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키스타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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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콩키스타도르는 15세기부터 17세기에 걸쳐 아메리카 대륙과 아시아, 오세아니아 등지를 탐험하고 정복했던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탐험가, 군인, 정복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종교적 열정과 경제적 이익 추구를 동기로 삼아 항해술과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정복 활동을 벌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에르난 코르테스와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있으며, 이들의 정복 활동은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에 치명적인 질병과 문화 파괴를 초래했다. 콩키스타도르는 유럽의 팽창과 식민주의 시대를 열었으며, 세계사의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16세기 초,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남부 해안을 따라 항해하며 중국으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고, 그 경로를 따라 많은 해안 거점을 설립했다.[4] 스페인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1492년 첫 항해를 통해 신대륙을 발견하고, 1521년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세계 최초로 일주 항해를 성공시킨 이후, 16세기 정복자들이 이끄는 탐험대를 통해 유럽과 이들 지역을 연결하는 무역로를 확립했다.[5]
2. 배경
16세기 초,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남부 해안을 따라 항해하여 중국으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고, 그 경로를 따라 많은 해안 거점을 설립했다.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첫 항해를 통해 스페인인이 신대륙을 발견하고, 1521년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세계 최초로 일주 항해를 한 이후, 16세기 정복자들이 이끄는 탐험대는 유럽과 이들 지역 모두를 연결하는 무역로를 확립했다.[5]
탐험의 시대는 1519년 에르난 코르테스가 아즈텍 제국 정복을 시작하면서 특징지어졌다.[6] 스페인인들은 금과 명예에 이끌려 아즈텍과 관계를 맺고 전쟁을 벌였고, 정복, 도시 건설, 원주민에 대한 문화적 지배는 현대 멕시코에 더 많은 스페인 군대와 지원을 가져왔다. 콜럼버스, 마젤란, 엘카노의 활동으로 해상 무역로가 확립되었고, 육상 지원 시스템도 구축되었다.
감염병은 처음으로 세계적인 전파 경로를 얻었다. 아프리카와 유라시아에서 아메리카로, 그리고 그 반대로 전파되었다.[7][8][9] 구대륙 질병의 확산, 특히 천연두, 독감, 티푸스로 인해 많은 신대륙 원주민들이 사망했다.
16세기에는 약 24만 명의 스페인인이 아메리카 항구에 들어왔다.[10][11] 16세기 후반까지 아메리카에서 수입된 금과 은은 스페인 전체 예산의 5분의 1을 차지했다.[12] 대표적인 콘키스타도르로는 에르난 코르테스(1521년 아즈텍 제국 정복)와 프란시스코 피사로(1533년 잉카 제국 정복)가 있다.[122]
콘키스타도르의 활동은 스페인 국왕의 허가가 필요했지만, 재정적 지원은 거의 없었고, 군대 규모도 작았으며 정복 자체가 투기적인 성격이었다.[123] 이들은 스스로 자금을 모아 조직한 수백 명의 무장한 용병 부대였으며, 스페인 정규군은 거의 포함되지 않았다.[122] 코르테스는 600명, 피사로는 200명이라는 소규모로 막대한 재산을 얻었지만, 에르난도 데 소토의 플로리다 원정처럼 비참한 결말을 맞은 사례도 있다.[123] 소규모 부대로 아즈텍이나 잉카의 대군을 이길 수 있었던 배경에는 화기, 검, 갑옷, 기병(아메리카 대륙에는 말이 없었다) 등 유럽의 과학 기술의 압도적인 우위가 있었다.[122] 원주민 간의 내부 갈등을 이용하거나, 아즈텍의 경우에는 치명적인 미신이 전의 상실로 이어진 것도 이유로 꼽을 수 있다.[122]
정복 완료 후, 왕실은 전리품의 5분의 1(퀸토 레알)을 요구했고, 정복지에 관리를 파견하여 콘키스타도르의 권리를 박탈하기 시작했다.[123] 페루에서 피사로처럼 공공연히 반란을 일으킨 자도 많았고, 특히 엔코미엔다 제도를 둘러싸고 대립했다.[123] 16세기 후반 펠리페 2세 시대에는 총독 제도를 비롯한 행정 기구에 통합되었다.[123]
2. 1. 이베리아 반도의 특수성
Reconquistaes(레콩키스타)는 711년부터 1492년까지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기독교 왕국을 재건하는 과정이었다. 이 과정은 콘키스타도르 정신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레콩키스타를 통해 종교적 열정과 군사적 경험이 결합된 독특한 문화가 형성되었다.
15세기 후반,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중앙집권적인 통일 왕국을 이루며 해외 진출을 위한 강력한 기반을 마련했다. 특히 스페인은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의 결합으로 탄생했으며,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의 통치 아래 강력한 국가로 성장했다.
당시 유럽은 동방과의 무역에서 향신료, 비단 등 귀중품을 얻고자 했으나, 오스만 제국이 지중해 무역을 장악하면서 새로운 무역로 개척이 절실했다. 콘키스타도르는 새로운 무역로를 확보하고, 금과 은 등 귀중한 자원을 획득하려는 경제적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2. 2. 항해술의 발전
15세기 포르투갈은 항해왕자 엔리케의 후원으로 항해술과 조선술을 발전시켰다. 엔리케 왕자는 탐험 여행의 주요 후원자였다. 포르투갈은 1415년 첫 해외 식민지인 세우타를 정복했다.[4]
15세기 포르투갈 탐험가들은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항해하며 무역 기지를 설립, 화약, 향신료, 은, 금, 노예 등을 거래했다. 1434년 첫 노예들이 리스본으로 수송되었고, 인도 아대륙에 도착할 때까지 노예 무역은 포르투갈 상업에서 가장 수익성이 높은 부문이었다. 1441년부터 노예 수입이 시작되면서 포르투갈 왕국은 유럽 내 노예 시장의 지배력을 통해 이베리아 반도 전역에 상당한 노예 인구를 확보할 수 있었다. 정복 시대 이전 유럽에서는 어두운 피부색을 노예 계급과 연관 지어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에게 적용했고, 이러한 인식은 정복자들이 아메리카 탐험을 시작할 때 함께 갔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조종사들의 연이은 탐험과 경험은 유럽 항해술의 빠른 발전을 가져왔다. 13세기에는 태양의 위치를 이용하여 항해했다. 다른 유럽인들처럼 천문 항해에 그리스식 도구인 천구의와 사분의를 사용하였는데, 이들은 이 도구들을 더 간편하고 단순하게 만들었다. 또한 바다에서 태양과 다른 별들의 높이를 측정하기 위한 크로스 스태프 또는 '야곱의 지팡이'를 고안하였다. 남십자성은 1471년 주앙 드 산타렘과 페드루 에스쿠바르가 남반구에 도착하면서 천문 항해에 사용되기 시작하여 기준점이 되었다. 연중 결과값이 다양하게 나타났기 때문에 보정이 필요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포르투갈인들은 천문표(역서)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15세기에 널리 보급된 해양 항해에 있어 귀중한 도구였다. 이러한 표들은 항해에 혁명을 일으켜 위도 계산을 가능하게 하였다. 천문학자 아브라함 자쿠토가 1496년 레이리아에서 출판한 ''알마나크 퍼페투움''의 표들은 바스쿠 다 가마와 페드루 아우베르슈 카브랄이 그들의 개량된 천구의와 함께 사용하였다.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최초의 탐험 시대를 열었던 배는 포르투갈의 카라벨선이었다. 이베리아인들은 이 배를 상선으로 빠르게 채택했다. 아프리카 어선을 기반으로 발전한 이 배는 민첩하고 항해가 용이했으며, 50~160톤의 톤수에 1~3개의 돛대를 가지고 있었고, 삼각돛을 사용하여 풍향 변화에 따른 조정이 가능했다. 카라벨선은 특히 가압항해 능력이 뛰어났다. 초기에는 탐험선이었기 때문에, "화물"은 탐험가가 새로운 영토에 대해 발견한 내용이었고, 한 사람의 공간만 차지했기에 제한된 승무원과 화물 공간은 받아들여졌다.[118] 유명한 카라벨선으로는 ''베리오''와 ''카라벨라 선포''가 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도 그의 항해에 이 배들을 사용했다.
장거리 대양 항해는 더 큰 배로 이어졌다. "나우"는 포르투갈어로 주로 상선을 가리키는 고어였다. 해안을 괴롭히던 해적 활동 때문에 이 배들은 해군에서 사용되기 시작했고, 대포 창문이 설치되어 함포의 위력에 따라 "나우"가 분류되었다. 카라크선 또는 나우는 3개 또는 4개의 돛대를 가진 배였다. 높고 둥근 선미와 큰 선미 캐슬, 선수 캐슬, 그리고 선수에 활대가 있었다. 처음에는 포르투갈인들이 사용했고, 나중에는 스페인인들도 사용했다. 또한 증가하는 해상 무역에 적응했다. 15세기 200톤에서 500톤으로 커졌다. 16세기에는 일반적으로 두 개의 갑판과 전후에 선미 캐슬, 두 개에서 네 개의 돛대와 겹치는 돛을 가지고 있었다. 16세기 인도 항해에는 가장자리가 높고 세 개의 돛대에 사각돛을 단 대형 상선인 카라크선이 사용되었는데, 2,000톤에 달했다.
포르투갈 선박은 해안 탐험 외에도 기상 및 해양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더 먼 바다로 항해했다. 이러한 항해를 통해 해류와 무역풍 및 대서양의 해양 소용돌이에 대한 지식, 그리고 위도의 결정은 아프리카에서 돌아오는 최적의 해상 경로를 발견하는 데 기여했다. 즉, 대서양 중앙부를 가로질러 아소르스 제도로 향하는 경로인데, 이는 대기 순환과 코리올리 효과로 인해 북반구에서 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는 바람과 해류를 이용하여 리스본으로 가는 길을 용이하게 하였다. 이는 포르투갈이 해안에서 더 멀리 항해할 수 있도록 하였고, 이러한 항해 전략은 "볼타 두 마르"( "바다의 귀환")로 알려지게 되었다. 1565년 태평양에서 이 원칙을 적용함으로써 스페인은 마닐라 갈레온 무역로를 발견하게 되었다.
