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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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금관가야는 삼국유사에 가락국으로 기록되었으며, 1세기 중엽부터 4세기 말까지 변한 지역 연맹체의 중심 국가였다. 김해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했으며, 철 생산과 해상 무역을 통해 번성했다. 건국 신화는 김수로왕에 대한 이야기이며, 42년에 수로왕이 9개의 촌락을 통일하여 건국되었다고 전해진다. 399년 고구려의 침략으로 세력이 약화되었고, 532년 신라에 투항하여 멸망했다. 금관가야의 왕족은 신라 귀족으로 편입되었으며, 김해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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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가야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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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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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이름 | 금관국 |
다른 표기 | 금관국(金官國) |
지위 | 전기 가야 연맹의 맹주국 |
존속 기간 | 42년 ~ 532년 |
수도 | 김해 |
공용어 | 가야어 |
민족 | 변한인 |
종교 | 불교, 샤머니즘 |
정부 형태 | 군주제 |
국성 | 김해 김씨 |
정치 | |
지도자 칭호 | 국왕 |
통치 기간 | 42년 ~ 199년, 521년 ~ 532년 |
주요 지도자 | 수로왕(초대), 구형왕(말대) |
역사 | |
면적 및 인구 | |
경제 | |
기타 |
2. 국명
삼국유사에 나오는 국명은 가락국(駕洛國)이며, 삼국유사 이전에는 금관가야 혹은 구야국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금관가야의 건국 설화는 가락국기에 실린 것을 삼국유사에서 옮겨 적은 것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23]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 권2의 「가락국기(駕洛國記)」에 기록되어 있다.[2]
삼국지 「위서(魏書)」 동이전(東夷伝) 한조(韓条)에는 한(韓)이 남쪽에서 육지로 왜(倭)와 접한다고 언급하고 있다.[12]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인조』에서는 구야한국을 "그( = 왜) '''북쪽 해안'''"이라고 언급하고 있다.[13][14] 「그 ( = 왜) 북쪽 해안」의 해석으로는, 왜국 (또는 왜인 거주지)의 영역 내로 보는 설, 영역 밖으로 대안(對岸)으로 보는 설, 왜(倭)의 바다와 해안이 접한다는 의미로 보는 설 등 세 가지 설이 제시되고 있다.[15] 변진 12국 가운데는 「변진구야국」으로 나타난다.[16] 『후한서』[17] 동이전(열전 제75)은 마한과 변진이 각각 그 남쪽에서 "왜(倭)와 접한다"라고 언급하고 있다.[18] 『후한서』 동이전 왜인조에서는, "대왜왕"이 거주하는 야마토국(邪馬臺国)은 낙랑군으로부터 "1만 2천 리", 왜(倭)국의 서북쪽 경계인 구야한국(拘邪韓國)은 낙랑군으로부터 "7천 리"라고 기록되어 있다.[19]
중국 사서인 삼국지 동이전에서는 '''구야국'''(狗邪國) 또는 '''구야한국'''(狗邪韓國)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가야한국을 한자의 음차로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 가야는 가야(加耶, 伽耶), 가락(駕洛, 加洛), 가라(加羅, 伽羅, 迦羅), 가량(加良) 등 여러 한자로 표기되었다. 금관가야가 1세기 중엽부터 4세기 말까지 변한 지역 연맹체의 중심국가였기 때문에 '가야'라는 말은 변한 지역 전체 또는 그 국가연맹체를 칭하는 이름이 되었다. 이 때문에 금관가야에 이어 후기 가야 연맹을 이끌었던 반파국 역시 금관가야가 전기 가야 연맹을 이끌 때 쓰던 대가야란 이름을 연맹체의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한편, 가야의 다른 이름인 가라는 외국을 뜻하는 가라/から일본어로 전해지기도 했다. 일본서기에서는 '가락국은 수나라(須那羅)'라고 쓰고 있는데 현대 우리말로는 '쇠나라'로 읽힌다. 이는 왜(倭)와의 교역에서 가야의 주요 수출품이 쇠(鐵), 즉 철기였기 때문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으며, 금관가야란 이름이나 삼국사기에 기록된 금관국(金官國)이란 이름 역시 모두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남가라(南加羅) 역시 금관국으로 이해된다.
