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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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제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북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서자 출신으로 신분적 제약 속에서도 학문에 정진하여 정조 시대에 규장각 검서관을 역임했다. 박제는 청나라 문물을 적극 수용하여 상업 진흥, 신분 차별 타파, 해외 통상, 서양 기술 도입 등을 주장하며, 폐쇄적인 조선 사회의 개혁을 촉구했다. 그의 저서로는 《북학의》, 《정유집》 등이 있으며, 그림에도 능했다. 박제는 현실 비판적인 시각과 개혁적인 사상으로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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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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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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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이름 | 박제가 |
한자 이름 | 朴齊家 |
로마자 표기 | Bak Jega |
다른 로마자 표기 | Pak Cheka |
호 | 초정 |
호 (한자) | 楚亭 |
호 (로마자 표기) | Chojeong |
출생일 | 1750년 11월 5일 |
사망일 | 1816년 7월 6일 |
사망지 | 회령시 |
직업 | 학자, 시인, 화가 |
국적 | 조선 |
가계 | |
아버지 | 박평 |
어머니 | 전주 이씨 첩실(모) |
형제 | 박제도(이복 적형) |
배우자 | 덕수 이씨 부인 |
자녀 | 박장림(장남) 박장름(차남) 박장암(3남) 박효석(4남) |
친인척 | 이관상(장인) 박태동(조부) 박형(백부) 박성(숙부) 박효선(손자) |
경력 | |
주요 경력 | 옛 소북인 이탈파 세력 출신의 통역관이자 무관 겸 저술가 및 실학자 |
관직 | |
관직 (1) | 조선의 전설서 별제 |
관직 (1) 재임 기간 | 1785년 ~ 1791년 |
임금 (1) | 조선 정조 |
관직 (2) | 조선의 오위도총부 오위장 |
관직 (2) 재임 기간 | 1794년 ~ 1795년 |
임금 (2) | 조선 정조 |
관직 (3) | 조선의 경기도 영평현감 |
관직 (3) 재임 기간 | 1796년 ~ 1798년 |
임금 (3) | 조선 정조 |
사상 및 정치 성향 | |
정당 | 노론계 낙론 성향 북학파 잔존 중심 세력 |
2. 생애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이자 북학파의 일원으로, 1768년 박지원에게 사사했다. 1779년 정조에 의해 규장각 검서관으로 발탁되어 이덕무, 유득공 등과 함께 활동했다.
1778년 이후 네 차례 조선 연행사로 청나라를 방문하여 선진 문물을 접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북학의』를 저술하여 청나라의 기술과 제도 도입을 통한 복리후생 증진을 주장했다.[4] 또한 정조에게 청나라에서의 견문을 정리한 "병오소회"를 올리기도 했다.
그는 부패한 양반을 비판하고 사농공상 차별 철폐와 중상주의에 입각한 상공업 진흥 및 대외 무역 확대를 강조했으나, 보수 세력의 반대로 개혁안은 실현되지 못했다. 당시 일반적인 화이관(華夷觀)을 가졌으나[5], 국익을 위해 청나라의 발전을 배우려 한 실용적인 면모를 보였다. 그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문단에서 다룬다.
2. 1. 생애 초기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 중 한 명이다. 1750년에 태어났으며, 또 다른 유명한 실학자인 박지원의 제자이기도 하다. 그의 어린 시절과 성장 과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문단에서 다룬다.2. 1. 1. 출생과 가계
초정 박제가는 1750년 아버지 박평(朴玶)과 어머니 전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였다. 이복형으로 박평의 정실부인 소생인 박제도가 있었다.그의 선대는 고려 충렬왕 때의 박척(朴陟)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제가의 가계는 조선 후기 소북 계열이었으며, 박율(朴栗)의 6대손이다.
구분 | 인물 |
---|---|
현조부 | 박심(朴尋) |
고조부 | 박수문(朴守文) |
증조부 | 박순(朴純) |
조부 | 박태동(朴台東) |
아버지 | 박평(朴玶) |
박제가는 어릴 적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여 읽은 책은 반드시 세 번씩 베껴 썼고, 늘 입에 붓을 물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변소에 가서는 옆 모래에 그림을 그리고, 앉아서는 허공에 글쓰기를 연습했다고 한다. 훗날 박제가 자신이 "내가 글을 처음 배운 것은 막 젖을 먹던 때였지"라는 시구를 남기기도 했다.
아버지 박평은 만년에 얻은 서자인 그를 각별히 여겼다. 그러나 박제가가 11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본가에서 나오게 되면서 생활이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시와 문학,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점차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그의 가계는 본래 소북이었으나, 박제가는 박지원의 문인이 되면서 노론 북학파로 당적을 옮겼다.
2. 1. 2. 소년기
일찍부터 시인으로 이름을 날렸고, 글재주를 알아본 아버지 박평은 그가 서자임에도 공부를 시켰다. 그러나 아버지가 사망하자 한성부 본댁에서 나와 어머니와 함께 자주 거처를 옮겨 다녔으며, 어머니가 생계를 이어갈 정도로 생활이 매우 어려웠다. 박제가는 밤을 새워 품팔이를 하며 공부시키는 어머니의 지극한 정성을 가슴 깊이 새겼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장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으며, 박제가는 당시 생활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해본다. 과부로 가난하게 살면서 10여 년 동안 성한 옷을 입어보지 못했고 입에 맞는 음식을 자셔보지도 못했으며 밤을 새워가며 삯바느질을 하여 공부하는 이 아들의 뒷바라지를 하였다. 내가 사귀는 사람 중에는 이따금 선생과 나이 든 분, 그리고 세상에 알려진 인사들이 많이 있었는데 반드시 그들을 초청케 하여 술과 안주를 극진히 대접한 관계로 그 아들을 대하는 사람으로서는 집안 형편이 빈한한 것을 모를 정도였다.
이러한 어려운 가정 환경과 사회적 차별은 그가 성장하여 사회적 천대와 멸시, 양반 제도의 모순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빈곤한 농민과 서민을 동정하는 입장에 서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한편, 우연한 기회에 연암 박지원을 만나 그의 문하에 출입하게 되었다. 또한 이순신의 5대손인 선비 이관상의 문하에도 출입했는데, 그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재주를 아깝게 여긴 이관상은 1766년 자신의 첩이 낳은 둘째 서녀를 박제가에게 출가시켜 서녀사위로 삼았다.
2. 2. 학문 연구와 개혁 운동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이자 개혁 사상가로, 박지원의 제자였다. 그는 당시 청나라로 불리던 중국으로의 조선 연행사 수행 등을 통해 선진 문물과 기술, 경제 체제를 직접 경험하였다.[4] 이러한 경험은 그의 학문과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청나라에서 돌아온 후, 박제가는 정조 시대에 규장각 검서관 등으로 활동하며 조선 사회의 개혁을 주장했다. 그는 성리학적 질서에 얽매이지 않고 과학 기술 발전과 상업 진흥을 통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특히 『북학의』[4]를 저술하여 청나라의 발전된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통해 조선의 복리후생을 증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저술에는 농업·목축 기술 개선, 성곽·궁궐 건축, 배·기와 제작법 등 구체적인 방안들이 담겨 있었다. 또한 농업 방식을 발전시키고 농업 기계 일부를 개량하는 데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며, 다른 저술들을 통해 상업 체제 강화 등을 주장하기도 했다.