1339년, 마요르카의 안젤리노 둘체르트(Angelino Dulcert)는 포르투란 해도(portolan chart) 지도를 제작했다. 이는 1336년 디니스 국왕(Dinis of Portugal)의 후원을 받은 란셀로토 말로첼로(Lanceloto Malocello)가 제공한 정보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지도에는 "란사로테 마로켈루스 섬(Insula de Lanzarotus Marocelus)"으로 명명되고 제노바 문장으로 표시된 란사로테 섬과 "포르테 베투라(Forte Vetura)"(푸에르테벤투라) 섬, "베기 마리(Vegi Mari)"(로보스 섬) 섬이 표시되어 있다.[119]
메스트레 자코메(Mestre Jacome)는 마요르카 출신의 지도 제작가로, 1420년대에 포르투갈 왕자 항해왕자 엔리케의 초청을 받아 포르투갈로 건너가 포르투갈 지도 제작자들에게 마요르카식 지도 제작법을 가르쳤다.[120]
마요르카 팔마(Palma) 출신의 유대인 지도 제작가 아브라함 크레스케스(Abraham Cresques)의 아들인 예후다 크레스케스(Jehuda Cresques)와 이탈리아계 마요르카인인 안젤리노 둘체르트(Angelino Dulcert)는 항해왕자 엔리케의 휘하 지도 제작가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가장 오래된 서명이 있는 포르투갈 항해 해도는 1485년 페드루 라이넬(Pedro Reinel)이 제작한 포르투란 해도로, 서유럽과 아프리카 일부를 나타내며 디오구 캉의 탐험을 반영하고 있다. 라이넬은 또한 1504년 위도 표시가 있는 최초의 항해 해도와 풍향계(wind rose)를 최초로 표현한 지도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의 아들인 지도 제작가 조르제 라이넬(Jorge Reinel)과 로푸 오멩(Lopo Homem)과 함께 1519년에 "로푸 오멩-라이네스 아틀라스(Lopo Homem-Reinés Atlas)" 또는 "밀러 아틀라스(Miller Atlas)"로 알려진 아틀라스 제작에 참여했다. 1517년 마누엘 1세 국왕은 로푸 오멩에게 선박의 모든 나침반(compass) 바늘을 인증하고 수정할 권한을 부여하는 특허장을 수여했다.
세 번째 항해 지도 제작 단계는 동쪽에 대한 프톨레마이오스의 묘사를 버리고 육지와 대륙의 묘사 정확도를 높이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페르낭 바스 두라두(Fernão Vaz Dourado)는 뛰어난 품질과 아름다움을 갖춘 작품을 제작하여 당대 최고의 지도 제작가 중 한 명으로 명성을 얻었다.
3. 주요 정복 활동
탐험의 시대는 1519년 에르난 코르테스가 아즈텍 제국 정복을 시작하면서 본격화되었다.[6] 스페인인들은 금과 명예를 쫓아 아즈텍과 관계를 맺고 전쟁을 벌였으며, 이 과정에서 도시 건설, 원주민에 대한 문화적 지배를 통해 현대 멕시코에 더 많은 스페인 군대와 지원을 가져왔다. 콜럼버스, 마젤란, 엘카노의 활동으로 해상 무역로가 확립되면서, 코르테스 정복의 수도로 가는 길과 같이 육상 지원 시스템도 구축되었다.
이 시기에는 인간 감염병이 처음으로 세계적인 전파 경로를 얻었다. 아프리카와 유라시아에서 아메리카로, 그리고 그 반대로 전파되었으며,[7][8][9] 특히 천연두, 독감, 티푸스와 같은 구대륙 질병의 확산으로 인해 많은 신대륙 원주민들이 사망했다.
16세기에는 약 24만 명의 스페인인이 아메리카 항구에 들어왔으며,[10][11] 16세기 후반까지 아메리카에서 수입된 금과 은은 스페인 전체 예산의 5분의 1을 차지했다.[12]
항해왕자 엔리케는 탐험 여행의 주요 후원자였으며, 1415년 포르투갈은 첫 번째 해외 식민지인 세우타를 정복했다. 15세기 포르투갈 탐험가들은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항해하며 화약, 향신료, 은, 금, 노예 등을 거래하는 무역 기지를 설립했고, 아프리카와 인도를 횡단하는 무역이 이루어졌다. 1434년 첫 노예들이 리스본으로 수송되었고, 인도 아대륙에 도착할 때까지 노예 무역은 포르투갈 상업에서 가장 수익성이 높은 부문이었다. 1441년부터 노예 수입이 시작되면서 포르투갈 왕국은 유럽 내 노예 시장 지배력을 통해 이베리아 반도 전역에 상당한 노예 인구를 확보할 수 있었다.
정복 시대 이전 유럽에서는 어두운 피부색을 노예 계급과 연관 짓는 인식이 있었고, 이는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에게 적용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정복자들이 아메리카 탐험을 시작할 때도 이어졌으며, 많은 원정대가 정복의 일환으로 노예를 찾게 만들었다.
1479년 페르난도 2세는 이사벨 1세와 결혼하여 스페인 왕국을 건설했다. 그는 결혼을 통해 포르투갈 왕국을 병합하려고 시도했다. 특히 이사벨라는 콜럼버스의 첫 항해를 지원했고, 이는 스페인 정복자들을 활동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결혼 전까지 이베리아 반도는 대체로 분열되어 있었다. 포르투갈, 아라곤, 나바라, 카스티야, 그라나다 등 다섯 개의 독립 왕국은 각각 독립적인 주권과 경쟁적인 이익을 가지고 있었다. 711년 북아프리카 무슬림의 침략으로 시작된 기독교인과 무슬림 간의 이베리아 지배권을 둘러싼 갈등은 1492년까지 지속되었다.[6] 기독교인들은 무슬림들을 그라나다로 몰아붙였고, 그라나다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슬림이 마지막으로 지배한 지역이었다.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1세의 결혼은 두 왕국의 공동 통치를 가져왔고,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이들을 "가톨릭 군주"로 칭송했다.[6] 왕들은 그라나다 함락, 무슬림 소수 민족에 대한 승리, 유대인과 비기독교인의 추방 또는 강제 개종을 통해 이베리아를 종교적으로 동질적인 지역으로 만들었다.
1492년 스페인의 신대륙 발견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탐험 영역 구분을 위한 경계 획정을 필요로 했고, 이는 세계를 두 개의 탐험 및 식민지화 영역으로 나누는 결과를 가져왔다.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은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교황령을 수정하여 카보베르데 서쪽 지점에 그어진 자오선을 따라 동쪽은 포르투갈, 서쪽은 스페인에 할당했다.
경도를 측정하는 당시 방법은 매우 부정확하여 경계선을 정확히 결정할 수 없었고,[15] 조약은 다양한 해석의 대상이 되었다. 포르투갈의 브라질 영유권 주장과 스페인의 몰루카 제도 영유권 주장은 모두 이 조약에 의존했다. 특히 포르투갈은 1497년에서 1499년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항해 완료로 새롭게 발견한 영토를 인정받았다.
이후 스페인이 서쪽에서 인도로 가는 항로를 확보하자 포르투갈은 사라고사 조약을 체결했다.
3. 1. 스페인의 정복 활동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항해로 스페인인들이 신대륙을 발견하고, 1521년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세계 최초로 일주 항해를 성공한 후, 16세기 정복자들이 이끄는 탐험대는 유럽과 신대륙을 연결하는 무역로를 확립했다.[5]
탐험의 시대는 1519년 에르난 코르테스의 아즈텍 제국 정복 시작과 함께 본격화되었으며[6], 이 과정에서 천연두, 독감, 티푸스 등 구대륙 질병이 확산되어 많은 신대륙 원주민들이 사망했다.[7][8][9]
16세기 동안 약 24만 명의 스페인인이 아메리카 항구에 들어왔으며[10][11], 16세기 후반 아메리카에서 수입된 금과 은은 스페인 전체 예산의 5분의 1을 차지했다.[12]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는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와 결혼하여 스페인 왕국을 건설하고, 이후 결혼을 통해 포르투갈 왕국 병합을 시도했다. 이사벨라는 콜럼버스의 첫 항해를 지원하여 스페인 정복자들의 활동 계기를 마련했다.
이베리아 반도는 포르투갈, 아라곤, 나바라, 카스티야, 그라나다 등 다섯 개의 독립 왕국으로 분열되어 있었으나, 711년 북아프리카 무슬림 침략으로 시작된 기독교인과 무슬림 간의 갈등이 1492년까지 지속되었다.[6] 기독교인들은 무슬림들을 그라나다로 몰아냈고, 그라나다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무슬림의 마지막 지배 지역이었다.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1세의 결혼으로 두 왕국은 공동 통치되었고,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이들을 "가톨릭 군주"로 칭송했다.[6] 왕들은 그라나다 함락, 무슬림 소수 민족에 대한 승리, 유대인과 비기독교인 추방 또는 강제 개종을 통해 이베리아를 종교적으로 동질적인 지역으로 만들었다.
1492년 스페인의 신대륙 발견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탐험 영역 구분을 위한 경계 획정을 필요로 했고, 이는 세계를 두 개의 탐험 및 식민지화 영역으로 나누는 결과를 낳았다.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은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교황령을 수정하여 카보베르데 서쪽 자오선을 따라 동쪽은 포르투갈, 서쪽은 스페인에 할당했다.
경도 측정 방법의 부정확성으로 인해 경계선은 정확히 결정될 수 없었고,[15] 조약은 다양한 해석의 대상이 되었다. 포르투갈의 브라질 영유권 주장과 스페인의 몰루카 제도 영유권 주장은 모두 이 조약에 의존했다. 특히 포르투갈은 1497년에서 1499년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항해 완료로 새롭게 발견한 영토를 인정받았다.
