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노 나가코토
1. 개요
아사노 나가코토는 1842년에 태어나 1937년에 사망한 일본의 화족으로, 히로시마 번의 마지막 다이묘이자 후작이었다. 그는 1860년대에 양아버지인 아사노 나가미치를 보좌하며 천황의 통치 복원을 지지했고,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권력 반환을 조언했다. 1869년 히로시마 번의 12대 다이묘가 되었고, 폐번치현 이후에는 후작의 칭호를 받았다. 겐로인 의원, 이탈리아 공사를 역임했으며, 히로시마 지역의 산업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아사노 도서관(현 히로시마 시립 중앙 도서관)을 설립하고, 슈도 학교(현 슈도 중학교·고등학교)를 부흥시키는 등 교육 및 문화 사업에도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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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아사노 나가코토 |
|---|---|
| 출생일 | 1842년 8월 28일 |
| 출생지 | 히로시마, 히로시마, 일본 |
| 사망일 | 1937년 2월 1일 |
| 배우자 | 쓰나코 (야마우치 도요요시의 딸) |
| 자녀 | 아사노 나가미치 (양자), 아사노 나가아쓰, 아사노 나가유키, 마쓰우라 마스코 |
| 작위 | 후작 |
| 칭호/훈장 | 종1위 욱일동화대수장 |
| 직책 | 히로시마 번주 |
|---|---|
| 재임 시작 | 1869년 6월 17일 |
| 재임 종료 | 1871년 7월 14일 |
| 전임 | 아사노 나가미치 |
| 후임 | 없음 |
| 직책 | 귀족원 의원 |
| 선거구 | 후작 의원 |
| 취임일 | 1890년 2월 |
| 퇴임일 | 1937년 2월 1일 |
| 직책 | 주 이탈리아특명전권공사 |
| 취임일 | 1882년 |
| 퇴임일 | 188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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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말 히로시마번 사람 -
가토 도모사부로
가토 도모사부로는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 참전하여 쓰시마 해전 승리에 기여한 일본 제국의 해군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해군 대신과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며 워싱턴 해군 군축 회의에서 군축 협상을 주도하고, 총리 재임 중에는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 이행, 산둥반도 일본군 철수, 시베리아 출병 종결 등의 업적을 남겼다. -
막말 히로시마번 사람 -
시모세 마사치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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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번주 -
아사노 나가아키라
아사노 나가아키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히데타다를 섬긴 에도 시대의 다이묘로, 형의 사망 후 기이 기슈번을 상속받고 오사카 전투에서 공을 세워 아키 히로시마번의 번주가 되었다. -
히로시마번주 -
후쿠시마 마사노리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긴 일본 아즈치-모모야마,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으로, 임진왜란 참전과 세키가하라 전투에서의 공으로 히로시마 번주에 임명되었으나 금령 위반으로 강등된 인물이다. -
일본의 인물신 (일본 제국) -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은 다이쇼 천황의 둘째 아들이자 쇼와 천황의 동생으로, 스포츠와 국제 교류에 적극 참여하여 '스포츠 왕자'라는 애칭을 얻었으나, 극우 군국주의 성향과 2·26 사건 연루 의혹 등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인물이다. -
일본의 인물신 (일본 제국) -
쇼켄 황태후
쇼켄 황태후는 메이지 천황의 황후로서 사회 사업과 여성 교육에 헌신했으며, 일본 적십자사 설립에 기여하고 국제 적십자 기금 조성에 힘썼다.
2. 생애
아사노 나가미치의 양자로 들어간 아사노 나가코토는 1860년대에 양아버지를 보좌하며 천황의 통치 복원과 관련된 여러 회의와 행사에 참석했다.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권력을 천황에게 반환하도록 조언한 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었으나, 사쓰마와 조슈 등과 달리 막부에 대한 군사 행동에는 반대했다. 어린 시절 이름은 기요츠치(喜代槌)였고, 후에 타메고로(為五郎)로 개명했다.
1869년 나가미치가 은퇴하면서 히로시마 번의 12대 다이묘가 되었다. 1871년 폐번치현으로 번이 폐지되었지만, 귀족 제도의 일환으로 후작(고샤쿠) 칭호를 받았다.
