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창 (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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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송창은 전한 시대의 인물로, 고제의 거병을 따라 도위가 되었고, 문제 옹립에 기여하여 열후에 봉해졌으나, 경제 때 작위가 박탈되어 관내후로 격하되었다. 그는 고제가 산동에서 거병했을 때 이를 따랐으며, 문제 즉위 과정에서 대나라로 사람을 보내 황제가 될 것을 청원했을 때 장무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문제에게 갈 것을 주장하여 공을 세웠다. 이후 위장군을 역임했으나, 죄가 있어 작위가 박탈되었다.
송창은 고제 유방을 따라 집사(家吏)로 종사했고, 도위가 되어 형양으로 종군하여 식읍을 받았다. 이후 대왕 중위가 되어 대왕 유항(문제)을 섬겼다.
2. 생애
고후 8년(기원전 180년), 승상 진평, 태위 주발 등이 여씨를 타도하고 유항을 황제로 옹립하려 했다. 대신들이 대왕을 맞이하러 가자, 대나라 낭중령 장무 등은 의심하여 병을 칭하고 장안에 가지 않고 사태를 지켜보라고 했다. 그러나 송창은 대왕에게 의심하지 말고 갈 것을 권했다. 대왕은 결정을 못했지만, 점괘 결과 "천자가 된다"는 결과를 얻었다. 대왕은 외척 박소를 장안에 보내 주발과 면회하게 했고, 박소는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보고했다. 대왕은 송창에게 "네 말대로였다"고 말하며 송창을 같은 수레에 태우고, 장무 등 6명을 동행시켜 장안으로 갔다.
장안에 바로 들어가지 않고 송창을 먼저 보냈는데, 승상 이하 모두가 마중을 나와 대왕도 장안으로 들어갔다. 태위 주발이 "사람들을 물리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송창은 "공개적인 일이라면 공개적으로 말하면 됩니다. 사적인 일이라면 왕에게 사적인 일이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대왕은 천자의 새를 헌상받아 황제에 즉위했다.
즉위한 문제(대왕)는 미앙궁에 들어가 밤에 송창을 위장군으로 임명하고 남북군을 장악하게 했다. 문제 전원년(기원전 179년), 문제는 즉위 공적을 인정하여 송창을 열후(장무후)에 봉했다.[2]
경제 중4년(기원전 146년), 죄를 지어 작위가 박탈되고 관내후로 강등되었다.[2]
2. 1. 초기 생애 및 전한 건국 기여
고제가 산동(山東)에서 거병하였을 때 이를 따랐고, 도위가 되어 형양(滎陽)을 지키고 식읍을 받았다. 유항이 대왕에 책봉되었을 때 중위가 되어 함께 대나라로 갔다.[2]
고후 8년(기원전 180년), 고후가 죽자 주발 및 유양을 비롯한 공경·황족들이 여씨 세력을 축출하였다. 본래 유양이 황제가 되기로 하였으나 그의 외가 사(駟)씨가 세도를 부릴 것을 걱정하여 유항으로 바꾸었고, 곧 대나라에 사람을 보내 황제가 될 것을 청원하였다. 대나라의 낭중령 장무 등은 이를 의심하여 유항에게 가지 말라고 아뢰었으나, 오직 송창만은 반대로 주장하였다.
문제는 장무 등 관료 여섯 명을 시켜 장안에 직접 가 보게 하였고, 과연 조정에 변고가 일어난 것을 알게 되어 황제로 즉위하였다(문제).[2] 송창은 고조 유방을 따라 집사(家吏)로 종사했고, 도위가 되어 형양으로 종군하여 식읍을 받았다. 이후 대왕 중위가 되어, 대왕 유항(문제)을 섬겼다.
같은 해 승상 진평, 태위 주발 등이 여씨를 타도하고, 그들은 유항을 황제로 옹립하려 했다(여씨의 난). 대신들이 대왕을 맞이하러 가게 하자, 대에서는 낭중령 장무 등 신하들이 의심하여, 병을 칭하고 장안에 가지 않고 사태를 지켜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송창은 대왕에게 의심하지 말고 갈 것을 권했다. 대왕은 결정을 내리지 못했지만, 점을 쳐본 결과 "천자가 된다"는 결과를 얻었다. 그래서 대왕은 외척 박소를 장안에 보내 주발과 면회하게 했다. 박소는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보고했고, 이에 대왕은 송창에게 "네 말대로였다"고 말하며 송창을 같은 수레에 태우고, 장무 등 6명을 동행시켜 장안으로 갔다.[2]
그러나 장안에 바로 들어가지 않고, 송창을 먼저 보냈는데, 승상 이하 모두가 마중을 나와서 대왕도 장안으로 들어갔다. 태위 주발이 대왕에게 "사람들을 물리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송창은 "공개적인 일이라면 공개적으로 말하면 됩니다. 사적인 일이라면 왕에게 사적인 일이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대왕은 천자의 새를 헌상받아 황제에 즉위했다.[2]
2. 2. 문제 옹립과 장무후 책봉
고후 8년(기원전 180년), 고황후가 죽자 주발, 유양을 비롯한 공경·황족들이 여씨 세력을 축출하였다. 본래 유양을 황제로 옹립하려 하였으나, 그의 외가 사(駟)씨가 세도를 부릴 것을 걱정하여 유항으로 바꾸었고, 곧 대나라에 사람을 보내 황제가 될 것을 청하였다. 대나라의 낭중령 장무 등은 이를 의심하여 유항에게 가지 말라고 아뢰었으나, 송창만은 반대로 주장하였다. 문제는 장무 등 관료 여섯 명을 시켜 장안에 직접 가 보게 하였고, 과연 조정에 변고가 일어난 것을 알게 되어 황제로 즉위하였다(문제). 송창은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장무후(壯武侯)에 봉해졌다.[2]
2. 3. 작위 박탈과 관내후 강등
경제 중4년(기원전 146년), 죄를 지어 작위가 박탈되고 관내후로 강등되었다.[2]
3. 출전
참조
[1]
서적
史記索隠
会稽典録
[2]
서적
漢書
文帝紀
[3]
서적
한서 문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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