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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푸체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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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푸체족은 "땅의 사람들"을 의미하며, 칠레와 아르헨티나에 걸쳐 거주하는 원주민이다. 18세기부터 마푸체어로 불리며, 스페인 식민 시대에는 아라우카니아인으로도 불렸다. 기원전 600년에서 500년 사이에 문화가 존재했으며, 잉카 제국과의 접촉을 통해 집단적 정체성을 형성했다. 16세기부터 300년 이상 스페인에 저항했으며, 아라우코 전쟁으로 대표되는 대립이 있었다. 19세기 칠레와 아르헨티나에 편입되었으며, 칠레는 아라우카니아를 점령했다. 현재는 칠레와 아르헨티나에 걸쳐 거주하며, 토지 분쟁과 폭력적인 충돌이 지속되고 있다. 마푸체족은 문화, 직물, 은세공,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독자적인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정치, 사회, 문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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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푸체족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민족 이름마푸체
로마자 표기Mapuche
IPA (영어)/məˈpuːtʃi/
IPA (스페인어)/maˈputʃe/
발음 (한글)머푸치
언어마푸체어
스페인어
종교전통 종교
가톨릭교회
복음주의 (덜 일반적)
여호와의 증인
관련 민족핵심 그룹:
보로아노족
쿤코족
우이치족
라프켄체
몰루체
피쿤체족
프로마우카에
아라우카나화된 그룹:
페우엔체족
푸엘체족
랑켈
테우엘체족
인구
총인구약 1,890,930명
거주 지역칠레
아르헨티나
칠레1,745,147명 (2017년)
아르헨티나145,783명 (2022년, 페우엔체족 포함)
이미지
2015년 티루아의 마푸체 여성들
전통
마푸체 전통 깃발
마푸체 전통 깃발

2. 명칭

18세기부터 마푸체어에서 스스로를 칭하는 이름은 '마푸체(Mapuche)' 또는 '마푼체(Mapunche)'이다. 이는 '땅, 국가'를 의미하는 mapuarn와 '사람'을 의미하는 chearn가 합쳐진 말로, '땅의 사람들', '원주민'을 뜻한다.[4]

마푸체 민족의 오일러 다이어그램.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역사적 명칭은 흰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마푸체어와 문화를 채택하거나 부분적으로 마푸체 혈통을 가진 집단은 주요 자홍색 영역의 주변에 표시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남아메리카의 스페인 식민 개척자들은 마푸체족을 '아라우카니아인'(스페인어: araucanoses)이라고 불렀다. 이 용어는 현재 일부 사람들에게는 경멸적인[5] 것으로 여겨진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라우카니아라는 용어가 알론소 데 에르실라[6]가 쓴 서사시 La Araucanaes의 보편성과 스페인 제국에 대한 그들의 길고 끝없는 전쟁에서 그들의 업적에 중요하다. 이 이름은 "진흙투성이 물"을 의미하는 지명 rag koarn (스페인어 아라우코)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7][8] "반역자, 적"을 의미하는 케추아어 단어 awqaqu는 '아라우카노'의 어원이 아니다.[7]

초기 스페인 식민 시대에 다양한 마푸체 집단(몰루체, 위이리체, 피쿤체 등)은 자신들을 Rechearn라고 불렀는데, 이는 rearn("순수한")과 chearn("사람")에서 유래한 것으로 순수한 원주민 혈통을 의미했다.[9]

'마푸체'라는 이름은 아라우카니아 출신의 피쿤체, 위이리체, 몰루체 또는 응굴루체를 통칭하는 데 사용되거나, 때로는 아라우카니아 출신 몰루체 또는 응굴루체를 독점적으로 지칭하는 데 사용된다. 마푸체는 "땅의 사람들" 또는 "땅의 자녀들"을 의미하는 비교적 최근의 자칭 용어이며, mapuarn는 "땅"을, chearn는 "사람"을 의미한다. 아라우코 전쟁 이후 사람들을 언급할 때 이 용어가 선호된다.[10]

마푸체는 다음과 같은 영토의 지리적 위치로 자신을 확인한다.

  • '''푸엘체''' 또는 '''푸엘체''': "동쪽의 사람들"은 '푸엘 마푸' 또는 Puel mapuarn, 동쪽 땅(아르헨티나팜파파타고니아)을 차지했다.
  • '''피쿤체''' 또는 '''피쿤체''': "북쪽의 사람들"은 Pikun-mapuarn, "북쪽 땅"을 차지했다.
  • '''위이리체''' 또는 '''위이리체''': "남쪽의 사람들"은 Willi mapuarn, "남쪽 땅"을 차지했다.
  • '''페웬체''' 또는 '''페우엔체''': "페웬/페우엔 나무의 사람들"은 Pewen mapuarn, "아라우카리아 아라우카나 나무의 땅"을 차지했다.
  • '''라프켄체''': "바다의 사람들"은 Lafken mapuarn, "바다의 땅"을 차지했다. 연안 마푸체로도 알려져 있다.
  • '''나그체''': "평원의 사람들"은 Nag mapuarn, "평원의 땅"(나우엘부타 산맥의 일부 지역과 그 경계 저지대)을 차지했다. 그들의 서사적이고 문학적인 이름은 '''아라우카니아인'''이며, 그들의 오래된 토착 이름은 '''레체'''이다.[11] 라우타로(레프-트라루, "빠른 매"), 카우폴리칸(칼률리칸, "푸른 석영 돌", "광택이 나는 부싯돌"로 더 잘 알려짐) 또는 펠란타로(펠론트라루, "빛나는 카라카라")와 같은 고대 마푸체 토키("도끼를 든 사람")는 나그체였다.
  • '''웬테체''': "계곡의 사람들"은 Wente mapuarn, "계곡의 땅"을 차지했다.[12]


16세기 이후 남아메리카에 진출한 스페인 사람들의 기록에는 아라우카노족(Araucanos) 또는 아라우카니아인(Araukanians)으로 불렸으나, 현재는 경멸적인 표현으로 여겨지며 칠레아르헨티나에서는 주로 "마푸체족"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으며, 마푸체족 자신들도 이를 선호한다. 'araucano'의 어원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케추아어로 "반역자"를 의미하는 'arauco'가 아니라, 마푸체어로 "진흙탕물"을 의미하는 지명 아라우코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다.[118][119]

3. 역사

펠리페 과만 포마 데 아얄라가 그린 마푸체족(좌)과 잉카 제국(우)의 대치 상황 그림


스페인은 페루 정복 이후 마푸체 영토로 확장했다.[20] 1536년 디에고 데 알마그로는 레이노구엘렌 전투에서 마푸체 부대에게 저지당했고, 1541년 페드로 데 발디비아는 산티아고를 건설했다.[21] 미치말론코는 산티아고 파괴를 이끌며 스페인에 저항했다.[22]

페드로 수베르카소의 그림 ''엘 호벤 라우타로''는 그의 백성의 군사적 천재성과 전문성을 보여준다.


