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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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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티스는 프리기아의 신으로, 키벨레 여신과 관련된 존재이다. 아티스 숭배는 기원전 1250년경 딘디몬에서 시작되어 그리스와 로마 시대로 확산되었다. 아티스는 아그디스티스에 의해 거세된 후 소나무로 변하거나 부활하는 등, 죽음과 부활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아티스 숭배는 의례와 상징, 문학, 철학, 고고학적 발견 등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으며, 현대에도 젠더 정체성 등 다양한 측면에서 해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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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 - [인물]에 관한 문서
신화 속 정보
이름아티스
다른 이름아티스, 아테스, 아테, 아티
역할프리기아의 식물 신; 자신의 자해, 죽음, 부활은 겨울에 죽었다가 봄에 다시 솟아나는 땅의 열매를 상징함
숭배 지역프리기아
그리스어Ἄττις, Ἄτυς, Ἄττυς, Ἄττης
가족 관계
어머니상가리우스 강의 딸 나나, 그리고 양성구유 아그디스티스의 잘린 남성 성기에서 자란 아몬드 나무
배우자키벨레
죽음
원인스스로 거세/불임하고 죽음

2. 기원 및 역사

아티스는 프리기아의 여신 키벨레(대지모신)의 아들이자 연인이었다. 일설에 따르면 제우스가이아의 아들 마네스가 그의 아버지라고 한다. 그러나 키벨레는 아티스가 다른 인간 여성과 사랑에 빠지자 그를 미치게 만들어 자살하게 했고, 이후 아티스는 나무의 형태로 부활하게 된다.

아티스는 본래 프리기아의 상업 도시 페시누스와 관련된 반신이었다. 페시누스 도시의 바람이 불어 오는 쪽에는 아그디스티스 산이 있었는데, 이 산은 이전부터 데몬의 체현이라고 여겨졌다.[17] 파우사니아스가 전해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아그디스티스는 본래 반음양이었다. 그러나 올림포스의 신들은 아그디스티스를 두려워하여 그의 남성기를 절제했다. 이윽고 지상에 버려진 성기에서 한 그루의 아몬드 나무가 자라났다. 그 나무가 여물었을 때, 상가리오스 강의 딸 나나가 그 씨앗을 가슴에 숨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씨앗은 사라져 그녀의 몸 속으로 흡수되었다. 그 후 사내아이가 태어났지만, 곧 들판에 버려졌고 수컷 염소들이 그를 키웠다.[18]

아티스가 성장하면서, 그의 긴 머리카락은 신과 같은 아름다움을 지녔고, 그의 부모인 아그디스티스(키벨레)는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티스의 양부모는 그를 페시누스로 보냈고, 그곳에서 그는 왕의 딸과 결혼하게 되었다.[5] 일부 버전에 따르면 페시누스의 왕은 미다스였다. 결혼 노래가 불려지자마자, 아그디스티스/키벨레가 초월적인 힘으로 나타났고, 아티스는 미쳐서 소나무 아래에서 스스로 거세했다. 그가 자해로 인해 죽자, 제비꽃이 그의 피에서 피어났다. 그의 미래의 장인, 즉 딸을 결혼시키는 왕도 그 뒤를 따랐고, 이는 키벨레에게 헌신하여 자해하는 코리반테스의 모습을 예고했다. 상심한 아그디스티스는 제우스에게 아티스를 보존하여 그의 몸이 썩거나 부패하지 않도록 간청했다.[5]

지리학자 스트라보는 페시누스의 키벨레 신전에서, 신들의 어머니는 여전히 아그디스티스라고 불렸다고 전했다.[6] 아티스는 로마에서 대지모신으로 알려진 프리기아의 여신 키벨레의 아들이자 연인이었으며, 동시에 거세된 시종이자 사자가 끄는 키벨레 전차마부였다. 그는 키벨레에 의해 정신을 잃고 스스로 거세했다.

