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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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지스는 1940년대 후반 맨 섬에서 태어난 깁 형제(배리, 로빈, 모리스)를 중심으로 결성된 밴드이다. 1950년대 후반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하여 활동을 시작했으며, 1960년 비지스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1960년대 후반 영국으로 진출하여 "Massachusetts", "Words", "How Deep Is Your Love" 등 다수의 히트곡을 발표하며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1970년대 중반 디스코 음악으로 전환하여 《Saturday Night Fever》 사운드트랙의 성공으로 전성기를 맞았으나, 디스코의 쇠퇴와 함께 인기가 하락했다. 1980년대 이후에도 앨범을 발표하며 활동을 이어갔지만, 멤버들의 사망으로 인해 2012년 로빈 깁의 사망 이후 비지스는 세 형제가 모두 모인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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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지스 - 콜린 피터슨
콜린 피터슨은 영국의 배우이자 음악가로서, 비 지즈의 드러머로 활동하며 유명해졌고, 밴드 탈퇴 후 험피 봉 결성, 화가 활동, 저작권 분쟁, 트리뷰트 쇼 출연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다 2024년 사망했다. - 비지스 - 빈스 멜러니
빈스 멜러니는 1963년 빌리 소프 & 디 아즈텍스의 창립 멤버로 데뷔하여 "포이즌 아이비" 커버로 이름을 알리고, 1967년부터 1969년까지 비 지스의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며 여러 히트곡 작업에 참여한 오스트레일리아의 기타리스트이다. - 1950년대 음악 그룹 - 슈프림스
슈프림스는 다이애나 로스, 메리 윌슨, 플로렌스 발라드 등을 주축으로 1959년 결성되어 "Baby Love", "Stop! In the Name of Love" 등으로 1960년대 미국을 대표하는 걸 그룹으로 자리매김하며 흑인 음악 대중화에 기여하고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친 미국의 여성 음악 그룹이다. - 1950년대 음악 그룹 - 포 탑스
포 탑스는 1953년 디트로이트에서 결성되어 모타운 레코드에서 다수의 히트곡을 내며 1960년대 전성기를 누린 미국의 남성 보컬 그룹으로, 로큰롤 명예의 전당과 그래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등 음악적 업적을 인정받았다. - 오스트레일리아의 팝 음악 그룹 - 새비지 가든
1990년대 후반에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팝 듀오 새비지 가든은 대런 헤이즈와 대니얼 존스로 구성되어 "I Want You", "To the Moon and Back", "Truly Madly Deeply" 등의 히트곡을 냈으며 2001년 해체되었지만 대표곡 "Truly Madly Deeply"는 한국에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 오스트레일리아의 팝 음악 그룹 - 걸프렌드 (오스트레일리아의 음악 그룹)
1992년 호주에서 결성된 걸프렌드는 5인조 팝 음악 그룹으로, 데뷔 싱글 "Take It from Me"의 성공과 앨범 발매 후 멤버 교체 및 그룹명 변경을 거쳐 해체되었다.
