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탈키다스 평화조약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안탈키다스 평화 조약은 기원전 387년 스파르타의 외교관 안탈키다스가 페르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아 아테네의 세력 확장을 막기 위해 체결한 조약이다. 이 조약으로 페르시아는 이오니아와 에게 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했으며, 그리스 도시들은 자율성을 보장받는 대신 페르시아에 종속되는 결과를 낳았다. 스파르타는 조약을 통해 그리스 정치 체제에서 공식적인 최고 지위를 얻었으나, 평화를 유지하려는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다른 폴리스들을 억압하며 패권을 강화했다. 이 조약은 그리스 내에서 스파르타의 권력 남용을 초래하고, 결국 끊임없는 전쟁 상태를 야기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아케메네스 제국의 조약 - 칼리아스 평화조약
칼리아스 평화조약은 기원전 450/449년경 아테네와 페르시아 간에 체결되었다고 전해지는 조약으로, 델로스 동맹의 반란 진압을 도왔지만, 조약의 존재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안탈키다스 평화조약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안탈키다스 평화조약 |
별칭 | 왕의 평화 페르시아의 평화 |
날짜 | |
서명 | 기원전 387년 |
장소 | |
위치 | 페르시아 제국 사르디스 |
교전국 | |
당사자 | 스파르타 아테네 코린토스 테베 기타 그리스 도시 국가들 페르시아 제국 |
영향 | |
결과 | 코린토스 전쟁 종결 |
영향 | 페르시아의 영향력 강화, 스파르타의 헤게모니 유지 |
관련 정보 | |
관련 전쟁 | 코린토스 전쟁 |
이전 조약 | 니키아스 평화조약 |
다음 조약 | 기원전 371년의 평화 |
2. 배경
코린토스 전쟁 이후 도시국가 아테네가 세력을 확장하며 패권을 굳히자, 스파르타는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의 도움을 받아 아테네를 견제하려 했다.
2. 1. 코린토스 전쟁의 전개
코린토스 전쟁 이후 도시국가 아테네는 세력을 확장하고 패권을 굳히고 있었다. 이에 스파르타는 페르시아 제국 아케메네스 왕조의 도움을 받아 아테네를 견제하도록 유도했다. 스파르타의 외교관이며 장군이기도 했던 안탈키다스는 기원전 387년 수사에 가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와의 협상 끝에 화약을 체결시켰다.[1]387 BC 무렵, 코린토스 전쟁의 주 전선은 그리스 본토에서 에게해로 옮겨갔다. 이곳에서 트라시불루스가 이끄는 아테네 함대는 에게해 전역의 여러 도시들을 아테네의 통제하에 두는 데 성공했으며, 키프로스의 왕 에우아고라스 1세와 협력하고 있었다. 에우아고라스는 페르시아의 적이었고, 아테네의 여러 이득은 페르시아의 이익을 위협했기 때문에 이러한 전개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로 하여금 아테네와 그 동맹국에 대한 지원을 스파르타로 전환하도록 만들었다. 스파르타 함대의 사령관 안탈키다스는 사트라프 티리바주스와 함께 수사로 소환되었다. 그곳에서 스파르타인과 페르시아인은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협약의 형태를 마련했다.[1]

아테네인들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이기 위해 안탈키다스는 90척의 함대를 헬레스폰트로 이동시켰다. 그곳에서 그는 아테네인들이 흑해 지역에서 곡물을 수입하는 무역로를 위협할 수 있었다. 아테네인들은 기원전 404년 스파르타인들이 헬레스폰트를 장악했을 때의 처참한 패배를 상기하며 협상에 동의했고, 테베, 코린토스, 아르고스는 아테네 없이 싸우기를 꺼려했기에 협상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스파르타에서 열린 평화 회담에서 모든 교전국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가 제시한 조건에 동의했다.[1]
2. 2. 스파르타와 페르시아의 협상