3. 건국 설화
세상이 시작된 후, 이 땅에는 아직 나라를 부를 칭호가 없었고, 왕이나 신하를 부를 칭호도 없었다. 그러나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류수간, 류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의 아홉 간(干)이 있어 읍락의 족장이 되어 백성을 이끌었다. 후한 말 광무제 치세 18년(서기 42년, 임인년(壬寅)) 음력 3월에, 북구지에서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부르는 소리가 들려 200~300명의 무리가 모여들었다. 아홉 간은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구지가'를 부르고 춤을 추며 즐거워했다. 잠시 후, 그들은 하늘에서 붉은 끈이 내려와 땅에 닿는 것을 보았고, 끈의 끝에는 붉은 보자기에 싸인 황금 상자가 있었다. 그 안에는 해처럼 둥근 여섯 개의 황금 알이 있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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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내어라
내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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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간 후, 다음 날 새벽, 무리가 다시 모여 상자를 열었더니 여섯 개의 알은 위엄 있는 얼굴을 한 사내아이들로 변해 있었다. 여섯 개의 알 중에서 가장 먼저 사람이 된 자가 그 달 15일에 왕위에 올랐으며, 가장 먼저 나타났기 때문에 '수로왕' 또는 '수릉'이라 이름 지었고, 나라는 '대가락' 또는 여섯 가야 국가 중 하나인 '가야국'이라 불렀다. 나머지 다섯 명은 나머지 다섯 가야의 맹주가 되었다.[1]
금관가야의 건국 신화는 금관가야의 시조이자 김해 김씨의 시조인 김수로왕에 관한 신화이다.[1] 이는 건국 신화라는 점에서 '단군 신화', '동명왕 신화', '박혁거세 신화'와 유사하다. 그러나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일대기의 순차적인 구조에서 다른 신화들과 차이를 보인다.[1]
금관가야의 역사를 재구성하기 위한 역사 연구, '구지가(龜旨歌)'의 해석을 중심으로 한 문학 연구, 고대 의례와의 관련성을 설명하기 위한 민속학 연구가 진행되었다. 특히 최근에는 문화 콘텐츠를 위한 스토리텔링 방식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신화의 현재적 의의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1]
4. 역사
4. 1. 건국
금관가야는 김해 일대를 중심으로 발전하였으며, 장유면 등지에서 지석묘 등의 청동기 유적이 발견되어 태고적부터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다.[24] 금관가야의 대표적인 고분으로는 대성동 고분이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는 가야의 전신인 변한에서 철이 생산되어 왜, 예, 낙랑군, 대방군 등이 이를 취했다고 기록되어 있다.[24] 고고학적으로도 철 생산 유적 7곳 중 4곳이 금관가야 인근에 분포하고 있어, 국가 초기부터 철 생산과 철 교역을 왕성히 한 것으로 추정된다.[24]
후한 말 광무제 치세 18년(서기 42년, 임인년(壬寅)) 음력 3월, 계욕 의식 때 북구지에서 의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고, 아홉 간(干)이 "구지가"를 부르며 춤을 추자 하늘에서 붉은 끈에 매달린 황금 상자가 내려왔다. 상자 안에는 여섯 개의 황금 알이 있었고, 이 알에서 나온 여섯 아이 중 가장 먼저 나온 이가 수로왕이 되어 '대가락' 또는 '가야국'이라 불리는 나라를 세웠다.[1] 수로왕은 탈해세력의 공격을 격퇴하고, 진한지역의 신라로 도주한 석탈해를 200척의 대함대로 추격하였다. 나머지 다섯 아이는 다섯 가야의 맹주가 되었다.[1]
삼국유사에 따르면, 금관가야는 수로왕이 통일한 9개의 촌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5] 수로왕의 왕비 허황옥은 아유타국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5] 가야는 도시 국가들의 연맹체로서, 일본을 비롯한 다른 국가들과의 해상 무역과 북쪽의 중국과의 육상 무역을 통해 번성했다.[9]
가야의 역사 초기에 고조선, 부여, 고구려를 포함한 북쪽으로부터 여러 차례의 이주가 있었으며, 이들은 기존의 인구와 통합되어 문화 및 정치 발전을 자극했다. 기원후 3세기 말경의 고고학 유적지에서 매장 양식의 급격한 변화가 발견되는데, 이는 이러한 이주가 일어났을 때로 추정된다.[6]
삼국지에 따르면, 신운신(臣雲遣支報),[7] 아라가야(安羅, 阿羅加耶)(安邪踧支濆), 신분활(臣離兒不例)[8] 및 금관(拘邪秦支廉)의 4개국이 3세기경 한반도 남부에서 우위를 점한 것으로 추정된다.
