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츠베르크암레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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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란츠베르크암레흐는 바이에른주에 위치한 도시로, 레흐강을 따라 자리 잡고 있다. 이 도시는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나뉘며, 역사적인 건축물과 자연 친화적인 환경을 함께 갖추고 있다. 란츠베르크암레흐는 중세 시대부터 소금 무역과 레흐강 통행세로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으며, 아돌프 히틀러가 수감되어 《나의 투쟁》을 집필한 란츠베르크 암 레흐 형무소와 나치 강제 수용소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현재는 유럽 홀로코스트 기념관과 다양한 문화 시설, 스포츠 클럽을 통해 지역 사회의 발전을 도모하고 있으며, 철도 및 도로 교통의 중심지로서 지역 경제에도 기여하고 있다.
란츠베르크암레흐는 레흐강을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어 있다. 강의 동쪽 높은 강둑과 강 사이에 역사적인 구시가지가 자리 잡고 있으며, 강 서쪽과 동쪽 높은 강둑 위로 현대적인 시가지가 확장되었다.
2. 지리
2. 1. 시의 구성
란츠베르크암레흐는 크게 세 개의 주요 지역으로 나뉜다. 레흐강과 그 동쪽의 높은 강둑 사이에 자리한 역사적인 구시가지 중심부, 레흐 강 서쪽에 위치하며 현재 도시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지역(카타리넨포어슈타트, 노이어프핑, 베스트슈타트, 슈바이곡호프지들룽 포함), 그리고 19세기 초부터 개발된 동쪽의 높은 강둑 지역(바이에르포어슈타트)이 그것이다.[9]
또한, 과거에는 독립적인 자치구였던 엘리히호펜, 에르프팅(프리드하임, 게라트호프, 미텔슈테텐 포함), 피츨링(푀링 포함), 라이슈(탈호펜 포함) 지역과 산다우, 푀싱 같은 작은 마을들도 현재 란츠베르크암레흐에 속해 있다.
공식적으로 란츠베르크암레흐는 10개의 지구(Ort)로 구성되어 있다.[9] 이 중에서 작은 규모의 촌락이나 외딴 농가를 제외한 주요 지구는 다음과 같다.
지구(Or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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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히호펜 |
에르프팅 |
프리트하임 |
란츠베르크암레흐 |
피츨링 |
라이슈 |
3. 역사
란츠베르크암레흐는 독일의 유명 관광 루트인 로맨틱 가도 상에 위치하며, 슈바벤과 바이에른의 경계 지역인 레흐라인 지역의 중심 도시이다. 그림 같은 역사적 중심지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도시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소금길이 레흐강을 건너는 지점에 자리 잡으면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12세기 중반, 사자공 하인리히는 강 위에 놓인 다리를 보호하기 위해 기존의 정착지 '페티네'(Phetinede)와 성을 포함하는 새로운 성, '카스트룸 란데스푸르흐'(Castrum Landespurchla) 건설을 명했다. 이 성을 중심으로 빠르게 정착지가 커졌고, 13세기 초에는 도시로서의 권리를 인정받았다.
1315년 큰 화재로 도시가 소실되었으나,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곧바로 재건되었다. 1320년에는 소금에 대한 관세를 징수할 권리를 얻어 상당한 부를 축적했으며, 1419년에는 강 통행세 징수권까지 확보하며 재정을 더욱 늘렸다.
20세기에 들어 란츠베르크는 어두운 역사를 경험하기도 했다. 1924년 아돌프 히틀러가 란츠베르크 교도소에 수감되어 그의 저서 『나의 투쟁』을 집필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나치 독일 시대에는 히틀러 유겐트의 주요 활동 도시 중 하나로 여겨졌으며, 히틀러의 감방은 나치 추종자들의 순례지가 되기도 했다.[2]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도시 외곽에 강제 수용소가 설치되어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약 3만 명 이상이 비인간적인 환경에 수감되었고, 그중 14,5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에는 홀로코스트 생존자 등을 위한 유럽 최대 규모의 실향민 수용소(DP 캠프) 중 하나가 운영되었으며, 1945년 이후 150명 이상의 전쟁 범죄자들이 처형된 장소이기도 하다.[3]
한편, 란츠베르크암레흐는 1991년 노벨 생리학·의학상 수상자인 에르빈 네어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3. 1. 중세 시대
1135년경, 훗날 란츠베르크암레흐 시역에 포함될 Phetine|페티네de라는 정착지가 문헌에 처음 기록되었다. 당시에는 아직 도시로서의 권리를 갖지 못했다. 1158년, 하인리히 사자공은 중요한 소금길을 남쪽으로 이전시켰고, 이로 인해 페티네 근처 레흐강에 다리가 건설되었다. 이전까지 소금길은 카우페링 부근의 도섭지에서 레흐강을 건넜다.
이 다리를 보호하기 위해, 기존 페티네 성 아래에 Castrum Landespurch|카스트룸 란데스푸르흐la, 즉 란데슈푸르흐 성이라는 새롭고 큰 규모의 성이 건설되었다. 이 성은 베소브룬 수도원의 대관이 관리하며 아우크스부르크 주교령과의 국경 방어 역할을 맡았다. 성의 보호 아래 정착지가 빠르게 성장하여 13세기에는 도시권을 획득하고 Landesperch|란데스페르히de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란츠베르크암레흐의 기원이 되었다.
1315년, 루트비히 4세와 프리드리히 3세 사이의 전쟁으로 도시는 큰 화재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바이에른 공작의 지원을 받아 곧바로 재건되었다. 1320년, 도시는 소금에 대한 세금, 이른바 Salzpfennig|자르츠페니히de(소금 동전)를 징수할 권리를 얻었다. 이를 통해 도시는 상당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1353년에는 첫 번째 소금 창고가 건설되어 소금을 보관하고 거래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소금 창고는 17세기까지 세 동으로 늘어났으며, 20세기에는 소방서 본부로 사용되다가 1990년대에 시립 도서관 "Lechstädel|레히슈테르델de"로 개조되었다. 소금 외에도 곡물, 목재 등이 레흐강을 통해 운송되었다. 도시 인구가 계속 증가하면서 1415년과 1435년에는 시벽을 확장하여 도시의 북부와 동부가 크게 넓어졌다.
