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잭슨
1. 개요
마이클 잭슨은 미국의 가수, 댄서, 작곡가, 프로듀서로, 1958년 인디애나주 게리에서 태어났다. 1960년대 후반 잭슨 파이브의 멤버로 데뷔하여 1970년대 초반부터 솔로 활동을 시작했다. 1979년 앨범 《Off the Wall》을 통해 성인 솔로 아티스트로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시작했고, 1982년 앨범 《Thriller》로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음반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잭슨은 '팝의 황제'라는 별칭을 얻으며, 댄스와 뮤직비디오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90년대 초 아동 성추행 혐의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2009년 런던에서 컴백 공연을 앞두고 사망했다. 그는 10장의 정규 앨범을 발매했으며, 여러 차례의 월드 투어를 통해 4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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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 마이클 조지프 잭슨 |
|---|---|
| 출생일 | 1958년 8월 29일 |
| 출생지 | 미국 인디애나주 게리 |
| 사망일 | 2009년 6월 25일 |
| 사망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
| 사망 원인 | 급성 프로포폴 중독으로 인한 심정지 |
| 안장 장소 | 미국 캘리포니아주 글렌데일 포레스트 론 메모리얼 파크 |
| 별칭 | 마이클 조 잭슨 |
| 직업 | 싱어송라이터 댄서 레코드 프로듀서 |
| 배우자 | |
| 자녀 | 파리스 포함 3명 |
| 부모 | 조 잭슨 캐서린 잭슨 |
| 가족 | 잭슨 가족 |
| 수상 | 전체 목록 |
| 웹사이트 | 공식 웹사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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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기 | 보컬 |
|---|---|
| 장르 | 팝 소울 R&B 펑크 록 디스코 포스트 디스코 댄스 팝 뉴 잭 스윙 |
| 음반 목록 | 앨범 싱글 노래 |
| 활동 기간 | 1964년–2009년 |
| 레이블 | 스티일타운 모타운 에픽 레거시 소니 MJJ 프로덕션 |
| 이전 소속 그룹 | 잭슨 5 |
-
바레인에 거주한 미국인 -
새뮤얼 즈웨이머
새뮤얼 즈웨이머는 미국의 선교사이자 신학자로서, 미국 아라비아 선교회를 설립하고 무슬림 선교 활동을 펼쳤으며, 프린스턴 신학교 교수로 선교 인력을 양성하고 저술 활동을 통해 이슬람과 기독교를 연구했다. -
잭슨 5의 일원 -
저메인 잭슨
저메인 잭슨은 잭슨 5의 멤버로 데뷔하여 기타 실력과 가창력으로 초기 리드 보컬을 맡았고, 솔로 가수로서도 성공적인 활동을 펼쳤으나 최근에는 성폭행 소송에 휘말리기도 한 미국의 가수이자 배우이다. -
잭슨 5의 일원 -
티토 잭슨
티토 잭슨은 잭슨 5의 멤버로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까지 "I Want You Back", "ABC" 등의 히트곡을 내며 성공을 거둔 미국의 가수이자 기타리스트이며, 솔로 활동과 잭슨스 멤버 활동, 블루스 음악가 활동을 이어가다 2024년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
루푸스 환자 -
정미홍
대한민국의 전 아나운서이자 정치인인 정미홍은 KBS 아나운서 출신으로, 서울특별시청 공무원, 더코칭그룹 대표이사, 정의실현국민연대 대표, 진정방송 대표 등을 역임하며 활동했고, 서울시장 후보 낙선, 대한애국당 탈당,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반대 시위 참여, 여러 논란을 일으킨 후 폐암으로 사망했다. -
루푸스 환자 -
섀넌 복스
섀넌 복스는 미국의 여자 축구 선수로, 미드필더로 활동하며 NCAA, FIFA 여자 월드컵, 올림픽 등에서 우승을 경험하고 여러 클럽에서 활약하다 2015년에 은퇴했다.
- 1. 개요
- 2. 생애
- 2.1. 1958-1978: 잭슨 파이브, 더 잭슨스, 유년기
- 2.2. 1979-1981: ''Off The Wall'', 첫 성인 1집
- 2.3. 1982-1985: ''Thriller'', 문워크, 백악관 수상, 그래미 신기록
- 2.4. 1986-1990: ''Bad'', 언론들의 거짓 보도, King of Pop
- 2.5. 1991-1993: ''Dangerous'', 슈퍼볼, 전설상 수상
- 2.6. 1993-1994: 1번째 성추행 사건과 1번째 결혼
- 2.7. 1995-2000: ''HIStory'', 2번째 결혼과 자녀
- 2.8. 2001-2002: ''Invincible'', 9.11 자선, 발코니 논란
- 2.9. 2003-2005: 2번째 성추행 혐의와 재판, 무죄 판결
- 2.10. 2006-2009: 마지막
- 3. 사생활
- 4. 아티스트적 면모
- 5. 한국과의 인연
- 6. 음반 목록
- 7. 투어
- 8. 도서
2. 생애
2.1. 1958-1978: 잭슨 파이브, 더 잭슨스, 유년기
마이클 조셉 잭슨은 1958년 8월 29일 미국 인디애나주 게리에서 흑인 노동자 계층 가정의 7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조지프 잭슨은 철강 노동자였으며, 어머니 캐서린은 여호와의 증인 신자이자 가정부였다. 조지프는 개인적 취미로 친구들과 밴드를 결성했다가 해체하기도 했다.
마이클 잭슨은 아버지 조지프 잭슨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2003년 조지프는 아들 마이클을 정기적으로 학대했음을 시인했다. 마이클은 1993년 오프라 윈프리 쇼에 나와 유년 시절 고독을 느꼈다고 말했고, 2003년에는 'Living With Michael Jackson'에 나와 아버지가 자신의 외모를 비하하여 큰 상처를 입었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의 엄격한 훈련이 자신의 성공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그러한 학대는 육체적, 감정적 고통이 되었다고 회상했다.
1963년, 마이클은 아버지에 의해 형제 잭키, 티토, 저메인이 결성했던 잭슨 브라더스 밴드에 합류했다. 1965년 형 저메인과 함께 리드 보컬을 맡기 시작했고, 밴드 이름을 잭슨 파이브로 바꿨다. 같은 해 메이저 지역 탤런트 쇼에서 제임스 브라운의 〈I Got You (I Feel Good)〉를 불러 우승했다. 잭슨 5는 스트립쇼와 클럽, 칵테일 라운지, 시 및 지역 강당과 고등학교 등에서 다양하게 공연을 했으며, 1967년 8월 할렘의 아폴로 극장에서 아마추어 콘서트 공연을 했다.
1969년 모타운 레코드와 계약하기 전, 지역 레코드사인 스틸타운에서 〈Big Boy〉 등을 포함한 몇몇 노래를 녹음하면서 전문적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롤링 스톤》은 어렸을 적 마이클을 "신동이다", "압도적인 음악적 재능을 지녔다", "가장 이목을 끌면서 빨리 알려진 리드 싱어"라고 묘사했으며, 잭슨 파이브에 대해선 "흑인 비틀즈"라고 썼다. 처음으로 발매했던 네 장의 싱글 〈I Want You Back〉, 〈ABC〉, 〈The Love You Save〉, 〈I'll Be There〉은 빌보드 핫 100 차트 진입과 함께 모두 1위를 하는 기록을 세웠다. 잭슨 파이브는 "가장 발전한 크로스오버 흑인 음악가의 본보기"라고 불렸으며, 이들은 지금까지도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보이밴드로 미국인들에게 인식되고 있다.
1972년 ~ 1975년 사이 잭슨은 "Got to Be There", "Ben", "Music&me", "Forever Michael" 네 장의 솔로 앨범을 발매했다. "Got to be there"는 앨범으로서 가장 큰 상업적 성공을 거뒀으며, "Ben"에서 발매한 싱글 〈Ben〉 은 빌보드 핫 100차트에서 1위를 기록했으며 마이클 잭슨의 유년 시절을 상징하는 곡으로 자리 잡았다.
1973년부터 잭슨 파이브와 모타운은 갈등을 겪었다. 잭슨 형제들은 모타운 사운드에 벗어나 다채로운 사운드를 제작하여 음악을 하기 바랐으며 작사/작곡의 자유가 부여되길 원했지만 모타운은 이를 거부했다. 또 잭슨 파이브의 인기가 감소하기 시작했다. 1975년, 잭슨 파이브는 모타운과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모타운을 떠났다. 이후 CBS 레코드의 자회사 에픽 레코드와 계약한 뒤, 밴드 이름을 더 잭슨스(The Jacksons)로 바꿨다.
1976년 더 잭슨스는 에픽 레코드에서의 첫 앨범인 "The Jacksons"를 발매한다. 마이클 잭슨은 앨범에서 "Blues Away"라는 노래를 단독으로 작사/작곡했고, 티토 잭슨과 함께 "Style of Life"를 작사/작곡했다. 1978년 발매한 "Destiny" 앨범에서 마이클 잭슨은 작사/작곡과 프로듀싱의 측면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크게 확장해 나갔다. 그중에서 마이클이 형제 랜디 잭슨과 함께 작사/작곡/프로듀싱한 "Shake Your Body (Down to the Ground)"는 미국에서 싱글로 200만 장이 팔렸고 빌보드 차트에서 7위를 하는 기염을 토했다.