4. 2. 가야 연맹의 대표국
변한계통 국가들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가야로 언급되는데, 이는 금관가야의 본래 이름인 '구야국'에서 기원한 것으로 여겨진다. 금관가야는 서기 400년까지 신라에게 한반도 남부 변한계통 국가들을 대표하는 국가로 인식되었다.[25][26]
초기 금관가야는 신라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탈해 이사금에게 도움을 줄 정도로 강한 국력을 가지고 있었다. 낙동강 하구에 대한 권리를 공고히 한 금관국은 변한계 국가들을 결집하고 해상무역을 기반으로 동아시아 해상무역의 허브로 발전했다. 금관가야에서 생산된 철은 한, 예, 왜 등에 공급되었다.[25][26]
이러한 해상무역을 통한 부의 축적은 가락국의 변한 내 맹주 지위를 공고하게 했지만, 한편으로 이에 소외된 변한제국들의 시기와 질투를 유발했다. 3세기 초, 해상무역에서 소외된 변한 남해안의 7개국과 침미다례 세력의 중심인 보라국(保羅國) 등이 포상팔국 동맹을 형성하여 금관가야와 변한제국들에게 대항했다. 209년 포상팔국은 안라국을 침공하여 신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신라군은 물계자 장군을 앞세워 금관가야를 도왔고, 전쟁은 포상팔국과 신라의 전쟁으로 비화되어 215년 포상팔국 중 3개국 연합함대의 울산 공격을 마지막으로 포상팔국의 패퇴로 끝났다. 포상팔국과의 전쟁에 신라의 지원을 받음으로써 금관가야의 위신은 추락했고 가야 전체의 맹주 자리도 위협받기 시작했다. 이후 가락국의 해상무역은 다소 침체되기 시작했다.
삼국지(三國志)에 따르면, 신운신(臣雲遣支報),[7] 아라가야(安羅, 阿羅加耶)(安邪踧支濆), 신분활(臣離兒不例)[8] 및 금관(拘邪秦支廉)의 4개국이 3세기경 한반도 남부에서 우위를 점한 것으로 추정된다.
4. 3. 가야 연맹의 세력 약화
399년에 가야의 철기군은 신라의 주요 항구인 울산으로 북상을 시작했고 여기서 상륙해 있던 왜군과 합류했다. 가야군과 왜군은 남천가에서 신라군을 격파한 뒤 곧바로 서라벌을 공격했고 신라는 큰 위기에 빠졌다. 그러나 신라의 내물 마립간은 급히 고구려의 평양으로 사신을 보내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남하해 있던 광개토대왕에게 구원 요청을 했고 가야와 마찬가지로 철기병이 주축인 고구려군이 서라벌을 장악한 연합군을 공격했다. 고구려군은 연합군의 뒤를 쫓아 금관가야의 종발성까지 공격하였다. 이 전쟁으로 전기 가야 연맹체의 수장격이였던 금관가야는 세력이 크게 약해졌다. 금관가야의 세력 약화로 변한에서 고령에 위치한 대가야가 부상하게 되었다.