1419년, 바이에른 공작 에른스트는 강 통행세 징수를 허가했으며, 이 수입은 도시 방어 시설 건설에 사용되었다. 1425년에는 도시의 동쪽 입구 역할을 하는 바이에른 문(Bayertorde)이 세워졌다. 소금길은 이 문을 통해 시내로 이어졌다. 에른스트 공작은 1429년에 현재까지 사용되는 시의 문장을 수여했으며, 1437년에는 Jungferngeld|융페르겔트de(젊은 여성 기금) 제도를 마련했다. 이 제도는 란츠베르크 시민들이 세금 수입의 일부로 매년 두 명의 젊은 여성에게 혼수 자금을 지원하도록 의무화한 것이었다.
3. 2. 근세
1315년, 이 도시는 루트비히 4세와 프리드리히 3세 간의 전쟁으로 인해 큰 화재를 겪었으나,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 덕분에 바이에른 공작의 지원을 받아 곧바로 재건되었다.
1320년, 란츠베르크는 소금에 대한 세금, 이른바 '자르츠페니히'(Salzpfennigde)를 징수할 권리를 부여받았다. 이를 통해 도시는 상당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1353년에는 첫 번째 소금 창고가 건설되었으며, 이후 17세기까지 세 동으로 늘어났다. 이 창고들은 소금을 보관하고 거래하는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오늘날 이 중 한 건물은 시립 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소금 외에도 곡물, 목재 등이 레흐강을 통해 활발히 거래되었다. 도시의 인구가 꾸준히 증가함에 따라 1415년과 1435년에는 도시를 둘러싼 성벽을 확장하는 공사가 이루어졌고, 이를 통해 도시의 북부와 동부 지역이 크게 넓어졌다. 1419년에는 바이에른 공작 에른스트가 강 통행세 징수를 허가하여 도시의 재정을 더욱 확충했다. 이 수입은 주로 도시 방어 시설을 강화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1425년에는 도시 동쪽 입구에 소금길이 통과하는 주요 관문인 바이에른 문(
에른스트 공작은 1429년에 현재까지 사용되는 란츠베르크의 시 문장을 수여했으며, 1437년에는 '융페르겔트'(Jungferngeld|융페르겔트de, 젊은 여성 기금)라는 독특한 제도를 도입했다. 이 제도는 도시의 세금 수입 일부를 매년 두 명의 젊은 여성에게 혼수 자금으로 지원하는 것을 의무화했다.
1762년에는 처음으로 문서상 번지 제도가 확인되었으며, 현재까지 이어지는 이 번지 체계는 1790년에 최종적으로 확립되었다. 이 방식은 거리 이름과 관계없이 하우프트 광장을 1번으로 시작하여 호프그라벤의 496a번까지 순차적으로 번호를 부여하는 독특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덧붙여진 번호 a, b, c, 또는 1/2, 1/3, 1/4는 분할되거나 나중에 세워진 건물을 나타낸다.
3. 2. 1. 나치즘
란츠베르크는 아돌프 히틀러가 1924년 성채 금고형을 선고받고 란츠베르크 교도소에 수감되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히틀러는 이 수감 기간 동안 루돌프 헤스와 함께 그의 저서 『나의 투쟁』을 집필하거나 구술했다. 이 때문에 란츠베르크는 나치즘 역사에서 중요한 장소가 되었으며, 히틀러가 머물렀던 감방 7호는 나치즘 숭배의 대상이 되어 많은 추종자들이 방문하기도 했다.[2]
1937년부터 1945년까지 란츠베르크는 뮌헨, 뉘른베르크와 더불어 나치 독일의 주요 중심 도시 중 하나로 여겨졌다. "란츠베르크 - 유겐트의 도시"라는 슬로건 아래 히틀러 유겐트의 중요 거점 역할을 했으며, 대규모 퍼레이드 스타디움 건설 계획도 있었으나 실현되지는 못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44년, 란츠베르크와 인근 카우페링 지역에는 11개의 시설로 구성된 외부 강제 수용소군(통칭 "카우페링")이 건설되었다. 이 수용소 단지의 사령부는 란츠베르크에 있었다. 1944년 6월 18일, 아우슈비츠에서 약 1,000명의 수감자가 처음으로 이곳으로 이송되었다. 이들은 군비 프로젝트 "린겔타우버" 작전의 일환으로 신형 제트 전투기 메서슈미트 Me262를 생산하기 위한 거대한 지하 벙커 건설에 강제 동원되었다. 수감자들은 기아, 추위, 티푸스를 비롯한 질병이 만연하는 비인간적인 환경 속에서 강제 노동에 시달렸으며, 이 수용소를 "차가운 화장터"라고 불렀다. 1944년 10월 말까지 노동 능력을 상실한 수감자들은 아우슈비츠로 보내져 가스실에서 살해되었으나, 그 이후에는 수용소 내에서 사망 처리되었다. 이들의 유해는 주변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이 수용소에는 총 30,000명 이상이 수감되었고, 그중 약 14,5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수감자 중 걸을 수 있었던 이들은 1945년 4월, 독일군에 의해 죽음의 행진으로 내몰렸다.
1945년 4월 27일, 미국 육군 제12기갑사단이 이 수용소를 해방했다. 테일러 장군의 명령에 따라 미군은 언론을 통해 수용소의 참상을 기록하게 했으며, 지역 독일 민간인과 경비병들에게 사망자들의 시신을 맨손으로 수습하고 매장하도록 지시했다. 이 수용소의 발견과 해방 과정은 미국 미니시리즈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9화 "왜 우리가 싸우는가" 에피소드에 묘사되기도 했다.[4]
전쟁 후, 이 수용소 부지는 소련과 발트 3국 출신 유대인 난민들을 위한 실향민(DP) 수용소 중 가장 큰 규모의 시설로 운영되었으며, 1950년 10월 15일에 폐쇄되었다. 또한 이곳은 1945년 이후 150명 이상의 전쟁 범죄자들이 처형된 장소이기도 하다.[3]
그러나 전쟁 후 수십 년 동안 지역 사회와 당국은 강제 수용소의 존재를 외면하고 역사를 잊으려 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5] 1983년부터 시민 운동가 안톤 포셋과 '란츠베르크 20세기의회'는 이러한 어두운 역사를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으며, 기부를 통해 옛 카우페링 VII 강제 수용소 부지에 유럽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건립했다.[6]
한편, 레흐강변 빌트파크에는 과거 독일 전역에 세워졌던 슈라게터 슈타인 중 하나가 남아있다. 이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프랑스 점령군에 저항하다 처형된 알베르트 레오 슈라게터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기념물이다.