2. 1. 초기 기원

아티스 숭배는 기원전 1250년경 딘디몬 산(오늘날 터키 게디즈의 무라트 다으)에서 시작되었다.[17] 아티스는 원래 프리게아의 지역 반신으로, 프리게아의 대규모 무역 도시 페시누스와 관련이 있었다. 페시누스는 아그디스티스 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이 산은 데몬으로 의인화되었고, 외국인들은 이 데몬을 위대한 어머니 키벨레와 연관시켰다.[17]

2. 2. 그리스-로마 시대의 확산

기원전 4세기 후반, 아티스 숭배는 그리스 세계의 특징이 되었다. 여행가 파우사니아스는 아그디스티스에서 아티스가 유래했다는 이야기를 기록했는데, 여기에는 분명히 그리스적이지 않은 요소가 있었다.[5]

인접한 리디아가 프리게아를 지배하면서 아티스 숭배는 리디아적 맥락을 가지게 되었다. 율리아누스는 키벨레의 광란적인 숭배와 그 확산을 묘사하는데,[7] 이 숭배는 아나톨리아에서 시작되어 그리스에서 채택되었고, 결국 로마 공화국에서도 받아들여졌다. 키벨레의 부활한 환관 배우자인 아티스 숭배가 키벨레 숭배를 따랐다.

3. 전설

아티스의 탄생과 죽음, 부활에 관한 여러 판본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티스는 프리기아의 여신 키벨레(대지모신으로도 알려짐)의 아들이자 애인이었다. 일설에는 제우스가이아의 아들 마네스가 그의 아버지라고도 한다. 키벨레는 아티스가 다른 인간 여성과 사랑에 빠지자 그를 미쳐 자살하게 만들었고, 이후 아티스는 나무의 형태로 부활하게 된다.[20]

아티스 숭배는 기원전 1250년경 딘디몬(오늘날 터키 게디즈, 퀴타히아의 무라트 다으)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원래 프리기아의 지역 반신으로, 거대한 프리기아 무역 도시인 페시누스와 관련이 있었다. 이 도시는 아그디스티스 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이 산은 "데몬"으로 의인화되었고, 외국인들은 이 데몬을 위대한 어머니 키벨레와 연관시켰다.

기원전 4세기 후반, 아티스 숭배는 그리스 세계의 특징이 되었다. 여행가 파우사니아스가 기록한 아그디스티스에서의 그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는 분명히 그리스적이지 않은 요소를 가지고 있다.[5]

율리아누스는 키벨레의 광란적인 숭배와 그 확산을 묘사한다.[7] 이 숭배는 아나톨리아에서 시작되어 그리스에서 채택되었고, 결국 로마 공화국에서도 받아들여졌다. 그녀의 부활한 환관 배필인 아티스 숭배가 그녀를 따랐다. 로마에서 키벨레의 환관 추종자들을 ''갈리''라고 불렀다.

3. 1. 탄생

파우사니아스가 전한 이야기에 따르면, 아그디스티스는 본래 양성을 가진 존재였다. 그러나 올림포스의 신들은 아그디스티스를 두려워하여 그의 남성기를 잘라 버렸다. 땅에 버려진 성기에서는 아몬드 나무가 자라났다. 나무에 열매가 열리자, 상가리오스(:en:Sangarios)[18] 강의 딸 나나가 그 열매를 가슴에 품었다. 얼마 후 열매는 사라졌고, 나나는 임신을 하게 되었다. 달이 차서 사내아이가 태어났지만, 곧 들판에 버려졌고, 수컷 염소들이 아이를 키웠다.[5]

3. 2. 죽음과 부활

아티스는 성장하면서 장발의 미남이 되었다. 아그디스티스(키벨레)는 아티스와 사랑에 빠졌으나, 아티스의 양부모는 그를 페시누스로 보내 그곳의 왕녀와 결혼시키려 하였다. 이에 질투를 느낀 아그디스티스는 초월적인 힘을 발휘해 아티스를 미치게 만들어 스스로 거세하게 했다.[5] 아티스가 죽자 그의 피에서 제비꽃이 피어났다. 페시누스의 왕도 이를 따라 스스로 거세하고 키벨레에게 몸을 바치는 코류반테스[19]의 선례가 되었다. 상심한 아그디스티스는 제우스에게 아티스의 몸이 썩거나 부패하지 않도록 간청했고,[5] 아티스를 전나무로 바꾸었다.[20] 아티스는 상록수인 소나무의 모습으로 부활했다.

