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모세 마사치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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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모세 마사치카는 일본 제국의 해군 기술자이자 화학자였다. 1859년 히로시마에서 태어나 도쿄 대학 공과대학을 졸업하고 내각 인쇄국에서 근무하며 흑색 잉크 등을 발명했다. 1887년 해군 기술자가 되어 화약 연구에 전념했고, 실험 중 사고로 손가락을 잃었음에도 1893년 시모세 화약을 개발했다. 시모세 화약은 러일 전쟁에서 일본 해군의 승리에 기여했으나, 취급의 어려움과 안전성 문제로 인해 2차 세계 대전 중 수류탄에 주로 사용되었다. 그는 1899년 공학 박사 학위를 받고 제국 학사원상을 수상했으며, 1911년 5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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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모세 마사치카 | |
---|---|
기본 정보 | |
이름 | 시모세 마사치카 |
원어 이름 | 시모세 마사치카 (下瀬 雅允) |
![]() | |
출생지 | 일본 히로시마현 히로시마시주오구 뎃포초 (현) |
국적 | 일본 |
사망 | 알 수 없음 |
학력 | |
출신 학교 | 도쿄 제국대학 공학부 응용화학과 졸업 |
학위 | 공학박사 (1899년) |
박사 과정 지도 교원 | 알 수 없음 |
다른 지도 교원 | 알 수 없음 |
주요 지도 학생 | 알 수 없음 |
경력 | |
연구 기관 | 내각인쇄국 해군성 |
연구 분야 | 응용화학 화약학 |
주요 업적 | 시모세 화약 발명 |
주요 작품 | 알 수 없음 |
영향을 받은 인물 | 알 수 없음 |
영향을 준 인물 | 알 수 없음 |
수상 및 회원 | |
주요 수상 경력 | 제국학사원상 (1899년) 훈2등 욱일중광장 (1911년) |
학회 회원 | 제국학사원 회원 (1908년) |
개인 정보 | |
배우자 | 알 수 없음 |
부모 | 알 수 없음 |
자녀 | 알 수 없음 |
서명 | 알 수 없음 |
공식 웹사이트 | 알 수 없음 |
2. 생애
1859년(안세이 6년) 12월 16일, 히로시마 번사 철포역(철포 담당)인 시모세 도쿠노스케의 장남으로 히로시마시 데포초(현 나카구 데포초)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아키 히로시마성하 뎃포정(鉄砲町)은 지금의 히로시마시 중심부인 나카구에 위치해 있으며 뎃포정 이름 그대로 에도 시대부터 뎃포 장인들이 모여 살던 마을이었다.
1884년 (메이지 17년), 히로시마 영어학교(히로시마 제일 중학교의 전신, 현 히로시마현립 히로시마 고쿠테이지 고등학교)를 거쳐, 제국대학 공과대학 응용화학과(도쿄대 공학부)를 졸업. 내각 인쇄국에 취직. 코세이(光의 청색 염료) 및 판면 세척액의 개량, 지폐의 진위 식별에 유효한 흑색 잉크 등을 발명.
1887년 (메이지 20년), 해군 기술자가 되어 아카바네 화약 제조소에서 화약 연구에 전념. 폭발 사고로 왼손에 화상을 입고 손가락 굴신을 할 수 없게 되었지만 굴하지 않았다.
1893년 (메이지 26년), 시모세 화약을 완성. 해군 기사로 승진, 화약 제조소장.
1899년 (메이지 32년), 공학 박사 학위를 받고, 제국 학사원상을 수여받았다. 러일 전쟁의 각 해전 및 뤼순 포격에서 시모세 화약의 위력은 유감없이 발휘되어, 승리에 크게 기여했으며, 당시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06년 (메이지 39년), 그 공로로 훈3등에 서훈되었다. 이후 시모세 화약의 제조법은 극비로 알려졌지만, 그 실체는 페놀을 니트로화하여 만드는 피크르산이었다.
1908년 (메이지 41년) 2월 26일, 제국 학사원 회원이 되었다[1]. 1909년 (메이지 42년) 2월 3일, 고등관 2등(소장 상당)에 서임되었다[2].
1911년 (메이지 44년) 9월 6일, 현역 해군 기사로 사망(향년 51세). 도쿄도토시마구코마고메의 소메이 묘지에 묻혔다.