박제가는 무위도식하는 부패한 양반 계층을 비판하고, 사농공상의 직업적 차별 철폐를 주장했다. 또한, 중상주의에 입각하여 국가 주도의 상공업 육성과 적극적인 대외 무역을 강조했으나, 그의 시대를 앞서간 개혁안은 당시 성리학을 고수하던 보수 세력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대부분 실현되지 못했다. 그는 한(漢)을 중화(中華)로, 여진과 조선을 이(夷)로 파악하는 당시의 일반적인 세계관을 가졌으나[5], 현실적인 국익을 위해 청나라의 발전을 인정하고 배우려 했다는 점에서 실용적인 면모를 보였다.
2. 2. 1. 수학과 학문 연구
1766년 16세에 이관상의 서녀와 혼인하였고, 장인 이관상의 배려로 그의 집에서 생활하며 독서를 지원받았다. 이관상은 박제가가 서자임을 안타까워하며 그를 아꼈고, 자신의 서실에 출입하게 하여 성리학과 글을 가르쳤다.1769년 19세에는 박지원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본격적인 학문 연구의 길에 들어섰다. 박지원 문하에서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등 여러 실학자들과 교류하며 학문적 영향을 주고받았다. 특히 이덕무와는 평생의 벗으로 지냈다.[9] 신분 차별 없이 인재를 받아들인 박지원 아래에서 다양한 동료들을 만났으며, 홍대용과도 교류하였다.
그러나 서자라는 신분적 제약은 그에게 깊은 고민을 안겨주었다. 양반 교육을 받았음에도 사회적 차별을 겪으면서, 봉건제적 신분 제도에 비판적인 사상을 키워나갔다. 그는 "우리를 믿지 않고 소인이라 하니, 무한한 마음속 계책 누구에게 말해 볼까?"[10]라며 서얼로서 겪는 울분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그의 학문 방향에도 영향을 미쳤다. 남인 계열의 정약용과도 신분을 넘어 교류하며 학문적 시야를 넓혔다.
청년기에 박제가는 스승 박지원의 가르침 외에도 다양한 분야의 서적을 탐독하며 독자적인 학문 세계를 구축했다. 그는 유형원이나 이익 등이 주장한 중농사상과 토지 중심의 경제관을 비판하였다. 대신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청나라와의 교류 확대를 주장했으며, 상공업을 천시하는 사회 풍조를 비판하고 국가 주도의 상공업 진흥과 무역 장려를 역설했다. 이를 위해 도로 정비와 수레 사용의 보편화, 화폐 유통의 활성화를 중요한 과제로 제시했다.
1773년에는 음서를 통해 관직에 나아가려 했으나 서얼이라는 이유로 좌절되었다. 하지만 학문 연구를 꾸준히 이어가 1776년에는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와 함께 시집 《건연집(巾衍集)》을 간행했다. 이 시집은 청나라에까지 알려져 박제가를 조선의 시문 사대가(詩文四大家)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 청나라를 방문하여 직접 선진 문물과 기술, 경제 체제 등을 익혔으며, 정조 대에는 규장각 검서관으로 활동하며 학문 연구와 정책 제안에 힘썼다.
2. 2. 2. 관료 생활 초반
1778년(정조 2년), 29세의 박제가는 청나라에 파견되는 사은사 채제공의 수행원으로 따라가 이조원(李調元), 반정균(潘庭筠) 등 청나라 학자들과 교류하며 견문을 넓혔다. 귀국 직후 그는 실사구시(實事求是) 사상을 바탕으로 《북학의》 내외편 저술을 시작했다. 내편에서는 실생활에 필요한 도구와 시설의 개선 방안을 다루었고, 외편에서는 정치·사회 제도의 모순점을 지적하며 전반적인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다.박제가는 정조에게 부국강병을 위해 청나라와의 교역로를 열고 선진 문물과 기술을 받아들이며, 상업을 장려해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건의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주장은 당시 조정의 중신들로부터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라는 비판을 받으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779년(정조 3년) 3월, 정조는 서얼 출신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규장각에 검서관 직책을 신설하고, 박제가를 비롯해 이덕무, 유득공, 서이수(徐理修) 등을 임명했다. 이는 신분 차별 없이 능력 위주로 인재를 쓰고자 했던 정조의 의지를 보여주는 조치였다. 박제가가 규장각에서 숙직하며 밤늦도록 책을 읽는 모습에 감동한 정조가 직접 자신의 담요를 덮어주고 약식을 내리며 격려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이후 박제가는 규장각 내외직을 거치며 방대한 서적을 탐독하고, 정조의 명을 받아 많은 서적의 교정과 간행 작업에 참여했다.
1785년(정조 9년)에는 전설서별제(典設署別提)에 임명되었다. 그는 사직하려 했으나 정조의 만류로 관직에 나아갔고, 이 기회에 서자라는 신분 때문에 능력이 있어도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는 불합리함을 지적하며 서자들의 관직 진출을 허용(서얼 허통)해 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조는 박제가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1786년(정조 10년), 정조가 관리들에게 시정의 폐단을 바로잡을 방안(구폐책, 救弊策)을 올리도록 명하자, 박제가는 '병오소회'(丙午所懷)라는 제목의 상소를 통해 파격적인 개혁안을 제시했다.[11] 그는 이 상소에서 상공업 장려, 신분 차별 타파, 적극적인 해외 통상, 서양 선교사 초빙을 통한 서구 문물 수용, 과학 기술 교육 진흥 등 국가 부강과 민생 안정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들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시대를 앞서간 제안들은 당시 지배층, 특히 보수적인 노론 벽파 세력의 격렬한 반발에 부딪혀 묵살되었다. 오히려 이들은 박제가가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비난하며 공격했고, 이는 이후 정조가 추진한 문체반정(文體反正)의 빌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2. 2. 3. 외교 활동과 귀국
1778년 이후 4차례에 걸쳐 조선 연행사를 수행하여 청나라를 방문했다.[4] 1790년(정조 14년) 5월에는 건륭제의 팔순 잔치를 축하하는 진하사절의 일원으로 청나라에 갔다. 이때 진하사(進賀使) 황인점(黃仁點), 부사 서호수(徐浩修)를 수행했으며, 유득공 등과 동행했다.건륭제의 팔순을 축하하고 돌아오던 중, 원자(元子, 훗날 순조)의 탄생을 축하해 준 건륭제의 호의에 보답하라는 정조의 특별 명령을 받았다. 이에 정3품 군기시정(軍器寺正)에 임시로 임명되어 다시 연경으로 가서 임무를 수행했다. 1791년(정조 15년) 귀국한 후 정식으로 군기시정(軍器寺正)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겨울, 동지사(冬至使)가 파견되자 이를 수행하여 다시 연경을 방문했다.
박제가는 여러 차례 청나라를 방문하며 농업·목축·성곽·궁궐·배·기와 제작법 등 다양한 문물을 상세히 관찰했다. 이를 바탕으로 청나라의 발전된 문물을 배워 조선의 복리후생을 증진시켜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북학의》를 저술했고[4], 정조의 요청에 따라 청나라에서의 견문을 정리한 "병오소회"를 올렸다.
귀국 후 주요 관직 경력은 다음과 같다.