1550년 페드로 데 발디비아는 마젤란 해협까지 칠레 전역을 장악하려 칠레 중남부에서 원정을 벌였다.[23] 1550년부터 1553년 사이에 스페인은 콘셉시온, 발디비아 등 여러 도시와 요새를 건설했지만,[23] 이는 아라우코 전쟁을 일으켰다. 마푸체는 강제 노역을 거부하며 스페인에 저항했다.[27]

니카노르 플라사의 카우폴리칸


쿠랄라바 전투 이후 마푸체와 위이리체는 봉기하여 7개 도시의 파괴를 이끌었다. 칠로에 제도를 제외한 비오비오 강 남쪽의 모든 칠레 영토는 스페인 지배에서 해방되었다.[29]

1869년 아라우카니아의 주요 롱코(lonkos)들과 회의 중인 코르넬리오 사아베드라 로드리게스(Cornelio Saavedra Rodríguez)


19세기 아르헨티나와 칠레는 영토를 확장하며 마푸체족 영토를 정복했다.[34][35] 아라우카니아 정복으로 많은 마푸체족이 삶의 터전을 잃었고, 1884년 칠레는 비오비오 강 남쪽 영토 점령을 완료했다.[41] 점령 이후 경제는 농업과 목재 채취 중심으로 변했다.[49]

아라우코 전쟁 당시 마푸체의 옛 깃발


왈마푸라는 용어는 1990년 모든 땅의 의회에서 사용하기 시작했다.[51][52] 현재 트라이구엔과 루마코 사이의 아라우카니아 지역 북부 등 일부 지역에서 토지 분쟁과 충돌이 계속되고 있다.

3. 1. 기원

고고학적 발견에 따르면 마푸체 문화는 기원전 600년에서 500년 사이에 칠레와 아르헨티나에 존재했다.[13] 마푸체족은 유전적으로 인접한 파타고니아 토착민들과 다르다.[14] 이것은 "마푸체와 파타고니아 인구의 기원이 다르거나 오래 지속되는 분리"를 암시한다.[14]

잉카 제국의 군대는 마울레 강에 도달해 그곳에서 마푸체와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15] 대부분의 현대 학자들은 잉카 제국의 남쪽 경계가 산티아고와 마이포 강 사이, 또는 산티아고와 마울레 강 사이 어딘가에 있었다고 믿고 있다.[16] 따라서 대부분의 마푸체는 잉카의 지배를 벗어났다. 잉카 침략자들과의 접촉을 통해 마푸체족는 처음으로 국가 조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났을 것이다. 잉카인들과의 접촉은 그들에게 그들과 침략자들을 구별하고 국가 조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느슨한 지정학적 단위로 통합하는 집단적 인식을 주었다.[17]

3. 2. 아라우코 전쟁 (16세기 ~ 19세기)

스페인의 마푸체 영토 확장은 페루 정복의 결과였다.[20] 1536년, 디에고 데 알마그로는 칠레 정복을 위해 출발했고, 이타타 강을 건넌 후 레이노구엘렌 전투에서 활과 창으로 무장한 마푸체 부대의 저항에 부딪혔다. 마푸체의 맹렬함과 이 지역의 금, 은 부족에 낙담한 알마그로는 이듬해 페루로 돌아갔다. 1541년, 페드로 데 발디비아쿠스코에서 칠레에 도착하여 산티아고를 건설했다.[21] 피쿤체는 최근 잉카 지배로부터 독립했으며, 잉카 총독 킬리칸타를 물리친 미치말론코의 지휘를 받았다. 미치말론코는 1541년부터 1545년까지 스페인에 대한 피쿤체의 저항을 이끌었으며, 산티아고 파괴를 이끌었다.[22]

1550년, 마젤란 해협까지 칠레 전역을 장악하려던 페드로 데 발디비아는 더 많은 마푸체가 지배하는 영토를 정복하기 위해 칠레 중남부에서 원정을 벌였다.[23] 1550년부터 1553년 사이에 스페인은 마푸체 땅에 콘셉시온, 발디비아, 임페리알, 비야리카, 앙골 등 여러 도시를 건설했다.[23] 또한 아라우코, 푸렌, 투카펠 요새를 건설했다.[23] 스페인이 더 많은 영토를 확보하려는 노력은 마푸체와의 아라우코 전쟁을 일으켰고, 이는 거의 350년 동안 지속된 분쟁이었다. 정복자들에 대한 적개심은 잉카의 미타와 같은 강제 노역 전통이 마푸체에게 없었고, 마푸체가 스페인 사람들을 섬기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더욱 심해졌다.[27]

1550년부터 1598년까지 마푸체는 아라우카니아의 스페인 정착지에 자주 포위 공격을 가했다.[24] 1553년, 마푸체는 회의를 열어 전쟁을 결의하고 카우폴리칸을 토키(전시 지도자)로, 라우타로를 부토키로 선택했다. 라우타로는 최초의 마푸체 기병대를 창설하고, 6,000명의 전사를 지휘하여 투카펠 요새를 공격했다. 스페인 수비대는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푸렌으로 후퇴했다. 라우타로는 요새를 점령하여 불태우고 스페인인들이 투카펠을 탈환하려 할 것이라고 확신하며 군대를 준비했다. 발디비아는 반격을 가했지만 투카펠 전투에서 마푸체에게 학살당했다.[25] 1554년 라우타로는 콘셉시온을 파괴하기 위해 비야그라 총독을 마리우에뉴 전투에서 물리치고 도시를 황폐화시켰다. 1555년 라우타로는 앙골시를 파괴하고, 스페인인들이 재건한 콘셉시온으로 돌아가 다시 파괴했다. 1557년, 마타키토 전투에서 라우타로와 그의 군대는 궤멸되었다.

1558년부터 1598년까지 전쟁은 주로 저강도 분쟁이었다.[26] 스페인 침략자들과 접촉한 후 마푸체의 수는 전쟁과 유행병으로 크게 감소했고,[22] 일부는 스페인 소유의 금광에서 죽었다.[27]

1598년 푸렌 출신 전사들 중 펠란타로가 이끄는 부대는 칠란 지역 약탈 후 남쪽으로 돌아오던 중, 마르틴 가르시아 오녜스 데 로욜라 총독과 그의 군대를 매복 공격했다.[28] 성직자 바르톨로메 페레스와 병사 베르나르도 데 페레다를 제외한 거의 모든 스페인 사람들이 죽었다. 그 후 마푸체는 비오비오 강 남쪽 고향의 모든 도시를 파괴하는 전반적인 봉기를 일으켰다.