코린토스 전쟁 이후 도시국가 아테네는 세력을 확장하고 패권을 굳히고 있었다. 이에 스파르타는 페르시아 제국 아케메네스 왕조의 도움을 받아 아테네를 견제하도록 유도했다. 스파르타의 외교관이며 장군이었던 안탈키다스는 기원전 387년 수사에 가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와의 협상 끝에 화약을 체결시켰다.[1]387 BC 무렵, 코린토스 전쟁의 주 전선은 그리스 본토에서 에게해로 옮겨갔다. 이곳에서 트라시불루스가 이끄는 아테네 함대는 에게해 전역의 여러 도시들을 아테네의 통제하에 두는 데 성공했으며, 키프로스의 왕 에우아고라스 1세와 협력하고 있었다. 에우아고라스는 페르시아의 적이었고, 아테네의 여러 이득은 페르시아의 이익을 위협했기 때문에 이러한 전개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로 하여금 아테네와 그 동맹국에 대한 지원을 스파르타로 전환하도록 만들었다. 스파르타 함대의 사령관 안탈키다스는 사트라프 티리바주스와 함께 수사로 소환되었다. 그곳에서 스파르타인과 페르시아인은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협약의 형태를 마련했다.[1]
아테네인들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이기 위해 안탈키다스는 90척의 함대를 헬레스폰트로 이동시켰다. 그곳에서 그는 아테네인들이 흑해 지역에서 곡물을 수입하는 무역로를 위협할 수 있었다. 아테네인들은 기원전 404년 스파르타인들이 헬레스폰트를 장악했을 때의 처참한 패배를 상기하며 협상에 동의했고, 테베, 코린토스, 아르고스는 아테네 없이 싸우기를 꺼려했기에 협상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다. 스파르타에서 열린 평화 회담에서 모든 교전국은 아르타크세르크세스가 제시한 조건에 동의했다.[1]
3. 조약의 내용
왕의 평화 조약의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은 페르시아의 영향이 반영되었다는 점이다. 크세노폰의 기록에서 페르시아가 설정한 평화 조약의 조건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조약의 주요 내용'''
- 페르시아는 그리스 도시를 포함한 아시아를 영유한다.
- 아테네에 속해야 하는 렘노스, 임브로스, 스키로스를 제외하고, 나머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완전한 독립을 유지한다.
- 이 평화 조약을 받아들이지 않는 나라에 대해서는 페르시아 제국이 전쟁을 일으킨다.
이오니아와 키프로스는 페르시아에 넘어갔고, 아테네는 에게해에서 새롭게 얻은 영토를 내주어야 했다. 또한, 전쟁으로 인해 성장한 아르고스와 코린토스의 연합(그리스인들은 이를 ''심폴리테이아''라고 불렀으며, 두 도시는 정치적으로 통합되어 모든 시민에게 공동 시민권을 부여했다)이 해체되었다. 테베는 보이오티아 동맹을 해산해야 했다.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헬로트는 평화를 관리할 책임이 있던 스파르타인들이 독립 원칙 적용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간과되었다.
3. 1. 조약문의 원문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왕은 아시아의 도시들과 섬들 중 클라조메나이와 키프로스는 자신에게 속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른 그리스 도시들은 크든 작든 자율적인(αὐτονόμουςgrc) 상태로 남겨져야 하며, 렘노스, 임브로스, 스키로스는 옛날처럼 아테네에 속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평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어느 쪽이든, 나는 이 조약을 원하는 자들과 함께 육지와 바다에서 배와 돈으로 전쟁을 벌일 것이다.[1][2][3]4. 조약의 영향
안탈키다스 평화 조약은 그리스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조약으로 페르시아는 이오니아와 에게 해 일부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했으며, 스파르타는 그리스 내에서 패권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조약은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지 못하고, 오히려 그리스 도시 국가들 간의 분쟁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4][5]
스파르타는 평화 유지라는 명분 하에 여러 폴리스들을 억압했다. 만티네이아를 강제 해산하고, 칼키디키 동맹 해체를 시도했으며, 테베를 점령하여 친 스파르타 정권을 세우기도 했다.[7]
하지만 이러한 스파르타의 패권은 오래가지 못했다. 기원전 379년 테베에서 봉기가 일어나 스파르타 세력이 축출되었고, 이후 보이오티아 전쟁이 발발하면서 그리스는 다시 혼란에 빠졌다. 결국 안탈키다스 평화 조약은 스파르타에 과도한 권력을 부여함으로써 그리스의 평화를 위협하는 결과를 낳았다.