해군 시모세 화약 제조소가 있었던 도쿄도기타구니시가하라의 공장 부지 근처에, 시모세에 연관된 "시모세 언덕"이라고 이름 붙여진 언덕이 있다[3].
1886년 프랑스인 유젠느 투르팡이 피크린산에서 강력한 작약을 발명했다. ‘멜리나이트’(mélinite)라고 이름을 붙여진 그 화약은 일본에도 판매를 제안받았지만, 당시의 화약 기술은 국가 기밀로 그 정보를 일본이 입수하기 어려웠다. 협상을 맡은 해군 장교가 길게 기른 손톱 사이에 끼워온 소량의 입자 샘플로부터 그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일본에서 개발된 시모세 화약과 동일한 물건인 것이 판명되었기 때문에, 구입은 보류되었다. 또한 시모세 자신도 독자 개발을 주장하고 있었다. 시모세는 실험 사고로 손가락을 잃고서도 여전히 연구를 계속하여 1893년(청일 전쟁 발발 1년 전)에 개발에 성공하여, 국산화했다. 그러나 청일전쟁 때는 양산을 할 수 없어서 사용하지 못했다.
2. 1. 초기 생애
1859년 12월 16일, 히로시마번의 사무라이이자 총포를 다루던 시모세 도쿠노스케의 장남으로 히로시마시 (현 나카구 뎃포정)에서 태어났다.[1] 뎃포정은 에도 시대부터 뎃포 장인들이 모여 살던 마을이었다. 히로시마 영어 학교(현 히로시마현립 히로시마 고쿠테이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1] 도쿄제국대학 공학부 응용화학과에 진학했다. 1884년에 졸업한 후 내각인쇄국에 취직하여 "鎬青(보정)"(빛나는 파란색 염료)과 판면 세정액의 개선, 지폐의 진위 식별에 유효한 흑색 잉크 등을 발명했다.[1]2. 2. 연구 활동 및 시모세 화약 개발
1884년 히로시마 영어 학교(현 히로시마현립 히로시마 고쿠타이지 고등학교)를 거쳐 도쿄대학 공학부의 전신인 공과대학 응용 화학과를 졸업한 시모세 마사치카는 내각인쇄국에서 근무하며 "鎬青(보정)"(빛나는 파란색 염료)과 판면 세정액의 개선, 지폐의 진위 식별에 유효한 흑색 잉크 등을 발명했다. 1887년 해군 기술자가 된 그는 아카바네 화약 제조소에서 화약 연구에 전념했다.1886년 프랑스인 외젠 튀르팽이 피크르산에서 강력한 폭약인 멜리나이트를 발명하였는데, 일본에도 판매 제안이 있었지만 국가 기밀이었기에 상세 정보는 얻기 어려웠다. 협상역이 손톱 사이에 문지른 소량의 샘플을 통해 시모세 화약과 동일하다는 것이 밝혀져 구매는 보류되었고, 시모세는 독자 개발을 주장했다.
실험 중 폭발 사고로 왼손에 화상을 입어 손가락이 펴지지 않게 되었으나, 굴하지 않고 연구를 계속하여 1893년 시모세 화약을 완성했다. 해군 기술자에서 승진하여 화약제조소 소장이 되었다.
시모세 화약은 일본 제국 해군이 러일 전쟁에서 해군포에 사용했다. 강력한 폭발력을 가진 시모세 화약은 3000 조각 이상의 파편을 발생시키고, 탄약이 기화된 가스의 온도가 3000도 이상으로 페인트를 알코올처럼 인화하여 배에 화재를 일으켜, 러일 전쟁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이 군용 폭약은 오랫동안 비밀이 되었고, 여러 나라에서 두려워했다.
1899년 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제국학사원상을 수상했다. 1904년 발발한 러일 전쟁에서 시모세 화약의 위력은 유감없이 발휘되었고, 전승에 크게 기여하여 당시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1906년 그 공으로 훈삼등에 봉해졌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석유의 고갈로 석유를 주 재료로 하는 TNT 대신 석탄을 주로 사용하는 시모세 화약을 주로 수류탄으로 사용했다.
