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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요시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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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미요시 대사는 오사카부 오사카시 스미요시구에 위치한 신사로, 延喜式(연희식) 신명장에 "주지좌신사(住吉坐神社)"로 기록되어 있다. 211년에 창건되었으며, 스미요시 삼신(住吉三神)과 신공황후(神功皇后)를 제신으로 모신다. 본전은 스미요시즈쿠리 양식으로,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해상 교통의 수호신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1871년부터 1946년까지 관폐대사로 지정되었다. 매년 다양한 연간 행사가 열리며, 특히 '주지사제'는 오사카 3대 여름 축제 중 하나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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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요시 대사 - [지명]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이름스미요시 대사
로마자 표기Sumiyoshi-taisha
한자 표기住吉大社
위치오사카부 오사카시 스미요시구 스미요시 2-9-89
종교신토
창건자다모미노 스쿠네
창건 연도211년 (전승)
건축 양식스미요시즈쿠리
웹사이트스미요시 대사 공식 웹사이트
제신
주신소코쓰쓰노 오노미코토
나카쓰쓰노 오노미코토
우와쓰쓰노 오노미코토
오키나가타라시히메노미코토
신사 격
사격식내사 (명신대사 4좌)
셋쓰국 이치노미야
22사 (중7사)
구 관폐대사
별표신사
주요 제례 및 행사
예제7월 31일 (스미요시 마쓰리)
주요 행사1월 4일: 답가신사
1월 7일: 백마신사
1월 13일: 어결진신사
4월 3일: 송묘신사
5월 첫 묘의 날: 묘지엽신사
6월 14일: 어전식신사
7월 셋째 주 월/화요일: 신여세신사
7월 31일: 하월대해신사
10월 17일: 보지시신사
관련 정보
영장가와치아스카 고사지 영장 객번, 신불영장순례의 길 제42번 (오사카 제1번)
본전
건축 양식스미요시즈쿠리 4동
이미지
스미요시 대사 경내 (왼쪽 뒤에서 오른쪽으로 제1, 제2, 제3, 제4 본궁)

2. 사명(社名)

연희식 신명장에는 "주지좌신사(住吉坐神社)"로 기록되어 있으며, 다른 고대 사료에는 "주지신사(住吉神社)", "주지사(住吉社)" 등으로 나타난다. 또한 『주지대사신대기』에는 "주지대사(住吉大社)", "주지대명신대사(住吉大明神大社)" 등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중세에는 주로 "주지대신궁(住吉大神宮)"으로 불렸다. 메이지유신 이후에는 사호를 "주지신사(住吉神社)"로 정했으나, 1946년에 『주지대사신대기』의 기록에 따라 "주지대사(住吉大社)"로 변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주지(住吉)"의 발음은 현재는 "'''스미요시'''"이지만, 원래는 "'''스미노에'''(스미에)"였다. 예를 들어 나라 시대 이전에 편찬된 『만엽집』에는 "주지(住吉)" 외에도 "주에(住江)", "묵강(墨江)", "청강(清江)", "스미노에(須美乃江)" 등의 표기가 보이지만, 헤이안 시대에 편찬된 『와명초』에는 이미 "수삼여지(須三與之)"로 기록되어 있다. 본고 이세나가의 『고사기전』 이후의 정설에서는, 원래의 "스미노에"에 여러 표기가 사용되면서 "주지(住吉)"가 일반화되었고, 그 발음이 변하여 헤이안 시대부터 "스미요시"라는 호칭이 일반화되었다고 해석된다. 하지만 과도기인 헤이안 시대에는 두 가지 표기가 혼용되기도 했고, 가마쿠라로서의 취급에서는 "스미노에"는 강을, "스미요시"는 사(社)·포(浦)·리(里)·함(浜)을 가리킨다고 가학서에는 나와 있다.

원래의 발음인 "스미노에"의 어의에 대해, 『세쓰쿠니풍토기』 일문[12]에서는, 신공황후가 "마사 스미요시 스미요시쿠니(まさに住み吉き住吉国)"라고 칭찬한 데서 유래한다는 지명 기원 설화를 싣고 있다.[13] 한편 역사 고증 학적으로는 "맑은 만(灣)=澄み江"을 원의로 하는 설이 유력시되고 있다. 실제로 주지대사 남쪽의 호소에가와(호소이가와) 구 하구에는 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14] 고대에 그곳에 정비된 주지쓰(묵강쓰)는 난바쓰와 함께 외교상의 요항으로 기능했고, 주지대사의 성립과 발전에 깊이 관련되었다고 생각된다.

3. 제신(祭神)

스미요시 대사(住吉大社)는 신공황후(神功皇后) 11년(211년)에 다모미노 스쿠네(田道間守)에 의해 창건되었다.[6] 그는 그 지역의 유력 가문 출신으로, 신공황후가 고기시치도(五畿七道) 해안을 방문했을 때 황후로부터 오와리 씨(尾張氏)의 성을 받았다. 그는 아마테라스(天照)의 신탁과 세 명의 스미요시 신(住吉神)의 계시에 따라 스미요시 산진(住吉三神)을 봉안하라는 명을 받았다.[7] 이후, 신공황후 자신도 스미요시 대사에 봉안되었다.

현재 스미요시 대사의 제신(祭神)은 다음 네 분이며, 네 개의 본궁에 한 분씩 모셔져 있다.


  • 제1본궁: '''저통남명'''(底筒男命)
  • 제2본궁: '''중통남명'''(中筒男命)
  • 제3본궁: '''표통남명'''(表筒男命)
  • 제4본궁: '''신공황후''' - 제14대 주아이 천황의 황후.


저통남명, 중통남명, 표통남명 세 신은 "'''스미요시 대신'''(住吉大神)"이라 총칭되며, "스미에 대신(住江大神)", "스미노에노미마에노대신(墨江三前の大神)"이라고도 불린다. 연장 5년(927년)에 성립된 『연희식』신명장[33]에서는 신을 네 자리로 기록하고 있다.



주지삼신(筒男三神)은 『고사기』·『일본서기』에서 이자나기(伊奘諾尊)가 미소기를 할 때 면진삼신(海三神)과 함께 탄생했다고 한다.[15] 신공황후의 삼한정벌 성공에도 기여했다고 전해진다.[16][24] 특히 『일본서기』에서는 주지신이 황후의 조선으로부터의 귀환 시에도 신탁을 내렸다고 하며, 아라미타마를 모시는 사당이 아나몬 야마다무라(穴門山田邑)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주지삼신은 7-8세기에는 천신(あまつかみ)의 랭크에 위치하고 있었으며,[17][18] “츠츠노오”의 의미는 항구의 신, 별(특히 오리온자리 중앙의 세 별) 등 여러 설이 제기된다.

원래 제신은 주지삼신의 3좌였으며, 4좌째(제4궁)는 후대에 합사된 것으로 여겨진다.[13] 제4궁은 무녀가 제사 지내는 신으로 발전하여 주지삼신의 아내 신으로서 형성되었고, 이후 신공황후 전설과 함께 제4궁에 신공황후의 신격이 부여되었다는 설이 있다.

4. 역사

스미요시 대사는 헤이안 시대 초기에 궁정의 보호를 받았다.[2] 965년, 무라카미 천황은 중요한 사건을 일본의 수호신에게 보고하도록 칙사(''헤이하쿠'')를 파견할 것을 명령했다. 이러한 칙사는 처음에는 스미요시 신사를 포함한 16개의 신사에 보내졌다.[3] 옛 세쓰 주의 총본산 신사(이치노미야(一宮))로 지정되었다.[4]

1871년부터 1946년까지 스미요시 대사는 공식적으로 관폐대사(官幣大社, ''Kanpei-taisha'')로 지정되어 정부 지원 신사 중 최고위급에 속했다.[5] 야마토 왕권의 외교와 항해와 관련이 있으며, 중국에 파견된 일본 사절단을 보호하는 신사이다. 쓰모리 씨(津守氏)는 최고 사제로서 이 사절단의 배에도 승선했다. 사절단은 스미요시 대사 남쪽에 위치한 호소에가와(細江川, 고대에는 스미노에노 호소에(住吉の細江)로 알려짐) 강변의 항구인 스미노에노쓰(住吉津)에서 출발했다. 스미노에노쓰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국제 항구로, 닌토쿠 천황(仁徳天皇)에 의해 개항되었다. 이는 일본으로 들어오는 실크로드의 입구였다.

일본서기』 신공황후기의 전설적인 기사를 제외하면, 확실한 사료에 근거한 문헌상 최초의 기록은 『일본서기』 주조 원년(686년)조[28]에 나온다. 기이국 국현신(日前神宮・國懸神宮)·아스카 사사(飛鳥四社)·스미요시 대신(住吉大神)에 폐백을 봉납했다는 기사이다. 지토 천황 6년(692년) 5월·12월조[29][30]에도 이세(伊勢)·야마토 신사(大和神社)·스미요시(住吉)·기이(紀伊) 대신의 4곳에 대한 봉폐(藤原京 천도에 따른 봉폐) 기사, 이세(伊勢)·스미요시(住吉)·기이(紀伊)·야마토(大倭)·우나스(菟名足)의 5곳 신사에 대한 봉폐(신라 진납 조물의 봉납) 기사가 보인다.

스미요시 신사는 遣唐使를 수호하는 신으로 여겨졌으며, 『만엽집[20]의 천평 5년(733년)의 노래나 엔닌(円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의 기사가 알려져 있다. 신계(神階)는 연력 3년(784년) 6월[40]에 정삼위훈삼등, 같은 해 12월[41]에 종이위, 다이도 원년(806년)[42]에 종일위로 각각 승서되었다. 덴케이 2년(939년) 이전에는 정일위였으며, 이때 사지가 외종오위하에 서임되었다.

헤이안 시대 이후에는 기우신으로서도 숭배되었으며, 조와 3~9년(836-842)[31]·조관 원년(859년)[32] 등에 기우 기원의 봉폐 기사가 보인다.

엔쵸 5년(927년)에 성립된 『연희식』 신명장[33]에는 셋쓰국(摂津国) 스미요시군(住吉郡)에 "스미요시자 신사 사좌 병명신대 월차상상신상(住吉坐神社四座 並名神大 月次相嘗新嘗)"으로 4좌가 명신대사에 열거될 뿐만 아니라, 조정의 월차제·상상제·신상제에서는 폐백에 참여하는 내용이 규정되어 있다. 또한 『연희식』 임시제 중 기우신제조[34]에는 기우신제 팔십오좌 중에 스미요시 신사 사좌가 보이며, 명신제조[35]에는 명신제 이백팔십오좌 중에 스미요시 신사 사좌가, 동궁팔십도제조[36]에는 팔십도제에 제사 지내는 신에 스미요시신 사좌가 보인다.

