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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아그리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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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 아그리피나는 로마 제국의 인물로, 대 아그리피나와 게르마니쿠스의 딸이며,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아내가 되었다. 그녀는 네로 카이사르, 칼리굴라 등의 형제와 클라우디아 옥타비아, 브리타니쿠스의 계모이기도 하다. 28년에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결혼하여 아들 네로를 낳았고, 클라우디우스와 결혼하여 황후가 되었지만, 아들 네로를 황제로 만들기 위한 정치적 행보를 보이다가 갈등을 겪고, 네로의 명령으로 암살당했다. 그녀는 정치적 수완을 발휘했으나, 권력욕과 아들에 대한 과도한 간섭으로 인해 비판적인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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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아그리피나
기본 정보
바르샤바 국립 박물관에 있는 흉상
바르샤바 국립 미술관 소장 흉상
칭호아우구스타
전체 이름율리아 아그리피나
다른 이름율리아 아우구스타 아그리피나, 아우구스타 마테르 아우구스티
출생일15년 11월 6일
출생지오피둠 우비오룸 (SPQR)
사망일59년 3월 23일 (43세)
사망지미세눔 (이탈리아) (SPQR)
배우자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 파시에누스
클라우디우스
자녀네로
가문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가문
아버지게르마니쿠스
어머니대 아그리피나
통치
로마 황후49년 1월 1일 – 54년 10월 13일
기타 정보
관련된 왕조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2. 가족

대 아그리피나와 게르마니쿠스의 딸인 소 아그리피나는 4번째 자녀였다. 오빠로는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 칼리굴라가 있었고, 여동생으로는 율리아 드루실라와 율리아 리빌라가 있었다. 아그리피나의 두 오빠와 어머니는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세야누스의 음모로 희생되었다.[2]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는데, 대 아그리피나는 율리아와 아그리파 사이에서 태어났다. 율리아의 아버지는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였고, 어머니 스크리보니야는 폼페이우스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와 가까운 혈연 관계였다.

아버지 게르마니쿠스는 인기 있는 장군이자 정치인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소 안토니아였고 아버지는 장군 대 드루수스였다. 게르마니쿠스는 리빌라와 클라우디우스를 형제로 두었고, 이들은 각각 아그리피나의 이모와 삼촌이 되었다. 클라우디우스는 훗날 로마 황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조카인 아그리피나를 아내로 맞이하게 된다.

안토니아 미노르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옥타비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게르마니쿠스의 아버지인 드루수스는 리비아와 티베리우스 네로에게서 낳은 아들이었고, 황제 티베리우스의 동생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의붓아들이었다.

서기 9년, 아우구스투스티베리우스에게 그의 조카인 게르마니쿠스를 양아들이자 상속자로 입양하도록 강요했다. 게르마니쿠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총애를 받았는데,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마니쿠스가 자신의 양자이자 상속자인 삼촌 티베리우스를 계승하기를 바랐다.

2. 1. 가계도



3. 생애

소 아그리피나는 게르마니쿠스와 대 아그리피나의 딸로, 15년 11월 6일 혹은 14년라인강의 로마 전초 기지인 오피둠 우비오룸(현재의 독일 쾰른)에서 태어났다.[2] 어린 시절, 부모와 함께 독일(15~16년)을 여행했고, 형제들(칼리굴라 제외)과 함께 로마로 돌아와 어머니의 할머니 안토니아와 함께 살았다. 18년에 부모는 공무를 위해 시리아로 떠났고, 타키투스에 따르면 그 여정 중 레스보스 섬에서 셋째 여동생 율리아 리빌라가 태어났다. 19년에 아버지 게르마니쿠스가 안티오키아에서 사망했다.

28년,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첫 번째 결혼을 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29년에 판다테리아 섬(현재의 벤토테네)으로 유배되었고, 33년에 황제 티베리우스에 의해 처형되는 등 불운한 전반생을 보냈다.

37년 3월 16일, 티베리우스가 사망하고 칼리굴라가 즉위했다. 같은 해 12월 15일에 아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후의 로마 황제 네로)가 태어났다. 아그리피나는 칼리굴라와 근친상간 관계였다는 설이 있지만, 당시 상류층은 근친상간 죄목으로 고발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40년, 율리아 리빌라와 함께 칼리굴라 암살을 꾀한 혐의로 폰티아 제도에 유배되었다.