연도 | 내용 |
---|---|
1791년 | 군기시정(軍器寺正) 임명 |
1792년 | 부여현감 부임 |
1793년 | 승정원의 지시에 따라 문체에 대한 반성문인 자송문(自訟文)을 정조에게 올림 |
1794년 | 춘당대무과(春塘臺武科) 장원 급제 후 오위장(五衛將) 임명 |
1796년 | 양평현감(陽平縣監)을 거쳐 영평 현감(永平縣令)으로 부임 |
1798년 | 왕에게 올리기 위한 《북학의》 진소본(進疏本) 작성 |
2. 3. 생애 후반
(내용 없음)2. 3. 1. 저술, 작품 활동
박제가는 시, 그림, 글씨 등 여러 예술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특히 청나라 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대련(對聯) 형식을 수용하여 조선에 소개하는 등 문화 교류에 기여했다.[13]그의 글씨는 예서를 바탕으로 해서, 행서, 초서 등 다양한 서체를 구사했으며, 구양순체와 동기창체의 행서에도 능했다. 필체는 굳세고 활달하며 강건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서풍은 조선 말기 서예계와 추사 김정희의 추사체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13] 그림에서는 간결한 필치와 맑고 옅은 채색을 사용한 사의적(寫意的)인 문인화풍을 선보였다. 주로 조선의 풍경을 담은 산수화와 인물화를 그렸으며, 꿩, 새, 물고기, 노루 등 동물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는 데에도 뛰어났다.[13] 그의 시는 청나라 문인들에게도 인정받아, 생전인 1801년 무렵 시문집 『정유고략(貞유藁略)』이 중국에서 간행되기도 하였다.[13]
박제가는 예술가일 뿐만 아니라 실학 사상을 바탕으로 사회 개혁을 추구한 사상가이자 저술가였다. 1768년 박지원에게 사사했고, 1779년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하자 검서관으로 발탁되었다. 1778년 이후 네 차례 조선 연행사로 청나라를 방문하여 농업, 목축, 성곽, 궁궐, 배, 기와 제작 기술 등 선진 문물을 상세히 관찰했다.[4]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청나라의 기술과 제도를 배워 조선의 복리후생을 증진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대표 저서 『북학의(北學議)』를 저술했고[4], 정조의 요청에 따라 견문을 정리한 "병오소회"를 올렸다.[4]
1798년 부여현감 재직 시, 영조의 적전(籍田) 친경 60주년을 기념하여 정조가 농서를 구하자 『북학의』 내용을 요약한 '응지농정소(應旨農政疏)'와 '소진본북학의(疏進本北學議)'를 올렸다. 그는 저술을 통해 무위도식하는 양반을 비판하고, 사농공상의 차별 철폐와 무역 및 통상을 통한 국가 발전을 강조하는 중상주의를 주장했다. 또한 농업 기술 발전과 농기구 개량에도 힘썼다. 그러나 그의 개혁적인 주장은 당시 성리학 중심의 보수 세력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4] 그는 여러 저술을 남겼는데, 주요 저작 및 편찬물은 다음과 같다.
저서명 | 한자명 | 로마자 표기 | 비고 |
---|---|---|---|
북학의 | 北學議 | Bukhagui | 청나라 문물 학습과 중상주의 주장 | |||
貞否集 | Jeongyujip | 시문집 | |||
明農草稿 | Myeongnongchogo | 농업 관련 저술 | |||
韓客巾衍集 | Hangaekgeonyeonjip| | |||
詩稿 | Sigo | | |||
무예도보통지 | 武藝圖譜通志 | Muyedobotongji | 편찬 참여 | |||
貞유藁略 | Jeongyugoryak | 중국 간행 시문집 | |||
應旨農政疏 | Eungjinongjeongso | 농업 정책 건의서 | |||
疏進本北學議 | Sojinbonbukhagui | 농업 정책 건의서 |
이 외에도 『정영업』이라는 편찬물이 있으며, 『우명농척고』와 『균역집』 등에서 상업 체제 강화를 주장했다.
2. 3. 2. 문체반정
박제가는 기존의 틀에 박히고 고루한 시와 문장을 비판하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글쓰기를 추구했다. 당시 선비들이 두보나 당나라, 송나라 등의 시를 최고로 여기며 모방하는 것을 남이 한 말의 찌꺼기나 줍는 행태에 불과하다고 보았다.[10] 그는 자기 시대의 현실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진정한 문학이며, 이것이야말로 옛사람들의 글쓰기 정신에 다가가는 길이라고 주장했다.[10] '형암 선생 시집서'(炯菴先生 詩集序)에서는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 있는 것이 모두 시다"라며, 현실에서 보고 듣고 관찰한 모든 것이 좋은 글의 소재가 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그러나 박제가의 이러한 새로운 문체는 기득권 세력이었던 노론계 다른 학파로부터 형식을 지나치게 벗어났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에 정조는 문단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는 의도에서<0xE2><0x80><0x94>표면적으로는 문풍을 바로잡는다는 명분 아래<0xE2><0x80><0x94>박제가의 스승 박지원을 비롯한 북학파 인사들에게 문체반정을 선언하고, '순정한 옛 문체'로 돌아갈 것을 강요하며 반성문 제출을 지시했다.
박제가는 '비옥희음송인'(比屋希音頌引)에서 다음과 같이 비유를 들어 자신의 문체가 부당하게 억압받고 있음을 항변했다.
: 소금이 짜지 않고, 매실이 시지 않고, 겨자가 맵지 않고, 찻잎이 쓰지 않음을 책망하는 것은 정당합니다. 그런데 만약 소금, 매실, 겨자, 찻잎을 책망하여 너희들은 왜 기장이나 좁쌀과 같지 않느냐고 한다든지, 국과 포를 꾸짖어 너희는 왜 제사상 앞에 가지 않느냐고 한다면 그들이 뒤집어 쓴 죄는 실정을 모르는 것입니다.[10]
스승 박지원을 포함한 동료 문인들은 정조의 압력에 못 이겨 반성문을 제출했지만, 박제가는 '자송문'(自訟文)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리면서도 반성보다는 자신의 문학적 소신을 굽히지 않고 항변하는 태도를 보였다.[10] 이는 당대의 문장을 획일적인 기준으로 재단하려 했던 정조의 강력한 의지 앞에서도 자신의 문학적 입장을 지키려 했던 박제가의 비판적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2. 3. 3. 유배와 최후
10여 년간의 검서관 생활은 그의 시력을 크게 악화시켰다. 밤늦게까지 책을 읽고 어두운 방에서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은 것이 원인이었다. 만년에 그는 안경을 착용했지만, 결국 왼쪽 눈의 시력을 잃어 안경조차 무용지물이 되었고, 몇 년 후에는 오른쪽 눈마저 희미해졌다. 개인적으로는 시집간 둘째 딸이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겪기도 했다. 그는 관직 생활 틈틈이 서실을 열어 문인들에게 글과 그림을 가르쳤는데, 추사 김정희 역시 그의 문하에서 수학했다.1800년 정조가 승하하자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소론, 남인 계열 및 실학파 학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정치적 격변 속에서 박제가는 기존의 소북 당적을 버리고 노론 북학파로 입장을 바꾸었다. 1801년, 네 번째로 청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온 직후, 그는 사돈이었던 윤가기(尹可基)가 주도한 흉서 사건에 연루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 실권자였던 정순왕후와 노론의 핵심 인물 심환지를 비방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10], 박제가의 청나라 방문을 후원했던 윤행임 또한 연루되면서 박제가 역시 윤가기, 윤행임과 한 패로 몰리게 되었다. 결국 그는 1801년 9월 함경북도 종성으로 유배되었다.
