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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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송대관은 대한민국의 트로트 가수로, 1946년 전라북도 정읍에서 태어났다. 1967년 "인정많은 아저씨"로 데뷔했으나, 1975년 "해뜰날"의 히트로 전성기를 맞이하며, 1980년대 트로트 부활에 기여했다. "차표 한 장", "유행가" 등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했으며, 현철, 태진아, 설운도와 함께 트로트 4대 천왕으로 불렸다. 2015년 부동산 투자 사기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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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태권은 대한민국 배드민턴 선수로,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남자 복식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선수 경력의 정점을 찍었다.
2. 생애
송대관은 1946년 6월 2일 전라북도 정읍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송영근은 3·1운동 당시 태극기와 독립 선언서를 배포하며 독립운동을 도왔다가 일제에 의해 고초를 겪었다. 아버지 송씨는 한국 전쟁 때 실종되어 송대관은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였다. 1965년 전주영생고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오아시스 레코드 사장 손진석을 만나 가수 트레이닝을 받았다.[7]
이후 가수 데뷔, 전성기, 미국 이민과 귀국, 재기와 트로트 4대 천왕으로 활동, 유행가와 제2의 전성기를 보내는 과정은 하위 섹션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가수 활동 외에도 배우로 활동하여 2009년 KBS 드라마 《공주가 돌아왔다》, 2011년 SBS 드라마 《신기생뎐》에 조연으로 출연하였다. 2009년 10월 31일에는 정읍시 출신의 국민가수이자 정읍시 홍보대사인 송대관의 명성을 통해 정읍시와 내장산을 전국에 알리고 가요제의 명품화를 통해 정읍시의 이미지 향상을 꾀한다는 취지로 《정읍 송대관 가요제》가 처음 개최되어 차세대 트로트 유망주의 등용문이 되기도 하였다.
2015년 8월 13일 부동산 투자 사기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고, 이후 '''"딱 좋아"'''를 발표하였다.[7] 주요 노래로는 '''"해 뜰 날"''', '''"차표 한 장"''', '''"분위기 좋고"''', '''"딱 좋아"''' 등이 있다.
2. 1. 데뷔와 무명 시절 (1967년 ~ 1974년)
송대관은 1967년 《인정많은 아저씨》라는 정통 트로트 곡으로 데뷔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남진과 나훈아가 이미 대중의 큰 주목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송대관은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고 무명 가수로 머물렀다. 1971년에는 브루스 풍의 《세월이 약이겠지요》를 발표해 인지도를 얻고 방송 출연도 늘었지만, 여전히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7]2. 2. 전성기 (1975년 ~ 1980년)
1975년 《해뜰날》(송대관 작사/신대성 작곡)이 크게 히트하면서 송대관이라는 이름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며 전성기를 맞이하였다.[7] 이 곡은 반복적이며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가사와 경쾌한 멜로디가 돋보였으며, 당시 남진, 나훈아, 하춘화 등 대세 가수들을 제치고 인기를 얻었다.[7] 1976년 방송국 가요대상 3개를 수상하고 동시에 가수왕에 등극하였다.[7]2. 3. 미국 이민과 귀국 (1980년 ~ 1988년)
1975년 《해뜰날》이 크게 히트하면서 스타가 되었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송대관은 1980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4][7] 미국에서 돈을 벌기 위해 다양한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7] 약 10년 간 미국 생활을 하다가 1988년에 대한민국으로 귀국하였다.[7]2. 4. 재기와 트로트 4대 천왕 (1988년 ~ 2000년대 초)
1988년에 대한민국에 귀국한 송대관은 《혼자랍니다》를 부르며 인지도를 얻다가 1989년 《정 때문에》를 발표하고 나서 20만 장의 레코드 판매량을 기록하고 라디오 차트 분야에서 3개월간 1위를 하며 다시금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7] 이후 1990년대에 《차표 한장》, 《인생은 생방송》, 《고향이 남쪽이랬지》 등 수많은 곡을 히트시켰다.1980년대 후반부터 송대관은 트로트를 부활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그 중심에는 현철, 태진아, 설운도와 함께 트로트 4대 천왕 체제를 구축하였다. 그중에서도 같이 미국 이민 생활을 했던 태진아와는 개인적으로 각별한 사이로 지내며 명콤비로 불리고 있다. 매년 《송대관 & 태진아 라이벌 콘서트》를 개최하고 있다.[7] 2002년 58세에 아내 이정심이 작사한 《유행가》를 발표하였는데, 이 곡은 2000년대 초반에 가장 크게 히트한 송대관의 노래로, 화려한 의상과 엇박자 댄스를 선보여 젊은 층들이 즐겨 부른 트로트로 자리매김하였다.[7]
2. 5. 유행가와 제2의 전성기 (2000년대 초 ~ 현재)
2002년 58세에 아내 이정심이 작사한 《유행가》를 발표하였는데, 이 곡은 2000년대 초반에 가장 크게 히트한 송대관의 노래이다. 화려한 의상과 엇박자 댄스를 선보여 젊은 층들이 즐겨 부른 트로트로 자리매김하였다.[7] 이후 《사랑해서 미안해》, 《내 녀자》, 《오래오래》를 부르며 활동해왔다. 2004년부터 2009년까지 태진아와 함께 《명인제약 이가탄》의 전속모델로 활약하였다. 2008년에는 김양을 스카우트하여 자신의 후계자로 선정하여 후배 양성에도 적극적인 노력을 하였고, 그 해엔 남진의 뒤를 이어 제2대 대한가수협회 회장에 취임했다.[4]3. 학력
4. 경력
5. 앨범
- 1집 ~ 15집 정보는 중복되므로 표 하단에 별도 표기하지 않고, 표에 통합한다.
5. 1. 콜라보레이션
코요태와 함께 2005년 2월에 "송대관 하이라이트 앨범 - 사랑하기 죄송해"를 발매했다.6. 출연작
7. 홍보대사
8. 수상 내역
제5회 대평가요대상 대상
제19회 대한민국 문화연예대상 가요부문 가요대상
제23회 KBS 가요대상 최고가수상
제7회 대한민국 연예예술대상 전통가요 가수상
제10회 서울가요대상 본상
MBC 10대 가수가요제 최고 가수상
일간스포츠 골든디스크 10대 가수상
제26회 한국방송대상 가수상
제13회 KBS 가요대상 올해의 가수상
제4회 고복수 가요제 최우수 남자 가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