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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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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준식은 충청남도 출신으로 일본에서 태어나 한국으로 유학 온 인물이다. 서울대학교 재학 중 형 서승과 함께 북한을 방문한 사건으로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1972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7년 만기 후에도 사회안전법에 의해 보호감호 처분을 받았으며, 18일간의 단식 투쟁과 51일간의 단식 투쟁을 벌였다. 1988년 석방 후 사회안전법 폐지 운동을 전개했으며,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공동 의장,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관련 구속, 인권운동사랑방 대표 등을 역임했다. 옥중 서한을 묶은 《서준식 옥중 서한》을 출간했으며, 사회주의자임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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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준식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서준식
원어명徐俊植
로마자 표기Seo Jun-sik
출생일1948년
출생지일본
국적대한민국
직업인권운동가, 사회주의자
경력
주요 경력인권운동사랑방 대표

2. 생애

서준식은 일제강점기일본으로 건너간 충남 출신 부모에게서 1948년 일본 교토시에서 태어났다. 1967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한민국으로 유학하여 1968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였다. 1970년 방학 중 일본에 머물던 중, 서울대학교에 다니던 둘째 형 서승과 함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했다.

1971년 서승과 함께 보안사령부에 체포되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1978년 형 만기에도 불구하고 사회안전법이 소급 적용되어 '사상 전향'을 거부, 석방되지 못하고 청주감호소에 이감되어 10년을 더 복역해야 했다. 이후 사회안전법 폐지 운동,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활동,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관련 투쟁, 인권운동사랑방 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연도사건
1948년일본 교토 출생
1967년고등학교 졸업 후 한국 유학
1968년서울대학교 법학과 입학
1970년형 서승과 함께 방북
1971년서승과 함께 보안사령부에 체포
1972년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7년 판결
1978년징역 7년 만기, 사회안전법에 의한 보호감호 처분 결정
1980년교도소 처우에 항의, 18일 단식 투쟁
1987년사회안전법 철폐와 석방 요구, 51일 단식 투쟁
1988년석방, 사회안전법 폐지 운동 전개
1989년 ~ 1991년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공동 의장
1991년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관련 구속
1991년 ~ 1993년강기훈 공대위 집행위원장
1993년인권운동사랑방 창립, 대표 역임
1993년 ~ 1995년전국연합 인권위원장
1996년 ~ 1997년인권영화제 집행위원장
1997년《레드헌트》 상영으로 구속,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인권상 수상
1998년씨네 21 영화상 대상 수상


2. 1. 유년 시절과 유학

서준식은 일제강점기일본으로 건너간 충남 출신 부모에게서 1948년 일본 교토시에서 태어났다. 1967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한민국으로 유학, 1968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였다. 1970년 방학 중 일본에 머물던 그는, 1968년에 서울로 유학 와 서울대학교에 다니던 그의 둘째 형 서승과 함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2. 2. 유학생 간첩단 사건과 투옥

1948년 일본 교토시에서 태어난 서준식은 1967년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한민국으로 유학, 1968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했다. 1970년 방학 중 일본에서 둘째 형 서승과 함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한 것을 빌미로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1971년 보안사령부에 체포되었다.[2] 1972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았으나, 1978년 형 만기 후에도 사회안전법이 소급 적용되어 '사상 전향'을 거부, 청주감호소에 이감되어 보호감호 처분으로 10년을 더 복역해야 했다.[2]

1972년 확정판결 후 서준식은 비전향장기수가 되기로 결심한다. 대전교도소에서 여러 선배 비전향장기수들을 만나 진보운동 전반을 사색했다. 50년대의 참혹했던 감옥상, 빨치산, 해방 공간의 노동 진보운동, 일제하의 감옥, 만주에서의 독립투쟁 등 다양한 경험을 가진 이들로부터 역사를 배웠다. 이를 통해 진보운동에도 부모와 조상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진보운동의 대장정에서 함부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했다.[2]

전향 문제는 단순한 명분이 아닌, 실존적 기여와 진보운동사에서 희생된 이들에 대한 겸허함의 문제였다. 그는 '힘을 내라 너의 몸은 너 혼자만의 몸이 아니다'라는 내면의 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다. 감옥에서 외부와 단절된 채 스스로를 지키며, 전향서에 굴복하지 않고 인고의 세월을 감내했다.[2]

2. 3. 옥중 투쟁과 석방

1971년 보안사령부에 체포된 서준식은 1972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1978년 5월 27일 형 만기에도 불구하고, 1975년에 제정된 사회안전법이 소급 적용되어 '사상 전향'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석방되지 못하고 청주감호소에 이감, 10년의 보호감호 처분을 받았다.[2]

