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성전기사단 총장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성전기사단 총장은 성전기사단을 이끌었던 수장들을 의미한다. 1118년 위그 드 파앵이 초대 총장으로 임명된 이후, 1314년 자크 드 몰레까지 총 23명의 총장이 존재했다. 이들은 십자군 전쟁 시기 예루살렘 왕국을 지원하고, 잃어버린 성지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1291년 아크레 함락 이후 세력이 약화되었고,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의 탄압으로 인해 1312년 교황 클레멘스 5세에 의해 공식적으로 해산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성전기사단 총장 - 에버라드 데 바레스
    에버라드 데 바레스는 프랑스 출신의 기사로, 루이 7세의 신임을 받으며 1147년부터 1152년까지 템플 기사단의 제3대 총장을 지냈으나, 재정 문제와 내부 갈등으로 사임 후 수도원으로 은퇴했으며 제2차 십자군에 참여했다.
  • 성전기사단 총장 - 로베르 드 크라온
    로베르 드 크라온은 12세기 프랑스 귀족 출신으로 성전기사단의 제2대 그랜드 마스터였으며, 약혼을 파기하고 기사단에 입단하여 교황 직속 기사단으로 만들고 세력을 확장했으나, 제2차 십자군에 참여한 후 1147년에 사망했다.
성전기사단 총장
개요
직책성전기사단 총장
영어 명칭Grand Master of the Knights Templar
지위성전기사단의 최고 지도자
임명 방식기사단 내부 선출
임기종신
역할 및 권한
군사적 지휘기사단의 군사 작전 총괄 지휘
행정적 관리기사단의 재산, 자원, 조직 관리
외교적 대표기사단을 대표하여 교황, 국왕 등과 외교 관계 담당
사법적 권한기사단 내부 분쟁 조정 및 재판
정신적 지도기사단의 정신적 가치 수호 및 단원 교육
선출 과정
후보 선출기사단 내 고위 기사들에 의해 후보 추천
투표전체 기사단의 투표를 통해 최종 선출
승인교황의 승인을 받아 최종 임명
역대 총장 목록
초대 총장위그 드 파앵 (1118년 - 1136년)
2대 총장로베르 드 크라옹 (1136년 - 1149년)
3대 총장에브라르 데 바레스 (1149년 - 1151년)
4대 총장베르나르 드 트레믈레 (1151년 - 1153년)
5대 총장앙드레 드 몽바르 (1153년 - 1156년)
6대 총장베르트랑 드 블랑슈포르 (1156년 - 1169년)
7대 총장필리프 드 밀리 (1169년 - 1171년)
8대 총장외드 드 생아망 (1171년 - 1179년)
9대 총장아르노 드 토로주 (1180년 - 1184년)
10대 총장제라르 드 리드포르 (1185년 - 1189년)
11대 총장로베르 드 사블레 (1191년 - 1193년)
12대 총장질베르 에랄 (1193년 - 1200년)
13대 총장필리프 뒤 플레시 (1201년 - 1209년)
14대 총장기욤 드 샤르트르 (1210년 - 1219년)
15대 총장페드루 데 몬테이루 (1219년 - 1232년)
16대 총장아르망 드 페리고르 (1232년 - 1244년/1247년)
17대 총장리처드 드 뷔레 (1245년 - 1247년)
18대 총장기욤 드 소노 (1247년 - 1250년)
19대 총장르노 드 비에르 (1250년 - 1256년)
20대 총장토마 베로 (1256년 - 1273년)
21대 총장기욤 드 보졸레 (1273년 - 1291년)
22대 총장티보 고댕 (1291년 - 1292년)
23대 총장자크 드 몰레 (1292년 - 1314년)

2. 성전기사단 총장 목록

(예루살렘 왕국)1119년 예루살렘왕 보두앵 2세에게 기사수도회 설립 제안,
성전산에 본부 설치.
1129년 트루아 공의회에서 정식 수도회로 공인.2.

