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세르게이 도블라토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세르게이 도블라토프는 1941년 소련에서 태어나 1990년 사망한 러시아 작가이다. 소련에서 작품 출판이 어려워 사미즈다트를 통해 유통되거나 서방 세계에서 출판되었으며, 1978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의 작품은 자전적이며, 간결하고 단순한 문체를 특징으로 한다. 뉴욕에서 러시아어 신문을 발행하고 여러 소설을 출판했으며, 1980년대 중반 문학적 성공을 거두었다. 주요 작품으로는 '여행가방', '타협', '지사' 등이 있으며, 사후 러시아에서도 그의 작품이 출판되어 20세기 후반 가장 사랑받는 작가 중 한 명이 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우파 출신 - 세르게이 악사코프
    세르게이 악사코프는 러시아의 작가이자 문학 평론가로서, 러시아 귀족의 일상생활을 세밀하게 묘사한 작품과 자연에 대한 애정을 담은 자연주의적 묘사로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 발전에 기여했다.
  • 우파 출신 - 세묜 옐리스트라토프
    세묜 옐리스트라토프는 러시아 쇼트트랙 선수로, 올림픽 참가, 세계 선수권 금메달, 유럽 선수권 입상 등의 경력을 가지고 있으며, 멜도니움 사건 이후 복귀하여 월드컵에서 다수의 우승 및 포디움 입상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 러시아의 작가 - 이오시프 스탈린
    이오시프 스탈린은 소비에트 연방의 독재자이자 소련 공산당 지도자로서, 소련의 산업화와 2차 세계 대전 승리를 이끌었지만 대숙청과 공포 정치로 수백만 명의 희생을 초래했으며, 그의 통치와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논쟁의 대상이다.
  • 러시아의 작가 - 예카테리나 2세
    예카테리나 2세는 1762년부터 1796년까지 러시아 제국을 통치한 여제로, 계몽주의 정책 추진, 영토 확장, 문화 예술 장려를 통해 러시아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 아르메니아계 러시아인 - 가리 카스파로프
    가리 카스파로프는 최연소 체스 세계 챔피언이자 최장 기간 세계 랭킹 1위를 기록한 러시아의 체스 그랜드마스터이며, 딥 블루와의 대결, 저술 활동, 정치 활동 등으로도 알려져 있다.
  • 아르메니아계 러시아인 - 옐레나 본네르
    옐레나 본네르는 소련과 러시아의 인권 운동가이자 반체제 인사로, 핵물리학자 안드레이 사하로프의 아내로서, 프라하의 봄을 계기로 인권 운동에 투신하여 모스크바 헬싱키 그룹 창립 멤버로 활동하고, 사하로프 사후에도 인권 운동을 지속하며 푸틴 정권 비판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세르게이 도블라토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군 복무 중인 세르게이 도블라토프
군 복무 중인 세르게이 도블라토프
본명세르게이 도나토비치 메치크
출생일1941년 9월 3일
출생지우파, 바시키르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소련
사망일1990년 8월 24일
사망지뉴욕 시, 미국
국적소련, 미국
직업저널리스트, 작가
활동 기간1977년–1990년
문학 사조사실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로마자 표기
러시아어세르게이 도나토비치 도블라토프
로마자 표기Sergei Donatovich Dovlatov
영향
영향 받은 인물불명
주요 작품
주요 작품《우리 가족》 외 다수

2. 생애

러시아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2] 제2차 세계 대전나치 독일의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 봉쇄를 피해 가족이 피난 간 우파에서 1941년 태어났다. 전쟁 후 레닌그라드로 돌아와 성장했으며, 레닌그라드 국립 대학교(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 입학했으나 중퇴하고 군에 입대했다. 군 복무 시절 교정 노동 수용소에서 교도관으로 일했던 경험은 그가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훗날 작품의 바탕이 되었다.

제대 후 저널리스트 등으로 활동하며 본격적으로 글을 썼지만, 소련 체제 하에서는 그의 작품이 출판되지 못했다. 첫 책의 조판이 KGB에 의해 파기되는 등 어려움을 겪자, 사미즈다트(지하 출판)나 서방의 러시아어 저널을 통해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1976년 소련 작가 연맹에서 제명되고 당국의 감시와 압박을 받았다.[3] 생계를 위해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특파원으로 일하거나 프스코프 근교 푸시킨 박물관 보호구역에서 가이드로 일하기도 했다.

