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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티아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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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스티아게스는 기원전 6세기 메디아 제국의 마지막 왕이었다. 키악사레스 2세의 아들이자, 리디아와 동맹을 맺고 바빌론과 교류하며 통치했다. 딸 만다네가 자신의 제국을 멸망시킬 아들을 낳는다는 꿈을 꾸고, 손자 키루스를 죽이려 했으나 실패했다. 키루스는 반란을 일으켜 아스티아게스를 폐위시키고 메디아 제국을 멸망시킨 후 페르시아 제국을 건국했다. 아스티아게스의 최후에 대해서는 기록에 따라 다르게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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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티아게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키루스에게 항복하는 아스티아게스 왕.
키루스 대제에게 사슬에 묶인 채 항복하는 아스티아게스 왕 (18세기 태피스트리).
칭호메디아 왕
재위 기간기원전 585년 – 550년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선임자키악사레스
후임자키루스 대제
출생 시기기원전 7세기
출생지메디아
사망 시기기원전 550년
사망 장소아케메네스 제국
배우자아류에니스
자녀만다네
아미티스
키악사레스 2세 (논쟁 중)
왕조메디아 왕조
아버지키악사레스
종교고대 이란 종교
이름
고대 페르시아어]]}}
아카드어 (신 바빌로니아)|translit=Ištumegu}}
고대 그리스어
, 로마자 표기:
, 로마자 표기:
라틴어Astyages
Astyigas
Aspadas

2. 생애

아스티아게스는 고대 메디아 제국의 마지막 왕으로, 기원전 585년부터 기원전 550년경까지 통치했다. 그는 아버지 키악사레스 2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며, 리디아, 바빌론 등 주변 강대국들과 동맹 및 혼인 관계를 맺으며 제국을 다스렸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손자인 키루스 2세의 반란으로 막을 내렸으며, 이로 인해 메디아 제국은 멸망하고 아케메네스 제국이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즉위

키악사레스와 아스티아게스 통치 시대의 메디아 제국


아스티아게스는 기원전 585년, 할리스 전투 이후 아버지 키악사레스 2세의 뒤를 이어 메디아의 왕위에 올랐다. 이 전투는 리디아와 메디아 간의 5년에 걸친 전쟁을 종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광대한 제국을 물려받았으며,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매형) 및 바빌론네부카드네자르와 동맹 관계를 맺고 통치했다.

네부카드네자르의 아내인 아미티스는 아스티아게스의 여동생으로 알려져 있으며, 네부카드네자르가 그녀를 위해 유명한 바빌론의 공중 정원을 건설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4] 또한 아스티아게스는 리디아 왕 크로이소스의 여동생인 아리예니스와 결혼하여 두 제국 간의 평화 조약을 공고히 했다.[5]

2. 2. 키루스 탄생과 관련된 전설

아스티아게스의 꿈 (프랑스, 15세기)


아스티아게스 왕이 하르파고스에게 갓난아이 키루스를 데려가 죽이라고 명령하는 모습, 얀 모이의 태피스트리 (1535-1550).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아스티아게스와 그의 손자 키루스 2세의 탄생에 얽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한다.

아스티아게스는 어느 날 그의 딸 만다네가 엄청난 양의 소변을 보아 수도 엑바타나뿐만 아니라 아시아 대륙 전체를 뒤덮는 불길한 꿈을 꾸었다. 그는 이 꿈을 자신의 왕위 계승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해석했다. 이 때문에 그는 딸 만다네를 메디아인보다 신분이 낮다고 여긴 페르시아의 귀족 캄비세스 1세에게 시집보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캄비세스 1세는 "조용하고 사려 깊은 왕자"로 알려져 있었고, 아스티아게스는 그가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얼마 후 아스티아게스는 다시 꿈을 꾸었는데, 이번에는 만다네의 몸에서 포도나무가 자라나 아시아 전역을 뒤덮는 내용이었다. 만다네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자, 아스티아게스는 이 아이가 장차 자신의 왕위를 빼앗을 운명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충성스러운 신하이자 장군인 하르파고스에게 만다네가 아이를 낳으면 즉시 죽이라는 비밀 명령을 내렸다.[6][7]

그러나 하르파고스는 왕족의 피를 직접 손에 묻히는 것을 꺼렸다. 그는 아스티아게스의 명령을 따르는 대신, 갓 태어난 키루스를 미트리다테스라는 이름의 양치기에게 몰래 넘겨주었다. 공교롭게도 그 양치기의 아내는 막 사산한 아이를 낳은 상태였다. 하르파고스는 죽은 양치기의 아이를 키루스인 것처럼 꾸며 아스티아게스에게 보여주었고, 왕은 손자가 제거되었다고 믿었다.