3. 3. 돼지와의 관련성

제우스리디아의 작물을 파괴하기 위해 멧돼지를 보냈고, 아티스를 포함한 리디아인들이 멧돼지에게 죽임을 당했다.[5] 파우사니아스는 페시누스의 골족(갈리아인)들이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관습이 이와 관련이 있다고 기록했다.[5] 이 신화적 요소는 갈라티아 리디아 골족의 특이한 식단 규정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5]

4. 숭배와 의례

기원전 1250년경 딘디몬 (오늘날 터키 게디즈, 퀴타히아의 무라트 다으)에서 아티스 숭배가 시작되었다.[5] 아티스는 원래 프리게아의 지역 반신으로, 페시누스와 관련이 있었다. 페시누스는 아그디스티스 산 기슭에 자리 잡은 프리게아 무역 도시였고, 데몬으로 의인화되었으며, 외국인들은 이 데몬을 위대한 어머니 키벨레와 연관시켰다.[5]

기원전 4세기 후반, 아티스 숭배는 그리스 세계의 특징이 되었다. 여행가 파우사니아스는 아그디스티스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했는데, 이는 분명히 그리스적이지 않은 요소를 가지고 있다.[5] 그는 "데몬" 아그디스티스가 처음에는 남성과 여성의 성기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고 전했다. 올림포스 신들은 아그디스티스를 두려워하여 그가 스스로 거세하도록 음모를 꾸몄다. 아그디스티스의 출혈에서 아몬드 나무가 싹텄고, 산가리우스 강의 딸 나나는 익은 아몬드를 가슴에 넣어 아티스를 임신하고 버렸다.[5] 아기는 수염소의 보살핌을 받았다.

아티스가 성장하면서, 그의 긴 머리카락은 신과 같은 아름다움을 띄었고, 아그디스티스(키벨레)는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티스의 양부모는 그를 페시누스 왕의 딸과 결혼시키려 했다.[5] 미다스 왕이 페시누스의 왕이었다는 설도 있다. 결혼 노래가 불려지자, 아그디스티스/키벨레가 초월적인 힘으로 나타났고, 아티스는 미쳐서 소나무 아래에서 스스로 거세했다. 그가 자해로 인해 죽자, 제비꽃이 그의 피에서 피어났다.[5]

상심한 아그디스티스는 제우스에게 아티스의 몸이 썩거나 부패하지 않도록 간청했다.[5] 스트라보는 페시누스의 키벨레 신전에서 신들의 어머니는 여전히 아그디스티스라고 불렸다고 전했다.[6]

리디아가 프리기아를 지배하면서 아티스 숭배는 리디아적 맥락을 가지게 되었다. 아티스는 리디아에 키벨레 숭배를 도입했다고 전해지며, 제우스는 멧돼지를 보내 리디아의 작물을 파괴하고 아티스를 포함한 리디아인들을 죽였다. 파우사니아스는 페시누스에 거주하는 골족이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다는 사실로 이 이야기를 뒷받침했다. 이는 갈라티아 리디아 골족의 특이한 식단 규정을 설명하기 위한 신화적 요소였을 수 있다.

율리아누스는 키벨레의 광란적인 숭배가 아나톨리아에서 시작되어 그리스를 거쳐 로마 공화국까지 확산되었다고 묘사한다.[7] 아티스 숭배는 키벨레 숭배와 함께 전파되었다. 아티스는 로마에서 대지모신으로 알려진 프리기아의 여신 키벨레의 아들이자 연인이었고, 거세된 시종이자 사자가 끄는 키벨레 전차마부였다. 그는 키벨레에 의해 정신을 잃고 스스로 거세했다.