1880년 겐로인 (원로원)의 일원이 되었고, 2년 후 이탈리아 대사로 임명되었으며, 귀족원에서도 활동했다. 도쿄에 거주하며 활동했지만, 히로시마현으로 개명된 고향의 산업과 기타 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사노 도서관(현재 히로시마 시립 중앙 도서관)은 1926년에 개관했으며, 1937년에 9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1. 출생과 가독 상속
아사노 나가코토는 아사노 나가아키(히로시마번 제7대 번주 아사노 시게아키의 넷째 아들 아사노 나가토시의 여덟째 아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56년(안세이 3년) 2월, 백부 아사노 나가쿠니의 양자가 되었다. 1858년(안세이 5년) 11월 4일, 양부 나가쿠니가 본가를 상속받음에 따라 아오야마 나이쇼 분가(히로시마 신덴 번 아사노 가문)의 가독을 이었다. 종5위하·이와미노카미에 임관했으며, 후에 오미노카미로 개명했다. 신덴 번주 재임 중에는 처음 이름인 나가오키를 사용했다.
1862년(분큐 2년) 12월 24일, 나가쿠니(시게나가)의 양자가 되어, 아오야마 나이쇼 분가의 가독은 사촌 동생 아사노 나가아쓰(정실은 나가쿠니의 자매)에게 양도했다. 통칭을 키이노카미로 개명했다. 1863년(분큐 3년) 2월 11일, 종4위하·시지쥬에 임관했으며, 장군 도쿠가와 이에모치로부터 편휘를 받아 시게코토로 개명했다. 1864년(겐지 원년) 4월 28일, 좌소장에 임관했다.
2.2. 막부 말기의 활동
아사노 나가미치의 양자로 들어간 나가코토는 1860년대에 양아버지를 보좌하며 천황의 통치 복원과 관련된 여러 회의와 행사에 참석했다. 그는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권력을 천황에게 반환하도록 조언한 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사쓰마와 조슈와 같은 번 출신들과 달리, 아사노는 막부에 대한 군사 행동에 반대했다.
게이오 2년(1866년) 5월, 히로시마번은 제2차 조슈 정벌에 대의가 없다며 강하게 반대했다. 히로시마에 주둔하고 있던 로주(老中) 오가사와라 이키노카미 나가미치는 비전론(非戰論)으로 맞서는 집정노무라 타테와키와 쓰지 쇼소에게 근신을 명했다.
이에 분개한 후나코시 요노스케, 키하라 슈조 등 문무 유지들은 번교 학문소(현재 슈도 중학교·슈도 고등학교)에 모여 오가사와라 로주를 공격하려 했다. 이를 안 시게토시는 가신들을 모아 훈령을 내리고 번사들의 경거망동을 경계하며, 시국에 대한 의견이 있으면 건백하라고 명령했다.
5월 18일, 학문소에 모였던 55인은 연명으로 시게토시에게 건백서를 제출하여 히로시마 번의 출병 거부를 요구했다. 그러나 5월 23일, 히로시마성 아래 마을 거리 5곳에 오가사와라 이키노카미와 무로가 이요노카미 암살 예고 벽보가 붙었다.
결국 히로시마 번주 아사노 시게나가(나가노리)는 55명의 젊은이들이 요구하는 불참전을 받아들여 오가사와라에게 국외 퇴거를 요청했다. 6월 2일, 오가사와라 로주는 히로시마를 떠났고, 6월 3일 시게나가는 오가사와라의 후임인 마쓰다이라 로주에게 히로시마 번의 선봉 거부를 통보했다. 6월 4일에는 번주가 다시 정벌 불가론을 펼치며 히로시마(게이슈) 번 병사의 출진 사퇴를 막부에 통고했다. 6월 8일, 제2차 막장 전쟁이 스오 오시마에서 시작되었다.
게이오 3년(1867년) 정월 4일, 집정 이시 슈리가 각로 이타쿠라 가쓰시게에게 대정봉환 건백서를 제출하고, 다음 날 5일에는 스게노가 덴소(傳奏) 아스카이에게 상주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시기가 무르익지 않아 성사되지 않았다.