1978년 감독 시드니 루멧의 《마법사》에서 허수아비 역으로 출연했다. 영화 작업을 하고 있던 중 영화에서 연주될 악보를 편집한 퀸시 존스와 만났고, 잭슨의 다음 솔로 앨범 《Off the Wall》을 같이 제작할 것을 약속했다.
2.2. 1979-1981: ''Off The Wall'', 첫 성인 1집
1979년 퀸시 존스와 처음으로 함께한 앨범이자, 잭슨의 성인 커리어를 시작하는 앨범인 《Off the Wall》을 발매했다. 이 앨범은 빌보드 200에서 3위를 기록했고 세계적으로 2,000만 장 이상 판매되었다. 빌보드 핫 100 1위에 오른 〈Don't Stop 'til You Get Enough〉와 〈Rock with You〉를 포함해 〈Off the Wall〉, 〈She’s Out of My Life〉 총 네 장의 싱글을 10위권에 진입시켰다. 앨범은 많은 평론가들에게 세련된 디스코로 구성됐다며 호평과 인정을 받았다. 2003년에는 롤링 스톤이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500위에서 68위를 차지했다. 2008년 《Off the Wall》은 뛰어난 음악성을 인정받아 그래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다.
1980년 마이클은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에서 가장 좋아하는 소울/알앤비 앨범, 가장 좋아하는 소울 알앤비 남자 아티스트, 가장 좋아하는 소울/알앤비 싱글 부문에서 수상하며 총 3관왕에 올랐다. 또 빌보드 연간 차트에서 탑 블랙 아티스트와 탑 블랙 앨범상을 받았고, 그래미상에서는 〈Don't Stop 'Til You Get Enough〉로 최우수 남자 알앤비 보컬 퍼포먼스 상을 받았다. 그러나, 마이클은 그래미에서 상을 얻었지만 무척이나 실망했는데 그 해 가장 많이 팔린 앨범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평론가들에게도 찬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상을 고작 하나만 받았기 때문이다. 1980년 음반 도매 수익의 37%를 가져갔는데, 이는 당시 음악 업계에서 가장 높은 로열티였다. 마이클은 《Off the Wall》이 훨씬 더 큰 영향력을 줬어야 했다고 생각했고 다음 앨범은 기대를 뛰어넘는 것을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2.3. 1982-1985: ''Thriller'', 문워크, 백악관 수상, 그래미 신기록
1982년 마이클 잭슨은 정규앨범 《Thriller》를 발매한다. 흑인은 흑인 음악을, 백인은 백인 음악을 할 당시에 인종이나 음악적 장르 구분을 완전히 무시하고 만들어진 이 앨범은 약 7000만 장이 팔린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다. 기네스북에도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등재됐다. 대한민국의 경우 《Thriller》의 구체적 판매량은 조사된 적 없지만 1984년 3월 21일 자 동아일보 신문을 보면 음반시장이 좁아 라이선스 음반은 5천장만 팔려도 잘 나간다고 보는 우리나라에서도 스릴러는 5만 장이 팔렸다고 보도됐다. 앨범은 빌보드 200에서 37주 동안 1위를 차지했고, 발매된 7개의 싱글이 모두 빌보드 핫 100의 10위 안에 올랐다.
《Thriller》는 MTV의 장벽을 무너뜨린 라는 데서 큰 의미를 갖는다. 마이클의 뮤직비디오가 제작되고 CBS는 Billie Jean 뮤직비디오를 MTV에게 제공하였는데 MTV는 거절했다. 그러자 CBS는 'Beat it' 뮤직비디오 영상을 제공하며 방영하지 않을 경우 다른 가수들의 모든 뮤직비디오를 빼버리겠으며 흑인 가수라는 이유로 방송을 불허한다는 MTV의 입장을 언론에 폭로하겠다고 통지했다. MTV에서 방영되는 가수들의 대다수는 CBS 소속이었고 CBS가 빼버리면 MTV의 앞날이 위험해진다. MTV는 결국 CBS의 뜻을 받아들여 마이클의 뮤직비디오를 방영했다. 이 사건 이후 흑인 가수들의 돌파구가 생겨났다.
1983년 모타운 레코드 25주년 공연에서 잭슨은 'Billie jean'을 댄스로 선보였다. 마이클의 트레이드 마크 춤 중 하나인 문워크를 처음으로 대중 앞에서 선보인 공연이었다. 이 공연은 지난 50년간 미국인들이 다시 보고 싶어 하는 순간 7위로 뽑혔다.
1984년 1월 27일 마이클은 펩시콜라의 CF 광고를 촬영하는 도중 사고로 인하여 2도 이상의 화상을 입어 수술을 했다. 마이클은 화상사고 책임 주체인 펩시에게 150만 달러를 받아 합의를 했다. 마이클은 화상 치료센터에 합의금 150만 달러를 기부했다. 2월 28일 그래미 어워드에서 12개 부문 후보로 올라 8개의 상을 휩쓸어 최다 부문 후보, 최다 수상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이 해 낸시 레이건 영부인의 반마약 운동인 "Just say no" 캠페인에 자신의 자작 히트곡인 'Beat it'의 음을 빌려준 대가로 5월 14일에는 백악관에서 당시 대통령이었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에게 초청을 받아 공개적으로 감사 인사와 상을 받았다.
1985년 'We Are The World'라는 아프리카 기아들을 도와주기 위한 대형 프로젝트에 주도적으로 참여한다. 라이오넬 리치와 공동으로 작사/작곡하였으며 퀸시 존스가 프로듀싱한 이 곡은 싱글로 발매돼 1400만 장 이상이 팔려나갔으며 빌보드 핫 100 싱글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 이 해 8월 10일에는 비틀즈의 레논-매카트니 카탈로그와 유명 가수들의 저작권을 포함하여 4000여 곡을 소유하고 있는 ATV 출판사에 대한 잭슨의 구매가 완료됐다.
2.4. 1986-1990: ''Bad'', 언론들의 거짓 보도, King of Pop
1986년 타블로이드 언론들은 잭슨이 노화를 늦추기 위해 고압 산소 챔버에서 잠을 잔다는 거짓 보도를 했다. 이는 잭슨이 언론을 통제하고 자신을 홍보하기 위해 꾸민 일이었으나, 언론은 잭슨에게 'Wacko Jacko'(미치광이 잭슨)라는 별명을 붙였다. 잭슨은 이 별명을 매우 싫어했다. 애틀랜틱(The Atlantic)은 "잭코(Jacko)"라는 이름이 인종차별적인 함축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과거 타블로이드 언론은 잭슨이 성전환 수술을 받고 남자 가수와 결혼하려 한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리기도 했다. 잭슨 측은 1984년 언론의 루머에 대해 반박 성명을 발표했지만, 언론은 더욱 자극적인 기사를 보도했다. 이로 인해 잭슨은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았고, 언론은 그를 은둔자적인 팝스타라고 묘사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잭슨의 피부는 백반증과 반흔성 홍반성 루푸스로 인해 점차 창백해졌지만, 언론은 그가 백인이 되고 싶어 피부 미백을 한다고 보도했다. 잭슨은 피부 질환을 가리기 위해 밝은 색조의 화장품과 피부 미백 크림을 사용했다. 그는 자신이 피부를 미백하지 않았다고 말하며 사람들의 오해에 상처받는다고 밝혔다.
1987년 잭슨은 앨범 《Bad》를 발매했다. 신시사이저를 적극 활용하여 더욱 날카로운 사운드를 선보였으며, 세계 평화와 시대상 비판을 주제로 한 곡들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빌보드 200 1위를 차지했으며, 5개의 싱글("I Just Can't Stop Loving You", "Bad", "The Way You Make Me Feel", "Man in the Mirror", "Dirty Diana")이 빌보드 핫 100 1위를 차지하는 신기록을 세웠다. 총 판매량은 3200만 장 이상으로 추정된다. 올 뮤직 가이드, 《큐 매거진》, 롤링 스톤 등에서 호평을 받았다. 1987년 한 해 동안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조사됐다. 잭슨은 단 2개의 음반으로 80년대 가장 많은 음반을 팔았으며, 모든 노래의 프로듀서에 참여하여 아티스트로서의 면모를 확고히 했다.
1987년 9월, Bad Tour를 개최했다. 총 123회 공연, 44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으며,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7회 연속 매진 기록을 세웠다. 공연 도중 관객 부상으로 안전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암표 문제가 논란이 되었다.
1988년 자서전 'Moon Walk'를 출판하여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같은 해 네버랜드를 건립했다. 얼마 후 소련 텔레비전 광고에 출연한 최초의 서방 연예인이 됐다.
1989년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잭슨을 'King Of Pop Rock Soul'이라고 칭하면서 'King Of Pop (팝의 황제)'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잭슨을 백악관으로 초청하여 세기의 아티스트상을 수여했다.
1990년 잭슨은 당시 슈퍼스타들의 평균 로열티(12%)보다 훨씬 높은 41%의 로열티를 지급받았다. 'Man in the mirror' 수익금을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2.5. 1991-1993: ''Dangerous'', 슈퍼볼, 전설상 수상
1991년 3월, 마이클 잭슨은 소니와 6,500만 달러 규모의 재계약을 체결했는데, 이는 닐 다이아몬드의 기록을 경신한 것이다. 같은 해 11월, 퀸시 존스 대신 테디 라일리와 프로듀싱한 정규 앨범 《Dangerous》를 발매하여 3,000만 장 이상 판매고를 올리며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 16위에 올랐다. 빌보드 200에서 4주 동안 1위를 차지했으며, 인종 화합 메시지를 담은 첫 싱글 'Black Or White'는 빌보드 차트에서 7주 동안 1위를 기록하며 평론가들에게도 호평을 받았다.