쿠랄라바 전투 이후 마푸체와 위이리체 사이에서 전반적인 봉기가 발생하여 7개 도시의 파괴로 이어졌다. 앙골, 임페리알, 오소르노, 산타 크루스 데 오녜스, 발디비아, 비야리카의 스페인 도시들은 파괴되거나 버려졌다.[29] 카스트로시는 1599년 네덜란드-마푸체 연합에 의해 함락되었지만 1600년 스페인에 의해 탈환되었다. 칠란과 콘셉시온만이 마푸체의 포위 공격과 습격에 저항했다.[30] 칠로에 제도를 제외하고 비오비오 강 남쪽의 모든 칠레 영토는 스페인 지배에서 해방되었다.[29] 이 시기에 마푸체 국가는 안데스 산맥을 넘어 현재 아르헨티나의 추부트, 네우켄, 라팜파, 리오네그로 주를 정복했다.

19세기 아르헨티나와 칠레는 빠른 속도로 영토를 확장했다. 아르헨티나는 1820년 포클랜드 제도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1865년에는 웨일스 이민자들과 함께 추부트에 정착했으며, 1870년에는 포르모사, 미시오네스, 차코를 파라과이로부터 정복했다. 이후 1898년 아타카마 푸나(Puna de Atacama)도 합병했다. 칠레는 1843년 마젤란 해협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발디비아, 오소르노, 럇키우에를 독일 이민자들과 함께 개척했으며, 페루와 볼리비아로부터 영토를 정복했다.[31][32] 이후 이스터 섬도 합병했다.[33] 이러한 맥락에서 마푸체족 영토는 아르헨티나와 칠레 국가의 영토 연속성,[34] 아르헨티나의 가축 확장과 칠레 농업 확장을 위한 유일한 장소라는[35] 이유로 정복되기 시작했다.

1861년부터 1879년 사이에 아르헨티나와 칠레는 여러 마푸체 영토를 자국에 편입했다. 1881년 1월, 칠레가 초릴로스 전투와 미라플로레스 전투에서 페루를 결정적으로 패배시킨 후, 칠레와 아르헨티나는 마푸체 영토 정복을 재개했다.[36][37][38]

아라우카니아 정복으로 수많은 마푸체족이 삶의 터전을 잃고 피난처와 식량을 찾아 떠돌아다녔다.[39] 학자 파블로 미라만은 아라우카니아 점령 기간 동안 도입된 국가 교육이 전통적인 마푸체 교육에 해로운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40] 칠레는 1884년에 비오비오 강 남쪽 영토 점령과 통합을 최종적으로 달성했으며, 비야리카와 이전의 안골 도시가 재건되었다.[41] 학교,[42] 도시, 법 체계가 수립되어 주민들이 국가 체제에 통합되었다.

20세기 마푸체 사람들의 농촌에서 도시로의 이동[43][44][45]은 1920년대부터 강화되어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정점을 찍은 경제적 이주와 1973년 쿠데타 이후 발생한 정치적 이주,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경제적 이주는 산티아고에서 일자리를 찾기 위한 필요성에 따라 발생했다. 마푸체 사람들은 1920년대에 산티아고에 와서 제빵업에 종사했고[46] "갈바리노 협회(Sociedad Galvarino)"와 같은 단체를 결성했다. 이러한 이주는 산업 성장과 농촌 지역의 기회 부족으로 더욱 심화되었다.[47] 1961년까지 마푸체 인구의 최대 25%가 전통 공동체 외부에 거주했지만, 데이터는 불완전했고 인구 조사는 마푸체와 비마푸체 시민을 구분하지 않았다.[48]

마푸체의 농촌에서 도시로의 이주에 대한 통계는 역사적으로 부족했으며, 통합주의 정책으로 인해 토착민 정체성을 고려하지 않고 시민으로만 대우했다. 1931년 법률 제266호와 1979년 법령 제2568호와 같은 법률에 따른 강제 공동체 분할은 토지 분할과 도시로의 강제 이주에 기여했다. 1952년 인구 조사에서는 산티아고에 마푸체 875명만 기록되었는데, 이는 도밍고 쿠라쿠에오와 같이 같은 주에서 21세 이상의 마푸체 10,000명을 확인한 독립적인 추정치보다 훨씬 낮은 수치이다.[48]

점령 이후 아라우카니아의 경제는 양과 소 사육에서 농업과 목재 채취를 기반으로 한 경제로 변했다.[49] 점령 후 마푸체의 토지 손실은 마푸체가 제한된 지역에서 대규모 가축 사육을 계속했기 때문에 심각한 침식을 야기했다.[50] (아르헨티나에 남은 마푸체 영토는 약 70%였다.)

3. 3. 칠레 및 아르헨티나에 편입 (19세기)

19세기에 칠레는 급속한 영토 확장을 겪었다. 1843년 마젤란 해협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독일 이민자들과 함께 발디비아, 오소르노, 란키우에에 정착했으며, 페루볼리비아의 땅을 정복했다. 이후 이스터 섬을 합병하기도 했다.[117] 이러한 상황에서 아라우카니아는 두 가지 이유로 칠레에 정복되기 시작했다. 첫째, 칠레는 영토 연속성을 확보하고자 했고, 둘째, 칠레 농업이 확장될 수 있는 유일한 곳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마푸체족 가족


점령 이후 몇 년 동안 아라우카니아의 경제는 양과 소 방목에서 농업과 목재 추출 중심으로 변화했다. 마푸체족의 토지 손실은 심각한 침식을 초래했는데, 이는 제한된 지역에서 대규모 가축 방목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인 변호사이자 모험가인 오르리 앙투안 드 투낭은 "아라우카니아의 왕"을 자칭하며 마푸체족의 땅을 중심으로 독립 국가 아라우카니아와 파타고니아 왕국(1860년 - 1862년) 건국을 선포했다. 그러나 이는 다른 국가의 승인을 얻지 못했고, 오히려 칠레 측에 불법 국가 타도라는 명분을 제공했다.[117] 아라우카니아와 파타고니아 왕국은 지도자 부재로 와해되었고,[117] 칠레 정부는 마푸체족의 땅을 압박하여 1880년대 중반부터 후반에 걸쳐 이를 점령했다. 이는 "아라우카니아 평정 작전"으로 불린다.

이러한 정복의 배경에는 1800년대 후반 칠레가 마푸체의 땅을 자국 영토로 여기는 사상이 있었고, 칠레 인구 증가로 인한 경제 활동이 마푸체와의 경계선을 압박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있다. 또한, 당시 볼리비아·페루 연합과의 남미 태평양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칠레는 대규모 상설 육군 정비와 라이플 소총 등 근대 무기 국내 생산을 실현했다. 태평양 전쟁 종전과 함께 이러한 병력은 마푸체와의 전투에 투입되었다. 통신망 정비 등으로 마푸체족은 남북 양쪽에서 더욱 강력한 군사력에 억압당했다.