이후 히로시마번의 집정 쓰지 쇼소는 미타라시 (구레시)의 밀무역으로 교류가 있던 사쓰마번의 가로 고마쓰 다테와키와 협의하여, 도사번의 고토 쇼지로에게도 이야기를 전달해 7월 3일, 삼 번에서 대정봉환 건백서 제출과 교토 출병을 계획했다. 오카야마번, 돗토리번, 도쿠시마번에도 찬동자를 넓혀갔다.
그러나 도사번의 야마우치 요도는 대정봉환 건백서는 인정했지만 교토 출병은 인정하지 않아 삼 번 출병 계획은 좌절되었다. 그래서 히로시마, 사쓰마 양 번은 조슈번을 출병시키기 위해 삼 번 군사 동맹을 계획했다. 창구는 히로시마번 교토 응접 담당 구로다 마스노조, 조게이 연락역 우에다 이치지로, 사쓰마번 오쿠보 이치조 (도시미치), 조슈번 기도 준이치로 (가쓰라 고고로・기도 다카요시)였다. 10월 1일, 사쓰마번은 번 내 의견 통일이 되지 않아 삼 번 출병이 좌절되었다.
10월 3일, 도사번이 단독으로 대정봉환 건백서를 막부에 제출했다. 10월 6일, 히로시마번도 로주 이타쿠라 가쓰키요에게 두 번째 대정봉환 건백서를 제출했고, 10월 15일 대정봉환이 조정에 수리되었다. 10월 17일, 교토에 있던 히로시마번 병사 876명과 사쓰마번 병사 약 2천 명이 아이즈, 구와나번 병사를 물리치고 교토 어소 경비를 맡았다.
11월 26일, 미타라시(구레시)에서 삼 번 출병이 실행되었다. 조슈병의 배에는 히로시마번과 사쓰마번의 깃발을 사용하여 위장했다.
12월 1일, 히로시마번 집정 쓰지 쇼소는 히로시마번 병사에게 교토 이탈 명령을 내렸다. 12월 9일, 왕정복고의 대호령으로 의정이 된 나가코토는 고쇼 회의에 출석하여 대립하는 사쓰마번 이와쿠라 도모미와 도사번을 중재했다.
2.3. 메이지 시대 이후의 활동
메이지 원년(1868년), 아사노 나가코토는 메이지 신정부에 협력하기 위해 도쿠가와 쇼군에게서 받은 이름을 버리고 나가코토로 개명했다. 1869년 판적봉환으로 히로시마 지번사가 되어 번정 개혁에 힘썼다. 1871년 폐번치현으로 지번사에서 물러나 도쿄로 이주했다.
1872년, 일본 최초의 양지 제조 공장인 유코샤를 설립하여 1874년부터 가동했다. 초기에는 적자가 계속되었지만, 일본 근대화에 따라 양지 수요가 늘어날 것이라고 확신하고 경영을 계속했다.
1878년 사재를 털어 폐쇄되었던 히로시마 번교 슈도칸을 부흥시켜 아사노 학교를 개교했다. 1881년 슈도 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번교 출신 야마다 쥬치쿠를 교장으로 초빙했다. 이 학교는 현재 슈도 중학교·슈도 고등학교로 이어져 많은 인재를 배출하고 있다.
1881년 원로원 의관이 되었고, 1882년 이탈리아 공사로 임명되어 유럽 각국을 시찰했다. 이탈리아에서는 국왕 부부에게 메이지 천황의 국서를 전달하고 훈장을 받았다. 유럽의 산업과 기술력을 시찰하고, 러시아에서는 백야를 경험했다. 미국을 경유하여 귀국하면서, 구 번의 젊은이들을 유럽에 유학시켰다.
1884년 궁내성화족국 장관, 1890년 귀족원 의원에 취임했다. 같은 해 후작 작위를 받았다. 쇼와 천황의 양육을 담당하기도 했다.
1887년 소마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 있던 소마가의 후견인이 되었다.
1889년 신문 '일본' 창간에 출자하고, 15은행의 대주주이자 이사, 1895년에는 은행장이 되었다.