41년칼리굴라가 암살당하고 클라우디우스가 황위에 오르자, 유배에서 돌아와 와 두 번째 결혼을 한다. 남편은 몇 년 뒤에 세상을 떠났지만, 이 결혼으로 남편의 부동산을 손에 넣었다.

49년, 클라우디우스와 결혼하여 황후가 되었다. 아들 네로를 황위에 앉히기 위해 로마법에서도 금지되었던 고모와 조카의 결혼을 강행했다. 클라우디우스는 아내의 행동에 관심이 없는 남자였기에, 아그리피나는 "[아우구스투스 (칭호)#황제 일문의 여성의 칭호|아우구스타]"(Augusta)의 칭호를 부여받고 군사 문제까지 관여했다.

54년, 클라우디우스가 독 버섯으로 사망하자 네로가 로마 황제가 된다. 클라우디우스의 사인에 대해서는 아그리피나가 암살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있다.

네로를 황위에 앉힌 후 정치에 간섭하려 했다. 그러나 횡포는 네로와의 갈등을 낳았고, 결국 미움을 받아 황궁에서 쫓겨나고, 마지막에는 네로의 명령으로 암살당한다.

네로는 나폴리 근교 바이아이(현재: 바콜리)의 별장에서 어머니를 접대하고, 나폴리만 유람을 권했다. 아그리피나는 배를 탔지만, 이 배는 부서지기 쉬운 구조였고, 네로는 모후를 익사시키려 했다. 그러나 수영을 잘했기 때문에 계획은 실패한다. 아그리피나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네로는 아그리피나가 자객을 보냈다고 죄를 뒤집어씌워 파울리의 저택에서 황제가 보낸 친위대에 의해 살해당했다.

죽을 때, 친위대에게 아그리피나는, 엉덩이(혹은 배)에 손가락을 가리키며 '''"찌르려면 여기를 찔러라. 네로는 여기서 태어났으니까"'''라고 말했다고 한다.

3. 1. 어린 시절

소 아그리피나는 대 아그리피나와 게르마니쿠스의 딸로, 서기 15년 11월 6일 또는 서기 14년에 라인강의 로마 전초 기지인 오피둠 우비오룸(현재 독일 쾰른)에서 태어났다.[2] 그녀의 출생지는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으나, 쾰른이 유력한 출생지로 여겨진다. 수에토니우스는 게르마니쿠스의 두 딸 모두 갈리아트리어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기도 한다.[4][5]

아그리피나는 어린 시절, 칼리굴라를 제외한 형제자매들과 함께 독일 전역을 여행했으며, 이후 로마로 돌아와 아버지 쪽 할머니인 안토니아와 함께 살며 양육되었다. 그녀의 부모는 서기 18년 공식적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시리아로 떠났고, 타키투스에 따르면 셋째 여동생인 율리아 리빌라는 레스보스 섬으로 가는 도중에 태어났다.[6]

서기 19년, 아버지 게르마니쿠스가 안티오크(현재의 안타키아, 터키)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게르마니쿠스의 죽음은 로마에서 큰 슬픔을 불러일으켰으며, 그가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와 문아티아 플란키나에 의해 티베리우스의 명령으로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아그리피나는 어머니, 아버지 쪽 할머니인 안토니아, 증조모인 리비아의 감독을 받으며 로마의 팔라티노 언덕에서 살았다.