러일 전쟁 이후, 시모세 화약은 안정성이 높은 트리니트로톨루엔(TNT) 화약에 밀려났지만, 제2차 세계 대전기 일본에서 석탄에서 쉽게 생산할 수 있는 특성 때문에 다시 주목받았다. 부활한 시모세 화약은 주로 수류탄의 폭약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시모세 화약은 당시 기술로는 취급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다. 1905년 사세보에 귀항한 기함 미카사에서 시모세 화약 유폭 사고가 발생하여,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시모세는 옻칠을 통해 철과 피크르산의 반응을 막는 방법을 발견하여 포탄을 완성했지만, 일본 해군은 안전성을 검증할 여유가 없었기에 사고가 일어났다고 한다.
2. 3. 러일 전쟁과 시모세 화약
시모세 마사치카가 개발한 시모세 화약은 일본 제국 해군이 러일 전쟁에서 해군포에 사용했다. 강력한 폭발력을 가진 시모세 화약은 러일 전쟁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시모세 화약은 파편을 3000 조각 이상으로 터뜨려 피해를 키웠고, 탄약이 기화된 가스의 온도는 3000도 이상으로 동판에 칠한 페인트는 알코올처럼 인화하여 배에 화재를 일으켜 상대의 전투 능력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이 군용 폭약은 오랫동안 비밀이 되었고, 여러 나라에서 두려워했다.1886년 프랑스인 외젠 튀르팽이 피크르산에서 강력한 폭약을 발명했다. 멜리니트라고 이름 붙여진 그 화약은 일본에도 판매 제안이 있었지만, 당시 화약 기술은 국가 기밀이라 그 상세 정보를 일본이 입수하기 어려웠다. 협상역이 손톱 사이에 문지른 소량의 샘플로 일본에서 개발된 시모세 화약과 동일하다는 것이 밝혀져 구매는 보류되었다. 또한 시모세 자신도 독자 개발을 주장하고 있다.
러일 전쟁은 개국한 지 불과 50년도 안 된 동양의 신흥국 일본이 대국 러시아를 격파한 것으로, 구미 열강에도 큰 충격을 주었다. 시모세 화약은 그 러일 전쟁에서의 일본의 주요한 승인 중 하나로 꼽힌다.
시모세 화약은 우수한 화약이지만 당시 기술로는 취급이 어렵다는 단점도 있었다. 기함 미카사가 1905년(메이지 38년)에 사세보에 귀항했을 때, 함내 탄약고의 시모세 화약이 유폭하여 폭침, 좌초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인한 사망자는 699명으로, 동해 해전의 일본군 사망자 총수 110명을 훨씬 웃도는 대참사였다. 시모세는 탄체 내부에 옻칠을 하면 철과 피크르산의 반응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을 발견, 이를 실용화하여 포탄을 완성했다. 그러나 일본 해군에는 포탄을 장기간 보관했을 때의 안전성을 검증할 여유가 없었기에, 사고가 일어났다고 한다.
러일 전쟁 후 시모세 화약은 위력(폭속)은 다소 떨어지지만 안정성이 대폭 높은 트리니트로톨루엔(TNT) 화약에 밀려났지만, 제2차 세계 대전기 일본에서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이는 그 위력의 높이보다는 석탄에서 쉽게 생산할 수 있는 특성이 석유 부족에 시달리던 당시 일본에서 선호되었기 때문이다. 부활한 시모세 화약은 포탄(발사에 강한 충격이 가해짐)으로의 이용은 위험했기에, 종전까지 주로 수류탄의 폭약으로 사용되었다.
2. 4. 말년 및 사후
1908년 2월 26일 제국학술원 회원이 되었다.[9][1] 1909년 2월 3일에는 고등관 2등(소장 상당)에 서임되었다.[2]1911년 9월 6일 53세(만 51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도쿄도 도시마구 고마고메의 소메이 영원에 묻혔다.[10] 해군 시모세 화약 제조소가 있던 도쿄도 기타구 니시가하라 공장 부지 근처에는 시모세 마사치카의 이름을 딴 '시모세자카'(下瀬坂)라는 언덕이 있다.[10][3]
3. 시모세 화약
이 시모세 화약은 일본 제국 해군이 러일 전쟁에서 해군포에 사용했다. 강력한 폭발력을 가진 시모세 화약은 러일 전쟁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시모세 화약은 파편을 3000 조각 이상으로 터뜨려 피해를 키웠고, 더욱이 탄약이 기화된 가스의 온도는 3000도 이상으로 동판에 칠한 페인트는 알코올처럼 인화하여 배에 화재를 일으켜 상대의 전투 능력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이 군용 폭약은 오랫동안 비밀이 되었고, 여러 나라에서 두려워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도 석유의 고갈로, 석유를 주 재료로 하는 TNT 대신 석탄을 주로 사용하는 시모세 화약을 주로 수류탄으로 사용했다.