결국 1978년 소련을 떠나 미국 뉴욕으로 망명했다. 뉴욕에서는 이민자 신문 ''The New American''의 공동 편집자로 활동하며 활발히 작품을 발표했고, 권위 있는 잡지 뉴요커에 글을 싣는 등 작가로서 명성을 얻었다.[4] 그러나 1990년 8월 24일, 50세 생일을 며칠 앞두고 뉴욕에서 갑작스러운 심부전으로 사망했다.[5] 그의 작품들은 그의 삶의 경험을 반영하고 있으며, 사후 러시아에서도 출판되어 널리 사랑받는 작가가 되었다.

2. 1. 출생과 성장

1941년 9월 3일, 소련 바시키르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인 우파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나치 독일의 침공을 피해 레닌그라드(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곳으로 피난 온 상태였다.[2] 그의 아버지는 유대인계 연극 감독인 도나트 메치크(Донат Исаакович Мечик|도나트 이사코비치 메치크ru, 1909-1995)였고, 어머니는 아르메니아인계 연극 배우 출신이자 이후 문장 교정자로 일한 노라 도블라토바(Нора Сергеевна Довлатова|노라 세르게예브나 도블라토바ru, 1908-1999)였다.[2] 어머니는 그루지야의 수도 트빌리시에서 태어나 레닌그라드에서 연극을 공부했다.

전쟁이 끝나고 1944년 이후, 도블라토프는 레닌그라드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의 부모는 1949년 이혼했으며, 그는 어머니와 함께 다세대 공동주택에서 생활했다. 그는 아버지의 성 대신 어머니의 성을 따랐는데, '도블라토프'는 아르메니아의 뿌리 깊은 성씨인 '도블라탼'(Դովլաթյան|도블라탼hy)을 러시아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생계를 위해 배우 일을 그만두고 교정 일을 시작한 어머니는 뛰어난 언어 감각으로 어린 아들에게 언어를 바르게 사용하도록 가르쳤고, 이는 훗날 도블라토프의 세련된 문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59년, 레닌그라드 국립 대학교 문학부 핀란드어과에 입학했으나, 학업 부진 등으로 2년 반 만에 퇴학당했다. 대학 시절 그는 레닌그라드의 젊은 시인들인 예브게니 레인, 아나톨리 나이만, 훗날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는 요제프 브로드스키 등과 교류했다. 또한 첫사랑 아샤 페쿠롭스카야(Ася Пекуровская|아샤 페쿠롭스카야ru)와 만나 3학년 때 결혼했지만, 결혼 생활은 짧게 끝나고 이혼했다.

대학에서 퇴학당한 후, 1962년부터 1965년까지 3년간 소련 내무군에 징집되어 복무했다. 그는 코미 공화국 북부에 위치한 삼엄한 경비의 교정 노동 수용소에서 교도관으로 근무했다. 이 시기 수용소에서의 경험은 미래를 결정하지 못했던 젊은 도블라토프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인간 이하의 경험을 통해 역설적으로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굳히는 전환점이 되었다. 이 경험은 훗날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단편집 ≪수용소≫(Зона|조나ru)의 바탕이 되었다.

2. 2. 레닌그라드 시기

1944년 제2차 세계 대전 중 피난 생활을 마치고 가족과 함께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1949년 부모가 이혼한 뒤, 다세대 공동주택에서 어머니 노라 도블라토바와 함께 살았다. 아르메니아계 연극 배우 출신인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교정 일을 시작했고, 타고난 언어 감각으로 어린 도블라토프에게 정확한 언어 사용을 가르쳐 그의 문학 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2] 도블라토프는 아버지의 유대계 성 '메치크' 대신 어머니의 아르메니아계 성 '도블라탼(Довлатян)'에서 유래한 '도블라토프'를 사용했다.

1958년 레닌그라드 국립 대학교(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핀란드어과에 입학하여 레닌그라드의 젊은 시인들인 예브게니 레인, 아나톨리 나이만, 요제프 브로드스키 등과 교류했다. 대학 시절 첫사랑 아샤 페쿠롭스카야(А. Пекуровская)와 결혼했으나 곧 이혼했고, 2년 반 만에 학업 부진으로 퇴학당했다. 퇴학 직후 소련 내무군에 징집되어 코미 공화국 북부에 위치한 교정 노동 수용소에서 3년간(1962년-1965년) 교도관으로 복무했다. 이 시기의 경험은 훗날 단편집 수용소(Зона) 집필의 바탕이 되었으며,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대 후 레닌그라드로 돌아와 여러 신문사와 잡지사에서 기자로 일하며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자신의 원고를 들고 출판사를 찾아다녔지만, 긍정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소련 내에서는 출판이 번번이 거절되거나 미뤄졌다. 계속되는 출판 거절에 좌절하며 술에 의존하기도 했으나, 창작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소련 내에서 출판이 불가능해지자 사미즈다트 방식으로 작품을 유통시키거나 서유럽으로 밀반출하여 외국 저널에 발표했다. 이러한 활동 때문에 1976년 소련 작가 연맹에서 제명되었고, 그의 첫 번째 책의 조판은 KGB의 명령으로 파괴되기도 했다.[3]