3. 2. 불행한 결혼과 칼리굴라 시대

서기 28년, 소 아그리피나는 13세 생일 이후 아버지 쪽 사촌인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티베리우스 황제가 주선하고 로마에서 거행되었다.[7] 도미티우스는 명망 있는 집정관 가문 출신으로, 어머니 안토니아 마요르를 통해 아우구스투스의 증손자이자 클라우디우스의 사촌이었으며, 소 아그리피나와는 사촌 관계였다. 그는 도미티아 레피다 더 엘더와 도미티아 레피다 더 영거 두 누이가 있었는데, 이 중 도미티아 레피다 더 영거는 훗날 황후 발레리아 메살리나의 어머니가 된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흉상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도미티우스는 "삶의 모든 면에서 혐오스러운" 인물이었으며, 서기 32년에 집정관을 지냈다. 소 아그리피나와 도미티우스는 안티움과 로마 사이에서 살았으며, 그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서기 37년 3월 16일, 티베리우스가 사망하고 소 아그리피나의 유일한 생존 형제인 칼리굴라가 황제가 되었다. 황제의 누이라는 신분은 아그리피나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주었다. 아그리피나와 그녀의 여동생들인 율리아 드루실라, 율리아 리빌라는 칼리굴라로부터 여러 명예를 얻었는데, 여기에는 다음이 포함된다.

  • 베스타의 무녀의 권한을 받아 경기장 상석에서 공개 경기를 관람할 수 있었다.
  • 칼리굴라와 그의 누이들의 이미지를 새긴 새로운 종류의 주화를 발행했다.
  • 충성 맹세 및 집정관 제안 등에 그들의 이름이 추가되었다. (예: "나는 황제와 그의 누이들의 안전만큼 내 생명이나 자녀들의 생명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황제와 그의 누이들에게 행운이 따르기를")


티베리우스가 사망할 무렵, 아그리피나는 임신 중이었고, 도미티우스는 자신이 아이의 아버지임을 인정했다. 서기 37년 12월 15일 이른 아침, 안티움에서 아그리피나는 아들을 낳았고, 이름을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라고 지었다. 이 아이는 훗날 황제 네로가 되며, 아그리피나의 유일한 친자였다. 수에토니우스는 도미티우스가 아들의 출생을 축하하는 친구들에게 "나와 아그리피나가 낳은 것은 국가나 국민에게 결코 좋은 일이 될 수 없을 것"이라고 답했다고 전한다.

칼리굴라와 그의 누이들은 근친상간 혐의를 받았다. 서기 38년 6월 10일, 드루실라가 사망하자 칼리굴라는 정신 이상 증세를 보였고, 생존한 누이들에게 특별한 존경을 보이지 않았다.

서기 39년, 아그리피나와 리빌라는 드루실라의 과부이자 어머니 쪽 사촌인 마르쿠스 아밀리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칼리굴라를 암살하고 레피두스를 새 황제로 옹립하려는 '세 개의 단검 음모'에 연루되었다. 레피두스, 아그리피나, 리빌라는 연인 관계였다는 혐의를 받았다. 레피두스의 재판에서 칼리굴라는 그들을 간통죄로 비난하고, 그들을 죽이려는 계획이 담긴 편지를 제시했다. 세 사람은 유죄 판결을 받았고, 레피두스는 처형되었다. 아르발 형제단의 비문에 따르면, 아그리피나는 레피두스의 유골 단지를 로마로 가져오도록 강요받았다.[8] 아그리피나와 리빌라는 폰티네 제도의 폰차 섬으로 추방되었다.

칼리굴라는 그들의 가구, 보석, 노예, 해방 노예들을 팔아 버렸다. 서기 40년 1월, 도미티우스는 부종으로 사망했다. 루키우스는 칼리굴라가 상속 재산을 빼앗은 후, 그의 둘째 아버지 쪽 고모인 도미티아 레피다 더 영거와 함께 살게 되었다.

서기 41년 1월 24일, 칼리굴라와 그의 아내 밀로니아 카이소니아, 딸 율리아 드루실라가 살해되었다. 이후 아그리피나의 아버지 게르마니쿠스의 형제이자, 그녀의 숙부인 클라우디우스가 새로운 황제가 되었다.

