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브레다 조약 (1667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브레다 조약(1667년)은 제2차 영란 전쟁을 종식하기 위해 잉글랜드, 네덜란드 공화국, 프랑스, 덴마크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점령지 보유 원칙에 따라 잉글랜드가 뉴네덜란드(현재 뉴욕)를, 네덜란드가 수리남 등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잉글랜드의 항해법을 완화하고,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간의 긴장을 완화하는 데 기여했다. 이 조약은 삼국 동맹의 기반을 마련했으며, 네덜란드 황금 시대의 정점을 나타내는 외교적 승리로 평가받는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브레다 - 브레다 선언
    브레다 선언은 1660년 찰스 2세가 발표한 잉글랜드 왕정복고를 위한 선언으로, 사면, 종교적 관용, 토지 소유권 보장 등을 제시하여 찰스 2세의 즉위와 왕정복고의 기반이 되었다.
브레다 조약 (1667년)
조약 정보
이름브레다 조약
브레다 성에서 평화 협상에 서명하는 모습
브레다 성에서 평화 협상에 서명하는 모습이 담긴 그림
분쟁제2차 영란 전쟁 종결
체결일1667년 7월 31일
체결 장소브레다
발효일1667년 8월 24일
중재스웨덴 요란 플레밍(Göran Fleming)
크리스토퍼 델피쿠스 추 도나 백작(Christopher Delphicus zu Dohna)
페테르 율리우스 코예트(Peter Julius Coyet)
협상가"잉글랜드 왕국: 덴질 홀리스 남작, 홀리스 남작 1세(Denzil Holles, 1st Baron Holles)); 헨리 코번트리(Henry Coventry)"
"네덜란드 공화국: 히에로니무스 반 베버닝(Hieronymus van Beverningh); 알라트 피터 반 용에스탈(Allart Pieter van Jongestall); 아돌프 헨드릭 리퍼다(Adolph Hendrik Ripperda); 피터 드 후이버트(Pieter de Huybert); 루돌프 탸르다 반 스타르켄보르흐(Ludolf Tjarda van Starkenborgh)"
"프랑스 왕국: 고드프로이, 에스트라드 백작(Godefroi, Comte d'Estrades); 오노레 쿠르탱"
"덴마크-노르웨이: 파울 클링겐베르크; 페테르 카니지우스"
서명자"잉글랜드 왕국: 찰스 2세"
"네덜란드 공화국: 네덜란드 연방 의회(States General of the Netherlands)"
"프랑스 왕국: 루이 14세(Louis XIV of France)"
"덴마크-노르웨이: 프레데리크 3세"
당사국잉글랜드 왕국
네덜란드 공화국
프랑스 왕국
덴마크-노르웨이
관련 정보
내용제2차 영란 전쟁을 종결하는 평화 조약

2. 배경

제2차 영-네덜란드 전쟁은 상업적 긴장으로 인해 발생했으며, 찰스 2세는 무역을 통해 의회에 대한 재정적 의존도를 줄이고자 했다. 1660년 찰스 2세는 제임스와 함께 왕립 아프리카 회사(RAC)를 설립하여 서아프리카에서 네덜란드에 도전했다. 조지 카터렛, 샤프츠버리, 알링턴과 같은 고위 정치인들이 투자자로 참여하여 RAC와 정부 정책 사이에 강력한 연관성이 만들어졌다.

분쟁의 핵심이었던 룬 섬; 아시아 향료 무역에 대한 독점권을 유지하려는 네덜란드의 결단은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과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막대한 이윤을 낳는 아시아 향료 무역은 평화 시기에도 갈등의 원인이 되었는데,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는 생산과 무역에 대한 독점권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1663년까지 포르투갈 등 경쟁자들이 제거되어 룬에 육두구 농장만 남게 되었다. 1616년 영국 동인도 회사가 룬에 농장을 설립했으나, 1620년 VOC에 의해 쫓겨났다. 1664년 말 영국이 룬을 재점령하자 네덜란드는 다시 그들을 추방하고 농장을 파괴했다.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WIC)와 스페인, 덴마크, 스웨덴, 포르투갈, 영국 간의 대서양 무역에서도 갈등이 있었다. 아메리카의 설탕 농장은 아프리카 노예들이 경작했으며, 북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물자를 공급받아 세 지역 모두에서 갈등을 초래했다. 1664년 8월, 영국은 뉴네덜란드를 점령하고 뉴욕으로 개명했다. 또한 현대 가나의 WIC 노예 무역 거점을 공격하자, 네덜란드는 이를 탈환하기 위해 함대를 파견했다. 이로 인해 RAC는 파산했고, 투자자들은 전쟁을 통해 손실을 만회하고자 했다.