1992년에는 《Dangerous》가 전 세계에서 연간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선정되었고, 싱글 'Black Or White'는 빌보드 뮤직 어워드에서 세계적인 올해의 싱글 베스트셀러 상을 받았다. 싱글 'Heal the World'는 영국과 유럽에서 큰 인기를 얻었으며, 그래미 어워드에서 여러 상에 후보로 올랐고 최우수 엔지니어 앨범상을 수상했다. 잭슨은 'Heal The World Foundation'이라는 자선단체를 설립하여 자선 기부, 전쟁 피해 지역 지원, 불치병 환자 치료 등의 활동을 펼쳤고,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부시 대통령에게 상을 받았다. 또한, 6월 27일부터 'Dangerous World Tour'를 진행하여 소련과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 붕괴 이후 동구권 국가에서도 공연을 개최했다. 특히 루마니아 부카레스트 공연은 HBO에서 방영되어 미국 케이블 TV 역사상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AIDS 환자인 라이언 화이트의 죽음 이후 HIV/AIDS 연구 지원을 위해 노력했으며, 빌 클린턴 취임식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아프리카 방문 중 가봉에서는 가봉 국가 공훈 훈장을 받았고, 코트디부아르에서는 "사니 왕"으로 즉위했다.
1993년 1월 31일, 슈퍼볼 XXVII 하프타임 쇼에 출연하여 시청률 상승에 기여하며 이후 하프타임에 유명 가수들이 공연하는 문화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2월 10일에는 오프라 윈프리 쇼에 출연하여 인터뷰를 가졌는데, 미국 역사상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TV 프로그램 중 하나가 되었다. 같은 해 그래미 어워드에서 '살아있는 전설상'을 수상했다.
2.6. 1993-1994: 1번째 성추행 사건과 1번째 결혼
1993년 여름, 마이클 잭슨은 13세 소년 조던 챈들러를 성추행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 혐의는 마이클의 상업적 매력, 음악적 명예, 대중적 이미지를 크게 손상시켰다. 마이클을 후원하던 펩시는 협력 관계를 종료하고 모든 홍보 활동을 중단했다. 조던 챈들러의 아버지 이반 챈들러는 마이클에게 민사 소송을 제기하며 2000만 달러의 합의금을 요구했다.
이반 챈들러는 아들 조던에게 최면 진정제 'AMYTAL SODIUM'을 투여한 후 마이클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진술을 받아냈다. 이 약물은 부작용이 심각하며, 의식이 몽롱해지고 상대방의 말에 거역할 수 없는 상태가 되게 한다. 또한, 이 약물을 사용하여 거짓 기억을 심어주는 것이 가능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마이클 잭슨은 결백을 주장하며 합의를 거절했지만, 극심한 스트레스와 진통제 중독, 그리고 변호사들의 권유로 인해 1500만 달러에 민사 소송을 합의했다. 합의 내용에는 마이클 잭슨이 성추행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 명시되어 있다.
민사 소송과 별개로 형사 수사가 진행되었으나, 검찰은 증거 부족으로 1994년 9월 22일 조사를 중단하고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경찰이 제시한 증거들은 잭슨을 기소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마이클 잭슨은 큰 고통을 겪었고, 불면증과 약물 의존 증세가 심해졌다.
1994년 5월, 마이클 잭슨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1975년부터 만나왔으며, 매우 긴밀한 관계였다. 일각에서는 이 결혼이 이미지 회복을 위한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했지만,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한다고 반박했다.
2.7. 1995-2000: ''HIStory'', 2번째 결혼과 자녀
1995년 마이클 잭슨은 자신이 보유했던 ATV 뮤직 카탈로그의 지분 절반을 소니에 9500만 달러를 받고 매각하여 소니/ATV 뮤직 출판사가 설립되었다. 같은 해 6월, 정규 앨범 《HIStory: Past, Present and Future, Book I》를 발매했다. 이 앨범은 Disc 1에 마이클의 히트곡들이, Disc 2에는 신곡이 수록된 더블 앨범으로,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2주간 1위를 차지하고 미국에서 70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싱글 'You Are Not Alone'은 빌보드 데뷔 첫 주 만에 1위를 기록하며 '핫샷' 데뷔라는 신기록을 세웠다. 앨범은 2000만 장 이상 판매되었으며,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앨범 상 후보로도 지명되었고, 수록곡 'Scream'은 발매와 동시에 미국 빌보드 싱글 차트 5위에 올랐으며, 그래미에서 올해의 뮤직비디오 상을 수상했다. 유럽에서 발매된 싱글 'Earth Song'은 영국에서 6주간 1위를 기록했고, 독일에서는 100만 장 이상 판매되어 2x 플래티넘을 기록했다. 그러나 'They Don't Care About Us'의 가사 중 'Jew'라는 단어가 유대인을 비하한다는 논란이 일자, 마이클 잭슨은 공개 사과 후 가사 부분을 수정하여 앨범을 재발매했다.
1996년 9월, HIStory World Tour를 개최하여 5개 대륙 35개국에서 총 82회 공연, 45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그의 투어 중 가장 성공적인 기록을 세웠다. 같은 해,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2년간의 결혼 생활을 끝내고 이혼했으며, 11월에는 간호사 데비 로우와 재혼했다. 데비 로우는 1980년대 초반부터 마이클 잭슨의 백반증 치료를 담당했던 간호사로, 마이클 잭슨의 열렬한 팬이었다.
1997년 2월 13일, 첫 번째 자녀 마이클 조셉 잭슨 주니어가 태어났다. 같은 해 5월 20일, 리믹스 앨범 《Blood on the Dance Floor: HIStory in the Mix》를 발매했다. 이 앨범의 싱글 Blood on the Dance Floor (노래)는 미국 빌보드 핫 100에서 42위에 그쳤지만, 영국에서는 1위를 기록했다.
1998년에는 두 번째 자녀 패리스 마이클 캐서린 잭슨이 태어났다.
1999년,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와 독일 뮌헨에서 '마이클 잭슨과 친구들' 자선 공연을 개최했다. 같은 해 10월 8일, 데비 로우와 이혼했다.
2.8. 2001-2002: ''Invincible'', 9.11 자선, 발코니 논란
2001년 9월, 1984년 이후 처음으로 형제들과 다시 모여 뉴욕에서 마이클 잭슨 30주년 기념 공연을 열었다. 이 공연에는 마이아, 어셔, 휘트니 휴스턴, 데스티니스 차일드, 모니카, 라이자 미넬리, 슬래시가 출연했다. 닐슨 미디어 리서치에 따르면 11월에 TV로 방송되었을때 4천 5백만명이 시청했다. 10월에는 정규 앨범 《Invincible》이 발매되었으나, 빌보드 핫 100 1위 곡을 배출하지 못했고, 판매량은 700만 장에 그쳐 평론가들에게 혹평을 받았다. 앨범 제작 도중 마이클은 소속사와 마찰을 겪기도 했다.
911 테러 이후, 2001년 10월 21일 워싱턴 D.C.의 로버트 F. 케네디 기념 경기장에서 열린 유나이티드 위 스탠드: 왓 모어 캔 아이 기브 자선 콘서트에 참여하여 마지막으로 "왓 모어 캔 아이 기브"를 공연했다.
2002년에는 3번째 자녀 프린스 마이클 잭슨 2세가 태어났다. 어머니 신원은 확인되지 않았으며, 대리모를 통해 인공수정으로 얻은 아이라고 알려져있다. 11월 20일, 독일 베를린의 호텔에서 팬들을 향해 창가에서 프린스 마이클 잭슨 2세를 보여주다가 아기를 흔드는 듯한 모습으로 비춰져 논란이 되었다. 마이클 잭슨은 이에 대해 끔찍한 실수였다고 해명했다. 2002년 1월 9일, 잭슨은 세기의 아티스트로 22번째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를 수상했다. 2002년 4월 24일, 잭슨은 아폴로 극장에서 공연했다. 이 콘서트는 민주당 전국위원회와 전 대통령 빌 클린턴을 위한 모금 행사였으며 250만 달러를 모금하여 시민들이 투표하도록 장려하는데 사용되었다. 이 콘서트는 마이클 잭슨: 라이브 앳 더 아폴로라고 불렸으며 잭슨의 마지막 무대 공연 중 하나였다.
2.9. 2003-2005: 2번째 성추행 혐의와 재판, 무죄 판결
2003년 2월, 영국의 기자 마틴 바시르가 240일 동안 마이클 잭슨을 동행하며 찍은 다큐멘터리 'Living With Michael Jackson'이 방영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영국에서 1400만 가구가 시청했으며 총 시청자 수는 3800만 명으로 53.9%라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 프로그램은 방영 직후 큰 논란을 불러왔는데, 프로그램 속 마이클 잭슨은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고, 다큐 후반부에서 개빈 아르비조와의 모습이 문제가 되어 아동 성추행 재판이 일어나는 원인이 됐다. 마이클 잭슨 측은 큰 배신감과 분노를 느낀다며 성명을 발표했고, 자신의 행동을 악의적인 편집으로 왜곡한 것이라며 'The Michael Jackson Interview : The Footage You Were Never Meant To See'이라는 비디오를 제작하여 반박했다.
