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타미 온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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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타미 온천은 일본 이즈반도 북동부에 위치한 유서 깊은 온천 지역으로, 약 1500년 전부터 "뜨거운 바다"라는 뜻으로 불려왔다. 역사적으로는 에도 시대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탕치한 곳으로 유명하며, 메이지 시대 이후에는 문인들의 사랑을 받으며 여러 작품의 배경이 되었다. 1923년 간토 대지진으로 피해를 입었지만 이후 부흥했으며, 1950~60년대에는 신혼여행과 단체 관광의 명소로 번성했다. 그러나 버블 붕괴 이후 관광객 감소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2011년을 기점으로 부활하여 현재는 수도권 관광객에게도 인기가 높다. 아타미 온천은 나트륨·칼슘-염화물 온천을 중심으로 하며, 아타미 칠탕으로 불리는 7개의 오래된 원천과 인공 간헐천인 오유 간헐천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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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타미시의 지리 - 하쓰시마섬
이즈 반도 동쪽 해상에 있는 하쓰시마섬은 화산 활동으로 형성되어 전설과 역사 속에 등장했으며, 온천 관광지로 발전 후 신칸센 개통으로 관광객이 증가하여 현재는 레저 시설과 숙박 시설을 갖춘 관광 명소이자 헬리포트와 방송 중계국이 있는 시즈오카현 아타미시의 섬이다. - 시즈오카현의 온천 - 이토 온천
이토 온천은 일본에서 세 번째로 용출량이 많고 혼슈에서는 1위를 차지하며, 780개의 원천에서 분당 34,000리터의 물이 솟아나는 무미, 무취의 단순 온천이며, 헤이안 시대에 개탕되어 에도 시대에는 도쿠가와 이에미쓰에게 헌상되었다.
2. 역사
아타미 온천은 약 1500년 전 닌켄 천황 시대부터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는 유서 깊은 온천이다.
160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7일간 탕치를 위해 머물렀고, 이후 도쿠가와 쇼군가의 명탕으로 지정되어 도쿠가와 이에미쓰 때부터는 아타미의 온천수를 에도 성까지 헌상하는 "어급탕"이 행해졌다.[11]
메이지 시대 이후에는 오자키 고요의 『황금야차』를 비롯한 많은 문학 작품의 배경이 되면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1923년 간토 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이듬해 아타미선 개통과 1936년 아타미 정영 온천(후의 시영 온천) 발족으로 빠르게 부흥했다.[12] 1934년 단나 터널 개통으로 온천 관광객이 증가하면서 풍속 산업 중심지에서 온천 관광지로 변화했다.[13]
전후 혼란기에는 빵빵가가 형성되기도 했지만,[14] 1950년대 아타미 대화재 이후 신혼여행지로 각광받았고, 도카이도 신칸센 개통과 고도 경제 성장으로 단체 관광객이 급증했다.[15] 버블 시대에는 고소득층의 신칸센 통근이 늘어나기도 했다.