3. 3. 클라우디우스 시대와 황후 등극

49년 아그리피나는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와 결혼하여 황후가 되었다. 로마 사회에서 삼촌과 조카의 결혼은 근친상간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 결혼은 많은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나 이 결혼은 권력을 위한 것이었으며, 아그리피나는 아들 루키우스(훗날 네로)를 황제로 만들기 위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12]

결혼 직후, 아그리피나는 경쟁자였던 롤리아 파울리나를 흑마술 혐의로 제거했다. 파울리나는 재판도 받지 못하고 재산을 몰수당했으며, 결국 자살했다. 또한 아그리피나는 자신의 외가 사촌이자 클라우디우스의 딸 클라우디아 옥타비아의 약혼자였던 루키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토르콰투스를 근친상간 혐의로 모함하여 약혼을 파기시키고 자살하게 만들었다. 이는 옥타비아와 자신의 아들 네로의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한 것이었다.[12]

아그리피나와 클라우디우스의 공동 통치자로서의 주화


아그리피나는 클라우디우스의 신뢰받는 조언자가 되었고, 황제의 결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녀의 동상이 제국 전역에 세워졌고, 주화에 그녀의 얼굴이 새겨졌다. 원로원에서 그녀의 추종자들은 요직에 등용되었으며, 그녀는 암암리에 원로원의 의사를 경청하고 별도의 법정을 가지며 제국 문제를 결정했다. 심지어 정부 문서를 서명하고 외국 대사들과 공식적으로 거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특권적인 지위는 원로원 계급과 황실 가족들 사이에서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50년 아그리피나는 아우구스타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는 세 번째로 수여된 사례였으며, 생전에 이 칭호를 받은 것은 리비아 드루실라에 이어 두 번째였다. 또한 클라우디우스는 아그리피나가 태어난 곳에 그녀의 이름을 딴 식민도시 '콜로니아 클라우디아 아라 아그리피넨시스'(오늘날의 쾰른)를 건설했다. 51년에는 베스타 처녀 등에게 주어지는 의식용 마차 '카르펜툼'을 받는 특권을 누렸다.

아그리피나는 클라우디우스에게 자신의 아들 루키우스를 입양하고 후계자로 삼도록 설득했다. 50년 루키우스는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라는 이름으로 클라우디우스의 양자가 되었고, 53년 클라우디우스의 딸 옥타비아와 결혼했다. 아그리피나는 네로의 가정교사로 세네카를 유배에서 불러들였으며,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를 근위대 장관으로 임명하여 네로의 지지 기반을 강화했다.[13]

한편, 아그리피나는 클라우디우스의 친아들 브리타니쿠스를 왕위 계승에서 배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51년 브리타니쿠스의 가정교사 소시비우스를 처형했는데, 이는 소시비우스가 네로의 입양과 후계자 지명에 반대했기 때문이다.[14]

54년 클라우디우스가 사망하면서 네로가 황제에 즉위했다. 클라우디우스의 사인은 독버섯에 의한 독살로 추정되며, 많은 고대 및 현대 역사가들은 아그리피나가 암살에 관여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3. 4. 네로 시대와 최후

네로의 대리석 흉상. 팔라티노 고대 유물관


네로가 황제가 된 후, 아그리피나는 아들의 젊음을 이용하여 로마 제국 통치에 참여하려 했다. 황제의 특권을 누리며 법정을 열고, 커튼 뒤에서 원로원 회의에 참석했으며, 황실 동전과 조각상에 아들과 함께 등장했다. 타키투스는 아그리피나가 공동 통치를 시도하고 프라이토리아 근위대에게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요구했다고 묘사했다. 또한 세네카와 부루스가 막기 전까지 아르메니아 대사와의 아들 회담에 참여하려 했다.[15]

어린 아들 네로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아그리피나의 조각상 ( 서기 54–59년)


그러나 네로 재위 1년째, 네로가 해방 노예 클라우디아 악테와 불륜을 저지르면서 아그리피나는 네로에 대한 영향력을 잃기 시작했다. 아그리피나는 이를 강하게 반대하며 네로를 꾸짖었고, 브리타니쿠스를 황제로 만들려는 시도를 하거나 네로를 위협하기 위해 그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서기 55년 2월, 네로는 자신의 연회에서 브리타니쿠스를 은밀히 독살했다. 이로써 아그리피나와 아들 간의 권력 투쟁이 시작되었다.[16]