4. 1. 페르시아의 영향력 강화
안탈키다스 평화 조약의 가장 큰 효과는 페르시아가 이오니아와 에게 해 일부 지역에 대한 확고한 지배권을 되찾은 것이다. 기원전 5세기에 델로스 동맹에 의해 에게 해 연안에서 밀려났던 페르시아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후반기부터 입지를 회복해 왔으며, 이제 그리스에 조건을 제시할 만큼 강해졌다.[4][5] 알렉산더 대왕 시대까지 이러한 강세를 유지할 것이다. 미하일 가스파로프는 그의 저서 ''즐거운 그리스''(러시아어: ''Занимательная Греция'')에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크세르크세스가 실패한 일을 성공시켰다. 페르시아 왕은 병사 한 명을 투입하지 않고도 그리스에서 마치 자기 나라처럼 명령을 내렸다."라고 언급했다.[4][5] 요컨대, 이 조약으로 그리스는 페르시아의 종주권 아래 놓이게 되었다.[4][5]
4. 2. 스파르타의 패권 강화
안탈키다스 평화조약으로 페르시아는 이오니아와 에게 해 일부 지역에 대한 확고한 지배권을 되찾았다. 기원전 5세기 델로스 동맹에 의해 에게 해 연안에서 밀려났던 페르시아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후반기부터 입지를 회복하여 그리스에 조건을 제시할 만큼 강해졌다.[4][5] 미하일 가스파로프는 ''즐거운 그리스''에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크세르크세스 1세가 실패한 일을 성공시켰다. 페르시아 왕은 병사 한 명을 투입하지 않고도 그리스에서 마치 자기 나라처럼 명령을 내렸다."라고 언급했다.[4][5]윌 듀런트가 "그리스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 중 하나로 묘사한 이 조약의 또 다른 효과는[6] 대왕이 강요한 그리스 정치 체제에서 스파르타가 공식적인 최고 지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스파르타는 평화를 보호하고 시행한다는 임무를 사용하여 정치적 위협으로 인식되는 여러 폴리스에 대해 일련의 원정을 시작했다.
왕의 평화는 그리스에 평화를 가져오는 데 실패했다. 펠로피다스와 동료들은 기원전 379년 라코니아화된 참주들을 암살하여 테베를 해방시켰다. 기원전 382-379년 스파르타가 올린토스를 공격한 후, 부활한 아테네 해상 동맹과 함께 일반적인 전투가 재개되었고(보이오티아 전쟁 기원전 378-371년), 그 후 20년 동안 평화를 회복하려는 간헐적인 시도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공통 평화의 아이디어는 오래 지속되었고, 원래의 시도보다 성공하지 못했지만, 수많은 시도가 이루어질 것이다. 조약은 사용 시 다른 국가들을 격분시킬 수밖에 없는 스파르타에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스스로의 종말의 씨앗을 뿌렸고, 거의 끊임없는 전쟁 상태가 그리스의 규범으로 계속되었다.