버블 붕괴 이후 단체 관광객 감소, 엔고, 해외여행 증가, 1990년대 초반 이토 앞바다 군발 지진 등으로 인해 관광객이 감소하고, 2006년 아타미 시는 재정 위기를 선언했다.[16] 그러나 지역 주민들의 노력과 수도권과의 접근성, 불꽃놀이 대회 등 개인 관광객 유치 노력으로 2011년 이후 다시 부활하고 있다.[18]
2. 1. 고대
약 1500년 전 닌켄 천황 시대에 바다에서 뜨거운 물이 뿜어져 나와 물고기가 썩어 죽는 것을 인근 사람들이 발견한 이래 "뜨거운 바다"라는 뜻으로 아타미라고 불리게 되었다. 덴표 호지 시대에 하코네 곤겐의 만간 쇼닌이 "뜨거운 바다" 때문에 어획 부진으로 고통받는 어민들을 구제하기 위해 기원을 통해 샘을 바다에서 현재의 산마을로 옮겼다는 전설도 전해진다.[9]남북조 시대 응안 7년/분추 3년(1374년) 3월 4일, 가마쿠라의 기도 슈신이 아타미 온천을 방문했을 때 상사절(3월 3일)의 시회가 열려 한시를 지은 것을 일기에 기록하고 있다(『공화일용공부략집』 응안 7년 3월 4일 조). 이는 당시 아타미에 문인 묵객이 많이 방문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교토에서 사용되던 교토력과 아타미에서 사용되던 미시마력의 날짜 오차에 대한 일화로도 알려져 있다.[10]
2. 2. 중세
남북조 시대 응안 7년/분추 3년(1374년) 3월 4일, 가마쿠라의 기도 슈신이 아타미 온천을 방문했을 때, 상사절(3월 3일) 시회가 열려 한시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공화일용공부략집』 응안 7년 3월 4일 조).[10] 이는 당시 아타미에 문인, 학자들이 많이 방문했음을 보여주며, 교토에서 사용되던 교토력과 아타미에서 사용되던 미시마력의 날짜 오차에 대한 일화로도 알려져 있다.[10]2. 3. 근세
1604년(게이초 9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7일간 탕치를 위해 아타미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도쿠가와 실기』). 이후 도쿠가와 쇼군가의 어용달 명탕으로 이름을 알렸고, 도쿠가와 이에미쓰 이후에는 아타미의 온천수를 에도 성까지 헌상하는 "어급탕"을 시행했다.[11]2. 4. 근대
메이지 시대 이후 아타미 온천에는 많은 문인들이 방문했고, 이곳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 많이 그려졌다. 대표적인 작품은 오자키 고요의 『황금야차』이며, 이 작품으로 인해 아타미는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국도 135호선을 따라 등장인물인 간이치·오미야의 상이 있다. 그 외에 나가이 가후의 『겨울날』이나 하야시 후미코의 『소용돌이』 등이 있다.[12]1923년(다이쇼 12년) 간토 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이듬해 국철 아타미선 아타미역 연장으로 급속히 부흥했으며, 1936년(쇼와 11년) 7월 1일에는 아타미 정영 온천(후의 시영 온천)이 발족했다.[12]
이 무렵 아타미는 신문에 "에로의 거리, 카페의 거리"라고 쓰일 정도로 풍속 산업이 번성한 온천가였지만, 1934년(쇼와 9년) 단나 터널 개통으로 온천 관광객이 증가하면서 카페는 잇따라 식당으로 전환되었다.[13] 그러나 전후 혼란기에는 다시 풍기가 문란해져 점령군 병사 등을 상대하는 빵빵가가 형성되었다.[14]
2. 5. 현대
메이지 시대 이후 아타미는 많은 문인들이 방문하며 작품의 배경이 된 곳이다. 오자키 고요의 『황금야차』는 아타미를 전국적으로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국도 135호선에는 작품 속 등장인물인 간이치와 오미야의 상이 있다. 나가이 가후의 『겨울날』, 하야시 후미코의 『소용돌이』 등도 아타미를 배경으로 한다. 1923년(다이쇼 12년) 간토 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이듬해 국철 아타미선 아타미역 연장으로 빠르게 부흥했다. 1936년(쇼와 11년)에는 아타미 정영 온천(후의 시영 온천)이 문을 열었다.[12]이 시기 아타미는 신문에 "에로의 거리, 카페의 거리"라고 불릴 정도로 풍속 산업이 번성했지만, 1934년(쇼와 9년) 단나 터널 개통으로 온천 관광객이 늘면서 카페는 식당으로 전환되었다.[13] 하지만, 전후 혼란기에는 빵빵가가 형성되어 풍기가 문란해지기도 했다.[14]
이후 아타미 대화재로 큰 피해를 겪었지만, 쇼와 30년대에는 신혼여행지로 인기를 끌었다. 흰 드레스에 흰색 여행 가방을 든 아베크로 붐볐으며, 도카이도 신칸센 개통 후 쇼와 40년대에는 고도 경제 성장에 힘입어 단체 여행객이 증가하여 연간 숙박객이 450만 명을 넘었다.[15] 버블 시대에는 고액 소득자들이 아타미에 온천이 딸린 주택을 마련하여 도쿄도로 신칸센 통근하는 모습도 흔했다.