서기 56년에서 58년 사이, 아그리피나는 아들을 매우 경계하고 비판했다. 서기 56년, 아그리피나는 아들에 의해 궁궐에서 쫓겨나 황실 저택에서 살게 되었다. 그러나 몇 년 동안 아들에게 어느 정도 영향력을 유지했고, 이 시기는 네로 통치의 가장 좋은 해로 여겨진다. 하지만 관계가 악화되면서 네로는 점차 어머니의 명예와 권력을 빼앗았고, 로마 및 게르만 경호원까지 제거했다. 네로는 어머니에게 황위를 포기하고 로도스 섬으로 가서 살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팔라스 또한 궁정에서 해임되었다. 팔라스의 몰락과 부루스와 세네카의 아그리피나 반대는 그녀의 권위 축소에 기여했다. 서기 56년 중반, 아그리피나는 로마 통치에서 물러나야 했다.[17]

아그리피나가 자신의 저택에 살거나 로마를 잠시 방문했을 때, 네로는 그녀를 괴롭히기 위해 사람을 보냈다. 미세눔에 살고 있었지만, 그녀는 항상 "아우구스타"로 불렸고, 아그리피나와 네로는 짧은 만남을 가졌다.[18] 서기 58년 말, 아그리피나는 군인 및 원로원 의원들과 함께 네로를 전복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았고, 가이우스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와 함께 이동할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19] 또한, 그녀는 네로와 포파이아 사비나의 관계를 폭로했다.

아그리피나의 죽음을 둘러싼 정황은 역사적 모순과 네로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불확실하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서기 58년 네로는 귀족 여성 포파이아 사비나와 관계를 맺었다. 포파이아는 네로를 "엄마 껌딱지"라고 조롱하며, 옥타비아와의 이혼과 포파이아와의 결혼이 아그리피나가 살아있는 한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네로가 아그리피나를 죽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20] 그러나 네로는 서기 62년이 되어서야 포파이아와 결혼했는데, 이는 이 동기에 의문을 제기한다.[21] 수에토니우스는 포파이아의 남편 오토가 서기 59년 아그리피나 사망 후에야 네로에 의해 쫓겨났다고 밝혀, 이미 결혼한 포파이아가 네로를 압박했을 가능성은 낮다고 한다.[22] 일부 현대 역사가들은 네로가 아그리피나를 죽이기로 결정한 것은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나 브리타니쿠스로 교체하려는 그녀의 음모 때문이라고 추측한다.[23]

타키투스는 네로가 독살이나 칼로 찌르는 것을 고려했지만, 너무 어렵고 의심스럽다고 느껴 스스로 가라앉는 배를 만들기로 결정했다고 주장한다.[24] 이 음모를 알고 있었음에도 아그리피나는 배에 탑승했고, 붕괴된 납 천장에 깔릴 뻔했지만 소파 측면이 천장의 낙하를 막아 구출되었다.[25] 붕괴된 천장은 아그리피나를 빗겨갔지만, 조타실 밖에 있던 그녀의 시종을 덮쳐 죽였다.[1]

배가 가라앉지 않자, 선원들은 배를 침몰시켰지만, 아그리피나는 헤엄쳐 해안으로 갔다.[1] 그녀의 친구 아케로니아 폴라는 물속에서 노꾼들에게 공격받아 죽거나 익사했는데, 구출받기를 바라며 자신이 아그리피나라고 외쳤기 때문이다. 아그리피나는 이것이 단순한 사고가 아닌 암살 시도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아그리피나는 해안에서 많은 추종자들의 환영을 받았다.[26] 아그리피나의 생존 소식이 네로에게 전해지자 그는 아니케투스, 삼단노선 지휘관 헤르쿨레이우스, 해병대 백인대장 오바리투스를 보내 그녀를 죽였다.[1]

별장을 포위한 후, 그들은 침실로 향했다. 마지막 시녀가 떠난 후, 아그리피나는 침대에 둘러싸여 곤봉으로 머리를 맞았고, 이후 배를 내밀며 "내 배를 찔러라!"라고 외치며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죽었다.

수에토니우스는 아그리피나의 "과도하게 감시하는" 시선이 네로가 그녀를 살해하도록 몰아넣었다고 말한다. 몇 달 동안 그녀의 권력, 명예, 경호원을 박탈한 후, 그는 그녀를 팔라티노에서 추방했고, 이어서 그녀를 고소와 "조롱과 야유"로 "괴롭히도록" 사람들을 보냈다.