개빈 아르비조는 암에 걸렸지만 치료비가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었는데, 한 코미디 클럽 사장의 도움으로 마이클 잭슨을 만나게 되었다. 마이클 잭슨은 개빈의 치료비를 지원해주었고, 개빈은 이후 마이클 잭슨의 집인 네버랜드에 놀러 가는 등 둘 사이는 가까워졌다. 다큐에서 논란이 됐던 장면은 마이클 잭슨이 개빈과 상당히 친밀했으며 같이 한 방에서 논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마이클 잭슨은 "왜 아이들과 같이 놀고 자는 것이 문제인가? 그것을 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이상하다."라고 항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심리학자와 정신과 의사들은 마이클 잭슨과 개빈의 관계가 부적절해 보인다며 산타바버라의 어린이보호당국과 로스엔젤레스의 아동복지국에 자체적으로 조사에 착수해야 한다며 서신을 보냈다.
산타바버라 보안관 부서와 아동복지국은 비밀리에 조사에 착수했고, 아르비조 가족들과 접촉하여 마이클 잭슨과의 관계를 물었다. 개빈의 어머니인 재닛 아르비조는 잭슨은 아버지 같은 존재이며 다정한 사람이라고 칭찬하며 눈물을 흘렸고, 개빈은 성적인 행위는 없었다고 말했다. 아동복지국은 성추행 혐의가 없음을 밝히면서 사건을 종결했고, 로스엔젤레스 경찰당국과 산타바버라 카운티 보안국 또한 마이클 잭슨에게는 죄가 없다며 사건을 공식적으로 종결했다. 그러나 톰 스네던 검사는 이 결과를 무시하고 은폐했다.
마이클 잭슨의 변호사인 마크 제라고스는 정보를 얻기 위해 노력했고, 측근들은 마이클 잭슨에게 개빈 가족들과 거리를 두라고 충고했다. 마이클 잭슨이 거리를 두기 시작하자, 재닛 아르비조는 1993년 마이클 잭슨에게 소송을 건 조단 챈들러를 변호한 변호사 레리 펠드먼을 찾아갔다. 레리 펠드먼은 개빈을 데리고 스탄 캐츠라는 정신과 의사를 찾아갔고, 스탄 캐츠는 마이클 잭슨이 개빈에게 술을 먹이고 자위행위를 하도록 강요했다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1998년 8월, 개빈 가족은 J.C 페니 백화점에서 절도 혐의로 구금된 적이 있다. 재닛 아르비조는 백화점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걸었고, 백화점 측 정신과 의사는 재닛이 정신분열증과 망상증을 앓고 있다고 진단했다. 재닛은 2년 후 백화점을 상대로 또다시 민사소송을 걸었고, 백화점 측 변호사는 재닛이 이야기를 지어내서 말하며, 개빈 가족이 마이클 잭슨에게 고소를 한 것에 대해선 홈런을 치려는 작정인 것 같다고 말했다. 백화점은 2001년 13만 달러의 합의금을 주고 사건을 종결했다.
2003년 11월 20일, 경찰은 마이클 잭슨에 대해 체포 영장을 발부했다. 마이클 잭슨은 당시
2004년 검찰은 네버랜드를 압수수색하고 4월 톰 스네던 검사는 마이클 잭슨을 기소했다.
2005년 재판이 시작되고, 재닛 아르비조는 마이클 잭슨이 열기구로 자신과 아이들을 납치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재판 과정에서 마이클 잭슨을 방어하기 위해 네버랜드에서 마이클 잭슨과 같이 있던 아이들이 나와 성적인 일을 당한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또한, 재닛 아르비조가 주장한 납치 시기에 아르비조 가족들은 고급 식당에서 한화 700만 원 이상의 식사를 하고 마이클 잭슨에게 이를 대신 내줄 것을 요청했던 것이 드러났으며, 검찰의 주장과는 달리 성추행 증거를 입증할 DNA가 발견되지도 않았다.
2005년 6월 13일, 마이클 잭슨은 기소된 14가지 혐의에 대해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배심원단은 백인 7명, 히스페닉 4명, 아시아인 1명으로 흑인 배심원은 없었으며, 검찰은 해외까지 탐문하며 거금을 쏟아 수사를 벌였으나 마이클 잭슨의 유죄를 입증할 증거를 찾지 못했다.
마이클 잭슨의 사망 후인 2009년, FBI 파일이 공개됐는데, FBI는 마이클 잭슨에게 혐의점을 찾을 수 없었고, 아동복지국 조사 결과에서도 성추행을 당했다는 증언을 못 얻어 불기소 처분을 할 것을 권유했지만 검찰은 FBI와 아동복지국의 의견을 무시하고 마이클 잭슨을 기소한 것으로 확인됐다.
재판 이후 재닛 아르비조는 2007년 공문서 위조를 통해 최저 생계 비용을 부당으로 취득한 사실이 드러나 기소당하여 벌금과 사회봉사명령을 받았다. 이 재판으로 많은 사람들이 마이클 잭슨을 비난했고, 가장 바보스러운 미국인으로 수년간 뽑히는 등 명예가 크게 실추됐다. 마이클 잭슨은 이후 네버랜드 렌치를 떠나 로스앤젤레스 인근에 거처를 마련했고, 2009년 사망할 때까지 네버랜드를 단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
2.10. 2006-2009: 마지막
2006년 재판 이후 마이클 잭슨은 은둔 생활을 했다. 2005년 6월, 바레인(Bahrain)으로 가서 셰이크 압둘라의 손님이 되었다. 같은 해 MTV 재팬과 런던 뮤직 어워드에서 상을 받기 위해 모습을 드러냈으며, 6월에는 일본의 방송 프로그램인 SMAP×SMAP에 출연했다. 한편, 잭슨이 거주했던 네버랜드는 돈 문제로 인해 안채가 폐쇄되었고, 당시 재정적으로 위태로운 상황에 있었다고 한다.
2008년, Thriller 25주년을 기념하여 잭슨과 소니는 Thriller 25를 발매했다. 앨범에는 기존의 Thriller 곡들이 수록됐고, 새롭게 리믹스 시킨 곡과 미공개 곡이 함께 추가됐다. 카니예 웨스트, 에이콘, 퍼기, 윌 아이 엠 등이 앨범 작업에 참여했다. 전 세계에서 300만 장이 팔렸고, 벨기에, 콜롬비아, 유럽, 인도 차트에서 1위를 했다. 또한 같은 해 King of Pop이라는 베스트앨범이 발매된다.
2009년 3월, 마이클 잭슨은 영국 런던에서 복귀를 선언했다. 그는 이번 공연이 마지막이 될 것이며 팬들이 원하는 노래를 부를 것이라고 했다. 처음 10회의 공연이 계획됐는데 표가 빠르게 매진되자 40회의 공연이 더 추가됐다. 공연은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O2 아레나에서 7월 13일부터 2010년 3월 6일까지 열릴 것으로 계획되었고, 75만 개의 티켓은 전부 매진되었다. 그러나 2009년 6월 25일, 잭슨은 프로포폴과 벤조디아제핀 과다 복용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개인 주치의인 콘래드 머레이는 렌트한 로스앤젤레스 할름비 힐스 저택에서 잭슨이 수면을 취하도록 여러 가지 약물을 투여했다. 잭슨의 사망 원인은 프로포폴 과다 복용이었다.
사망 소식은 온라인을 통해 빠르게 퍼져나가 웹사이트들이 사용자 과부하로 속도가 느려지거나 크래시되는 원인이 되었고, 구글, AOL 인스턴트 메신저, 트위터, 위키백과를 포함한 많은 서비스와 웹사이트에 전례 없는 부담을 안겨주었다.
3. 사생활
마이클 잭슨은 평소 팬들과 사람들에게 타블로이드 신문을 읽거나 믿지 말라고 강조했다. 정규 5집 《HIStory: Past, Present and Future, Book I》의 수록곡 'Tabloid Junkie'에서 이러한 입장을 분명히 했다. 1970년대 타블로이드 언론은 잭슨의 높은 목소리를 근거로 그가 동성애자라는 소문을 퍼뜨렸고, 1980년대에는 'Wacko Jacko'라는 별명을 붙여 그의 이미지를 실추시켰다. '잭코(Jacko)'라는 이름은 자코 마카코(Jacco Macacco)에서 유래했으며, 코크니 슬랭(Cockney slang)에서 일반적으로 원숭이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어 인종차별적인 함축을 내포하고 있었다. 1993년 1차 성추행 사건 이후 잭슨과 타블로이드 언론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타블로이드 언론들은 잭슨이 사망한 후에도 거짓 기사를 보도했다. 마이클 잭슨 유산 관리원 측은 이러한 보도가 사실이 아니며, 잭슨을 이용해 이익을 얻으려는 타블로이드 언론을 혐오한다고 밝혔다. 팬들에게 잭슨의 업적을 보호하는 데 함께 해 줄 것을 요청했다.