1805년에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그 이후 박제가의 구체적인 행적이나 사망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종성 유배에서 돌아온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주변 지인들의 이야기만 단편적으로 전해질 뿐, 명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3. 사상과 신념
박제가는 서얼이라는 신분적 한계와 타협하지 않는 성격으로 인해 당시 조선의 주류 사회로부터 소외되었다.[12] 그가 속했던 북학파 역시 노론 내 비주류로 여겨졌으며, 그의 급진적인 주장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허울뿐인 양반·학자·선비 등 편협한 지식인 집단을 비판했으며,[12] 상업을 천시하고 공리공담에 빠진 성리학적 사회 풍조와 주자학적 사상, 풍수도참설 등을 강하게 비판했다.
특히 존명(尊明) 사대주의자들이 내세운 북벌론의 비현실성을 지적하고, 오히려 청나라의 발전된 문물과 서양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조선의 현실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그의 대표적인 저서 『북학의』에 잘 나타나 있으며, 수레와 선박 이용을 통한 상공업 진흥과 해외 무역 확대, 신분제 폐지 등을 핵심 내용으로 한다.[2][4] 그는 사농공상의 차별적 서열을 개혁하고 무역과 통상을 통해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자는 중상주의 사상을 펼쳤으나, 보수 세력의 반대에 부딪혔다.
1779년 정조에 의해 규장각 검서관으로 발탁되어 개혁의 기회를 얻는 듯했으나, 그의 이상을 실현하기에는 현실적인 한계가 많았고 정조 사후에는 유배 생활을 겪으며 뜻을 온전히 펼치지 못했다.[12] 그럼에도 박제가는 사회적 차별과 편견에 굴하지 않고, "고독하고 고매한 사람만을 골라서 남달리 친하게 사귀고, 권세 많고 부유한 사람은 일부러 더 멀리하며"[10] 자신의 소신을 지키며 직설과 독설로 당대 사회의 모순과 인습에 맞섰다.[10]
3. 1. 인재 등용론
박제가는 과거 제도가 본래의 목적을 잃었다고 비판했다.[1] 그는 과거 제도가 학문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선발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점차 사대부나 고위 관료, 힘 있는 가문들이 돈과 권력을 이용해 관직을 대물림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고 지적했다.[1] 박제가는 이러한 문벌 중심의 관직 세습이 사회적 생산과 과학기술 발전을 가로막는다고 보았다.[1]따라서 그는 실제 능력과 쓰임새에 맞게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1] 조광조가 실시했던 현량과를 훌륭한 대안으로 여기기도 했으며,[1] 신분이 낮더라도 재능 있는 인재를 추천하는 제도를 도입하자고 주장했다.[1] 박제가가 근본적으로 반대한 것은 과거 제도 그 자체가 아니라, 과거라는 이름 아래 행해지는 불공정한 관직 세습이었다.[1]
3. 2. 상업 진흥론
상업과 무역의 장려와 개선을 주장했다. 그는 청나라를 오가며 아랍, 베트남 등의 무역상들을 통해 신문물을 접하면서 상업과 무역이 새로운 문물 전파와 문화 교류의 중요한 방법임을 인식했다.[2] 따라서 농업 중심 사회에서 벗어나 상업에서 사회 발전의 계기를 찾아야 한다고 보았으며, 당시 지배층이 상업과 무역을 천시하는 것을 비판하며 국가 경제 개선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실학자들조차 미덕으로 여겼던 봉건적인 절검사상을 배격해야 상업이 발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무조건적인 근검절약만이 능사가 아니며, 오히려 소비가 재생산을 자극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그의 저서 ''북학의'' 내편 시정(市井)조에서 '생산과 소비의 유기적 관계'를 설명하며 상업과 무역의 중요성을 강조한 데서 잘 드러난다. 그의 경제 사상은 상업 발달이 농업과 수공업의 동반 성장을 이끈다는 중상주의적 관점에 기반했다.
정조에게 화폐 유통의 중요성을 여러 차례 건의하였다. 화폐는 상업과 무역을 활발하게 하는 핵심 수단이며, 이를 통해 국가 경제력을 증대시켜 이용후생(利用厚生)을 도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상인과 무역상에 대한 지나친 천대와 편견을 없애고, 수공업자에 대한 국가적 수탈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대량 생산 체제를 구축하고, 농업 기술 개량을 통해 생산성을 높이며 상업적 농업을 실시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국가 경제 강화를 위해 해외 통상을 통한 재화 증식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밀무역을 근절하기 위한 방안으로 국가가 상업과 무역에 대한 제재와 천시를 줄여야 하며, 이를 통해 밀무역을 양성화하고 정상적인 외국 무역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개성, 인천 및 충청도·전라도의 서산, 태안, 장진, 은진, 강경, 여산 등 강가를 낀 지역에 무역항을 열어 중국 남부 및 산둥 지방과 통상을 확대하고, 국력이 성장하면 일본, 안남(현 베트남), 위구르 등으로 무역 대상을 넓히자고 제안했다. 그는 조선 후기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을 현실로 인정하고, 이를 기반으로 상업·수공업·농업 전반의 생산력 발전을 추진하여 국가 경제 체제를 재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부(國富)를 창출하기 위한 방안으로 상공업 진흥론과 함께 농업 진흥론을 제시하였다. 상공업 진흥을 위한 구체적 방안으로는 교통기관 발달(용거론(用車論)), 화폐의 질 개선(악화주조 금지), 밀무역 양성화 및 무역 장려, 국내 시장 확보 등을 제시했다. 동시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국가가 금과 은을 비축할 것을 정조에게 건의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조선 국내에서 생산되는 금과 은의 해외 유출과 중국 상품의 무분별한 유입을 금지할 것을 주장했으나, 당시 조공을 바쳐야 했던 현실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상업 유통이 활발해지면 농산물 판매가 원활해지고, 수공업 발달로 낙후된 농기구가 개량되어 농업 경영의 합리화도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그의 상업 진흥책은 상업적 이익 추구를 천시하던 당시 사대부들의 보수적인 사고방식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는 상공업 육성에 장애가 되는 봉건적인 문물 제도와 과거 제도의 타파까지 주장했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 ''북학의''에서는 수레 사용을 통한 국내 상업 발전과 강력한 선박 건조를 통한 적극적인 해외 무역 진출을 역설했다. 또한 청나라의 선진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현실을 개선해야 하며, 신분제 폐지와 상공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조선의 자연환경을 적극 활용하여 해상 무역을 발전시킨다면 국력이 강해지고 백성의 생활이 안정될 것"이라고 말했다.[2] 그의 다른 저술인 ''우명농척고''와 ''균역집'' 등에서도 상업 체제 강화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1779년 정조에 의해 규장각 검서관으로 발탁된 이후, 여러 차례 조선 연행사로 중국을 방문하며 얻은 견문을 바탕으로 ''북학의''를 저술했고[4], '병오소회'를 통해 자신의 개혁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무위도식하는 부패한 양반을 비판하고 사농공상의 차별 철폐, 무역을 통한 부국강병을 주장하는 그의 중상주의 사상은 당시 보수 세력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실현되지 못했다.