3. 3. 현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란츠베르크암레흐는 큰 변화를 겪었다. 특히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을 위한 실향민 수용소(DP 캠프) 운영과 란츠베르크 교도소의 용도 변경이 중요한 사건이었다.
1945년, 나치 독일의 강제 수용소에서 해방된 유대인 생존자들은 대부분 돌아갈 집이나 가족을 잃은 상태였다. 또한, 독일인 추방으로 인해 동프로이센, 실롱스크,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방 등에서 온 수천 명의 독일인 실향민(DP, Displaced Persons)도 란츠베르크에서 연합군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45년 5월 9일, 미군은 잘츠부르크 병영 내에 DP 캠프를 설치했다. 이 캠프는 전후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의 DP 캠프 중 하나였다. 1945년 말에는 캠프 내에 약 7,000명의 DP가 거주했으며, 란츠베르크 지역 전체에는 약 23,000명의 유대인 DP가 있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대규모 난민 유입은 기존 란츠베르크 주민들과의 관계에 어려움을 야기하기도 했다. 일부 주민들은 수용소 생존자들의 모습에 공포를 느끼기도 하는 등, 통합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DP 캠프는 단순한 임시 거처를 넘어,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공간이 되었다. 1947년부터 1948년까지는 생존자들의 운명을 그린 이디시어 영화 Lang ist der Wegde(길은 멀다)가 이곳에서 촬영되기도 했다. 영화의 주연이었던 이스라엘 베이커를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딴 거리도 생겨났다.
이스라엘이 건국된 이후, 란츠베르크 DP 캠프는 이스라엘, 미국, 또는 다른 나라로 이주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통과 수용소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캠프 내에는 학교와 작업장이 마련되었고, 공동체 생활을 위한 9개의 키부츠가 형성되었으며, 자체 신문인 iddische Landsberger Cajtungyi이 발행되는 등 활발한 활동이 이루어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캠프의 규모는 점차 줄어들어, 1950년 4월에는 수용자 수가 1,500명으로 감소했고, 같은 해 11월 1일에 DP 캠프는 최종적으로 폐지되었다.
한편, 아돌프 히틀러가 수감되었던 것으로 알려진 란츠베르크 교도소는 1945년부터 1958년까지 연합군(주로 미군)에 의해 나치 독일의 전쟁 범죄자들을 수용하는 시설로 사용되었다. 1946년에는 미군 제1 전쟁 범죄자 형무소로 지정되었으며, 1951년까지 유죄 판결을 받은 전범들에 대한 형이 집행되었다.[3] 이곳에서 처형된 전범의 정확한 숫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대략 279명에서 3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4. 란츠베르크 강제 수용소와 실향민 수용소
란츠베르크암레흐 외곽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이 운영했던 강제 수용소가 있었다. 이 수용소는 카우페링 강제 수용소 단지의 일부로, 총 11개의 시설로 구성되었으며 사령부는 란츠베르크에 위치했다.[2] 이곳에서는 30,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비인간적인 환경에 수감되었고, 그중 약 14,5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수감자들은 주로 신형 제트 전투기 메서슈미트 Me 262 생산을 위한 거대한 지하 엄폐호 건설에 강제 동원되었다.[2]
수용소는 1945년 4월 27일 미국 육군 제12기갑사단에 의해 해방되었다. 해방 당시 발견된 참혹한 실상은 이후 미국 미니시리즈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9화 '왜 우리가 싸우는가'에 묘사되기도 했다.[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이곳은 실향민(DP) 수용소로 전환되어, 전후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의 DP 수용소 중 하나가 되었다.[3] 주로 소련 및 발트 3국 출신의 유대인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이곳에 머물렀으며, 이스라엘, 미국, 기타 국가로 이주를 준비하는 거점이 되었다. DP 수용소는 1950년 11월 1일에 최종적으로 폐쇄되었다.[2]
한편, 란츠베르크 교도소는 전후 연합군에 의해 나치 전쟁 범죄자들을 수용하고 처형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1945년 이후 150명 이상의 전쟁 범죄자들이 이곳에서 처형되었다.[3]
수십 년 동안 지역 사회에서 외면받았던 강제 수용소의 역사를 기억하고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한 노력도 이어졌다. 1983년부터 시민운동가 안톤 포셋과 '란츠베르크 20세기의회'라는 단체의 주도로 기금을 모아 옛 카우페링 VII 강제 수용소 부지에 유럽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건립했다.[6][5]
4. 1. 카우페링 강제 수용소 단지
란츠베르크 수용소는 나치 강제 수용소의 외부 수용소군으로, 1944년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 란츠베르크와 카우페링 주변에 11개 시설로 건설되었다. 이들은 "카우페링"으로 통칭되었으나, 사령부는 란츠베르크에 위치했다. 이 수용소 단지는 1944년 6월에 공식적으로 운영을 시작했으며, 같은 해 6월 18일 아우슈비츠에서 약 1,000명의 첫 수감자들이 카우페링으로 이송되었다. 수용소 건설의 목적은 군비 프로젝트 "린겔타우버" 작전에 따라 신형 제트 전투기 Me 262를 제조하기 위한 거대한 지하 엄폐호 건설이었다.수감자들은 기아, 추위, 티푸스를 비롯한 역병이 만연하는 열악한 환경에서 강제 노동에 시달렸으며, 이 때문에 수용소는 "차가운 화장터"라고 불렸다. 1944년 10월 말까지 일할 수 없게 된 수감자들은 아우슈비츠로 보내져 가스실에서 살해되었으나, 그 이후에는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이 해체되면서 수용소 내에서 사망 처리되었다. 사망한 수감자들의 유해는 주변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1944년 10월까지 수용소에는 5,000명 이상의 생존 수감자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된다. 전쟁 막바지인 1945년 4월, 걸을 수 있는 상태의 남은 수감자 대부분은 독일군에 의해 죽음의 행진으로 강제 "대피"되었다. 전체적으로 이 수용소 단지에서는 30,000명 이상의 희생자가 비인간적인 조건에서 수감되었고, 그중 약 14,5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수용소는 1945년 4월 27일, 미국 육군 제12기갑사단에 의해 해방되었다. 당시 약 15,000명의 수감자가 유대인 학살의 최종 단계에서 살아남아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직후, 테일러 장군의 명령에 따라 미군은 언론을 통해 수용소의 잔혹 행위를 기록하도록 허용했으며, 지역 독일 민간인과 경비병들에게 사망자들을 애도하고 맨손으로 매장하도록 명령했다. 수용소의 발견과 해방 과정은 미국 미니시리즈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9화 '왜 우리가 싸우는가'에 묘사되기도 했다.[4]
해방 이후, 옛 강제 수용소 부지는 주로 소련과 발트 3국 출신의 유대인 난민들을 위한 실향민(DP) 수용소로 전환되었다. 1945년 5월 9일, 미군은 잘츠부르크 병영 내에 DP 캠프를 설치했으며, 1945년 말에는 약 7,000명의 DP가 거주했다. 당시 란츠베르크와 관련된 유대인 DP의 총 수는 약 23,000명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란츠베르크 시민들과 DP 간의 관계는 순탄치 않았으며, 지역 주민들은 수용소 생존자들에 대해 불편함과 공포를 느끼기도 했다.