헤이안 시대에는 와카의 신으로서도 신앙되었으며, 『겐지 모노가타리』를 비롯한 많은 이야기에 그려지고, 귀족들의 참배도 자주 있었다. 인정기에는 구마노 순례 도중 상황·귀족이 당사에 참배하고 있다. 초력 3년(1039년)경에는 이십이사의 하나로 위치 지정되었고, 그 후 셋쓰국 내에서는 일궁으로 위치 지정되었다.[37]

지쇼 5년(1181년) 8월, 난역어기(亂逆御祈)를 위해 고시라카와인(後白河院)으로부터 쇼엔(荘園)의 기진에 참여하는 신사가 선정되었을 때, 호겐(保元)의 예의 이세 신궁(伊勢神宮), 이시키미즈 하치만궁(石清水八幡宮), 가모 신사(賀茂神社), 히요시(日吉)에 더해, 가스가샤(春日社)와 스미요시샤도 선정되었다.

무라카미 천황은 965년에 중요한 사건을 일본의 수호신에게 보고하도록 칙사를 파견할 것을 명령했는데, 이러한 칙사(''헤이하쿠'')는 처음에는 스미요시 신사를 포함한 16개의 신사에 보내졌다.[3] 스미요시 신사는 옛 세쓰 주의 총본산 신사(이치노미야(一宮))로 지정되었다.[4]

가마쿠라 시대에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카지와라 카게토키를 사자로 삼아 스미요시 신사에 봉헌하고 신마를 봉납하였으며,겐큐 6년(1195년)[38] 고문서에는 이 무렵 신불습합이 진행된 모습도 보인다. 원의 침입 당시에는 에이존이 여러 차례 이 신사에서 적의 항복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렸다.

신주(神主)인 쓰모리 씨는 겐포 3년(1215년) 이후 가마쿠라 시대부터 남북조 시대에 걸쳐 셋쓰노카미(摂津守)에 보임되어 셋쓰국(摂津国)에서 정치적 세력을 강화하였다. 다이가쿠지토의 상북면에도 임명되어 다이가쿠지토・남조 세력과 정치적 관계를 강화하였고, 그 관계로 남조의 고무라카미 천황・쵸케이 천황이 일시적으로 스미요시 신사에 행궁을 두었다(스미요시 행궁).

[[파일:Emperor Go-Murakami.jpg|130px|thumb|{{작은글|남조 제97대 천황. 스미요시 행궁에서 승하.}]}]

무로마치 시대에도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비롯한 무로마치 막부 쇼군으로부터 존경받았으며, 제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신전 건립을 호소카와 가쓰모토에게 명령하였다. 그러나 신사의 세력은 쇠퇴하여, 전국 시대에는 화재로 여러 차례 소실되었고, 신전의 시키넨조타이(式年造替)도 지연되었다.

무라카미 천황은 중요한 사건을 일본의 수호신에게 보고하도록 칙사를 파견하는 헤이하쿠를 스미요시 신사를 포함한 16개의 신사에 보냈다.[3] 스미요시 신사는 옛 세쓰 주의 총본산 신사(이치노미야(一宮))로 지정되었다.[4] 1871년부터 1946년까지 스미요시 대사는 공식적으로 관폐대사(官幣大社, ''Kanpei-taisha'')로 지정되어 정부 지원 신사 중 최고위급에 속했다.[5]

분로쿠 3년(1594년)에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검지에 의해 주인지로서 스미요시 향내 2,060석이 정해졌고, 게이초 11년(1606년)부터 다음 해 게이초 12년(1607년)에 걸쳐 토요토미 히데요리에 의한 사전과 경내의 재흥이 이루어졌다.

에도 시대에는 에도 막부로부터 존경받아, 게이초 19년(1614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금제를 얻은 외에, 겐나 원년(1615년)에 계속해서 주인지로서 스미요시 향내 2,060석이 정해졌다. 중건도 여러 번 실시되어, 분카 7년(1810년)에는 현재의 본궁 사전이 조영되었다. 사이국(西國)의 다이묘도 참근교대 때에는 스미요시샤에 참례했을 뿐만 아니라, 마쓰오 바쇼(겐로쿠 7년(1694년) 참례)・이하라 사이카쿠(정쿄 원년(1684년) 참례)가 참례하여 노래를 지은 것과, 오타 난보・타키자와 마코토 등의 참례도 알려져 있다. 서민으로부터도 신앙을 모아, 그 모습은 전국 각지로부터 봉납된 다수의 석등롱에 엿볼 수 있다.

이 신사는 헤이안 시대 초기에 궁정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2] 965년, 무라카미 천황은 중요한 사건을 일본의 수호신에게 보고하도록 칙사(''헤이하쿠'')를 파견할 것을 명령했다. 이러한 칙사는 처음에는 스미요시 신사를 포함한 16개의 신사에 보내졌다.[3]

스미요시 신사는 옛 세쓰 주의 총본산 신사(이치노미야(一宮))로 지정되었다.[4]

1871년부터 1946년까지 스미요시 대사는 공식적으로 관폐대사(官幣大社, ''Kanpei-taisha'')로 지정되어 정부 지원 신사 중 최고위급에 속했다.[5]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사호(社号)를 "스미요시 신사(住吉神社)"로 정하고, 1871년(메이지(明治) 4년)에는 근대 사격 제도(近代社格制度)에서 관폐대사(官幣大社)에 봉해졌다. 전후인 1946년(쇼와(昭和) 21년)에 사호를 "스미요시 타이샤(住吉大社)"로 개칭하였다. 1952년(쇼와(昭和) 27년)에 신사본청(神社本庁)의 별표신사(別表神社)에 추가되었다.

2006년(헤이세이(平成) 18년)에는 경내역(스미요시 타이샤 경내 유적(住吉大社境内遺跡))에서 본격적인 발굴 조사가 처음으로 실시되었고, 조사지가 된 구 신궁사(神宮寺) 터 한쪽에서는 고분 시대 말기-아스카 시대(飛鳥時代)경과 중세경의 2시기를 중심으로 하는 다수의 유물이 출토되었다.[39]

4. 1. 창건

스미요시 대사(住吉大社)는 신공황후(神功皇后) 11년(211년)에 다모미노 스쿠네(田道間守)에 의해 창건되었다.[6] 그는 그 지역의 유력 가문 출신으로, 신공황후가 고기시치도(五畿七道)(현재 오사카부 사카이시의 시치도(七道)) 해안을 방문했을 때 황후로부터 오와리 씨(尾張氏)의 성을 받았다. 동시에 그는 아마테라스의 신탁과 세 명의 스미요시 신(住吉神)의 계시에 따라 스미요시 산진(住吉三神)을 봉안하라는 명을 받았다.[7] 이후, 신공황후 자신도 스미요시 대사에 봉안되었다. 오진 천황 때부터 스미요시 대사의 궁사(宮司) 직을 세습해 온 츠모리 씨(津守氏)[8]는 다모미노 스쿠네의 아들인 츠모리노 토요아다(津守豊安) 또는 츠모리노 토요노고단(津守豊蹈耳)의 후손이다.

일본서기 신공황후 섭정전기에 따르면, 주지삼신(통남삼신)은 신공황후의 신라 정벌에서 황후에게 탁선을 내리고, 그 정벌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신공황후 섭정 원년[24], 황후는 야마토로 귀환하는 중에 사슴坂황자·닌쿠마황자의 반란을 당하고, 더욱 난바로 향했지만 배가 나아가지 않아, 무고수문(무고의 미나토: 효고현 니시노미야시의 무코가와 하구 동안에 비정)에서 점을 치자 주지삼신이 삼신의 와다마를 “대진누중창지장협(おおつのぬなくらのながお)”에 섬기도록 탁선을 내렸다. 거기서 황후가 신의 가르침대로 진제를 하자, 무사히 바다를 건널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25]

통설에서는 이 “대진누중창지장협”이 주지대사의 땅에 비정되고[25], 이 기사를 가지고 주지대사의 trấn좌로 여긴다. 천황편년기에서는 신공황후 섭정 11년 신묘로 하고 있으며, 현재의 주지대사에서도 이 해를 가지고 진제로 한다.[26]

주지대사신대기에 따르면, 주지삼신은 “누중려장옥타메데오(ぬなくらのながおかのたまでのお)”에 사는 것을 원했기에, 신공황후는 그 땅에 살고 있던 테사시타리(田裳見宿禰)를 신주로 삼아 섬기게 했다고 한다. 이 테사시타리의 후예가 주지대사의 제사를 맡은 츠모리련(츠모리씨) 일족이라고 한다. 그 밖에 세쓰국풍토기일문[12]에서는 주지사의 땅은 “누명려지장옥지전(ぬなくらのながおかのさき)”으로 보인다[13].

역사 고증상 신공황후의 전설적 기사는 별개로 하더라도, 실제로도 상당히 이른 시기의 창사라고 생각하는 설도 있다. 야마토 왕권의 외항 수호신으로 발전했다고 생각하는 설이 제기되지만, 그 야마토 왕권의 숭경을 배경으로 신공황후 전설과 주지신과가 결부되었다고 하는 설이 있다.

이 신사는 헤이안 시대 초기에 궁정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2] 965년, 무라카미 천황은 중요한 사건을 일본의 수호신에게 보고하도록 칙사를 파견할 것을 명령했다. 이러한 칙사(''헤이하쿠'')는 처음에는 스미요시 신사를 포함한 16개의 신사에 보내졌다.[3] 스미요시 신사는 옛 세쓰 주의 총본산 신사(이치노미야(一宮))로 지정되었다.[4] 1871년부터 1946년까지 스미요시 대사는 공식적으로 관폐대사(官幣大社)로 지정되어 정부 지원 신사 중 최고위급에 속했다.[5]

4. 2. 고대

스미요시 대사는 헤이안 시대 초기에 궁정의 보호를 받았다.[2] 965년, 무라카미 천황은 중요한 사건을 일본의 수호신에게 보고하도록 칙사(''헤이하쿠'')를 파견할 것을 명령했다. 이러한 칙사는 처음에는 스미요시 신사를 포함한 16개의 신사에 보내졌다.[3] 옛 세쓰 주의 총본산 신사(이치노미야(一宮))로 지정되었다.[4]

1871년부터 1946년까지 스미요시 대사는 공식적으로 관폐대사(官幣大社, ''Kanpei-taisha'')로 지정되어 정부 지원 신사 중 최고위급에 속했다.[5] 야마토 왕권의 외교와 항해와 관련이 있으며, 중국에 파견된 일본 사절단을 보호하는 신사이다. 쓰모리 씨(津守氏)는 최고 사제로서 이 사절단의 배에도 승선했다. 사절단은 스미요시 대사 남쪽에 위치한 호소에가와(細江川, 고대에는 스미노에노 호소에(住吉の細江)로 알려짐) 강변의 항구인 스미노에노쓰(住吉津)에서 출발했다. 스미노에노쓰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국제 항구로, 닌토쿠 천황(仁徳天皇)에 의해 개항되었다. 이는 일본으로 들어오는 실크로드의 입구였다.