3. 3. 폐쇄성과 배타성 비판
박제가는 조선 사회가 상당히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사회라고 지적했다. 그는 "나와 다르다고 해서 무리지어 비웃고, 또 덩달아 이를 업신여긴다. 좁은 소견으로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엿보고, 틀에 박힌 안목으로 끝없는 변화를 논하곤 한다.[12]"고 한탄하며,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는 외부의 우수한 문물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보았다. 그는 중국 문명 외에도 서방에 더 우수한 문명이 존재함을 알렸으나, 당시 사회는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이러한 박제가의 비판적 시각은 그가 처한 현실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는 서자라는 신분적 한계 때문에 어릴 때부터 차별과 무시를 당했으며,[12] 그가 속했던 북학파 역시 노론 내 비주류로 취급받았다. 그의 화폐 유통론이나 국가 주도의 무역 장려론은 상업을 천시하던 조선의 성리학자들에게 불순한 사상이나 이익을 좇는 행위로 여겨졌다. 또한 그의 집안이 소북에서 노론으로 전향한 배경 역시 문제시되었다.
정조에 의해 발탁되기도 했으나, 이상을 펼치기 어려운 현실적 한계와 정조 사후의 유배 생활 등으로 인해 그의 개혁적 주장은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12] 그럼에도 박제가는 사회적 차별과 편견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권세 있는 이들을 멀리하며 자신의 소신을 지키려 했다.[10] 그는 당시 사회의 단단한 습속의 벽에 직설과 독설로 맞섰다.[10]
박제가는 저서 『북학의』를 통해 폐쇄성을 극복하고 사회를 발전시킬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그는 수레를 활용하여 국내 상업을 활성화하고, 강력한 선박을 건조하여 해외 무역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청나라의 발전된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현실을 개선하고, 신분제를 폐지하며 상공업의 중요성을 강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특히 삼면이 바다인 조선의 지리적 이점을 활용한 해상 무역 발전이 국력 신장과 민생 안정의 길이라고 보았다.[2]
3. 4. 허례허식 비판
그는 자신의 저서 '북학의'에서 대부분의 백성이 아침저녁 먹을 거리조차 없이 생계를 꾸려가며, “열 가구가 사는 마을에서 하루 두 끼를 해결하는 자가 몇 집 되지 않는다”고 당시의 참담한 현실을 보고하였다.[14]박제가가 바란 이상적인 사회는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문화적으로도 발전한 사회였다.[10] 그는 재화의 유통이 활발하고 사람들이 어느 정도 사치를 누릴 수 있으며, 문화 수준 또한 높은 사회를 지향했다. 특히 문화예술이나 사치품을 논할 때 도덕주의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것을 비판했다.[10] 돈에는 도덕이 개입될 여지가 없으며, 부도덕한 사람이라고 해서 돈을 벌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또한 재물을 탐내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당시의 풍조를 위선이라고 보았다.
나아가 조정에서 도덕이나 인의예지, 인륜과 같은 명분을 내세워 춘화나 야담[15] 등을 단속하는 것 역시 잘못이라고 비판했다. 박제가는 예술의 아름다움과 사치스러움이야말로 재화와 물품이 끊임없이 돌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했다.[10] 향락을 즐기기 위해 돈을 쓰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며, 모든 백성이 선비처럼 고결하게 살아야 할 이유는 없다고 주장했다. 소인은 소인답게 살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이는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을 이상적으로 여겼던 전통적인 유학적 가치관과 결별하는 생각이었다.[10] 그는 당시 지배층이 위선적인 농본정책으로 백성들을 극심한 가난 속에 몰아넣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인의(仁義)가 강물처럼 흐르는 요순(堯舜)의 시대"를 다시 열겠다며 허장성세를 부리고 있다고 지적했다.[14]
3. 5. 북벌론 비판과 북학론
박제가는 당시 조선 사회의 지배적 이념이었던 주자학의 공리공담과 풍수도참설 등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특히, 존명(尊明) 사대주의자들이 내세운 북벌론에 대해, 당시 조선의 국력과 경제적, 군사적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비현실적인 주장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북벌의 대상인 청나라가 더 이상 오랑캐가 아니라 서양의 과학 기술과 새로운 학문으로 발전한 문명국임을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나라를 통해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자는 그의 제안은 당시 조선 지식인 사회의 낡은 사고방식에 큰 충격을 준 혁명적인 발상이었다.[8] 그러나 이러한 북벌론 비판은 노론뿐만 아니라 남인 강경파로부터도 반감을 사는 요인이 되었다.1778년 이후 네 차례에 걸쳐 조선 연행사의 일원으로 청나라를 방문한 경험은 박제가의 사상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청나라 방문을 통해 청이 단순한 오랑캐가 아니며, 조선의 빈곤을 극복하고 낡은 관습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청의 선진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연행에서 돌아온 직후 『북학의』를 저술했다.
박제가는 박지원의 제자로서, 조선 후기 실학을 대표하는 학자 중 한 명이다. 1768년 박지원에게 배우기 시작했으며, 1779년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하자 검서관으로 발탁되어 활동했다. 청나라 연행 중에는 농업, 목축, 성곽, 궁궐, 배, 기와 제작 기술 등 다양한 분야를 상세히 관찰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북학의』에서 청나라 문물 수용을 통한 복리후생 증진 방안을 제시했다.[4] 또한 정조의 요청으로 자신의 견문을 정리한 "병오소회"를 올리기도 했다.
『북학의』에서 박제가는 수레를 활용하여 국내 상업을 활성화하고, 튼튼한 선박을 건조하여 해외 무역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청나라 문화를 적극 수용하여 현실 문제를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봉건적인 신분 제도의 폐지와 상공업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특히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조선의 자연환경을 적극 활용하여 해상 무역을 발전시킨다면 국력이 강해지고 백성의 생활이 안정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해상 무역의 중요성을 강조했다.[2] 그는 무위도식하는 부패한 양반을 비판하고, 사농공상의 차별적 서열을 개혁하며, 무역과 통상을 통해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자는 중상주의 사상을 펼쳤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개혁안은 당시 보수 세력의 반대에 부딪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편, 박제가는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 속에서 한(漢)을 중화 문명의 중심으로 인식하고, 여진과 조선을 그 주변의 '이(夷)'로 파악하는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5]
3. 6. 중국어 사용론
