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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강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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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사강목은 안정복이 기존 역사서의 문제점을 비판하며 편찬한 역사서로, 1756년에 저술을 시작하여 1781년에 완성되었다. 기자조선에서 고려까지를 정통으로 삼고, 강목체 방식을 사용하여 역사의 정통성과 대의명분을 강조했다. 실증적인 태도를 바탕으로 고증과 비판적 서술을 시도했으며, 경세치용학파에 영향을 미쳐 근대 계몽기에 학문적, 사상적 가치를 지닌다.

2. 편찬 배경 및 과정

영조 32년(1756년) 안정복은 45세의 나이로 《동사강목》 저술을 시작했다. 이는 스승 이익의 역사에 대한 관심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1] 안정복은 1760년까지 4년에 걸쳐 한국사의 주요 사건과 인물 평가, 역대 강역과 지명 고증 등에 대해 의문점을 스승 이익에게 편지로 질문했고, 이익의 답변은 《동사강목》 서술에 대부분 반영되었다. 이익 외에도 윤동규와 이병휴에게도 편지를 보내 자문을 구했다. 안정복이 보낸 12통의 편지와 그에 대한 스승 이익의 답장은 《순암선생문집》, 《성호전집》, 「조선시대간찰집모음」 등에 실려 있다.

안정복은 기존 역사서에 대한 불만을 바탕으로 《동사강목》을 집필했다. 《삼국사기》는 소략하고 사실과 다르며, 《고려사》는 번잡하고 요점이 적다고 비판했다. 《동국통감》은 지나치게 상세하고 의례가 어긋나며 잡스럽다고 평가했다. 《여사제강》과 《동사찬요》에 대해서도 강목체의 체제, 필법, 서술 원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판하며, 고증과 내용의 부실함에 대한 불만을 제기했다. 이에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동국통감》 등 8종의 역사서와 32종의 문집 등을 참고하여 편년체 형식으로 재구성하고, 김부식, 이제현고려와 조선 유학자 17명의 사론을 제시하였다.

《동사강목》은 안정복 혼자 집필한 것이 아니다. 1757년 병을 얻은 안정복은 집필을 중단했다. 당시 《동사강목》 수권의 동사범례와 부권의 지리고는 완성된 상태였다. 인종 시대(《동사강목》 권제8)까지 집필한 후 병이 악화되자, 안정복은 동생 안정록, 아들 안경증, 이익의 손자 이원양, 권철신의 형 권기명에게 집필을 부탁하고 윤동규에게 윤문을 부탁하는 유서를 남겼다. 나머지 초고(11권 분량)는 1년 동안 이들에 의해 완성되었다.

초고 완성 후 안정복은 《성호사설유편》(1762년), 《열조통기》(1769년)를 저술하고 세손(훗날의 정조) 교육을 맡는 등 관직 생활로 초고 보완에 전념할 수 없었다. 1774년 세손의 명으로 마무리 작업을 시작하여 1778년 서문을 지어 책을 완성했다. 초고 완성 후 18년, 67세 때였다. 1781년 《동사강목》은 정조에게 바쳐졌다.

2. 1. 시대적 배경

영조 32년(1756년) 안정복은 45세의 나이로 《동사강목》 저술을 시작했는데, 이는 스승인 성호 이익의 역사에 대한 관심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1] 안정복은 1760년까지 4년에 걸쳐 한국사의 주요 사건과 인물 평가, 역대 강역과 지명 고증 등에 대해 의문점을 스승 이익에게 편지로 질문했고, 이익의 답변은 《동사강목》 서술에 대부분 반영되었다. 또한 이익의 문인인 윤동규와 조카 이병휴에게도 편지를 보내 자문을 구했다.

안정복은 기존 역사서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삼국사기》는 소략하고 사실과 다르며, 《고려사》는 번잡하고 요점이 적다고 비판했다. 《동국통감》은 지나치게 상세하고 의례가 어긋나며 잡스럽다고 평가했다. 《여사제강》, 《동사찬요》에 대해서도 강목체의 체제, 필법, 서술 원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판하며, 고증과 내용의 부실함에 대한 불만을 느껴 직접 《동사강목》 집필을 결심했다.