일본서기』 신공황후기의 전설적인 기사를 제외하면, 확실한 사료에 근거한 문헌상 최초의 기록은 『일본서기』 주조 원년(686년)조[28]에 나온다. 기이국 국현신(日前神宮・國懸神宮)·아스카 사사(飛鳥四社)·스미요시 대신(住吉大神)에 폐백을 봉납했다는 기사이다. 지토 천황 6년(692년) 5월·12월조[29][30]에도 이세(伊勢)·야마토 신사(大和神社)·스미요시(住吉)·기이(紀伊) 대신의 4곳에 대한 봉폐(藤原京 천도에 따른 봉폐) 기사, 이세(伊勢)·스미요시(住吉)·기이(紀伊)·야마토(大倭)·우나스(菟名足)의 5곳 신사에 대한 봉폐(신라 진납 조물의 봉납) 기사가 보인다.

스미요시 신사는 遣唐使를 수호하는 신으로 여겨졌으며, 『만엽집[20]의 천평 5년(733년)의 노래나 엔닌(円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의 기사가 알려져 있다. 신계(神階)는 연력 3년(784년) 6월[40]에 정삼위훈삼등, 같은 해 12월[41]에 종이위, 다이도 원년(806년)[42]에 종일위로 각각 승서되었다. 덴케이 2년(939년) 이전에는 정일위였으며, 이때 사지가 외종오위하에 서임되었다.

헤이안 시대 이후에는 기우신으로서도 숭배되었으며, 조와 3~9년(836-842)[31]·조관 원년(859년)[32] 등에 기우 기원의 봉폐 기사가 보인다.

엔쵸 5년(927년)에 성립된 『연희식』 신명장[33]에는 셋쓰국(摂津国) 스미요시군(住吉郡)에 "스미요시자 신사 사좌 병명신대 월차상상신상(住吉坐神社四座 並名神大 月次相嘗新嘗)"으로 4좌가 명신대사에 열거될 뿐만 아니라, 조정의 월차제·상상제·신상제에서는 폐백에 참여하는 내용이 규정되어 있다. 또한 『연희식』 임시제 중 기우신제조[34]에는 기우신제 팔십오좌 중에 스미요시 신사 사좌가 보이며, 명신제조[35]에는 명신제 이백팔십오좌 중에 스미요시 신사 사좌가, 동궁팔십도제조[36]에는 팔십도제에 제사 지내는 신에 스미요시신 사좌가 보인다.

헤이안 시대에는 와카의 신으로서도 신앙되었으며, 『겐지 모노가타리』를 비롯한 많은 이야기에 그려지고, 귀족들의 참배도 자주 있었다. 인정기에는 구마노 순례 도중 상황·귀족이 당사에 참배하고 있다. 초력 3년(1039년)경에는 이십이사의 하나로 위치 지정되었고, 그 후 셋쓰국 내에서는 일궁으로 위치 지정되었다.[37]

지쇼 5년(1181년) 8월, 난역어기(亂逆御祈)를 위해 고시라카와인(後白河院)으로부터 쇼엔(荘園)의 기진에 참여하는 신사가 선정되었을 때, 호겐(保元)의 예의 이세 신궁(伊勢神宮), 이시키미즈 하치만궁(石清水八幡宮), 가모 신사(賀茂神社), 히요시(日吉)에 더해, 가스가샤(春日社)와 스미요시샤도 선정되었다.

4. 3. 중세

무라카미 천황은 965년에 중요한 사건을 일본의 수호신에게 보고하도록 칙사를 파견할 것을 명령했는데, 이러한 칙사(''헤이하쿠'')는 처음에는 스미요시 신사를 포함한 16개의 신사에 보내졌다.[3] 스미요시 신사는 옛 세쓰 주의 총본산 신사(이치노미야(一宮))로 지정되었다.[4]

가마쿠라 시대에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카지와라 카게토키를 사자로 삼아 스미요시 신사에 봉헌하고 신마를 봉납하였으며,겐큐 6년(1195년)[38] 고문서에는 이 무렵 신불습합이 진행된 모습도 보인다. 원의 침입 당시에는 에이존이 여러 차례 이 신사에서 적의 항복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렸다.

신주(神主)인 쓰모리 씨는 겐포 3년(1215년) 이후 가마쿠라 시대부터 남북조 시대에 걸쳐 셋쓰노카미(摂津守)에 보임되어 셋쓰국(摂津国)에서 정치적 세력을 강화하였다. 다이가쿠지토의 상북면에도 임명되어 다이가쿠지토・남조 세력과 정치적 관계를 강화하였고, 그 관계로 남조의 고무라카미 천황・쵸케이 천황이 일시적으로 스미요시 신사에 행궁을 두었다(스미요시 행궁).

[[파일:Emperor Go-Murakami.jpg|130px|thumb|{{작은글|남조 제97대 천황. 스미요시 행궁에서 승하.}]}]

무로마치 시대에도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비롯한 무로마치 막부 쇼군으로부터 존경받았으며, 제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신전 건립을 호소카와 가쓰모토에게 명령하였다. 그러나 신사의 세력은 쇠퇴하여, 전국 시대에는 화재로 여러 차례 소실되었고, 신전의 시키넨조타이(式年造替)도 지연되었다.

4. 4. 근세

무라카미 천황은 중요한 사건을 일본의 수호신에게 보고하도록 칙사를 파견하는 헤이하쿠를 스미요시 신사를 포함한 16개의 신사에 보냈다.[3] 스미요시 신사는 옛 세쓰 주의 총본산 신사(이치노미야(一宮))로 지정되었다.[4] 1871년부터 1946년까지 스미요시 대사는 공식적으로 관폐대사(官幣大社, ''Kanpei-taisha'')로 지정되어 정부 지원 신사 중 최고위급에 속했다.[5]

분로쿠 3년(1594년)에는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검지에 의해 주인지로서 스미요시 향내 2,060석이 정해졌고, 게이초 11년(1606년)부터 다음 해 게이초 12년(1607년)에 걸쳐 토요토미 히데요리에 의한 사전과 경내의 재흥이 이루어졌다.

에도 시대에는 에도 막부로부터 존경받아, 게이초 19년(1614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금제를 얻은 외에, 겐나 원년(1615년)에 계속해서 주인지로서 스미요시 향내 2,060석이 정해졌다. 중건도 여러 번 실시되어, 분카 7년(1810년)에는 현재의 본궁 사전이 조영되었다. 사이국(西國)의 다이묘도 참근교대 때에는 스미요시샤에 참례했을 뿐만 아니라, 마쓰오 바쇼(겐로쿠 7년(1694년) 참례)・이하라 사이카쿠(정쿄 원년(1684년) 참례)가 참례하여 노래를 지은 것과, 오타 난보・타키자와 마코토 등의 참례도 알려져 있다. 서민으로부터도 신앙을 모아, 그 모습은 전국 각지로부터 봉납된 다수의 석등롱에 엿볼 수 있다.

4. 5. 근대 이후

이 신사는 헤이안 시대 초기에 궁정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2] 965년, 무라카미 천황은 중요한 사건을 일본의 수호신에게 보고하도록 칙사(''헤이하쿠'')를 파견할 것을 명령했다. 이러한 칙사는 처음에는 스미요시 신사를 포함한 16개의 신사에 보내졌다.[3]

스미요시 신사는 옛 세쓰 주의 총본산 신사(이치노미야(一宮))로 지정되었다.[4]

1871년부터 1946년까지 스미요시 대사는 공식적으로 관폐대사(官幣大社, ''Kanpei-taisha'')로 지정되어 정부 지원 신사 중 최고위급에 속했다.[5]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사호(社号)를 "스미요시 신사(住吉神社)"로 정하고, 1871년(메이지(明治) 4년)에는 근대 사격 제도(近代社格制度)에서 관폐대사(官幣大社)에 봉해졌다. 전후인 1946년(쇼와(昭和) 21년)에 사호를 "스미요시 타이샤(住吉大社)"로 개칭하였다. 1952년(쇼와(昭和) 27년)에 신사본청(神社本庁)의 별표신사(別表神社)에 추가되었다.

2006년(헤이세이(平成) 18년)에는 경내역(스미요시 타이샤 경내 유적(住吉大社境内遺跡))에서 본격적인 발굴 조사가 처음으로 실시되었고, 조사지가 된 구 신궁사(神宮寺) 터 한쪽에서는 고분 시대 말기-아스카 시대(飛鳥時代)경과 중세경의 2시기를 중심으로 하는 다수의 유물이 출토되었다.[39]

5. 신앙

스미요시 대사(住吉大社)는 하치만의 종가 신사로 여겨지는데, 그 이유는 이 신사가 오진 천황으로 신격화된 진구 황후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신사는 미나모토 씨 가와치(河内) 혈통의 수호신이기도 하다. 또한 하치만은 육상의 전쟁의 신이고, 스미요시 신들은 해상의 전쟁의 신이다. 후에 스미요시 대사는 와카(和歌)의 세 신 중 하나가 되었다.

스미요시 대사는 해상 교통의 수호신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24]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따르면, 스미요시 삼신(住吉三神)은 "왕래하는 배를 보살피겠다"고 말하며 항해 수호신으로 여겨졌다.[25]

츠쿠시 오오가미(筑紫大神)인 스미요시 삼신(住吉三神)은 원래 나노쓰(那の津)(현 하카타 만)의 지주신이자 수호신이었다. 삼한정벌(三韓征伐) 이후 분사(分祀)되어 아라미타마(荒魂)는 나가토(長門)의 스미요시 신사(住吉神社)에, 니기미타마(和魂)는 스미요시 대사에 봉안되었다. 난바(難波)가 발전하면서 스미요시 대사는 야마토 왕권의 외항 수호신으로 자리 잡았다.