4. 4. 멸망
대가야가 가야의 맹주로 떠오르면서 금관가야는 소국으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31] 496년에 금관가야는 신라에 화친의 표시로 "흰 꿩"을 보냈다. 대가야의 다른 지역에서 고총(高塚)이라는 대규모 고분이 조성되고 있을 때 동시기의 김해유적에 중규모의 고분이 있었음을 보면 이시기 금관국은 완전히 쇠퇴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529년 신라장군 이사부는 다다라(多多羅)를 기지로 삼아 군사행동을 개시했다. 갸야제국들 중에 하나인 안라국과 무역관계에 있던 오미노 케누(近江毛野)의 왜군을 웅천(熊川)에서 공격한데 이어서 531년에는 구례모라(久禮牟羅)의 백제군을 패퇴시켰고 안라국을 중심으로 결집되어 있던 금관가야는 세력이 약해졌다. 그 와중에 532년 금관가야의 구형왕은 신라에 투항하였다.[31] 가야 귀족들은 신라의 진골로 편입되어 여전히 그 세력을 유지했고 이는 나중에 김유신 등이 신라의 정계로 진출하는 기반이 되었다.
가락국의 왕손들은 이후 신라황실의 성(姓)인 김씨에 대해 신김씨라 불리며 진골에 편입되었지만 한동안은 신라의 상류사회로부터 차별이 있을 수도 있었다고 대중매체등에서는 추측하기도 하지만 삼국사기나 사서에 그런 증거는 없다. 이런 신김씨의 위상이 높아졌던 것은 김유신이 나중에 태종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와 결혼동맹으로 제휴하면서부터로 이후 김유신은 김춘추를 왕위에 올리는데 노력하는 한편 삼국통일 전쟁에서 높은 전공을 세웠다. 그 자신도 생전의 전공으로 사후에 흥무대왕에 추증되어 신라왕이 되었다. 김유신의 손자인 김윤중은 북방의 말갈족을 평정하는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고려시대 이후 신 김씨는 본관을 김해로 지정받아 김해 김씨가 되었다. 가락국의 고토는 신라의 병합이후 금관군(金官郡)으로 편입되었고 680년 김유신의 조카인 문무왕에 의해 금관소경(金官小京)으로 승격하고 16년뒤에 김해소경(金海小京)으로 개명해 지금의 김해라는 지명이 탄생했다. 문무왕은 가야왕실의 외손으로 김수로왕의 능역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기도 했다. 신라말이 되자 가야 김씨인 김인광(金仁匡)이 강력한 사병군단을 기반으로 지김해부진례성제군사명의장군(知金海府進禮城諸軍事明義將軍)을 칭하며 진례성(進禮城)을 중심으로 김해와 창원일대를 장악하였다. 김인광은 신김씨의 후손으로 봉림사의 건립을 후원하여 선종9산의 하나인 봉림산파(鳳林山派)의 후견인 구실을 하였다. 나중에 김인광은 신라황실의 방계인 소충자, 김율희 형제[32] 에 의해 권력을 빼앗겼다. 김인광과 소충자, 김율희의 활약으로 고려시대에 김해지역이 역사상 "'''금관가야'''"로 인식되었다.