안정복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동국통감》 등 역대 사서 8종과 32종의 문집류 등 방대한 사료를 참고하여 편년체 형식으로 재구성하고, 김부식, 이제현고려와 조선 유학자 17명의 사론을 참고했다.

1757년 병을 얻은 안정복은 집필을 중단했으나, 동생 안정록, 아들 안경증, 이원양, 권기명 등 동료 문인과 제자들이 집필을 이어갔다. 초고 완성 후 안정복은 《성호사설유편》(1762년), 《열조통기》(1769년)를 저술하고 세손(훗날의 정조) 교육을 맡는 등 바쁜 시간을 보냈다. 1774년 세손의 명으로 《동사강목》 마무리 작업을 시작하여 1778년 서문을 지어 완성했다.

2. 2. 저술 동기

안정복은 45세 되던 해인 영조 32년(1756년)에 《동사강목》 저술을 시작하였다. 안정복은 스승 이익을 비롯해 윤동규와 이병휴에게도 편지를 보내 자문을 구했는데, 이는 이익의 역사에 대한 관심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1]

또한 《동사강목》은 기존 역사서술에 대한 불만에서 시작되었다. 안정복은 기존의 역사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 삼국사기》: "소략하면서 사실과는 다르다"
  • 고려사》: "번잡하고 쓸데없는 것이 많고 요점이 될 만한 것은 적다"
  • 동국통감》: "지나치게 상세하고 그래서 방대한 책이 되었지만 의례가 어긋나고 잘못이 많고 잡스러움도 심하다"
  • 여사제강》, 《동사찬요》: "필법이 간혹 어긋나기도 하고 오류 때문에 잘못을 답습한 폐단까지 낳게 되었다"


안정복은 역사책에 서술된 사실들의 고증이나 내용의 부실함에 대한 불만 때문에 《동사강목》 집필을 결심하게 되었다.

2. 3. 저술 과정

영조 32년(1756년), 안정복은 45세의 나이로 《동사강목》 저술을 시작하였다. 안정복은 스승인 성호 이익의 역사관에 영향을 받았으며, 《동사강목》 집필 초기부터 초고가 완성된 영조 36년(1760년)까지 4년간 한국사의 주요 사건과 인물 평가, 역대 강역 및 지명 고증 등에 대해 이익에게 편지로 질문하며 자문을 구했다. 이익의 답변은 《동사강목》 서술에 대부분 반영되었다.[1] 또한 이익의 문인인 윤동규와 이익의 조카 이병휴에게도 편지를 보내 자문을 구했다. 안정복이 보낸 12통의 편지와 이익의 답장은 《순암선생문집》, 《성호전집》, 「조선시대간찰집모음」 등에 실려 전한다.

안정복은 기존 역사서에 대한 불만을 품고 《동사강목》 집필을 결심했다. 그는 《삼국사기》는 소략하고 사실과 다르며, 《고려사》는 번잡하고 요점이 적으며, 《동국통감》은 지나치게 상세하고 잡스럽다고 비판했다. 또한 《여사제강》, 《동사찬요》 등도 강목체의 체제, 필법, 서술 원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판하며, 역사적 사실 고증과 내용의 부실함에 대한 불만을 제기했다. 이에 안정복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동국통감》 등 8종의 역사서와 32종의 문집류 등 방대한 자료를 참고하여 편년체 형식으로 재구성하고, 김부식, 이제현고려와 조선 유학자 17명의 사론을 제시하였다.

《동사강목》은 안정복 혼자 집필한 것이 아니다. 영조 33년(1757년)에 병을 얻은 안정복은 집필을 중단했다. 당시 《동사강목》 수권의 동사범례와 부권의 지리고는 완성된 상태였다. 영조 35년, 인종 시대(《동사강목》 권제8)까지 집필한 후 병이 악화되자, 안정복은 동생 안정록, 아들 안경증, 이익의 손자 이원양, 권철신의 형 권기명에게 집필을 부탁하고 윤동규에게 윤문을 부탁하는 유서를 남겼다. 나머지 초고(11권 분량)는 1년 동안 이들에 의해 완성되었다.