시가우미 신사(志賀海神社)(후쿠오카현(福岡県)후쿠오카시(福岡市))와 무나카타 타이샤(宗像大社)(후쿠오카현(福岡県)무나카타시(宗像市))도 항해 수호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스미요시 대사는 특정 씨족의 우지가미(氏神)가 아니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세 신궁(伊勢神宮), 이시카미 신궁(石上神宮), 가시마 신궁(鹿島神宮)과 함께 고대 왕권의 국가적 기관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스미요시 대사는 율령제(律令制) 하에서도 견당사(遣唐使)와 깊은 관련을 맺었다. 『연희식(延喜式)』 축사[19], 『만엽집(万葉集)]』[20],

5. 1. 항해 수호신

스미요시 대사(住吉大社)는 해상 교통의 수호신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24]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따르면, 스미요시 삼신(住吉三神)은 "왕래하는 배를 보살피겠다"고 말하며 항해 수호신으로 여겨졌다.[25]

츠쿠시 오오가미(筑紫大神)인 스미요시 삼신(住吉三神)은 원래 나노쓰(那の津)(현 하카타 만)의 지주신이자 수호신이었다. 삼한정벌(三韓征伐) 이후 분사(分祀)되어 아라미타마(荒魂)는 나가토(長門)의 스미요시 신사(住吉神社)에, 니기미타마(和魂)는 스미요시 대사에 봉안되었다. 난바(難波)가 발전하면서 스미요시 대사는 야마토 왕권의 외항 수호신으로 자리 잡았다.

시가우미 신사(志賀海神社)(후쿠오카현(福岡県)후쿠오카시(福岡市))와 무나카타 타이샤(宗像大社)(후쿠오카현(福岡県)무나카타시(宗像市))도 항해 수호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스미요시 대사는 특정 씨족의 우지가미(氏神)가 아니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세 신궁(伊勢神宮), 이시카미 신궁(石上神宮), 가시마 신궁(鹿島神宮)과 함께 고대 왕권의 국가적 기관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스미요시 대사는 율령제(律令制) 하에서도 견당사(遣唐使)와 깊은 관련을 맺었다. 『연희식(延喜式)』 축사[19], 『만엽집(万葉集)』[20], 엔닌(円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礼行記)』, 『일본후기(日本後紀)』[42],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実録)』[21] 등에는 견당사와 관련된 스미요시 신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신직(神職)인 쓰모리 씨(津守氏) 중에서도 견당사가 된 인물이 있었다.

에도 시대(江戸時代)에는 회선(廻船) 도매상들이 600기 이상의 석등롱(石燈籠)을 봉납하는 등 항해 수호신으로서의 신앙은 계속 이어졌다.

스미요시 대사는 중국에 파견된 일본 사절단을 보호하는 신사이기도 하다. 쓰모리 씨(津守氏)는 최고 사제로서 사절단의 배에 승선했으며, 사절단은 스미노에노쓰(住吉津)에서 출발했다. 스미노에노쓰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국제 항구로, 닌토쿠 천황(仁徳天皇)에 의해 개항되었으며 실크로드의 입구였다.

5. 2. 정화의 신

스미요시 대사(住吉大社)는 제례의 신과 와카의 신으로도 신앙되었다. 제례의 신으로서의 신앙은 『고사기』·『일본서기』의 이자나기의 제례에 의한 츠츠오미 삼신(筒男三神)의 탄생 신화에 잘 나타나 있으며, 현재도 예제(例祭)인 주짓제에서 훌륭한 의미를 담은 신사(神事)가 거행된다. 난바(難波)의 야소지마제(헤이안 시대~가마쿠라 시대의 천황 즉위 의례 중 하나)에 주짓사(住吉社)가 관여했다는 설도 있다.

와카의 신으로서의 신앙은 헤이안 시대 무렵부터 나타난다. 원래 주짓은 “주짓의 소나무”로 우타마쿠라에서 노래되듯이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헤이안 시대 중엽 당사(遣唐使) 중지로 항해의 신으로서의 성격이 희미해지는 한편, 귀족의 내유(來遊)나 구마노모데(熊野詣) 때 참배를 받아 와카의 신으로서 신앙받게 되었다. 특히 주짓묘진(住吉明神) 외에 타마츠시마묘진(玉津島明神)·가키노모토 히토마로의 3주는 와카의 수호신으로서 “와카 삼신(和歌三神)”이라고 총칭된다(3신의 선정에는 이설도 있다). 쇼타이 원년(898년)[22]에 우다 상황이 주짓사에 참배했을 때 와카를 헌상한 것 외에, 쵸겐 8년(1035년)에는 후지와라 요리미치 저택에서의 우타아이(歌合)에 이긴 공달(公達)이 주짓사에 감사 참배하여 와카를 읊는 등, 헤이안 귀족이 자주 교토에서 참배에 찾아왔다. 주짓사는 『이세 이야기』, 『겐지 이야기』스마 권·아키시 권·미오시루시 권, 『에이카 이야기』전상(殿上)의 꽃놀이 권·소나무의 가지 권 등 많은 이야기에 등장한다. 인정기 이후 구마노모데(熊野詣)에서는 도중에 주짓사에 들러 와카를 헌상하는 예가 있었고, 주짓사 신주(神主)인 츠모리씨(津守氏)로부터도 츠모리 쿠니모토 등의 가인이 나오고 있다. 주짓 관계의 노래에서는, 우타마쿠라(歌枕) “주짓의 소나무” 등 소나무가 많이 등장하는데, 이는 주짓사의 소나무가 신목으로 여겨졌던 것에 유래한다.

그 외, 이시카미 오토마로가 토사국에 유배되었을 때 읊은 『만엽집』[23]에 보이는 것처럼 신이 현세에 현현한다는 현인신 신앙이 있었고(흰 수염의 노인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헤이안 시대부터는 기우(祈雨)의 신으로 하는 신앙도 있고, 또 현지의 지주신으로서 오타에 신지(御田植神事)에 보이는 것 같은 농경의 신으로 하는 신앙도 있다.

5. 3. 와카의 신

스미요시 대사(住吉大社)는 제례의 신이자 와카의 신으로도 신앙되었다. 제례의 신으로서의 신앙은 『고사기』·『일본서기』의 이자나기의 제례를 통한 츠츠오미 삼신(筒男三神)의 탄생 신화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현재도 예제(例祭)인 주짓제에서는 훌륭한 의미를 담은 신사(神事)가 거행된다. 난바(難波)의 야소지마제에 주짓사(住吉社)가 관여했다는 설도 있다.

와카의 신으로서의 신앙은 헤이안 시대부터 나타난다. 원래 주짓은 “주짓의 소나무”로 우타마쿠라에서 노래되듯이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헤이안 시대 중엽 당사(遣唐使) 중지로 항해의 신으로서의 성격이 희미해지는 한편, 귀족의 내유(來遊)나 구마노모데(熊野詣) 때 참배를 받으면서 와카의 신으로 신앙받게 되었다. 특히 주짓묘진(住吉明神) 외에 타마츠시마묘진(玉津島明神)·가키노모토 히토마로의 3주는 와카의 수호신으로서 “와카 삼신(和歌三神)”이라고 불리게 되었다(3신 선정에는 이설도 있다).

쇼타이 원년(898년)[22]에 우다 상황이 주짓사에 참배했을 때 와카를 헌상한 것 외에, 쵸겐 8년(1035년)에는 후지와라 요리미치 저택에서의 우타아이(歌合)에 이긴 공달(公達)이 주짓사에 감사 참배하여 와카를 읊는 등, 헤이안 귀족이 자주 교토에서 참배를 왔다. 또 주짓사는 『이세 이야기』, 『겐지 이야기』스마 권·아키시 권·미오시루시 권, 『에이카 이야기』전상(殿上)의 꽃놀이 권·소나무의 가지 권 등 많은 이야기에 등장한다. 인정기 이후 구마노모데(熊野詣)에서는 도중에 주짓사에 들러 와카를 헌상하는 예가 있었고, 주짓사 신주(神主)인 츠모리씨(津守氏)로부터도 츠모리 쿠니모토 등의 가인이 나오고 있다. 주짓 관계의 노래에서는, 우타마쿠라(歌枕) “주짓의 소나무” 등 소나무가 많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주짓사의 소나무가 신목으로 여겨졌던 것에 유래한다.

그 외에도, 이시카미 오토마로가 토사국에 유배되었을 때 읊은 『만엽집』[23]에 보이는 것처럼 신이 현세에 현현한다는 현인신 신앙이 있었다. 헤이안 시대부터는 기우(祈雨)의 신으로 하는 신앙도 있고, 현지의 지주신으로서 오타에 신지(御田植神事)에 보이는 것 같은 농경의 신으로 하는 신앙도 있다.

6. 경내

경내는 약 99,173m2(3만 평)의 넓이이다. 가미마치 대지 서쪽 끝에 위치하며, 고대에는 바다에 면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메이지 시대에는 서쪽 스미요시타카 등롱 너머로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현재는 본전 구역 서쪽을 정면 참배길로 하고, 남쪽에는 동서 악소・석무대, 동쪽에는 고장・섭말사군, 북쪽에는 구 신궁사 터・섭사 대해신사를 배치하고 있다.[80] 국보인 본전 4동을 비롯한 많은 지정 문화재, 석조물, 연못, 신전, 고목 등이 남아 있어 역사를 전하는 귀중한 장소로서 경내는 오사카시 지정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98]

본궁 뒤편(동쪽)에는 고장 2동이 남북으로 나란히 세워져 있으며, 각각 '''북고장'''과 '''남고장'''이라 불린다. 모두 도요토미 시대 게이초 12년(1607년)에 건립되었으며, 오사카부 내 지정 문화재 창고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형식은 긴 행(桁行) 3칸, 들보 행(梁間) 2칸(북: 5.40m × 4.81m, 남: 4.85m × 4.24m)의 판교창조 고상창고이며, 상부는 팔작지붕이고, 지붕은 본기와이다. 못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지어졌기 때문에 「못 없는 보물 창고」라고도 불린다. 「쓰모리에 세이키(津守家盛記)」에는 고장 4동의 건립으로 보이지만, 다른 2동은 현재 존재하지 않으며, 현재의 2동도 쇼와 45년(1970년)에 경내로 이전한 후 현재 위치에 자리 잡았다. 과거에는 신보가 보관되었지만, 신보는 스미요시 문화관으로 옮겨졌고, 현재는 제구 수장고로 사용되고 있다. 북고장과 남고장 2동은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81][80][55]

경내 남쪽에 위치하여 경내를 구획하는 '''남문'''과 그 양쪽의 악소('''동악소'''・'''서악소''')는 에도 시대 초기 게이초 12년(1607년)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재흥에 의한 건립이다. 모두 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남문은 사각문, 맞배지붕이고, 지붕은 본기와이다. 굵은 목재와 그림에는 도요토미 시대의 특징이 보인다. 동악소는 긴 행(桁行) 11칸, 들보 행(梁間) 2칸이며, 동쪽 면은 우진각지붕, 서쪽 면은 맞배지붕이고, 지붕은 본기와이다. 서악소는 긴 행(桁行) 5칸, 들보 행(梁間) 2칸이며, 서쪽 면은 우진각지붕, 동쪽 면은 맞배지붕이고, 지붕은 본기와이다. 남문과 동서악소 3동은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77][78]