키벨레 숭배가 아나톨리아에서 그리스, 나아가 로마까지 퍼지면서, 거세 후 부활한 아티스 숭배도 함께 퍼졌다. 마그나 그라에키아 (이탈리아 남부 등의 그리스인 정착지)에서 발견된 대리석 얕은 부조에는 전차를 탄 키벨레와 아티스가 함께 그려져 있으며, 베네치아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4. 1. 코리반테스

아티스는 자라면서 장발의 미남자가 되었고, 아그디스티스(키벨레)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아티스의 수양부모는 그를 펫사누스 왕녀와 결혼시키려 하였다. 이에 질투를 느낀 아그디스티스는 아티스를 미치게 만들어 스스로 거세하게 만들었다. 펫사누스의 왕도 이를 모방하여 스스로 거세하고 키벨레에게 몸을 바치는 코류반테스[19]가 되었다. 로마에서는 키벨레를 따르는 거세된 사제들을 '갈리'라고 불렀다.

4. 2. 의례 및 상징

아티스는 종종 프리기아 모자를 쓰고, 목동의 지팡이와 석류를 든 모습으로 묘사된다.[5] 소나무는 아티스의 부활을 상징하는 중요한 상징물이었으며,[5] 아티스는 상록수인 소나무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6]

5. 영향 및 유물

아티스 숭배는 고대 세계에 널리 퍼져 다양한 문화적 영향을 남겼다.

카툴루스는 그의 유명한 시 중 하나에서 아티스를 언급했고,[8] 장바티스트 륄리와 니콜로 피치니는 각각 아티스를 주제로 한 오페라를 작곡했다.[10] 오스카 와일드는 그의 시 ''스핑크스''에서 아티스의 자해를 언급했다.[10] 율리아누스 황제는 "신들의 어머니 찬가"에서 아티스에 대한 신플라톤주의적 해석을 제시했다.[11] 그는 아티스가 갈루스 강가에서 버려져 꽃처럼 자랐고, 아름답게 성장하여 신들의 어머니의 사랑을 받았다고 전한다.[12]

오스티아 안티카에서는 거세 후 누워 있는 아티스의 실물 크기 조각상이 발견되었고,[13] 베네치아 고고학 박물관에는 키벨레와 아티스를 묘사한 대리석 부조가 소장되어 있다.[21] 트리어 라인 주립 박물관에는 아티스 조각상이 보관되어 있으며, 헤르쿨라네움 유적에서는 아티스 부조로 장식된 나무 왕좌가 발견되어 서기 79년 베수비오 산 분화 당시 아티스 숭배가 성행했음을 보여준다.[14]

5. 1. 문학

카툴루스는 그의 가장 유명한 시 중 하나인 카툴루스 63에서 아티스를 언급했다.[8] 장바티스트 륄리는 1675년에 오페라 ''아티스''를 작곡했고, 니콜로 피치니는 1780년에 자신의 ''아티스''를 작곡했다. 오스카 와일드는 1894년에 출판된 그의 시 ''스핑크스''에서 아티스의 자해를 언급했다.[10]

5. 2. 철학

율리아누스 황제는 "신들의 어머니 찬가"에서 아티스에 대한 신플라톤주의적 분석을 제시했다.[11] 율리아누스는 이 글에서 아티스가 갈루스 강가에서 버려진 채 태어나 꽃처럼 자랐고, 아름답고 키가 크게 성장하여 신들의 어머니의 사랑을 받았으며, 그녀가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별이 박힌 모자를 씌워주었다고 전한다.[12] 라이트는 이 구절에 대해 주석하며, 아티스와 자연의 동일시를 암시한다고 설명했다.[12]