박제가는 당시 공리공담에 치우친 주자학이나 풍수도참설 등을 비판했다.[10] 또한 명나라를 숭상하는 사대주의자들이 내세운 북벌론의 비현실성을 지적하며, 청나라를 통해 전래된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과거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봉건적인 신분제에도 반대했다.조선이 빠르게 문명국으로 발전하기 위한 방안으로, 박제가는 언문일치가 이루어진 중국어(북경어)를 사용하자고 제안했다.[10] 그는 중국 문명을 동경하는 사대부들이 중국어를 제2의 국어로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명 세계를 향한 박제가의 열망은 한국어를 버리고 중국어를 공용어로 삼자는 주장으로까지 나아갔다.[10] 이러한 급진적인 주장은 북벌론을 절대적인 이념으로 삼았던 당시 선비들로부터 '당괴'(唐魁) 혹은 '당벽'(唐癖)이라는 비난을 받았다.[10]
그의 저서 『북학의』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한자는 문자의 근본이다. 중국에서는 뜻이 먼저 있고 글자가 생겨났으므로, 글자를 몰라도 뜻을 알 수 있다. 외국인이 한자를 존중하여 중국 책만 기꺼이 읽어도 どうしても隙間が生じてしまう|도-시테모 스키마가 쇼-지테 시마우일본어(어쩔 수 없이 틈이 생겨 버린다). 말이 막처럼 되어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중국에 가까우며, 음성도 거의 같으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다 함께 본래의 말을 버리는 것도 결코 무리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 비로소 야만인이라고 불리지 않을 것이다.[6][7]
:— 『북학의』
3. 7. 서양 기술 도입론
박제가는 당시 사회의 주류였던 주자학적 관념론이나 풍수도참설 등을 현실과 동떨어진 공리공담으로 비판하였다. 또한 명나라를 숭상하며 청나라를 배척하는 북벌론의 비현실성을 지적하며, 오히려 청나라를 통해 전래된 서양의 발달된 문물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낡은 과거 제도의 폐단을 지적하고 봉건적인 신분 질서에도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조선 사회가 직면한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박제가는 중국과의 적극적인 통상 교류와 서양의 신기술 도입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그는 서양의 기술을 배우기 위한 방안으로, 우선 무역과 상업 활동을 활발히 하여 서양인들이 자연스럽게 조선에 들어와 교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786년 1월 22일에는 조정 회의에 참석하여, 중국에 사신을 보내 "일본, 유구, 안남, 서양 등 여러 나라가 중국 남부 지방에서 교역하고 있으니, 우리도 이들처럼 뱃길을 이용해 통상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자고 구체적으로 건의하기도 했다.[8]
나아가 서양의 기술 전문가들을 직접 조선으로 초빙하여 천문 관측법, 농업 및 양잠 기술(農蠶), 의약 제조법, 궁궐·성곽·다리 건설 기술, 구리나 옥을 캐는 채굴법, 유리 제조법, 화포 설치 및 운용법, 수레 제작 및 통행법, 선박 건조 기술 등 다양한 선진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8] 이는 단순히 서양 문물을 모방하는 것을 넘어, 조선의 현실에 필요한 실용적인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발전시키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이 외에도 종두법의 연구와 보급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국가 경제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물자 유통과 물가 안정이 중요하다고 보고, 이를 위해 수레의 보급과 활용을 적극 주장하였다. 또한 삼면이 바다인 조선의 지리적 이점을 살려 선박 이용을 늘리고 해상 무역을 발전시켜야 국력을 키우고 백성의 삶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2] 병기 개량, 농사법 개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선진 기술 도입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더 나아가 경제 구조의 근본적인 개혁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나라에 놀고먹는 자가 늘어나는 것은 양반 사족들이 하는 일 없이 늘어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며, 이들 사족들도 물류와 상업 활동에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8] 이는 사농공상으로 대표되는 엄격한 신분 질서에 도전하고, 상공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중상주의적 사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박제가는 1778년 이후 네 차례에 걸쳐 조선 연행사의 일원으로 중국을 방문하여 농업, 목축, 건축, 선박, 기와 제작 등 다양한 분야의 발전된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중국(청나라)의 문물을 배워 조선의 복리후생을 증진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북학의』를 저술했다.[4] 또한 정조의 명에 따라 자신의 견문을 정리한 "병오소회"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박제가의 이러한 혁신적인 주장과 제안들은 당시 사회의 기득권을 쥐고 있던 보수적인 세력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들은 서양인을 '귀신'이나 '괴물'처럼 여기며 두려워했고, 박제가의 주장을 세상을 어지럽히는 '요망한 사술'로 치부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3. 8. 농정 개혁론
박제가는 당시 주자학적 공리공담이나 풍수도참설 등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존명 사대주의자들이 내세운 북벌론의 비현실성을 지적하며 청나라를 통해 전래된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과거 제도의 폐단을 지적하고 봉건적인 신분 제도를 반대했다.박제가는 이익이나 유형원 등이 주장한 중농주의 사상에는 비판적 입장을 취하며 독자적인 농업계획론을 제시했다. 그는 국가 전체의 부와 경제 구조 안에서 농업의 역할을 규정하고, 경제 시스템 전반의 원활한 운영이 농업 경제의 안정과 직결된다고 보았다. 농기구 개량, 국가 주도의 농업 및 농지 개량 정책 등을 통해 농업 경영을 합리화하고 생산성을 높이면 국가 재정과 경제 질서 전반의 안정을 이룰 수 있다고 판단했다. 특히 다른 산업과의 연계를 강조하여, 상업과 수공업의 발달 및 유통 활성화가 이루어져야 농기구와 농업 시설의 개량이 촉진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농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상업이나 수공업 분야의 발전도 함께 이루어져야 함을 역설했다.
농법 개량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합리적인 농경을 위해 경작지 구획 방식인 전무(田畝) 제도를 개선하고, 비료 효과를 높이기 위해 분뇨를 효율적으로 모으는 취분법(取糞法)을 개량하며, 노동력 절감을 위해 농기구를 개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농민들이 농기구를 저렴하고 쉽게 교체할 수 있어야 함을 강조했다. 그는 시장 활성화가 농기구 개량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시장이 활성화되면 농산물 판매가 원활해지고, 상거래를 통해 새로운 농기구가 유입되며, 수공업 발달로 낙후된 조선의 농기구를 개선하여 농업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대부 계층 역시 노동과 농업에 직접 참여하고 상업 활동에도 종사하여 일하지 않는 인구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토지를 주로 소유했던 지주 계층이 사대부였으므로, 이들의 농업 참여는 단순히 노동력 확보 차원을 넘어 농업 경영의 합리화를 통해 농업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비록 '농자천하지대본'을 내세운 조선 사회에서 유생에게 농사를 권하는 그의 주장에 대해 표면적인 반발은 적었으나, 사대부들은 내심 불편하게 여겼다. 그러나 박제가는 국가가 토지를 강제로 매수하거나 몰수하는 방식에는 반대했다. 그는 사대부의 과도한 토지 점유를 비판하기보다, 경영 방식과 기술의 개선 및 집약화를 통해 수익을 늘리는 것, 즉 소규모 농지에서 최대의 수익을 올리는 것이 더 시급한 과제라고 보았다. 이러한 생각을 실현하기 위해 정조에게 여러 차례 둔전(屯田) 설치를 건의하기도 했다.