초고 완성 후 안정복은 《성호사설유편》(1762년), 《열조통기》(1769년)를 저술하고 세손(훗날의 정조)의 교육을 맡는 등 관직 생활로 초고 보완에 전념할 수 없었다. 1774년 무렵 세손의 명으로 《동사강목》 마무리 작업을 시작하여 정조 2년(1778년) 서문을 지어 책을 완성했다. 초고 완성 후 18년, 그의 나이 67세 때였다. 정조 5년(1781년) 《동사강목》은 정조에게 바쳐졌다.

3. 구성 및 내용

《동사강목》은 수권(首卷), 본편(本編), 부권(附卷)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수권(首卷)'''


  • 제동사편면
  • 동사강목서
  • 목록
  • 동사강목 범례(凡例): 통계(統系) 및 포폄(褒貶)의 원칙을 세웠다.
  • 통계: 역사의 정통론을 정립하는 것으로, 기자조선-마한-신라-고려를 정통으로 삼았다.
  • 세년(歲年): 정통 및 참국의 기년을 기준으로 삼았다.
  • 명호(名號): 정통의 임금은 왕(王) 또는 시호로, 정통이 아닌 임금은 모국왕(某國王), 소국의 임금은 모국군(某國君)으로 표기하고 찬탈자는 이름을 썼다.
  • 포폄(褒貶): 단어 및 용어 사용에 철저한 원칙을 세워 칭찬과 꾸짖음을 나타내려 하였다.
  • 도(圖)
  • 상(上): 《동국역대전수지도》(한국 역대 국가의 흥망)와 전세지도(傳世之圖, 각국의 왕계보)[2]
  • 중(中): 지도(각국의 강역표)[2]
  • 하(下): 관직연혁도(官職沿革圖)[2]


'''2. 본편(本編)'''

'''3. 부권(附卷)'''

  • 상권(上卷) - 고이(考異): 전설이나 상반된 기록을 따로 기록하였다.
  • 중권(中卷)
  • 괴설변증(怪說辨證): 괴상한 전설·기록에 대해 비판하였다.
  • 보유(補遺): 금의에 대한 추측을 기록하였다.
  • 잡설(雜說): 기타 고증이나 의견을 기록하였다.
  • 하권(下卷)
  • 지리고(地理考): 국가별 강역, 논란이 많은 지명에 대한 문헌적 고증을 하였다.

3. 1. 수권(首卷)

首卷중국어은 《동사강목》의 첫머리에 해당하며,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 제동사편면(題東史篇面)

# 동사강목서(東史綱目序)

# 목록(目錄)

# 동사강목 범례(凡例): 역사의 통계(統系) 및 포폄(褒貶)의 원칙을 제시하였다.

## 통계(統系)

역사의 정통론을 정립하는 것으로, 《동사강목》은 기자조선-마한-신라-고려를 정통으로 삼았다. 단군조선은 정통으로 삼지 않았지만 정통에 준하여 기록하였다. 삼국은 특정 정통 국가를 정하지 않고 무통(無統)으로 처리하였고, 위만조선, 후삼국, 신라 멸망 이전의 고려는 참국(僭國)으로 삼았다. 부여, 예맥, 옥저, 가락, 대가야 등은 소국(小國)으로 기록하였다. 또한, 이전 사서에서 고려 정통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전폐왕 우후폐왕 창을 모두 정통 군주로 기록하였다.[2]

## 세년(歲年)

정통 및 참국의 기년을 기준으로 삼았다. 갑자(甲子)를 먼저 쓰고 다음에 기년을 서술하였으며, 중국의 기년은 본문 바깥에 별도로 기록하였다. 정통 왕조의 기년은 연도만 표시하였고, 소국이나 참국 등의 기년은 국명 및 왕호를 함께 표기하였다. 삼국은 무통이기 때문에 모두 국명 및 왕호를 함께 표기하였다. 신라의 여왕 및 찬탈자의 경우 이름 및 기년을 먹으로 표시하였다.[2]