금관가야는 일본과의 전쟁과 북쪽 부족과의 전쟁으로 인해 쇠퇴했다. 금관가야를 구성하던 여러 도시 국가들은 하나씩 신라에 함락되었다.[9] 금관가야가 서기 532년에 신라에 항복한 후, 그 왕가는 신라 귀족으로 편입되었으며[10][11] 경주 김씨가 가야 왕가, 즉 김해 김씨와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5. 지리
오늘날, 경상남도 김해시인 이곳은 금관가야가 존재했을 당시에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바다나 갯벌이었다. 일제강점기인 20세기 초 낙동강 제방공사로 인해 평야지대로 탈바꿈하였지만, 그 이전까지는 낙동강의 본류가 지금처럼 구포 방면으로 흐른 것이 아니라 선암다리 밑으로 흐르고 있었다. 부분적으로 수몰되지 않은 얕은 구릉에서는 어김없이 조개무지인 패총(貝塚)이 나오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33]
6. 종교
불교가 인도에서 기원한 지 수백 년 후, 대승 불교가 기원전 1세기에 불교의 실크로드 전파를 통해 중국에 전래되었고, 이후 서기 3세기 삼국 시대에 한반도로 전래되어 일본으로 전파되었다.[9] 한국에서는 삼국 시대의 세 구성 정치체에 의해 불교가 국교로 채택되었는데, 372년에 금관가야의 고구려 지배 부족에 의해 처음으로 채택되었다.[9]
7. 문화
금관가야는 김해와 부산 일대에 많은 수의 고분군과 그에 부장된 유물을 남기고 있다. 금관가야와 관련된 주요 고분군은 김해 대성동 고분군과 부산 복천동 고분군이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은 광개토왕의 남정 전까지 활발한 고분 조성이 이루어졌으나 그 이후 그 조성이 중단되어 가락국의 패망을 시사해주고 있다는 서술은 잘못된 것으로, 복천동의 최상위층 고분인 10, 11호와 21, 22호, 39호, 53호 등은 모두 고구려왕 남정이 이루어진 400년의 뒤인 5세기 1/4분기 이후에 조영된 고분이며 이후 동아대 1호가 조영되는 6세기까지도 복천동에서는 계속해서 대형의 고분들이 조영된다. 신라와 함께 가야의 장례 풍습 중 주요 특징은 다량의 유물을 껴묻는 후장(厚葬)이다. 이로 인해 다양한 토기와 유물을 후세에 전할 수 있었다. 또 한가지 특징은 독무덤과 함께 덧널무덤에 있는데 이와 함께 도질토기(陶質土器), 그리고 순장의 풍습 등은 북방 문화의 영향일 것이라는 설도 있다. 금속 유물은 다수의 철정(鐵鋌)과 함께 철제 갑옷과 금동관이 파편으로나마 대량으로 발견되었다. 초기에는 철이 주종을 이루고 금, 은 등의 귀금속은 그다지 발견되지 않았다. 대신에 많은 량의 옥(玉)제품이 출토되었다. 귀금속이 발견된 것은 5세기 이후의 일이다.
8. 역대 국왕
금관가야의 역대 국왕은 삼국유사에서 가락국기를 인용하여 전한다. 김해 김씨 족보에서는 말왕(末王)이 11대로 마지막 왕이라고 기록한다.
대수 | 제호 | 재위 | 비고 |
---|---|---|---|
1 | 수로왕 | 42년 ~ 199년 | 가락국의 시조. |
2 | 거등왕 | 199년 ~ 253년 | 수로왕의 아들. |
3 | 마품왕 | 253년 ~ 291년 | 거등왕의 아들. |
4 | 거질미왕 | 291년 ~ 346년 | 마품왕의 아들. |
5 | 이시품왕 | 346년 ~ 407년 | 거질미왕의 아들. |
6 | 좌지왕 | 407년 ~ 421년 | 이시품왕의 아들. |
7 | 취희왕 | 421년 ~ 451년 | 좌지왕의 아들. |
8 | 질지왕 | 451년 ~ 491년 | 취희왕의 아들. |
9 | 겸지왕 | 491년 ~ 521년 | 질지왕의 아들. |
10 | 구형왕 | 521년 ~ 532년 | 겸지왕의 아들. 가락국의 마지막 왕 |
9. 계보
수로왕(42년 ~ 199년)을 시조로 하여 구형왕(521년 ~ 532년)까지 10명의 왕이 있었다.