그는 세 번이나 독살을 시도했지만, 그녀는 미리 해독제를 복용하여 죽음을 막았다. 그 후, 천장 타일이 떨어지도록 기계를 설치했지만, 그녀는 계획을 듣고 다시 한번 죽음을 피했다. 네로는 붕괴되어 침몰할 배에 그녀를 태우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바이아이에서 킨쿠아트루스를 축하하도록 초대한 친절한 편지를 보냈다. 그는 그녀의 갤리선과 그의 선장 중 한 명 사이에 "우발적인" 충돌을 일으켰다. 집으로 돌아갈 때, 그는 손상된 갤리선 대신 붕괴되는 배를 제공했다.

배가 침몰한 다음 날, 네로는 그녀의 해방 노예 아게르무스에게서 그녀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받았다. 당황한 네로는 경비병에게 아게르무스 뒤에 칼을 떨어뜨리라고 명령했고, 즉시 그를 살인 미수 혐의로 체포했다. 네로는 아그리피나 암살을 명령했다. 그는 네로를 죽이려는 그녀의 음모가 드러난 후 아그리피나가 자살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수에토니우스는 아그리피나가 죽은 후 네로가 아그리피나의 시체를 검사하고 그녀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논의했다고 말한다. 네로는 또한 아그리피나가 죽은 후 그를 괴롭힐 것이라고 믿었다.[27]

카시우스 디오의 이야기는 포파이아가 살해 동기라고 시작한다.[28] 네로는 바다에서 바닥이 열리는 배를 설계했다.[29] 아그리피나는 배에 태워졌고, 배의 바닥이 열린 후 물에 빠졌다.[1] 아그리피나는 헤엄쳐 해안으로 갔고, 네로는 그녀를 죽이기 위해 암살자를 보냈다.[30] 네로는 그 후 아그리피나가 자신을 죽이려 음모를 꾸몄고 자살했다고 주장했다.[31] 암살자가 공격하려 할 때 그녀가 말했다고 전해지는 마지막 말은 "내 자궁을 쳐라"였는데, 여기서 의미하는 바는 그녀가 "혐오스러운 아들"을 낳은 신체 부위부터 파괴되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32]

아그리피나 사후, 네로는 그녀의 시신을 바라보며,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언급했다.[33] 그녀의 시신은 그날 밤 식탁 소파에서 화장되었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네로는 정신이 없고, 말도 못하며, 겁에 질린 모습을 보였다. 아그리피나의 사망 소식이 퍼지자, 로마 군대, 원로원, 그리고 여러 사람들이 어머니의 음모에서 벗어났다는 축하 편지를 그에게 보냈다.

네로의 통치가 끝날 때까지 아그리피나의 무덤은 덮이거나 둘러싸이지 않았다. 그녀의 가신들은 나중에 미세눔에 그녀의 소박한 무덤을 마련했다.[33] 네로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다. 그는 너무나 죄책감을 느껴 때때로 그녀에 대한 악몽을 꾸고, 심지어 어머니의 유령을 보거나 페르시아의 마법사에게 그녀의 용서를 구하기도 했다.[27] 그녀가 죽기 몇 년 전, 아그리피나는 점성가를 찾아 아들의 미래에 대해 물었다. 점성가들은 그녀의 아들이 황제가 되어 그녀를 죽일 것이라고 예측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그녀는 "그가 황제가 될 수 있다면, 차라리 나를 죽여라"라고 대답했다.[33]

민간에 알려진 이야기에 따르면, 네로를 황위에 앉힌 후 아그리피나는 정치에 간섭하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횡포는 황제로서 독립심이 싹튼 네로와의 사이에 갈등을 낳았고, 결국 미움을 받아 황궁에서 쫓겨나고, 마지막에는 네로의 명령으로 암살당했다.

네로는 아그리피나와 함께 나폴리로 여행하여 근교의 바이아이(현재: 바콜리)의 별장에서 어머니를 접대했다. 아그리피나가 바이아이에서 나폴리만을 사이에 두고 몇 킬로미터 떨어진 파울리의 자신의 별장으로 돌아가게 되자 네로는 호화로운 배를 준비하여 나폴리만 유람을 하고 돌아가도록 권했다. 아들의 제안에 아그리피나도 따랐고, 육로로 돌아갈 예정이었지만 네로가 준비한 배를 타기로 했다.