로베르 드 크라온1136년–1147년교황 인노첸시오 2세 『완벽한 선물』 칙소 발표.
성전기사단이 세속군주의 법률에 복종해야 할 의무 면제됨.3.
에버라드 데 바레스1147년–1151년1151년 은퇴하고 프랑스로 귀국하여 일반 수도사가 됨.4.
베르나르 드 트레믈레1151년–1153년아스칼론 공방전에서 전사.5.
앙드레 드 몽바르1153년–1156년6.
베르트랑 드 블랑셰포르1156년–1169년7.
필리프 드 밀리1169년–1171년8.
오도 드 생아망1171년–1179년마르지운 전투에서 살라딘에게 포로로 잡혀 옥사.9.
아르노 드 토로주1181년–1184년신흥세력으로 부상한 구호기사단과 세력다툼.10.
제라르 드 리데포르1185년–1189년아크
(예루살렘 왕국)아크 공방전에서 살라딘에게 포로로 잡힌 뒤 참수당함.11.
로베르 4세 드 사블레1191년–1193년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1세의 고문관.12.
질베르 오랄1193년–1200년구호기사단과의 세력다툼 계속.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구호기사단의 편을 듦.13.
필리프 드 플레시1201년–1208년유럽 지역에서 성전기사단의 최전성기.14.
기욤 드 샤르트르1209년–1219년15.
피에르 드 몽테귀1218년–1232년하틴 전투에서 상실했던 성십자가 회수.16.
아르망 드 페리고르1232년–1244년1205년부터 총장 되기 전까지 시칠리아 단장 역임.
갈릴리 해 주변으로 무슬림에게 반격 시도했으나 무용.
1239년 다마스쿠스 술탄과 동맹.
1244년 이집트 술탄의 화레즘인 용병대와 전투(하르비야 전투), 패배. 전사 또는 포로.[1]17.
리샤르 드 뷔르1244년/1245년-1247년이름 외에 기록이 거의 없음.
페리고르가 하르비야 전투에서 포로로 잡히거나 죽자 서리를 맡았을 가능성 있음.[1]18.
기욤 드 소나크1247년–1250년제7차 십자군 참전. 루이 9세가 포로로 잡힌 파리스쿠르 전투에서 사망.19.
르노 드 비시에1250년–1256년20.
토마스 베라르1256년–1273년21.
기욤 드 보죄1273년–1291년아크레 공방전에서 전사. 아크레 함락으로 성지 육상 교두보 상실.22.
티보 고댕1291년–1292년키프로스
(키프로스 왕국)23.
자크 드 몰레1292년–1314년1303년 맘루크에게 아르와드 섬을 빼앗기면서(루아드 공성전) 성지 교두보 완전 상실.
성지 상실 후 기사수도회의 개혁을 꾀함.
1307년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에게 체포, 이단 누명을 쓰고 1314년 화형.


3. 총장들의 주요 활동 및 사건

성전기사단 총장은 기사단의 최고 지도자로서 군사, 정치, 종교 활동 전반을 이끌었다. 초대 총장 위그 드 파앵은 1119년 예루살렘 왕국에서 기사단을 창설하고 1129년 트루아 공의회에서 공식적인 인가를 받는 기반을 마련했다. 그의 후임 로베르 드 크라옹 시기에는 교황 인노첸시오 2세로부터 『완벽한 선물』 칙서를 받아 세속 군주의 법률에서 면제되는 등 중요한 특권을 확보하며 기사단의 독립성과 영향력을 키웠다.

이후 총장들은 십자군 전쟁 과정에서 중요한 군사적 역할을 수행했다. 제2차 십자군에 참여했던 에브라르 데 바르나, 1153년 아스칼론 공방전에서 전사한 베르나르 드 트레믈레, 살라딘과의 마르지 아윤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옥사한 오도 드 생아망 등 많은 총장들이 성지에서의 전투에 직접 참여하고 희생되었다. 이 시기 구호기사단과의 경쟁 관계가 시작되기도 했는데, 아르노 드 토로주와 질베르 오랄 총장 시기에 이러한 갈등이 나타났다.