이후 스페인이 서쪽에서 인도로 가는 항로를 확보하자 포르투갈은 사라고사 조약을 체결했다.
스페인의 주요 정복 활동은 다음과 같다:
인물 | 지역 | 기간 |
---|---|---|
프란시스코 피사로 | 페루 | 1509년 - 1535년 |
디에고 데 알마그로 | 페루, 칠레 | |
곤살로 피사로 | 페루 | 1540년 - 1542년 |
페드로 데 발디비아 | 칠레 | 1540년 - 1552년 |
세바스티안 데 베라르카살 | 에콰도르, 콜롬비아 | |
곤살로 히메네스 데 케사다 |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 |
후안 디아스 데 솔리스 | 우루과이 | 1516년 |
프란시스코 데 오렐리아나 | 아마존강 | 1541년 - 1543년 |
후안 폰세 데 레온 | 푸에르토리코 (1508년), 플로리다 (1513년 및 1521년) | |
디에고 벨라스케스 데 쿠엘라르 | 쿠바 | 1511년 - 1519년 |
판필로 데 나르바에스 | 플로리다 | 1527년 - 1528년 |
에르난도 데 소토 | 미국 남동부 | 1539년 - 1542년 |
루카스 바스케스 데 아욘 | 현재 미국 동해안 | |
디에고 데 니쿠에사 | 파나마 | 1506년 - 1511년 |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 | 파나마 | |
프란시스코 에르난데스 데 코르도바 | 니카라과 | |
크리스토발 데 올리드 | 온두라스 | 1523년 - 1524년 |
마르틴 데 우르수아 | 과테말라 페텐 지역 | 1696년 - 1697년 |
에르난 코르테스 | 멕시코 (1518년 - 1522년), 온두라스 (1524년), 바하칼리포르니아 반도 (1532년 - 1536년) | |
프란시스코 에르난데스 데 코르도바 | 유카탄 | |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 | 유카탄, 멕시코 | |
페드로 데 알바라도 | 멕시코, 과테말라, 페루 | 1523년-1541년 |
후안 데 그릴할바 | 유카탄 | |
프란시스코 데 몬테호 | 유카탄 | 1527년 - 1546년 |
프란시스코 바스케스 데 코로나도 | 미국 남서부 | |
알바르 누녜스 카베사 데 바카 | 미국 남서부, 남아메리카 | |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 | 필리핀 | 1565년-1571년 |
마르틴 데 고이티 | 필리핀 | 1570년-1571년 |
펠리페 데 살세도 | 필리핀 | |
후안 데 살세도 | 필리핀 | 1570년-1576년 |
3. 1. 1. 아메리카 대륙
에르난 코르테스는 1519년 아즈텍 제국 정복을 시작했다.[6] 스페인인들은 금과 명예를 찾아 아즈텍과 관계를 맺고 전쟁을 벌였다. 이들은 도시를 건설하고 원주민을 문화적으로 지배하며 현대 멕시코에 더 많은 스페인 군대와 지원을 가져왔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페르디난드 마젤란, 후안 세바스티안 엘카노의 활동으로 해상 무역로가 확립되면서, 코르테스의 정복 수도로 가는 길과 같은 육상 지원 시스템도 구축되었다.프란시스코 피사로는 1532년부터 1572년까지 잉카 제국을 정복하고 리마를 건설했다. 그는 잉카 제국의 내분을 이용하고, 아타왈파 황제를 포로로 잡아 막대한 양의 금과 은을 탈취했다.
스페인은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 북아메리카 남부 지역까지 정복 활동을 확장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원주민 문명이 파괴되고, 원주민들은 가혹한 통치를 받았다. 대표적인 콩키스타도르로는 1521년에 아즈텍 제국을 정복한 에르난 코르테스와 1533년에 잉카 제국을 정복한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있다.[122]
콩키스타도르의 활동은 스페인 국왕의 허가가 필요했지만, 재정적 지원은 거의 없었고 군대 규모도 작았으며, 정복 자체가 투기적인 성격의 시도였다.[123] 이들은 스스로 자금을 모아 조직한 수백 명의 무장한 용병 부대였으며, 스페인 정규군은 거의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122] 코르테스는 600명, 피사로는 200명이라는 소규모 병력으로 막대한 재산을 얻었다.[123] 소규모 부대로 아즈텍이나 잉카의 대군을 이길 수 있었던 배경에는 화기와 검, 갑옷, 기병(아메리카 대륙에는 말이 없었다) 등 유럽의 과학 기술의 압도적인 우위가 있었다.[122] 원주민 간의 내부 갈등을 교묘하게 이용하거나, 아즈텍의 경우에는 치명적인 미신이 전의 상실로 이어진 것도 이유로 꼽을 수 있다.[122]
3. 1. 2. 아시아 및 오세아니아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는 1565년에 필리핀을 정복하고 마닐라를 건설했다.[5] 스페인은 필리핀을 통해 아시아 무역 거점을 확보하고, 가톨릭을 전파했다. 또한, 스페인은 괌, 마리아나 제도 등 태평양의 여러 섬을 정복하고 식민지로 삼았다.3. 2. 포르투갈의 정복 활동

15세기 포르투갈 탐험가들은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항해하며 화약, 향신료, 은, 금, 노예 등을 거래하는 무역 기지를 설립했다. 아프리카와 인도를 잇는 무역이 이루어졌으며, 1434년 첫 노예들이 리스본으로 수송되었다. 인도 아대륙에 도착할 때까지 노예 무역은 포르투갈 상업에서 가장 수익성이 높은 부문이었다. 1441년부터 노예 수입이 시작되면서 포르투갈 왕국은 유럽 내 노예 시장 지배력을 통해 이베리아 반도 전역에 상당한 노예 인구를 확보할 수 있었다.[4]
정복 시대 이전 유럽에서는 어두운 피부색을 노예 계급과 연관 짓는 인식이 있었고, 이는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에게 적용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정복자들이 아메리카 탐험을 시작할 때도 이어졌으며, 많은 원정대가 정복의 일환으로 노예를 찾게 만들었다.
4. 콘키스타도르의 특징 및 전략
콩키스타도르들은 탐험과 정복 과정에서 다양한 특징과 전략을 활용했다.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항해로 스페인인들이 신대륙을 발견하고, 1521년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세계 최초로 일주 항해를 성공한 후, 16세기 정복자들은 유럽과 아메리카를 연결하는 무역로를 확립했다.[5] 16세기에는 약 24만 명의 스페인인이 아메리카 항구에 들어왔다.[10][11]
1519년 에르난 코르테스의 아즈텍 제국 정복은 탐험 시대의 특징을 보여주며, 구대륙 질병의 확산은 많은 원주민들의 사망을 초래했다.[7][8][9]
주요 특징 및 전략:
- 탐험 및 무역로 개척: 포르투갈 탐험가들은 15세기 동안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항해하며 화약, 향신료, 은, 금, 노예 등을 거래하는 무역 기지를 세웠다.
- 노예 무역: 1434년 첫 노예들이 리스본으로 수송되었고, 인도 아대륙에 도착할 때까지 노예 무역은 포르투갈 상업에서 가장 수익성이 높은 분야였다.
- 식민지 건설: 1525년,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는 가르시아 호프레 데 로아이사 수사가 이끄는 탐험대에게 아시아 항로 개척 임무를 부여하고, 인도네시아의 몰루쿠 제도를 식민지화하려 했다.
- 선교 활동: 1546년부터 1547년까지 프란시스코 하비에르는 몰루쿠 제도의 암본섬, 테르나테, 모로타이 주민들 사이에서 기독교 전파 활동을 펼쳤다.
- 태평양 무역: 필리핀과 멕시코 사이에는 마닐라 갈레온으로 알려진 태평양 무역이 성립되었다.
- 지형 탐사 및 지도 제작: 1542년 후안 로드리게스 카브리요는 캘리포니아 해안을 항해하며 지형에 이름을 붙였고, 1601년 세바스티안 비스카이노는 해안선을 자세히 지도에 기록했다.
- 일본과의 관계: 1549년 프란시스코 하비에르와 포르투갈 상인들이 예수회 선교사들과 함께 가고시마(규슈)에 도착한 후, 스페인은 일본에 선교사를 파견하여 무역 이권을 확보하려 했다.