격렬한 전투와 외교 협상을 통해 칠레 정부는 마푸체족 수장들로부터 그들의 땅을 칠레에 병합하는 동의를 얻어 조약을 체결했다. 여기에는 장기간의 전쟁으로 기근질병이 만연했던 마푸체족의 어려운 사정이 있었다. 어떤 보고에 따르면 과거 50만 명의 인구를 자랑했던 마푸체족은 2만 5천 명까지 급격히 감소했다고 한다.[121] 그러나 이러한 수치 변화에는 의도적인 과장이 섞여 있다는 주장도 있다.

점령하에 놓인 마푸체족의 상당수는 구금되었고, 농업과 교역으로 유지되던 경제 활동은 대부분 파괴되었다. 그들이 소유했던 다량의 보석류를 포함한 동산과 부동산 등의 재산은 칠레 정부에 몰수되었다. 더 나아가 미국의 "강제 이주법"과 같은 "reducciones"라 불리는 일련의 제도에 얽매이게 되면서, 마푸체족은 쫓겨나 약탈당하고 극도의 빈곤에 노출되었다.

3. 4. 현대 마푸체 갈등 (1990년 ~ 현재)

왈마푸라는 용어는 1990년 설립된 모든 땅의 의회가 마푸둔군 명칭인 ''Aukiñ Wallmapu Ngulam''을 채택한 이후 마푸둔군 사용 공동체 외부에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51][52] 이는 원주민 운동이 “탄압”이라고 묘사하는 것과 토지 증서 (''Títulos de Merced'')에 대한 무시로 인식되는 것에 대한 반응으로 생겨났다.[53] 이는 칠레 군사 독재 기간과 그 이전에 남중부 지역에서 칠레 주요 도시로의 마푸체 이주 물결과 함께 나타났다.[54] 이 의회는 역사 수정주의에 참여하고, 특히 “선조 땅 회복”과 “마푸체 사람들의 정치적 영토 자치”에 대한 요구와 관련하여 지역에 대한 칠레 국가의 이익에 반대하는 정치적 입장을 채택한 것으로 주목할 만하다. 이 운동에는 1992년 웨누포예 마푸체 국기를 포함하여 칠레 남부의 주요 마푸체 영토를 나타내는 5개의 추가 깃발이 만들어지는 것도 포함되었다.[55]

칠레 역사가 크리스토발 가르시아 우이도브로는 “‘왈마푸’라는 용어는 비교적 오래된 용어가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용어이다. 이해된 바에 따르면, 1990년대 초 수정주의 운동에서 생겨났다.(…) 그들은 정체성, 언어, 마푸체 사람들을 대표하는 상징에 대한 재검토와 수정주의를 수행한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역사적 문제가 아니며, 마푸체 사람들의 조상 문화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며, 그들은 자신의 영토를 특별히 정의된 장소로 여긴 적이 없다.”라고 말한다.[56]

원주민 매장지를 옮긴 랄코 수력발전소 건설은 국가-마푸체 관계에서 결정적인 시점이었으며, 1997년 12월 포레살 아라우코 소속 트럭 3대가 불타는 사건 이후 코오르디나도라 아라우코-말레코(CAM)의 결성에 기여했다. 이 첫 번째 공격은 칠레 남부 거대 지역에서 폭력 시대의 시작과 마푸체 자치주의 정치 운동 발전의 전환점을 표시한다.[58] 그 이후로 폭력은 점진적으로 증가하여 인접한 비오비오와 로스 라고스 지역으로 확대되었다.[59]

토지 분쟁과 폭력적인 충돌은 일부 마푸체 지역, 특히 트라이구엔과 루마코 사이와 주변의 아라우카니아 지역 북부 지역에서 계속되고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마푸체 무장 반군이 저지른 범죄는 군사 독재 시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정치 반체제 인사들을 통제하기 위해 도입한 테러 방지 법에 따라 기소되었다. 이 법은 검찰이 최대 6개월 동안 피고 측에 증거를 제출하지 않고, 화면 뒤에서 법정에서 증언할 수 있는 증인의 신원을 은폐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코오르디나도라 아라우코 말레코와 같은 반군 단체는 집, 교회, 차량, 구조물, 목초지를 불태우는 것과 같은 극단적인 사건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전술을 사용하며, 때로는 사망자와 특정 표적에 대한 위협을 초래하기도 했다. 2005년 현재 마푸체 공동체의 시위대는 다국적 임업 기업과 개인 소유의 재산에 대해 이러한 전술을 사용해 왔다.[60][61] 2010년 마푸체는 테러 방지 법에 변화를 주기 위한 시도로 많은 단식 투쟁을 벌였다.[62]

2019년 현재, 프랑스 웹사이트 Orin21에 따르면, 칠레 정부는 이스라엘 군사 기술과 감시를 바탕으로 마푸체에 대한 인권 유린을 저질렀다.[63]

2022년 5월, 칠레 하원은 코오르디나도라 아라우코-말레코, 마푸체 레지스탕스 말레코, 마푸체 레지스탕스 라프켄체, 웨이찬 아우카 마푸를 "불법 테러 단체"로 선언했다.[64][65][66]

세계에서 가장 큰 셰일 오일 및 셰일 가스 매장지 중 하나인 누에켄의 바카 무에르타 지역의 석유 개발과 프랙킹은 슬러지 폐기물 매립지를 만들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남쪽으로 약 1,200km 떨어진 아넬로 마을 근처 환경을 오염시켰다. 2018년 마푸체는 엑손, 프랑스 기업 토탈에너지 및 판 아메리칸 에너지를 고소했다.[67]

현재 마푸체족 후손들은 칠레와 아르헨티나에 걸쳐 거주하며, 아라우카니아주 주민의 80%를 차지하고 로스라고스주, 비오비오주, 마울레주에서도 높은 인구 비율을 보인다. 전통을 계승하여 농업을 중심으로 생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다수는 더 나은 수입을 위해 도시로 이주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다양한 차별의 대상이 되어 경제적, 공적인 측면에서 불우한 상황에 놓여 있다.[122]

마푸체족이 특히 많은 아라우카니아주에서는 국군의 주둔에 저항했기 때문에, 피노체트 정권 시대에 많은 원주민들이 억울하게 죽었고, 1990년 민주화로 정부와의 대화가 시작되었지만 결렬되었으며, 토지와 물 권리를 요구하는 시위와 점거가 여러 곳에서 계속되고 있다.[117] 최근에는 그들이 거주하는 토지를 개발하는 임업계 대기업[123]을 향한, 토지 소유권 분쟁 등으로 인한 폭력의 보복이 계속되고 있으며, 특히 아라우카니아주 북부 트라이구엔 지구와 루마코 지구 사이 역사적으로 격렬한 분쟁이 계속된 지역에서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4. 문화

유럽인들이 도착했을 때, 마푸체족은 요새와 방어 시설 네트워크를 조직하고 건설했다. 고대 마푸체족은 푸렌 근처에서 발견된 일부 토목 제방과 같은 의식 건축물도 건설했다.[68] 마푸체족은 금속 가공을 빠르게 채택했으며(피쿤체족은 이미 구리를 가공했다.[69]), 스페인인들로부터 타기와 기병의 전투 사용법을 배웠고, 재배도 배웠다.