그 밖에, 경내 남쪽에 있는 '''신관'''은 다이쇼 4년(1915년) 다이쇼 천황의 즉위 기념으로 지어진 것이다.[93] 본궁 북쪽의 구 신궁사 터에 있는 '''스미요시 문화관'''(쇼와 52년(1977년) 준공)에는 신보가 소장되어 있다.[55] 또한 스미요시 문화관 동쪽에는 '''어문고'''(스미요시 어문고)라고 불리는 회칠한 건물이 있다. 교호 8년(1723년)에 서적상의 발원으로 지어진 것으로, 이후 약 5만 권에 달하는 사본과 판본이 봉납되어 「오사카에서 가장 오래된 도서관」이라고도 불린다.[55]


  • 본전 4동
  • * 제1본궁(국보) - 분카 7년(1810년) 재건.
  • ** 폐전 및 도전(중요문화재) - 분카 7년(1810년) 재건.
  • ** 수곽 및 문(국보) - 분카 7년(1810년) 재건.
  • * 제2본궁(국보) - 분카 7년(1810년) 재건.
  • ** 폐전 및 도전(중요문화재) - 분카 7년(1810년) 재건.
  • ** 수곽 및 문(국보) - 분카 7년(1810년) 재건.
  • * 제3본궁(국보) - 분카 7년(1810년) 재건.
  • ** 폐전 및 도전(중요문화재) - 분카 7년(1810년) 재건.
  • ** 수곽 및 문(국보) - 분카 7년(1810년) 재건.
  • * 제4본궁(국보) - 분카 7년(1810년) 재건.
  • ** 폐전 및 도전(중요문화재) - 분카 7년(1810년) 재건.
  • ** 수곽 및 문(국보) - 분카 7년(1810년) 재건.
  • 북수篱문(국가 등록유형문화재) - 에도 시대 후기 조영, 1963년(쇼와 38년) 이축.
  • 남수篱문(국가 등록유형문화재) - 에도 시대 후기 조영, 1963년(쇼와 38년) 이축.
  • 행록문 - 북서쪽의 문.
  • 행수문(행수문, 국가 등록유형문화재) - 서쪽의 문. 사전의 정면에 해당한다. 에도 시대 전기 조영, 1970년(쇼와 45년) 이축.
  • 각토리이(국가 등록유형문화재) - 에도 시대 전기 건립. 편액 “스미요시 신사”는 아리스가와노미야 노리히토 친왕의 필적.
  • 행복문(국가 등록유형문화재) - 남서쪽의 문. 에도 시대 전기 조영, 1970년(쇼와 45년) 이축.
  • 탄생석 - 사쓰마번주 시마즈 타다히사의 탄생지로 여겨진다.
  • 연못
  • 반교(타이코바시) - 1981년(쇼와 56년) 재건. 석조의 각부·대들보 부분은 게이초 연간(1596년-1615년)에 도요토미 히데요리 또는 어머니 요도도노에 의한 재건.
  • 북에마전(국가 등록유형문화재) - 1929년(쇼와 4년) 재건.
  • 남에마전(국가 등록유형문화재) - 1929년(쇼와 4년) 재건.
  • 신마사(국가 등록유형문화재) - 1931년(쇼와 6년) 재건.
  • 벌전
  • 가쿠전
  • 기도전
  • 사무소
  • 스미요시 문화관 - 1977년(쇼와 52년) 건축.
  • 온분고(국가 등록유형문화재) - 교호 8년(1723년) 건축. 쇼와 시대 전기에 이축.
  • 길상전
  • 동문
  • 북고장(중요문화재) - 게이초 12년(1607년)에 도요토미 히데요리에 의해 재건.
  • 남고장(중요문화재) - 게이초 12년(1607년)에 도요토미 히데요리에 의해 재건.
  • 동소문
  • 고쇼고젠 - 스미요시 신 봉안 전설지.
  • 남중문(국가 등록유형문화재) - 에도 시대 후기 조영, 1963년(쇼와 38년) 이축.
  • 제관(국가 등록유형문화재) - 분세이 11년(1828년) 재건으로, 1915년(다이쇼 4년)에 이축.
  • 신관(국가 등록유형문화재) - 1915년(다이쇼 4년) 건축.
  • 신관서문(국가 등록유형문화재) - 분세이 11년(1828년) 조영으로, 메이지 시대 중기에 이축.
  • 연못
  • 석무대(중요문화재) - 게이초 12년(1607년)에 도요토미 히데요리에 의해 재건.
  • 동악소(중요문화재) - 게이초 12년(1607년)에 도요토미 히데요리에 의해 재건.
  • 서악소(중요문화재) - 게이초 12년(1607년)에 도요토미 히데요리에 의해 재건.
  • 남문(중요문화재) - 게이초 12년(1607년)에 도요토미 히데요리에 의해 재건.
  • 정원 “우스노하나원”
  • 스미요시 무도관
  • 온전
  • 5월전(국가 등록유형문화재) - 1936년(쇼와 11년) 조영.
  • 남수수사(국가 등록유형문화재) - 에도 시대 말기 조영.
  • 북대토리이(국가 등록유형문화재) - 에도 시대 전기 조영으로, 메이지 시대 전기에 이축.
  • 북와키산도 각토리이(국가 등록유형문화재) - 1919년(다이쇼 8년) 조영.
  • 서대토리이(국가 등록유형문화재) - 에도 시대 전기 조영.
  • 남대토리이(국가 등록유형문화재) - 에도 시대 전기 조영.
  • 남와키산도 각토리이(국가 등록유형문화재) - 1919년(다이쇼 8년) 조영.

6. 1. 본궁

본전(本殿)은 스미요시즈쿠리(스미요시즈쿠리)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이 양식으로는 가장 오래된 예로서 일본 국보로 지정되었다.[76][54] 본전 지붕에는 가지가 갈라진 장식인 오키치기(置千木, okichigi)가 있으며, 지붕 길이를 따라 수평으로 놓인 5개의 정사각형 가쓰오기(堅魚木, katsuogi)가 있다. 신전 주변에는 회랑이 없다. 본전은 판자로 된 타마가키(玉垣, tamagaki)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바깥쪽은 아라이미(荒忌垣, ara-imi) 울타리로 다시 둘러싸여 있다. 기둥은 원형이며 돌기초 위에 서 있다. 기둥 사이의 판자는 수평으로 배치되어 있다. 정면에서 보이는 부분은 내전(内陣)이며, 그 너머에 내궁(内宮)과 두 번째 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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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umiyoshi-taisha, hongu-1 heiden.jpg|200px|thumb|}]}]

본궁은 바다를 향해 서쪽을 향하고 있으며, 서쪽에서 동쪽으로 제3본궁(제3전)·제2본궁(제2전)·제1본궁(제1전)이 세워져 있고, 제3본궁 남쪽에는 제4본궁(제4전)이 자리 잡고 있다. 각 본궁은 거의 같은 형태와 크기의 본전·와전·폐전으로 구성되며, 주요 신 4柱가 각각 1柱씩 모셔져 있다.

본전은 4동 모두 에도 시대 후기 분카(文化) 7년(1810년)에 건립되었다. “'''주궁식'''(스미요시즈쿠리)”이라고 불리는 독특한 양식으로, 신사 본전으로서는 신명조·대사조·대조조와 함께 아스카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가장 오래된 양식으로 여겨진다.[53] 건물은 칸 수(본 건물의 경우 측면)가 가로 4칸, 들보 간격은 정면 3칸·뒷면 2칸이며[51](또는 정면 1칸·뒷면 2칸[53]), 맞배지붕, 처마가 안쪽으로 들어가는 형식이며, 지붕은 檜皮葺(히와다부키)이고 내부는 앞뒤 2칸으로 되어 있다.[53] 기둥은 원형 기둥으로 초석 위에 세워져 있으며, 정면 중앙의 기둥은 생략하고 판문을 설치한다.[53][76] 지붕은 곡선이 없이 직선적이며, 지붕 위에는 치기(千木)와 가쓰오기(鰹木)가 놓여 있다. 가쓰오기의 수는 4동 모두 5개이지만, 치기는 제1본궁부터 제3본궁까지는 바깥쪽을 깎은 형태(끝을 지면에 대해 수직으로 깎음), 제4본궁은 안쪽을 깎은 형태(수평으로 깎음)이다.[52] 내부를 2칸으로 하는 형태는 나라 시대의 다치바나 부인 저택(법륭사 동원 전법당)·나가야왕 저택 유적에서도 확인되며(단, 건물 자체는 평입), 상대의 궁전 배치에서 착상된 양식으로 여겨진다.[53] 기둥 등의 축부와 서까래·처마판은 주칠, 벽은 흰색(백묵)칠이다. 또한 사전 주위에 회원을 두르지 않은 점도 고색으로 여겨진다.[53] 본전 주위에는 수각(본전 하반부를 틈 없이 가리는 울타리)·옥각(수각 바깥쪽의 각기둥 울타리)이 이중으로 둘러져 있지만, 이것들도 고색을 유지하고 있다.[76]

각 본전 앞에는 '''와전'''(와타리덴)·'''폐전'''(헤이덴)이 세워져 있으며, 모두 본전과 마찬가지로 에도 시대 후기 분카 7년(1810년)에 건립되었다. 제1본궁의 폐전은 중세에는 존재했다고 전해지는 반면, 제2·제3·제4본궁의 폐전은 게이쵸(慶長) 중건 이후에 설치된 것으로 여겨진다. 제1본궁의 폐전은 칸 수(가로)가 5칸·들보 간격이 2칸이며, 맞배지붕으로, 정면에 겹처마와 처마 끝에 장식이 있는 처마가 있으며, 지붕은 檜皮葺(히와다부키)로 이라가무네를 쌓는다. 분할된 배전 형식으로, 중앙은 닦은 마루, 좌우는 2칸×4칸의 방으로 한다. 제2·제3·제4본궁의 폐전은 칸 수(가로)가 3칸인 것을 제외하고는 제1본궁과 같은 형식이다. 칸 수(가로)가 3칸이기 때문에 좌우의 방은 좁아진다. 본전과 폐전을 잇는 와전은 “간노로카”라고도 불리며, 4본궁 모두 같은 형식으로, 칸 수(가로)가 2칸·들보 간격이 1칸인 양하조이며, 지붕은 檜皮葺(히와다부키)이다. 폐전의 마루를 늘여 복도로 하고, 중간에 주칠 각기둥의 토리이를 붙인다. 와전·폐전은 합쳐 1동으로 간주하여 4동 모두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80]

신사의 본전 남쪽에 있는 돌 토리이(鳥居) 중 하나는 각토리이(角鳥居, Kakutorii)로 알려져 있다. 가운데 가로대가 세로 기둥 밖으로 뻗어나가지 않고 모든 부분이 모서리가 각진 것이 특징이다.[9] 이러한 토리이(鳥居)는 신사의 이름을 따서 스미요시 토리이(住吉鳥居, Sumiyoshi torii)라고 불린다.