출판의 어려움 속에서 1972년부터 1975년까지 약 2년 반 동안 당시 소련에서 가장 유럽적인 도시로 여겨지던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 탈린으로 이주하여 잡지사에서 일하며 출판 기회를 모색했다. 이 시기의 경험은 화해(Компромисс)의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첫 작품 출간 직전 KGB의 갑작스러운 가택수색으로 출판은 무산되었고, 결국 빈손으로 레닌그라드로 돌아와야 했다.

레닌그라드로 돌아온 후 계속되는 어려움 속에서 생계를 위해 1976년1977년 여름, 프스코프 근처의 미하일로프스코예 박물관 보호구역(알렉산드르 푸시킨 관련 유적지)에서 관광 가이드로 일했다. 이 경험은 보존지구(Заповéдник)에 담겨 있다.

1977년 서방 세계에서 그의 책과 단편들이 연이어 출판되면서 소련 당국의 감시가 심해졌고, 결국 이민을 종용받게 되었다. 1979년, 먼저 미국으로 떠난 두 번째 아내 레나와 딸 카탸를 따라 어머니 노라와 함께 미국 뉴욕으로 이민을 떠나며 그의 레닌그라드 시기는 막을 내렸다.[4]

2. 3. 창작 활동과 탄압

소련 내무군에서 교도관으로 복무하며 겪은 수용소 생활은 도블라토프에게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안겨준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때의 경험은 훗날 단편집 ≪수용소≫(Зона|조나ru)의 바탕이 되었다. 제대 후 레닌그라드 국립 대학교 저널리즘 학부에 입학하여 공부하면서[2] 공장 신문 기자로 일했고,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마람진, 에피모프, 바흐친 등과 함께 레닌그라드의 문학 서클 "도시파"(Горожане|고로자네ru)에 참여했으며, 한때 작가 베라 파노바 밑에서 비서로 일하기도 했다.

도블라토프는 꾸준히 산문 소설을 썼지만, 소련 내에서는 그의 작품을 출판하기 어려웠다. 출판사에 원고를 가져가 긍정적인 반응을 얻기도 했으나 번번이 출판이 거절되거나 미뤄졌고, 심지어 그의 첫 번째 책 조판은 KGB의 명령으로 파괴되기도 했다. 계속되는 좌절 속에서 그는 술에 의지하기도 했지만 창작 활동을 멈추지는 않았다.

1972년부터 1976년까지 약 2년 반 동안, 그는 당시 소련에서 가장 유럽적인 도시로 여겨지던 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 탈린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소베츠카야 에스토니아"(Советская Эстония|소베츠카야 에스토니야ru, 소비에트 에스토니아) 신문의 특파원으로 일하며 출판 기회를 엿보았다. 이 시기의 경험은 소설 ≪화해≫(Компромисс|콤프로미스ru)의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탈린에서의 첫 작품 출판 시도 역시 KGB의 갑작스러운 가택 수색으로 무산되었고, 그는 빈손으로 레닌그라드로 돌아와야 했다.

생계를 위해 1976년1977년 여름에는 프스코프 근교의 푸시킨 보존지구에서 관광 가이드로 일했다. 이 경험은 소설 ≪보존지구≫(Заповéдник|자포베드니크ru)에 담겨 있다.

소련 내에서 공식적인 출판이 불가능해지자, 도블라토프는 1960년대 말부터 자신의 작품을 사미즈다트(지하 출판물)를 통해 유통시키기 시작했다. 1976년에는 그의 작품 일부가 서유럽으로 밀반출되어 러시아어 망명 문학 잡지인 "콘티넨트"(Континент|콘티넨트ru)와 "시간과 우리"(Время и мы|브레먀 이 믜ru) 등에 실렸다.[3] 이 일로 그는 소련 작가 연맹과 소련 저널리스트 조합에서 제명되었고,[3] 정부의 감시와 이민 압박을 받게 되었다.

