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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폰 레프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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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빌헬름 폰 레프는 독일의 군인으로, 1876년 란츠베르크암레흐에서 태어났다. 바이에른 4 야전 포병 연대에 입대하여 군 경력을 시작했으며, 의화단 운동에 참전하고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공을 세워 막스 요제프 군사 훈장을 수여받고 기사 작위를 받았다. 전간기에는 바이마르 공화국 육군에 남아 국방군에서 승진을 거듭했으며, 1938년 주데텐란트 점령에 참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서부 전선과 동부 전선에서 활약하며 원수로 진급했으나, 레닌그라드 공략 실패 이후 해임되었다. 1945년 미군에 포로로 잡혔으며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지만 곧 석방되었다. 석방 후에는 바이에른에서 생활하다가 1956년 사망했으며, 그의 이름을 딴 병영이 설치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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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폰 레프 기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40년의 레프
레프 (1940년)
본명빌헬름 요제프 프란츠 레프 (Wilhelm Josef Franz Leeb)
출생1876년 9월 5일
사망1956년 4월 29일
출생지란츠베르크암레히, 바이에른 왕국, 독일 제국
사망지퓌센, 바이에른 주, 서독
형제자매에밀 레프 (형)
서명
군 경력
소속독일 제국 (1895년–1918년)
바이마르 공화국 (1918년–1933년)
나치 독일 (1933년–1945년)
군종바이에른 육군
국방군
독일 육군
복무 기간1895년–1945년
최종 계급원수
지휘제12군 (1938년)
C 집단군 (1939년)
북부 집단군 (1941년)
주요 참전의화단 운동
제1차 세계 대전
고를리체-타르노프 공세
세르비아 전역
제2차 세계 대전
체코슬로바키아 점령
폴란드 침공
브주라 전투
프랑스 전투
바르바로사 작전
발트 해 작전
레닌그라드 진격
루가 방어선
솔치 공세
스타라야 루사 공세
데먄스크 작전
레닌그라드 포위전
제1차 시냐빈스크 작전
스트렐니-페테르고프 작전
제2차 시냐빈스크 작전 (1941년)
티흐빈 방어 작전
티흐빈 공세
훈장
훈장 내역막시밀리안 요제프 군사 훈장
기사 철십자 훈장
전쟁 범죄 유죄 판결
범죄인류에 대한 죄
재판국방군 최고 사령부 재판
형벌3년형

2. 초기

빌헬름 레프는 1895년 바이에른 육군에 입대하여 의화단 운동 동안 중국에서 복무했다. 1907년부터 1913년까지 바이에른 전쟁 아카데미에서 수학하고 참모본부에서 근무했다.[1]

2. 1. 출생과 가톨릭 집안 배경

레프는 1876년 란츠베르크암레흐에서 빌헬름 요제프 프란츠 레프라는 이름으로 로마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1]

2. 2. 군 경력 시작

1895년 빌헬름 레프는 사관후보생으로 바이에른 4 야전 포병 연대에 입대했다. 1897년 소위로 진급하고 포병학교에 입학했다. 의화단 운동 당시 중국에서 독일 동방원정군 총사령관인 육군 원수 알프레트 폰 발더제 백작의 휘하에서 복무했다. 1903년에서 1907년 사이 뮌헨에 있는 바이에른 육군대학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 1905년 중위로 진급했다.

1907년부터 1909년까지 레프는 참모 장교로서 바이에른 참모본부에서 근무했다. 이후 1911년까지 베를린의 프로이센 참모 본부에서 근무했다.

1912년부터 1914년 사이 대위로 진급하여 바이에른 10 야전 포병 연대의 중대장을 맡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뮌헨의 바이에른 1 군단 참모 장교로 복무했다.

2. 3. 의화단 운동 참전

의화단 운동 당시 레프는 독일 동방원정군 총사령관 알프레트 폰 발더제 원수 휘하에서 복무했다. 1903년부터 1907년까지 뮌헨의 전쟁 대학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

2. 4. 바이에른 전쟁 아카데미 수학

1903년부터 1907년까지 레프는 뮌헨에 있는 바이에른 전쟁 아카데미에서 수학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1905년에 중위로 진급했다.