## 명호(名號)

정통의 임금은 왕(王) 또는 시호로 표시하였고, 정통이 아닌 임금은 모국왕(某國王), 소국의 임금은 모국군(某國君), 찬탈자는 이름을 썼다. 초기 신라의 왕호는 기년 및 목(目)에는 왕(王)으로 표기하였으나 강(綱)에서는 원형 그대로 표기하였다.[2]

## 포폄(褒貶)

기록을 할 때 단어 및 용어 사용에 철저한 원칙을 세워 칭찬과 꾸짖음을 나타내려 하였다. 같은 의미에도 칭찬하는 글자와 꾸짖는 글자를 달리 사용하였으며, 정통에 사용하는 글자와 비정통에 사용하는 글자를 다르게 하였다. 예를 들어 정통 왕의 죽음은 훙(薨), 비정통 왕의 죽음은 졸(拙), 찬탈자의 죽음은 사(死)로 서술하였다.[2]

# 도(圖)

## 상(上)

《동국역대전수지도》(東國歷代傳授之圖, 한국 역대 국가의 흥망)와 전세지도(傳世之圖, 각국의 왕계보)가 수록되었다.[2]

## 중(中)

지도(地圖, 각국의 강역표)가 수록되었다.[2]

## 하(下)

관직연혁도(官職沿革圖)가 수록되었다.[2]

3. 2. 본편(本編)

本編중국어은 동사강목의 주요 내용을 담고 있으며,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시대내용주요 사건 및 인물[1]
권1상조선마한기자조선에서 마한까지의 역사기자조선, 마한
권1하 ~ 권4상삼국 시대 (10년 ~ 668년)고구려, 백제, 신라의 건국, 발전, 멸망고구려 주몽, 백제 온조왕, 신라 박혁거세, 김알지, 미천왕, 소수림왕, 광개토대왕, 장수왕, 안장왕, 안원왕, 양원왕, 평원왕, 영양왕, 영류왕, 보장왕, 을지문덕, 백제 근초고왕, 개로왕, 동성왕, 무령왕, 성왕, 의자왕, 신라 내물왕, 눌지왕, 자비왕, 소지왕,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 진평왕, 선덕여왕, 진덕여왕, 김춘추, 김유신, 관창
권4하 ~ 권5하신라 (669년 ~ 935년)신라의 삼국 통일, 발전, 멸망문무왕, 신문왕, 효소왕, 성덕왕, 효성왕, 경덕왕, 혜공왕, 선덕왕, 원성왕, 소성왕, 애장왕, 헌덕왕, 흥덕왕, 희강왕, 민애왕, 신무왕, 문성왕, 헌안왕,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 진성여왕, 효공왕, 신덕왕, 경명왕, 경애왕, 경순왕, 장보고, 궁예
권6상 ~ 권17고려 (936년 ~ 1392년)고려의 건국, 발전, 멸망태조, 광종, 성종, 현종, 문종, 숙종, 인종, 의종, 명종, 신종, 희종, 강종, 고종, 원종,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 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 최충, 최승로, 서희, 강감찬, 윤관, 묘청, 조위총, 만적, 최충헌, 최우, 김방경, 배중손, 김구용, 안향, 이제현, 이색, 정몽주, 정도전



안정복은 역사를 단순한 과거 기록이 아닌 현재와 미래를 위한 교훈으로 보았다. 그는 정통론에 입각하여 역사를 서술하고, 왕조 흥망성쇠와 인물 선악을 엄격하게 평가하여 후세에 귀감이 되도록 하였다. 특히, 우왕창왕을 정통 군주로 기록하여 고려 왕조 정통성을 강조하였다.