1976년 11월 30일에는 아타미 린카이 호텔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2명이 사망했다. 2011년 2월 25일에는 시호미야 여관의 종업원 기숙사가 전소되었으나, 부상자는 없었다. 2018년 7월 28일에는 태풍 12호로 인해 호텔 뉴 아카오의 레스토랑 창문 유리가 파손되기도 했다. 2021년 7월 3일에는 아타미시 이즈산 토석류 재해가 발생하여 아타미 뉴 후지야 호텔과 호텔 뉴 아카오가 피해자들을 위한 피난소로 사용되었다.
2. 5. 1. 버블 경제 붕괴 이후
버블 붕괴로 기업의 보양 시설이나 단체 여행이 쇠퇴했고, 엔고에 따른 해외여행의 일반화로 간사이 등 원거리 지역에서의 방문객도 감소했다. 1990년대 초반 이토 앞바다에서 발생한 군발 지진까지 겹쳐 관광객이 감소했으며, 2006년에는 아타미 시가 재정 위기 선언을 했다.[16]이러한 상황에 대응하여 지역 주민들이 활동을 시작했다.[17] 아타미역과 여관·호텔가를 잇는 아타미 긴자 상점가에서는 늘어난 빈 점포를 도쿄에서 온 U턴자, 지역 주민, 시가 협력하여 벼룩시장을 개최하고 의욕 있는 점주를 유치하거나 업태를 전환하는 방식으로 재생시켰다.[15]
이러한 노력으로 장기간의 하락세가 2011년을 저점으로 반전하여, 아타미는 부활하는 지역으로 주목받고 있다. 수도권 서쪽에 인접하고 신칸센 역이 있다는 지리적 이점은 여전하며, 여관·호텔 업계도 불꽃놀이 대회 등을 통해 개인·소규모 그룹 고객 유치에 힘쓴 것이 효과를 보았다.[18]
1990년(헤이세이 2년) 경부터 거품 붕괴의 영향으로 단체 관광객이 대폭 감소하면서, 개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던 대형 여관들이 잇따라 휴관했다. 이로 인해 도시가 쇠퇴하는 인상을 주어 관광객 이탈이 가속화되는 악순환이 발생했다.
2. 5. 2. 최근 동향
버블 붕괴로 기업의 휴양 시설이나 단체 여행이 줄어들었고, 엔고로 인해 해외여행이 일반화되면서 간사이 등 먼 지역에서의 관광객도 감소하였다. 1990년대 초반에 발생한 이토 앞바다 군발 지진까지 겹쳐 관광객이 감소하였고, 2006년에는 아타미 시가 재정 위기 선언을 하기도 하였다.[16]이러한 상황에 지역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였으며,[17] 아타미 역과 숙박업소 밀집 지역을 연결하는 아타미 긴자 상점가에 늘어난 빈 점포를 도쿄에서 돌아온 U턴 주민, 지역 주민, 시가 협력하여 벼룩시장을 열고 의욕 있는 점주를 유치하거나 업종 전환을 통해 상점가를 활성화시켰다.[15]
이러한 노력으로 장기간의 하락세가 2011년을 기점으로 반전되어 아타미는 다시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수도권 서쪽에 인접하고 신칸센 역이 있다는 지리적 이점은 여전하며, 숙박업계도 불꽃놀이 대회 등을 통해 개인 및 소규모 그룹 고객 유치에 힘쓴 것이 효과를 보았다.[18]
3. 온천 특징
아타미 온천은 염화물천이 주를 이루지만, 과거에는 황산염천이 더 많았다. 보링을 통한 개발로 인해 해수가 섞이면서 염화물천으로 변화했다. 다른 지역의 중성 염화물천에 비해 황산염 성분이 많아 약알칼리성을 띠며, 피부에 닿는 느낌이 부드러운 것이 특징이다.