2. 5. 바이에른 10 야전 포병 연대 시절

1912년부터 1914년까지 레프는 대위로 진급하여 바이에른 10 야전 포병 연대의 중대장을 맡았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뮌헨의 바이에른 1 군단 참모 장교로 복무했다.

3. 제1차 세계대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레프는 바이에른군에 재입대했다. 동부 전선에서 복무했으며,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 장군의 지휘하에 고를리체-타르누프 공세, 프셰미슬 요새 점령, 세르비아 작전에서 공을 세웠다.[1]

3. 1. 참전과 전공

제1차 세계 대전 중 바이에른 11 보병 사단 참모로서 여러 전선에서 종군했는데,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 장군의 지휘하에서 고를리체-타르누프 공세, 프셰미슬 요새 공략전, 발칸 반도 전선의 도나우 도하 작전 등에서 뛰어난 공을 세웠다. 1916년 5월 29일에 고를리체 공세 중 전년 5월 2일의 공적으로 막스 요제프 군사 훈장을 수훈했고, 같은 해 6월 21일에는 "기사(Ritter)" 칭호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소령으로 승진한 후 1917년 3월부터 종전까지 서부 전선에서 루프레히트 왕세자의 참모를 맡아, 초기에 차석 참모, 이어서 병참 부장에 취임했다.

3. 2. 막스 요제프 군사 훈장 수훈과 기사 작위

제1차 세계 대전 중 바이에른 11 보병 사단 참모로서 여러 전선에서 종군했는데,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 장군의 지휘하에 고를리체-타르누프 공세, 프셰미실 요새 공략전, 발칸 반도 전선의 도나우 도하 작전 등에서 뛰어난 공을 세웠다. 1916년 5월 29일 고를리체 공세 중 전년 5월 2일의 공적에 의해 막스 요제프 군사 훈장을 수훈했고, 같은 해 6월 21일 "기사(Ritter)" 칭호를 받았다. 이 훈장을 받음으로써 귀족 작위를 얻게 되어, 레프의 성은 "기사 폰 레프"로 변경되었다.[1]

3. 3. 루프레히트 황태자 참모 복무

제1차 세계 대전 중 레프는 바이에른 11 보병 사단 참모로서 여러 전선에서 종군했는데,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 장군의 지휘하에 고를리체-타르누프 공세, 프셰미실 요새 공략전, 발칸 반도 전선의 도나우 도하 작전 등에서 공을 세워 1916년에 막스 요제프 군사 훈장을 수상하여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해 소령으로 승진한 후 1917년 3월부터 종전까지 서부 전선에서 루프레히트 황태자의 참모로 근무하면서 병참부장으로 승진했다.

4. 전간기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레프는 바이마르 공화국 군대인 국방군에 남았다. 아돌프 히틀러가 권력을 잡기 전에는 바이에른을 관할하는 군사 지구를 지휘했다. 1938년 7월, 제12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주데텐란트 점령에 참여했다. 1934년에 『방어전(Die Abwehr)』을 저술하여 방어 전술의 일인자로 여겨지게 되었다.

4. 1. 바이마르 공화국 육군 복무

전후 레프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육군에 남아 국방성 병무국 참사, 제2, 7 군관구 참모를 역임했고, 1929년에 소장으로 승진했다. 1930년부터는 7 군관구 사령관 및 7 사단장을 지냈다.

1933년에 아돌프 히틀러 정권이 수립된 후에도 나치와 거리를 두었지만, 계속 승진하여 10월에 제2 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다음 해에 포병대장이 되었다. 이때, 『방어전(Die Abwehr)』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레프는 방어 전술의 일인자로 여겨지게 되었다.