키루스는 미트리다테스 부부의 아들로 무사히 성장했다. 그가 열 살이 되던 해, 어떤 사건을 계기로 그의 비범함과 출생의 비밀이 드러나 아스티아게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아스티아게스는 마기(Magi, 메디아의 사제 계급이자 점성가)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키루스를 죽이지 않고, 그의 본래 부모가 있는 안샨으로 돌려보냈다.

헤로도토스는 키루스가 어렸을 때 개에게 젖을 먹고 자랐다는 민간 전설을 소개하면서, 이 이야기가 퍼진 배경에 대한 설명을 덧붙인다. 그에 따르면 키루스를 키운 양치기 미트리다테스의 아내 이름이 '스파코(Spako)'였는데, 이것이 메디아어로 "개"를 의미하는 단어였기 때문에[9][10] 이러한 전설이 생겨났을 가능성이 있다고 헤로도토스는 합리적으로 추정한다.[11]

2. 3. 키루스의 반란과 메디아 멸망

아스티아게스의 패배. 키루스 대왕(가운데)에게 사로잡힌 아스티아게스(왼쪽 사슬에 묶인 모습)가 묘사되어 있다. 18세기 태피스트리.


키루스 2세는 아버지 캄비세스 1세의 뒤를 이어 기원전 559년 안샨의 왕위에 올랐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메디아의 귀족 하르파고스는 과거 아스티아게스로부터 자신의 아들을 먹게 되는 잔혹한 형벌("혐오스러운 만찬")을 받은 것에 복수심을 품고 있었다. 그는 키루스에게 아스티아게스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겼고, 이에 키루스는 기원전 553년 할아버지인 아스티아게스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아스티아게스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하르파고스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군대를 보냈다. 그러나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하르파고스는 전투 중에 아스티아게스를 배신하고 자신의 부대 전체를 이끌고 키루스에게 투항했다. 3년간의 전쟁 끝에, 파사르가다에 전투에서 아스티아게스 군대 내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결국 아스티아게스는 패배하여 키루스에게 사로잡혔다. 이 사건으로 메디아 제국은 멸망했으며, 키루스는 메디아를 정복하고 아케메네스 제국 건설의 기반을 다졌다. 키루스는 메디아의 수도였던 엑바타나를 점령했다.

당대의 기록인 ''나보니두스 연대기'' 역시 아스티아게스 군대의 반란이 그의 패배로 이어졌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하르파고스의 이름은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르파고스가 파사르가다에 전투 당시 아스티아게스의 장군이었고, 전쟁 이후 그의 가문이 키루스 치하에서 높은 지위를 누렸으며 하르파고스 본인 역시 키루스의 가장 성공적인 장군 중 한 명이 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가 반란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15]

사로잡힌 아스티아게스의 이후 삶에 대해서는 고대 기록들의 설명이 일치하지 않는다. 헤로도토스는 키루스가 아스티아게스를 관대하게 대우했으며, 하르파고스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여생 동안 자신의 궁정에서 머물게 했다고 전한다. 반면, 크테시아스는 키루스가 아스티아게스를 파르티아 지역의 총독으로 임명했으나, 이후 정치적 경쟁자였던 오이바레스의 계략에 의해 환관 페티사케스에게 살해당했다고 기록했다. 아스티아게스의 정확한 사망 경위는 알려지지 않았다. 아스티아게스가 폐위된 후,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는 아스티아게스의 복수를 명분으로 키루스에게 전쟁을 일으켰으나, 기원전 547년경 키루스와 하르파고스에게 패배하고 리디아는 정복되었다.[16]

2. 4. 아스티아게스의 최후

키루스에게 패배하고 사로잡힌 아스티아게스의 이후 행적과 최후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전해진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키루스는 아스티아게스를 관대하게 대우했으며, 하르파고스에게 조롱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남은 생애 동안 키루스의 궁정에서 지낼 수 있도록 했다.[15]