1980년 7월 9일, 교도소 당국의 처우에 항의하며 18일간 단식 투쟁을 벌였다. 1987년 3월 3일에는 사회안전법 철폐와 석방을 요구하며 51일간 단식 투쟁을 진행했다. 같은 해 3월 6일, 고등법원에 "나의 주장"을 제출하기도 했다.[2]

1972년 확정판결 후, 서준식은 대전교도소에서 '비전향 장기수'로 수감 생활을 했다. 이곳에서 여러 비전향 장기수들을 만나 진보 운동 전반에 대해 사색했다. 1950년대의 참혹했던 감옥 상황, 빨치산들의 인간적인 면모, 해방 공간에서의 노동 진보 운동, 일제강점기 하의 감옥, 만주에서의 독립 투쟁 등 다양한 경험을 들으며, 진보 운동에도 부모와 조상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200년이 넘는 진보 운동의 전통을 강물에 비유하며 자신은 그 속의 포말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이러한 깨달음은 진보 운동 대열에서 함부로 벗어날 수 없다는 책임감과 독재 정권이 강요하는 전향서에 서명할 수 없는 이유가 되었다.[2]

서준식은 전향 문제가 명분이 아닌, 실존으로서 최대한 기여할 수 있는 위치와 진보 운동사에서 희생된 이들 앞에서 겸허할 수 있는 처신에 대한 고민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힘을 내라 너의 몸은 너 혼자만의 몸이 아니다'라는 내면의 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감옥에서 외부와 단절된 채 스스로를 지켜나갔으며, 전향서에 서명하면 석방될 수 있었음에도 굴복하지 않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뎌냈다. 그는 훗날 "몸은 비록 고달팠지만 영혼은 맑았다"고 술회했다.[2]

1988년 5월 25일, 석방된 서준식은 이후 사회안전법 폐지 운동을 전개했다.[2]

2. 4. 석방 후 활동

1988년 5월 25일 석방된 후, 서준식은 사회안전법 폐지 운동을 전개했다.[1] 1989년부터 1991년까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공동 의장을 역임했다.[1] 1991년 6월에는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과 관련하여 구속되기도 했다.[1] 이후 1993년까지 강기훈 공대위 집행위원장을 맡았다.[1]

1993년 3월 인권운동사랑방을 창립하여 대표를 역임했고,[1] 같은 해부터 1995년까지 전국연합 인권위원장을 지냈다.[1] 1996년부터 1997년까지 인권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았는데,[1] 1997년 인권영화제에서 제주도 4·3 항쟁을 다룬 《레드헌트》 상영으로 구속되기도 했다.[1]

1997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현재는 NCCK) 인권상을 수상했고,[1] 1998년에는 씨네 21 영화상 대상을 수상했다.[1]

2. 5. 인권운동사랑방 활동

1993년 3월 인권운동사랑방을 창립하여 대표를 역임하였다. 1993년부터 1995년까지 전국연합 인권위원장을 맡았고, 1996년부터 1997년까지 인권영화제 집행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97년 인권영화제에서 제주도 4·3 항쟁을 다룬 《레드헌트》 상영으로 구속되기도 하였다. 같은 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인권상을 수상하였고, 1998년에는 씨네 21 영화상 대상을 수상하였다.

2. 6. 사회주의 선언

서준식은 스스로 "나는 사회주의자이다"라고 선언하였다.

그는 어린 시절 재일동포 2세로 일본에서 자라면서 박해받는 소수자의 슬픔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 때 수많은 학우들이 보는 앞에서 '조선인'임을 고백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사회주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3]

3. 옥중 서한과 저술 활동

《서준식 옥중 서한》은[1] 서준식이 17년 동안 옥중 생활을 하며 보낸 편지들을 모은 책이다. 1988년 대한민국에서 처음 출간되었고, 이후 노동사회과학연구소(노사과연)에서 재출간되었다. 이 책은 엽서라는 제한된 공간에 담긴 청년 서준식의 사상과 상념을 보여준다.

서준식 옥중서한은 엽서 위에 고통스럽게 정신적 지평을 열며 전진하는 '젊은 날의 자화상'을 담고 있다. 이루지 못한 꿈과 그 꿈을 가로막는 현실 구조와의 갈등, 살인적인 고문에도 살아남기 위한 저항의 기록이다. 민족에 대한 사랑 외에는 가진 것이 없었던, 글쓰기를 싫어했던 그를 독재의 감옥은 엄하게 훈련시켰다.

그는 고정관념과 통념, 유행을 따르지 말고, 고난을 정면으로 돌파하며, 부도덕한 세상에서 피해자의 위치에 서라고 당부했다. 일상에 갇히지 말고 꿈을 꾸며, 역사를 공부하고, '역사 앞에 겸손하라'고 절규했다. 이는 사악한 세상에서 아웃사이더로 살아가라는 메시지였다. 그는 국가폭력에 저항하며 감옥에서 힘겹게 꿈을 지켜내고자 했고, 체제에 동화되지 않기 위해 사회주의자의 길을 가고자 했다.

