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유타야 일본인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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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유타야 일본인 마을은 14세기부터 센고쿠 시대의 낭인들이 아유타야 왕조의 용병으로 유입되면서 형성되었다. 일본인 용병은 군사적 중요성을 얻어 정치적으로 강력해졌으며, 상업적 발전과 기독교 전파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1630년대 이후 쇄국 정책으로 인해 쇠퇴하였으며, 현재는 기념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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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유타야 일본인 마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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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정보 | |
기본 정보 | |
원어명 | 일본어: アユタヤ日本人町 (Ayutaya Nihonjin-machi) |
태국어 | หมู่บ้านญี่ปุ่น อยุธยา (Mū̀ bān Yī̀pun Ạyutthyā) |
설명 | 아유타야에 존재했던 일본인 마을 |
역사 | |
설립 시기 | 아유타야 왕조 시대 |
특징 |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외교 고문이었던 야마다 나가마사와 관련됨. |
관련 단체 | |
관련 단체 | http://japanesevillage.org/ |
참고자료 | |
참고자료 | 2021년 9월 기준 |
2. 역사
아유타야 일본인 마을은 14세기 무렵 전국 시대 일본에서 건너온 로닌(낭인)들이 아유타야 왕조의 용병으로 활동하면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인선 무역을 통해 상업적으로도 성장했으며, 에도 막부의 키리시탄 박해를 피해 온 기독교 신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1629년 프라삿 통 왕이 무역 규정을 변경하면서 일본의 영향력은 줄어들기 시작했다. 1630년 야마다 나가마사가 암살되고 정착지가 파괴되면서 쇠퇴의 길을 걸었다. 1633년 재건되었지만, 쇄국령으로 인해 일본과의 교류가 단절되면서 점차 태국 사회에 동화되었다.
2. 1. 성립 배경
전국 시대를 거치면서 실전 경험이 풍부한 일본 무사들, 특히 주군을 잃은 로닌(낭인)들이 아유타야 왕조의 용병으로 유입되면서 아유타야 일본인 마을이 성립되기 시작했다. 당시 태국(타이 왕국)은 주변국인 버마로부터 군사적 압박을 당하고 있었다.[2]센고쿠 시대의 격동적인 정치 상황 속에서, 명나라가 중일 무역과 여행을 금지하고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로닌들이 대거 일본을 떠나 동남아시아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인근 버마의 투웅구 제국에게 군사적 패배를 겪고 있던 아유타야 왕국은 군사 경험이 풍부한 이 일본인 사무라이들을 용병으로 고용하고자 했고, 이로 인해 일본인 이민이 크게 증가했다. 포르투갈 포병 부대가 주로 고용되었지만, 투웅구 역시 포르투갈 부대를 고용했기 때문에 포르투갈 용병들은 주저하는 경향이 있었다.[2] 이러한 딜레마는 일본인 용병을 고용함으로써 해결되었다.
일본인 용병은 수백 명(약 200~800명)으로 늘어났고, 정치적으로도 강력해지기 시작했다. 이 일본 부대의 위력은 아유타야의 중요한 법전인 삼인법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인 용병들은 일반적으로 태국 봉건 제도에서 세 번째로 높은 계급인 프라야의 지위를 차지했다.[2] 야마다 나가마사는 무술 실력으로 그 칭호를 얻었고 송탐 국왕의 존경을 받은 그러한 '프라야' 중 한 명이었다.

