었다.[2] 박지원, 홍대용, 이덕무 등 '북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학자들은 청나라 사행에서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폐쇄적인 사회의 문을 열어 이용후생을 통한 백성들의 생활 안정과 부국강병을 외쳤다.[2] 이들은 건축 자재로 벽돌을 사용하고, 교통 수단으로 수레와 배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며, 비활동적이었던 한복을 개량하고 대외 무역을 확대하자고 주장했다. 이러한 사상의 배경에는 사농공상으로 서열화되었던 직업의 귀천을 최대한 배제하고 상공업을 진흥시키자는 생각이 있었다.[2]《북학의》에 나타난 국내 상업 및 외국 무역 장려, 수입 금지, 수출 장려, 은의 해외 유출 금지, 물가 평준화, 대량 생산, 제품 규격 규제, 전국적 시장 확대, 농공상업에 대한 국가적 후원 강화 등의 견해는 근대 유럽의 중상주의 경제 사상과 비슷한 경향으로 평가받는다.[2]
하지만 박제가는 지나치게 중국 문명을 찬양한 나머지,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가장 선구적인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균형 감각을 유지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받는다.[2] 네 차례에 걸친 중국 사행 이후 박제가는 중국에 대한 선망이 지나쳐 조선에 대한 완전한 부정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의 자기는 너무 거칠다", "우리나라는 1천 호가 사는 마을에서도 반듯해서 살 만한 집이 한 채도 없다", "우리나라의 의술은 정말 믿을 수 없다" 등 《북학의》 곳곳에는 중국 문화에 대한 칭찬과 함께 우리 것에 대한 불만이 가득 나열되어 있다. 조선에 대한 거의 일방적이기까지 한 비하는 중국의 선진 문화를 수용하지 못하면 '보잘것없는' 조선은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논리로까지 비약된다.[2] 더욱이 "본래 사용하는 우리 말을 버리고 중국어를 써야만 '오랑캐'라 불리는 신세를 면할 수 있다"고까지 외치는 대목에서는 '북학의 선구자'로서뿐 아니라 '극단적인 중국 신봉자'라는 이미지를 덧씌우기에 충분하다는 평가를 받는다.[2]
참조
[1]
웹인용
북학의(北學議)
https://encykorea.ak[...]
한국학중앙연구원
[2]
문서
《북학의》한어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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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개혁방안 담은 ‘북학의’ 국가지정문화유산 ‘보물’ 지정
조선 후기 대표 실학서 ‘박제가 고본 북학의’ 보물 된다
조선 후기 대표 실학서 ‘박제가 북학의’ 보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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