비지스 - [음악 그룹]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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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비지스 |
원어 이름 | Bee Gees |
별칭 | BGs (1958–1959) |
출신지 | 오스트레일리아 퀸즐랜드주 브리즈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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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기간 | 1958–1969 1970–2003 2006 2009–2012 |
장르 | 팝 소울 디스코 록 소프트 록 |
레이블 | 리던 스핀 페스티벌 폴리도르 애틀랜틱 RSO 워너 브라더스 캐피틀 |
공식 웹사이트 | 비지스 공식 웹사이트 |
멤버 | |
과거 멤버 | 배리 깁 로빈 깁 모리스 깁 빈스 멜러니 콜린 피터슨 제프 브리지포드 |
관련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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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기록 | 핫 100 1위 최다 기록 그룹 3위 |
서훈 | 2002년 신년 서훈 |
재결합 | 비지스 라이브 컴백 |
멤버 사망 | 로빈 깁, 비지스 공동 창립자 사망 |
2. 초기 활동과 비지스 결성
1940년대 후반 맨섬에서 태어난 깁 형제는 1955년 아버지 휴 깁의 고향인 맨체스터 콜튼컴하디로 이사하였다. 형제는 그곳에서 배리가 기타와 보컬을 담당하고 로빈과 모리스가 보컬을, 형제의 친구인 폴 프로스트가 드럼을, 케니 호록스가 워시텁 베이스를 맡아 스키플/로큰롤을 연주하는 레틀스네이크스를 결성하였고 1957년 12월 노래를 시작하였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들은 지역 영화관에서 립싱크를 하려고 하였으나 극장에 가는 도중에 레코드 디스크가 깨지는 바람에 라이브로 노래를 해야 했다고 한다. 이들의 라이브 공연이 청중의 호응을 얻으면서 형제는 본격적으로 음악을 하기로 결정하였다.[238] 1958년 5월 프로스트와 호록스가 팀을 떠나 레틀스네이크스는 해체되었고 깁 형제는 "위 조니 헤이스 앤드 블루 캣츠"를 결성하였다.[239]
1958년 8월, 가족 전체가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하여 퀸즈랜드 주의 레드클리프에 자리잡았다. 형제는 용돈 벌이를 위해 공연을 시작하였고, 1960년 레드클리프의 스피드웨이 경기장에서 막간을 이용하여 공연하였다. 이 때 형제들의 그룹 이름을 비지스(Bee Gees)로 정하였다. 스피드웨이 경주 홍보 담당이자 운전자이기도 하였던 빌 구드는 깁 형제를 브리즈번 라디오 진행자겸 디스크 자키였던 빌 게이츠에게 소개하였다. 형제는 경기 막간에 트럭 위에 올라 트랙을 돌며 공연하였고, 군중들은 그들을 위해 트랙 위로 돈을 던졌다. 이들의 공연이 좋은 호응을 얻자 게이츠는 깁 형제들의 맏이 배리의 B와 빌 구드의 G를 따서 BGs라고 그룹을 소개하였고 이것이 비지스(Bee Gees)의 출발이 되었다.[240][241][242]
그 후 몇 년 동안 비지스는 퀸즈랜드 해안의 리조트를 돌며 활동하였다. 1963년 당시 오스트레일리아의 유명한 록 가수였던 콜 조이는 배리의 작곡 실력에 관심을 갖고 비지스가 페스티벌 레코즈의 자회사 린던 레코즈와 계약을 맺도록 주선해 주었다.[243]
1965년 발표한 "Wine and Women"은 어느 정도 인기를 끌었고 이에 힘입어 첫 LP 앨범 《The Bee Gees Sing and Play 14 Barry Gibb Songs》을 제작하였으나, 1966년 린던 레코즈는 비지스가 상업적 성공이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자신들의 가수 목록에서 제외하려고 하였다. 이때 형제는 스핀 레코즈의 A&R 매니저로 임명된 미국 출신 프로듀서 냇 키프너를 만났다. 키프너는 비지스의 매니저 역할을 하면서 이들을 스핀 레코즈로 이적시켰고 대신 페스티벌 레코즈에게 비지스 음반의 오스트레일리아 배포 권한을 부여하기로 하였다.[247] 키프너는 시드니 교외에서 소규모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던 오시 바이른을 비지스와 연결시켰고 스핀 레코즈 이적 후 비지스의 초기 음반은 대부분 여기서 녹음되었다. 1966년 중반 무렵 바이른은 비지스에게 자신의 스튜디오를 언제든 무제한 쓸 수 있도록 해 주었다.[248] 이 기간에 비지스의 첫 대규모 히트작 "Spicks and Specks"이 녹음되었다.[249]
오스트레일리아에서의 삶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던 깁 형제는 영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1967년 1월 4일 오시 바이른과 함께 배에 올랐다. 1967년 1월 바다에 있는 동안 형제들은 "Spicks and Specks"이 올해 최고의 싱글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250]