성리학적 질서가 강했던 조선 사회에서 박제가는 실학 사상을 바탕으로 과학 기술과 상업을 통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자 노력했다. 그의 농업 관련 사상은 『우명농척고』 등의 저술에 담겨 있으며, 1778년 이후 네 차례에 걸친 조선 연행사 수행 경험을 바탕으로 중국의 선진 문물(농업, 목축, 성곽, 궁궐, 배, 기와 제작법 등)을 상세히 관찰하고 이를 조선의 복리후생 증진에 활용할 것을 주장한 『북학의』를 저술했다.[4] 정조의 요청으로 이러한 견문을 정리하여 "병오소회"를 올리기도 했다. 그는 무위도식하는 부패한 양반을 비판하고, 사농공상의 서열 개혁과 무역 및 통상을 통한 국가 부강을 주장하는 중상주의를 내세웠으나, 보수 세력의 반대에 부딪혀 그의 주장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3. 9. 청렴 무용론
박제가는 조선의 선비들이 가난한 것을 당연시하거나 미덕으로 여기는 세태를 비판하며, 청렴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위선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권력에 아부하기 싫어 가난하게 살았을 뿐, 가난 자체를 편안하게 여긴 것은 아니었다고 술회했다.[10] 젊은 시절, 장인 이관상이 검소하게 살라고 충고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반박하며 물질적 풍요와 사회적 인정에 대한 솔직한 욕구를 드러냈다.[10]: 침향목과 단목으로 저를 조각하고 색실로 저를 수놓아 열 겹으로 싸서 간직하여 길이 후세에 전해 사람마다 보게 하고 싶습니다. 오늘날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집에서 소쿠리 밥에 표주박 물을 마시며 해진 솜옷을 입고 살면서도 좋고 나쁜 것을 알지 못하는 듯 지내는 것이 어찌 본마음이겠습니까?[10]
박제가는 가난이 도덕적으로 고결한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정신을 황폐하게 만드는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有恆產 有恆心 無恆產 無恆心|유항산 유항심 무항산 무항심중국어이라 하여, 안정적인 생활 기반(항산)이 있어야 바른 마음(항심)을 유지할 수 있듯이,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고 주장했다. 또한 풍수지리설을 비판하며 사람들의 생각과 사회 기풍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지리적 요인이 아니라 사회적 환경이라고 보았다. 놀기만 좋아하고 일하기 싫어하는 양반 사대부의 나태한 기풍 역시 이러한 잘못된 사회 환경 때문에 조성된 것이라고 지적했다.[10]
: (같은 벌레라고 하더라도) 꽃에서 자란 벌레는 그 날개나 더듬이조차도 향기가 나지만 똥구덩이에서 자란 벌레는 구물거리며 더러운 것이 많은 법이다. 사물도 본래가 이러하거니와 사람이야 당연히 그러하다. 빛나고 화려한 여건에서 성장한 사람은 먼지 구덕의 누추한 처지에서 헤어나지 못한 자들과는 반드시 다른 점이 있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우리나라 백성의 더듬이와 날개에서 향기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10]
따라서 그는 청렴과 청빈함을 강조하는 것을 현실을 외면한 허위의식이라고 비판했다. 박제가에게 안빈낙도(安貧樂道)는 스스로를 속이는 공허한 구호에 불과했다.[10] 나아가 그는 소비를 샘물에 비유하며, 무조건적인 절약보다는 재화의 유통과 적절한 소비가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데 필수적이라고 역설했다. 즉, 돈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상업 활동을 장려해야만 국가 경제가 발전할 수 있다는 실용적인 주장을 펼쳤다.
3. 10. 국수주의 비판
박제가는 당시 주자학에서 현실과 동떨어진 논쟁만 벌이는 것이나 풍수도참설 같은 비합리적인 믿음을 비판적으로 보았다. 또한 명나라를 숭상하는 사대주의자들이 내세운 북벌론이 현실성이 부족하다고 지적하는 한편, 청나라를 통해 전래된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과거 제도의 폐단과 봉건적인 신분 제도의 문제점 역시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그는 늘 "언제까지 우리 것만 좋다고 주장할 것인가?[12]"라고 반문하며, 맹목적인 애국심과 자부심, 즉 국수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박제가는 당시 사회가 우리 문화나 것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자랑스러워하는 습관적인 태도와 맹목적인 자부심을 문제 삼았다.[12] 그는 형식적인 구호에 그치는 북벌론을 비판하며 실제로는 북벌을 위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음을 지적했다. 또한, 과거 오랑캐로 여겨졌던 청나라가 서구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 중국 문화에 흡수되어 변화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박제가는 조선의 현실이 과연 맹목적으로 애국심을 가질 만한 상황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사회 상류층조차 끼니를 거르기 일쑤고, 선비들은 종이가 없어 책을 쓰지 못하며, 소 한 마리 없는 농민이 대부분인 나라 형편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비효율적인 농업 중심 정책과 극단적인 국수주의를 고수하고 있다[12]'고 지적했다. 이러한 현실이 '소비와 욕망을 억누르는' 비극적인 사회를 만들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주장은 세상은 물론 주변 사람들조차 설득하지 못했으며[12], 도리어 일부 사람들은 그를 역심을 품은 위험한 인물로 취급하며 꺼리기도 했다.
3. 11. 인습에 대한 저항
박제가는 서자라는 신분적 한계와 타협하지 않는 성격 때문에 주류 사회에서 소외되었다.[12] 그는 허울뿐인 조선의 양반, 학자, 선비 등 편협한 지식인 집단을 비판했지만, 기득권의 벽을 넘기 어려웠다.[12] 그가 속한 북학파는 노론 내에서도 비주류였으며, 그의 화폐 유통론과 국가 주도의 무역 장려론은 상업을 천시하던 당시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이를 불순한 사상이나 이익을 좇는 행위로 여겨 폄하했다. 또한 그의 집안이 본래 소북이었다가 그의 대에 노론으로 당적을 바꾼 점도 논란거리가 되었다.정조에 의해 발탁되기도 했으나, 이상을 펼치기 어려운 현실적 한계에 부딪혔고 정조 사후에는 유배 생활을 겪기도 했다.[12] 그럼에도 박제가는 사회적 차별에 굴하지 않고 "고독하고 고매한 사람만을 골라서 남달리 친하게 사귀고, 권세 많고 부유한 사람은 일부러 더 멀리하며" 가난하게 살았다.[10] 그는 당시 사회의 견고한 인습의 벽에 직설과 독설로 맞섰다.[10]
박제가는 공리공담에 치우친 주자학적 사상과 풍수도참설 등을 비판적으로 보았다. 또한 명나라를 숭상하는(존명사대) 사대주의자들이 주장한 북벌론의 비현실성을 지적하는 한편, 청나라를 통해 전래된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다. 과거 제도의 폐단을 지적하는 한편 봉건적인 신분제에도 반대했다. 그는 시대와 불화하며 인습에 저항하는 길을 선택했으며,[10] 조선 사회를 위선과 가식이 넘치는 사회라고 비판했다.
그는 당시 사회가 '아교로 붙이고 옻칠을 한 눈꺼풀'로 눈과 귀를 막고 현실을 외면한다고 비판하며, 이러한 폐쇄적인 태도를 버리고 '심지를 열고 이목을 넓히라'고 외쳤다.[10] 박제가는 형식만 남은 관습이 인간의 본성을 무시하고 자연스러운 생활과 생각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자 짐이라고 여겼다.
4. 저서와 작품
박제가는 시, 그림, 글씨 등 여러 예술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는 청나라 학자들과 활발히 교류하며 그들의 문물을 받아들였고, 특히 대련 형식(對聯形式)을 조선에 소개하는 데 기여했다.[13] 그의 예술적 성취는 조선 말기 서풍과 추사체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다.[13]
그는 실학 사상을 바탕으로 여러 중요한 저술을 남겼는데, 대표적으로 청나라의 문물을 소개하고 조선의 개혁 방향을 제시한 《북학의》(北學議)가 있다. 이를 통해 상업과 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사회 개혁을 주장했다. 또한 1798년 정조의 명으로 농업 관련 정책을 제안하는 글('응지농정소', '소진본북학의')을 올리기도 했으며, 그의 저술 활동은 과학 기술 발전과 상업 진흥을 통해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고자 하는 개혁적인 시도였다. 그의 시문집인 『정유고략』(貞<0xEC><0x9C><0xA0>藁略)은 1801년 무렵 중국에서 간행될 정도로 문학적 성취를 인정받았다.
박제가의 저술과 예술 활동은 조선 후기 사회의 변화를 모색했던 그의 실학자적 면모를 잘 보여준다. 구체적인 저서 목록과 설명, 그리고 그림과 글씨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하위 문단에서 확인할 수 있다.