1662년 4월 프랑스-네덜란드 조약에도 불구하고, 루이 14세는 처음에는 중립을 지켰는데, 스페인령 네덜란드에 대한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달랐기 때문이다. 1648년 뮌스터 조약은 셸트강 하구와 안트베르펜 항구를 영구적으로 폐쇄했고, 이로 인해 암스테르담은 북서 유럽 무역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게 되었다. 루이 14세는 스페인 마리아 테레사와의 결혼으로 스페인령 네덜란드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평화적으로 얻기를 원했다. 그러나 네덜란드와의 협상은 프랑스 상품 수출 경로로 안트베르펜을 재개하려는 그의 욕망 때문에 결렬되었다. 1663년, 루이 14세는 네덜란드가 자발적으로 양보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 내리고 군사 개입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는 1665년 6월 로스토프트에서 심각한 패배를 겪었지만, 영국은 이를 활용할 수 없었다.


1665년 초, 영국은 스웨덴과 동맹을 맺었고, 네덜란드는 6월 로스토프트에서 패배한 후 뮌스터 주교령의 침공을 받았다. 루이 14세는 1662년 조약을 발효하여 네덜란드가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점령에 반대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는 또한 스웨덴에게 중립을 유지하도록 돈을 지불하고, 덴마크-노르웨이가 전쟁에 참여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 덴마크의 지원은 8월 보겐 해전에서 네덜란드 상선대를 구했지만, 이는 의사소통 오류 때문이었다. 프레데리크 3세는 이익의 일부를 대가로 영국이 함대를 점령하도록 비밀리에 동의했지만, 그의 지시는 너무 늦게 도착했다.

1666년 말, 찰스 2세는 의회를 소집하지 않아 자금이 부족했고, 영국 무역은 전쟁과 국내 재난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반면 네덜란드 경제는 1665년 이후 위축에서 회복되었고, 1667년 공공 부채는 1652년보다 낮았다. 그러나 해군 유지 비용은 막대했고, 암스테르담 시장조차 이를 충당하기 어려워했다. 양측 모두 평화를 원했는데, 네덜란드는 전쟁을 계속하여 얻을 이익이 거의 없었고, 경쟁자들로부터 외부 도전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덴마크는 1647년 크리스티아노펠에서 강요된 양보에 불만을 품었고, WIC의 덴마크 선박 압류는 분쟁의 원인이었다. 1667년 초, 덴마크는 스웨덴, 프랑스와 함께 네덜란드 상품에 관세를 부과하여 발트 곡물 무역에 영향을 미쳤다.

1666년 10월, 찰스 2세는 네덜란드 연방과 윌리엄 버클리의 시신을 돌려주는 문제에 대한 합의를 핑계로 대화에 들어갔다. 그는 네덜란드를 런던에서 협상에 초대했고, 오렌지공 윌리엄을 총독으로 임명하고, 손해 배상을 지불하며, 룬을 반환하고, 인도에 대한 무역 협정을 맺으라는 이전 요구를 철회했다. 네덜란드 연방은 프랑스 없이 평화 회담에 참석하는 것을 거부했다. 영토 주장에 대해 그들은 현재 상황을 유지하거나, 전쟁 전 상황으로 되돌리겠다고 제안했는데, 이는 영국에게 받아들일 수 없는 선택이었다.

찰스 2세가 이 제안을 얼마나 진심으로 했는지는 의문인데, 그의 파리 특사 세인트 올번스 백작이 동시에 영-프 동맹에 대한 비밀 회담을 열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이 14세는 네덜란드가 영국의 요구 사항을 준수하도록 보장하고, 스페인령 네덜란드에서 자유로운 손을 얻는 데 동의했다. 1667년 4월, 헤이그의 외교관들은 합의가 임박했다고 예측했다. 회담이 시작되었을 때, 영국 대표단은 자신들의 입장이 매우 강하다고 느꼈다.