3. 1. 수질
아타미 온천의 수질은 다음과 같다.- 매분 용출량: 18000L
- 무색 투명의 원천
- 총 원천 수: 410개 (이즈산, 아지로는 합쳐서 600개 이상)
- 용출 온도: 98.2°C의 고온천
염화물천의 원천이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다. 산기슭에는 황산염천의 원천이 많다. 옛날에는 대부분의 원천이 황산염천이었다. 보링에 의한 원천 개발을 다수 실시한 결과, 지하의 선맥에 해수의 혼입량이 증가했기 때문에 천질이 바뀌었다. 과거에는 도카이도 본선 선로 부근에 위치한 원천은 염화물·황산염 온천이었지만, 쇼와 후기부터 염화물 온천으로 바뀐 곳이 많다. 그러나 다른 현의 중성의 염화물 온천과 비교하여 황산염 성분이 많이 들어있어 약알칼리성이며, 피부에 닿는 느낌이 매끄러운 것이 특징이다.
3. 2. 아타미 칠탕 (熱海七湯)
온천가에는 '''아타미 칠탕'''(熱海七湯, 아타미 나나유)이라고 불리는, 에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7개의 오래된 원천이 존재했지만, 메이지 시대 이후 주변의 원천 개발의 영향으로 예전의 자연 용출 모습은 사라졌다. 오유는 1962년(쇼와 37년)에, 나머지 6개는 1997년(헤이세이 9년)에, 문화재 · 관광 자원으로서, 시영 온천을 인공적으로 분출 · 용출시키는 형태로 복원되었다.[3]아타미 칠탕은 다음의 7개의 원천이다.
- '''오유'''(大湯) - 옛 아타미 온천의 중심적인 원천.
- '''노나카노유'''(野中の湯) - 후지모리 이나리 신사의 동쪽. 수증기가 있음.
- '''코사와노유'''(小沢の湯) - 지명에서 유래. 시즈오카 은행 아타미 지점의 뒷편 북쪽. 온천 거리沿이에 위치. 고온 증기로 삶은 계란을 만들 수 있다. 옆에는 "단나 용수"의 식수대도 병설되어 있다.
- '''후로노유'''(風呂の湯) - 후쿠시마야 료칸 옆. 인접한 미즈노유(水の湯)와 세트.
- '''메노유'''(目の湯) - 효능에서 유래. 긴자 거리 내, 스루가 은행과 시즈오카 주오 은행 사이. 옛 소유자의 이름에서 '''사지로노유'''(佐治郎の湯)라고도 불린다.
- '''세이자에몬노유'''(清左右衛門の湯) - 사망한 농민에서 유래. 후루야 료칸 서쪽. 수증기가 있음.
- '''카와라유'''(河原湯) - 옛 동해안의 강가에 위치한 서민을 위한 원천. 국도 135호선沿이 세븐일레븐 아타미 긴자쵸점 남쪽.
3. 3. 오유 간헐천 (大湯間歇泉)

오유(오유 간헐천)는 세계 3대 간헐천으로 칭송받았지만, 메이지 시대 이후 주변 지역의 무분별한 굴착으로 인해 수위가 낮아져 자연적으로 분출되지 않게 되었고, 현재는 인공 간헐천으로 정비되어 있다. 과거에는 하루에도 여러 번 온천수와 증기를 분출하여, 에도 시대 후기에는 하루 8번을 기록하기도 했지만,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 감소했다[4]。이후 오유의 보존을 주장하는 측과 오유 외에도 온천가를 확장하려는 파벌 간의 충돌이 발생했다. 1883년의 기록에는 낮과 밤에 각각 3번씩 분출이 있었다[4]。메이지 시대 중기(1902년경)에 자연 분출이 멈추자, 놀란 마을 주민들은 물리학자 혼다 고타로에게 조사를 의뢰했고, 혼다는 조수 테라다 토라히코와 함께 복구에 성공했다[5]。이 당시에는 하루 평균 4번, 8분간 분출이 있었다[6]。다이쇼 12년(1923년)에 자연 분출이 멈추고 고갈된 것을 계기로, 원천 개발의 제한이 철폐되어, 산측이나 해안 매립지 등에서의 굴착이 잇따라 시작되었고, 쇼와 10년(1935년)에는 220개의 원천이 굴착되었다. 한편, 새로운 굴착을 중지하는 등 조치를 취했지만, 1912년 고즈 슈쿠유의 조사 당시에는 하루 평균 2회, 3분으로 감소했다. 그 후, 관동 대지진 때 다시 자연 분출이 시작되었지만, 쇼와 초기에 다시 자연 분출이 멈췄다. 1962년(쇼와 37년)에 시영 온천수를 끌어와 인공 간헐천으로 정비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오유 간헐천 옆에는 일본 최초의 전화 부스가 재현되어 있다(현재 아타미 뉴 후지야 호텔 별관 옆).