3. 세계적인 성공
깁 형제의 아버지 휴 깁은 비틀즈의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에게 비지스의 데모를 보냈다. 1967년 2월, 엡스타인에게서 이 데모를 건내받은 로버트 스티그우드는 비지스의 오디션을 보고 계약을 결정, 폴리도르 레코드를 통해 영국, 앳코 레코드를 통해 미국에서 5년간 활동하게 되었다. 스티그우드는 비지스를 비틀즈에 비교하며 "1967년의 가장 중요한 새로운 음악 천재"라고 선전했다.[252]
첫 국제 앨범을 제작하면서 콜린 피터슨과 빈스 멜러니를 새 멤버로 영입했다.[253] 영국에서 처음 발매된 싱글은 "Spicks and Specks"이었고, 두 번째 싱글 "New York Mining Disaster 1941"은 스티그우드의 지휘 아래 영국에서 녹음되었다. 스티그우드는 제목만 적힌 빈 레이블 음반을 라디오 방송국에 배포했고, 일부 DJ들은 이를 비틀즈의 새 싱글로 착각해 자주 틀었다. 이 전략으로 "New York Mining Disaster 1941"은 영국과 미국 모두에서 상위 20위에 올랐다.[254]
비지스는 국제적 활동을 시작하며 만든 첫 앨범 《Bee Gees 1st》를 발표, 미국 7위, 영국 8위를 기록했다. 1968년 2월에는 앨범 《Horizontal》을 발표, 수록곡 "Massachusetts"가 영국 싱글 1위를 차지했다.[262]
1969년, 로빈은 스티그우드가 자신보다 배리를 더 முன்ன세운다고 느껴 그룹을 떠났다.[267] 로빈이 없는 동안 배리, 모리스, 피터슨은 《 Cucumber Castle》을 녹음했다. 1970년 초 앨범 발매 이후 비지스는 내리막길을 걸었고, 결국 멤버들은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272]
1970년 여름, 비지스는 재결합했다. 배리는 휴가 중 로빈으로부터 "다시 해보자"는 연락을 받았다고 말했다. 8월 21일 재결합을 발표하며 다시는 헤어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276] 1971년, 9집 앨범 《Trafalgar》의 "How Can You Mend a Broken Heart"가 처음으로 미국 차트 1위를 차지, 그래미상 후보에 올랐다.
3. 1. 디스코로의 전향
1975년, 에릭 클랩튼의 제안으로 비지스는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로 이사하여 크리테리아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하였다. 비지스는 디스코로 전환하기로 결정하였고, 그렇게 제작된 음반 《Main Course》가 성공하였다. 이 앨범에서 "Jive Talkin' "이 미국 차트 1위, "Nights on Broadway"가 미국 7위를 차지하였다.[285]
1976년, 앨범 《Children of the World》를 발매하여 미국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예전의 팬들 가운데 일부는 그들의 디스코 전향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286]
이후, 비지스는 《토요일 밤의 열기》 사운드 트랙 작업에 참여하여, 디스코 음반 《Saturday Night Fever》를 발표하였다. 존 트래볼타는 자신이 스티비 원더와 보즈 스캑스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고 회상할 정도로 영화 제작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비지스에게 사운드 트랙 의뢰가 들어왔고 형제는 "사실상 주말 한 번에" 노래를 작곡하였다.[288]
영화의 음악을 담당했던 빌 오크스는 비지스의 작업이 디스코 열풍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시들어 가던 열기에 새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라고 평가한다.[289] 사운드 트랙은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 "How Deep Is Your Love", "Stayin' Alive", "Night Fever" 등이 전 세계를 휩쓸며 디스코 전성 시대를 알렸다.[290]
4. 1980년대 이후 활동
1980년대에 들어 형제는 각기 다른 그룹의 음반 제작에 참여하였다. 로빈은 1980년 5월 발매된 지미 러핀의 《Sunrise》를 공동 제작하였는데, 여기에는 "Hold On To My Love"와 같은 깁 형제가 작곡한 노래가 포함되었다.[295] 1980년 3월 배리 깁은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 함께 앨범 《Guilty》를 작업하였다. 이 앨범의 모든 곡 제작에 배리가 참여하였으며 일부는 로빈, 모리스가 작사를 하였다.[296] 1981년 비지스는 RSO 레코드를 통해 CD 음반 《Living Eyes》를 발표했다.[297] 그러나 디스코에 대한 여전한 반발로 미국과 영국 모두 40위 권에도 들지 못하였다.