그러나 1187년 하틴 전투에서의 참패는 기사단에게 큰 위기를 가져왔다. 제라르 드 리데포르 총장 시기에 예루살렘살라딘에게 빼앗기고 본부를 아크로 옮겨야 했다. 제라르 드 리데포르 자신도 1189년 아크레 공방전에서 전사했다. 이후 피에르 드 몽테귀 총장 시기에 하틴 전투에서 잃었던 성십자가를 되찾는 성과도 있었으나, 아르망 드 페리고르 총장 시기에는 하르비야 전투에서 큰 패배를 겪기도 했다. 기욤 드 소나크 총장은 제7차 십자군에 참전했다가 파리스쿠르 전투에서 전사했다. 결국 1291년 맘루크 왕조에 의해 아크마저 함락되면서(아크레 공방전) 기욤 드 보죄 총장이 전사하고, 성전기사단은 성지에서의 주요 거점을 모두 잃게 되었다.

성지 상실 이후, 기사단은 키프로스로 본부를 옮겼다. 마지막 총장 자크 드 몰레는 기사단의 재건과 새로운 십자군 결성을 시도했지만, 유럽 군주들의 비협조와 변화된 정세 속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막대한 부와 조직력을 가진 성전기사단을 경계하던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는 기사단을 해체할 음모를 꾸몄다. 1307년 필리프 4세자크 드 몰레를 비롯한 프랑스 내 기사단원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하고, 고문을 통해 이단이라는 거짓 자백을 받아냈다. 결국 1312년 교황 클레멘스 5세는 비엔 공의회에서 기사단 해체를 선언했고, 1314년 자크 드 몰레화형에 처해지면서 성전기사단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3. 1. 초기 성전기사단 (1118년 ~ 1187년)

(예루살렘 왕국)1119년 예루살렘 왕 보두앵 2세에게 기사수도회 설립 제안, 성전산에 본부 설치.
1129년 트루아 공의회에서 정식 수도회로 공인.2로베르 드 크라옹1136년–1147년교황 인노첸시오 2세 『완벽한 선물』 칙서 발표.
성전기사단이 세속 군주의 법률에 복종할 의무 면제됨.3에브라르 데 바르1147년–1151년1151년 은퇴하고 프랑스로 귀국하여 일반 수도사가 됨.4베르나르 드 트레믈레 (전사)1151년–1153년1153년 아스칼론 공방전에서 전사.5앙드레 드 몽바르1153년–1156년6베르트랑 드 블랑셰포르1156년–1169년7필리프 드 밀리1169년–1171년8오도 드 생아망 (포로)1171년–1179년1179년 마르지 아윤 전투에서 살라딘에게 포로로 잡혀 옥사.9아르노 드 토로주1181년–1184년신흥 세력으로 부상한 구호기사단과 세력 다툼.10제라르 드 리데포르 (전사)1185년–1189년아크
(예루살렘 왕국)1187년 하틴 전투 참패 및 예루살렘 함락. 본부를 아크로 이전.
1189년 아크레 공방전에서 전사.


3. 2. 십자군 전쟁과 성전기사단 (1187년 ~ 1291년)