그러나 이 배는 부서지기 쉬운 구조로 되어 있었고, 배가 만의 중간 지점에 이르자 부수어 침몰시킬 계획이었다. 네로는 모후를 익사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아그리피나가 수영을 잘했기 때문에 실패한다. 아그리피나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는 것을 알리는 사자를 네로에게 보냈지만, 네로는 사자가 단검을 소지하고 있다는 것을 이유로 아그리피나가 자객을 보냈다고 죄를 뒤집어씌운다. 황제 암살 혐의를 받게 된 아그리피나는 파울리의 저택에서 황제가 보낸 친위대에 의해 살해당했다.

죽을 때, 친위대에게 아그리피나는, 엉덩이(혹은 배)에 손가락을 가리키며 '''"찌르려면 여기를 찔러라. 네로는 여기서 태어났으니까"'''라고 말했다고 한다.

4. 평가

고대 로마의 자료들은 소 아그리피나를 상당히 비판적으로 묘사한다. 타키투스는 그녀를 악랄하다고 여겼으며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수에토니우스와 카시우스 디오의 기록도 유사하다.[38]

하워드 헤이즈 스컬라드는 아그리피나가 야심만만하고 부도덕하며 타락한 성적 사이코패스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아그리피나는 일련의 희생자들을 쓰러뜨렸으며, 경쟁을 의심하거나 재산을 탐내는 사람은 누구도 안전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했다.[38]

반면 구글리엘모 페레로는 아그리피나에게 동정적인 시각을 보였다. 그는 아그리피나가 역사에 의해 가혹하게 판단되었다고 주장하며, 클라우디우스와의 결혼은 무능한 황제 때문에 제국의 권위와 정부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옹호했다. 페레로는 아그리피나가 자신의 지성과 의지력으로 남편의 부족함을 보완하려 했다고 보았다.

앤서니 A. 배럿은 스컬라드의 비판과 페레로의 변호를 종합하여 균형 잡힌 견해를 제시했다. (배럿, 앤서니 A., 아그리피나: 초기 로마 제국의 섹스, 권력, 정치, 예일 대학교 출판부, 뉴 헤이븐, 1996년 참조.)

아그리피나는 권력욕이 강하고, 오빠 칼리굴라와 아들 네로 등 개성이 강한 황제들 사이에 있었으며, 남편 살해 혐의까지 받는 등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뛰어난 정치적 감각으로 아들의 교육자로 세네카를 등용하고, 군사적 기반으로 프라이토리아니에 주목하는 등 인선에 탁월함을 보였다. 또한 로마 시대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회고록을 남길 정도로 교양 있는 인물이었다.

후세에는 인기가 없었다고 전해지지만, 오현제 중 한 명인 트라야누스가 칭찬했듯이, 네로의 치세 초기 5년은 Quinquennium Neronis|퀸켕니움 네로니스la라고 불릴 정도로 "드물게 볼 수 있는 선정"이었다. 소 아그리피나의 정치적 수완이 증조부 아우구스투스 사후 로마 시민들이 갈망하던 기품 있는 시대를 구현했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수에토니우스의 "로마 황제 열전"(De vita Caesarum|데 비타 카이사룸la)에는 가마를 타고 시내를 이동하는 동안 네로와 근친상간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이것이 네로가 그녀를 암살한 원인이라고도 한다.

5. 기타


  • 아그리피나 콤플렉스의 어원이기도 하다.
  • 독일의 도시 쾰른은 로마의 식민 도시가 기원이며, 그 이름은 그녀의 요청으로 클라우디우스가 '''오피둠 우비오룸'''(Oppidum Ubiorumla)에서 '''콜로니아 아그리피나'''(Colonia Agrippinala)로 개명한 데에서 유래한다.

6. 대중문화

조반니 보카치오가 1361~62년에 피렌체에서 저술한 역사적, 신화적 여성 전기 모음집인 ''여걸전''에 소 아그리피나가 기록되어 있다. 이는 서양 문학에서 여성의 전기에만 전념한 최초의 모음집으로 주목할 만하다.[37]

소 아그리피나는 다음 작품들에서 등장한다.