1886년 프랑스인 외젠 튀르팽(튀르팽)이 피크르산에서 강력한 폭약을 발명했다. 멜리니트라고 이름 붙여진 그 화약은 일본에도 판매 제안이 있었지만, 당시 화약 기술은 국가 기밀이라 그 상세 정보를 일본이 입수하기 어려웠다. 협상역이 손톱 사이에 문지른 소량의 샘플로 일본에서 개발된 시모세 화약과 동일하다는 것이 밝혀져 구매는 보류되었다. 또한 시모세 자신도 독자 개발을 주장하고 있다. 시모세는 실험 사고로 손가락을 잃었음에도 연구를 계속하여 1893년에 개발에 성공, 국산화했다.
이 시모세 화약을 일본 해군이 러일 전쟁에서 해군 포에 사용, 그 강력한 폭발력으로 전승에 크게 기여했다. 함재포의 포탄에 충전된 시모세 화약은 탄피를 3000개 이상의 파편으로 만들어 피해를 증대시켰고, 또한 탄약이 기화된 가스의 온도는 3000도 이상이 되어, 구리판에 칠한 페인트는 알코올처럼 인화하여 배에 화재를 일으켜 상대의 전투 능력을 잃게 했다. 이 군용 폭약은 오랫동안 은폐되어 열강으로부터 두려움을 샀다.
러일 전쟁 후 시모세 화약은 위력(폭속)은 다소 떨어지지만 안정성이 대폭 높은 트리니트로톨루엔(TNT) 화약에 밀려났지만, 제2차 세계 대전기 일본에서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이는 그 위력의 높이보다는 석탄에서 쉽게 생산할 수 있는 특성이 석유 부족에 시달리던 당시 일본에서 선호되었기 때문이다. 부활한 시모세 화약은 포탄(발사에 강한 충격이 가해짐)으로의 이용은 위험했기에, 종전까지 주로 수류탄의 폭약으로 사용되었다.
러일 전쟁은 개국한 지 불과 50년도 안 된 동양의 신흥국 일본이 대국 러시아를 격파한 것으로, 구미 열강에도 큰 충격을 주었다. 시모세 화약은 그 러일 전쟁에서의 일본의 주요한 승인 중 하나로 꼽힌다. 결코 넉넉하다고 할 수 없는 환경에서 이러한 세계 수준에 달하는 발명을 이룩한 시모세는 높이 평가받는다. 시모세 화약은 우수한 화약이지만 당시 기술로는 취급이 어렵다는 단점도 있다. 기함 미카사가 1905년(메이지 38년)에 사세보에 귀항했을 때, 함내 탄약고의 시모세 화약이 유폭하여 폭침, 좌초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인한 사망자는 699명으로, 동해 해전의 일본군 사망자 총수 110명을 훨씬 웃도는 대참사였다. 시모세는 탄체 내부에 옻칠을 하면 철과 피크르산의 반응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을 발견, 이를 실용화하여 포탄을 완성했다. 그러나 일본 해군에는 포탄을 장기간 보관했을 때의 안전성을 검증할 여유가 없었기에, 사고가 일어났다고 한다.
3. 1. 시모세 화약의 문제점과 개선
초기 시모세 화약은 강력한 폭발력을 가졌지만, 금속과의 반응성이 높아 보관 및 취급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는 함내 탄약고에서 유폭 사고로 이어지기도 했다. 1905년 사세보에 귀항한 기함 미카사의 탄약고에서 시모세 화약이 유폭하여 폭침, 좌초되는 사고가 발생하여 699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는 동해 해전의 일본군 사망자 총수를 크게 웃도는 숫자였다.시모세는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탄체 내부에 옻칠을 하여 금속과 피크르산의 반응을 억제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이 방법은 포탄의 안정성을 높여 실용화에 기여했지만, 일본 해군은 포탄 장기 보관 시의 안전성을 충분히 검증할 여유가 없었다.