3. 협상 과정

1666년 10월, 찰스 2세는 네덜란드 연방과 대화를 시작하면서, 런던 개최, 조카 오렌지공 윌리엄의 총독 임명 등 이전 요구를 철회했다. 네덜란드 연방은 프랑스 없이는 평화 회담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밝혔으며, 영토 문제에 대해서는 현재 상황 유지, 또는 전쟁 전 상황으로 되돌리는 것을 제안했다. 찰스 2세가 이 제안에 대해 얼마나 진심이었는지는 의문인데, 이는 그의 파리 특사 세인트 올번스 백작이 동시에 영-프 동맹에 대한 비밀 회담을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한 데 비트(대국고)와 홀란트 주는 오란예파의 반대가 심했던 헤이그에서 협상하자는 잉글랜드의 제안을 거부했다. 양측은 결국 브레다에서 협상하기로 합의했지만, 프랑스의 군사적 준비로 인해 오란예파는 데 비트가 루이 14세가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침공하는 것을 돕기 위해 의도적으로 협상을 지연시키고 있다고 비난했다.

평화 회담 중재는 위신을 높이고 관계를 구축할 기회를 제공했다. 루이와 레오폴트 모두 그 자리를 원했기 때문에 스웨덴 외교관을 이용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네덜란드 연방 의회는 8명의 대표를 임명했지만, 실제 참석한 대표는 홀란트 주, 젤란트 주, 프리슬란트 주 출신뿐이었다. 잉글랜드 측 수석 협상가는 덴질 홀리스(프랑스 주재 대사)와 헨리 코번트리(스웨덴 주재 대사)였다.

1667년 5월 24일, 루이는 분할 전쟁을 시작했고, 프랑스군은 스페인령 네덜란드와 프랑슈콩테의 상당 부분을 신속하게 점령했다. 프랑스의 팽창으로 인한 네덜란드 경제에 대한 위협은 잉글랜드-네덜란드 전쟁을 종식시키는 것을 시급한 문제로 만들었다. 1667년 6월, 네덜란드는 메드웨이 급습을 통해 잉글랜드 해군에 큰 타격을 입혔고, 이는 협상에 영향을 미쳤다.

4. 조약 내용

조약 제1조는 제한적인 군사 동맹을 규정하여, 같은 항로로 항해하는 함대 또는 단일 선박이 제3자에 대해 서로를 방어할 의무를 지도록 했다. 제3조는 5월 20일을 기점으로 "현상 유지" 또는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킨다"는 원칙을 세웠다. 이에 따라 네덜란드는 현대 수리남의 일부인 수리남, 포트 코만틴, 런 섬을 유지했고, 영국은 이후 뉴욕 식민지, 뉴저지 식민지, 펜실베이니아 식민지, 매사추세츠만 식민지, 코네티컷 식민지, 델라웨어 식민지로 분할된 뉴네덜란드를 유지했다.

제4조부터 제8조까지는 전쟁 전에 발생한 손실을 포함하여 재화나 선박의 손실에 동일한 원칙을 적용했다. 어떠한 배상금도 부과하거나 처벌을 가할 수 없었지만, 모든 기존의 사략 면허는 무효로 선언되었다. 이러한 지침을 전달할 시간을 주기 위해 제7조는 시행 날짜를 변경했다. 영국 해협북해는 9월 5일, 다른 유럽 해역은 10월 5일, 적도 이북 아프리카 해안은 11월 2일, 그 외 지역은 1668년 4월 24일이었다.

제10조는 모든 포로를 몸값 없이 교환하도록 요구했지만, 네덜란드는 나중에 그들의 생활비를 배상할 것을 요구했고, 영국은 이를 동일한 것으로 간주했다. 1666년 쿠데타 실패 후, 많은 오렌지파 사람들이 영국으로 피신했으며, 영국과 스코틀랜드 반체제 인사들은 반대로 네덜란드 쪽으로 향했다. 제13조와 제17조에서 양측은 서로의 반역자를 보호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비밀 부속서에서 네덜란드는 1649년 찰스 1세 처형에 찬성표를 던진 왕당파를 인도하기로 약속했지만, 실제로 이러한 조항은 무시되었다.

별도의 조약에서 항해법이 수정되었다. 라인강 또는 스헬데강을 따라 암스테르담으로 운송된 상품은 관세 없이 네덜란드 선박으로 영국까지 운송될 수 있었다. 영국은 또한 "자유 선박은 자유 재산을 만든다"는 원칙을 받아들여, 네덜란드가 중립국인 전쟁 동안 영국 해군이 네덜란드 선박을 가로채는 것을 막았다. 이러한 조건은 예비적인 것으로, 최종 문서는 1668년 2월 17일에 서명되었다.