타블로이드 언론의 기사 작성 과정에는 브로커가 개입하여 거액의 돈이 오가는 경우가 있다. 브로커 바레시는 1991년 잭슨의 집에서 10개월간 일했던 필립 르마르크에게 10만 달러를 제안하며 잭슨이 맥컬리 컬킨의 성기를 만졌다고 거짓 증언을 강요했다. 컬킨은 재판에서 르마르크의 주장을 부인하고 잭슨을 옹호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잭슨의 피부색이 옅어지면서 피부 미백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의 피부과 의사 아놀드 클라인(Arnold Klein)은 1983년에 잭슨이 백반증을 앓고 있다고 진단했으며, 1986년에는 반흔성 홍반성 루푸스를 진단했다. 잭슨은 백반증으로 인한 피부 얼룩을 가리기 위해 밝은 색조의 화장품과 피부 미백 크림을 사용했다. 그는 피부를 고의로 미백한 것이 아니라며, 사람들이 자신이 원래 모습대로 있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를 지어낼 때 상처받는다고 말했다.
1988년 자서전과 1993년 인터뷰에서 잭슨은 두 번의 코 성형술과 턱 성형술을 받았다고 밝혔다. 1980년대 초 춤을 추기 위해 식단을 바꾸면서 체중이 감소했고, 이로 인해 거식증을 앓고 있다는 추측이 제기되기도 했다. 잭슨의 어머니는 그가 "얼룩덜룩한 소"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 백반증 치료를 위해 성형 수술을 시작했으며, 이후 성형 수술에 중독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1986년에는 잭슨이 노화를 늦추기 위해 고압 산소 챔버에서 잠을 잔다는 보도가 나왔다. 잭슨은 이를 부인했지만, 그가 유리 챔버에서 자는 사진을 내셔널 인콰이어러(The National Enquirer)에 유출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마돈나, 아프로다이트 존스, 토마스 메제로우 변호사, 찰스 톰슨 등은 언론이 잭슨을 표적으로 삼아 그의 파멸을 기도하고, 검찰 측 주장에 맞춰 보도를 왜곡하는 등 편향적인 보도를 했다고 비판했다.
마이클 잭슨은 무대 위 모습과는 다르게 아주 내성적이고 소심하며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었다. 시드니 루멧은 "마이클은 너무 수줍음을 타서 등을 돌리고 노래를 불렀다"라고 증언했으며, 프로듀서 퀸시 존스도 잭슨의 내성적인 성격을 보고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한다. 2003년 비행기 승객 프로필에 잭슨에 관해 "매우 소심함"이라고 명시된 것이 확인되었다. 1984년 백악관에 갔을 때 정부 관료들이 한데 모여있는 것을 보고 겁이 나 화장실로 도망갔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마이클 잭슨은 잦은 성형 수술과 눈에 띄는 피부색 변화로 대중매체의 주목을 받으며 논쟁과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1979년 무대에서 코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처음 성형 수술을 받았다. 1984년에는 머리 화상으로 인해 안면 골격과 피부에 후유증이 남았다. 1988년 자서전 《문워크》에서 그는 코 두 번, 턱 한 번 성형 수술을 받았다고 밝혔다.
피부색 변화는 백반증이라는 질병 때문이며, 사후 부검 보고서에서 공식적으로 밝혀졌다. 1993년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그는 『오프 더 월』부터 『스릴러』 시절 병이 진행되기 시작했으며, 온몸의 피부색이 얼룩덜룩하게 변해갔다고 밝혔다. 1990년대 이후 병세는 급격히 악화되어 외출 시에는 자외선을 차단하기 위해 항상 큰 모자, 우산, 선글라스, 마스크를 착용해야 했다. 그의 메이크업을 담당했던 카렌 페이는 "처음에는 흰 부분을 갈색 파운데이션으로 가렸지만, 백반증이 온몸으로 퍼지자 하얗게 화장하는 것으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아버지인 조지프 잭슨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조지프 잭슨은 2010년 그의 아내인 캐서린 잭슨과 이혼했는데, 그 이유는 조지프 잭슨이 마이클 잭슨의 유산 분쟁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잭슨은 총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데비 로 사이에서 얻은 마이클 조셉 잭슨 주니어와 패리스 마이클 캐서린 잭슨, 그리고 대리모를 통해 얻은 프린스 마이클 잭슨 2세가 있다. 이중 마이클 조셉 잭슨 주니어는 백반증에 걸린 듯한 사진이 보도되어 화제를 모았다.
소년 시절 조셉 잭슨으로부터 아동 학대를 받았다는 사실을 밝혔는데, 노래와 춤 레슨은 매우 엄격했으며, 벨트 등 주변에 있는 어떤 것이든 이용하여 맞았다고 한다. 또한 학대는 신체적 학대에만 그치지 않고 "큰 코" 등 외모도 계속 조롱당했다고 한다.
형제들과도 문제가 많았는데, 친형 저메인 잭슨이 1991년 발표한 음반 'You Said'에 수록된 곡 'Word To Badd'는 마이클 잭슨의 외모를 비난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큰 충격과 논쟁을 불렀다. 친누나 라토야 잭슨은 플레이보이 잡지에 나오기 위하여 잭슨의 스릴러 분장을 한 뒤 누드 사진을 찍었는데 이 또한 큰 파장을 몰고왔으며, 잭슨이 1993년 아동 성추행 혐의로 힘들어 할 때 거짓 증언을 함으로 잭슨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라토야는 50만 달러를 제시하면 성추행 사건의 결정적 증거를 제시하겠다는 발언도 했다.
마이클과 형제들끼리의 문제는 마이클이 죽고나서도 이어지고 있다. 마이클 잭슨의 엄청난 유산과 마이클 잭슨의 이름으로 발생하는 향후 수입 때문이다. 2002년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유서 내용은 잭슨의 형제자매들에게 있어서 큰 충격과 같았다. 유서에는 자신들에게 지급하는 돈이 없기 때문이다. 형제들은 잭슨의 유산을 담당하는 변호사를 비난하며 유서가 조작됐으니 유산집행 변호사가 퇴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이클 잭슨의 자녀 패리스 마이클 캐서린 잭슨이 약물을 과다 복용하고 칼로 손목을 베어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었다.
첫 번째 아내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는 2년도 못 되어 이혼했다. 이혼 사유에 대해 리사는 "평범한 결혼 생활이었다. 성관계도 했다. 하지만 그가 어느 시점에, 그의 피를 빨아먹는 사람들과 마약, 혹은 그들과 나 중에서 선택해야 했고, 그는 나를 멀리하는 것을 선택했다"고 말하고 있다.
두 번째 아내 데비 로는 "성관계는 전혀 없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다른 인종 간에 태어난 아이에게도 흑인적인 외모 특징이 일부 보일 텐데, 마이클의 아이는 코카소이드적인 특징만 눈에 띄는 점에 의문을 갖는 사람이 적지 않다.
마이클은 꾸준히 세 아이의 아버지라고 주장해 왔지만, 2015년 SNS에서 장남 프린스 잭슨은 마이클이 친부가 아니라고 인정하는 발언을 했다. 차남 비지 잭슨(2015년에 블랑켓에서 비지로 개명. 프린스 마이클 2세)은 대리모 출산을 통해 태어났다. 한편, 자녀에 대해서는 프라이버시를 지키는 데 신경 썼다. 세 아이 중 패리스 잭슨은 특히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침실 벽을 마이클의 포스터로 덮었다고 한다.
2014년 3월, 가수 브랜턴 하워드가 미키 하워드의 아들이며, DNA 감식 결과 마이클 잭슨의 자녀일 가능성이 99.9%라는 보도가 있었다. 브랜턴은 이에 대해, 비벌리힐스의 한 치과의사가 경매에서 마이클 잭슨이 사용하던 치과용 기구를 입수하여 그 기구에서 마이클 잭슨의 DNA를 채취, 임의로 감식을 진행했다고 주장했다. 이 보도에 대해 브랜턴은 영상 메시지를 통해 "나는 마이클 잭슨과의 DNA 감식을 승인한 적이 없다"라고 의혹을 강력하게 부인했다.
3.1. 언론과 루머
마이클 잭슨은 평소 팬들과 사람들에게 타블로이드 신문을 읽거나 믿지 말라고 강조했다. 정규 5집 《HIStory: Past, Present and Future, Book I》의 수록곡 'Tabloid Junkie'에서 이러한 입장을 분명히 했다. 1970년대 타블로이드 언론은 잭슨의 높은 목소리를 근거로 그가 동성애자라는 소문을 퍼뜨렸고, 1980년대에는 'Wacko Jacko'라는 별명을 붙여 그의 이미지를 실추시켰다. '잭코(Jacko)'라는 이름은 1820년대 초 웨스트민스터 핏(Westminster Pit)에서 원숭이 투견에 사용된 원숭이인 자코 마카코(Jacco Macacco)에서 유래했으며, 코크니 슬랭(Cockney slang)에서 일반적으로 원숭이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어 인종차별적인 함축을 내포하고 있었다. 1993년 1차 성추행 사건 이후 잭슨과 타블로이드 언론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타블로이드 언론들은 잭슨이 사망한 후에도 거짓 기사를 보도했다. 마이클 잭슨 유산 관리원 측은 이러한 보도가 사실이 아니며, 잭슨을 이용해 이익을 얻으려는 타블로이드 언론을 혐오한다고 밝혔다. 팬들에게 잭슨의 업적을 보호하는 데 함께 해 줄 것을 요청했다. CNN 또한 타블로이드 언론의 보도를 반박했다.