주요 콩키스타도르:
이름 | 활동 지역 | 활동 시기 |
---|---|---|
프란시스코 피사로 | 페루 | 1509년 - 1535년 |
디에고 데 알마그로 | 페루, 칠레 | - |
곤살로 피사로 | 페루 | 1540년 - 1542년 |
페드로 데 발디비아 | 칠레 | 1540년 - 1552년 |
세바스티안 데 베라르카살 | 에콰도르, 콜롬비아 | - |
곤살로 히메네스 데 케사다 |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 - |
후안 디아스 데 솔리스 | 우루과이 | 1516년 |
프란시스코 데 오렐리아나 | 아마존강 | 1541년 - 1543년 |
후안 폰세 데 레온 | 푸에르토리코, 플로리다 | 1508년, 1513년, 1521년 |
디에고 벨라스케스 데 쿠엘라르 | 쿠바 | 1511년 - 1519년 |
판필로 데 나르바에스 | 플로리다 | 1527년 - 1528년 |
에르난도 데 소토 | 미국 남동부 | 1539년 - 1542년 |
루카스 바스케스 데 아욘 | 현재 미국 동해안 | - |
디에고 데 니쿠에사 | 파나마 | 1506년 - 1511년 |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 | 파나마 | - |
프란시스코 에르난데스 데 코르도바 | 니카라과 | - |
크리스토발 데 올리드 | 온두라스 | 1523년 - 1524년 |
마르틴 데 우르수아 | 과테말라 페텐 지역 | 1696년 - 1697년 |
에르난 코르테스 | 멕시코, 온두라스, 바하 캘리포니아 반도 | 1518년 - 1522년, 1524년, 1532년 - 1536년 |
프란시스코 에르난데스 데 코르도바 | 유카탄 | - |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 | 유카탄, 멕시코 | - |
페드로 데 알바라도 | 멕시코, 과테말라, 페루 | 1523년 - 1541년 |
후안 데 그릴할바 | 유카탄 | - |
프란시스코 데 몬테호 | 유카탄 | 1527년 - 1546년 |
프란시스코 바스케스 데 코로나도 | 미국 남서부 | - |
알바르 누녜스 카베사 데 바카 | 미국 남서부, 남아메리카 | - |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 | 필리핀 | 1565년 - 1571년 |
마르틴 데 고이티 | 필리핀 | 1570년 - 1571년 |
펠리페 데 살세도 | 필리핀 | - |
후안 데 살세도 | 필리핀 | 1570년 - 1576년 |
4. 1. 군사적 우위
콘키스타도르들은 레콩키스타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군사 전략과 전술을 활용했다. 이들은 원주민들 사이의 정치적 상황을 이용하여 더 큰 제국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기도 했다.[98]스페인과 포르투갈 군대는 외국 땅에서 빠르게 이동하여 수적으로 우세한 적군을 기습했다. 육상 전투에서는 유럽식 전술과 알안달루스의 무슬림 산적들의 기법이 결합되었는데, 소규모 부대가 매복을 통해 적을 기습하는 전술이 사용되었다. 몬바사에서 바스쿠 다 가마는 무장이 거의 없고 무거운 대포도 없는 아랍 상선을 공격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아메리카 대륙의 스페인 정복자들은 검, 창, 석궁을 사용했으며, 1570년대부터 화승총이 널리 보급되었다.[115] 정복자들은 기병 화승총병(근대 용기병의 초기 형태)을 활용했다.[115] 1540년대 프란시스코 데 카르바할은 페루의 스페인 내전에서 화기를 사용하여 유럽에서 발전한 집중 사격 기법을 선보였다.[115]
동물 또한 중요한 요소였다. 말과 다른 짐승의 도입은 원주민 문화에는 알려지지 않은 더 큰 이동성을 제공했다. 그러나 산악과 정글에서는 스페인 사람들이 좁은 아메리카 원주민 도로와 다리를 사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아르헨티나, 뉴멕시코, 캘리포니아 등지에서 원주민들은 승마, 소 사육, 양 치기를 배웠다.
스페인 사람들은 전쟁, 사냥 및 보호를 위해 개를 사육하는 데 능숙했다. 마스티프(mastiff), 스페인 전쟁견,[116] 및 양치기개는 원주민들에게 심리적 무기로 효과적이었다. 일부 원주민들은 사냥개를 가지고 있었지만, 스페인 정복자들은 스페니시 마스티프(Spanish Mastiff)와 다른 몰로서(Molossers)를 타이노(Taíno), 아즈텍(Aztecs), 마야족과의 전투에 사용했다. 특별히 훈련된 개들은 그들의 힘과 사나움 때문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전쟁견은 거의 옷을 입지 않은 군대에 사용되었으며, 살해하고 내장을 파헤치도록 훈련된 갑옷을 입은 개들이었다.[117]
폰세 데 레온의 마스코트인 ''베세릴로(Becerrillo)''는 북아메리카에 도착한 최초의 유럽 개로 알려져 있다. ''베세릴로''의 아들인 ''레온시코(Leoncico)''는 태평양을 본 최초의 유럽 개였으며,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Vasco Núñez de Balboa)의 마스코트였다.
4. 2. 동맹과 분열 전략
정복자들은 원주민들 사이의 정치적 상황을 이용하여 더 큰 제국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었다. 잉카 제국 문명을 정복하기 위해 그들은 내전의 한쪽 편을 지원했다. 스페인은 더 강력한 이웃 부족과 왕국에 정복당했던 원주민들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아즈텍 문명을 전복시켰다. 이러한 전술은 스페인이 그라나다 전쟁, 카나리아 제도 정복 및 나바라 정복에서 사용한 바 있다. 정복 과정 전체에서 원주민들은 정복자들보다 훨씬 수적으로 많았다. 정복자 군대는 원주민 인구의 2%를 넘지 않았다. 에르난 코르테스가 테노치티틀란을 포위했을 때의 군대는 20만 명으로 구성되었는데, 그중 1% 미만이 스페인인이었다.[98]4. 3. 종교적 명분
콘키스타도르들은 기독교 전파를 자신들의 정복 활동에 대한 주요 명분 중 하나로 내세웠다. 이들은 원주민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강요하고, 그들의 전통적인 종교와 문화를 파괴하는 경우가 많았다.




콩고의 아폰수 1세가 등극하면서 콩고 왕국의 로마 가톨릭 교회가 설립되었다.[58] 1516년 아폰수 1세는 그의 자녀들과 귀족들을 유럽으로 유학 보냈는데, 그중에는 1518년 주교로 임명된 그의 아들 엔리케 키누 아 엠베바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폰수 1세는 포르투갈 왕 마누엘 1세와 주앙 3세에게 편지를 여러 차례 보내, 자국 내 포르투갈인들의 행동과 발전하는 노예 무역에서 그들의 역할에 대해 불만을 제기했다. 불법적으로 노예로 팔린 사람들을 구매하는 데 포르투갈인들이 공모한 것과 아폰수의 신하들, 콩고에 고용된 포르투갈 용병들, 그리고 포르투갈인들에 의한 노예 포획 및 판매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 항의했다.[58]
1546년부터 1547년까지 프란시스코 하비에르(Francis Xavier)는 몰루쿠 제도의 암본섬(Ambon Island), 테르나테(Ternate), 모로타이(Morotai) 주민들 사이에서 활동하며 기독교의 기반을 마련했다.

정복자들은 원주민을 개종시키고, 새로운 영토에서 교회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선교사들을 동반했다. 선교사들은 원주민들에게 기독교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고, 교회를 세우는 역할을 수행했다.
5. 콘키스타도르의 영향
콩키스타도르의 활동은 16세기 세계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스페인 선원들이 1492년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 상륙한 이후,[5]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일주 항해를 통해 유럽과 아메리카, 아시아를 연결하는 무역로가 확립되었다. 에르난 코르테스가 1519년 아즈텍 제국 정복을 시작하면서 탐험의 시대가 본격화되었다.[6]
이 과정에서 인간 감염병이 처음으로 세계적인 전파 경로를 얻었다. 아프리카와 유라시아에서 아메리카로, 그리고 그 반대로 질병이 전파되면서[7][8][9] 구대륙 질병, 특히 천연두, 독감, 티푸스로 인해 많은 신대륙 원주민들이 사망했다.
16세기에는 약 24만 명의 스페인인이 아메리카 항구에 들어왔고,[10][11] 16세기 후반까지 아메리카에서 수입된 금과 은은 스페인 전체 예산의 5분의 1을 차지했다.[12]
포르투갈은 항해왕자 엔리케의 후원으로 15세기부터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항해하며 무역 기지를 설립하고 노예 무역으로 이익을 얻었다. 1511년에는 광저우에 도착하여 마카오를 거점으로 동남아시아 무역에 참여했다. 디오구 로드리게스는 마스카렌 제도를 탐험했고, 프란시스쿠 세라웅은 테르나테와 동맹을 맺고 말루쿠 제도에서 포르투갈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따라 포르투갈은 주앙 페르난데스 라브라도르, 코르테-레알 형제, 주앙 알바레스 파군데스 등을 파견하여 캐나다 지역을 탐험하고 영유권을 주장했다.
이러한 콩키스타도르들의 활동은 유럽 중심의 세계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세계 역사의 흐름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는 파괴되었고, 수많은 원주민들이 질병과 전쟁으로 목숨을 잃었다.
5. 1.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의 파괴
콩키스타도르의 침략은 아메리카 원주민 사회에 엄청난 파괴를 가져왔다.에르난 코르테스가 아즈텍 제국 정복을 시작한 1519년은 탐험 시대의 특징적인 사건이었다.[6]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페르디난드 마젤란 등의 활동으로 해상 무역로가 확립되면서 육상 지원 시스템도 구축되었다.
인간 감염병은 처음으로 세계적인 전파 경로를 얻어, 아프리카와 유라시아에서 아메리카로, 그리고 그 반대로 전파되었다.[7][8][9] 특히 천연두, 독감, 티푸스와 같은 구대륙 질병의 확산은 신대륙 원주민들에게 치명적이었다. 많은 원주민들이 이러한 질병으로 사망했다.
16세기에는 약 24만 명의 스페인인이 아메리카 항구에 들어왔으며,[10][11] 16세기 후반까지 아메리카에서 수입된 금과 은은 스페인 전체 예산의 5분의 1을 차지했다.[12]

최근 연구에 따르면, 나무 나이테 증거를 통해 아즈텍 멕시코의 인구 감소를 초래한 질병이 16세기의 심각한 가뭄으로 인해 악화되었고, 스페인 정복이 시작될 때까지 계속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99][100] 1545년부터 1548년까지의 코코리즐티 유행병은 약 500만~1500만 명, 즉 원주민 인구의 최대 80%를 사망하게 했다. 1576년부터 1578년까지의 코코리즐티 유행병은 추가적으로 약 200만~250만 명, 즉 나머지 인구의 약 50%를 사망하게 했다.[101][102]
미국의 연구원 헨리 도빈스는 아메리카 대륙 전체 인구의 95%가 처음 130년 동안 사망했다고 주장했으며,[103] 잉카 제국 인구의 90%가 유행병으로 사망했다고 밝혔다.[104]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캠퍼스의 쿡과 보라는 멕시코의 원주민 인구가 1518년 2520만 명에서 1623년 70만 명으로 감소하여 원래 인구의 3% 미만이 되었다고 추정한다.[105]
콩키스타도르는 원주민들의 전통 종교, 언어, 문화를 파괴하고 유럽식 문화를 강요했으며, 전통적인 경제 시스템을 파괴하고 유럽 중심의 식민지 경제 시스템을 구축했다.