3. 3. 부권(附卷)


  • 상권(上卷)
  • '''고이(考異)''' : 전설이나 서로 다르게 전해져 오는 기록들을 따로 기록한 것이다. 여러 사실 가운데 특정 사실을 선택한 이유를 서술하였다. (이는 사마광의 《자치통감》의 영향을 받아 지은 것임을 저자 본인이 밝히고 있다.)[2]
  • 중권(中卷)
  • '''괴설변증(怪說辨證)''' : 괴상한 전설이나 기록 등에 대해서 비판을 가한 것이다. 삼국의 시조 설화를 비롯하여 많은 신이(神異)한 전설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 '''보유(補遺)''' : 금의에 대한 자신의 추측을 기록하였다. 통설과 상반되는 추측이기에 부록에 따로 서술하였다.
  • '''잡설(雜說)''' : 기타 잡다한 고증이나 의견을 기록하였다.
  • 하권(下卷)
  • '''지리고(地理考)''' : 국가별 강역, 논란이 많은 개별 지명에 대한 문헌적 고증을 하였다. 《동사강목》에서 가장 높이 평가받는 부분이다.

4. 역사관 및 특징

《동사강목》에는 애국적 사상과 애민적 사상이 담겨 있다. 본편 17권 전체에 걸쳐 이러한 사상이 일관되게 나타난다. 부권(附卷)에서는 고이(考異), 괴변설(怪辯說), 잡설(雜說), 지리고(地理考) 등 4개 편목을 통해 여러 가지 개별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동사강목》은 경세치용학파의 저술로서 근대 계몽기에 이르러 학문적,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다.[2]

4. 1. 정통론

기자조선-마한(馬韓)-신라-고려를 정통으로 삼았다. 단군조선은 정통으로 삼지는 않았지만 정통에 준하도록 기록하였으며, 삼국은 특정한 정통을 정하지 않고 무통(無統)으로 하였다. 위만조선, 후삼국, 신라 멸망 이전의 고려는 참국(僭國)으로 삼았으며, 부여, 예맥, 옥저, 가락(駕洛), 대가야 등은 소국(小國)으로 기록했다. 또한, 이전 사서에서 고려 정통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전폐왕 우(前廢王 禑), 후폐왕 창(後廢王 昌)을 모두 정통 군주로 기록하였다.[2]

4. 2. 강목체 서술

《동사강목》은 주자의 《자치통감강목》의 영향을 받아 '강목체'라는 서술 방식을 사용했다. 강목체는 역사를 단순히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강'(綱)과 '목'(目)으로 나누어 사건의 중요도와 인과 관계를 명확히 보여주는 방식이다.[2] 안정복은 이러한 강목체를 통해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사건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드러내고자 했다.

'강'(綱)은 사건의 핵심 내용을 요약하여 제시하고, '목'(目)은 '강'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부가적인 정보를 담고 있다. 이러한 구분을 통해 독자는 사건의 큰 흐름과 세부 내용을 동시에 파악할 수 있다.

안정복은 강목체를 사용하면서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 통계(統系): 역사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것으로, 《동사강목》에서는 기자조선-마한-신라-고려로 이어지는 정통 왕조를 설정했다. 단군조선은 정통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중요하게 다루었고, 삼국시대는 특정 국가를 정통으로 보지 않는 무통(無統)으로 처리했다.[2]
  • 세년(歲年): 정통 왕조와 그렇지 않은 국가(참국)의 연도를 표기하는 방식을 달리했다. 정통 왕조는 연도만 표시하고, 참국은 국명과 왕호를 함께 표기했다.
  • 명호(名號): 왕의 칭호를 정통과 비정통에 따라 다르게 표기했다. 정통 왕은 '왕' 또는 시호로, 비정통 왕은 '모국왕'(某國王)으로, 소국의 왕은 '모국군'(某國君)으로 표기했다.
  • 포폄(褒貶): 칭찬과 비판을 명확히 하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와 용어를 엄격하게 구분했다. 예를 들어 정통 왕의 죽음은 '훙'(薨), 비정통 왕의 죽음은 '졸'(拙), 찬탈자의 죽음은 '사'(死)로 다르게 표현했다.[2]


이러한 원칙들은 《동사강목》의 내용 구성과 역사 해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안정복은 강목체를 통해 자신의 역사관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독자들에게 특정한 관점을 제시하고자 했다.

