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마 기요히데
1. 개요
시마 기요히데는 일본 제국 해군의 군인으로, 1911년 해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여러 군함에서 복무하며 경력을 쌓았다. 대위 진급 후에는 어뢰 전술을 익히고 해군대학교를 졸업했으며, 다카마쓰노미야의 부관을 지내기도 했다. 1939년 소장으로 진급하여 마이즈루 진수부 참모장이 되었고, 태평양 전쟁 중 툴라기 침공 부대를 지휘했다. 레이테 만 해전에서 제2 공격 부대를 이끌었으나 수리가오 해협 해전에서 퇴각했으며, 이후 다카오 경비 지구 사령관과 제1 항공 함대 사령관을 역임했다. 전후에는 자신의 행동을 옹호했으며, 공직 추방되었다.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 출생일 | 1890년 2월 25일 |
|---|---|
| 사망일 | 1973년 11월 7일 |
| 출생지 | 미야자키현, 일본 |
| 사망지 | 불명 |
| 소속 | 일본 제국 해군 |
| 복무 기간 | 1911년 – 1946년 |
| 최종 계급 | |
| 소속 부대 | 불명 |
| 지휘 경력 | 오이, 19번째 전대, 16번째 전대, 요코스카 해군 통신학교, 5번째 함대, 1번째 항공 함대, 다카오 경비 구역 |
| 주요 전투 | 제2차 세계 대전 툴라기 침공 (1942년 5월) 레이테 만 해전 |
| 수상 내역 | 욱일장 (4등) 서보장 (2등) |
| 일본어 | 志摩 清英 (시마 기요히데) |
|---|---|
| 로마자 표기 | Shima Kiyohide |
| 출신 학교 | 도쿄 부립 제일중학교 |
|---|
| 관련 인물 | 시마 기요나오(志摩清直) |
|---|
-
도쿄도 출신 -
이와야 사자나미
이와야 사자나미는 메이지 시대에 아동 문학을 보급하고 일본 최초의 아동 문학 총서 간행, 전승 설화 리텔링, '옛날이야기 하이쿠 그림' 창조 등을 통해 일본 근대 아동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아동 문학가, 소설가, 시인, 수필가이자 문예 평론가이다. -
도쿄도 출신 -
미시마 유키오
미시마 유키오는 1925년 도쿄에서 태어나 소설, 희곡, 평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일본의 전통과 현대 사이의 갈등을 작품에 담아낸 20세기 일본 문학의 중요한 인물이며, 1970년 자위대에서 쿠데타를 시도하다 실패하고 할복 자살했다. -
도쿄도립 히비야 고등학교 동문 -
최린
최린은 3·1 운동의 주요 기획자였으나, 이후 친일 행보를 보이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역임하는 등 극렬한 친일 활동을 펼쳤고, 광복 후 체포되었다가 석방, 한국 전쟁 중 월북하여 북한에서 사망, 남북 모두에서 부정적으로 평가받으며 친일파 명단에 등재된 인물이다. -
도쿄도립 히비야 고등학교 동문 -
아베 노부유키
아베 노부유키는 러일 전쟁에 참전한 일본 제국의 육군 대장이자 정치인으로, 제39대 내각총리대신으로서 중일 전쟁 종식과 일본의 중립 유지를 시도했으나 실패했으며, 이후 조선총독을 지내며 전쟁 말기 조선에서의 압제적 통치를 담당했다. -
1890년 출생 -
최남선
최남선은 1890년에 태어나 1957년에 사망한 대한민국의 문인이자 독립운동가, 언론인, 역사학자이며, 《소년》을 창간하고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여 현대 한국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으며, 3·1 운동 독립선언서 기초, 친일 행적, 단군 연구, 《단군론》, 《불함문화론》 저술 등의 활동을 했다. -
1890년 출생 -
김창영 (1890년)
김창영은 일제강점기 경찰 및 관료, 만주국 관리로서 항일 무장 세력 탄압과 귀순 공작에 참여하고 금산군수와 전라남도 참여관을 지냈으며, 광복 후 경성부부윤을 역임했으나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처벌받고 친일파 명단에 포함되었다.