그 밖의 주궁식 본전으로는, 경내의 섭사인 다이카이 신사 본전(보영 5년(1708년) 건립, 중요문화재), 하카타의 스미요시 신사 본전(겐와 9년(1623년) 건립, 중요문화재)이 알려져 있다.[53]

6. 2. 석무대(石舞台)



제1본궁 남쪽에 있는 '''석무대'''는 게이쵸 12년(1607년)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재건한 것이다. 연못에 걸쳐진 석조 격교(폭 약 11미터 × 길이 약 12미터) 위에 한 변 약 6미터, 높이 약 0.5미터 규모로 축조되어 있다.[56][79][77] 정면에 계단을 붙이고, 무악을 연주할 때는 상면에 목제 고란이 부착된다. 「일본 삼무대」 중 하나로 꼽히며,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56][79][77]

6. 3. 소리하시(反橋)



'''소리하시'''(反橋)는 「타이코바시(太鼓橋)」라고도 불리며 스미요시 대사를 상징하는 다리이다.[57]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일본어의 소설 『소리하시』의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59]

소리하시가 걸쳐진 연못은 고대 석호(라군)의 흔적이라는 설이 있으며[57], 소리하시 부근까지 옛날에는 바다였다고 한다. 현재의 다리는 쇼와 56년(1981년)에 만들어졌지만, 석조 각·량 부분은 1596년-1615년의 게이쵸 연간에 조영된 것으로, 도요토미 히데요리요도덴의 기증에 의한 것이라고 전해진다.[57] 높이는 4.4미터이다.[57]

참고로, 스미요시 대사에는 약 600기에 이르는 수많은 '''석등롱'''이 늘어서 있으며, 가장 오래된 것은 1644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대부분은 에도 시대 회선업 관계자들의 봉납이다.

6. 4. 오소고젠(五所御前)

본전(本殿)은 스미요시즈쿠리(住吉造)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이 양식으로는 가장 오래된 예로서 일본 국보(国宝)로 지정되었다. 본전 지붕에는 가지가 갈라진 장식인 오키치기(置千木, okichigi)가 있으며, 지붕 길이를 따라 수평으로 놓인 5개의 정사각형 가츠오기(堅魚木, katsuogi)가 있다. 신전 주변에는 회랑이 없다. 본전은 판자로 된 타마가키(玉垣, tamagaki)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바깥쪽은 아라이미(荒忌垣, ara-imi) 울타리로 다시 둘러싸여 있다. 기둥은 원형이며 돌기초 위에 서 있다. 기둥 사이의 판자는 수평으로 배치되어 있다. 정면에서 보이는 부분은 내전(内陣)이며, 그 너머에 내궁(内宮)과 두 번째 방이 있다.

본궁 남쪽에는 '''오소고젠'''(ごしょごぜん)이라는 옥가리(玉垣) 구역이 있으며, 안쪽에는 삼나무가 자란다.

사전(社伝)에 따르면, 신공황후가 스미요시 신을 봉안할 장소를 찾던 중 3마리의 백로가 삼나무에 내려앉았기에 이곳을 봉안지로 정했다고 한다.[59] 원래는 신의 강림 의식을 거행하는 미알레쇼(御阿礼所/御生所)였다는 설도 있다. 현재는 "고텐겐(高天原)"이라고도 불리며, 매년 음력 5월 첫 번째 토끼날(스미요시타이샤 창건 전승일)의 우노하 신사(卯之葉神事)에서는 이 오소고젠에 갯대추 잎으로 만든 신물(玉串)을 바친다.[59] 오소고젠에서는 "오(五)"・"대(大)"・"력(力)"이라고 적힌 돌을 주워 부적으로 삼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신앙이 있다.[58]

6. 5. 온다(御田)

본전(本殿)은 스미요시즈쿠리(住吉造)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이 양식으로는 가장 오래된 예로서 일본 국보(国宝)로 지정되었다. 본전 지붕에는 가지가 갈라진 장식인 오키치기(置千木, okichigi)가 있으며, 지붕 길이를 따라 수평으로 놓인 5개의 정사각형 가츠오기(堅魚木, katsuogi)가 있다. 신전 주변에는 회랑이 없고, 본전은 판자로 된 타마가키(玉垣, tamagaki)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바깥쪽은 아라이미(荒忌垣, ara-imi) 울타리로 다시 둘러싸여 있다. 기둥은 원형이며 돌기초 위에 서 있고, 기둥 사이의 판자는 수평으로 배치되어 있다. 정면에서 보이는 부분은 내전(内陣)이며, 그 너머에 내궁(内宮)과 두 번째 방이 있다.

신사의 본전 남쪽에 있는 돌 도리이(鳥居) 중 하나는 각토리이(角鳥居, Kakutorii)로 알려져 있다. 가운데 가로대가 세로 기둥 밖으로 뻗어나가지 않고 모든 부분이 모서리가 각진 것이 특징이다.[9] 이러한 도리이(鳥居)는 신사의 이름을 따서 스미요시 도리이(住吉鳥居, Sumiyoshi torii)라고 불린다.

제4본궁 외주에 둘러싸인 수각에는 서쪽에 고로쿠몬(북서쪽면)·고쥬몬(고쥬몬, 서쪽면)·고후쿠몬(남서쪽면)의 3문이 열린다. 그 중 제3본궁 정면의 고쥬몬 문전에는 각도리이(角鳥居)가 세워져 있다. 「각도리이」라는 이름은 기둥이 사각기둥이라는 데서 유래하며(본궁의 와텐 내에 있는 도리이도 같은 기둥), 그 독특한 형식으로 「주미요시 도리이」라고도 불린다. 편액의 「주미요시 신사」는 아리스가와노미야 노리히토 친왕의 필적이다.

각도리이에서 이어지는 참도에는 각도리이 앞 연못에 소리하시(소리하시)가 걸쳐져 있다. 「타이코바시(太鼓橋)」라고도 불리며 주미요시타이샤를 상징하는 다리가 된다. 높이는 4.4미터이다.[57] 가마쿠라 시대의 『제신사지제기』에도 다리의 기록이 보인다. 현재의 다리는 1981년(쇼와 56년)의 조영에 의한 것이지만, 석조의 각·량 부분은 1596년-1615년(게이쵸 연간)의 조영이 되고, 도요토미 히데요리에 의한 것이라고도, 요도덴의 기증에 의한 것이라고도 전해진다.[57] 소리하시를 무대로 한 작품으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소리하시』가 있다.[59] 그리고 이 소리하시 부근까지는 옛날 바다였다고 하며,[57] 소리하시가 걸쳐진 연못에 대해서는 고대의 석호(潟湖)(라군)의 흔적이라는 설이 있다.

제1본궁 남쪽에는 '''석무대'''가 있다. 남문·동서악소와 마찬가지로 1607년(게이쵸 12년)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재흥에 의한 조영이다. 연못에 걸쳐진 석조 격교(폭 약 11미터 × 길이 약 12미터) 위에 한 변 약 6미터, 높이 약 0.5미터 규모로 축조되어 있다. 정면에 계단을 붙이고, 무악을 연주할 때는 상면에 목제 고란이 부착된다. 「일본 삼무대」의 하나로 꼽히는 동시에[56],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79][77]

참도에는 수많은 '''석등롱'''이 늘어서 있으며, 그 수는 약 600기에 이른다. 가장 오래된 것은 1644년(관영 21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그 대부분은 에도 시대의 회선업 관계자들의 봉납이다.

6. 6. 각토리이(角鳥居)

스미요시 대사(住吉大社)의 본전 남쪽에 있는 돌 도리이(鳥居) 중 하나는 각토리이(角鳥居, Kakutorii)로 알려져 있다.[9] 가운데 가로대가 세로 기둥 밖으로 뻗어나가지 않고 모든 부분이 모서리가 각진 것이 특징이다.[9] 이러한 도리이(鳥居)는 신사의 이름을 따서 스미요시 도리이(住吉鳥居, Sumiyoshi torii)라고 불린다.

제4본궁 외주에 둘러싸인 수각에는 서쪽에 고로쿠몬(북서쪽면)·고쥬몬(서쪽면)·고후쿠몬(남서쪽면)의 3문이 열리는데, 그 중 제3본궁 정면의 고쥬몬 문전에 각도리이가 세워져 있다. 「각도리이」라는 이름은 기둥이 사각기둥이라는 데서 유래하며, 그 독특한 형식으로 「주미요시 도리이」라고도 불린다. 편액의 「주미요시 신사」는 아리스가와노미야 노리히토 친왕의 필적이다.

6. 7. 섭사(摂社) 및 말사(末社)

스미요시 대사(住吉大社) 경내에는 4개의 경내사(境內社)와 4개의 경외사(境外社)를 포함하여 총 29개의 섭사(摂社) 및 말사(末社)가 있다.[60]

大海神社(다이카이진자)는 첫 번째 섭사(摂社)로, 경내 북쪽에 본궁과 마찬가지로 서쪽을 향해 자리 잡고 있다. 주제신은 豊玉彦命(토요타마히코노미코토)와 豊玉姫命(토요타마히메노미코토)이다. 본전은 스미요시즈쿠리(住吉造) 양식으로, 宝永(호에이) 5년(1708년)에 건립되어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85] 폐전·와전(호에이 5년(1708년) 건립), 서문(에도 시대 전기 건립)도 중요문화재이다.[82][83]

志賀神社(시가진자)는 경내 북쪽의 다이카이진자 근처에 서쪽을 향해 위치하며, 주제신은 底津少童命(소토츠와카와라노미코토), 中津少童命(나카츠와카와라노미코토), 表津少童命(우와츠와카와라노미코토)이다. 이들은 스미요시 삼신과 함께 禊祓(미소하라이)로 태어난 바다의 신으로, 志賀海神社(시가우미진자)(福岡県(후쿠오카켄)福岡市(후쿠오카시))를 본사로 한다.[61]

船玉神社(후네타마진자)는 본궁 남서쪽, 수각 밖에 서쪽을 향해 자리 잡고 있다. 주제신은 天鳥船命(아마토리후네노미코토)와 猿田彦神(사루타히코노카미)이다.

若宮八幡宮(와카미야하치만구)는 본궁 남쪽, 고쇼고젠의 남쪽에 서쪽을 향해 위치하며, 주제신은 応神天皇(오진텐노)와 武内宿禰(다케우치노스쿠네)이다.