2. 2. 군사적 발전
센고쿠 시대의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과 명나라의 중일 무역 금지, 그리고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많은 로닌(주군 없는 사무라이)들이 일본을 떠나 동남아시아로 이주했다. 투웅구 제국에게 군사적 패배를 겪던 아유타야 왕국은 이들을 용병으로 고용했고, 일본인 이민이 크게 증가했다. 포르투갈 포병 부대가 고용되었지만, 투웅구 역시 포르투갈 부대를 고용했기 때문에 포르투갈 용병들은 전투를 주저했다.[2]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인 용병 고용은 좋은 해결책이 되었다.전국 시대에 주군을 잃은 낭인들이 아유타야로 유입되면서 일본인 마을은 급격히 팽창했다. 세키가하라 전투, 오사카 전투 이후 이러한 경향은 더욱 강해졌다. 당시 미얀마 따웅우 왕조의 군사적 압력에 시달리던 아유타야는 실전 경험이 풍부한 일본인 병사를 용병으로 고용하여 이를 저지하려 했고, 이는 낭인의 아유타야 유입을 가속화시켰다. 아유타야 군주 송탐 치세에 포르투갈인 철포대가 고용되었지만, 따웅우 왕조 측도 포르투갈인 용병대를 고용했기 때문에, 서로 싸우는 것을 꺼린 포르투갈인 용병대가 발포하지 않아 쓸모가 없었던 적이 있었다. 이로 인해 아유타야가 포르투갈인 외의 군사력을 필요로 했던 것도 낭인의 아유타야 유입에 영향을 주었다.
일본인 용병은 수백 명(약 200~800명)으로 늘어나 정치적으로도 강력해졌다. 삼인법에 따르면, 일본인 용병들은 태국 봉건 제도에서 세 번째로 높은 계급인 프라야 지위를 받았다.[2] 삼인법전에서 일본인 용병대는 끄롬 아사 이쁜(일본인 의용병 국)으로 명명되었고, 최고 책임자에게는 반다삭 (관위 제도)의 세 번째인 '''옥야'''(혹은 '''프라야''') '''세나피묵''' ( ออกญาเสนาภิมุขth )이라는 관위 ·흠사명이 수여되었다. 야마다 나가마사는 무술 실력으로 이 칭호를 얻었고 송탐 국왕의 존경을 받았다.
2. 3. 상업적 발전
주인선 제도의 성공으로 일본과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 간의 상업적 발전이 이루어졌다. 특히 일본인 연대가 컸던 에카토삿롯 왕 치세 하에 교역을 촉진하기 위해 이 정착지에 항구가 건설되었다. 아유타야는 일본 용병과 무기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유명한 칼 제작 지역인 사카이에서 대량의 칼이 수입되었으며, 이후 좀 더 친숙한 태국식 칼과 창으로 개조되었다.[2] 이 칼들 중 다수는 현재 방콕 왕궁의 무기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 대가로 일본은 도자기, 모피, 사어피, 향신료인 빈랑 잎 등을 구매했다. 특히 모피는 일본으로 가장 많이 수출된 상품이었으며, 에도 초기에 20만 개 이상의 동물 가죽 제품이 일본으로 수출되었다.[2] 일본인들은 후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무역 독점에 도전한 것으로 네덜란드인들에게 알려졌다.주인선 무역을 통해 아유타야 일본인 마을은 무역 면에서도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에카토삿롯 왕 시대에 일본인 마을에 비교적 규모가 큰 항구가 건설되었다. 아유타야는 타웅우 왕조에 대한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많은 무기를 필요로 했으므로, 칼날 생산으로 유명한 사카이에서 많은 칼이 수출되었다. 이들은 태국풍 칼이나 창으로 개조되어 사용되었다. 17세기 초 아유타야 무기의 대부분은 일본산이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칼의 일부는 현재도 방콕 왕궁 무기 박물관 등에서 볼 수 있다. 일본은 아유타야에서 도자기, 가죽 제품(주로 사슴, 상어 등), 빈랑 칠 등을 구입했다. 특히 가죽 제품의 태국에서 일본으로의 수입량은 엄청나서, 에도 초기 아유타야에서 일본으로의 가죽 제품 수는 20만 장 이상이었다.[6]
이러한 상업적 발전은 다른 나라 상인들을 위협하게 되었다. 1620년대 일본인의 무역량은 다른 나라 무역상들의 합계보다 훨씬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움직임을 가장 우려한 것은 화교 상인이었다.