1947년부터 1948년까지 란츠베르크 DP 캠프에서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운명을 그린 이디시어 영화 "Lang ist der Weg (길은 멀다)"가 촬영되었다. 주연 배우 이스라엘 베이커를 기리기 위해 도시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생겼다. 이스라엘 건국 후, 란츠베르크 DP 캠프는 점차 통과 수용소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곳에서 과거 수감자들은 사회 복귀를 준비하며 이스라엘, USA, 기타 국가로의 이주를 준비했다. 캠프 내에는 학교와 작업장이 마련되었고, 9개의 키부츠가 형성되었으며, 'iddische Landsberger Cajtung'이라는 이디시어 신문이 발행되기도 했다. DP 캠프의 수용자 수는 1950년 4월까지 1,500명으로 감소했으며, 최종적으로 1950년 11월 1일에 폐지되었다.
전쟁 후 수십 년 동안 지역 사회와 당국은 강제 수용소의 존재를 외면하고 역사를 잊으려 노력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2019년 이스라엘 학자 일라나 해머먼은 강제 수용소 부지 방문과 추모비 탐색의 어려움에 대해 글을 쓰며 이러한 문제를 지적했다.[5] 그러나 1983년부터 시민운동가 안톤 포셋과 '란츠베르크 20세기의회'라는 단체는 이 비극적인 역사를 기리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이들의 노력과 기부를 통해 옛 카우페링 VII 강제 수용소 부지에는 유럽 홀로코스트 기념관이 설립되어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6]
4. 2. 유럽 홀로코스트 기념관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인 1944년, 란츠베르크와 인근 카우페링 주변에는 다하우 강제 수용소의 하위 개념인 11개의 외부 강제 수용소군이 건설되었다.[2] 이 수용소들은 집합적으로 "카우페링"으로 불렸으나, 사령부는 란츠베르크에 위치했다. 1944년 6월 18일, 약 1,000명의 수감자가 아우슈비츠에서 처음으로 카우페링으로 이송되었다. 이들의 주요 임무는 군비 프로젝트 "링겔타우버" 작전의 일환으로 신형 제트 전투기 메서슈미트 Me 262를 생산하기 위한 거대한 지하 벙커를 건설하는 것이었다.[2]수용소의 환경은 극도로 열악했다. 수감자들은 굶주림, 추위, 티푸스를 비롯한 각종 질병이 만연한 비위생적인 환경 속에서 강제 노동에 시달렸다. 이러한 비인간적인 조건 때문에 수감자들 사이에서 이곳은 "차가운 화장터"라고 불렸다.[2] 1944년 10월 말까지 노동력을 상실한 수감자들은 아우슈비츠로 보내져 가스실에서 살해되었으나, 그 이후에는 수용소 내에서 사망 처리되었다. 사망한 수감자들의 유해는 주변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2] 1945년 4월 27일, 미군이 수용소를 해방했을 당시 약 15,000명의 수감자가 생존해 있었다. 이들은 홀로코스트의 마지막 단계를 이곳에서 겪었다.[2]
종전 후, 란츠베르크암레흐 지역의 강제 수용소에서 해방된 유대인 생존자들은 대부분 돌아갈 집이나 가족을 잃은 실향민(Displaced Person, DP) 신세가 되었다. 1945년 5월 9일, 미군은 잘츠부르크 병영 내에 DP 캠프를 설치했으며, 이는 전후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의 DP 캠프 중 하나가 되었다.[3] 1945년 말에는 약 7,000명의 DP가 거주했으며, 전체 유대인 DP는 약 23,000명에 달했다. 이 캠프는 유대인 생존자들이 사회로 복귀하거나 이스라엘, 미국, 또는 다른 나라로 이주할 준비를 하는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캠프 내에는 학교, 작업장, 9개의 키부츠가 운영되었고, 이디시어 신문인 'iddische Landsberger Cajtung'이 발행되기도 했다.[2] 1947년부터 1948년까지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이야기를 다룬 이디시어 영화 "Lang ist der Weg"(길은 멀다)가 이 캠프에서 촬영되었으며, 주연 배우 이스라엘 베이커를 기리는 거리가 란츠베르크에 있다.[2] DP 캠프는 1950년 11월 1일에 최종적으로 폐쇄되었다.[2]
한편, 란츠베르크 교도소는 1945년부터 1958년까지 연합군에 의해 독일인 전쟁 범죄자를 수용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1946년에는 미군 제1 전쟁 범죄자 형무소로 지정되었으며, 1951년까지 유죄 판결을 받은 나치 전범들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 정확한 처형자 수는 279명에서 3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2][3]
5. 행정
란츠베르크암레흐 시의회는 30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대 시장은 다음과 같다.