5. 2. 유럽의 팽창과 식민주의
탐험 시대는 1519년 에르난 코르테스가 아즈텍 제국 정복을 시작하면서 본격화되었다.[6] 스페인인들은 금과 명예를 찾아 아즈텍과 전쟁을 벌였고, 이는 현대 멕시코에 더 많은 스페인 군대와 지원을 가져왔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페르디난드 마젤란, 후안 세바스티안 엘카노의 해상 무역로 확립에 이어, 코르테스의 정복로와 같은 육상 지원 시스템도 구축되었다.16세기에는 약 24만 명의 스페인인이 아메리카 항구에 들어왔으며,[10][11] 16세기 후반까지 아메리카에서 수입된 금과 은은 스페인 전체 예산의 5분의 1을 차지했다.[12]
항해왕자 엔리케는 탐험 여행의 주요 후원자였다. 1415년 포르투갈은 첫 해외 식민지인 세우타를 정복했다. 15세기 내내 포르투갈 탐험가들은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항해하며 화약, 향신료, 은, 금, 노예 등을 거래하는 무역 기지를 설립했다. 1434년 첫 노예들이 리스본으로 수송되었고, 인도 아대륙에 도착할 때까지 노예 무역은 포르투갈 상업에서 가장 수익성이 높은 부문이었다. 1441년부터 노예 수입이 시작되면서 포르투갈 왕국은 유럽 내 노예 시장 지배력을 통해 이베리아 반도 전역에 상당한 노예 인구를 확보할 수 있었다.
정복 시대 이전 유럽에서는 이미 어두운 피부색을 노예 계급과 연관 지어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에게 적용했다. 이러한 인식은 정복자들이 아메리카 탐험을 시작할 때 함께 가져갔고, 많은 원정대가 정복의 일환으로 노예를 찾도록 만들었다.
1509년 자메이카 섬에 최초의 스페인 정착지인 세비야라 누에바가 설립되었으나, 건강에 좋지 않은 위치 때문에 1534년경 스페니시타운으로 옮겨졌다.[16][17]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바하마의 과나하니에 처음 상륙한 후, 쿠바 섬을 발견하고 "이슬라 후아나"라고 명명했다.[18] 1511년 쿠바의 첫 번째 아델란타도인 디에고 벨라스케스 데 쿠엘라르는 바라코아에 섬 최초의 스페인 정착지를 세웠고, 이후 아바나를 포함한 다른 도시들이 건설되었다(1515년).

디에고 벨라스케스 데 쿠엘라르는 유카탄 반도로 향한 프란시스코 에르난데스 데 코르도바 원정대를 포함하여 더 서쪽 땅을 탐험하기 위한 원정대를 승인했다. 그는 조카 후안 데 그리할바가 이끄는 유카탄 원정대와 1519년 에르난 코르테스 원정대를 지휘했다. 처음에는 코르테스의 멕시코 원정을 지원했지만, 개인적인 적대감 때문에 판필로 데 나르바에스에게 코르테스를 체포하도록 명령했다. 그리할바는 네 척의 배와 약 240명의 병력을 이끌고 파견되었다.[19]

에르난 코르테스는 페드로 데 알바라도와 베르나르디노 바스케스 데 타피아를 포함한 멕시코 원정을 이끌었다. 아즈텍 제국에 대한 스페인의 원정은 1521년 8월 13일, 코르테스와 틀락스칼라 전사 연합군이 아즈텍 제국의 황제 쿠아우테목과 수도 테노치티틀란을 함락하면서 최종 승리를 거두었다. 테노치티틀란의 함락은 중앙 멕시코에서 스페인의 통치가 시작된 것을 의미하며, 그들은 테노치티틀란의 폐허 위에 멕시코시티를 수도로 건설했다. 아즈텍 제국의 스페인 정복은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다.
1516년 후안 디아스 데 솔리스는 우루과이 강과 파라나 강의 합류점에 의해 형성된 강어귀를 발견했다.
1517년 프란시스코 에르난데스 데 코르도바는 유카탄 해안을 따라 노예를 찾아 쿠바에서 항해를 시작했다.[20][21] 이 원정대는 새로운 땅의 발견을 보고하기 위해 쿠바로 돌아왔다.
쿠바 총독 디에고 데 벨라스케스는 현재 타바스코 지역에 금이 있다는 후안 데 그리할바의 소식을 받고 이전보다 더 큰 함대를 파견하여 코르테스를 함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코르테스는 자신의 모든 자금을 사용하고, 재산을 담보로 잡히고, 상인과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 배를 장비했다. 벨라스케스는 이 노력에 기여했을 수도 있지만, 스페인 정부는 재정적 지원을 하지 않았다.[22]

이슬라 에스파뇰라의 총독 페드로 아리아스 다빌라는 콘베르소 가문 출신이었다. 1519년 다빌라는 다리엔을 건설했고, 1524년 파나마시티를 건설하여 수도를 이곳으로 옮겼다. 이는 남아메리카 서해안 탐험과 페루 정복의 기초를 마련했다. 다빌라는 질 곤살레스 다빌라를 북쪽으로, 페드로 데 알바라도를 과테말라 탐험으로 보냈다. 1524년 그는 프란시스코 에르난데스 데 코르도바와 함께 또 다른 원정대를 파견했는데, 그는 85세가 넘은 다빌라에 의해 1526년 처형되었다.

다빌라는 프란시스코 피사로와 디에고 데 알마그로와 협정을 맺어 페루 발견을 가져왔지만, 결과에 대한 확신을 잃고 1526년 소액의 보상을 받고 물러났다. 1526년 다빌라는 페드로 데 로스 리오스 이 구티에레스 데 아구아요에 의해 파나마 총독직에서 물러났지만, 1527년 니카라과 레온의 총독이 되었다.

프란시스코 피사로와 그의 형제들이 이끄는 원정대는 오늘날 파나마에서 남쪽으로 탐험하여 1526년까지 잉카 제국 영토에 도착했다.[23] 1529년 한 번 더 원정을 간 후, 피사로는 그 지역을 정복하고 총독이 되는 왕실 승인을 받았다. 승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529년 7월 스페인 여왕은 피사로가 잉카를 정복할 수 있도록 허가하는 칙령에 서명했다. 피사로는 새로운 카스티야의 모든 정복의 총독이자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24] 1542년 남아메리카의 모든 스페인령을 포함하는 페루 부왕령이 설립되었다.
1536년 초, 카나리아 제도의 아델란타도 페드로 페르난데스 데 루고는 콜롬비아의 산타 마르타에 총독으로 도착했다. 시에라 네바다 데 산타 마르타로의 몇 차례 원정 후, 페르난데스 데 루고는 마그달레나 강을 따라 페루로 가는 육로를 찾아 초기 영토 내부로 원정대를 파견했다. 이 원정대는 곤살로 히메네스 데 케사다가 지휘했는데, 그는 결국 원주민 무이스카를 발견하고 정복하여 새로운 그라나다 왕국을 건설했다. 이 왕국은 거의 2세기 동안 부왕령이었다. 히메네스 데 케사다는 또한 콜롬비아의 수도 산타페 데 보고타를 건설했다.