300년 동안 스페인 식민지와 비교적 명확하게 구분된 자치적인 마푸체 지역이 공존하면서, 마푸체족은 스페인인, 아르헨티나인, 칠레인과의 활발한 무역 전통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무역은 마푸체 은세공 전통의 중심에 있으며, 마푸체족은 스페인, 아르헨티나, 칠레의 광범위하게 분포된 다량의 은화로 보석을 만들었다. 마푸체족은 또한 '트라릴롱코(trarilonko)' 등으로 불리는 동전으로 머리 장식을 만들었다.

클라우디오 게이가 1848년에 그린 마푸체 가족

4. 1. 의식과 전통

사람과 비교한 체마물(마푸체 장례상)의 높이.


웨 트리판투는 마푸체족의 설날 축제이자 신년전야 행사이다. 위 트리판투(We Tripantu)|위 트리판투arn

4. 2. 직물

마푸체족의 가장 잘 알려진 예술 중 하나는 직물이다. 남아메리카 대륙 최남단 지역(오늘날의 칠레 남부와 아르헨티나)의 직물에 대한 가장 오래된 자료는 고고학 발굴 조사에서 발견되는데, 칠레의 템우코 시 근처 피트렌 묘지와 비오비오 주 알보얀코 유적, 그리고 아르헨티나 네우켄주 레볼레도 아리바 묘지 등이 있다. 연구자들은 서기 1300년~1350년 사이의 복잡한 기법과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직물의 증거를 발견했다.[75]

마푸체 여성들은 방적과 직조를 담당했다. 직조 기법과 특정 지역의 직물 무늬에 대한 지식은 일반적으로 어머니, 할머니, 이모들이 딸에게 장로들로부터 배운 기술을 가르치는 가족 내에서 전수되었다. 직물 예술에 뛰어난 여성들은 그들의 업적에 대해 높이 평가받았고, 친족 집단에 경제적, 문화적으로 기여했다. 직조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척도는 능숙한 직조공인 신부에게 남성이 더 큰 지참금을 주는 것을 기대하는 데서 분명히 알 수 있다.[76]

전통적인 마푸체족의 폰초


또한 마푸체는 직물을 중요한 잉여 생산물이자 교역품으로 사용했다. 16세기의 많은 기록은 그들이 다른 원주민들과, 그리고 새로 개발된 정착지의 식민 개척자들과 직물을 교역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교역을 통해 마푸체는 생산하지 않거나 높이 평가하는 상품, 예를 들어 말과 같은 상품을 얻을 수 있었다. 아라우카니아와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 북부에서 원주민 여성이 생산하고 판매한 직물의 양은 상당했으며, 원주민 가족에게 중요한 경제적 자원이 되었다.[77] 유럽인 정착 이전 시대의 직물 생산은 가정 소비를 넘어서는 용도를 위해 이루어졌다.[78]

현재 마푸체가 짠 직물은 가정용으로, 그리고 선물, 판매 또는 교역용으로 계속 사용되고 있다. 대부분의 마푸체 여성과 그들의 가족들은 이제 외국 디자인의 의복을 입고 공업용 재료로 맞춤 제작된 의류를 입지만, 정기적으로 사용할 폰초, 담요, 띠, 벨트를 계속해서 짜고 있다. 많은 직물이 거래를 위해 짜여지며, 많은 경우 가족의 중요한 소득원이 된다.[79] 많은 마푸체 여성들은 조상들의 관습에 따라 직물을 계속 짜고 있으며, 어머니에서 딸로, 할머니에서 손녀로 가정 생활에서 그들의 지식을 전달하고 있다. 이러한 학습 방식은 몸짓 모방을 기반으로 하며, 엄격하게 필요한 경우에만 드물게 견습생은 강사로부터 명시적인 지시나 도움을 받는다. 지식은 직물이 짜여지는 동안 전달되며, 직조와 지식 전달은 함께 이루어진다.[76]

4. 3. 은세공

유럽인들이 남아메리카에 진출했을 무렵, 마푸체족은 금속 가공 기술과 승마 기술을 빠르게 습득하였고, 밀 재배와 양 사육도 받아들였다.[125] 300년 동안 스페인 식민지와 비교적 명확하게 구분된 자치적인 마푸체 지역이 공존하면서, 스페인인, 아르헨티나인, 칠레인과의 활발한 무역 전통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무역은 마푸체 은세공 전통의 중심에 있었으며, 마푸체족은 스페인, 아르헨티나, 칠레의 광범위하게 분포된 다량의 은화로 보석을 만들었다. 또한 '트라릴롱코(trarilonko)' 등으로 불리는 동전으로 머리 장식을 만들었다.[125]

18세기 후반, 마푸체 은세공인들은 다량의 은 장신구를 생산하기 시작했다.[83] 은세공 활동의 급증은 1726년 네그레테 의회와 관련이 있을 수 있는데, 이 의회는 스페인인과 마푸체 사이의 적대감을 줄이고 식민지 칠레와 자유 마푸체 사이의 무역을 증가시켰다.[83] 이러한 무역 증가의 맥락에서 마푸체는 18세기 후반부터 주로 소나 말과 같은 자신의 상품에 대한 대가로 은화를 받기 시작했다.[83] 정치적 협상을 통해 얻은 은화와 은 주화는 마푸체 금속 세공인(rüxafe|륏사페arn)에게 원료로 사용되었다.[83][84][85] 오래된 마푸체 은 펜던트에는 종종 녹이지 않은 은화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현대 연구자들이 유물의 연대를 측정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84] 대부분의 스페인 은화는 상페루의 포토시 광산에서 채굴된 것이었다.[85]



은 장신구 디자인의 다양성은 디자인이 서로 다른 reynma|레인마arn(가족), lof mapu|로프 마푸arn(땅)뿐만 아니라 특정 lonko|론코arn와 machi|마치arn(샤먼)와 관련되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86] 마푸체 은 장신구는 유행의 변화에도 영향을 받았지만, 철학적, 영적 개념과 관련된 디자인은 큰 변화를 겪지 않았다.[86]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 마푸체 은세공 활동과 예술적 다양성은 절정에 달했다.[87] 19세기의 모든 중요한 마푸체 추장들은 적어도 한 명의 은세공인을 두었다고 여겨진다.[83] 1984년 마푸체 학자 카를로스 알두나테(Carlos Aldunate)는 현대 마푸체들 중에는 은세공인이 없다고 언급했다.[83]