또한, 외국인으로 기록된 최초로 후지산 정상에 도달한 막부 말기의 주일 영국 공사 러더퍼드 올콕의 기념비와, 그의 애견이자 동행했던 스코티시 테리어 토비의 묘소가 있다. 토비는 귀가 길에 이 아타미의 오유 간헐천에서 큰 화상을 입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 큰 화상을 입은 토비는 지역 주민들의 정성 어린 간호를 받았지만, 결국 사망했다. 묘소는 이를 슬퍼한 지역 주민들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올콕은 이에 감사를 표했다고 전해진다. 묘비에는 "poor Toby(불쌍한 토비)"라고 적혀 있다.
3. 4. 원천 목록
아타미 온천에는 410개의 원천이 있으며, 이 중 250개 정도가 현재 사용되고 있다.[7] 대부분의 원천은 염화물천이며, 일부 황산염천도 존재한다. 과거에는 황산염천이 많았으나, 보링을 통한 개발로 인해 해수 혼입량이 증가하면서 염화물천으로 바뀌었다.[7]아타미 온천의 원천은 대부분 나트륨·칼슘-염화물 온천(80%)이며, 나트륨·칼슘-염화물·황산염 온천(19%), 나트륨·칼슘-황산염 온천(1%)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7]
각 원천에는 고유한 이름이 붙어 있으며, 100번대까지는 주로 무가 저택, 촌장, 유력 상점의 성씨가 사용되었고, 이후에는 여관 설립자의 성씨나 여관 이름이 사용되었다.[7]
4. 온천 시설
아타미에는 외래 입욕이 가능한 당일 온천 시설(호텔이나 여관과 겸업하는 것을 포함)이 다수 있다.[1]
아타미에는 공동 욕장이 3곳 있다.[1] 대부분 한적한 분위기로, 아타미의 환락적인 분위기와는 거리가 있다.
아타미역 앞에 있는 족욕 시설인 이에야스의 탕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헤이와도리 상점가에 있는 후쿠후쿠노 탕은 무료 수탕 시설이다.
4. 1. 온천가
이즈반도 북동단, 아타미역 북동에서 남동에 걸쳐, 사가미만을 향하는 바다를 따라 료칸이나 호텔이 늘어서 있다. 전망을 추구하고 산속에 입지하는 시설도 있다. 아타미역 병설 시설인 라스카 아타미나 역 근처의 상점가, 기운카쿠와 같은 관광지, 해변의 해수욕장이나 앞바다에 있는 하쓰시마섬까지 포함된 관광지가 되고 있다.아타미역은 이토선의 시발역으로, 이즈반도 관광의 동쪽 현관구적인 입지로도 되어 있다.

4. 2. 당일 온천 시설
외래 입욕이 가능한 당일 온천 시설(호텔이나 여관과 겸업하는 것을 포함)이 다수 존재한다.[1]
4. 3. 공동 욕장
아타미에는 3곳의 공동 욕장이 있다.[1] 대부분 한적한 분위기로, 아타미의 환락적인 분위기와는 거리가 있다.