결국 1978년, 그는 먼저 미국으로 떠난 두 번째 아내 레나와 딸 카탸를 따라 어머니 노라와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의 복잡한 심경은 작품 ≪여행가방≫(Чемодан|체모단ru)에 반영되어 있다. 뉴욕에 정착한 후 그는 비로소 자유롭게 작품을 발표하며 작가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고, 권위 있는 잡지 ''뉴요커''에도 작품을 게재했다.[4]

2. 4. 망명과 미국 생활

에스토니아에서 첫 작품 출판 직전 KGB의 가택수색으로 출판이 무산되는 등[3] 소련 내에서 출판이 계속 거절되자, 도블라토프는 사미즈다트를 통해 글을 유통시키고 서유럽으로 밀반출하여 외국 저널에 발표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1976년 소련 작가 동맹에서 제명되었고, 1977년 서구에서 그의 책과 단편들이 연이어 출판되면서 정부의 감시망에 놓이며 이민 압박을 받게 되었다.

결국 1978년, 먼저 떠난 두 번째 아내 레나와 딸 카탸를 따라 어머니 노라, 애견 글라샤와 함께 소련을 떠나 비엔나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뉴욕에 정착했으며, 당시 심경은 ≪여행가방(Чемодан)≫에 잘 나타나 있다.

뉴욕에서 도블라토프는 러시아어로 발행되는 자유주의 성향의 이민자 신문 'The New American'(Новый американец)의 공동 편집자로 활동했다. 그동안 소련에서 출판하지 못했던 작품들을 발표하기 시작했는데, 망명 기간 12년 동안 12권의 책을 서방에서 출판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보이지 않는 책'(Невидимая книга, 1978년 출판)[3], '언더우드의 솔로'(Соло на ундервуде, 1980년), '화해'(Компромисс, 1981년), '보존지구'(Заповéдник, 1983년), '우리 집 사람들'(Наши, 1983년) 등이 있다. 미국 생활에 대한 이야기는 ≪지점≫에 집약되어 있다.

1980년대 중반에는 권위 있는 잡지 뉴요커에 작품이 실리면서[4] 작가로서 큰 성공과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1990년 8월 24일, 50세 생일을 며칠 앞두고 뉴욕에서 갑작스러운 심부전으로 사망했다.[5] 유해는 뉴욕 퀸스의 마운트 헤브론 묘지에 안장되었다.

마운트 헤브론 묘지, 뉴욕, 2010년 7월 26일


그의 사후 소련이 붕괴하면서 러시아에서도 단편집들이 다수 출판되었고, 20세기 후반 가장 사랑받는 러시아 작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2018년에는 그의 레닌그라드 시절을 다룬 전기 영화 '도블라토프'가 공개되었다.

2. 5. 사망

1978년, 소련 정부의 감시를 피해 오스트리아 비엔나를 거쳐 미국 뉴욕으로 망명하여 먼저 이주해 있던 아내와 딸과 합류했다.[2] 뉴욕에서는 자유주의 성향의 러시아어 이민자 신문인 ''The New American''의 공동 편집자로 일했다. 1980년대 초, 도블라토프는 마침내 작가로서 인정을 받기 시작하여 권위 있는 잡지 뉴요커에 작품을 게재했다.[4] 망명 생활 12년 동안 미국과 유럽에서 총 12권의 책을 출판했다.

1990년 8월 24일, 뉴욕에서 심부전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5] 50세 생일을 며칠 앞둔 시점이었다. 그의 유해는 뉴욕 퀸스에 있는 유대인 묘지인 마운트 헤브론 묘지에 안장되었다.

생전 소련에서는 그의 작품이 공식적으로 출판되지 못하고 사미즈다트(자가출판)나 서방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만 알려졌으나, 그의 사후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에서 다수의 단편집이 출판되면서 20세기 후반 가장 사랑받는 러시아 작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3. 작품 세계

(내용 없음)

3. 1. 주요 작품

도블라토프는 이민자로서 12년 동안 미국과 유럽에서 12권의 책을 출판했다. 소련에서는 그의 작품이 출판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하 출판물인 삼izdat와 자유 라디오 채널을 통해 작가로 알려졌다. 그의 사후와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된 후, 그의 단편 소설 모음집 등이 러시아에서도 다수 출판되었다.

'''생전에 출판된 작품:'''