후안 디아스 데 솔리스는 잉카 정복 후, 리오 데 라 플라타(은의 강)로 개명된 곳에 다시 도착했다. 그는 포토시의 은을 유럽으로 운송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잉카 은광 덕분에 오랫동안 포토시는 볼리비아 포토시 주에 위치한 식민지 시대 스페인 아메리카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었으며[25] 스페인 식민지 조폐국이 있던 곳이었다. 그 길에 있는 첫 번째 정착지는 1527년 파라나 강 옆에 설립된 산티 스피리투 요새였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1536년에 건설되어 리오 데 라 플라타 총독령을 수립했다.[26]
아프리카인들도 카리브해와 멕시코의 초기 정복 원정에서 정복자였다. 1500년대에는 대서양을 횡단하는 스페인 배에 노예로 끌려온 흑인과 자유 흑인 선원들이 있었고, 아메리카에서 새로운 정복과 무역 경로를 개발했다.[27]
아즈텍과 싸우고 제국의 멸망에서 살아남은 흑인 정복자 중 한 명이 후안 가리도였다.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가리도는 포르투갈에서 젊은 노예로 살다가 스페인인에게 팔려서 푸에르토리코, 쿠바 및 기타 섬 정복에서 싸우며 자유를 얻었다. 그는 1520년대와 1530년대에 멕시코의 다른 지역(바하 캘리포니아 포함)으로 스페인 원정에 참가했다. 멕시코시티에서 집 부지를 받은 그는 그곳에서 가족을 꾸리고 때때로 경비원과 도시 외침꾼으로 일했다. 그는 멕시코에 최초로 밀을 심은 사람이라고 주장했다.[28]
세바스티안 토랄은 아프리카 노예였고 신세계의 최초 흑인 정복자 중 한 명이었다. 노예였던 그는 스페인인 주인과 함께 원정에 나섰다. 그는 이 봉사 중에 자유를 얻었다. 그는 자유로운 정복자로서 스페인인들과 함께 1540년 유카탄의 마야와 싸웠다. 정복 후 그는 새로 형성된 유카탄 식민지 메리다 시에 가족과 함께 정착했다. 1574년 스페인 왕관은 식민지의 모든 노예와 자유 흑인이 왕관에 조공을 바쳐야 한다고 명령했다. 그러나 토랄은 그의 정복 기간 동안의 봉사를 근거로 세금에 항의하는 글을 썼다. 스페인 왕은 토랄의 봉사 때문에 세금을 낼 필요가 없다고 응답했다. 토랄은 세 차례의 대서양 항해와 두 번의 정복 원정의 베테랑으로 사망했고, 위대한 스페인 왕에게 성공적으로 청원을 제기했고, 리스본, 세비야, 멕시코시티의 거리를 걸었고, 아메리카의 수도 건설에 도움을 준 사람이었다.[29]
후안 발리엔테는 서아프리카에서 태어나 포르투갈 상인이 아프리카 노예상으로부터 구입했다. 1530년경 그는 알론소 발리엔테에게 팔려 멕시코 푸에블라에서 노예 가정부가 되었다. 1533년 후안 발리엔테는 주인과 4년 동안 정복자로 활동하고 모든 수입을 알론소에게 돌려주는 협약을 맺었다. 그는 칠레와 페루에서 수년 동안 싸웠다. 1540년까지 그는 칠레 페드로 데 발디비아의 회사에서 대장, 기수, 파트너였다. 그는 나중에 그가 발디비아가 세운 도시인 산티아고에서 영지를 하사받았다. 알론소와 발리엔테는 모두 발리엔테의 해방에 관한 협정을 맺고 알론소에게 수여된 돈을 보내기 위해 서로 연락하려고 했다. 그들은 결코 서로 연락할 수 없었고 발리엔테는 1553년 투카펠 전투에서 사망했다.[30]
다른 흑인 정복자로는 페드로 풀루포, 후안 바르달레스, 안토니오 페레스, 후안 포르투게스가 있다. 페드로 풀루포는 코스타리카에서 싸운 흑인 노예였다. 후안 바르달레스는 온두라스와 파나마에서 싸운 아프리카 노예였다. 그의 봉사로 그는 해방과 50페소의 연금을 받았다. 안토니오 페레스는 북아프리카 출신의 자유 흑인이었다. 그는 베네수엘라 정복에 합류하여 대장이 되었다. 후안 포르투게스는 베네수엘라 정복에서 싸웠다.[30]


1500년대에 스페인은 북아메리카를 탐험하고 식민지화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외국의 왕국에서 금을 찾고 있었다. 1511년까지 히스파니올라의 북서쪽에 미지의 땅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후안 폰세 데 레온은 자신의 비용으로 적어도 200명의 인원을 태운 세 척의 배를 준비하고 1513년 3월 4일 푸에르토리코에서 플로리다와 그 주변 해안 지역으로 출발했다. 또 다른 초기 동기는 사막 남서부 어딘가에 아메리카 원주민이 건설했다고 알려진 황금의 일곱 도시 또는 "시볼라"를 찾는 것이었다. 1536년 프란시스코 데 우요아는 콜로라도 강에 도착한 최초로 기록된 유럽인으로 캘리포니아 만과 강 삼각주로 약간 진입하여 항해했다.[31]
바스크인들은 1520년 테라노바(라브라도어와 뉴펀들랜드 섬)에서 모피 무역, 대구 어업, 고래잡이를 하고 있었고,[32] 적어도 17세기 초에는 아이슬란드에서도 활동했다.[33][34] 그들은 전자, 주로 뉴펀들랜드 래브라도 주 레드베이에 고래잡이 기지를 설립했고,[35] 후자에도 일부 기지를 설립했을 가능성이 있다. 테라노바에서는 북극고래와 대왕고래를 사냥했고, 아이슬란드에서는[36] 후자만 사냥했던 것으로 보인다.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초 스페인과 다른 유럽 열강 간의 갈등으로 테라노바의 스페인 어업은 쇠퇴했다.
1524년, 페르디난드 마젤란 함대에서 항해했던 포르투갈인 에스테반 고메스는 노바스코샤를 탐험하고 메인을 지나 남쪽으로 항해하여 뉴욕 항과 허드슨 강에 진입했고, 결국 1525년 8월 플로리다에 도착했다. 그의 탐험 결과, 1529년 디에고 리베이루 세계 지도는 북아메리카 동해안을 거의 완벽하게 묘사했다.

스페인인 카베사 데 바카는 1527년부터 1535년까지 북아메리카 본토를 탐험한 600명의 나르바에스 원정대의 지도자였다.[37] 1528년 4월 15일 플로리다 주 템파베이에서 그들은 플로리다를 통과하여 행진했다. 주로 도보로 여행하면서 텍사스, 뉴멕시코, 애리조나와 타마울리파스 주, 누에보레온 주, 코아우일라 주 등 멕시코 주를 횡단했다. 야생과 늪을 통과하며 여러 달 동안 원주민과 싸운 후, 그 일행은 242명의 인원으로 아팔라치 만에 도착했다. 그들은 멕시코에 있는 다른 스페인 사람들 근처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그들 사이에 1500마일의 해안이 있었다. 그들은 해안을 서쪽으로 따라가다가 갈베스턴 섬 근처 미시시피 강 어귀에 도착했다.

나중에 그들은 상부 멕시코 만 연안의 여러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에게 몇 년 동안 노예로 팔렸다. 그들은 코아우일라와 누에바비스카야를 통과하여 캘리포니아 만 해안을 따라 현재 시날로아 주, 멕시코까지 약 8년 동안 이동했다. 그들은 루이지애나 만 섬의 아나나리보 부족에게 수년간 노예로 팔렸다. 나중에 그들은 ''한스''(Hans), ''카포케스''(Capoques) 등에게 노예로 팔렸다. 1534년 그들은 미국 내륙으로 탈출하여 그 과정에서 다른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과 접촉했다. 카베사 데 바카, 안드레스 도란테스 데 카란사, 알론소 델 카스티요 말도나도, 그리고 노예로 잡힌 모로코 베르베르 족인 에스테바니코 등 네 명만이 살아남아 멕시코시티에 도착했다. 1539년 에스테바니코는 전설적인 시볼라의 일곱 도시를 찾아 마르코스 데 니사를 안내하는 네 명 중 한 명이었고, 프란시스코 바스케스 데 코로나도보다 먼저 갔다. 다른 사람들이 병에 걸리자 에스테바니코는 혼자 계속해서 현재의 뉴멕시코와 애리조나를 열었다. 그는 현재 뉴멕시코에 있는 주니 족 마을 하위쿠에서 살해되었다.

누에바에스파냐의 총독 안토니오 데 멘도사(멘도사 사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됨)는 1540년~1542년에 누에바에스파냐의 북부 지역을 탐험하고 정착지를 건설하기 위해 여러 탐험대를 파견했다. 프란시스코 바스케스 데 코로나도는 캔자스 중부의 퀴비라에 도착했다. 후안 로드리게스 카브릴로는 1542년~1543년에 알타 캘리포니아의 서해안을 탐험했다. 바스케스 데 코로나도의 1540년~1542년 원정은 전설적인 황금 도시를 찾는 것으로 시작되었지만, 뉴멕시코의 원주민으로부터 서쪽에 있는 큰 강에 대해 알게 된 후, 그는 가르시아 로페스 데 카르데나스를 파견하여 그것을 찾도록 했다. 호피족 인디언의 안내를 받아 카르데나스와 그의 부하들은 그랜드 캐니언을 본 최초의 외부인이 되었다.[38] 그러나 카르데나스는 콜로라도 강의 폭을 1.8m로 추정하고 약 91.44m 높이의 암석 형성을 사람의 크기로 추정하며 캐니언에 감명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강으로 내려가는 시도에 실패한 후, 그들은 험난한 지형과 혹독한 날씨에 패배하여 그 지역을 떠났다.[39]
1540년 에르난도 데 알라르콘과 그의 함대는 콜로라도 강 어귀에 도착하여 코로나도 원정대에 추가 보급품을 제공하려고 했다. 알라르콘은 현재 캘리포니아-애리조나 국경까지 콜로라도 강을 상류로 항해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코로나도는 캘리포니아 만에 도착하지 못했고, 알라르콘은 결국 포기하고 떠났다. 멜키오르 디아스는 같은 해에 알라르콘과 접촉하기 위해 삼각주에 도착했지만, 디아스가 도착했을 때 알라르콘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디아스는 콜로라도 강을 ''리오 델 티손''(Río del Tizón)이라고 명명했고, ''콜로라도''("붉은 강")라는 이름은 처음에 길라 강의 지류에 적용되었다.

1540년, 에르난도 데 알라르콘과 멜키오르 디아스의 지휘하에 탐험대가 애리조나 주 유마 지역을 방문했고, 즉시 멕시코에서 캘리포니아로 육로로 콜로라도 강을 건널 수 있는 자연적인 지점을 도시에 이상적인 장소로 보았다. 콜로라도 강은 한 지점에서 약 약 304.80m 미만으로 좁아진다. 유마 크로싱 국립 유산 지역에서 콜로라도 강을 건넌 후속 군사 탐험에는 후안 바우티스타 데 안사(1774)의 탐험이 포함된다.
세비야 출신의 흑인 가정부 루이사 데 아브레고와 세고비아 출신의 백인 콘키스타도르 미겔 로드리게스의 1565년 세인트 어거스틴(스페인 플로리다) 결혼은 미국 본토 어디에서든 최초로 알려지고 기록된 기독교 결혼이다.[40]
차무스카도와 로드리게스 원정은 1581년~1582년에 뉴멕시코를 탐험했다. 그들은 1540년~1542년 사이에 코로나도가 방문했던 뉴멕시코의 일부 경로와 미국 남서부의 다른 지역을 탐험했다.
누에바에스파냐의 총독 돈 디에고 가르시아 사르미엔토는 1648년에 캘리포니아를 탐험하고 정복하며 식민지화하기 위한 또 다른 원정대를 파견했다.
1511년, 포르투갈인들은 바닷길로 광저우에 도착한 최초의 유럽인이었으며, 다른 국가들과의 무역 독점을 위해 항구에 정착했습니다. 이후 그들은 정착지에서 쫓겨났지만, 1511년에 점령한 마카오를 사용하고 1557년 광저우와의 무역 거점으로 삼는 것을 허락받았습니다. 이 지역의 외국 무역에 대한 준독점은 17세기 초 스페인과 네덜란드가 도착할 때까지 포르투갈에 의해 유지되었습니다.