4. 4. 문학

16세기 마푸체 문화는 구전 전통을 가지고 있었고, 문자 체계가 없었다. 그 이후로 마푸둥군 문자 체계가 개발되었고, 스페인어와 마푸둥군으로 된 마푸체 문학이 번성했다.[88] 현대 마푸체 문학은 구전 전통과 스페인어-마푸둥군 이중 언어 작품으로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88] 주목할 만한 마푸체 시인으로는 세바스티안 케우풀(Sebastián Queupul), 페드로 알론소(Pedro Alonzo), 엘리쿠라 치와이라프(Elicura Chihuailaf), 레오넬 리엔라프(Leonel Lienlaf)가 있다.[88]

4. 5. 종교 및 신념

마푸체족의 신앙은 마치(machi)라 불리는 무당이 거행하는 의식을 중심으로 한 자연숭배로 분류된다. 그들의 신앙에서는 전승 『트렌트렌 빌루와 카이카이 빌루 전설』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71] 또한 엔겐과 필란 등을 비롯한 자연숭배를 기반으로 한 정령 존재들이 숭배되고 있다. 마치는 샤머니즘적인 특징을 가지며, 일반적으로 여성이 담당하지만, 연장자가 후진을 지도한다. 마치는 다양한 약초 등과 과학적인 지식을 폭넓게 가지고 있으며, 질병 치료(machitun)와 귀신 쫓기, 또는 기우제(guillatun)와 풍년에 관한 의식 및 사회적 교류 등을 거행한다.[72][73][74]

1904년 아라우카니아 철학자들의 회의


마푸체 우주론의 중심에는 ngenechenarn이라 불리는 창조주가 있다는 개념이 있으며, 이 창조주는 네 가지 요소(나이든 남자(fucha/futra/cha chauarn), 나이든 여자(kude/kusearn), 젊은 남자, 젊은 여자)로 구현된다. 그들은 Wenu Mapuarn와 Minche Mapuarn로 알려진 세계를 믿는다. 마푸체 신화에서 주요 신 또는 정령 집단은 Pillanarn과 Wangulenarn(조상의 영혼), Ngenarn(자연의 정령), 그리고 wekufearn(악령)이다.

마푸체 의식의 일부는 우주적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기도와 동물 희생이다. 1960년에는 지진과 쓰나미 후 어린 소년을 물에 던져 희생시킨 마치도 있었다.

lonko 킬라판의 딸


1540년대부터 이어진 스페인과 칠레에 대한 독립과 저항, 그리고 1870년대에 칠레에 의해 정복당한 역사도 마푸체족의 신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기억과 이야기, 신념들은 때로는 지역적인 것이거나 상당히 특수한 것으로 변화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칠레에 사는 많은 마푸체족이 자신을 칠레인으로, 아르헨티나에 사는 그들이 자신을 아르헨티나인으로 여기는 현재에도 그 저항의 역사는 사라지지 않고 아직도 맥을 잇고 있으며, 칠레 문화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4. 6. 양성성 관점

아라우카니아의 마푸체족 사이에는 이성애 여성 마치 무당 외에도 여성 의복을 입는 동성애 남성 마치 웨예(machi weye) 무당이 있었다.[89][90][91] 이러한 마치 웨예는 1673년 스페인 연대기에 처음 기록되었다.[92] 마푸체족에게 "영혼은 마치의 옷 아래의 성이 아닌, 마치의 성별화된 담론과 행위에 관심이 있다".[93] 필레우(filew, 영혼)를 불러들일 때, "남성과 여성 마치 모두 영혼을 유혹하고 부르는 영적인 신부가 되는데, 그 영혼은 동시에 남편이자 주인이 되어 그들의 머리를 지배한다… 남성 마치의 의례적 변복은 영혼 남편과 마치 아내로 이루어진 부부(kurewen)라는 관계적 성별 범주에 주목하게 한다."[94] 마치의 "양성을 가진 정체성"[95], "양성 전문가로서의 마치"[96]에 관해서는 마푸체족 사이에 "여성 버다치(berdaches)"가 과거에 존재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97]

5. 마푸체와 칠레/아르헨티나 국가

16세기 이후 남아메리카에 진출한 스페인 사람들은 마푸체족을 아라우카노족(Araucanos) 또는 아라우카니아인(Araukanians)이라 불렀으나, 현재는 경멸적인 표현으로 여겨진다.[4][5] 칠레와 아르헨티나에서는 주로 "마푸체족"이라는 표현이 사용되며, 마푸체족 자신들도 이를 선호한다. 'araucano'의 어원은 케추아어(Quechua)로 "반역자"를 의미하는 'awqa'가 아니라, 마푸체어로 "진흙탕물"을 의미하는 지명 아라우코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다.[7][8]

마푸체족은 공통의 사회 구성, 종교, 경제 구조, 언어적 유산을 공유하는 다수의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영향력은 아콩카과 강(Aconcagua River)과 아르헨티나 라 판파 주(La Pampa Province) 사이의 지역 전체에 미쳤다. 칠레 중부의 산악 지역에 거주하며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잉카 제국의 일부로 간주되었던 피쿤체와 위이리체, 쿤코족도 같은 일파로 간주된다.[120] 마푸체족은 위이리체족, 라프켄체족(Lafquenche) 및 페우엔체족(Pehuenche)과 마찬가지로 이타타 강(Itata River)과 톨텐 강(Toltén River) 사이의 계곡에 거주했다.

마푸체는 지리적 위치에 따라 자신을 다음과 같이 확인한다.


  • '''푸엘체''': "동쪽의 사람들"은 '푸엘 마푸'(Puel mapuarn), 동쪽 땅(아르헨티나의 팜파와 파타고니아)을 차지했다.
  • '''피쿤체''': "북쪽의 사람들"은 Pikun-mapuarn, "북쪽 땅"을 차지했다.
  • '''위이리체''': "남쪽의 사람들"은 Willi mapuarn, "남쪽 땅"을 차지했다.
  • '''페우엔체''': "페웬/페우엔 나무의 사람들"은 Pewen mapuarn, "아라우카리아 아라우카나 나무의 땅"을 차지했다.
  • '''라프켄체''': "바다의 사람들"은 Lafken mapuarn, "바다의 땅"을 차지했다. 연안 마푸체로도 알려져 있다.
  • '''나그체''': "평원의 사람들"은 Nag mapuarn, "평원의 땅"(나우엘부타 산맥의 일부 지역과 그 경계 저지대)을 차지했다.
  • '''웬테체''': "계곡의 사람들"은 Wente mapuarn, "계곡의 땅"을 차지했다.[12]


잉카 제국의 군대는 마울레 강에 도달하여 마푸체와 전투를 벌였으며,[15] 대부분의 현대 학자들은 잉카 제국의 남쪽 국경이 산티아고와 마이포 강 사이, 또는 산티아고와 마울레 강 사이 어딘가에 있었다고 믿는다.[16] 잉카 침략자들과의 접촉을 통해 마푸체는 처음으로 국가 조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났을 것이다.