4. 4. 족욕·수욕 시설
- 아타미역 앞에 있는 족탕 시설인 이에야스의 탕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 헤이와도리 상점가에 있는 후쿠후쿠노 탕은 무료 수탕 시설이다.
5. 교통
도카이도 신칸센이나 도카이도 본선 아타미역에서 내려 바로 갈 수 있다. 해안을 따라 이어진 중심부로 가려면 이즈 도카이 버스 노선 버스로 약 5분 정도 걸린다. 이토선 기노미야역도 이용할 수 있다. 자가용으로는 세이쇼 바이패스 이시바시 나들목에서 국도 135호선을 경유하면 된다.
5. 1. 철도
도카이도 신칸센 또는 도카이도 본선 아타미역에서 하차하면 바로 앞에 있다. 해안을 따라 이어진 중심부로 가려면 이즈 도카이 버스가 운행하는 노선 버스로 약 5분 거리이다. 또한, 이토선 기노미야역도 이용할 수 있다.5. 2. 자가용
세이쇼 바이패스 이시바시 나들목에서 국도 135호선을 경유한다.6. 기타
과거 아타미 온천이 일본을 대표하는 환락 온천으로 번성했던 것에서 유래하여, 다른 지방의 온천가나 온천향이 "○○의 아타미"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러한 온천가들도 아타미 온천처럼 거품 경제 붕괴와 레저 다양화로 인해 관광객이 감소하면서, "과거 '○○의 아타미'라고 불렸던 ×× 온천은…"이라는 식으로 언급되기도 한다.[20][21]
하지만, 가이케 온천처럼 긍정적인 의미로 "산인의 아타미"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반다이아타미 온천은 개장 당시 영주가 이즈 출신이었던 것에서 이름을 따온 특별한 사례이다.
1990년대 초 거품 붕괴 이후, 아타미 온천 지역의 많은 숙박 시설들이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다.
6. 1. '○○의 아타미'
과거 아타미 온천이 일본을 대표하는 환락 온천으로서 영화를 누렸던 것에서 비롯하여, 다른 지방의 유사하거나 유명한 온천가나 온천향이 "○○의 아타미"라고 선전하거나 그렇게 불린 적이 있다.이러한 온천가들도 아타미 온천과 마찬가지로, 거품 경제의 붕괴, 레저의 다양화 등의 사정으로 인해 손님이 줄어들면서, 현상황의 온천가를 평하여 "과거 '○○의 아타미'라고 불렸던 ×× 온천은…"이라는 문맥으로 언급되는 사례도 보이게 되었다[20][21]。
그 한편, "산인의 아타미"를 자칭하는 가이케 온천처럼, 부정적·소극적인 의미를 동반하지 않고, 보통 선전 문구로 사용하고 있는 사례도 있다.
특수한 예로, 반다이아타미 온천은 개탕 당시의 영주가 이즈 출신인 것에서 이름을 빌려온 것으로, 현지와의 인연이 있는 명칭이 되었다.
6. 2. 폐관 시설
1990년대 초 거품 붕괴 이후 아타미 온천 지역의 많은 숙박 시설들이 경영난을 겪고 문을 닫았다. 다음은 폐관된 시설 목록이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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昭和薫る熱海・渚町 35年ぶり温泉銭湯、今秋オープン 飲食店改装「憩いの場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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坂口安吾 安吾巷談 熱海復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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衰退から一転、「熱海の奇跡」が実現した舞台裏を、再生キーパーソンに聞いてきた ―街づくりと観光の連動から「関係人口」の創出まで|トラベルボイス(観光産業ニュー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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衰退一途の熱海がいつのまにか復活を遂げた「再生の秘密」(市来 広一郎) | 現代ビジネス | 講談社(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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なぜ「熱海」は人気観光地に返り咲いたか アラフィフのおじさんたちが大奮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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プレジデン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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岡本ホテル事件、実質オーナーに懲役18年 東京地裁判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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浅虫温泉を「東北の熱海」と称した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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よみがえれ!温泉街 ~老舗の熱海・地震が襲った能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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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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