포르투갈의 디오구 로드리게스는 1528년 인도양을 탐험했고, 레위니옹, 모리셔스, 로드리게스 섬을 탐험하여 그의 동포인 페드로 마스카렌하스의 이름을 따서 마스카렌 제도라고 명명했습니다. 페드로 마스카렌하스는 이전에 그곳에 있었습니다. 포르투갈의 존재는 동남아시아 무역을 혼란스럽게 하고 재편성했으며, 인도네시아 동부에서는 기독교를 전파했습니다.[71] 1511년 8월 포르투갈이 말라카를 합병한 후, 한 포르투갈 일기에는 "그들이 무어인이 된 지 30년이 되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72] 이는 당시 그 지역에서 이슬람과 유럽의 영향 사이에 일어났던 경쟁을 보여줍니다. 아폰수 드 알브케르크는 반다 제도와 다른 "향신료 제도"로 가는 길을 알게 되었고, 안토니우 드 아브레우, 시망 아폰수 비시구두, 프란시스쿠 세라웅의 지휘하에 3척의 선박으로 탐험대를 파견했습니다.[73] 귀환 여행 중 프란시스쿠 세라웅은 1512년 히투 섬(북부 암본 섬)에서 난파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무술 실력에 감명을 받은 현지 통치자와 관계를 맺었습니다. 테르나테와 티도레의 경쟁하는 섬 국가의 통치자들도 포르투갈의 지원을 구했고, 신참들은 1511년 말라카에서의 분쟁 이후 자바인과 말레이인의 항해가 일시적으로 중단됨에 따라 지역 무역의 침체기에 물품과 향신료의 구매자로 환영받았습니다. 향신료 무역은 곧 다시 활기를 띠었지만, 포르투갈은 이 무역을 완전히 독점하거나 방해할 수 없었습니다.[74]
세라웅은 테르나테 통치자와 동맹을 맺고 그 작은 섬에 요새를 건설했으며, 대부분의 향신료 무역을 장악한 두 명의 지역 분쟁 술탄 중 한 명의 봉사하에 포르투갈 선원 용병대의 대장으로 활동했습니다. 유럽에서 멀리 떨어진 그러한 전초기지는 대체로 가장 절박하고 탐욕스러운 사람들만을 끌어들였고, 그러한 기독교화의 미약한 시도는 테르나테의 이슬람 통치자와의 관계를 악화시켰습니다.[74] 세라웅은 페르디난드 마젤란에게 말루쿠에 합류할 것을 촉구했고, 향신료 제도에 대한 정보를 탐험가에게 보냈습니다. 그러나 세라웅과 마젤란 모두 만나기 전에 사망했으며, 마젤란은 마카탄에서 전투 중에 사망했습니다.[74] 1535년 타바리지 술탄은 폐위되어 고아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여 이름을 돔 마누엘로 바꾸었습니다. 그에 대한 혐의에서 무죄가 선고된 후 그는 옥좌에 복귀하기 위해 다시 보내졌지만, 1545년 말라카에서 가는 도중 사망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암본 섬을 그의 포르투갈 대부인 조르당 드 프레이타스에게 유증했습니다. 유럽인들의 손에 하이룬 술탄이 살해된 후, 테르나테 사람들은 5년간의 포위 공격 후 1575년에 증오하는 외국인들을 추방했습니다.
포르투갈인들은 1513년에 처음으로 암본 섬에 상륙했지만, 테르나테에서 추방된 후에야 말루쿠에서 그들의 활동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 지역의 유럽 세력은 약했고, 테르나테는 바압 울라(재위 1570~1583) 술탄과 그의 아들 사익드 술탄 통치하에 확장되는 강력한 이슬람 국가이자 반유럽 국가가 되었습니다.[75] 그러나 암본의 포르투갈인들은 특히 자바 북부 해안의 주요 항구 도시와 무역 및 종교적 연계가 있었던 히투와 같은 섬 북부 해안의 이슬람 원주민들에게 정기적으로 공격을 받았습니다. 전반적으로 포르투갈은 향신료 지역 무역을 통제할 자원이나 병력이 없었고, 대부분의 육두구와 메이스 생산의 중심지인 근처의 중요한 반다 제도에 대한 권위를 확립하려는 시도에 실패했습니다. 포르투갈 선교 활동 이후, 특히 암본 사람들 사이에서 인도네시아 동부에 대규모 기독교 공동체가 생겨났습니다.[75] 1560년대에는 이 지역에 주로 암본에 1만 명의 가톨릭 신자가 있었고, 1590년대에는 5만~6만 명이 있었지만, 암본 주변 지역의 대부분은 이슬람교 지역으로 남아있었습니다.[75]
모리셔스는 1507년(디오구 페르난데스 페레이라에 의해)과 1513년 사이에 포르투갈인들에 의해 방문되었습니다. 포르투갈인들은 고립된 마스카렌 제도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주요 아프리카 기지는 모잠비크에 있었기 때문에 포르투갈 항해사들은 인도로 가는 데 모잠비크 해협을 이용하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북쪽의 코모로는 더 실용적인 기항지임이 증명되었습니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근거하여, 마누엘 1세는 1497년과 1498년에 존 캐벗이 방문한 지역에 대한 영토 권리를 주장했습니다.[76] 그러한 목적으로, 1499년과 1500년에 포르투갈 항해사 주앙 페르난데스 라브라도르는 북동부 대서양 연안과 그린란드, 그리고 캐나다의 북대서양 연안을 방문했는데, 이는 당시 지형도에 "
5. 3. 세계사의 변화
콩키스타도르들의 활동은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을 연결하는 대서양 삼각 무역을 만들었다.[5] 16세기에는 약 24만 명의 스페인인이 아메리카 항구에 들어왔으며,[10][11] 같은 시기 아메리카에서 수입된 금과 은은 스페인 전체 예산의 5분의 1을 차지했다.[12] 15세기부터 포르투갈 탐험가들은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항해하며 화약, 향신료, 은, 금, 노예와 같은 상품을 거래하는 무역 기지를 설립했고, 아프리카와 인도를 횡단하는 무역이 이루어졌다.[71] 1434년 첫 노예들이 리스본으로 수송되었고, 노예 무역은 포르투갈 상업에서 가장 수익성이 높은 부문이었다.[72]크리스토퍼 콜럼버스, 페르디난드 마젤란 등의 활동으로 해상 무역로가 확립되었고, 인간 감염병이 처음으로 세계적인 전파 경로를 얻어 아프리카와 유라시아에서 아메리카로, 그리고 그 반대로 전파되었다.[7][8][9] 특히 천연두, 독감, 티푸스와 같은 구대륙 질병의 확산으로 인해 많은 신대륙 원주민들이 사망했다.
이러한 콩키스타도르의 탐험과 정복은 유럽 중심의 세계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6. 한국의 관점에서의 평가
콩키스타도르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 시각과 비판적 시각으로 나뉜다. 긍정적 시각은 이들을 신대륙 발견과 문명 전파의 주역으로 보지만, 한국의 관점에서는 비판적 시각이 우세하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후,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세계 일주 항해 등 탐험가들의 활동으로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 간 교류가 시작되었다.[5] 에르난 코르테스는 아즈텍 제국을 정복하고, 프란시스코 데 오레야나는 아마존 강을 탐험하는 등 콩키스타도르들은 새로운 지역을 탐험하고 유럽에 알렸다.[6] 이 과정에서 천연두, 독감 등 구대륙의 질병이 아메리카 대륙에 전파되어 원주민 인구가 감소하기도 했다.[7][8][9]
16세기 아메리카에서 유입된 금과 은은 스페인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12] 그러나 콩키스타도르들은 엘도라도와 같은 황금 도시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탐험을 계속했지만, 대부분 큰 성과를 얻지 못했다.[107][108]
6. 1. 비판적 시각
콘키스타도르의 활동은 명백한 폭력과 침략 행위였으며, 이는 한국의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비판적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은 일본 제국에 의해 강제로 식민 지배를 당했으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인명 피해와 문화적 손실을 겪었다. 콘키스타도르가 아메리카 원주민 문화를 파괴한 것은 한국의 전통 문화를 말살하려 했던 일제의 정책과 유사하다. 또한 콘키스타도르의 자원 약탈과 노예 무역은 일제의 경제적 수탈과 강제 징용을 연상시킨다.에르난 코르테스와 프란시스코 피사로와 같은 콘키스타도르들은 아즈텍, 잉카 제국과 같은 아메리카 원주민 문명을 파괴하고, 황금을 약탈했다.[122] 이들은 원주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했으며, 일부는 강간과 폭행을 저지르기도 했다.[122]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와 같이 이러한 만행을 고발한 사람도 있었지만, 소수였고 오히려 비판을 받았다.
콘키스타도르의 활동은 스페인 국왕의 허가가 필요했지만, 실제로는 재정적 지원이 거의 없는 소규모 용병 부대의 투기적인 성격이 강했다.[123] 이들은 유럽의 과학 기술의 우위를 바탕으로 원주민 간의 갈등을 이용하여 정복을 달성했다.[122] 정복 후, 스페인 왕실은 콘키스타도르의 권리를 박탈하고 식민지를 총독 제도와 같은 행정 기구에 통합했다.[123]
콘키스타도르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대립한다. 이들의 문화 파괴 행위는 근대 이후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6. 2. 역사적 교훈
콩키스타도르의 역사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가 가져오는 여러 문제점을 보여준다. 이들의 침략 행위는 폭력, 억압, 착취를 동반했으며, 이는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진보 진영에서 비판하는 주요 내용이다. 특히, 콩키스타도르들은 원주민들의 문화를 파괴하고, 그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았다.에르난 코르테스가 아즈텍 제국을 정복하고,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잉카 제국을 정복한 사례는 이러한 문제점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이들은 원주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했으며, 심지어 여성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위는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와 같은 선교사들에 의해 비판받았지만, 당시에는 소수의 의견에 불과했다.