1938년에 블롬베르크-프리치 위기가 일어나자 새로운 육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발터 폰 브라우히치는 히틀러의 지시로 레프를 상급대장으로 승진시킴과 동시에 전역시켰다. 그러나 7월에 주데텐 위기로 인해 다시 현역으로 복귀하여 12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주데텐란트 진주군으로 일했다. 하지만 주데텐 점령 직후 다시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유럽에서의 긴장이 높아지던 1939년 여름에 레프는 다시 현역으로 복귀해 프랑스 제3공화국 국경지대에 배치된 C 집단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레프는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에 이어 독일군의 최고참 군인이었다.

4. 2. 소장 진급과 7 군관구 사령관/7 사단장

전후 바이마르 공화국 육군에 남아 국방성 병무국 참사, 제2, 제7 군관구 참모를 역임한 레프는 1929년에 소장으로 승진했고, 1930년부터 제7 군관구 사령관 및 제7 사단장을 지냈다.[1]

4. 3. 히틀러 정권과의 관계

1933년 아돌프 히틀러 정권 수립 후에도 나치와 거리를 뒀지만 독일 국방군에서의 출세는 이어져, 그 해 10월에 제2집단군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1월 1일에 포병 대장으로 승진했다. 이때 『방어전 (Die Abwehr)』을 저술하여 방어 전술 연구의 제일인자로 여겨지게 되었다.[1]

1938년에 블롬베르크-프리치 사건이 일어나자, 새롭게 육군 총사령관이 된 발터 폰 브라우히치는 히틀러의 지시로 레프를 상급대장으로 승진시킴과 동시에 예비역으로 편입했다. 그러나 곧 그해 7월에는 주데텐 위기를 겪고 현역으로 복귀하여 제12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주데텐란트 진주에 종사했다. 하지만 그 직후 다시 예비역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긴박한 정세에 따라 1939년 여름에 다시 현역으로 복귀하여 프랑스 제3공화국과의 국경에 배치된 C군집단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때 레프는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다음으로 독일 육군의 최고참 군인이었다.[1]

4. 4. 방어전(Die Abwehr) 저술

레프는 1934년에 『방어전(Die Abwehr)』을 저술하여 방어 전술 연구의 일인자로 여겨지게 되었다.[1]

4. 5. 블롬베르크-프리치 위기와 상급대장 진급

1938년에 블롬베르크-프리치 위기가 일어나자 새로운 육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발터 폰 브라우히치는 히틀러의 지시로 레프를 상급대장으로 승진시킴과 동시에 전역시켰다.[1] 그러나 그해 7월 주데텐 위기로 인해 다시 현역으로 복귀하여 12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주데텐 진주군으로 일했다.[1] 하지만 주데텐 점령 직후 다시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1]

그러나 1939년 여름 유럽에서의 긴장이 높아지자 레프는 다시 현역으로 복귀해 프랑스 국경지대에 배치된 C 집단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1] 이때 레프는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에 이어 독일군의 최고참 군인이었다.[1]

4. 6. 주데텐 위기와 12군 사령관

1938년 블롬베르크-프리치 위기가 일어나자 육군 총사령관이 된 발터 폰 브라우히치는 히틀러의 지시로 레프를 상급대장으로 승진시킴과 동시에 전역시켰다. 그러나 그해 7월 주데텐 위기로 인해 현역으로 복귀하여 12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주데텐란트 진주에 참여했다. 하지만 주데텐 점령 직후 다시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4. 7. C 집단군 사령관 임명

1939년 여름, 유럽에서의 긴장이 고조되자 레프는 다시 현역으로 복귀하여 프랑스 국경 지대에 배치된 C 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레프는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에 이어 독일군 최고참 군인이었다.