순번문장이름임기비고
colspan=5 |
10.제라르 드 리데포르 †1185년–1189년아크레 공방전 (1189년-1191년)에서 살라딘에게 포로로 잡힌 뒤 참수당함 (전사). 주재지: 아크 (예루살렘 왕국).
11.로베르 4세 드 사블레1191년–1193년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1세의 고문관. 주재지: 아크.
12.질베르 오랄1193년–1200년구호기사단과의 세력 다툼 계속.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구호기사단의 편을 듦. 주재지: 아크.
13.필리프 드 플레시1201년–1208년유럽 지역에서 성전기사단의 최전성기. 주재지: 아크.
14.기욤 드 샤르트르1209년–1219년주재지: 아크.
15.피에르 드 몽테귀1218년–1232년하틴 전투에서 상실했던 성십자가 회수. 주재지: 아크.
16.아르망 드 페리고르 (†/포로)1232년–1244년1205년부터 총장 되기 전까지 시칠리아 단장 역임. 갈릴리 해 주변으로 무슬림에게 반격 시도했으나 실패. 1239년 다마스쿠스 술탄과 동맹. 1244년 이집트 술탄의 화레즘인 용병대와 전투(하르비야 전투, 라 포르비 전투)에서 패배 (전사 또는 포로).[1] 주재지: 아크.
17.리샤르 드 뷔르1244년/1245년–1247년이름 외에 기록 없음. 아르망 드 페리고르가 하르비야 전투에서 포로로 잡히거나 사망한 후 총장직을 대행했을 가능성이 있음.[1] 주재지: 아크.
18.기욤 드 소나크 †1247년–1250년제7차 십자군 참전. 루이 9세가 포로로 잡힌 파리스쿠르 전투에서 사망. 주재지: 아크.
19.르노 드 비시에1250년–1256년주재지: 아크.
20.토마스 베라르1256년–1273년주재지: 아크.
21.기욤 드 보죄 †1273년–1291년아크레 전투 (1291년)에서 전사. 아크레 함락으로 성지 육상 교두보 상실. 주재지: 아크.


3. 3. 성전기사단의 몰락 (1291년 ~ 1314년)

1291년, 맘루크 왕조의 술탄 알아슈라프 칼릴이 이끄는 대군에 의해 십자군의 마지막 보루였던 아크가 함락되었다(아크레 공방전). 이 전투에서 성전기사단 총장 기욤 드 보죄는 싸우다 전사했다.[1] 아크레 함락으로 성지에서의 기독교 세력은 사실상 종말을 고했고, 성전기사단은 육상 교두보를 완전히 상실했다.

기욤 드 보죄의 뒤를 이어 티보 고댕이 총장으로 선출되었으나, 혼란 속에서 리더십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그는 남은 기사단원들과 함께 키프로스로 본부를 옮겼지만 1292년 사망했다.

티보 고댕의 후임으로는 자크 드 몰레가 선출되었다. 그는 성전기사단의 마지막 총장이 되었다. 자크 드 몰레성지 회복을 위한 새로운 십자군을 조직하려 노력했으나, 유럽 군주들의 이해관계와 교황청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303년에는 맘루크 왕조에게 아르와드 섬마저 빼앗기면서(루아드 공성전) 성지에서의 마지막 거점마저 상실했다.

성지 상실 이후, 막대한 부와 강력한 조직력을 갖춘 성전기사단은 유럽 군주들에게 점차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되었다. 특히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는 왕권 강화와 재정 확보를 위해 성전기사단을 해체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성전기사단이 이단 행위와 부도덕한 의식을 행한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 교황 클레멘스 5세를 압박했다.

1307년 10월 13일 금요일 새벽, 필리프 4세는 프랑스 전역의 성전기사단원들을 기습적으로 체포했다. 자크 드 몰레를 비롯한 지도부는 고문을 통해 거짓 자백을 강요받았다. 필리프 4세의 강력한 압력 아래, 교황 클레멘스 5세는 1312년 비엔 공의회에서 성전기사단의 공식적인 해체를 선언했다. 기사단의 막대한 재산은 대부분 필리프 4세와 다른 유럽 군주들, 그리고 구호기사단에게 넘어갔다.

자크 드 몰레는 처음에는 고문에 못 이겨 거짓 자백을 했으나, 나중에 공개적으로 자신의 자백이 거짓임을 밝히고 기사단의 결백을 주장했다. 이에 분노한 필리프 4세는 1314년 3월 18일, 자크 드 몰레와 조프루아 드 샤르네를 파리의 센강에 있는 시테 섬에서 화형에 처했다. 이로써 200년에 걸친 성전기사단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