콩키스타도르의 문화 파괴 행위는 문화 다양성 존중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고 이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또한, 콩키스타도르의 침략 행위는 국가 간 평화적 관계 구축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힘으로 다른 나라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것은 결국 더 큰 갈등과 비극을 초래할 뿐이다.
7. 주요 인물
-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서인도 제도, 1492년~1504년)
- 알론소 페르난데스 데 루고 (카나리아 제도, 1492년~1496년)
- 에르난 코르테스 (멕시코, 1518년~1522년, 바하 캘리포니아, 1532년~1536년)
- 페드로 데 알바라도 (멕시코, 1519년~1521년,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1523년~1527년, 페루, 1533년~1535년, 멕시코, 1540년~1541년)
- 프란시스코 피사로 (페루, 1509년~1535년)
- 곤살로 히메네스 데 케사다 (콜롬비아, 1536년~1539년, 베네수엘라, 1569년~1572년)
- 페드로 페르난데스 데 루고 (카나리아 제도, 콜롬비아 1509년~1536년)
- 페드로 데 칸디아 (파나마, 1527년, 콜롬비아 및 에콰도르, 1528년, 페루, 1530년)
- 프란시스코 바스케스 데 코로나도 (미국, 1540년~1542년)
- 후안 데 오냐테 (미국 뉴멕시코주, 1598년~1608년)
- 후안 로케 (사페 동지회)
- 후안 바스케스 데 코로나도 이 아나야 (코스타리카)
- 디에고 데 알마그로 (페루, 1524년~1535년, 칠레, 1535년~1537년)
- 로드리고 데 바스티다스 (콜롬비아 및 파나마, 1500년~1527년)
-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 (파나마, 1510년~1519년)
- 후안 폰세 데 레온 (푸에르토리코, 1508년, 플로리다, 1513년~1521년)
- 알바르 누녜스 카베사 데 바카 (미국, 1527년~1536년, 1540년~1542년)
- 루카스 바스케스 데 아용 (미국, 1524년~1527년)
- 세바스티안 데 벨알카사르 (에콰도르와 콜롬비아, 1533년~1536년)
- 헤로니모 루이스 데 카브레라 (페루, 아르헨티나, 16세기)
- 도밍고 마르티네스 데 이랄라 (아르헨티나와 파라과이, 1535년~1556년)
- 곤살로 피사로 (페루, 1532년~1542년)
- 디에고 벨라스케스 데 쿠엘라르 (쿠바, 1511년~1519년)
- 후안 데 가라이 (페루,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16세기)
- 디에고 데 오르다스 (베네수엘라, 1532년)
- 후안 피사로 (페루, 1532년~1536년)
- 프란시스코 에르난데스 데 코르도바 (유카탄, 1517년)
- 프란시스코 에르난데스 데 코르도바 (니카라과, 1524년)
- 에르난도 피사로 (페루, 1532년~1560년)
- 세바스티안 카보토 (우루과이 16세기)
- 헤로니모 데 알데레테 (페루, 1535년~1540년, 칠레, 1550년~1552년)
- 디에고 에르난데스 데 세르파 (베네수엘라, 1510년~1570년)
- 후안 데 그리할바 (유카탄, 1518년)
- 프란시스코 데 몬테호 (유카탄, 1527년~1546년)
- 후안 데 라 카마라 (유카탄, 1539년~1546년)
- 니콜라스 페더만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 1537년~1539년).
- 판필로 데 나르바에스 (스페인령 플로리다, 1527년~1528년)
- 디에고 데 니쿠에사 (파나마, 1506년~1511년)
- 에르난 베네가스 카리요 (콜롬비아, 1536년~1544년)
- 크리스토발 데 올리드 (온두라스, 1523년~1524년)
- 프란시스코 데 오렐리아나 (아마존강, 1541년~1543년)
- 에르난도 데 소토 (미국, 1539년~1542년)
- 곤살로 가르시아 소로 (콜롬비아, 1536년~1544년)
- 이네스 수아레스, (칠레, 1541년)
- 프란시스코 데 아기레 (페루 1536년~40년, 볼리비아 1538년~39년, 칠레 1540년~1553년, 아르헨티나 1562년~64년)
- 마르틴 데 우르수아 이 아리스멘디 (페텐, 과테말라, 1696년~1697년)
- 후안 데 세스페데스 루이스 (콜롬비아, 1521년~1543년)
- 페드로 데 발디비아 (칠레, 1540년~1552년)
- 호르헤 로블레도 (페루와 콜롬비아, 1521년~1543년)
- 페드로 메넨데스 데 아빌레스 (플로리다, 1565년~1567년)
- 후안 데 산크트 마르틴 (콜롬비아, 1536년~1550년)
- 페드로 데 멘도사 (아르헨티나, 1534년~1537년)
- 안토니오 데 레브리하 (콜롬비아, 1529년~1539년)
- 알론소 데 리베라 (칠레 1599년~1617년)
- 알론소 데 소토마요르 (칠레 1583년~1592년, 파나마 1592년~1604년)
- 마르틴 루이스 데 감보아 (칠레 1552년~1590년)
- 후안 가리도 (다수의 원정 1502년~1530년, 히스파니올라, 푸에르토리코, 쿠바, 플로리다, 멕시코)
- 미겔 로페스 데 레가스피 (필리핀, 1565년~1572년)
- 후안 데 살세도 (필리핀, 1565년~1576년)
- 디에고 로모 데 비바르 이 페레스 (멕시코, 17세기)
- 곤살로 수아레스 렌돈 (콜롬비아, 1536년~1539년)
- 아폰수 드 알브케르크(Afonso de Albuquerque)
- 제로니무 드 아제베두(Jerónimo de Azevedo)
- 필리페 드 올리베이라(Phillippe de Oliveira)
- 브라간사의 콘스탄티누(Constantino of Braganza)
- 앙드레 푸르타두 드 멘돈사(André Furtado de Mendonça)
- 주앙 드 카스트루(João de Castro)
- 두아르테 파셰쿠 페헤이라(Duarte Pacheco Pereira)
- 안토니우 라포주 타바레스(António Raposo Tavares)
- 도밍구스 조르지 벨류(Domingos Jorge Velho)
- 프란시슈쿠 바레투(Francisco Barreto)
- 페르낭 멘데스 핀투(Fernão Mendes Pinto)
- 알바루 마르틴스(Álvaro Martins)
- 안토니우 드 아브레우(António de Abreu)
- 조르지 드 메네지스(Jorge de Menezes)
- 페드루 마스카렌야스(Pedro Mascarenhas)
- 두아르테 페르난데스(Duarte Fernandes)
- 디오구 로페스 드 세케이라(Diogo Lopes de Sequeira)
- 안토니우 드 놀리(António de Noli)
- 안탕 곤살베스(Antão Gonçalves)
- 바르톨로메우 디아스(Bartolomeu Dias)
- 카다모스토(Cadamosto)
- 크리스토방 드 멘돈사(Cristóvão de Mendonça)
- 로렌수 드 알메이다(Lourenço de Almeida)
- 디오구 강(Diogo Cão)
- 디오구 드 아잠부자(Diogo de Azambuja)
- 디오구 고메스(Diogo Gomes)
- 프란시슈쿠 세랑(Francisco Serrão)
- 디니스 디아스(Dinis Dias)
- 페르낭 두 포(Fernão do Pó)
- 페르낭 마갈량이스(Fernão Magalhães) (Ferdinand Magellan 및 Magallanes로도 알려짐, 스페인에도 봉사함)
- 페르낭 피레스 드 안드라데(Fernão Pires de Andrade)
- 프란시슈쿠 드 알메이다(Francisco de Almeida)
- 프란시슈쿠 알바레스(Francisco Álvares)
- 항해왕 엔리케(Henry the Navigator)
- 가스파르 코르테-레알(Gaspar Corte-Real)
- 질 에아네스(Gil Eanes)
- 곤살루 벨류(Gonçalo Velho)
- 주앙 아폰수 드 아베이루(João Afonso de Aveiro)
- 주앙 다 노바(João da Nova)
- 주앙 그레구(João Grego)
- 주앙 알바레스 파군데스(João Álvares Fagundes)
- 주앙 페르난데스 라브라도르(João Fernandes Lavrador)
- 주앙 곤살베스 자르쿠(João Gonçalves Zarco)
- 주앙 인판테(João Infante)
- 주앙 바스 코르테-레알(João Vaz Corte-Real)
- 조르지 알바레스(Jorge Álvares)
- 토메 드 소우사(Tomé de Sousa)
- 로푸 소아레스 드 알베르가리아(Lopo Soares de Albergaria)
- 루이스 피레스(Luís Pires)
- 루이스 바스 드 토레스(Luís Vaz de Torres)
- 마르팀 아폰수 드 소우사(Martim Afonso de Sousa)
- 미겔 코르테-레알(Miguel Corte-Real)
- 니콜라우 코엘류(Nicolau Coelho)
- 누누 알바레스 페헤이라(Nuno Álvares Pereira)
- 누누 다 쿠냐(Nuno da Cunha)
- 파울루 다 가마(Paulo da Gama)
- 누누 트리스탕(Nuno Tristão)
- 파울루 디아스 드 노바이스(Paulo Dias de Novais)
-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Pedro Álvares Cabral)
- 페드루 테이셰이라(Pedro Teixeira)
- 페루 드 알렝케르(Pero de Alenquer)
- 페루 드 바르셀루스(Pero de Barcelos)
- 페루 다 코빌량(Pero da Covilhã)
- 페루 디아스(Pero Dias)
- 페루 바스 드 카미냐(Pero Vaz de Caminha)
- 트리스탕 다 쿠냐(Tristão da Cunha)
- 트리스탕 바스 테이셰이라(Tristão Vaz Teixeira)
-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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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콩키스타도르
- 대항해 시대
- 레콩키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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