그 이후 비지스는 다른 가수를 위한 작곡에서 더 나은 성적을 보였다. 1982년 디온 워릭의 "Heartbreaker"는 영국 2위를 기록하였다. 1983년 돌리 파튼과 케니 로저스는 비지스가 작곡한 트랙 "Island in the Stream"으로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1위를 기록하였고 영국에서도 10위 권에 진입하였다. 비지스가 작곡하고 배리가 공동 제작한 로저스의 앨범 《Eyes That See in the Dark》도 미국 10위 권의 히트작이 되었다.[298] 1983년 《토요일 밤의 열기》의 속편 격으로 제작된 영화 《스테잉 얼라이브》의 사운드트랙은 다시 히트하여 미국 30위 권에 진입하였지만, 예전과 같은 열풍을 보이지는 못하였다.
이 시기 비지스는 표절 시비에 휘말렸다. 시카고의 작곡가 로널드 셀이 "How Deep Is Your Love"의 일부가 자신의 노래 "Let It End"에서 멜로디를 훔쳤다고 주장하였다. 소송은 비지스에게 불리하게 시작되었으나 몇 달 뒤에 뒤집혀 표절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299]
1983년 8월 배리는 MCA 레코즈와 솔로 계약을 체결하였고[300] 로빈도 세 개의 솔로 싱글을 발표하였다. 모리스도 솔로 싱글 "Hold Her in Your Hand"를 발표했다.[301] 1985년 비지스가 작곡하고 마이클 잭슨이 참여한 다이애나 로스의 앨범 《Eaten Alive》 에 수록된 "Chain Reaction"이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1위를 차지하였다.[302]
1987년 발표한 앨범 《E.S.P.》가 2백만 부 이상 팔리며 비지스는 다시 인기를 얻었다.[303] 이 앨범은 6년 만에 나온 앨범이자 워너 레코드에서 제작한 첫 앨범이었다. 수록된 싱글 "You Win Again"은 영국을 포함한 많은 국가에서 1위에 올랐지만[304] 미국에서는 75위의 실망스러운 기록을 보였다. 비지스는 미국 라디오 방송에서 유럽의 히트 싱글을 방영하지 않는다는 불만을 토로하였다. 이 노래는 영국 아이버 노벨로 어워드를 수상하였다.[305]
1988년 3월 10일 뮤지컬 배우로 활동하고 있던 깁 형제의 동생 앤디 깁이 30세의 이른 나이에 사망하였다. 이듬해인 1989년 비지스는 앤디에게 헌정한 노래 "Wish You Were Here"가 수록된 앨범 《One》을 발표하였다. 앨범 발매 이후 비지스는 10년 만에 세계 투어에 나섰다.
1993년, 앨범 《Size Isn't Everything》을 발매하였다. 1997년, 앨범 《Still Waters》가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97년, 브릿 어워드를 수상하였다.
2001년, 그룹은 새로운 음악이 담긴 마지막 앨범인 《This Is Where I Came In》을 발매했다. 이 앨범은 영국에서 상위 10위권에 진입(골드 인증)하고 미국에서도 상위 20위권에 진입하며 또다른 성공을 거두었다. 타이틀곡 역시 영국 차트에서 20위권에 진입하는 히트곡이 되었다.[110]
비지스가 트리오로서 마지막으로 공연한 무대는 2002년 열린 'Love and Hope Ball'이었다.[112] 모리스 기브는 2003년 1월 12일, 53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는 장 협착 수술을 기다리던 중이었다.[113] 처음에 그의 형제들은 그의 추모를 위해 "비지스"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할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그룹의 이름을 은퇴시키기로 결정하고, 세 형제가 함께 했던 시절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남겨두기로 했다.[114]
모리스가 사망한 같은 주에 로빈의 솔로 앨범 《Magnet》이 발매되었다. 2003년 2월 23일, 비지스는 그래미 레전드상을 수상했으며, 21세기에 이 상을 처음 수상한 그룹이 되었다. 배리와 로빈, 그리고 모리스의 아들 아담이 눈물 속에 상을 받았다.[115]
2009년 후반, 배리와 로빈은 비지스로서 다시 함께 녹음하고 공연할 계획을 발표했다.[123] 2012년 5월 20일, 로빈 깁이 간부전과 신부전으로 사망했다.[132]
5. 음반 목록
비지스는 수많은 음반을 발매했으며, 엘비스 프레슬리부터 데스티니스 차일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가수들이 이들의 음악을 커버했다. 전 세계적으로 2억 3천만 장 이상의 레코드 및 CD 판매량을 기록했다.[218]
1971년부터 1979년까지 빌보드 차트에서 9곡의 1위 히트곡을 기록했으며, 1978년 3월에는 제작에 참여한 4곡이 상위 5위에 랭크인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는 비틀즈가 1964년 4월에 상위 5곡을 모두 독점한 기록에 이은 것이다. 또한 1977년 마지막 주부터 1978년 8월까지 32주 동안 참여한 곡이 1위 자리를 지켰다. 영국에서는 비틀즈의 28곡에 이어 19곡이 1위를 기록했다.