4. 3. 실증적 태도

안정복은 《동사강목》을 저술하면서 철저한 고증과 비판적 역사 서술 태도를 보여주었다. 이는 부권(附卷)에 잘 나타나 있는데, 고이(考異), 괴설변증(怪說辨證), 잡설(雜說), 지리고(地理考) 등 4개 편목을 통해 다양한 역사적 문제들을 다루었다.

  • 고이(考異): 전설이나 기록이 서로 다르게 전해져 오는 경우, 여러 사실 가운데 특정 사실을 선택한 이유를 밝혀 객관성을 확보하려 했다. 이는 사마광의 《자치통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2]
  • 괴설변증(怪說辨證): 삼국 시대의 시조 설화와 같이 신이(神異)한 전설이나 기록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제시하여 합리적인 역사 해석을 추구했다.
  • 잡설(雜說): 기타 잡다한 고증이나 의견을 기록하여 역사 서술의 폭을 넓혔다.
  • 지리고(地理考): 국가별 강역과 논란이 많은 개별 지명에 대해 문헌적으로 고증하여 역사 지리 연구에 기여했다. 이 부분은 《동사강목》에서 가장 높이 평가받는 부분이다.


이러한 안정복의 실증적 태도는 당시 조선 사회의 역사 인식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경세치용학파의 저술로서 근대 계몽기에 이르러 학문적, 사상적으로 더욱 현저한 영향을 주었다.

5. 평가 및 영향

東史綱目중국어은 경세치용학파의 저술로서, 근대 계몽기에 학문적·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다.

5. 1. 긍정적 평가

《동사강목》에는 애국적 사상과 애민적(愛民的) 사상이 담겨 있으며, 이는 본편 17권 전체에 걸쳐 나타난다. 본편 외에 부권(附卷)은 《동사강목》의 가치를 높여주는데, 여기에는 고이(考異), 괴변설(怪辯說), 잡설(雜說), 지리고(地理考) 등 4개 편목(篇目)이 있고, 각 편목에는 여러 개별적 문제들이 다루어져 있다. 《동사강목》은 경세치용학파의 저술로서 근대 계몽기에 학문적,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다.

5. 2. 영향

《동사강목》은 경세치용학파의 저술로서 본편 17권 속에 애국적 사상과 애민적 사상이 한결같이 흐르고 있어, 근대 계몽기에 이르러 학문적·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다.

6. 현대적 의의

東史綱目중국어은 경세치용학파의 저술로서, 근대 계몽기에 학문적,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책에는 애국적 사상과 애민적(愛民的) 사상이 담겨 있다. 본편 외에 부권(附卷)은 東史綱目중국어의 가치를 더욱 높여주는데, 고이(考異), 괴변설(怪辯說), 잡설(雜說), 지리고(地理考) 등 4개 편목(篇目)이 포함되어 있다.

6. 1. 역사 교육 자료로서의 가치

《동사강목》은 애국적 사상과 애민적(愛民的) 사상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이러한 사상은 본편 17개 권 전체에 걸쳐 나타난다. 본편 외에 부권(附卷)은 《동사강목》의 가치를 더욱 높여주는데, 여기에는 고이(考異), 괴변설(怪辯說), 잡설(雜說), 지리고(地理考) 등 4개 편목(篇目)이 포함되어 있으며, 각 편목에는 여러 개별 문제들이 다루어져 있다. 《동사강목》은 경세치용학파의 저술로서, 근대계몽기에 학문적,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다.

6. 2. 역사 연구 자료로서의 가치

《동사강목》은 경세치용학파의 저술로서 근대 계몽기에 이르러 학문적·사상적 영향이 더욱 현저하였다. 이 책에는 애국적 사상과 애민적(愛民的) 사상이 흐르고 있는데, 이는 본편 17개 권 속에 한결같이 나타나 있다. 본편 외에 마지막 부권(附卷)은 《동사강목》의 가치를 더욱 높여주었다. 부권에는 고이(考異) · 괴변설(怪辯說) · 잡설(雜說) · 지리고(地理考) 등의 4개 편목(篇目)이 있으며, 각 편에는 여러 개의 개별적 문제들이 다루어져 있다.

참조

[1] 문서 성호사설과 동사강목의 연관성
[2] 문서 동사강목의 왕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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