  • 플라비우스 왕조 시대에 쓰여진 로마 비극 옥타비아
  • 다니엘 카스퍼 폰 로헨슈타인의 독일 바로크 비극 ''Agrippina: Trauerspiel'' (1665)
  • 빈첸초 그리마니의 대본을 바탕으로 한 G.F. 헨델의 1709년 오페라 ''아그리피나''
  • 로버트 데마리아의 소설 ''로마의 여제''(1978)
  • 1911년 이탈리아 영화 ''아그리피나''
  • ''나의 아들 네로''(1956) (글로리아 스완슨 연기)
  • ''나, 클라우디우스''(1976) (바바라 영 연기, 작중 이름은 아그리피닐라)
  • ''칼리굴라''(1979)와 ''메살리나, 메살리나''(1977) (로리 와그너 연기)
  • ''칼리굴라와 메살리나''(1981) (프랑수아즈 블랑샤르 연기)
  • ''A.D.''(1985 미니시리즈) (아바 가드너 연기)
  • ''부디카''(2003) (프랜시스 바버 연기)
  • ''임페리움: 네로''(2005) (로라 모란테 연기)
  • ''고대인들의 못된 행동''(2009), 히스토리 채널 다큐멘터리 (에피소드 "네로")
  • ''로마 제국''(2016), 넷플릭스 (테레사 리앤 연기)
  • 1953년 8월 31일 CBS 라디오 프로그램 ''범죄 고전'' 에피소드 "사랑하는 아들 네로" (베티 루 게르손 연기, 아들 네로는 윌리엄 콘래드 연기)
  • 끔찍한 역사 - 영화 (2019) (킴 캐트럴 연기)


구스타프 베르트하이머: ''아그리피나의 난파'' (1874)


아그리피나는 쾰른의 창시자로 여겨지며 오늘날에도 쾰른 삼두정치의 처녀의 옷으로 상징된다. 쾰른 시청 타워의 조각 프로그램에서 헤리베르트 칼린의 조각이 1층에 아그리피나에게 헌정되었다.

참조

[1] 서적 Annals
[2] 논문 Caligula's Three Sisters
[3] 서적 Germanicus Pen and Sword 2013
[4] 서적 Caligula: The Mad Emperor of Rome https://books.google[...] Turner Publishing Company 2019-07-30
[5] 서적 Agrippina: Mother of Nero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02-01-04
[6] 서적 Annals
[7] 서적 Annals
[8] 서적 Caligula: A Biograph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9] 웹사이트 C. Suetonius Tranquillus https://penelope.uch[...]
[10] 서적 Roman Women: The Women who influenced the History of Rome https://books.google[...] Fonthill Media 2017-05-17
[11] 서적 The Works of Tacitus: The annals, Volume I Harper & Brothers
[12] 서적 1940
[13] 서적 Annals
[14] 서적 Annals
[15] 서적 Annals
[16] 문서 Rome: Agrippina the Younger – Background and Rise to Prominence
[17] 서적 Oxford Classical Dictionary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18] 서적 Ad Britannia II: First Century Roman Britannia Trafford Publishing 2017
[19] 서적 Annals
[20] 서적 Annals
[21] 간행물 Whatever Happened to Lady Agrippina? 1969
[22] 서적 The Lives of Caesars
[23] 간행물 Heirs and Rivals to Nero 1955
[24] 서적 Annals
[25] 서적 Annals
[26] 서적 Annals
[27] 서적 The Lives of Caesars
[28] 서적 Historia Romana
[29] 서적 Historia Romana
[30] 서적 Historia Romana
[31] 서적 Historia Romana
[32] 서적 Europe: A history
[33] 서적 Annals
[34] 서적 The Oxford Classical Dictionary Oxford University Press 1996
[35] 학술지 Lost Memoirs of Antiquity https://www.jstor.or[...] 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19
[36] 서적 Annals
[37] 서적
[38] 서적 From the Gracchi to Nero: History of Rome from 133 B.C. to A.D.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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