5. 제2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당시 빌헬름 폰 레프 기사는 63세로, 64세였던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다음으로 나이가 많은 장군이었다. 1939년 여름, 레프는 C 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1939년 11월 1일에는 ''상급대장''으로 진급했다. 그는 중립국인 베네룩스 3국을 통한 1940년 프랑스 공방전 계획에 대해 "온 세상이 독일에 등을 돌릴 것이다. 불과 25년 만에 두 번째로 중립 벨기에를 공격하다니! 불과 몇 주 전에 정부가 이 중립의 유지와 존중을 엄숙히 보증하고 약속했는데 말이다."라며 반대했다. 전투 중 그의 부대는 마지노 선을 돌파했고, 레프는 1940년 원수 진수식에서 ''야전원수'' 계급으로 진급하고 철십자 기사 십자장을 수여받았다.

독소전 준비를 위해 레프는 1940년 가을 프랑스에서 드레스덴으로 이동 배치되어 1941년 초에 북부 집단군 사령관이 되었다.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되자 레프의 북방군 집단은 발트해 연안의 해안도시들을 공략하면서 레닌그라드로 진격했다. 그러나 그해 겨울 북방군 집단은 휘하의 장갑군단을 모스크바 공략을 위해 중앙군 집단으로 차출하면서 레닌그라드에 대한 대대적인 공략은 불가능해졌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레프는 당시 나치 독일의 야만적인 학살과 히틀러의 전횡에 혐오감을 느껴 직접 히틀러에게 자신을 북방군 집단사령관에서 해임시켜달라고 건의했다. 1942년 1월 16일, 레프는 사령관직에서 해임되어 총통예비령에 의해 이후 다시는 군무를 수행하지 못했다.[1]

나치에 비판적이었지만, 레프는 1941년 9월 65세 생일에 히틀러로부터 250000RM를 하사받았다. 1944년에는 바이에른에서 638000RM 상당의 장원도 하사받았다. 1944년 7월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직후, 레프는 다른 많은 장군들처럼 자신의 안위를 위해 히틀러에게 충성 서약을 했다.[1]

5. 1. 폴란드 침공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의 폴란드 침공에서 폰 레프의 C 집단군은 서부 전선연합군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였으나, 연합군은 공세를 취하지 않았다. 이듬해인 1940년 5월에 시작된 서방 전격전에서 폰 레프의 C 집단군은 개전 후 처음으로 공세에 나서 마지노 선을 돌파했다. 프랑스가 항복한 후 1940년 7월 19일에 폰 레프는 많은 장군들과 함께 원수로 진급했다.

5. 2. 서방 전격전과 마지노선 돌파

1940년 5월에 시작된 서방전격전에서 레프의 C집단군은 개전 후 처음으로 공세에 나서 마지노 선을 돌파했다. 프랑스가 항복한 후 7월 19일에 레프는 많은 장군들과 함께 원수 반열에 올랐다.

5. 3. 원수 진급

1940년 5월에 시작된 서방 전격전에서 레프의 C집단군은 개전 후 처음으로 공세에 나서 마지노 선을 돌파했다. 프랑스 항복 후 1940년 7월 19일에 레프는 많은 장군들과 함께 원수로 진급했다.

5. 4. 독소전과 북부 집단군 사령관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의 폴란드 침공에서 폰 레프의 C군 집단은 서부 전선연합국 군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연합군은 공세를 취하지 않았다. 이듬해 1940년 5월에 시작된 서방 전격전에서 폰 레프의 C군 집단은 개전 후 처음으로 공세에 나서 마지노 선을 돌파했다. 프랑스 항복 후 7월 19일, 폰 레프는 많은 장군들과 함께 원수로 진급했다.

독소전 준비를 위해 폰 레프는 같은 해 가을에 프랑스에서 드레스덴으로 배치되었고, 이듬해 1941년 초에 북방군 집단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6월 22일에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되었고, 폰 레프의 북방군 집단은 발트해 연안의 항구 도시를 점령하면서 레닌그라드를 향해 진격했다. 그러나 같은 해 겨울이 되자, 북방군 집단은 휘하의 기갑 집단을 모스크바 공략을 목표로 하는 중앙군 집단에 넘겨주는 형세가 되어, 레닌그라드를 포위하는 것만 가능하고 공략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경건한 기독교도였던 폰 레프는, 이 무렵 이미 나치 독일이 저지르는 만행과 히틀러의 전횡에 혐오감을 느껴, 히틀러에게 북방군 집단 사령관 해임을 요청했었다. 1942년 1월 16일, 폰 레프는 사령관에서 해임되어 총통 예비대기(待命)가 되었고, 이후 군무에 종사하는 일은 없었다.