재임 기간 | 이름 | 정당 |
---|---|---|
– 1988년 | 한스 함베르거(Hanns Hamberger) | CSU |
1988년 – 2000년 | 프란츠 자비에 로슬레(Franz Xaver Rößle) | UBV |
2000년 – 2012년 | 잉고 레만(Ingo Lehmann) | SPD |
2012년 – 2020년 | 마티아스 노이너(Mathias Neuner) | CSU |
2020년 – 현재 | 도리스 바움가르틀(Doris Baumgartl) | Unabhängige Bürgervereinigungdeu (UBV) |
5. 1. 자매 도시
란츠베르크암레흐는 다음과 같은 도시들과 자매 도시 관계를 맺고 있다.[8]
6. 문화와 볼거리
란츠베르크암레흐는 독일 바이에른 주의 로맨틱 가도에 위치한 도시로, 그림 같은 역사적 중심지로 잘 알려져 있다. 슈바벤과 바이에른 사이의 경계 지역인 레흐라인 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이 도시는 레흐강을 건너는 주요 소금길이 지나는 지점에 자리 잡으면서 발전했다. 1158년경 사자공 하인리히가 다리를 보호하기 위해 성을 건설하도록 명령한 것이 시초이며, 이후 정착지가 커져 13세기 초에 도시 헌장을 받았다. 1320년부터 소금 관세를 징수하며 상당한 부를 축적했고, 이를 바탕으로 1415년과 1435년에는 시벽을 확장하는 등 도시 규모를 키웠다.
란츠베르크암레흐에는 바이에른 문, 하우프트 광장의 구 시청사와 슈말츠 탑 등 중세 및 근세 시대의 다양한 건축물이 잘 보존되어 있어 방문객들에게 풍부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도미니쿠스 침머만과 같은 유명 건축가의 손길이 닿은 건축물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도시는 어두운 역사의 흔적도 간직하고 있다. 1924년 아돌프 히틀러가 뮌헨 폭동 실패 후 수감되었던 란츠베르크 교도소가 이곳에 있으며, 히틀러는 수감 기간 동안 『나의 투쟁』을 집필했다.[2]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도시 외곽에 나치 강제 수용소가 운영되어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으며, 종전 후에는 유럽에서 가장 큰 실향민 수용소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3] 이러한 과거사는 오늘날 도시 곳곳의 기념 장소를 통해 기억되고 있다.
이 외에도 시립 박물관, 후베르트 폰 헬코머의 작품을 전시하는 헬코머 박물관 등 다양한 문화 시설과 유서 깊은 교회 및 예배당이 자리하고 있으며, 정기적인 축제와 행사가 열려 도시의 활기를 더한다.
6. 1. 건축물

란츠베르크암레흐에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여러 건축물이 남아있다.
- 바이에른 문(Bayertorde): 1425년에 도시 동쪽 입구로 세워진 문이다. 높이는 36m이며 전망대가 있다. 과거 중요한 소금길이 이 문을 통해 시내로 이어졌다. 1419년 바이에른 공작 에른스트가 허가한 강 통행세 수입으로 건설된 방어 시설의 일부이다.
- 하우프트 광장(Hauptplatzde): 도시의 중심 광장으로, 여러 중요 건축물이 모여 있다.
- 구 시청사(Altes Rathausde): 1719년 도미니쿠스 침머만이 건축했다.
- 마리아 분수(Marienbrunnende): 1783년에 세워졌다.
- 슈말츠 탑(Schmalzturmde): 13세기에 지어진 탑으로, 채색된 기와 지붕이 특징이다.
- 무터 탑(Mutterturmde, 어머니의 탑): 1884년 화가 후베르트 폰 헬코머가 자신의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지었다.
- 알테 베르크슈트라세(Alte Bergstraßede): 바이에른 문에서 하우프트 광장까지 이어지는 오래된 거리이다.
- 카롤리넨 방벽/레히 방벽: 3단으로 구성된 방벽이다.
- 헥센 구획(Hexenviertelde): 오래된 나무 발코니가 특징적인 예술가 구역이다.
- 성산(Schlossbergde): 성터가 있으며 구 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다.
- 폴데랑거의 성 요하네스 분교회(Johanniskirchede): 폴데랑거 지역에 위치한 교회이다.
- 예제이텐 콜렉스의 구 아케이드 광장: 1576년부터 1609년 사이에 지어졌다.
- 논넨 탑(Nonnenturmde): 크레스타르 구획에 위치한 탑이다.
- 융페른슈프룽(Jungfernsprungde): 1300년에서 1350년 사이에 지어진 탑으로 전망대가 있다.
- 다흐르 탑(Dachlturmde), 또는 도렌 탑(Dohlen Turmde): 1450년에서 1500년 사이에 지어졌다.
- 페버 문(Färbertorde): 1458년에 세워졌으며, 물레방앗간으로 이어지는 도수로 근처에 있다.
- 베커 문(Bäckertorde): 15세기에 지어졌으며, 말 시장 앞에 위치한다.
- 헥센 탑(Hexenturmde): 15세기에 지어졌으며, 현재 같은 이름의 레스토랑으로 사용되고 있다.
- 풀퍼 탑(Pulverturmde): 15세기에 지어졌으며, 현재는 란츠베르크 산악 구조대의 숙소로 사용된다.
- 잔다우어 문(Sandauer Torde): 1630년에 세워졌으며, 과거 시의 염색장(1500년)이었던 슈타핑거 호프 근처에 있다.
- 란츠베르크의 염장(Salzstadelde): 14세기부터 18세기까지 소금 저장 및 거래 장소로 사용되었다. 최초의 염장은 1353년에 건설되었고, 17세기까지 3동으로 늘어났다. 20세기에는 소방서 본부로 사용되다가, 1990년대에 시립 도서관으로 개조되었다.
- 구 묘지: 보호 문화재로 지정된 묘석과 묘지 교회(1596년-1598년)가 있다.
- 란츠베르크역: 1872년에 건립되었으며, 2007년 '올해의 역' 소도시 역 부문으로 선정되었다.[10]
- 란츠베르크 교도소: 1904년부터 1908년 사이에 지어졌다. 뮌헨 폭동 실패 후 아돌프 히틀러가 수감되어 『나의 투쟁』을 집필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 푈링 성(Pöringerschlösslde): 16세기에 레오프레히팅 남작 카를이 건립했다.
6. 2. 기념 장소
안톤 포셋과 '란츠베르크 20세기의회'는 1983년부터 나치즘 시대의 역사를 기리기 위해 노력해왔다. 이들의 노력과 기부를 통해 옛 카우페링 VII 강제 수용소 부지에 란츠베르크 유럽 홀로코스트 기념관이 세워졌다.[6] 그러나 이스라엘 학자 일라나 해머먼은 2019년 방문 당시 희생자 추모비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언급하며, 전쟁 후 수십 년간 지역 주민들과 당국이 수용소의 존재를 외면하려 했다고 지적했다.[5]그 외 주요 기념 장소는 다음과 같다.
