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안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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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숙안공주는 조선 효종의 둘째 딸로, 인조의 손녀이며, 현종의 누이이자 숙종의 고모이다. 1649년 숙안공주에 봉해졌으며, 1651년 홍득기에게 하가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아들 홍치상이 처형된 후 정치에 관여하여 서인 세력을 지원했으며, 1698년 6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숙안공주는 횡포와 재산 축적, 정치 개입 등으로 비판을 받았으며, 2002년 드라마 《장희빈》에 등장하기도 한다. 현재 묘는 양평군 향토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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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안공주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작위 | 공주 |
실아버지 | 효종 |
실어머니 | 인선왕후 |
배우자 | 홍득기 |
자녀 | 홍치상 |
생애 | |
출생일 | 숭덕 원년 4월 28일 ( 1636년 6월 1일) |
사망일 | 강희 36년 12월 22일 ( 1698년 2월 2일) |
기타 정보 | |
묘소 | 숙안공주묘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화천리 산 24) |
별칭 | 익평공주, 비안공주 |
2. 생애
1636년 6월 1일(인조 14년) 효종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1649년 조부 인조가 붕어하고 아버지 효종이 즉위하자 숙안공주에 봉해졌다. 1651년, 홍득기와 혼인하여, 홍득기는 익평위에 봉해졌다[1]。
1689년 기사환국으로 아들 홍치상이 처형되었다. 이후 여동생 숙명공주와 함께 인현왕후 복위 운동에 협력하였다. 1698년, 62세로 사망하였다.
2. 1. 탄생과 군주 시절
1636년(인조 14년) 4월 28일, 인조의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효종)과 풍안부부인 장씨(인선왕후)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언니인 숙신공주가 요절하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서에는 첫째 딸로 기록되어 있다.1637년(인조 15년), 아버지 봉림대군과 어머니 장씨가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끌려가게 되었는데[4], 당시 돌이 채 되지 않았던 숙안공주는 부모와 같이 청나라로 가지 않고 궁중에서 양육되었다.[5]
1645년(인조 23년), 소현세자가 급서한 이후 아버지 봉림대군이 왕세자로 책봉되자, 다음 해인 1646년(인조 24년) 왕세자의 적녀에게 내려지는 작위인 군주(郡主)로 봉작되어 '''숙안군주'''(淑安郡主)가 되었다.[6]
1649년(인조 27년) 4월, 현감 홍중보의 아들인 홍득기가 익평부위(益平副尉)로 간택되었다.[7] 그러나 다음달인 5월 8일에 인조가 사망하여 혼례가 미루어졌다.
2. 2. 공주 시절과 도르곤과의 혼인 시도
효종이 즉위하여 '''숙안공주'''(淑安公主)에 봉해졌다. 혼인이 결정된 홍득기는 익평부위에서 익평위로 진봉되었다.[8] 인조의 삼년상을 마치기 전까지 혼례가 마땅히 미루어져야 했지만, 1650년(효종 1년) 청나라의 섭정왕 도르곤이 조선의 공주를 비(妃)로 맞이하겠다고 구혼하였다. 이에 효종은 다음해 1월, 간략한 절차로 숙안공주와 홍득기의 가례를 진행하였다.[9] 공주를 대신해 종실 금림군의 딸이 효종의 양녀가 되어 의순공주의 작위를 받고 도르곤의 비(妃)가 되었다.[10]2. 3. 남편과 아들의 죽음
1673년 11월 27일, 남편 홍득기가 39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12] 1689년(숙종 15년)에 발생한 기사환국 이후, 선왕의 딸이자 현왕의 고모라는 어머니의 배경을 믿고 악행[12]을 일삼던 아들 홍치상(洪致祥|홍치상중국어)이 교형에 처해졌다.[13]2. 4. 죽음
1697년(숙종 23년) 12월 22일 훙서하였다.[15] 숙종은 비망기를 내려 그 상제를 동생인 숙휘공주의 것을 따르게 하였고, 선왕대의 관례에 따라 친히 숙안공주의 초상에 나아가 임곡하였다.[16] 숙안공주는 남편 홍득기의 무덤에 같이 안장되었다. 두 사람의 묘는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화전리 산 24에 위치하고 있다.3. 횡포와 정치 개입
효종과 인선왕후의 딸로 효종의 총애를 받았다. 서인의 당색을 드러내며 정사에 간여하였는데, 조카인 숙종에게 자의대왕대비(장렬왕후)의 조카인 조사석이 임명된 것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고[3], 남인인 희빈 장씨와 숭선군의 아들 동평군 등과 반목하였다. 기사환국으로 아들 홍치상이 처형되자, 원수를 갚기 위해 인현왕후 복위 운동에 서인으로 협력했다.