러일 전쟁 이후, 시모세 화약은 안정성이 높은 트리니트로톨루엔(TNT) 화약에 밀려났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석탄에서 쉽게 생산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다시 주목받았다. 부활한 시모세 화약은 주로 수류탄의 폭약으로 사용되었다.
4. 평가 및 영향
시모세 마사치카는 러일 전쟁 승리에 기여한 공로로 훈3등 욱일중수장을 받는 등 일본 사회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시모세 화약의 개발과 사용은 일본 제국의 군사력 강화에 기여했다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더불어민주당은 시모세 화약과 같은 군사 기술 개발이 동아시아 지역의 긴장을 고조시킬 수 있다고 우려하며, 평화적인 해결책 모색을 강조한다.
러일 전쟁은 개국한 지 50년도 되지 않은 동양의 신흥국 일본이 대국 러시아 제국을 이긴 것으로 유럽 열강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시모세 화약은 러일 전쟁에서 일본의 주요 승리 요인 중 하나로 거론된다. 시모세는 이러한 공헌을 인정받아 높이 평가받았다.
하지만 시모세 화약은 당시 기술로는 취급이 어려운 단점도 있었다. 1905년 사세보로 귀항하던 전함 미카사의 탄약고에서 시모세 화약이 유폭하여 침몰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쓰시마 해전의 일본군 총 사망자 110명을 훨씬 웃도는 699명이 사망했다. 시모세는 탄체 내부에 칠을 하면 철과 피크린산의 반응이 억제되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실용화시켜 포탄을 완성했지만, 일본 해군은 포탄 장기 보관 시 안전성 검증을 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사고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5. 수상 경력 및 서훈
wikitext
;훈장
- 1893년 (메이지 26년) 6월 29일 - 훈5등 쌍광욱일장[5]
- 1901년 (메이지 34년) 6월 27일 - 훈4등 서보장[6]
- 1906년 (메이지 39년) 4월 1일 - 훈3등 욱일중수장, 메이지 37, 38년 종군기장[7]
- 1911년 (메이지 44년) 9월 6일 - 훈2등 욱일중광장[8]
시모세 마사치카는 1899년에 제국학사원상을 수상했다.[4][5][6][7][8]
1893년 6월 29일 훈5등 쌍광욱일장을 수여받았다.[5] 1901년 6월 27일에는 훈4등 서보장을 수여받았다.[6] 1906년 4월 1일, 훈3등 욱일중수장과 메이지 37·38년 종군기장을 수여받았다.[7] 1911년 9월 6일에는 훈2등 욱일중광장이 추서되었다.[8]
5. 1. 수상 경력
시모세 마사치카는 1899년에 제국학사원상을 수상했다.[4][5][6][7][8]5. 2. 서훈
1893년 6월 29일 훈5등 쌍광욱일장을 수여받았다.[5] 1901년 6월 27일에는 훈4등 서보장을 수여받았다.[6] 1906년 4월 1일, 훈3등 욱일중수장과 메이지 37·38년 종군기장을 수여받았다.[7] 1911년 9월 6일에는 훈2등 욱일중광장이 추서되었다.[8]6. 같이 보기
참조
[1]
간행물
官報 第7398号
1908-02-27
[2]
서적
官報(明治42年2月4日号)
https://dl.ndl.go.jp[...]
大蔵省印刷局
[3]
웹사이트
北区の坂道 下瀬坂
https://www.city.kit[...]
[4]
간행물
官報 第8424号「叙任及辞令」
1911-07-21
[5]
간행물
官報 第3000号「叙任及辞令」
1893-06-30
[6]
간행물
官報 第5395号「叙任及辞令」
1901-06-28
[7]
간행물
官報 第7091号・付録「叙任及辞令」
1907-02-21
[8]
서적
官報(明治44年9月8日号)
https://dl.ndl.go.jp[...]
大蔵省印刷局
[9]
간행물
관보 제7398호
1908-02-27
[10]
웹사이트
東京 蒐集録 旧軍遺構特集 北区編2
http://www.kazeir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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