3. 가계
| 관계 | 이름 | 비고 |
|---|---|---|
| 아버지 | 아사노 쓰토무 | |
| 어머니 | 사와 요시모토의 딸 | |
| 양아버지 | 아사노 나가미치 | |
| 부인 | 야마노우치 쓰나히메 | 도사 번 제13대 다이묘 야마노우치 도요테루의 딸 |
| 양자 | 아사노 나가미치 | |
| 양자 | 아사노 나가아쓰 | 1843년 ~ 1873년 |
| 양자 | 마시코 | 마쓰라 아쓰시와 결혼 |
| 양자 | 아사노 나가유키 | 숙부 아사노 도시쓰구의 아들 |
| 아버지 | 아사노 모치아키 | |
| 어머니 | 사와 요시카타의 딸 | |
| 형제 | 아사노 나가코토 | 본인 |
| 남동생 | 아베 마사하루 | 1852년 ~ 1914년 |
| 여동생 | 기쿠코 | 1856년 ~ 1902년, 백작 난부 토시유키 부인 |
| 남동생 | 코세츠토시 | 1861년 ~ 1936년 |
| 남동생 | 아사노 나가미치 | 1865년 ~ 1886년 |
| 남동생 | 아사노 나가나가 | 1872년 ~ 1941년 |
| 양아버지 | 아사노 나가노리(시게나가) | 1812년 ~ 1872년 |
| 정실 | 츠나히메 | 야마우치 토요하루의 딸 |
| 양자 | 아사노 나가미치 | 친동생, 아사노 모치세키의 자녀 |
| 양자 | 아사노 나가토시 | 1843년 ~ 1873년, 히로시마 신덴 번주, 아사노 모치세키의 넷째 아들 |
| 양자 | 아사노 나가유키 | 1864년 ~ 1947년, 아사노 후작 가문, 아사노 모치세키의 아홉째 아들 |
| 양자 | 마쓰우라 마스 | 마쓰라 아쓰시 부인, 아사노 모치세키의 자녀 |
4. 업적
아사노 나가미치의 양자로 입적된 아사노 나가코토는 1860년대 동안 양아버지의 보좌관으로 일했으며, 천황의 통치 복원과 관련된 많은 회의와 행사에 참석했다. 그는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권력을 천황에게 반환하도록 조언한 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사쓰마와 조슈와 같은 번 출신들과 달리, 막부에 대한 군사 행동에는 반대했다.
1869년, 나가코토는 나가미치가 은퇴하면서 히로시마의 12대 다이묘가 되었다. 1871년에 번(藩)이 폐지되었지만, 아사노는 그 당시 제정된 귀족 제도의 일환으로 후작(고샤쿠)의 칭호를 받았다.
1880년에 겐로인 (원로원)의 일원이 되었고, 2년 후 이탈리아 대사로 임명되었으며, 잠시 동안 귀족원에서도 활동했다. 그는 도쿄에서 거주하며 활동했지만, 자신의 고향인 히로시마현의 산업과 기타 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노력했다.
1926년 아사노 도서관(현재 히로시마 시립 중앙 도서관)이 개관했으며, 아사노는 1937년에 9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5. 기타
* 히로시마 시립 중앙 도서관의 전신은 나가코토가 만든 사립 도서관 "아사노 도서관"으로, 나가코토가 만년에 시에 기증했다.
* 히로시마 현립 미술관은 원래 나가코토가 만든 사립 미술관 "칸코칸"이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나가코토 사후 아사노 가문에서 현에 기증되었으나, 원폭으로 궤멸되었고 그 자리에 현재의 미술관이 세워졌다.
* '마지막 번주', '마지막 다이묘'라고 불리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는 오미조번 번주였던 와케베 미츠토시가 번주 경험자 중 마지막까지 생존했지만, 그는 만 7세에 4일밖에 번주를 역임하지 못했다. 세이사이 번 번주였던 하야시 타다타카도 나가코토보다 오래 살았지만, 세이사이 번은 하야시 타다타카가 보신 전쟁에 참전하여 영지가 몰수되었기 때문에, 대규모 번의 마지막 번주로서 나가코토가 '마지막 다이묘'로 주목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