3. 1. 재산 축적과 민폐
효종의 딸이자, 현종의 큰누나, 숙종의 고모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백성들의 토지와 세금을 빼앗아 횡포를 부렸으며, 이로 인해 세 왕의 비호에도 불구하고 탄핵과 소송이 끊이지 않았다.[17][3]홍득기(洪得箕)의 궁노(宮奴)가 소를 함부로 도살하는 것을 금하는 우금(牛禁)을 어기고도 이를 단속하는 관리를 마구 때리고, 궁노를 이끌고 본조 참의 이척연(李惕然)의 집에 가서 난동을 부린 일은 예나 지금이나 없던 변고였다.[20] 숙안공주의 궁노는 완산(完山) 등에, 청평공주[21]의 궁노는 호내(湖內) 등에 전장(田庄)을 설치했다.
숙정, 숙안 두 공주가 왕의 허가를 받은 공사(公事)라는 핑계를 대고 신천, 재령, 평산 등지의 민전(民田)을 불법으로 빼앗았는데, 평산 부사 윤겸(尹㻩)이 공갈과 협박에 겁을 먹고 아첨하기 위해 허다한 민전을 모조리 궁가의 소속으로 만들어 백성들이 생업을 잃고 원망하는 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숙안공주의 집을 수선할 때 100명에 가까운 공장(工匠)들과 많은 물건들이 들어갔다.
숙안공주방의 김해(金海) 땅 언답(堰畓)은 절수(折受)한 지 오래되었는데, 본 고을이 간사한 백성들의 무고(誣告)를 듣고 믿어 면세된 전답을 마음대로 빼앗아 주는 일은 매우 근거가 없다며, 김해 부사를 종중 추고(從重推考)하라는 왕명이 내려졌다. 김해는 숙안공주방에서 절수한 곳인데 궁차(宮差)가 세력을 믿고 민전을 침탈하고 있다는 상소가 올라왔으나, 왕은 간사한 백성들의 무고에서 나온 것 같다며 윤허하지 않았다.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니 사람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아 궁인(宮人)들은 왕족들과 결탁하고, 왕족들은 사대부들과 결탁하여 갖가지로 아첨하고 없는 사실을 날조하며 음흉한 소문을 지어내어 군주를 모함하는 습관은 진실로 매우 통탄할 일이라며, 이러한 일은 드러나는 대로 효시(梟示)하는 것을 영갑(令甲: 법)으로 삼도록 하라는 왕명이 내려졌다. 왕족은 대체로 여러 공주들(숙안공주, 숙명공주, 숙휘공주)을 가리킨 것으로, 숙안공주의 집이 가장 의심을 받았다.
3. 2. 정치 개입과 당쟁
효종과 인선왕후의 딸로 효종의 총애를 받았다. 하지만 효종의 딸, 현종의 큰누나, 숙종의 고모라는 입장을 앞세워 횡포를 부리고 백성들의 땅과 세금을 갈취하여 세 왕의 노골적인 비호에도 불구하고 탄핵과 소송이 끊이지 않았다.[3]서인의 당색을 드러내며 정사에 간여하였는데, 조카인 숙종에게 자의대왕대비(장렬왕후)의 조카인 조사석이 임명된 것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고[3], 남인인 희빈 장씨와 숭선군의 아들 동평군 등과 반목하였다.
숙안공주와 숙명공주의 언동은 숙종의 분노를 자아냈고, 숙종은 기사환국때 숙안공주의 아들 홍치상을 처형하였다. 이후 숙안공주는 아들을 잃은 원한을 갚기 위해 서인에게 자금을 대어주고 환국과 인현왕후의 복위를 도모하려고 시도하기도 하였다.
4.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조부 | 인조 | 1595년 | 1649년 | 조선 제16대 왕 |
조모 | 인열왕후 | 1594년 | 1636년 | |
부왕 | 효종 | 1619년 | 1659년 | 조선 제17대 왕 |
외조부 | 장유 | 1587년 | 1638년 | 신풍부원군 |
외조모 | 김이순 | 1587년 | 1654년 | 안동 김씨, 영가부부인 |
모친 | 인선왕후 | 1618년 | 1674년 | |
언니 | 숙신공주 | 1634년 | 1645년 | |
여동생 | 숙명공주 | 1640년 | 1699년 | |
남동생 | 현종 | 1641년 | 1674년 | 조선 제18대 왕 |
여동생 | 숙휘공주 | 1642년 | 1696년 | |
여동생 | 숙정공주 | 1646년 | 1668년 | |
여동생 | 숙경공주 | 1648년 | 1671년 | |
시부 | 홍중보 | 1612년 | 1671년 | |
시모 | 한산 이씨 | 이현영의 딸 | ||
남편 | 홍득기 | 1635년 | 1673년 | 익평위 |
아들 | 홍치상 | 1654년 | 1689년 | |
며느리 | 전주 이씨 | 1674년 | 이정영의 3녀[23] | |
손자 | 홍태유 | 1672년 | 1715년 | |
며느리 | 황제한 | 1658년 | 황진(黃璡)의 딸 | |
손녀 | 심증현(沈曾賢)의 처 | |||
손녀 | 신사성(申思聖)의 처 | |||
며느리 (측실) | ||||
서손녀 | 신영(申瑩)의 처 | |||
의붓 여동생 | 의순공주 | 1635년 | 1662년 | 금림군 이개윤의 딸, 도르곤의 적복진[2] |
기타 | 왕자 2명 (요절) |
5. 숙안공주가 등장하는 작품
2002년~2003년 KBS 2TV에서 방영된 드라마 《장희빈》에서는 배우 김영란이 숙안공주(肅安公主중국어) 역을 연기하였다.