타블로이드 언론의 기사 작성 과정에는 브로커가 개입하여 거액의 돈이 오가는 경우가 있다. 브로커 바레시는 1991년 잭슨의 집에서 10개월간 일했던 필립 르마르크에게 10만 달러를 제안하며 잭슨이 맥컬리 컬킨의 성기를 만졌다고 거짓 증언을 강요했다. 컬킨은 재판에서 르마르크의 주장을 부인하고 잭슨을 옹호했다. 바레시는 1994년 PBS "Frontline" 인터뷰에서 르마르크 부부와 거래한 이유가 돈 때문이었으며, 잭슨의 유죄 여부는 자신과 상관없다고 밝혔다.
1980년대 중반부터 잭슨의 피부색이 옅어지면서 피부 미백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의 피부과 의사 아놀드 클라인(Arnold Klein)은 1983년에 잭슨이 백반증을 앓고 있다고 진단했으며, 1986년에는 반흔성 홍반성 루푸스를 진단했다. 잭슨은 백반증으로 인한 피부 얼룩을 가리기 위해 밝은 색조의 화장품과 피부 미백 크림을 사용했다. 그는 피부를 고의로 미백한 것이 아니라며, 사람들이 자신이 원래 모습대로 있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를 지어낼 때 상처받는다고 말했다.
1988년 자서전과 1993년 인터뷰에서 잭슨은 두 번의 코 성형술과 턱 성형술을 받았다고 밝혔다. 1980년대 초 춤을 추기 위해 식단을 바꾸면서 체중이 감소했고, 이로 인해 거식증을 앓고 있다는 추측이 제기되기도 했다. 잭슨의 어머니는 그가 "얼룩덜룩한 소"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 백반증 치료를 위해 성형 수술을 시작했으며, 이후 성형 수술에 중독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1986년에는 잭슨이 노화를 늦추기 위해 고압 산소 챔버에서 잠을 잔다는 보도가 나왔다. 잭슨은 이를 부인했지만, 그가 유리 챔버에서 자는 사진을 내셔널 인콰이어러(The National Enquirer)에 유출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잭슨 측은 챔버의 존재는 인정했지만, 그 안에서 잠을 자는지는 확인해주지 않았다.
마돈나, 아프로다이트 존스, 토마스 메제로우 변호사, 찰스 톰슨 등은 언론이 잭슨을 표적으로 삼아 그의 파멸을 기도하고, 검찰 측 주장에 맞춰 보도를 왜곡하는 등 편향적인 보도를 했다고 비판했다. 특히 2005년 마이클 잭슨 재판 관련 보도에 대해, 재판 기록과 달리 잭슨에게 불리한 내용만 부각하고, 무죄 평결 후에도 반성이나 사과 없이 잭슨을 비방하는 보도를 지속했다고 지적하며, 이를 저널리즘 역사상 가장 부끄러운 사건 중 하나라고 비판했다.
3.2. 성격
마이클 잭슨은 무대 위 모습과는 다르게 아주 내성적이고 소심하며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었다. 시드니 루멧은 "마이클은 너무 수줍음을 타서 등을 돌리고 노래를 불렀다"라고 증언했으며, 프로듀서 퀸시 존스도 잭슨의 내성적인 성격을 보고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한다. 2003년 비행기 승객 프로필에 잭슨에 관해 "매우 소심함"이라고 명시된 것이 확인되었다. 1984년 백악관에 갔을 때 정부 관료들이 한데 모여있는 것을 보고 겁이 나 화장실로 도망갔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마이클 잭슨의 어머니 캐서린 잭슨은 마이클이 심할 때는 자신과 눈도 마주치지 않을 만큼 부끄러움을 탔으며 집에서 고독을 즐기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마이클의 지인은 마이클이 가수를 안 했으면 사탕가게를 운영하며 골방에 박혀 늙었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3.3. 외모, 피부색, 성형
마이클 잭슨은 잦은 성형 수술과 눈에 띄는 피부색 변화로 대중매체의 주목을 받으며 논쟁과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1979년 무대에서 코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처음 성형 수술을 받았다. 1984년에는 머리 화상으로 인해 안면 골격과 피부에 후유증이 남았고, 어린 시절 가족으로부터 "큰 코"라는 놀림을 받아 외모에 대한 열등감을 가졌던 것도 있어, 이후 코와 턱을 중심으로 성형 수술을 반복했다. 1988년 자서전 《문워크》에서 그는 코 두 번, 턱 한 번 성형 수술을 받았다고 밝혔다.
한편, 피부색 변화는 백반증이라는 질병 때문이며, 사후 부검 보고서에서 공식적으로 밝혀졌다. 1993년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그는 『오프 더 월』부터 『스릴러』 시절 병이 진행되기 시작했으며, 온몸의 피부색이 얼룩덜룩하게 변해갔다고 밝혔다. 1990년대 이후 병세는 급격히 악화되어 외출 시에는 자외선을 차단하기 위해 항상 큰 모자, 우산, 선글라스, 마스크를 착용해야 했다. 그의 메이크업을 담당했던 카렌 페이는 "처음에는 흰 부분을 갈색 파운데이션으로 가렸지만, 백반증이 온몸으로 퍼지자 하얗게 화장하는 것으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1984년 입은 머리 화상도 병의 진행을 앞당겼다고 알려져 있다.
3.4. 가족 관계
아버지인 조지프 잭슨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조지프 잭슨은 2010년 그의 아내인 캐서린 잭슨과 이혼했는데, 그 이유는 조지프 잭슨이 마이클 잭슨의 유산 분쟁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잭슨은 총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데비 로 사이에서 얻은 마이클 조셉 잭슨 주니어와 패리스 마이클 캐서린 잭슨, 그리고 대리모를 통해 얻은 프린스 마이클 잭슨 2세가 있다. 이중 마이클 조셉 잭슨 주니어는 백반증에 걸린 듯한 사진이 보도되어 화제를 모았다.
소년 시절 조셉 잭슨으로부터 아동 학대를 받았다는 사실을 밝혔는데, 노래와 춤 레슨은 매우 엄격했으며, 벨트 등 주변에 있는 어떤 것이든 이용하여 맞았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본 어머니 캐서린 잭슨은 "그만해! 죽겠어! 죽여버릴 거야!"라며 울부짖었다고 한다. 또한 학대는 신체적 학대에만 그치지 않고 "큰 코" 등 외모도 계속 조롱당했다고 한다.
형제들과도 문제가 많았는데, 친형 저메인 잭슨이 1991년 발표한 음반 'You Said'에 수록된 곡 'Word To Badd'는 마이클 잭슨의 변화하는 외모를 비난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큰 충격과 논쟁을 불렀다. 친누나 라토야 잭슨은 플레이보이 잡지에 나오기 위하여 잭슨의 스릴러 분장을 한 뒤 누드 사진을 찍었는데 이 또한 큰 파장을 몰고왔으며, 잭슨이 1993년 아동 성추행 혐의로 힘들어 할 때 거짓 증언을 함으로 잭슨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라토야는 50만 달러를 제시하면 성추행 사건의 결정적 증거를 제시하겠다는 발언도 했다. 당시 이 거짓 증언으로 잭슨은 엄청난 분노를 토로했다고 다큐 프로그램 'The Life of an Icon'에서 측근이 회고했다. 후 라토야 잭슨은 자신의 남편이었던 '잭 고든'의 협박으로 인해 자신은 노예같은 삶을 살았으며 어쩔 수 없이 누드 사진을 찍었고 돈을 얻기 위해 거짓 증언을 했었다고 뉘우쳤다. 잭슨의 팬들에게 잭슨의 형제는 이러한 일들 때문에 크게 비난당하고 있다.
마이클과 형제들끼리의 문제는 마이클이 죽고나서도 이어지고 있다. 마이클 잭슨의 엄청난 유산과 마이클 잭슨의 이름으로 발생하는 향후 수입 때문이다. 2002년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유서 내용은 잭슨의 형제자매들에게 있어서 큰 충격과 같았다. 유서에는 자신들에게 지급하는 돈이 없기 때문이다. 형제들은 잭슨의 유산을 담당하는 변호사를 비난하며 유서가 조작됐으니 유산집행 변호사가 퇴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이클 잭슨의 자녀 패리스 마이클 캐서린 잭슨이 약물을 과다 복용하고 칼로 손목을 베어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주었다. 잭슨의 유가족들이 그의 소속사였던 'AEG라이브'를 상대로 건 배상 청구 소송에서 증언을 하기로 한 데 따른 중압감이라고 언론들은 추측했다.
첫 번째 아내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는 2년도 못 되어 이혼했다. 이혼 사유에 대해 리사는 "평범한 결혼 생활이었다. 성관계도 했다. 하지만 그가 어느 시점에, 그의 피를 빨아먹는 사람들과 마약, 혹은 그들과 나 중에서 선택해야 했고, 그는 나를 멀리하는 것을 선택했다"고 말하고 있다.
두 번째 아내 데비 로는 "성관계는 전혀 없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다른 인종 간에 태어난 아이에게도 흑인적인 외모 특징이 일부 보일 텐데, 마이클의 아이는 코카소이드적인 특징만 눈에 띄는 점에 의문을 갖는 사람이 적지 않다.
마이클은 꾸준히 세 아이의 아버지라고 주장해 왔지만, 2015년 SNS에서 장남 프린스 잭슨은 마이클이 친부가 아니라고 인정하는 발언을 했다. 차남 비지 잭슨(2015년에 블랑켓에서 비지로 개명. 프린스 마이클 2세)은 대리모 출산을 통해 태어났다. 한편, 자녀에 대해서는 프라이버시를 지키는 데 신경 썼다. 세 아이 중 패리스 잭슨은 특히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침실 벽을 마이클의 포스터로 덮었다고 한다.