2. 4. 기독교의 전파
아유타야는 종교적 제한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에도 막부의 키리시탄 박해를 피해 일본을 떠난 기독교 신자들이 정착촌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1627년 포르투갈 선교사 안토니오 프란시스코 카르딤은 약 400명의 일본인 기독교인에게 성사를 집행했다고 한다.[3]마카오의 포르투갈 당국이 남만 무역의 지속을 위해 선교사들에게 일본 도항 자제를 요청하자, 많은 선교사들이 아유타야를 거점으로 포교 활동을 했으며, 주 인장을 이용해 일본으로 밀항하기도 했다.
2. 5. 쇠퇴
1629년, 프라삿 통 왕은 무역 규정을 변경하여 일본의 영향력을 줄이고자 했다. 당시 반 이푼의 지도자이자 프라삿 통의 즉위에 반대했던 야마다 나가마사는 나콘시탐마랏의 지사로 파견되었다.[4] 1630년 나가마사가 암살당하고, 정착지가 불탔으며, 주민들이 셰이크 아흐마드에 의해 "반란 활동"을 명목으로 살해되면서 일본인 마을은 종말을 맞이했다. 많은 일본인들은 크메르 제국으로 도망쳤다.[4]1633년, 약 400명의 일본인이 아유타야에 정착지를 재건했다. 쇼군은 동남아시아에서 일본인 업무를 담당하는 관리인 ''나가사키 부교''에게 쇄국령을 발동하여 동남아시아로의 이민을 금지하고, 해외 거주 일본인들에게 일본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다. 이 법령은 국제적 갈등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발효되었다. 새로운 왕래가 끊기면서 일본의 영향력과 그들의 수도 줄어들었다. 군사적 지위와 권력을 잃은 일본인들은 브로커 또는 주석 상인(태국 남부에 풍부했음)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부활한 반 이푼은 18세기까지 존재했다고 전해지지만,[5] 정착지와 그 주민들은 점차 태국인으로 동화되었다.[4]
3. 현재
현재 반 이푼 부지에는 일본 건물 잔해가 남아 있지 않지만, 그 자리에는 기념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작은 박물관과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1] 일본인 안내원이 여행사에 배치되어 이 공원을 패키지 여행 코스로 활용하고 있다. 박물관에는 에도 시대에 일본에서 보낸 소수의 서적과 기타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1][8]
일본인이 지은 건물 등 이전의 흔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지만, 일본인 마을의 흔적을 기리는 비석 등이 세워져 있다. 일본 여행사가 이 공원을 패키지 투어 코스에 포함시키기 위해 일본인 안내원도 상주하고 있다. 자료관에는 에도 시대에 일본에서 보내진 친서 등이 약간 전시되어 있다.[8]
4. 위치
태국 국철아유타야역에서 남쪽으로 약 2km 떨어진 차오프라야강변에 위치해 있다. 2010년 영화 '야마다 아유타야의 사무라이'의 영향으로, 현지인에게는 "일본 마을은 어디?"보다 "야마다는 어디?"라고 묻는 것이 더 잘 통한다.
참조
[1]
웹사이트
Japanese Village
http://japanesevilla[...]
[2]
웹사이트
十七・八世紀の日本=シャム貿易について [About Japan-Siamese Trade in the 17th and 8th Century]
http://id.nii.ac.jp/[...]
[3]
서적
Multicultural Japan
Cambridge University Press
[4]
서적
Lords of Life
Alvin Redman Limited
1960
[5]
웹사이트
日本人村(アユチヤ日本人町の跡)[Japanese Village (Ruins of Ayutthaya Japanese Town)]
https://www.thailand[...]
[6]
간행물
十七・八世紀の日本=シャム貿易について(栗原福也教授退職記念号)
https://twcu.repo.ni[...]
1994-02
[7]
웹사이트
日本人町跡
https://www.thailand[...]
タイ国政府観光庁日本事務所公式ホームページ
[8]
웹사이트
日本人町跡
http://www.thailandt[...]
タイ国政府観光庁
2013-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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