칠레의 힙스패닉 시대 원주민 분포


칠레에 최초의 스페인 사람들이 도착했을 당시 가장 큰 원주민 인구 밀집 지역은 이타타 강에서 칠로에 섬까지 뻗어 있는 지역, 즉 마푸체의 중심지였다.[18] 16세기 중반 이타타 강과 렐롱카비 해협 사이의 마푸체 인구는 705,000~900,000명으로 추산된다.[19]

1990년 설립된 모든 땅의 의회가 마푸둔군 명칭인 ''Aukiñ Wallmapu Ngulam''을 채택한 이후 “왈마푸”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51][52] 1992년 웨누포예 마푸체 국기를 포함하여 칠레 남부의 주요 마푸체 영토를 나타내는 5개의 깃발이 만들어졌다.[55]

랄코 수력발전소 건설은 국가-마푸체 관계에서 결정적인 시점이었으며, 1997년 코오르디나도라 아라우코-말레코(CAM)의 결성에 기여했다.[58]

트라이구엔과 루마코 사이의 아라우카니아 지역 북부 등 일부 마푸체 지역에서는 토지 분쟁과 폭력적인 충돌이 계속되고 있다.

일본과 스위스의 이익이 아라우카니아 (Ngulu Mapuarn) 경제에 활발하지만, 주요 임업 회사는 칠레 소유이다. 과거 이 회사들은 몬터레이 소나무, 더글러스 전나무, 유칼립투스 나무와 같은 외래종을 심어 토착 발디비아 숲을 대체하기도 했다.

최근 마푸체 무장 반군이 저지른 범죄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테러 방지 법에 따라 기소되었으며, 2010년 마푸체는 테러 방지 법에 변화를 주기 위해 단식 투쟁을 벌였다.[62]

2022년 5월, 칠레 하원은 코오르디나도라 아라우코-말레코, 마푸체 레지스탕스 말레코, 마푸체 레지스탕스 라프켄체, 웨이찬 아우카 마푸를 "불법 테러 단체"로 선언했다.[64][65][66]

바카 무에르타 지역의 석유 개발은 환경을 오염시켰고, 2018년 마푸체는 엑손, 토탈에너지, 판 아메리칸 에너지를 고소했다.[67]

5. 1. 칠레

1810년대 칠레 독립 이후, 마푸체족은 이전과는 달리 다른 칠레인들과 마찬가지로 칠레인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98] 그러나 19세기 아르헨티나 작가이자 대통령인 도밍고 파우스티노 사르미엔토는 "칠레의 두 주(콩셉시온과 발디비아) 사이에는 주가 아닌 땅이 있다. 그곳의 언어는 다르고,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여전히 칠레의 일부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 칠레는 그 깃발이 휘날리고 법이 준수되는 나라의 이름이다."라고 언급하며 다른 견해를 제시하기도 했다.[99]

1849년 ''호벤 다니엘(Joven Daniel)''호 난파 사건에서 살아남았다고 알려진 엘리사 브라보(Elisa Bravo)가 마푸체족에게 납치당했다는 내용의 레이몽드 몽부아쟁(Raymond Monvoisin)의 그림.


1849년 아라우카니아 해안에서 발생한 호벤 다니엘(Joven Daniel)호 난파 사건은 마푸체족을 잔혹한 야만인으로 보는 시각을 굳히고, 칠레 당국의 이전 호의적인 태도가 순진했음을 보여주는 "전환점"으로 여겨진다.[100][101]

19세기 칠레 정부와 군부는 마푸체족을 문명화 사업(civilizing mission)의 대상으로 삼았다. 코르넬리오 사아베드라 로드리게스(Cornelio Saavedra Rodríguez)는 1861년 마푸체족이 칠레 국가 권위에 복종하고 "감소 및 문명화에 들어가야 한다"고 촉구했다.[102] 1883년 마푸체족이 최종적으로 패배했을 때, 도밍고 산타 마리아(Domingo Santa María) 대통령은 "오늘날 아라우카니아 전체는 물질적 힘보다 공화국의 도덕적이고 문명화된 힘에 정복되었습니다…"라고 선언했다.[103]

태평양 전쟁(War of the Pacific)(1879–1883) 이후 칠레 지배 계급 사이에서 인종적, 민족적 우월성 사상이 증가했다.[104] 칠레 의사 니콜라스 팔라시오스(Nicolás Palacios)는 과학적 인종주의(scientific racism)와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마푸체 "인종"을 칭찬하며, 마푸체족을 다른 부족보다 우월하고 칠레 메스티소(mestizo)는 마푸체족과 스페인의 서고트족(Visigoths) 요소의 혼합이라고 생각했다.[105] 그의 저술은 칠레의 나치즘(Nazism in Chile)에 영향을 미쳤다.[106]

아라우카니아 점령(Occupation of Araucanía)과 태평양 전쟁 결과, 칠레는 새로운 토착민 인구가 있는 영토를 병합했다. 마푸체족은 "원초적인" 칠레인으로서 다른 토착민과 대조적으로 비교적 호의적인 시각을 얻었다.[107]

칠레 비원주민들의 마푸체족에 대한 현대적 태도는 개인적이고 이질적이지만, 상당수는 마푸체족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차별적인 태도를 보인다. 2003년 연구에 따르면, 60세 이상, 저사회경제적 지위, 우익 정당 지지자, 프로테스탄트, 가톨릭 신자 등에서 높은 편견을 보였다. 반면, 대학 진학자, 좌익 정당 지지자, 18~29세에서는 낮은 편견을 보였다.[108] 마푸체족에 대한 편견으로는 게으르고 알코올 중독이라는 점이 있으며, 다소 덜하지만 구식이고 더럽다는 평가도 있다.[109]

20세기, 많은 마푸체 여성들이 가정부로 일하기 위해 대도시로 이주했다. 에릭 파산은 마푸체 가정부의 출현을 식민지 시대의 봉사 관계의 연장선으로 규정했다.[111]

원주민 단체 "모든 땅의 의회"가 1992년에 만든 ''웨누포예'' 깃발.