5. 5. 발바로사 작전과 레닌그라드 진격

1940년 원수 진수식에서 ''야전원수''로 진급한 빌헬름 폰 레프는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발트 3국을 침공하고 레닌그라드를 점령하는 임무를 맡은 북부 집단군의 지휘를 맡았다. 레프는 1941년 3월 30일, 히틀러가 소련에 대한 멸망 전쟁 (''Vernichtungskrieg'') 계획을 설명하는 연설에 참석한 200명 이상의 고위 장교 중 한 명이었다.

1941년 6월, 제4기갑집단, 제16군, 제18군으로 구성된 북부 집단군은 발트 작전에서 소련 국경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7월 1일까지 카우나스리가를 점령하며 발트 3국을 빠르게 진격했다. 레프는 군사 작전 지역과 북부 집단군 후방 지역에 대한 관할권을 가지고 있었다.

레프(Leeb)와 에리히 회프너 (Erich Hoepner) 1941년 9월


1941년 7월 초, 육군 집단이 라트비아-러시아 국경을 넘으면서 소련의 저항이 거세졌다. 육군 최고 사령부(OKH)는 제3 기갑집단이 더 이상 북부 집단을 지원하지 않고 중부 집단군에만 집중하도록 명령하여, 레프는 추가 기갑집단의 지원 없이 노브고로드, 프스코프, 루가, 에스토니아를 목표로 진격해야 했다. 레프는 독일군의 우월성을 믿고 붉은 군대의 저항이 그의 작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명령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멘 호 주변의 늪지대와 붉은 군대의 반격으로 인해 신속한 진격은 어려웠다.

8월 초, 북부 집단군은 전선을 넓히고 여러 방향으로 병력을 분산시키면서 전선이 확대되었다. 레프는 모든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35개 사단이 필요하다고 추산했지만, 실제로는 26개 사단만 가지고 있었다. 8월 10일 공격이 재개되었지만, 루가 주변에서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 레프의 병력은 8월 17일에 킹기세프와 나르바를 점령했다. 육군 집단은 8월 20일에 추도보에 도달하여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 사이의 철도 연결을 차단했다. 탈린은 8월 28일에 함락되었다. 레프의 지휘 하에 있는 부대들은 진격하면서 식량을 약탈했다. 과도한 약탈은 레프가 약탈과 재산 파괴를 제한하는 명령을 내리도록 했으며, 이는 점령지의 활용을 방해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레프는 1941년 8월 16일 명령에서 "군대의 무의미한 '조직'으로 인해 경제 당국의 시작 작업이 불가능해지고 있다"고 밝혔다.

레프(Leeb)와 게오르크 폰 퀴힐러 (Georg von Küchler) 관측소, 1941년 10월 11일


레닌그라드로 가는 마지막 철도 연결은 독일군이 네바 강에 도달한 8월 30일에 끊어졌다. 9월 초, 레프는 레닌그라드가 곧 함락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민간인과 산업 물품의 대피에 대한 보고를 받은 레프와 OKH는 붉은 군대가 도시를 포기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믿었다. 9월 5일, 그는 도시 주변의 붉은 군대를 파괴하는 것을 포함한 새로운 명령을 받았다. 9월 15일까지 제4 기갑집단은 모스크바를 향한 새로운 공세에 참여하기 위해 중부 집단군으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예상했던 항복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독일의 새로운 공세는 9월 8일까지 도시를 포위했다. 주요 작전을 수행할 충분한 병력이 부족했던 레프는 육군 집단이 도시를 점령할 수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지만, 10월과 11월 내내 그의 전선에서 격렬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9월부터 육군 집단 사령부와 OKH는 도시의 운명과 굶주린 소련 인구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 논의했다. 레프는 포병에게 포위된 도시에서 탈출하려는 민간인에게 사격을 가하여 최전선 보병의 눈에 띄지 않도록 사살하라고 명령했다. 11월 중순, 육군 집단의 전쟁 일지에는 포병이 민간인이 독일군 선에 접근하는 것을 막고 있다고 기록되었다. 이러한 작전은 지휘부가 비무장 민간인 사살이 "내적 균형을 잃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숙고하게 했다. 고위 장교들은 또한 병사들의 전투 능력을 저해할 수 있는 "잘못된" 동정에 대해서도 우려했다.