덴마크와 프랑스 조약은 손실 배상 청구를 포기하는 점에서 영국-네덜란드 조약을 따랐다. 또한 영국은 1667년과 1654년에 각각 점령한 카옌과 아카디아의 프랑스 영토를 반환했지만, 정확한 경계는 명시되지 않았고, 양도는 1670년까지 지연되었다. 영국은 몬트세랫과 앤티가를 되찾았고, 카리브해 섬인 세인트키츠의 영국-프랑스 분할이 복원되었다. 조약이 7월 31일에 서명된 후, 비준을 위해 각 국가에 보내졌고, 이 과정은 8월 24일까지 완료되었으며, 브레다에서 공공 축하 행사가 열렸다.

제2차 영란 전쟁은 네덜란드가 우세했지만, 프랑스와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조기에 전쟁을 종결시키기를 원했기 때문에, 잉글랜드 측에 약간 양보하는 형태로 조약이 체결되었다.

네덜란드 수상 데 비트의 제안에 따라 점령지 보유주의 원칙이 적용되어, 네덜란드는 뉴 암스테르담(현재의 뉴욕)을 포함한 북미 식민지를 잉글랜드에 할양했지만, 점령했던 수리남, 기아나 등 남아메리카 북부 해안(후의 네덜란드령 기아나)을 얻었다. 잉글랜드의 항해법을 수정 완화하여, 라인강을 경유하는 네덜란드 선박에는 적용되지 않도록 했다.

5. 결과 및 영향

렘브란트의 직물 상인 조합의 감시인; 1667년 직후 시기는 네덜란드의 번영과 권력의 정점을 나타냈다


브레다 조약은 뉴네덜란드와 런을 교환함으로써 두 가지 주요 분쟁 지역을 제거했고, 전반적인 잉글랜드-네덜란드 간의 긴장을 완화했으며, 1668년 삼국 동맹 (네덜란드 공화국, 스웨덴, 잉글랜드 간)의 길을 열었다. 이 동맹은 종종 프랑스가 아헨 조약에서 대부분의 영토를 반환하도록 강요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루이 14세와 레오폴트 1세가 1668년 1월에 이미 합의한 조건이었다.

장기적으로 볼 때, 브레다 조약은 잉글랜드와 네덜란드가 프랑스를 서로보다 더 큰 위협으로 인식하게 된 시점이었다. 찰스 2세가 프랑스와의 동맹을 선호하여 1670년 도버 비밀 조약으로 이어졌지만, 장기적인 흐름은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잉글랜드 해군의 힘을 재확인하려는 지원은 제3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에서 제한적인 지원을 제공했지만, 목표가 달성되자 중단되었다.

이 조약은 찰스 2세가 약속했던 오라녜 가문을 복원하거나 망명자들의 귀국을 허용하지 않아 오라녜 지지자들을 실망시켰다. 프랑스의 진격에 대응하여, 제칠란트프리슬란트가 빌럼 3세를 네덜란드 육군의 대장으로 임명할 것을 제안하자, 홀란트 주의 의회는 8월 5일에 영구 칙령으로 응답했다. 이 칙령은 홀란트의 총독 직위를 폐지했으며, 두 번째 결의안에서는 연합 대장 또는 제독이 다른 주의 총독이 되는 것을 반대하기로 합의했다. 군대는 오라녜 지지 세력의 기반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군사비 지출은 의도적으로 최소화되었고, 이는 1672년에 비참한 결과를 초래했다.

브레다 조약은 중재자 역할을 통해 엘빙 조항을 개선하고, 네덜란드-덴마크 간의 합의를 파기하고, 삼국 동맹에 가입하는 데 성공한 스웨덴에게도 성공적이었다. 스페인은 프랑슈콩테와 대부분의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되찾았으며, 더 중요한 것은 네덜란드가 야심 찬 프랑스보다 스페인을 더 나은 이웃으로 여기게 되었다는 점이다. 전반적으로, 네덜란드는 브레다 조약과 동맹의 창설을 외교적 승리로 간주했으며, 조약 직후 시기는 네덜란드 황금 시대의 정점으로 여겨진다.

제2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은 네덜란드가 우세했지만, 프랑스와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조기에 전쟁을 종결시키기를 원했기 때문에, 잉글랜드 측에 약간 양보하는 형태로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네덜란드 수상 데 비트의 제안에 따라 점령지 보유주의 원칙이 적용되어, 네덜란드는 뉴암스테르담(현재의 뉴욕)을 포함한 북미 식민지를 잉글랜드에 할양했지만, 점령했던 수리남, 기아나 등 남아메리카 북부 해안을 얻었다(후의 네덜란드령 기아나). 잉글랜드의 항해법을 수정 완화하여, 라인 강을 경유하는 네덜란드 선박에는 적용되지 않도록 했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