- '''죽음의 행진 기념비''': 노이엔 베르크슈트라세(Neuen Bergstraße)에 위치하며, 홀로코스트의 죽음의 행진 당시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이 겪었던 고난을 기리는 부조 형태의 기념비이다.
- '''강제 수용소 묘지''': 란츠베르크 산업 지구에 위치했던 카우페링 제1 수용소의 희생자들을 위한 묘지이다.
- '''슈라게터 슈타인''': 레흐강 변 페싱거 아우(Pössinger Au)의 빌트파크(Wildpark)에 있으며, 나치에 저항했던 알베르트 레오 슈라게터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기념석이다. 과거 독일 전역에 100여 개가 세워졌던 것 중 하나이다.
6. 3. 교회와 예배당
란츠베르크암레흐에는 다양한 시대와 양식을 대표하는 여러 교회와 예배당이 있으며, 이들은 중핵 지구와 교외 지역에 걸쳐 분포해 있다.주요 교회 및 예배당 외에도 다음과 같은 곳들이 있다.
- 카타리넨포어슈타트의 성 카타리나 분교회: 1890년부터 1892년 사이에 건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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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타리넨포어슈타트의 구 레프로젠 예배당: 오래된 묘지와 작은 납골당이 함께 있다.
- 슈페팅의 성 울리히 묘지 교회: 1765년에 지어졌다.
- 발트프리트호프(숲의 묘지)의 알트외팅거 예배당: 1857년에 세워졌다.
- 잔다우 수도원의 구 수도원 교회: 8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란츠베르크암레흐 군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로 여겨진다.
- 피츠링 지구:
- * 페링 성의 성내 교회 (1764년 - 1766년)
- * 세례자 성 요한 교구 교회 (1435년)
- 에어푸프팅 지구:
- * 마리아 아이히 예배당 (1696년)
- 라이슈 지구:
- * 마리아 승천 분교회 (1730년)
- 엘리크호펜 지구:
- * 성 슈테파누스 분교회
- * 성 라쏘 예배당 (1690년)
- * 탄식의 성모 예배당 (1760년)
이 외에도 중핵 지구와 교외 지구에 각각 여러 교회와 예배당이 자리 잡고 있다.
6. 3. 1. 중핵 지구
란츠베르크암레흐의 중핵 지구에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여러 교회와 예배당이 자리 잡고 있다.
- 도시 교구 교회 성모 승천 교회 (1458년 - 1708년): 로렌츠 루이돌의 바로크 양식 십자가의 길 크리페가 있다.
- 마리아 예배당 (1605년): 성모 승천 교회 남쪽 입구 상층에 위치한다.
- 요하니스 교회 (1750년 - 1752년): 도미니쿠스 침머만이 건축했다.
- 성 십자가 교회: 몰타 교회라고도 불리며, 1754년에 헌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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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그나티우스 예배당: 성 십자가 교회당의 내진 상층에 있다. 루페르트 마이어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부상 후 첫 미사를 이곳에서 거행했다.
- 우르술리넨 수도원 교회 (1754년).
- 호프그라벤 샘의 소 교회 (1756년).
- 성 천사 교회 (1967년).
- 개신교 그리스도 교회 (1913년 - 1914년).
- 신 사도파 교회 (1970년).
- 성 크리스티나 예배당 (1991년).
6. 3. 2. 교외 지구
- 폴데랑거의 성 요하네스 분교회가 있다.
- 구 묘지에는 보호 문화재로 지정된 묘석과 함께 1596년부터 1598년 사이에 지어진 묘지 교회가 있다.
- 16세기에 건립된 푈링 성은 레오프레히팅 남작 카를에 의해 세워졌다.
6. 4. 극장
란츠베르크 시립 극장은 1878년에 건립되었으며, 바이에른에서 가장 오래된 시민 극장 중 하나로 꼽힌다.6. 5. 박물관
- 시립 박물관: 1693년에 지어진 건물에 위치한다.
- 헬코머 박물관: 후베르트 폰 헬코머가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세운 뭇터 탑(어머니의 탑)에 자리 잡고 있다.
- 프란츠 신발 박물관
- 란츠베르크암레흐 소방 박물관
- 시립 극장의 주랑 홀: 교체 전시가 열린다.
6. 6. 여가
란츠베르크암레흐에는 다양한 여가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인젤바트(Inselbadde): 야외 수영장이다.
- 레히탈바트(Lechtalbadde): 워터 슬라이드를 갖춘 실내 수영장이다.
- 레히파크 페싱거 아우(Lechpark Pössinger Aude): 시민들을 위한 공원이다.
- 올림피아 키노(Olympia Kinode): 영화관이다.
- 란츠베르크 도서관(Stadtbücherei Landsbergde): 시립 도서관으로, 과거 소금 창고 건물을 활용하고 있다.
- 오베러 레히슈타우제(Oberer Lechseede): 인공 호수로, 수영과 수상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 자전거 및 산책로: 암머 호(Ammersee)까지 이어지는 300km 이상의 자전거 및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다.
6. 7. 미디어
- Landsberger Tagblattdeu: 지역 일간 신문이다.
- Kreisbote Landsbergdeu: 주간으로 발행되는 지역 신문이다.
- Extra Landsbergdeu: 주간으로 발행되는 또 다른 지역 신문이다.
- Landsberger Monatszeitungdeu: 월간으로 발행되는 지역 신문이다.
- Partyzeitung Landsbergdeu: 온라인으로 발행되는 지역 이벤트 정보 잡지이다.