그해 겨울, 북방군 집단은 휘하 기갑 집단을 모스크바 공략을 목표로 하는 중앙군 집단에 넘겨주면서 레닌그라드 포위는 가능했지만 공략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경건한 기독교도였던 폰 레프는 당시 나치 독일의 만행과 히틀러의 전횡에 혐오감을 느껴 히틀러에게 북방군 집단 사령관 해임을 요청했다.

5. 6. 레닌그라드 포위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의 폴란드 침공 작전 중, 폰 레프의 C군 집단은 서부 전선연합국 군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연합군은 공세를 취하지 않았다. 이듬해 1940년 5월에 시작된 서방 전격전에서 폰 레프의 C군 집단은 개전 후 처음으로 공세에 나서 마지노 선을 돌파했다. 프랑스 항복 후 7월 19일, 폰 레프는 많은 장군들과 함께 원수로 진급했다.

독소전 준비를 위해 폰 레프는 같은 해 가을에 프랑스에서 드레스덴으로 배치되었고, 이듬해 1941년 초에 북방군 집단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6월 22일에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되었고, 폰 레프의 북방군 집단은 발트해 연안의 항구 도시를 점령하면서 레닌그라드를 향해 진격했다.

1941년 7월 초, 육군 집단이 라트비아-러시아 국경을 넘으면서 소련의 저항이 현저히 굳건해졌다. 동시에, ''육군 최고 사령부(Oberkommando des Heeres, OKH)''는 제3 기갑집단이 더 이상 북부 집단을 지원하지 않고 중부 집단군에만 집중하도록 명령하여, 레프는 추가 기갑집단의 지원 없이 노브고로드, 프스코프, 루가, 그리고 에스토니아를 목표로 추구하도록 했다. 레프는 독일군의 우월성을 믿고, 붉은 군대의 저항이 그의 작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명령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예상과는 달리, 일멘 호 주변의 늪지대와 붉은 군대의 맹렬한 반격으로 인해 신속한 진격을 할 수 없었다.

8월 초까지 북부 집단군은 전선을 넓히고 여러 방향으로 병력을 분산시키면서 심각하게 전선이 확대되었다. 레프는 모든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35개 사단이 필요하다고 추산했지만, 실제로는 26개 사단만 가지고 있었다. 8월 10일에 공격이 재개되었지만, 루가 주변에서 즉시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 레프의 병력은 8월 17일에 킹기세프와 나르바를 점령할 수 있었다. 육군 집단은 8월 20일에 추도보에 도달하여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 사이의 철도 연결을 차단했다. 탈린은 8월 28일에 함락되었다. 레프의 지휘 하에 있는 부대들은 진격하면서 식량을 광범위하게 약탈했다. 과도한 약탈은 레프가 약탈과 재산 파괴를 제한하는 명령을 내리도록 했으며, 이는 점령지의 활용을 방해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레프는 1941년 8월 16일 명령에서 "군대의 무의미한 '조직'으로 인해 경제 당국의 시작 작업이 불가능해지고 있다"고 밝혔다.