5. 3. 고고학적 발견

오스티아 안티카에서 아티스의 실물 크기 조각상이 발견되었는데, 거세 후 누워 있는 아티스를 묘사하고 있다. 왼손에는 목동의 지팡이, 오른손에는 석류를 들고 있으며, 머리에는 소나무 화관과 태양의 청동 광선, 프뤼기아 모자에는 초승달이 있다. 이 조각상은 1867년 마그나 마테르 캠퍼스에서 발견되어 현재 바티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13]

베네치아 고고학 박물관에는 전차를 탄 키벨레와 아티스를 묘사한 대리석 부조가 소장되어 있다.[21]

트리어 라인 주립 박물관에는 1963년 모젤강에서 발견된 아티스 조각상이 보관되어 있다. 이 조각상은 다리 앞쪽을 토글로 고정한 바지와 프리기아 모자 등 아나톨리아 신의 전형적인 의상을 보여준다.

헤르쿨라네움 유적에서는 솔방울을 줍는 성스러운 소나무 아래 아티스 부조로 장식된 나무 왕좌가 발견되었다. 이는 서기 79년 베수비오 산 분화 당시 헤르쿨라네움에서 아티스 숭배가 성행했음을 보여준다.[14]

6. 현대적 해석

아티스 신화는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다.

6. 1. 죽음과 부활의 상징

아티스의 죽음과 부활은 자연의 순환, 특히 봄의 도래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는 억압과 고통 속에서도 희망과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1] 아티스는 상록수인 소나무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2]

키벨레는 아티스가 다른 인간 여성과 사랑에 빠지자 그를 미치게 만들어 자살하게 했다. 이후 아티스는 나무의 형태로 부활하게 된다.[3] 아티스는 키벨레의 손에 의해 정신을 잃고 스스로 거세했다.[4] 아그디스티스는 후회했고, 아티스의 육체를 쇠퇴하거나 멸망하지 않는 존재로 바꾸었다.[5]

6. 2. 젠더 정체성

아티스는 키벨레의 아들이자 연인이었으며, 동시에 거세된 시종이자 키벨레의 전차를 모는 마부였다.[1] 그는 키벨레에 의해 정신을 잃고 스스로 거세했다.[1]

아티스의 거세는 전통적인 성 역할 관념에 도전하고 다양성을 포용하는 현대적 관점과 연결될 수 있다. 그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경계를 넘어서는 젠더 정체성을 가진 인물로 해석될 수 있다. 로마에서는 거세된 키벨레의 신도를 갈리(Galli)라고 불렀다.[3]

참조

[1] 웹사이트 Attis https://www.maicar.c[...] 2023-04-07
[2] 서적 A Dictionary of Greek and Roman Biography and Mythology John Murray via Spottiswoode and Co.
[3] 백과사전 Attis (Phrygian deity) http://www.britannic[...]
[4] 서적 Encyclopedia of Greek and Roman Mythology https://books.google[...] Infobase Publishing
[5] 서적 Description of Greece
[6] 서적 Geography
[7] 서적 Oratio
[8] 논문 'Poem 63 – was Attis at Rome under the Republic?' https://books.google[...]
[9] 서적 Attis: Van Herdersknaap tot God Vlaamse Akademie
[10] 서적 Poems http://www.gutenberg[...] Methuen & Co.
[11] 서적 The Works of the Emperor Julian William Heinemann, The Macmillan Co.
[12] 서적 The Works of the Emperor Julian William Heinemann, The Macmillan Co.
[13] 웹사이트 Regio IV – Regio I – Santuario di Attis (IV, I, 3) http://www.ostia-ant[...] 2006-05-13
[14] 간행물 An ivory throne for Herculaneum http://minervamagazi[...] 2008-03
[15] 서적 Ἱστορίαι ("Historíai̯")
[16] 논문 Attis: A Greek god in Anatolian Pessinous and Catullan Rome https://pure.rug.nl/[...]
[17] 문서 Geography
[18] 문서
[19] 문서
[20] 문서 Greece
[21]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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