이 외에도 楯社(타테샤), 鉾社(호코샤), 侍者社(오모토샤), 后土社(고도샤), 楠君社(난쿤샤), 市戎·大国社(이치에비스·다이코쿠샤), 種貸社(타네카시샤), 児安社(코야스샤), 海士子社(아마고샤), 龍社(타츠샤), 八所社(핫쇼샤), 新宮社(싱구샤), 立聞社(타치키키샤), 貴船社(키후네샤), 星宮(호시미야), 五社(고샤), 薄墨社(우스즈미샤), 斯主社(코노누시샤), 今主社(이마누시샤), 招魂社(쇼콘샤) 등의 경내사가 있다.

경외사로는 大歳社(오토시샤), 浅沢社(아사자와샤), 港住吉神社(미나토스미요시진자), 숙원돈궁(宿院頓宮)(슈쿠인톤구)가 있다. 숙원돈궁(宿院頓宮)은 스미요시 축제의 어가소(御旅所)이다.

[[파일:Shukuin Tongu2.jpg|160px|center|숙원돈궁(宿院頓宮) (스미요시 축제의 어가소(御旅所))]

7. 연간 행사


  • 매월
  • * 초하루제(朔日祭, 매월 1일)
  • * 토끼날 제사(卯之日祭, 매월 첫 卯日)
  • * 초삼일 제사(初辰祭, 매월 첫 辰日)
  • * 보름제(十五日祭, 매월 15일)
  • * 해상·교통 안전 기원제(海上・交通安全祈願祭, 매월 20일)
  • 1월
  • * 신년제(元旦祭, 1월 1일)
  • * 원시제(元始祭, 1월 3일)
  • * 답가 신사(踏歌神事)(1월 4일)
  • * 백마 신사(白馬神事)(1월 7일)
  • * 결진 신사(御結鎮神事, 1월 13일)
  • 2월
  • * 절분제(節分祭, 2월 절분)
  • * 기원제(紀元祭, 2월 11일)
  • 3월
  • * 기년제(祈年祭, 3월 17일)[74]
  • 4월
  • * 소나무 묘목 신사(松苗神事, 4월 3일)
  • 5월
  • * 토끼 잎 신사(卯之葉神事, 5월 첫 卯日)
  • 6월
  • * 오타에우에 신사(御田植神事)(6월 14일)
  • * 대형벌식(大祓式, 6월 30일)
  • 7월
  • * 신여 씻는 신사(神輿洗神事, 7월 셋째 월요일·화요일)
  • * 망경제(宵宮祭, 7월 30일)
  • * '''례대제''', 하지 대형벌식(夏越大祓神事, 7월 31일)
  • 8월
  • * 도고제, 아라하타 대형벌식(渡御祭、荒和大祓神事, 8월 1일)
  • 9-10월
  • * 관월제(観月祭, 추석 명월)
  • 10월
  • * 보물 시장 신사(宝之市神事, 10월 17일)
  • 11월
  • * 메이지제(明治祭, 11월 3일)
  • * 신장제(新嘗祭, 11월 23일)
  • 12월
  • * 천장제(天長祭, 12월 23일)
  • * 매연 털이식(煤払式, 12월 26일)
  • * 대형벌식, 제야제(大祓式、除夜祭, 12월 31일)


'''주지사제(住吉祭)'''(스미요시사이/스미요시마쓰리)는 주지대사(住吉大社)의 례제(例祭)(례대제(例大祭), 1년 중 가장 중요한 축제)를 중심으로 한 축제이다. 오사카를 맑게 정화하는 축제로서 「오하라이(おはらい)」라고도 불리며、「오사카 3대 여름 축제(大阪三大夏祭り)」의 하나로도 꼽힌다。

과거에는 음력 6월 30일을 중심으로 거행되었지만, 1874년의 태양력 전환 이후로는 7월 31일을 중심으로 거행된다。『주지대사신대기(住吉大社神代記)』에 「6월 거행 해제, 개수구문 궁신사(開口水門姫神社)」「9월 거행 해제, 다미노시마 궁신사(田蓑嶋姫神社)」라고 적혀 있는데, 그중 전자(남제)를 계승한 것이라고 여겨지지만, 후자(북제)는 현재까지 폐지되었다。

현재 제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 7월 셋째 월요일(
  • 7월 30일 - 주지사제 석궁제(住吉祭宵宮祭)
  • 7월 31일 - 하쓰고시하라이 신지(夏越祓神事), 주지사제 례대제(住吉祭例大祭)
  • 8월 1일 - 도고사이(渡御祭), 돈궁사이(頓宮祭), 아라니고오하라이 신지(荒和大祓神事)


7월 셋째 월요일(바다의 날)부터 다음 화요일까지 거행되는 신여 세신(神輿洗神事)(미코시아라이신지)은 례대제(주지사제)에 앞서 바닷물로 신여를 정화하는 신사이다. 과거에는 6월 15일 저녁 만조 때 나가사키의 우라(長峡の浦)에서 거행되었지만, 현재는 오사카만(大阪湾) 외해의 바닷물을 사용하여 스미요시 공원(住吉公園)에서 거행되며, 오타비쇼(御旅所)(스미요시 고토롱(住吉高燈籠))에서 하룻밤 봉안한 후, 다음 날 환어(還御)한다。

7월 31일의 하쓰고시하라이 신지(夏越祓神事)(나고시노하라이신지)에서는, 고가토덴(五月殿)에서의 대발식(大祓式) 후, 전통 의상을 차려입은 하쓰고시 여자(夏越女)・치고(稚児) 행렬이 까락풀 꿰뚫기(茅の輪くぐり)를 한다。이 하쓰고시하라이 신지는 「주지대사의 하쓰고시사이(住吉大社の夏越祭)」로서 오사카부(大阪府) 선택 무형 민속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다음으로 제일 본궁(第一本宮)에서 례대제(例大祭)(레이타이사이)가 거행되고, 제전(祭典) 후에 가구라(神楽)「구마노마이(熊野舞)」・주지오도리(住吉踊)가 봉납된다。



8월 1일에는, 주지신(住吉神)의 신령을 모신 신여가 사카이(堺)의 슈쿠인 돈궁(宿院頓宮)(사카이시 사카이구 슈쿠인초 히가시(堺市堺区宿院町東))까지 도고(渡御)한다。1962년 이후로는 자동차 행렬이었지만, 2005년부터는 봉련(鳳輦)・신여 행렬이 부활하여, 거리를 행진하고 다이와가와(大和川)에서는 강 한가운데를 지난다。슈쿠인 돈궁(宿院頓宮)에 도착 후에는 돈궁 경내의 이이가이보리(飯匙堀)(이이가이보리)에서 아라니고오하라이 신지(荒和大祓神事)(아라니고노오하라이신지)를 거행한다。이 이이가이보리(飯匙堀)는 우미사키야마사키 신화(海幸山幸神話)의 조간주(潮干珠)를 묻은 곳이라고 전해지는 곳으로, 이곳에서 본사(本社)에서 행한 것과 같은 까락풀 꿰뚫기(茅の輪くぐり)를 한다.

6월 14일에 열리는 스미요시의 오타에 신사(御田植神事)는 신전에서 모내기를 하는 행사이다. 신공황후가 나가토 국에서 우에온나(植女)를 불러 논을 만들게 한 것이 그 시초라고 전해진다.[72]

먼저 신관에서 우에온나의 분대・대배식을 한 뒤, 이시부타이에서 전원의 수복, 제일 본궁에서 풍년의 제전을 행하고, 신전의 와사나에(早苗)가 우에온나에게 주어진다. 그리고 오타로 향해 가이우에온나(替植女)에 의한 식재가 시작되는데, 이 사이에 무대나 제방에서 타마이(田舞)・신덴다이마이(神田代舞)・후류무샤 행사(風流武者行事)・보우다이 고센(棒打合戦)・타에오도리(田植踊)・스미요시오도리(住吉踊) 등의 예능이 행해진다.[72]

스미요시 대사의 오타에는 규모가 크고 대표적인 것으로, 「스미요시의 오타에」로서 국가의 중요무형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90], 예능은 국가의 선택무형민속문화재로 선정되어 있다.[91]

답가 신사(踏歌神事)는 1월 4일에 열리는 신사로, 대지를 밟고 오곡 풍년을 기원한다.[67] 중국의 수·당 시대에 유행했던 군중 가무에 유래하며, 옛날에는 궁중에서도 1월 중순에 踏歌節会가 열려 '아라레바시리(あらればしり)'라고도 불렸다.[67] 현재는 熱田神宮(愛知県名古屋市)과 스미요시 대사에만 남아 있다고 한다.

신사에서는 제일 본궁에서 축사 봉정 후, 히타타레(直垂)를 착용한 소역 2명(곤스이(言吹)・후쿠리모치(袋持))이 각각 매화 가지(곤스이)・주머니(후쿠리모치)를 가지고 제정에서 마주 서서, 3번 소리를 주고받은 후 후쿠리모치가 신전에 떡을 진설한다. 그 후 신악녀가 시라비야시(白拍子) 춤, 구마노(熊野) 춤을 봉납하고, 떡 던지기를 한다.[68]

1월 7일에 열리는 백마 신사(白馬神事, 아오우마신지)는 백마가 각 본궁을 순례하여 액을 쫓는 신사이다.[69] 연초에 백마(청마)를 보면 일 년 내내 액이 쫓아진다는 중국의 신앙에 유래한다.[69] 예전에는 궁중에서도 1월 7일에 白馬節会(청마절회)가 열렸으며, 현재는 스미요시 대사 외에 賀茂別雷神社(京都府 京都市)・鹿島神宮(茨城県 鹿嶋市) 등에서 행해진다.[69]

신사에서는 축사 봉정 후, 신마와 봉행 2명・신마사람이 각 본궁에서 배례한 후 전 본궁을 외주한다.[68]

7. 1. 스미요시 축제(住吉祭)



'''주지사제(住吉祭)'''(스미요시사이/스미요시마쓰리)는 주지대사(住吉大社)의 례제(例祭)(례대제(例大祭), 1년 중 가장 중요한 축제)를 중심으로 한 축제이다. 오사카를 맑게 정화하는 축제로서 「오하라이(おはらい)」라고도 불리며、「오사카 3대 여름 축제(大阪三大夏祭り)」의 하나로도 꼽힌다。

과거에는 음력 6월 30일을 중심으로 거행되었지만, 1874년의 태양력 전환 이후로는 7월 31일을 중심으로 거행된다。『주지대사신대기(住吉大社神代記)』에 「6월 거행 해제, 개수구문 궁신사(開口水門姫神社)」「9월 거행 해제, 다미노시마 궁신사(田蓑嶋姫神社)」라고 적혀 있는데, 그중 전자(남제)를 계승한 것이라고 여겨지지만, 후자(북제)는 현재까지 폐지되었다。