연도원제한국어 제목출판 정보비고
1977Невидимая книгаru『보이지 않는 책』아르 안보르: Ardis
1980Соло на ундервуде: Записные книжкиru『언더우드에서의 솔로: 공책』파리: Третья волна
1981Компромиссru『타협』뉴욕: Knopf
1982Зона: Записки надзирателяru『구역: 교도관의 이야기』영어 번역 (뉴욕: Knopf, 1985)
1983Заповедникru『푸시킨 언덕』영어 번역 (버클리, CA: Counterpoint, 2014)
1983Марш одинокихru『고독한 사람들의 행진』홀리요크: New England Publishing Co
1983Нашиru『우리들』아르 안보르: Ардис
1985Демарш энтузиастовru『열정가들의 데마르셰』파리: Синтаксис바그리치 바흐차냔 및 N. 사갈로프스키 공저
1985Ремесло: Повесть в двух частяхru『공예: 두 부분으로 된 이야기』아르 안보르: Ардис
1986Иностранкаru『외국인 여성』뉴욕: Russica Publishers
1986Чемоданru『가방』테너플라이: Эрмитаж
1987Представлениеru『공연』뉴욕: Russica Publishers
1988He только Бродский: Русская культура в портретах и в анекдотахru『브로드스키만이 아니다: 초상화와 농담으로 보는 러시아 문화』뉴욕: Слово — WordM. 볼코바 공저
1990Записные книжкиru『공책』뉴욕: Слово — Word
1990Филиалru『지사』뉴욕: Слово — Word


3. 2. 문학적 특징

도블라토프는 "운율이 시인을 제한하는 것처럼 산문을 제한한다"라고 말하며, 스스로 정한 규칙에 따라 글을 썼다. 그 규칙은 한 문장 안에 같은 글자로 시작하는 단어가 두 개 이상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그의 문장은 대부분 짧고 단순하며, 복잡한 절 구조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1985년에 쓴 ''공예: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 이야기''에서 밝혔듯이, 문학 경력 초기에는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자신의 우상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헤밍웨이 스타일처럼 자전적인 내용이 많이 나타난다. 이후에는 개인적으로도 잘 알고 지냈던 요세프 브로드스키에게 큰 매력을 느끼고 영향을 받았다.

4. 한국과의 관계


  • ''우리 가족'' 누마노 미쓰요시 번역, 성문사, 1997년.
  • ''가방'' 페트로프=모리야 아이 번역, 성문사, 2000년.

5. 평가 및 영향

요세프 브로드스키는 도블라토프에 대해 "그는 작품을 끝까지 읽게 되는 유일한 러시아 작가"라고 말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어조인데, 이는 민주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공감할 수 있다. 즉, 희생자 역할을 자처하지 않고, 자신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 개인"이라고 평했다.[7]

2014년 6월 26일, 뉴욕 시의회는 63번가와 108번가 교차로를 "세르게이 도블라토프 길"(Sergei Dovlatov Wayeng)로 명명했다.[10] 이 명예를 요청하는 청원에는 18,000명이 서명했으며, 같은 해에 그의 딸 캐서린 도블라토프가 번역한 작가의 '푸시킨 언덕'의 새 판이 출판되었다. 이 작품은 최우수 번역 도서상 후보에 올랐다. 거리 명명 기념식은 2014년 9월 7일 108번가와 63번가 교차로에서 열렸으며, 3개의 러시아 텔레비전 뉴스 방송국이 이 행사를 취재했고, 축하 행사는 인근 고인의 집에서 이어졌다.[11]

세르게이 도블라토프에 관한 전기 영화는 2018년에 개봉되었다. 이 영화는 베를린 영화제 2018 경쟁 부문에 출품되었다.[12]

6. 저서 목록


  • ''우리 가족'' 누마노 미쓰요시 번역, 성문사, 1997년.
  • ''가방'' 페트로프=모리야 아이 번역, 성문사, 2000년.

참조

[1] 웹아카이브 Корабельная гавань Сергея Довлатова, 24 Август 2015, СМТУ http://www.smtu.ru/n[...] 2016-09-07
[2] 서적 Literature in Exile https://books.google[...] Duke University Press
[3] 웹사이트 Сергей Довлатов: «Мне суждено было побывать в аду» http://www.konkurent[...] 2024-10-11
[4] 웹사이트 Sergei Dovlatov https://www.newyorke[...] 2024-10-08
[5] 뉴스 Sergei Dovlatov, 48, Soviet Emigre Who Wrote About His Homeland https://www.nytimes.[...] 2024-10-08
[6] 학술지 Brodsky on Dovlatov http://magazines.rus[...]
[7] 학술지 О Сереже Довлатове http://www.sergeidov[...] 2024-10-11
[8] 웹사이트 Ironic: Russian Author Sergei Dovlatov’s Connections to the University of Michigan https://blogs.lib.um[...] 2024-10-08
[9] 웹사이트 Sergei Dovlatov, dissident sans idea https://www.eurozine[...] 2024-10-11
[10] 문서 Naming of 63 thoroughfares and public places http://legistar.coun[...] The New York City Council 2014-06-26
[11] 웹사이트 Dovlatov's Way http://www.theparisr[...] 2015-06-02
[12] 웹사이트 Dovlatov https://www.berlinal[...] 2024-10-1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