레닌그라드로 가는 마지막 철도 연결은 독일군이 네바 강에 도달한 8월 30일에 끊어졌다. 9월 초, 레프는 레닌그라드가 곧 함락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민간인과 산업 물품의 대피에 대한 보고를 받은 레프와 OKH는 붉은 군대가 도시를 포기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믿었다. 9월 5일, 그는 도시 주변의 붉은 군대를 파괴하는 것을 포함한 새로운 명령을 받았다. 9월 15일까지 제4 기갑집단은 모스크바를 향한 새로운 공세에 참여하기 위해 중부 집단군으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예상했던 항복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독일의 새로운 공세는 9월 8일까지 도시를 포위했다. 주요 작전을 수행할 충분한 병력이 부족했던 레프는 육군 집단이 도시를 점령할 수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지만, 10월과 11월 내내 그의 전선에서 격렬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9월부터 육군 집단 사령부와 OKH는 도시의 운명과 굶주린 소련 인구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 숙고했다. 레프는 포병에게 포위된 도시에서 탈출하려는 민간인에게 사격을 가하여 최전선 보병의 눈에 띄지 않도록 사살하라고 명령했다. 11월 중순, 육군 집단의 전쟁 일지에는 포병이 민간인이 독일군 선에 접근하는 것을 막고 있다고 기록되었다. 이러한 작전은 지휘부가 비무장 민간인 사살이 "내적 균형을 잃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숙고하게 했다. 고위 장교들은 또한 병사들의 전투 능력을 저해할 수 있는 "잘못된" 동정에 대해서도 우려했다.

그러나 같은 해 겨울이 되자, 북방군 집단은 휘하의 기갑 집단을 모스크바 공략을 목표로 하는 중앙군 집단에 넘겨주는 형세가 되어, 레닌그라드를 포위하는 것만 가능하고 공략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경건한 기독교도였던 폰 레프는, 이 무렵 이미 나치 독일이 저지르는 만행과 히틀러의 전횡에 혐오감을 느껴, 히틀러에게 북방군 집단 사령관 해임을 요청했었다. 1942년 1월 16일, 폰 레프는 사령관에서 해임되어 총통 예비대기(待命)가 되었고, 이후 군무에 종사하는 일은 없었다.

5. 7. 히틀러와의 갈등과 해임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레프는 나치 독일의 야만적인 학살과 히틀러의 전횡에 혐오감을 느껴 직접 히틀러에게 북방군 집단사령관에서 해임시켜달라고 건의했다.[1]

1942년 1월 16일, 레프는 사령관직에서 해임되어 총통예비령에 편입되었고, 이후 다시는 군무를 보지 못했다.[1] 나치에 비판적이었지만, 1941년 9월 65세 생일에 히틀러로부터 250000RM를 받았다.[1] 1944년에는 바이에른에서 638000RM에 구입한 장원도 하사받았다.[1] 1944년 7월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직후, 레프는 다른 많은 장군처럼 보신을 위해 히틀러에게 충성 서약을 했다.[1]

5. 8.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이후

나치에 비판적이었지만, 레프는 1941년 9월 65세 생일에 히틀러로부터 250000RM를 하사받았다. 1944년에는 바이에른에서 638000RM 상당의 장원을 구입하려 했는데, 이 또한 하사받았다. 1944년 7월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직후, 레프는 다른 많은 장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안전을 위해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서를 제출했다.

6. 전후

독일이 패망하면서 1945년 5월에 레프는 미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1948년에 열린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지만, 이미 3년 이상 포로 생활을 했기 때문에 곧바로 석방되었다. 레프에 대한 판결은 잘못된 증거 서류에 기반한 것이었지만, 오늘날까지 수정되지 않고 있다.

레프는 1956년 퓌센에서 사망하기 전까지 막스 요제프 훈장 수여자 단체의 대표를 맡았다. 그는 등산을 즐겨 전문 산악 안내인 강습을 받기도 했다. 레프 사후 1년 뒤, 그의 고향 란츠베르크에 레프의 이름을 딴 병영이 설치되어 독일 연방방위군 제8 산악 포병 연대와 주독 미군이 사용했다. 독일 재통일 후, 1992년 독일군 개편으로 해당 연대가 해체되면서 레프 병영도 폐쇄되어 란츠베르크 시로 이관되었다. 병영 부지는 공업 용지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주택 단지로 바뀌었다.