1972년 확정판결 후 서준식은 사상 전향을 거부하고 비전향 장기수가 되었다. 대전교도소에서 그는 여러 선배 비전향 장기수를 만나 진보 운동 전반을 사색했다.

반공 국가의 감옥에서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1950년대의 참혹했던 감옥, 빨치산, 해방 공간에서의 노동 진보운동, 일제강점기 감옥, 만주에서의 독립 투쟁 등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박헌영의 공산당에 참가했던 운동가로부터 살아있는 역사 이야기를 들으며, 진보 운동에도 부모와 조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200년이 넘는 진보 운동의 전통을 강물에 비유하며 자신은 포말에 지나지 않음을 자각하고, "내 인생도 내 것만이 아님"을 새기며 진보 운동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명분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 실존으로서 최대한 기여할 수 있는 위치, 진보 운동사에서 희생된 이들 앞에서 겸허할 수 있는 처신을 고민했다. '힘을 내라 너의 몸은 너 혼자만의 몸이 아니다'라는 질타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외부 세계와 타락한 기득권과 단절된 채 전향서에 도장을 찍지 않고 인고의 세월을 감내하며 '몸은 비록 고달팠지만 영혼은 맑았다'고 했다.[2]

3. 1. 옥중 서한

《서준식 옥중 서한》은[1] 서준식이 17년 동안 옥중 생활을 하며 보낸 편지들을 모은 책이다. 1988년 대한민국에서 처음 출간되었고, 이후 노동사회과학연구소(노사과연)에서 재출간되었다. 이 책은 엽서라는 제한된 공간에 담긴 청년 서준식의 사상과 상념을 모은 것이다.

서준식 옥중서한은 엽서 위에 고통스럽게 정신적 지평을 열며 전진하는 '젊은 날의 자화상'을 담고 있다. 이루지 못한 꿈과 그 꿈을 가로막는 현실 구조와의 갈등, 살인적인 고문에도 살아남기 위한 저항의 기록이다. 민족에 대한 사랑 외에는 가진 것이 없었던, 글쓰기를 싫어했던 그를 독재의 감옥은 엄하게 훈련시켰다.

그는 고정관념과 통념, 유행을 따르지 말고, 고난을 정면으로 돌파하며, 부도덕한 세상에서 피해자의 위치에 서라고 당부했다. 일상에 갇히지 말고 꿈을 꾸며, 역사를 공부하고, '역사 앞에 겸손하라'고 절규했다. 이는 사악한 세상에서 아웃사이더로 살아가라는 메시지였다. 그는 국가폭력에 저항하며 감옥에서 힘겹게 꿈을 지켜내고자 했고, 체제에 동화되지 않기 위해 사회주의자의 길을 가고자 했다.

1972년 확정판결 후 서준식은 사상 전향을 거부하고 비전향 장기수가 되었다. 대전교도소에서 그는 여러 선배 비전향 장기수를 만나 진보 운동 전반을 사색했다.

반공 국가의 감옥에서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1950년대의 참혹했던 감옥, 빨치산, 해방 공간에서의 노동 진보운동, 일제강점기 감옥, 만주에서의 독립 투쟁 등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박헌영의 공산당에 참가했던 운동가로부터 살아있는 역사 이야기를 들으며, 진보 운동에도 부모와 조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200년이 넘는 진보 운동의 전통을 강물에 비유하며 자신은 포말에 지나지 않음을 자각하고, "내 인생도 내 것만이 아님"을 새기며 진보 운동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명분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 실존으로서 최대한 기여할 수 있는 위치, 진보 운동사에서 희생된 이들 앞에서 겸허할 수 있는 처신을 고민했다. '힘을 내라 너의 몸은 너 혼자만의 몸이 아니다'라는 질타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외부 세계와 타락한 기득권과 단절된 채 전향서에 도장을 찍지 않고 인고의 세월을 감내하며 '몸은 비록 고달팠지만 영혼은 맑았다'고 했다.[2]

3. 2. 저술

韓国人権運動の証言(世界人権問題叢書)|칸코쿠 진켄운도-노 쇼-겐 (세카이 진켄 몬다이 소-쇼)|아카시 쇼텐일본어, 2001년

3. 3. 공저


  • 《서준식 옥중서간》(서무성 공편저, 박서방, 1992년)
  • 《자생への情熱―한국 정치수감자에서 인권운동가로》(서무성 공편저, 영서방, 1995년)

3. 4. 번역


  • 서승·서준식, 書兄弟獄中から来た手紙―承、準植の十年|서 형제 옥중에서 온 편지 서승, 서준식의 10년일본어 (이와나미 신서, 1981)

참조

[1] 서적 서준식 옥중 서한 야간비행
[2] 서적 옥중서한 노사과연
[3] 서적 서준식의 생각 야간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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