2014년 3월, 가수 브랜턴 하워드가 미키 하워드의 아들이며, DNA 감식 결과 마이클 잭슨의 자녀일 가능성이 99.9%라는 보도가 있었다. 브랜턴은 이에 대해, 비벌리힐스의 한 치과의사가 경매에서 마이클 잭슨이 사용하던 치과용 기구를 입수하여 그 기구에서 마이클 잭슨의 DNA를 채취, 임의로 감식을 진행했다고 주장했다. 이 보도에 대해 브랜턴은 영상 메시지를 통해 "나는 마이클 잭슨과의 DNA 감식을 승인한 적이 없다",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 DNA 샘플을 제공하는 것에 동의했을 뿐, 이런 식으로 사용될 줄은 몰랐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내가 마이클 잭슨의 아들이라고 주장한 적이 없으며, 그의 유산을 노릴 의도도 전혀 없다"라며 의혹을 강력하게 부인했다. 브랜턴의 친부인 오지 존슨도 "브랜턴은 내 아들이다", "DNA 감식을 받아도 좋다"라고 언론에 밝혔다. 또한, 브랜턴의 출생 시기 등을 고려하여 마이클 잭슨의 히트곡 "빌리 진"이 미키 하워드를 노래한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있었지만, 미키 하워드는 이를 부인했다. 마이클 잭슨 본인도 생전에 "빌리 진은 실존 인물을 노래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참고로, 미키 하워드와 마이클 잭슨이 교제했다는 보도는 과거에 없었다. 이후, 감식 결과 용지가 위조품이라는 보도가 나오는 등 감식 자체의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4. 아티스트적 면모
4.1. 음악 스타일
잭슨은 주로 R&B, 팝, 솔, 록을 다뤘다. 제임스 브라운, 다이애나 로스, 재키 윌슨, 프레드 아스테어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잭슨은 잭슨 파이브 시절부터 솔로 마지막 정규 음반까지 조금씩 다른 음악적 스타일을 보였다. 모타운 시절에는 댄스, 소프트 록, 재즈, 발라드를 주 장르로 했지만, Off the Wall을 발매하면서 펑크, 팝 발라드, 재즈, 소울 등의 성숙한 음악을 선보였다. 80 ~ 90년대에는 R&B, 뉴 잭스 윙 적인 음악을 했으며, 2001년 Invincible에서는 독특한 어번 R&B 음악에 미래적인 사운드를 첨가했다.
잭슨은 자신의 음악에 여러 메시지를 담았다. 'Beat it'은 싸움이 날 것 같으면 도망치라는 메시지를, 'Man in the Mirror'는 세상을 바꾸고 싶으면 자신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Smooth Criminal'은 성폭행과 살인 같은 범죄를, 'Bad'는 나쁜 길로 빠지지 말 것을, 'Leave Me Alone'은 자신을 향한 언론들의 공격적 보도에 그만둘 것을 권유하고 있다.
Dangerous 음반부터 사회 비판적 메시지가 강해졌다. 'Heal the World', 'We Are The World'는 전쟁 반대, 화합과 자선을 강조하며, 'They Don't Care About Us'는 극우주의자들에 대한 비난 기사를 담고 있다. 'Gone Too Soon'은 에이즈로 사망한 라이언 화이트를 추모하기 위한 곡이며, 'Earth Song'은 지구환경에 대한 경고, 'Childhood'는 그의 어린시절에 대해, 'Stranger in Moscow'는 모스크바에서 고독함을 느낀 자신의 처지에 대한 것이다. 'D.S'는 1993년 자신을 수사한 검사 톰 스네던을 인종차별 주의자라고 비판하며, 'Tabloid Junkie'는 타블로이드 언론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다. 'You are not alone'과 'Will you be there'는 사랑과 고독의 의미를 강조한다.
잭슨은 제임스 브라운, 리틀 리처드, 재키 윌슨, 다이애나 로스, 프레드 아스테어,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 진 켈리, 데이비드 러핀 등 많은 음악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브라운은 그의 가장 큰 영감이었다. 잭슨의 보컬 기법은 다이애나 로스의 영향을 받았으며, 데이비드 윈터스는 잭슨이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좋아했으며, "Beat It"과 "Bad" 뮤직비디오에서 이 영화에 경의를 표했다고 말했다.
잭슨은 정식 음악 교육을 받지 않았고 악보를 읽거나 쓸 줄 몰랐지만, 기타, 키보드, 드럼을 연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곡할 때 그는 비트박스와 성대모사를 통해 악기를 연주하는 소리를 녹음했다.
잭슨은 팝, 소울, 리듬 앤 블루스, 펑크, 록, 디스코, 포스트 디스코, 댄스 팝 그리고 뉴 잭 스윙 장르를 탐구했다. 스릴러는 오프 더 월의 강점을 발전시켜 댄스와 록 트랙은 더욱 공격적이었고, 팝 튜닝과 발라드는 더 부드럽고 소울풀했다. "빌리 진"에서 잭슨은 자신이 자신의 아이를 낳았다고 주장하는 집착적인 팬을 묘사하고, "워너 비 스타틴 섬띵"에서는 험담과 언론에 반박한다. "비트 잇"은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오마주하여 갱 폭력을 비난했으며, 잭슨의 첫 번째 성공적인 록 크로스오버 작품이었다. "스릴러"는 잭슨의 초자연적 주제에 대한 관심의 시작을 알렸다. 1985년 잭슨은 자선가곡 "위 아 더 월드"를 공동 작곡했다.
배드에서 잭슨의 포식적인 연인에 대한 개념은 록 노래 "더티 디아나"에서 볼 수 있다. "스무스 크리미널"은 피비린내 나는 폭행, 강간, 그리고 아마도 살인을 연상시키는 노래이다. 데인저러스는 사회적 병폐가 주요 주제가 된 첫 번째 잭슨 앨범이었다. 히스토리는 편집증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D.S."에서 잭슨은 두 건의 아동 성 학대 사건에서 그를 기소했던 토마스 W. 스네든 주니어(Thomas W. Sneddon Jr.) 변호사를 공격한다. 인빈서블에는 힙합, 팝, R&B를 믹스한 음악이 포함되어 있다.
4.2. 보컬 스타일
마이클 잭슨은 4 옥타브에 달하는 넓은 음역과 뛰어난 표현력을 가진 보컬리스트로 알려져 있다. 비평가들은 그의 보컬이 장르에 따라 맑고 부드러운 것부터 거칠고 공격적인 것까지 다양하다고 평가했다.
어린 시절부터 노래를 시작한 잭슨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목소리와 보컬 스타일에 변화를 겪었다. 1971년부터 1975년 사이에는 보이 소프라노에서 서정적인 테너로 변화했다. 1970년대 후반 오프 더 월(Off the Wall) 앨범을 발표하면서 보컬리스트로서의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했고, 롤링 스톤지는 그의 보컬을 스티비 원더의 "숨 막힐 듯한 몽환적인 더듬거림"에 비유하며 "잭슨의 섬세한 음색의 테너는 매우 아름답다. 놀라울 정도로 대담하게 사용되는 놀라운 팔세토로 부드럽게 이어진다"라고 평가했다. 1982년 스릴러(Thriller) 앨범에서는 "슬픔이 묻어나는" "완전히 성숙한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다고 평가받았다.
잭슨은 스타카토, 레가토, 팔세토뿐만 아니라 보컬 딸꾹질, 즉흥적인 음절, 울부짖음, 그르렁거림과 같은 독특한 스타일을 구사했다. 이러한 스타일은 그의 음악적 특징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특히 노래를 부를 때 특유의 딸꾹질 창법(윽-억, 히히 등)을 사용하는데, 이는 1973년 "It's Too Late to Change the Time"에서 처음 시작되었으며, "Get It Togethe" 앨범에서 잘 드러난다. 또한, "Come on"을 "C'mon", 'Cha'mone", "Shamone"으로 고의적으로 다르게 발음하기도 했다.
1990년대에는 데인저러스(Dangerous) 앨범에서 "숨을 헐떡이고, 목소리가 불안함으로 떨리거나 절박한 속삭임으로 떨어지며, 이를 악문 채 쉿 하는 소리를 낸다"라는 평을 받으며 "비참한 음색"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형제애나 자존감에 대해 노래할 때는 "부드러운" 보컬로 돌아왔다. 2001년 발매된 인빈시블(Invincible) 앨범에서는 43세의 나이에도 "정교하게 표현된 리듬 트랙과 진동하는 보컬 하모니"를 선보였다. 조셉 보겔은 잭슨이 비언어적 소리를 사용하여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에 주목했다.
잭슨은 자신의 목소리를 유지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인빈시블 앨범의 "2000 Watts"에서는 디지털 처리로 오해받을 만큼 낮은 목소리를, "버터플라이즈"에서는 부드러운 팔세토를 선보이는 등, 다양한 보컬 레인지를 보여주었다. 보이스 퍼커션에도 능숙하여, 1993년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후 이즈 잇"을 보이스 퍼커션만으로 선보이기도 했다.
잭슨의 본래 목소리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었다. 높은 톤의 목소리 때문에 여성호르몬 주사를 맞는다는 루머가 있었으나, 보컬 트레이너 세스 릭스는 "마이클 잭슨은 아이처럼 남고 싶어 의도적으로 고음의 목소리를 냈다"라고 말했다. 리사 마리 프레슬리는 "잭슨은 항상 고음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라고 말했으며, 라이오넬 리치는 "잭슨은 자신의 성대를 보호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가늘픈 고음의 목소리를 낸다. 그는 저음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2005년 재판 당시 잭슨과 함께 작업한 음악인은 "잭슨은 화를 낼 때는 중저음으로 말했다"라고 증언했다.