6. 1. 미군 포로와 뉘른베르크 재판

1945년 5월, 레프는 미국 육군의 포로가 되었다.[1] 1948년 뉘른베르크 계속 재판의 하나인 국방군 최고사령부 재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이미 3년간 포로로 잡혀 있었기 때문에 석방되었다.[1] 레프에 대한 판결은 잘못된 증거 서류에 근거한 것이었지만, 오늘날까지 수정되지 않았다.[1]

고위 지휘관 재판에서 레프의 변호인 한스 라테르네르는 사실상 수석 변호사 역할을 했으며, 절차 관련 문제에서 다른 당사자들을 종종 대변했다. 그는 독일 장교단의 "품위"를 변호하고, 그들이 전쟁법을 존중했다고 주장했다. 변호 측은 민간인, 인질, 파르티잔에 대한 독일 군대의 행위를 전투 상황과 군사적 필요성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라테르네르는 레프가 형사 명령을 보거나 전달한 적이 없고, 무효화할 기회도 없었던 인도적인 군인이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레프는 자신의 지휘 지역에서 Einsatzgruppen의 활동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그들을 막을 권한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레프는 재판을 받는 사람들 중 가장 고위 장교로서 피고인들을 대표하여 최종 진술을 했다. 그는 피고인들이 군인으로서의 원칙을 훼손하지 않았다고 말하며, 그들을 역사의 희생자라고 묘사했다. "이 세상 어떤 군인도 이처럼 큰 고통과 비극 속에서 싸운 적이 없다."라는 그의 진술은 1950년대와 1960년대 서독에서 만연했던 희생자 서사를 예고했다. 레프는 4가지 혐의 중 하나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바르바로사 칙령과 부대들의 범죄적 적용을 전달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기결수 형을 선고받고 재판 후 석방되었다. 이 형량은 다른 유죄 판결을 받은 피고인들보다 가벼웠다. 판결문에는 "그의 서명이나 승인의 도장이 찍힌 형사 명령은 [증거로] 제시되지 않았다"고 명시되어 있다.

6. 2. 석방 이후

1945년 5월, 독일 패망 후 레프는 미군에 포로로 잡혔다. 1948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이미 3년 이상 포로 생활을 했기 때문에 곧바로 석방되었다. 레프에 대한 판결은 잘못된 증거 서류에 기반한 것이었지만, 오늘날까지 수정되지 않고 있다.

레프는 1956년 퓌센에서 사망하기 전까지 막스 요제프 훈장 수여자 단체의 대표를 맡았다. 그는 등산을 즐겨 전문 산악 안내인 강습을 받기도 했다. 레프 사후 1년 뒤, 그의 고향 란츠베르크에 레프의 이름을 딴 병영이 설치되어 독일 연방방위군 제8 산악 포병 연대와 주독 미군이 사용했다. 동서독 통일 후, 1992년 독일군 개편으로 해당 연대가 해체되면서 레프 병영도 폐쇄되어 란츠베르크 시로 이관되었다. 병영 부지는 공업 용지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주택 단지로 바뀌었다.

6. 3. 등산 취미와 병영

레프는 등산을 취미로 하여, 전문 산악 안내인 강습도 받았다.

레프가 사망한 다음 해, 고향 란츠베르크에 그의 이름을 딴 병영이 설치되어 독일 연방군 제8 산악 포병 연대와 주독 미군이 사용했다. 독일 재통일에 따른 독일 연방군 개편으로 1992년에 이 연대가 해체되면서 레프 병영도 폐기되어 란츠베르크 시로 이관되었다. 병영 터는 공업용지로 사용되었는데, 현재는 주택단지가 되었다.

7. 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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