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의 유씨
1. 개요
소의 유씨는 조선 숙종의 후궁으로, 정2품 소의에 이르렀다. 1698년 숙원에 책봉되었으며, 1702년 소의로 진봉되었다. 1707년에 사망하여 서삼릉 후궁 묘역에 묘소가 있으며, 숙종과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다. 사후 삼각산 북쪽 산기슭을 개인 시장으로 절수받은 행위로 탄핵을 받았으며, 정조 때 왕실 사치 폐단 근절 정책에 따라 전답과 노비가 국고로 회수되고 신주는 수진궁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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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숙종 -
경신환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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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숙종 -
심재
심재는 조선 중기 문신으로, 좌의정 심희수의 후손이며, 문과 급제 후 여러 요직을 거쳐 경기도 관찰사, 이조판서, 대사헌 등을 역임했으나 갑술환국으로 관작이 추탈되었다. -
조선의 후궁 -
숙의 나씨 (중종)
조선 중종의 후궁인 숙의 나씨는 나주 나씨로, 중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26세에 출산 중 사망하여 경빈 박씨와의 관계 속에서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으며, 그녀의 묘는 이천시의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었다. -
조선의 후궁 -
숙의 방씨
숙의 방씨는 철종의 후궁으로 두 딸을 낳았으나 모두 요절하였고, 사후 조귀인의 예에 따라 장례를 치렀으며 묘는 서삼릉 후궁 묘역으로 이장, 해당 묘역은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드라마에서 묘사되기도 했다. -
17세기 한국 사람 -
윤증
윤증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소론의 영수로 우의정까지 역임한 정치가였으며, 성리학적·정치적 갈등으로 스승 송시열과 결별하고 탕평책을 지지했으나 당쟁 속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실천적 삶을 강조한 무실학을 추구하며 조선 후기 정치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7세기 한국 사람 -
광해군
광해군은 조선 제15대 국왕으로, 임진왜란 중 세자로 책봉되어 전란 수습에 기여하고 즉위 후 대북파를 등용, 일본과 기유약조를 맺고 후금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했으나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으며, 대동법 시행, 『동의보감』 편찬 등의 업적과 폐모살제 등의 논란으로 역사적 평가가 엇갈린다.
2. 생애
본관은 강릉, 성은 유이다. 조선 숙종의 후궁이며, 소의(정2품)였다.
1698년(숙종 24년) 종4품 숙원으로 책봉되었고, 1699년(숙종 25년) 단종 복위를 맞아 종2품 숙의로 진봉되었다. 1702년(숙종 28년) 인원왕후 책봉을 기념하여 정2품 소의로 다시 진봉되었다. 1707년(숙종 33년) 사망하여 의빈부 3등의 예로 장례가 치러졌다.
숙종과의 사이에서 자녀는 없었다. 제사를 모실 자녀와 가까운 친속이 없어, 생전에 숙종에게 받은 사제에 신주를 모시고 환관과 궁녀의 봉공을 받았다. 그러나 정조 즉위 후 왕실의 사치와 폐단을 근절하는 정책에 따라 전답과 노비 등이 국고로 회수되면서 신주도 수진궁으로 옮겨졌다.
현재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서삼릉(西三陵) 경내 후궁 묘역에 있다. 묘표는 1767년(영조 43년)에 세워졌다. 원래 묘소는 경기도 양주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왕자, 왕녀, 후궁의 무덤을 한 곳으로 옮기면서 현재 위치로 이전되었다. 1970년 5월 26일 서삼릉이 사적 제200호로 지정될 때 후궁묘도 함께 지정되었다.
2.1. 책봉과 논란
1698년(숙종 24년) 음력 8월 2일 궁인으로 있다가 종4품 숙원으로 책봉되었다. 당시 유씨를 후궁에 책봉하면서 그 땅과 집을 마련하기 위해 6000냥과 콩 100석 등 막대한 재물이 소요되었는데, 《조선왕조실록》의 사관은 당시 국고가 거덜나고 백성들의 생활이 곤궁함에도 후궁의 책봉에 이처럼 돈을 쓰는 것에 대해 식자들이 한탄하고 근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1699년(숙종 25년) 숙안공주가 숙종에게 절수받은 전장의 백성들에게서 마구잡이로 혹독한 세금을 거두는 것에 대한 비판이 이어질 때 그녀도 함께 언급되었지만 숙종의 비호를 받았다.
2.2. 진봉과 사망
1699년(숙종 25년) 단종 복위를 맞아 종2품 숙의로 진봉되었다. 1702년(숙종 28년) 인원왕후 책봉을 기념하여 정2품 소의로 진봉되었다. 1707년(숙종 33년) 음력 4월 8일 사망하여 음력 6월 10일 장사지냈다. 내명부 정2품 소의였지만 숙종의 의지로 의빈부 3등의 예로 장례가 치러졌다.
2.3. 사후 논란
1707년(숙종) 유씨가 사망한 직후, 가뭄 때 제사를 올리는 성역인 삼각산 북쪽 산기슭을 개인 시장市場중국어으로 절수(임금이 공신이나 왕족에게 내려 영구히 차지하여 이용하게 하던 토지)받아 나무를 베어온 행태가 드러나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정조 즉위 직후, 왕실의 사치와 폐단을 근절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이미 사망한 선왕의 공주와 후궁들에게 속해 있던 토지와 노비 등이 국고로 회수되었는데, 이때 유씨의 신주도 수진궁으로 옮겨졌다.
3. 묘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의 서삼릉 경내 후궁 묘역에 있으며, 1767년(영조 43년) 묘표가 세워졌다. 원래 경기도 양주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영토 개발을 이유로 왕자, 왕녀, 후궁의 무덤을 한 곳으로 옮기면서 이장되었다. 1970년 5월 26일 서삼릉이 사적 제200호로 지정될 때 후궁묘도 함께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4. 가족 관계
* 남편 : 제19대 숙종 (1661~1720, 재위: 1674~1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