6. 8. 축제와 행사
행사명 | 개최 주기/장소/특징 |
---|---|
뤼텐페스트 | 4년에 한 번 열리는 중세풍 어린이 축제 |
시 축제 | 매년 하우프트 광장에서 개최 |
포위 축제 | 매년 바이에른 문에서 개최 |
DLandsberger Wiesn | 매년 바이칭거 비제에서 개최되는 민속 축제 |
헬코머 콘테스트 | 클래식 자동차를 이용한 투어링카 랠리, 매년 개최 |
남독일 도자기 시장 | 매년 개최 |
란츠베르크의 크리스마스 선물 시장 | 매년 개최 |
란츠베르크 예술의 밤 | 매년 구시가지 전역에서 개최 |
란츠베르크-암머제-메세 | 수공예·산업 박람회, 매년 개최 |
란츠베르크의 여름 음악 축제 | 매년 개최 |
란츠베르크의 오르간의 여름 | 매년 개최 |
야외 영화제 | 로스마르크트의 낭만적인 무대 장치 속에서 매년 개최 |
란츠베르크의 크로이츠마르크트 | 매년 개최 |
란츠베르크의 주간 시장 |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
란츠베르크의 농민 시장 | 매주 개최 |
란츠베르크의 도시 시장 "체더 마르크트" | 체더 거리에서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개최 |
란츠베르크의 파이트 시장 | 매년 개최, 이 날은 예외적으로 일요일에 가게가 열림 |
레히찰 페스티벌 | 매년 란츠베르크 청소년 센터에서 개최 |
6. 9. 공원
- 페싱거 아우의 사냥터 공원
- 무터 탑의 공원
- 레흐강 서안의 영국식 정원
- 레히 거리의 루나 파크
6. 10. 명물 요리
- 란츠베르거 링: 돼지고기와 소고기, 감자로 만들어진 소시지로, 자우어크라우트와 함께 제공된다.
- 란츠베르거 라트: 중세 시대의 조리법에 따라 만들어진 달콤한 식물 향신료가 들어간 리큐어이다.
- 란츠베르거 골트: 2008년 2월 20일부터 양조되고 있는 맥주이다. 2009년 5월에는 '란츠베르거 바이스'라는 이름으로 밀맥주도 출시되었다.
6. 11. 스포츠 클럽
란츠베르크에는 다음과 같은 스포츠 클럽이 있다.클럽 | 종목 | 리그 | 창단 |
---|---|---|---|
TSV 란츠베르크 | 축구 | 바이에른 주 리그 | 1882 |
란츠베르크 리버킹스 | 아이스하키 | 레기오날리가 (바이에른리가) | 2008 |
란츠베르크 X-PRESS | 미식축구 | 레기오날리가 쥐트 | 2007 |
DJK 란츠베르크 | 농구 | 레기오날리가 | 1956 |
Jahn 란츠베르크 | 축구 | A-클라세 오버바이에른 | 1923 |
튀르크스포르 란츠베르크 | 축구 | A-클라세 오버바이에른 | -- |
란츠베르크 크루세이더스 | 야구 | 베치르크리가 바이에른 | 2003 |
란츠베르크 코디악스 | 소프트볼 | 란데스리가 바이에른 | 2009 |
란츠베르크 BB-댄스 캠프 | 댄스 | 부기우기 댄스 페스티벌 | 1987 |
1. BC 란츠베르크 | 포켓볼 | -- | -- |
EV 란츠베르크 2000 | 아이스하키 | -- | -- |
SV D.I.T.I.B 란츠베르크 | 축구 | -- | -- |
테니스 클럽 란츠베르크 e.V. | 테니스 | -- | -- |
FT 얀 란츠베르크 e.V. | 미상 | -- | -- |
7. 경제와 사회 자본
(내용 없음 -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해당 섹션에 부합하는 내용이 없으며, 하위 섹션에서 관련 내용을 상세히 다루고 있어 중복을 피하기 위해 내용을 생략함)
7. 1. 지역 기업
- Rational AGdeu: 업소용 조리 기구를 생산하는 기업이다.
- ADAC 기술 센터 및 서비스 센터 "겔베 엥겔"(Gelbe Engeldeu, 노란 천사) 남부 독일 지점이 있다. ADAC는 독일의 자동차 클럽이다.
- LUTZ Fleischwaren AGdeu: 육가공품을 생산한다.
- E.ON Wasserkraft AGdeu: 수력 발전을 전문으로 하는 기업이다.
- Pettinger GmbHdeu: 농기구를 제조한다.
- Klausner Holz Bayern GmbHdeu: 목재 유통을 담당하는 기업이다.
- Webasto-Solar GmbHdeu: 태양광 시스템 관련 사업을 한다.
- 3M ESPE AG: 치과 관리 용품을 생산하는 기업이다.
7. 2. 교통
시에는 두 개의 기차역, 란츠베르크 (레흐)와 란츠베르크 (레흐) 슐레가 있다. 주요 역인 란츠베르크역은 1872년에 건설되었으며, 2005년 독일 최초로 민영화된 역이 되었다. 2007년에는 '올해의 역' 소도시 역 부문으로 선정되었다.[10]시외 버스 터미널로는 ZOB 란츠베르크가 있다.
도로 교통으로는 연방 아우토반 A96호선(뮌헨-린다우)이 지나며, 연방도 B17호선 신선(아우크스부르크-란츠베르크 암 레흐 서부)과 로맨틱 가도의 일부인 연방도 B17호선(란츠베르크-퓌센-로이테)이 연결된다.
철도 노선으로는 레히펠트 철도(아우크스부르크-란츠베르크)가 운행된다.
7. 3. 공공 기관
기관명 | 소재지/소속 |
---|---|
연방 이민 및 난민청 지소 | 란츠베르크 암 레흐 |
연방 기술 구조대 연맹 | 란츠베르크 암 레흐 |
연방 관재 사무소 뮌헨 지소 | 란츠베르크 암 레흐 |
바이에른주 형무소 | 란츠베르크 암 레흐 |
구 재판소 | 란츠베르크 암 레흐 |
시 당국 | 란츠베르크 암 레흐 |
군청 | 란츠베르크 암 레흐 |
세무서 | 란츠베르크 암 레흐 |
직업 안정소 | 란츠베르크 암 레흐 |
주 건설국 | 란츠베르크 암 레흐 |
보건소 | 란츠베르크 암 레흐 |
등기소 | 란츠베르크/슈타른베르크 |
영림서 | 란츠베르크 암 레흐 |
연방군 뵐펜 병영 | 제13 공군 정비 그룹, 공군 항공 병기 시스템 프로그램 센터 |
7. 4. 병원
- 크리니쿰 란츠베르크 암 레흐
- 오버바이에른 행정구역 정신 병원 (크리니쿰 란츠베르크 내 위치)
7. 5. 교육
(내용 없음)7. 5. 1. 직업 교육
- 오버바이에른 행정구의 란츠베르크암레흐 농업 교육 센터
- 주립 직업 학교 란츠베르크암레흐
- 오버바이에른 행정구의 양봉가 학교, 꿀벌 학습 센터와 학습 양봉장을 병설하고 있다.