4. 2. 1. 만티네이아 강제 해산
윌 듀런트가 "그리스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 중 하나로 묘사한[6] 이 조약의 두 번째 효과는, 대왕이 강요한 그리스 정치 체제에서 스파르타가 공식적인 최고 지위에 오른 것이다. 스파르타는 평화를 보호하고 시행한다는 임무를 이용하여, 정치적 위협으로 인식되는 여러 폴리스에 대해 일련의 원정을 시작했다. 그중 가까운 곳에 있던 아르카디아의 도시 만티네이아를 강제로 해산시켜 구성 마을로 만들었다.[7]4. 2. 2. 칼키디키 동맹 해체
윌 듀런트가 "그리스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이라고 묘사했듯이,[6] 이 조약으로 스파르타는 그리스 정치 체제에서 공식적인 최고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스파르타는 평화 유지 임무를 이용하여 정치적 위협으로 간주되는 여러 폴리스에 대한 원정을 시작했다. 가까운 곳에서는 아르카디아의 도시 만티네이아를 강제로 해산시켜 구성 마을로 만들었다.[7] 가장 큰 개입은 기원전 382년 대왕의 법령에 따른 자율성 원칙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북동부 그리스의 연방 칼키디키 동맹을 해체하기 위한 원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기원전 383년 스파르타 지지 세력의 초청을 받은 스파르타 지휘관 포이비다스는 테베의 아크로폴리스인 카드메이아를 점령하고, 스파르타 수비대의 지원을 받는 라코노필리아(스파르타 지지) 과두 정치를 수립했다. 스파르타 지지자인 크세노폰조차도 이 행위를 광기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이처럼 자율성의 원칙은 패권 세력에게는 유연하게 이용되는 도구였다.4. 3. 아테네의 쇠퇴와 테베의 부상
안탈키다스 평화 조약으로 페르시아는 이오니아와 에게 해 일부 지역에 대한 확고한 지배권을 되찾았다. 기원전 5세기 델로스 동맹에 의해 에게 해 연안에서 밀려났던 페르시아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후반기부터 입지를 회복해, 그리스에 조건을 제시할 만큼 강해졌다. 이러한 강세는 알렉산더 대왕 시대까지 유지되었다.[4][5] 미하일 가스파로프는 ''즐거운 그리스''에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크세르크세스가 실패한 일을 성공시켰다. 페르시아 왕은 병사 한 명을 투입하지 않고도 그리스에서 마치 자기 나라처럼 명령을 내렸다."라고 언급했다.[4][5]이 조약으로 스파르타는 그리스 정치 체제에서 최고 지위에 올랐다.[6] 스파르타는 평화 유지 임무를 이용하여 정치적 위협이 되는 여러 폴리스에 대한 원정을 시작했다. 아르카디아의 도시 만티네이아를 강제로 해산시켰고,[7] 기원전 382년에는 칼키디키 동맹을 해체하기 위한 원정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스파르타 지휘관 포이비다스는 테베 카드메이아를 점령하고 친 스파르타 과두 정치를 세웠다.
그러나 왕의 평화는 그리스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기원전 379년 펠로피다스와 동료들이 테베를 해방시켰고, 기원전 382-379년 스파르타의 올린토스 공격 이후 보이오티아 전쟁(기원전 378-371년)이 발발하며 전투가 재개되었다. 이후 20년 동안 평화 회복 시도가 있었지만, 스파르타에 권한을 부여한 조약은 결국 다른 국가들을 격분시켰고, 전쟁 상태는 지속되었다.
5. 조약에 대한 비판
안탈키다스 평화 조약은 다음과 같은 비판을 받았다.[1]
- 페르시아가 그리스인의 도시를 포함한 아시아를 영유하는 것을 인정하였다.
- 아테네에 속하는 렘노스, 임브로스, 스키로스를 제외한 나머지 그리스 제국의 독립을 보장했지만, 이는 페르시아의 간섭을 허용하는 조치였다.
- 평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국가에 대해 페르시아가 전쟁을 일으킬 수 있도록 하여, 사실상 페르시아의 패권을 인정하였다.
참조
[1]
서적
Trouble in the West: Egypt and the Persian Empire, 525–332 BC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USA
2012
[2]
서적
The Greek World in the Fourth Century: From the Fall of the Athenian Empire to the Successors of Alexander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3
[3]
문서
Xenophon, Hellenica 5.1.31
[4]
서적
The Political Economic Foundation of Democratic Capitalism: From Genesis to Maturation
https://books.google[...]
Brown Walker
[5]
서적
A Global Chronology of Conflict
ABC-CLIO LLC
[6]
문서
Durant, The Life of Greece
1939
[7]
간행물
Greece and the Hellenistic World
Oxford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