역사가 곤살로 비알는 칠레 공화국이 마푸체족에게 "역사적 빚"을 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아라우코-말레코 조정위원회는 마푸체의 "국가 해방"과 그들의 땅에 대한 주권 회복을 목표로 한다고 주장한다.[98] 마푸체 여성 활동가들 사이에서는 그들의 투쟁이 성별을 넘어선다고 생각하여 페미니즘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110]

현재 마푸체족 후손들은 칠레와 아르헨티나에 걸쳐 거주하며, 아라우카니아주 주민의 80%를 차지하고 로스라고스주, 비오비오주, 마울레주에서도 높은 인구 비율을 보인다. 대다수는 더 나은 수입을 위해 도시로 이주하고 있지만, 경제적, 공적인 측면에서 불우한 상황에 놓여 있다.[122]

마푸체족이 많은 아라우카니아주에서는 국군의 주둔에 저항했기 때문에, 피노체트 정권 시대에 많은 원주민들이 억울하게 죽었고, 1990년 민주화 이후에도 토지와 물 권리를 요구하는 시위와 점거가 계속되고 있다.[117] 최근에는 그들이 거주하는 토지를 개발하는 임업계 대기업[123]을 향한 폭력 보복이 계속되고 있으며, 특히 아라우카니아주 북부 Traiguén 지구와 루마코 지구 사이에서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마푸체족의 정치 활동에는 피노체트 정권 시절의 테러방지법이 적용되어 가중 처벌되기도 했지만, 수감자들은 단식 투쟁을 벌였고, 유엔에 중재를 요청하기도 했다.[117]

칠레인이 "Araucanía", 마푸체족이 "Ngulu Mapu"라고 부르는 지역의 산림 자원에 대해 일본스위스가 이권 확보에 나섰을 때, 마푸체족은 라디에이타 소나무(몬터레이 소나무)와 유칼립투스 등의 산림은 원래 그들이 조림한 것이며, 자원의 권리는 그들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칠레에서 연간 약 6억달러에 달하는 목재를 수입하는 미국에서는, 열대림 보호 캠페인 단체 Forest Ethics가 주도하여, 홈데포 등 주요 수입업체로부터 "칠레의 원시림을 보호하는" 목재 구매 방침으로 변경하는 동의를 얻어내는 등의 움직임도 있었다.

최근 칠레 정부는 마푸체족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한 여러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템우코시에서는 초등학교에 마푸체어와 문화 수업을 추가하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정부 특별 기관인 위원회(the Commission for Historical Truth and New Treatment)는 2003년 보고서를 제출하여 원주민에 대한 정책을 과감하게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5. 2. 아르헨티나

19세기 아르헨티나 당국은 팜파스와 파타고니아를 국토에 편입하려 했으며, 푸엘마푸 마푸체족이 칠레와 강력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이는 칠레에게 팜파스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어느 정도 부여했다. 아르헨티나 당국은 파타고니아를 둘러싼 칠레와의 전쟁에서 마푸체족이 칠레 편에 설 것을 우려했다.[112] 이러한 맥락에서 에스타니슬라오 세바요스(Estanislao Zeballos)는 1878년 아르헨티나 전쟁부의 의뢰로 La Conquista de quince mil leguas|1만 5천 리의 정복es을 발표했다. 이 책에서 마푸체족은 칠레로 돌아가야 하는 칠레인으로 묘사되었다.[113] 따라서 마푸체족은 간접적으로 외국의 적이라고 여겨졌다.[113] 이러한 개념은 푸엘마푸에 대한 니콜라스 아벨라네다(Nicolás Avellaneda)와 훌리오 아르헨티노 로카(Julio Argentino Roca)의 팽창주의적 계획과 잘 맞아떨어졌다.[113] 그러나 마푸체족을 칠레인으로 보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견해이다. 마푸체족은 현대 칠레 국가의 형성 이전부터 존재했기 때문이다.[113] 1920년대에 이르러 아르헨티나의 나시오날리즘es은 마푸체족을 칠레인으로 보는 견해를 되살렸는데, 이는 리카르도 E. 래트챔(Ricardo E. Latcham)과 프란시스코 안토니오 엔시나(Francisco Antonio Encina)와 같은 20세기 칠레 학자들의 견해와는 대조적이다. 이들은 마푸체족이 안데스 산맥 동쪽에서 기원하여 현재 칠레가 된 지역으로 진출했다는 이론을 제시했다.[13][113]

2017년 후반기에 아르헨티나 역사가 로베르토 E. 포르셀(Roberto E. Porcel)은 국립역사학회에 보낸 공문에서 아르헨티나에서 마푸체족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유럽계 후원자들에 의해 격려받은 메스티소(Mestizo)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들이 "대부분 아라우카니아인(Araucanian)이 아니라는 점뿐만 아니라, 아라우카니아인이 우리 원주민 중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들의 주장과 폭력에 대한 어떤 권리도 없다"고 썼다.[114]

아르헨티나 테우엘체-마푸체 깃발


세계에서 가장 큰 셰일 오일 및 셰일 가스 매장지 중 하나인 누에켄의 바카 무에르타 지역의 석유 개발과 프랙킹은 슬러지 폐기물 매립지를 만들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남쪽으로 약 1,200km 떨어진 아넬로 마을 근처 환경을 오염시켰다. 2018년 마푸체는 엑손, 프랑스 기업 토탈에너지 및 판 아메리칸 에너지를 고소했다.[67]

6. 현대 정치

2017년 칠레 총선에서 최초로 마푸체족 여성 두 명이 칠레 의회에 당선되었다. 국민혁신당 소속 아라셀리 레우켄 우리베와 사회당 소속 에밀리아 누야도가 그들이다.[115]

7. 대중문화


  • 2012년, 저명한 마푸체 직조가 아닐타 파이야밀(Anita Paillamil)은 칠레 예술가 기예르모 베르트(Guillermo Bert)와 협력하여 전통 마푸체 직물 직조와 QR 코드 디자인을 결합한 전시회 "Encoded Textiles"를 개최했다.[116]
  • 2020년 칠레-브라질 합작 애니메이션 영화 ''나후엘과 마법 책''은 주요 등장인물인 프레시아와 후엔추르를 통해 마푸체의 의복과 부족을 보여준다.
  • 4X 비디오 게임 ''문명 VI''에서는 마푸체가 플레이 가능한 문명(흥망성쇠 확장팩 추가)으로 등장한다. 그들의 지도자는 라우타로로, 칠레에서 스페인 정복에 맞서 토착 저항을 이끈 젊은 마푸체 토키이며, 오랜 아라우카니아 전쟁 동안 마푸체가 계속 사용하게 될 전술을 개발한 인물이다.
  • 이사벨 아옌데의 소설 "내 영혼의 이네스(Inés of My Soul)"는 페드로 발디비아에 의한 칠레 정복을 다루며, 책의 상당 부분은 마푸체 갈등에 대한 내용이다.
  • 2021년 칠레 스릴러 영화 "몰입(Immersion)"의 줄거리는 휴가를 온 가족과 세 명의 마푸체 남성 간의 권력 다툼이다.
  • 2023년 영화 "사옌(Sayen)"은 코발트를 채굴하려는 국제 광산 회사에 저항하는 마푸체 마을 사람들을 묘사한다.
  • 2024년 그랜드 전략 비디오 게임 하츠 오브 아이언 IV의 확장팩 "충성의 시련(Trial of Allegiance)"에서는 플레이어가 칠레로 플레이하고, 각각의 집중 트리를 통해 아라우카니아와 파타고니아 왕국을 복원하거나(마푸체 소수 민족이 인정됨) 마푸체 쿠데타를 일으켜 북미와 남미 대륙의 원주민들을 해방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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