대수 | 이름 | 재위 기간 |
---|---|---|
1 | 수로왕 | 42년 ~ 199년 |
2 | 거등왕 | 199년 ~ 253년 |
3 | 마품왕 | 253년 ~ 291년 |
4 | 거질미왕 | 291년 ~ 346년 |
5 | 이시품왕 | 346년 ~ 407년 |
6 | 좌지왕 | 407년 ~ 421년 |
7 | 취희왕 | 421년 ~ 451년 |
8 | 질지왕 | 451년 ~ 492년 |
9 | 겸지왕 | 492년 ~ 521년 |
10 | 구형왕 | 521년 ~ 532년 |
구형왕의 아들로는 김무력, 노리부, 금릉 김씨 시조 김무득이 있었다. 김무력은 김서현과 김유신으로 이어진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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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cyclopedia
김수로왕신화(金首露王神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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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y of Korean Stu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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臣雲新國 also 忱彌多禮, 新彌國 present-day in South Jeolla Provi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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臣濆活國 presumed present-day Gapyeong Coun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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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ducing Kaya History and Archa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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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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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ya
Penguin, London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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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韓在帶方之南,東西以海爲限,南與倭接,方可四千里。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辰韓者,古之辰國也。馬韓在西。
[13]
Harv
[14]
인용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依山島爲國邑。舊百餘國,漢時有朝見者,今使譯所通三十國。從郡至倭,循海岸水行,歷韓國,乍南乍東,到其北岸狗邪韓國,七千餘里。
[15]
문서
狗邪韓国
吉川弘文館
[16]
인용
弁辰亦十二國,又有諸小別邑,各有渠帥,大者名臣智,其次有険側,次有樊濊,次有殺奚,次有邑借。有,已柢國,不斯國,弁彌離彌凍國,弁辰接塗國,勤耆國,辰彌離彌凍國,弁辰古資彌凍國,弁辰古淳是國,冉奚國,弁辰半路國,弁樂奴國,軍彌國,弁軍彌國,弁辰彌烏邪馬國,如湛國,弁辰甘路國,戸路國,州鮮國,馬延國,弁辰狗邪國,弁辰走漕馬國,弁辰安邪國,馬延國,弁辰瀆盧國,斯盧國,優由國。弁,辰韓合二十四國,大國四五千家,小國六七百家,總四五萬戸。
[17]
문서
正史としての順番は『三国志』より前だが、成立は『三国志』より遅い。
[18]
인용
馬韓在西,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辰韓在東,十有二國,其北與濊貊接。弁辰在辰韓之南,亦十有二國,其南亦與倭接。
[19]
인용
倭在韓東南大海中,依山島為居,凡百餘國。自武帝滅朝鮮,使驛通於漢者三十許國,國皆稱王,世世傳統。其大倭王居邪馬臺國。樂浪郡徼,去其國萬二千里,去其西北界拘邪韓國七千餘里。其地大較在會稽東冶之東,與朱崖,儋耳相近,故其法俗多同。
[20]
문서
삼국사기 김유신열전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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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泰植《加耶聯盟史》
[22]
저널
의 임나(任那) 관련 기록에 대한 재검토 - 임나(任那)·초발(草拔)·금관국(金官國)의 역사적 성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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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수로왕의 탄생과 육가야의 성립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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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지역의 철 생산과 유통 양상
https://www.dbpia.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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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유물로 읽는 우리 역사
세종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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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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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문서
지금의 경남 양산시 물금읍 물금리 황산역터 근처. 전덕재, 삼국시대 황산진과 가야진에 대한 고찰, 한국고대사연구 제47권, 2007년 9월, 35~75면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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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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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복의 동사강목-제 2상 을묘년, 신라 유례왕 12년. 김세렴의 해사록- 왜황 응신(22년)때 신라측이 명석포에 들이닥쳤다. 왜가 강화와 군대해산을 요청함. 응신 22년은 유례왕 8년이었다." 일본연대기. 이창일본전.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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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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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소씨였냐 하면 조상인 알천이 태종무열왕에게 황위를 양보하면서 진골인 김씨를 버리고 金의 훈독인 蘇(쇠)씨를 성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충자의 동생인 율희는 권력을 잡은 후 원래 성씨이자 가락국의 왕씨인 김씨로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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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유물로 읽는 우리 역사
세종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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