4. 1. 주요 저서
박제가는 실학 사상을 바탕으로 조선 사회의 발전을 위한 다양한 저술 활동을 펼쳤다. 그의 저작들은 당시 지배 이념이었던 성리학적 질서 속에서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과학 기술을 발전시키고 상업을 진흥시켜 부국강병을 이루고자 하는 개혁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저서명 (한자) | 공저자 | 비고 |
---|---|---|
북학의 (北學議) | 청나라의 발전된 문물과 제도를 소개하고, 이를 본받아 조선의 부국강병을 이룰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한 대표 저작이다. 특히 수레와 선박의 이용, 상업과 무역의 장려, 소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
정유집 (貞蕤集) | 박제가의 시와 문장을 모은 문집이다. | |
정유각집 (貞蕤閣集) | ||
명농초고 (明農草稿) | 농업 기술의 개선과 생산력 증대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농업 기계 개량 등 실용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 |
무예도보통지 (武藝圖譜通志) | 백동수, 이덕무 | 정조의 명으로 편찬된 조선 시대의 공식 종합 무예 서적으로, 박제가는 편찬 작업에 참여했다. |
한객건연집 (韓客巾衍集) | 연행사로 중국을 방문했을 때 교류했던 중국 학자들과 주고받은 시문을 모은 책이다. | |
정유시고 (貞否詩稿) | 시고(詩稿) 모음이다. |
이러한 저술 활동은 조선 후기 사회가 직면한 문제점을 실증적으로 분석하고 실질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려는 실학 정신의 발현이었다. 특히 《북학의》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을 강조하며 당대 지식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4. 2. 그림
박제가는 시, 그림, 글씨에 모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림에서는 간결한 필치와 맑고 옅은 채색을 사용하여 운치와 문기(文氣)가 느껴지는 사의적(寫意的)인 문인화풍의 산수화와 인물화를 잘 그렸다. 그의 그림은 사실적인 묘사를 특징으로 하며, 중국의 산수화보다는 조선의 풍경을 주로 담았다. 또한 꿩, 새, 물고기, 노루 등 동물을 생동감 있고 정밀하게 묘사하는 데에도 능했다.[13] 그는 서실을 열어 학문뿐만 아니라 그림 제자들도 다수 배출했다.글씨에도 능하여 예서풍을 바탕으로 해서, 행서, 초서 등 다양한 서체를 구사했으며, 특히 구양순(歐陽詢)과 동기창(董其昌)체의 행서를 잘 썼다. 그의 필적은 굳세고 활달하며 강건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그의 서예 실력은 추사 김정희에게도 영향을 미쳐 조선 말기 서풍과 추사체 형성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청나라 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대련 형식(對聯形式)을 조선에 소개하기도 했다.[13]
주요 작품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목우도(牧牛圖)
- 의암 관수도(倚巖 觀水圖)
- 어락도(魚樂圖)
- 야치도(野稚圖)
- 대련글씨
5. 평가
박제가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통찰력과 판단력, 넓은 학식과 예술적 재능을 지녔다. 그러나 서얼이라는 신분적 한계와 타협하지 않는 성격 탓에 주류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무시당했다. 그는 형식과 허울에 얽매인 당시 조선의 지배층을 비판했지만, 기득권의 견고한 벽을 넘어서지는 못했다.[12]
서자라는 신분 때문에 겪는 멸시에 더해, 그가 속했던 북학파는 노론 내에서도 비주류로 취급받았다. 그의 화폐 유통 및 국가 주도 무역 장려 주장은 상업을 천시하던 성리학자들에게 불순한 사상이나 사적인 이익 추구로 치부되었다. 또한 그의 집안이 본래 소북이었다가 그의 대에 이르러 노론으로 당파를 바꾼 점도 논란거리가 되었다.
젊은 시절 겪은 심한 차별과 냉대는 그에게 깊은 실망감을 안겼고 자신의 포부를 펼칠 기회를 얻기 어렵게 만들었다. 정조에 의해 등용되기도 했으나, 이상을 실현하기에는 현실적인 제약이 많았고, 정조 사후에는 결국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했다.[12]
하지만 박제가는 이러한 사회적 차별에 굴하지 않았다. 그는 "고독하고 고매한 사람만을 골라서 남달리 친하게 사귀고, 권세 많고 부유한 사람은 일부러 더 멀리하며"[10] 가난한 삶을 택했다. 그는 당시 사회의 견고한 관습에 맞서 직설적이고 때로는 독설에 가까운 비판으로 저항했다.[10]
학문적으로는 실생활과 국가 경영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인 지식을 강조했으며, 이를 위해 발전된 외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북학파의 사상을 집대성한 대표적인 실학자로 평가받는다. 청나라의 문인 이조원(李調元)은 박제가의 문집 서문에서 그의 인물됨을 평하며 "몸집은 작지만 굳세고 날카로우며 재치있는 생각이 풍부하다. 그의 문장은 별빛처럼 찬란하고, 조개가 뿜어내는 신기루 같으며, 용궁의 물과 같다"[8]고 높이 평가했다. '명분에 얽매이지 않고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에 솔직했던' 인물이라는 평가도 있다.[10]
박제가는 당파 싸움이 극심했던 정치 현실에서 벗어나 모든 백성이 잘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고자 고민하고 꿈꿨다. 비록 그의 이상은 생전에 완전히 실현되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누구보다 예리하게 현실을 비판하고 미래를 내다본 선각자[12]로 기억된다. 변화가 요원해 보이던 시대에도 개혁의 목소리를 높이며 치열하게 살았던 선구자[12]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조선 정부가 성리학적 이념을 중시했음에도 박제가는 자신의 소신을 펼치며 조선 사회의 과학 기술 발전과 상업 진흥을 통한 부국강병을 추구했다.
그는 『정영업』을 비롯한 여러 저술을 남겼으며, 특히 『우명농척고』와 『균역집』에서는 상업 시스템 강화를 주장했다. 당시 성리학적 질서에 반하는 실학 사상을 추구한 것은 매우 혁신적인 행보였다. 또한 농업 기술 발전에도 관심을 기울여 식물 재배를 위한 농기구를 개량하는 등 실질적인 개선을 시도하기도 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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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lites and political power in Sout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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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뉴스
[실학, 조선의 재건을 꿈꾸다] 20. 북학으로 조선을 재건하자_초정 박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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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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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武藝圖譜通志』成。武藝諸譜所載, 棍棒、籐牌、狼筅、長槍、鎲鈀、雙手刀, 六技出於戚繼光《紀効新書》, 而宣廟朝命訓局郞韓嶠, 遍質東征將士, 撰譜刊行者也。英宗己巳, 莊獻世子代理庶政, 歳己卯, 命增入竹長鎗、旗鎗、鋭刀、倭劍、交戰月挾刀、雙劍、提督劍、本國劍、拳法、鞭棍十二技, 纂修圖解, 作爲新譜。上即阼初, 命增騎槍、馬上月刀、馬上雙劍、馬上鞭棍四技, 又以撃毬、馬上才附之, 凡二十四技, 命檢書官李德懋、朴齊家, 開局於壯勇營, 看詳編摩, 爲之疏解, 凡厥得失, 亦著論斷。仍命壯勇營哨官白東脩, 察試技藝, 董飭開雕。」『正祖 30巻14年4月29日 5回目 《무예도보통지》가 완성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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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직 박제가를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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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친구·연인·동지보다 동무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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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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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5) ‘북학의’ 박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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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조선의 '현실 타파' 주장한 박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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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8월의 문화인물:초정 박제가(楚亭 朴齊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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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년전에 박제가는 경제민주화의 허구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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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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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야화 또는 음담패설 등을 두루 포함한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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