2. 생애
태평양 전쟁 발발 후 1942년 10월 제16전대 사령관을 맡았다. 이후 요코스카 진수부 해군 통신학교장을 거쳐 1944년 2월에 제5함대 사령관에 취임했다. 레이테 만 해전에서 시마 제독으로 알려졌지만, 원래는 통신 기술 전문가로 니시무라 쇼지 중장과 같은 실전형 제독은 아니었다.
첩1호 작전 발동에 따라 제2유격부대를 이끌고 수리가오 해협 해전에 참전했으나, 미군 함재기의 맹공에 밀려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미군 함대의 견고한 수비 진형과 비교하여 니시무라와 함께 일본 함대를 쉬운 표적으로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45년 5월 가오슝 경비부 사령장관을 거쳐 오니시 다키지로 중장의 뒤를 이어 제1항공 함대 사령관에 취임했지만, 일본 해군은 이미 전력을 상실하여 더 이상 미군에 대항할 수 없었다.
미국 측에서는 시마의 후퇴를 “장병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평가했다.
2.1. 초기 생애 및 경력
미야자키현 출신인 시마 기요히데는 1911년에 일본 제국 해군사관학교를 39기로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했다. 사관후보생 시절에는 순양함 아소, 하시다테와 전함 아키에서 복무했다. 이후 전함 이와미에 배속되었다가 중위로 진급하여 순양전함 이부키와 순양함 가토리에서 복무했다.
1918년 대위로 진급한 시마는 어뢰 전술과 항해술 과정을 이수하고 순양전함 기리시마의 통신장교로 임명되었다. 1921년에는 해군대학교를 졸업하고 소령으로 진급했다.
1925년부터 1926년까지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의 부관을 역임했으며, 동시에 전함 나가토와 후소에서 복무했다. 1928년부터 1929년까지는 미국과 유럽으로 파견되었다. 귀국 후에는 주로 여러 해군 군수학교의 교관으로 근무했다.
1933년 대령으로 진급했고, 1936년에는 순양함 오이의 함장을 맡았다. 1939년 11월 15일에는 소장으로 진급하여 마이즈루 진수부 참모장이 되었다.
아래는 시마의 초기 생애 및 경력을 정리한 표이다.
| 연도 | 사건 |
|---|---|
| 1911년 | 해군병학교 졸업, 아소 승무 |
| 1912년 | 하시다테, 아키 승무, 소위 임관 |
| 1914년 | 이와미 승무, 중위 임관, 해군 수뢰학교 보통과 입교 |
| 1915년 | 해군 포술학교 보통과 학생 입교, 이부키 승무 |
| 1916년 | 가토리 승무, 제2함대 부속 |
| 1917년 | 구레 진수부 부속, 구레 해병단 부속, 해군대학교 을종 학생 입교 |
| 1918년 | 해군 수뢰학교 고등과 학생 입교, 대위 진급, 해군 수뢰학교 특수과 학생 입교 |
| 1919년 | 특수과 학생 졸업, 제4 수뢰전대 사령부 부속/참모 |
| 1920년 | 기리시마 통신장 대리/분대장 대리 |
| 1921년 | 해군대학교 (갑) 학생 (~1923년 10월) |
| 1923년 | 제2함대 참모 |
| 1924년 | 소좌 진급, 요코스카 진수부 부속 |
| 1925년 | 노부히토 친왕 부속 무관 |
| 1926년 | 군령부 제2반 제4과 참모 |
| 1928년 | 구미 각국 출장 |
| 1929년 | 귀국, 연합함대 참모/제1함대 부속, 중좌 진급 |
| 1930년 | 해군 수뢰학교, 해군 통신학교, 해군 포술학교, 가스가 교관, 가스미가우라 해군 항공대 교관 |
| 1931년 | 해군 통신학교, 해군 수뢰학교, 요코스카 항공대 교관 |
| 1932년 | 해군 통신학교, 해군 수뢰학교, 요코스카 항공대, 가스가 교관 |
| 1933년 | 군령부/해군성 출사, 주만 해군부 부속/참모, 대좌 진급 |
| 1934년 | 군령부 출사, 군령부 제3부 제8과 과장 |
| 1936년 | 오이 함장 |
| 1939년 | 소장 진급, 마이즈루요항부/마이즈루 진수부 참모장 |
2.2. 태평양 전쟁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시마 기요히데는 전투 지휘를 맡아 1942년 5월 3일 모 작전의 일환으로 솔로몬 제도의 툴라기를 점령하는 툴라기 침공 부대를 이끌었다. 1943년 5월 1일 중장으로 진급했으며, 1944년 2월 15일 일본 제5함대 사령관이 되었다.