비지스는 활동 기간 동안 5개의 그래미상을 수상했으며, 1994년 송라이터 명예의 전당,[219] 1995년 플로리다 아티스트 명예의 전당, 1997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220] ARIA 명예의 전당,[221] 2001년 보컬 그룹 명예의 전당, 2004년 9월 20일 댄스 뮤직 명예의 전당 등 여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다음은 비지스의 주요 싱글 목록이다.
- "New York Mining Disaster 1941" (1967년)
- To Love Somebody (1967년)
- Massachusetts (1967년)
- "World" (1967년)
- Words (1968년)
- "I've Gotta Get A Message To You" (1968년)
- First Of May (1969년)
- "Lonely Days" (1971년)
- Melody Fair (1971년)
- "How Can You Mend A Broken Heart" (1971년)
- "My World" (1972년)
- "Run To Me" (1972년)
- "Jive Talkin'" (1975년)
- "Nights On Broadway" (1975년)
- "You Should Be Dancing" (1976년)
- How Deep Is Your Love (1977년)
- Stayin' Alive (1978년)
- "Night Fever" (1978년)
- "Too Much Heaven" (1979년)
- "Tragedy" (1979년)
- "Love You Inside Out" (1979년)
- "You Win Again" (1987년)
- "One" (1989년)
- "For Whom The Bell Tolls" (1993년)
- "Alone" (1997년)
비지스는 정규 음반 외에도 작은 사랑의 멜로디(1971), 토요일 밤의 열기(1977) 등의 영화 사운드트랙에도 참여했다.
5. 1. 정규 음반
연도 | 음반 | 최고 순위 | |
---|---|---|---|
미국 | 영국 | ||
1965 | The Bee Gees Sing and Play 14 Barry Gibb Songs | — | |
1966 | 스픽스 앤드 스펙스 Spicks and Specks | — | |
1967 | 비 지스 퍼스트 Bee Gees 1st | 7 | 8 |
1968 | 호리존탈 Horizontal | 12 | 16 |
1968 | 아이디어 Idea | 17 | 4 |
1969 | 오데사 Odessa | 20 | 10 |
1970 | 큐컴버 캐슬 Cucumber Castle | 94 | 57 |
1970 | 투 이어스 온 2 Years On | 32 | — |
1971 | 트라팔가 Trafalgar | 34 | — |
1972 | 투 훔 잇 메이 컨서른 To Whom It May Concern | 35 | — |
1973 | 라이프 인 어 틴 캔 Life in a Tin Can | 69 | — |
1974 | 미스터 내추럴 Mr. Natural | 178 | — |
1975 | 메인 코스 Main Course | 14 | — |
1976 | 칠드런 오브 더 월드 Children of the World | 8 | — |
1979 | 잃어버린 사랑의 세계 Spirits Having Flown | 1 | |
1981 | 리빙 아이즈 Living Eyes | 41 | 73 |
1987 | E.S.P. E.S.P. | 96 | 5 |
1989 | 원 One | 68 | 29 |
1991 | 하이 시빌라이제이션 High Civilization | — | 24 |
1993 | 사이즈 이즈 낫 에브리씽 'Size Isnt Everything'' | 153 | 23 |
1997 | 스틸 워터스 Still Waters | 11 | 2 |
2001 | 디스 이즈 웨어 아이 케임 인 This Is Where I Came In | 16 | 6 |
5. 2. 라이브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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