반면, 크테시아스의 기록은 다르다. 그는 키루스가 아스티아게스를 파르티아 지역의 총독으로 임명했지만, 이후 정치적 반대자였던 오에바레스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주장했다.[15] 크테시아스의 다른 기록에서는 오이바레스의 계략에 의해 키루스의 환관 페티사케스가 아스티아게스를 외딴 곳에 버려 굶어 죽게 만들었다고도 한다. 아스티아게스의 정확한 사망 경위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니엘서제2경전 버전인 벨과 용 14장에서는 아스티아게스가 사망한 후 키루스가 왕위를 계승했다고 언급하며[12], 두에-랭스 성경의 초기 번역본에서는 메디아의 다리우스를 아스티아게스의 다른 이름으로 보기도 했다.[13][14]

한편, 당대의 기록인 나보니두스 연대기는 아스티아게스가 패배한 원인으로 전장에서 일어난 군대의 반란을 언급한다.[15] 아스티아게스가 몰락한 후,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는 아스티아게스의 복수를 명분으로 키루스에게 도전했으나 패배하고 왕국을 잃었다.[16]

3. 역사적 평가와 논란



고대 자료들은 아스티아게스의 통치 기간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 않으며, 그의 인품에 대한 명확한 평가는 어렵다. 이는 헤로도토스가 그를 잔혹하고 폭군적인 통치자로 묘사한 것과 크테시아스가 긍정적으로 평가한 기록이 모두 편향되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2] 크세노폰의 ''키루스의 교육''에서는 아스티아게스를 손자인 키루스에게 헌신하는 자상한 노인으로 묘사하지만, 이 작품은 허구적인 내용이 많고 역사적 사실과 다른 부분이 많아 신뢰할 수 있는 자료로 보기 어렵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아스티아게스는 딸 만다네가 자신의 제국을 무너뜨릴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꿈을 꾸었다. 이 예언을 두려워한 그는 만다네를 캄비세스 1세와 결혼시켰는데, 캄비세스 1세는 당시 "조용하고 사려 깊은 왕자"로 알려져 아스티아게스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 인물로 여겨졌다. 이후 두 번째 꿈에서 다시 만다네의 자손에 대한 경고를 받자, 아스티아게스는 장군 하르파고스에게 갓 태어난 키루스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헤로도토스는 키루스의 부모를 정확히 언급했지만, 캄비세스가 왕이었다는 사실은 기록하지 않았다.[6][7]

그러나 현대 학계에서는 헤로도토스의 기록, 특히 키루스가 아스티아게스의 손자라는 주장과 캄비세스 1세의 신분에 대한 묘사에 의문을 제기한다. 키루스가 아스티아게스의 손자라는 주장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며,[8] 캄비세스 1세는 낮은 신분이 아니라 메디아 왕국의 속국이었던 페르시아의 왕이었다는 견해가 있다. 또한 아스티아게스는 키루스의 할아버지가 아니며, 기원전 551년 키루스가 즉위한 직후 폐위되었다는 설도 있다.

참조

[1] 서적 Pronouncing dictionary of proper names: pronunciations for more than 28,000 proper names, selected for currency, frequency, or difficulty of pronunciation; including place names, given names, names of famous individuals, cultural, literary, historical, and biblical names, mythological names, names of peoples and tribes, company names and product names; with pronunciations transcribed into the international phonetic alphabet and a simplified phonetic respelling; and including an explanatory introduction Omnigraphics 1998
[2] 웹사이트 ASTYAGES – Encyclopaedia Iranica http://www.iranicaon[...]
[3] 웹사이트 Ištumegu [ASTYAGES, KING OF THE UMMAN-MANDA] (RN) http://oracc.museum.[...]
[4] 웹사이트 Hanging Gardens of Babylon http://www.personal.[...] 2013-08-02
[5] 웹사이트 Cyaxares (Livius.org) https://www.livius.o[...] 2020-03-26
[6] 문서 cf. How, W. W., & Wells, J. (1991)
[7] 문서 "A commentary on Herodotus with introduction and appendixes" Oxford University Press
[8] 문서 cf. How and Wells i.107
[9] 문서 Herodotus i.110
[10] 문서 Justin (historian) (i.4)
[11] 문서 cf. How and Well, i.110
[12] bibleverse Daniel
[13] 웹사이트 Philologic Results http://philologic.no[...]
[14] 웹사이트 Philologic Results http://philologic.no[...]
[15] 웹사이트 Cyrus takes Babylon (530 BCE) (Livius.org) https://www.livius.o[...] 2020-03-26
[16] 웹사이트 Astyages - Livius https://www.livius.o[...]
[17] 웹사이트 Tapestry: The Defeat of Astyages (from the series, The Life of Cyrus) https://collections.[...] Museum of Fine Arts, Boston 2021-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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