- 간호 직업 전문 학교
7. 5. 2. 상급 학교
7. 5. 3. 특수학교
란츠베르크암레흐에는 SFZ 특수학교가 있다.8. 인물
란츠베르크암레흐는 다양한 분야의 인물들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도시다. 노벨 생리학·의학상 수상자인 생물학자 에르빈 네어가 이곳에서 태어났으며, 로코코 양식의 건축가 도미니쿠스 치머만은 란츠베르크의 구 시청사를 설계하는 등 도시 경관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영국에서 활동한 예술가 허버트 폰 헤르코머 경 역시 이 도시 출신이다.
한편, 란츠베르크는 어두운 역사의 흔적도 가지고 있다. 나치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는 1924년 뮌헨 폭동 실패 후 란츠베르크 교도소에 수감되어 그의 악명 높은 저서 『나의 투쟁』을 집필했다.[2]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 원수이자 전범으로 기록된 빌헬름 리터 폰 리프 역시 란츠베르크 출신이다.
미국의 유명 싱어송라이터 조니 캐시는 미국 공군 복무 시절인 1951년부터 1954년까지 란츠베르크-레흐 공군기지에 주둔하기도 했다.[7] 이 외에도 란츠베르크암레흐는 역사적으로 많은 인물들이 거쳐가거나 배출된 곳이다.
8. 1. 출신 인물
- 란스페르기우스 (1489–1539): 카르투시오회 수도사이자 금욕주의 작가.
- 이그나츠 쾨글러 (1680–1746): 예수회 선교사이자 수학자.
- 도미니쿠스 치머만 (1685–1766): 로코코 양식의 대표적인 건축가. 비에스 순례 교회, 란츠베르크의 구 시청사 등을 설계했으며, 1748년부터 1753년까지 란츠베르크 시장을 역임했다.
- 허버트 폰 헤르코머 경 (1849–1914): 영국에서 활동한 화가, 조각가, 영화 및 연극 감독. 란츠베르크에 어머니를 기리는 무터 탑(Mutterturm)을 건설했다.
- 알로이스 볼프뮐러 (1864–1948): 발명가이자 항공 공학자.
- 빌헬름 리터 폰 리프 (1876–1956):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 원수. 전쟁 범죄에 연루된 인물이다.
- 조지 레머스 (1878–1952): 미국의 금주법 시대에 활동한 변호사이자 유명한 밀주업자.
- 아돌프 히틀러 (1889–1945): 나치 독일의 독재자. 1923년 뮌헨 폭동 실패 후 1924년 란츠베르크 교도소에 수감되어 『나의 투쟁』을 집필했다.
- 루이제 린저 (1911–2002): 작가이자 정치인.
- 조니 캐시 (1932–2003):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미국 공군 복무 시절인 1951년부터 1954년까지 란츠베르크-레흐 공군기지에 주둔했다.[7]
- 지크프리트 라우흐 (1932–2018): 배우.
- 사무엘 바크 (1933년 출생): 화가이자 작가.
- 안톤 포세트 (1941–2015): 홀로코스트 연구자. 란츠베르크에 유럽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설립했다.
- 에르빈 네어 (1944년 출생): 생물학자. 세포막의 이온 채널 연구로 1991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다.
- 모리스 클라이너 (1948년 출생): 미국 미네소타 대학교의 AFL-CIO 노동 정책 및 노동 관계 교수.
- 율리안 나겔스만 (1987년 출생): 축구 감독.
- 미하엘 운터부흐너 (1988년 출생): 다트 선수.
- 플로리안 노이하우스 (1997년 출생): 축구 선수.
8. 2. 관련 인물
- 란스페르기우스 (1489–1539): 카르투시오회 수도사이자 금욕주의 작가.
- 이그나츠 쾨글러 (1680–1746): 예수회 선교사이자 수학자.
- 도미니쿠스 치머만 (1685–1766): 건축가. 란츠베르크암레흐의 구 시청사를 건축했다.
- 허버트 폰 헤르코머 경 (1849–1914): 예술가, 영화 및 연극 감독.
- 알로이스 볼프뮐러 (1864–1948): 발명가이자 항공 공학자.
- 빌헬름 리터 폰 리프 (1876–1956):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의 야전 원수이자 전쟁 범죄자.
- 조지 레머스 (1878–1952): 미국의 금주법 시대 변호사이자 유명한 밀주업자.
- 아돌프 히틀러 (1889–1945): 나치 독일의 독재자. 1923년 뮌헨 폭동 실패 후 1924년 란츠베르크 교도소에 수감되어 『나의 투쟁』을 집필했다.
- 루이제 린저 (1911–2002): 작가이자 정치인.
- 조니 캐시 (1932–2003): 미국의 유명 싱어송라이터. 미국 공군 복무 시절인 1951년부터 1954년까지 란츠베르크-레흐 공군기지에 주둔하며 무선 통신 기술자로 일했다. 이곳에서 첫 밴드인 '란츠베르크 바바리안스'를 결성하기도 했다.[7]
- 지크프리트 라우흐 (1932–2018): 배우.
- 사무엘 바크 (1933년 출생): 화가이자 작가.
- 안톤 포세트 (1941–2015): 홀로코스트 연구자이자 란츠베르크에 위치한 유럽 홀로코스트 기념관 설립자.
- 에르빈 네어 (1944년 출생): 생물학자. 란츠베르크암레흐 출신으로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다.
- 율리안 나겔스만 (1987년 출생): 축구 감독.
- 미하엘 운터부흐너 (1988년 출생): 다트 선수.
- 플로리안 노이하우스 (1997년 출생): 축구 선수.
- 모리스 클라이너 (1948년 출생): 미네소타 대학교 AFL-CIO 노동 정책 교수.
9. 기타
란츠베르크암레흐는 한때 국가 사회주의의 중심적인 중요 도시였고, 인근(예: 1935년 이후의 펜치히 공군 기지) 또는 시내(예: 자르부르크 병영)에 군사 시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군청 소재지 중 연합군의 공습 피해가 가장 적었던 도시 중 하나이다.
신문 기사에 따르면 1944년 4월 뮌헨으로 향하던 전투 폭격기 1대가 현재 게오르크 헬마이어 광장에 면한 중세풍 가옥에 작은 폭탄을 투하한 사례가 있다. 이 건물(169번지)은 현재 카페로 운영되고 있으며, 1980년대 초에 문화재로서 복원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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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uture began at DP-Camp Landsbe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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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haare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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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ue Chancen für alte Empfangsgebäude
DB Welt
20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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