6. 관련 문화재
참조
[1]
실록
효종실록
1649-06-09
[2]
실록
조선왕조실록 顕宗実録5巻、顕宗3年8月18日 戊午2回目
[3]
실록
숙종실록
1687-09-13
[4]
실록
인조실록
1637-02-08
[5]
문서
돌아가신 할머니 숙안공주 가장
[6]
승정원일기
승정원일기
1646-12-25
[7]
실록
인조실록
1649-04-09
[8]
실록
효종실록
1649-06-09
[9]
실록
효종실록
1650-11-05
[10]
실록
효종실록
1650-03-25
[11]
승정원일기
승정원일기
1673-06-29
[12]
실록
조선왕조실록(숙종,숙보,영조,정조)
[13]
실록
숙종실록
1689-04-22
[14]
문서
숙안공주, 숙명공주 (조선), 숙휘공주
[15]
실록
숙종실록
1697-12-22
[16]
실록
숙종실록
1697-12-23
[17]
문서
숙종이 영의정 김수항과 좌의정 이단하가 추천한 후보 중에서 우의정을 뽑지 않고 이조판서 조사석을 우의정으로 임명한 사건을 말한다. 김수항과 이단하가 추천한 후보들은 숙안공주 자매, 여양부원군 민유중(인현왕후의 아버지), 김수항(영빈 김씨의 종조부), 김만중(인경왕후의 숙부)의 친인척이었다. 또한, 숙안공주의 아들 홍치상과 숙명공주의 아들 심정보는 영빈 김씨의 이모부이기도 하기에 숙종실록과 인현왕후전에 언급된 대로 숙안공주와 숙명공주가 기사환국이 발발하기 전부터 희빈 장씨를 욕하고 궁에서 쫓아낼 것을 종용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18]
승정원일기
갑술환국 발발 후 숙종은 민암 등의 죄를 논하며 당시 남인이 세 공주(숙안, 숙명, 숙휘)를 반드시 죽이려고 했다고 말했다. - 승정원일기 숙종 20년 윤5월 29일 (을미) 원본358책/탈초본19책 (17/17)
[19]
실록
숙종실록
1694-04-01
[20]
문서
익평은 숙안공주의 남편 익평위 홍득기의 작호이다. 출가한 왕녀의 죄를 논할 때 왕녀의 작호로 거론할 때도 있지만 친 혈육인 왕의 입장을 고려해 남편의 작호로 대신하거나 살고 있는 동네의 이름이나 궁호(혹은 당호)로 대신하기도 했고, 주가(主家)나 궁가(宮家)를 쓰기도 했다.
[21]
문서
숙명공주 (조선)의 남편 청평위 심익현의 작호이다.
[22]
문서
인현왕후와 영빈 김씨를 가리킨다. 이날 이 전교가 있기 직전에 인현왕후의 인척인 한성우가 김창협·김만길·송주석 등에 이어 이징명의 상소를 각색하고 '과거 송 인종이 새로이 여인을 얻고 기뻐하였다가, 현명한 대신의 충언을 받고 부끄러워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회개하며 즉시 여인을 내쳤던 것을 본으로 삼아 나흘 전 후궁으로 삼은 희빈 장씨의 숙원 교지를 취소하고 당장 폐출할 것'을 상소했다. 이에 이제껏 장씨에 관한 모든 공격을 무시로만 일관했던 숙종이 기어이 분노를 터트리며 한성우에게 벌을 내린 것을 비롯, 앞서 이징명의 상소를 각색하여 희빈 장씨의 출궁을 종용한 대신들(전원 인현왕후와 영빈 김씨의 일족들)에게 엄중히 경고를 함과 동시에 그간 입궁하여 장씨의 출궁을 종용해왔던 숙안공주(영빈 김씨의 이모부인 홍치상의 어머니)·숙명공주(영빈 김씨의 이모부인 심정보의 어머니)·숙휘공주(인현왕후와 영빈 김씨의 인척)·명안공주(인현왕후와 영빈 김씨의 인척)에게도 경고를 내린 것이다.
[23]
문서
이정영의 차녀가 영빈 김씨의 어머니(김창국 (조선)의 처)이다. 이정영의 오녀는 숙명공주의 아들인 심정보와 혼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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