현재 제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 7월 셋째 월요일(
  • 7월 30일 - 주지사제 석궁제(住吉祭宵宮祭)
  • 7월 31일 - 하쓰고시하라이 신지(夏越祓神事), 주지사제 례대제(住吉祭例大祭)
  • 8월 1일 - 도고사이(渡御祭), 돈궁사이(頓宮祭), 아라니고오하라이 신지(荒和大祓神事)


7월 셋째 월요일(바다의 날)부터 다음 화요일까지 거행되는 신여 세신(神輿洗神事)(미코시아라이신지)은 례대제(주지사제)에 앞서 바닷물로 신여를 정화하는 신사이다. 과거에는 6월 15일 저녁 만조 때 나가사키의 우라(長峡の浦)에서 거행되었지만, 현재는 오사카만(大阪湾) 외해의 바닷물을 사용하여 스미요시 공원(住吉公園)에서 거행되며, 오타비쇼(御旅所)(스미요시 고토롱(住吉高燈籠))에서 하룻밤 봉안한 후, 다음 날 환어(還御)한다。

7월 31일의 하쓰고시하라이 신지(夏越祓神事)(나고시노하라이신지)에서는, 고가토덴(五月殿)에서의 대발식(大祓式) 후, 전통 의상을 차려입은 하쓰고시 여자(夏越女)・치고(稚児) 행렬이 까락풀 꿰뚫기(茅の輪くぐり)를 한다。이 하쓰고시하라이 신지는 「주지대사의 하쓰고시사이(住吉大社の夏越祭)」로서 오사카부(大阪府) 선택 무형 민속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다음으로 제일 본궁(第一本宮)에서 례대제(例大祭)(레이타이사이)가 거행되고, 제전(祭典) 후에 가구라(神楽)「구마노마이(熊野舞)」・주지오도리(住吉踊)가 봉납된다。

8월 1일에는, 주지신(住吉神)의 신령을 모신 신여가 사카이(堺)의 슈쿠인 돈궁(宿院頓宮)(사카이시 사카이구 슈쿠인초 히가시(堺市堺区宿院町東))까지 도고(渡御)한다。1962년 이후로는 자동차 행렬이었지만, 2005년부터는 봉련(鳳輦)・신여 행렬이 부활하여, 거리를 행진하고 다이와가와(大和川)에서는 강 한가운데를 지난다。슈쿠인 돈궁(宿院頓宮)에 도착 후에는 돈궁 경내의 이이가이보리(飯匙堀)(이이가이보리)에서 아라니고오하라이 신지(荒和大祓神事)(아라니고노오하라이신지)를 거행한다。이 이이가이보리(飯匙堀)는 우미사키야마사키 신화(海幸山幸神話)의 조간주(潮干珠)를 묻은 곳이라고 전해지는 곳으로, 이곳에서 본사(本社)에서 행한 것과 같은 까락풀 꿰뚫기(茅の輪くぐり)를 한다.

7. 2. 오타에우에 신사(御田植神事)

6월 14일에 열리는 스미요시의 오타에 신사(御田植神事)는 신전에서 모내기를 하는 행사이다. 신공황후가 나가토 국에서 우에온나(植女)를 불러 논을 만들게 한 것이 그 시초라고 전해진다.[72]

먼저 신관에서 우에온나의 분대・대배식을 한 뒤, 이시부타이에서 전원의 수복, 제일 본궁에서 풍년의 제전을 행하고, 신전의 와사나에(早苗)가 우에온나에게 주어진다. 그리고 오타로 향해 가이우에온나(替植女)에 의한 식재가 시작되는데, 이 사이에 무대나 제방에서 타마이(田舞)・신덴다이마이(神田代舞)・후류무샤 행사(風流武者行事)・보우다이 고센(棒打合戦)・타에오도리(田植踊)・스미요시오도리(住吉踊) 등의 예능이 행해진다.[72]

스미요시 대사의 오타에는 규모가 크고 대표적인 것으로, 「스미요시의 오타에」로서 국가의 중요무형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90], 예능은 국가의 선택무형민속문화재로 선정되어 있다.[91]

7. 3. 답가 신사(踏歌神事)

답가 신사(踏歌神事)는 1월 4일에 열리는 신사로, 대지를 밟고 오곡 풍년을 기원한다.[67] 중국의 수·당 시대에 유행했던 군중 가무에 유래하며, 옛날에는 궁중에서도 1월 중순에 踏歌節会가 열려 '아라레바시리(あらればしり)'라고도 불렸다.[67] 현재는 熱田神宮(愛知県名古屋市)과 스미요시 대사에만 남아 있다고 한다.

신사에서는 제일 본궁에서 축사 봉정 후, 히타타레(直垂)를 착용한 소역 2명(곤스이(言吹)・후쿠리모치(袋持))이 각각 매화 가지(곤스이)・주머니(후쿠리모치)를 가지고 제정에서 마주 서서, 3번 소리를 주고받은 후 후쿠리모치가 신전에 떡을 진설한다. 그 후 신악녀가 시라비야시(白拍子) 춤, 구마노(熊野) 춤을 봉납하고, 떡 던지기를 한다.[68]

7. 4. 백마 신사(白馬神事)

1월 7일에 열리는 백마 신사(白馬神事, 아오우마신지)는 백마가 각 본궁을 순례하여 액을 쫓는 신사이다.[69] 연초에 백마(청마)를 보면 일 년 내내 액이 쫓아진다는 중국의 신앙에 유래한다.[69] 예전에는 궁중에서도 1월 7일에 白馬節会(청마절회)가 열렸으며, 현재는 스미요시 대사 외에 賀茂別雷神社(京都府 京都市)・鹿島神宮(茨城県 鹿嶋市) 등에서 행해진다.[69]

신사에서는 축사 봉정 후, 신마와 봉행 2명・신마사람이 각 본궁에서 배례한 후 전 본궁을 외주한다.[68]

8. 문화재

스미요시 대사 본전은 스미요시즈쿠리(住吉造)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현존하는 이 양식의 건물 중 가장 오래된 예시로 국보로 지정되었다.[76] 본전 지붕에는 가지가 갈라진 장식인 오키치기(置千木, okichigi)와 지붕 길이를 따라 수평으로 놓인 5개의 정사각형 가츠오기(堅魚木, katsuogi)가 있다. 신전 주변에는 회랑이 없고, 본전은 타마가키(玉垣, tamagaki) 울타리와 아라이미(荒忌垣, ara-imi)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다. 기둥은 원형이며 돌기초 위에 서 있고, 기둥 사이의 판자는 수평으로 배치되어 있다. 정면에서 보이는 부분은 내전(内陣)이며, 그 너머에 내궁(内宮)과 두 번째 방이 있다.

본전 남쪽에 있는 돌 토리이(鳥居) 중 하나는 각토리이(角鳥居, Kakutorii)로, 가운데 가로대가 세로 기둥 밖으로 뻗어나가지 않고 모든 부분이 모서리가 각진 것이 특징이다.[9] 이러한 토리이는 신사의 이름을 따서 스미요시 토리이(住吉鳥居, Sumiyoshi torii)라고 불린다.

1810년 건립된 주(住吉)대사 본전 4동은 구사지보존법에 따라 특별보호건축물로 지정되었고, 문화재보호법 시행에 따라 국보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1953년에 국보로 지정되었다.[76] 1607년에 건립된 남문을 포함한 스미요시 대사 13동[77], 1708년에 건립된 주쿠지대사 섭사 다이카이진자 본전[85] 등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헤이안 시대부터 가마쿠라 시대 작품인 목조 무용면 9면[86], 가마쿠라 시대 작품인 태도 명슈케이 1구[87], 에도 시대 작품인 도 명오노 시게카타 봉납 접주 주쿠지 다이묘진 고호마에 1구[88] 등은 공예품으로 지정되었다. 주쿠지대사 신대기(住吉大社神代記)는 서적[89], 住吉の御田植(스미요시의 오타네)는 중요무형민속문화재[90], 주쿠지 행궁터는 사적[92]으로 지정되었다.

그 외에도 다수의 건축물이 등록유형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9. 등장 작품

에도 시대까지 스미요시 공원이 바다에 면해 있어 "백사청송"의 경관을 대표하는 곳으로 여겨졌으며, 이는 디자인과 예술에서 스미요시 양식으로 알려져 있다.

무라사키 시키부의 『겐지 이야기』에서 아카시 여인과 관련된 몇몇 장에서 중요한 배경으로 사용되었다. 『겐지 모노가타리』의 "스마"와 "아키시"에서는 히카루 겐지가 큰 폭풍우를 만나고, 폭풍이 잔잔해진 새벽에 겐지의 꿈에 키리쓰보테이가 나타나, 스미요시 신의 인도에 따라 스마를 떠나 아키시로 옮기라고 알려주었다고 적고 있다. 귀경 후의 "미오시루베"에서는 스미요시 대사에 감사 참배를 갔는데, 우연히 아키시 닛토가 배를 타고 아키시노 미카타를 데리고 그곳에 참배하러 왔지만, 미카타와 겐지는 서로 만나지 못하고 헤어졌다고 적고 있다.

민담 "이순보시"에서 자식이 없는 노부부가 스미요시 신사에서 기도를 올렸고, 그 기도가 이루어졌다. 그들의 아이가 항해를 떠날 때, 그는 스미요시 항구에서 출발하여 오사카 만으로 항해한 후 요도가와를 거슬러 올라 교토로 들어갔다. 일본의 대표적인 옛이야기인 「엄지동자」는 원래 『오가타 이야기』에 실려 있으며, 세쓰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스미요시 대사에 기도하여 엄지동자를 얻게 되었고, 그는 "스미요시의 항구"에서 배를 타고 교토로 향했다.

만엽집』에는 스미요시 신사에 대한 내용이 담긴 세 수가 실려있다.[105][106][107]

능(일본극) 『다카사고』에서 “다카사고야, 이 포구의 배에 돛을 올리고, 이 포구의 배에 돛을 올리고, 달과 함께 나아가는 조수의, 파도가 아와지 섬 그림자를 지나, 멀리 나루오의 바다를 지나, 벌써 '''스미요시'''에 도착했구나, 벌써 스미요시에 도착했구나”라고 노래된다.

겐로쿠 7년(1694년) 9월 13일, 마쓰오 바쇼가 보물 시장에 참배하여 시를 지었다.

세이 쇼나곤의 수필 『마쿠라노 소시』의 "가모에 참배하는 길"에서는 당시의 풍습을 기록하고 있으며, 이 노래는 스미요시 대사의 오타나에 신지에서 거의 그대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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