레이테 만 해전 (1944년 10월 23일–26일) 동안 시마는 수리가오 해협 해전에서 3척의 순양함과 7척의 구축함으로 구성된 "제2 공격 부대"를 이끌었다. 니시무라 쇼지 중장과 시마 중장의 함대는 통틀어 "남부 부대"라고 불렸다. 부대에 엄격한 무선 침묵이 부과되었기 때문에 시마는 니시무라의 움직임과 동기화할 수 없었다. 시마의 부대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4척)는 니시무라의 부대가 치명적인 함정에 빠져 피해를 입은 후에 전투에 도착했다. 야간 전투 중에 시마는 미국 함선으로 착각한 두 섬에 16발의 어뢰를 발사했다. 그러고 나서 니시무라의 전함 두 척의 잔해로 보이는 것을 보고 그는 퇴각을 명령했다. 퇴각하는 동안, 그의 기함인 중순양함 나치는 니시무라의 중순양함 모가미와 충돌하여 후자의 조타실을 침수시켰다. 모가미는 퇴각 과정에서 뒤쳐졌고 다음 날 아침 항공기에 의해 격침되었다.
대만 해전 이후, 미 제독 할제이는 손상 함선을 고의로 눈에 띄는 위치에 배치하여 시마 함대를 유인하려 했으나, 시마는 정확한 적정 분석으로 대본영 발표가 오보임을 간파하고 진격을 중지하여 함대를 보존했다.
이 참사 이후, 시마는 1945년 5월 10일부터 1945년 11월 30일까지 다카오 경비 지구 사령관으로 재배치되었다. 1945년 5월 10일부터 6월 15일까지 그는 또한 제1 항공 함대의 마지막 사령관을 역임했다. 그러나 일본 해군은 이미 전력을 상실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미군에 대항할 수 없었다.
2.3. 전후
1959년, 캘리포니아주 샌 페르난도 출신 16세 빌 프레이저의 편지에 답하여, 시마는 수리가오 해협 해전에서의 자신의 행동과 수행을 옹호했다. 특히 시마는 해전에서 일본군의 완패와 관련하여 시마를 "비극의 광대"라고 언급한 역사가 제임스 A. 필드 주니어에게 비판적이었다.
3. 평가
시마 기요히데는 니시무라 쇼지와 같은 실전형 지휘관은 아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레이테 만 해전의 수리가오 해협 해전에서 시마는 제2유격부대를 이끌었으나, 미군 함재기의 공격과 니시무라 함대의 전멸을 보고 후퇴했다. 이러한 후퇴는 "장병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시마의 결정은 일본 함대를 쉬운 표적으로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역사가 제임스 A. 필드 주니어는 시마를 "비극의 광대"라고 비판했다. 한편, 대만 해전 이후 시마는 미끼로 사용된 미군 함선을 간파하고 추격을 중지하여 함대를 위기에서 구한 공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