어린 시절 잭슨의 보컬에 대해 나얼은 "지금 들어도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아름다워요. 스티비 원더와 함께 저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뮤지션이죠."라고 평가했고, 김범수는 "마이클 잭슨의 어릴 때 미성은 흉내내기도 어려울 만큼 너무 예쁘고, 멋있고, 훌륭해요."라고 평가했다. 모타운 창립자 베리 고디는 잭슨이 30살의 감성으로 노래를 불렀다며 그의 실력을 칭찬했다.
성인 시절의 보컬에 대해 김영대 음악평론가는 "잭슨은 그 목소리만으로도 흑백을 통틀어 역대 팝 보컬리스트 중 열 명 안에 꼽아 억울할 게 없는 인물일 것"이라며 그의 발라드, 댄스, 록 모든 장르에서의 뛰어난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오페라 테너 네일 쉬코프는 "그 어떤 테너도 마이클 잭슨과 같은 수준으로 데시벨이 올라간 적은 없었습니다."라고 평가했다.
4.3. 뮤직 비디오 및 안무
잭슨은 자신의 노래와 춤만큼 뛰어난 뮤직 비디오를 선보였다. 복잡한 스토리 라인과 특유의 댄스 효과 등이 돋보이며, 'Thriller' 뮤직비디오는 지금까지 가장 성공적인 뮤직비디오로 선정돼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그의 뮤직비디오 안무는 필리핀의 한 교도소에서 죄수들이 춤을 추며 패러디하여 5400만이라는 조회수를 기록했으며, 슈렉에도 응용됐다.
마틴 스콜세지와 협력하여 만든 'Bad' 뮤직비디오는 총 19분으로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성적 이미지와 안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1993년 오프라 윈프리쇼에서 잭슨은 가랑이를 잡는 특유의 행동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며 계획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Smooth criminal' 뮤직비디오에서는 45도 각도로 기울어지는 춤(제로 그래비티)을 선보였으며, 이를 위해 특수 신발을 개발하여 특허를 취득했다.
1991년 11월 14일 27개국에서 공개된 'Black or White' 뮤직비디오는 후반부 성적인 이미지와 폭력적인 장면이 묘사되어 논란이 되었고, 잭슨은 이에 대해 사과했다. 이 뮤직비디오는 당시 27개국에 동시 방송되어 5억명 이상이 시청한 것으로 집계됐다. 'Remember the time'은 이집트에서 촬영했으며 잭슨이 가루에서 사람으로 변하는 획기적인 시각적 효과를 사용하고 있다. 'In The Closet'은 잭슨의 뮤직비디오 중 가장 성적으로 도발적인 작품이며, 슈퍼 모델인 나오미 캠벨도 출연했다.
1995년 'Scream'은 700만 달러를 투자하여 제작하였는데 이는 역사상 가장 많은 비용이 든 뮤직비디오이며, 기네스북에도 등재됐으며 그래미에서도 최우수 뮤직비디오로 수상을 한다. 'Ghost'의 뮤직비디오는 총 38분으로 가장 긴 뮤직비디오로 기네스북 기록에도 등재됐다. 'They Don't Care About Us'는 교도소에서 촬영한 것과 브라질 빈민촌에서 촬영한 것 총 두가지의 뮤직비디오가 있다. 'You are not alone'은 그의 전 아내인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상의를 벗은 채 함께 등장한다.
잭슨은 어린 시절부터 잭슨 5의 일원으로 춤을 추었으며, 그의 공연과 뮤직비디오에 춤을 광범위하게 활용했다. 가디언의 산조이 로이에 따르면, 잭슨은 "마치 접이식 칼처럼 팔다리를 재빨리 움직였다가 멈추거나, 회오리치는 스핀에서 완벽하게 균형 잡힌 발끝으로 서는 동작을 선보였다"고 한다. 문워크는 제프리 다니엘에게 배운 잭슨의 시그니처 댄스 동작이었으며, 20세기 가장 유명한 춤 동작 중 하나이다. 잭슨은 이전에 "백슬라이드(backslide)"로 알려졌던 이 스트릿 댄스 동작의 이름을 "문워크"로 명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타운 25주년 기념 콘서트에서의 문워크 공연은 프레드 아스테어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또한 마이클은 판토마임 배우로도 알려져 있으며, "판토마임의 신"이라고 불리는 마르셀 마르소는 "마이클은 타고난 판토마임 아티스트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5. 한국과의 인연
1988년 대한민국의 특정 종교가 서울에서 마이클 잭슨의 공연을 열기 위해 잭슨의 가족들과 접촉했으나, 출연료 부족으로 무산되었다. 당시 잭슨은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었으며, 이 사진은 현재 공개되어 있다. 그의 전기 작가 'J 랜디 타라보렐리'는 이로 인해 잭슨이 한국에 대해 특별한 감정이 생긴 것 같다고 분석했다. 80년대 한국 언론 보도에 따르면, 당시 일로 고소까지 진행되었다.
1993년 한국에서 공연을 열기 위해 김영삼 정부에 공연 허가 신청서를 냈지만, 근검절약의 사회 분위기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절되었다.
1996년 10월 11일, 잭슨은 서울 잠실올림픽주경기장에서 첫 내한공연을 개최했다. 보수 개신교 단체들을 중심으로 '마이클 잭슨 내한공연반대 공동대책위원회'가 조직되어 반대 성명을 발표하는 등 진통을 겪었으나, 무산 위기를 넘기고 공연이 성사되었다. 그러나 반대 시위로 인해 청소년 관람 금지 조치가 내려졌고, 시민단체들이 예매처를 봉쇄하여 표 판매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로 인해 주관사인 태원예능이 수작업으로 표를 판매해야 했다. 공연은 매진에는 실패했지만 총 좌석 수의 70%를 판매했으며, 총 2회 동안 76,881명의 관중을 동원했다. 공연 도중 한 남성 팬이 크레인에 올라탄 잭슨에게 난입하는 사건이 발생했으나, 잭슨은 그를 붙잡고 노래를 이어갔다.
1997년 동계 유니버시아드 당시 무주 덕유산 리조트 티롤 호텔에 방문하여 객실 501호에 머물렀다. 1998년 김대중 전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했고, 1999년에는 '마이클 잭슨과 친구들'이라는 이름으로 한국 서울에서 공연을 개최했다. 이 공연은 SBS에서 생중계되었으며, 당시 SBS 시트콤 《순풍산부인과》의 '미달이' 역으로 출연했던 배우 김성은이 출연하여 잭슨에게 꽃다발을 전달했다. 잭슨은 공연 중 통일이 되면 다시 와서 공연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사망으로 인해 지키지 못했다.
6. 음반 목록
마이클 잭슨은 1971년부터 2001년까지 총 10장의 정규 음반을 발매했다. 1971년 Got to Be There를 시작으로, Ben(1972), Music & Me(1973), Forever, Michael(1975)를 발매했다. 1979년에는 Off the Wall을 발매했고, 1982년에는 Thriller를 발매하여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Bad(1987), Dangerous(1991), HIStory: Past, Present and Future, Book I(1995), Invincible(2001) 등을 발매했다.
빌보드 핫 100 및 UK 싱글 차트 종합 부문 1위 곡으로는 벤의 테마(1972), 돈트 스톱 '틸 유 겟 이너프(1978), 락 위드 유(1978), 원 데이 인 유어 라이프(1981), 빌리 진(1982), 비트 잇(1983), 세이 세이 세이(1983), 캔트 스톱 러빙 유(1987), 배드(1987), 더 웨이 유 메이크 미 필(1987), 맨 인 더 미러(1987), 더티 다이애나(1987), 블랙 오어 화이트(1991), 유 아 낫 얼론(1995), 어스 송(1996), 블러드 온 더 댄스 플로어(1997) 등이 있다.
상세한 내용은 마이클 잭슨의 음반 목록 참고.
7. 투어
마이클 잭슨은 1987년부터 1989년까지 배드 월드 투어를 진행하여 15개국에서 123회 공연을 펼쳐 44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이 투어는 그의 첫 번째 솔로 투어였으며, 웬블리 라이브(Live at Wembley)로 영상화되었다. 1992년부터 1993년까지는 데인저러스 월드 투어를 통해 69회 공연, 320만 명의 관객을 만났으나, 아동 성추행 의혹 등으로 인한 심적 고통으로 중단되었다. 이 투어는 부쿠레슈티 라이브(Live in Bucharest)로 영상화되었다. 1996년부터 1997년까지는 히스토리 월드 투어를 통해 35개국에서 82회 공연을 하여 45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이 투어는 DVD 발매를 위해 뮌헨 공연이 녹화되었으나, 아직 미발매 상태다.
1999년에는 자선 콘서트인 MJ & 프렌즈를 2개국에서 2회 공연했다. 2001년에는 자신의 솔로 활동 30주년을 기념하는 콘서트를 미국에서 2회 개최했다. 2009년에는 This Is It 콘서트를 런던에서 50회 공연할 예정이었으나, 마이클 잭슨의 사망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이 콘서트는 마이클 잭슨 디스 이즈 잇으로 영상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