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레산드로 만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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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레산드로 만초니는 1785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난 작가이자 시인이다. 그는 15세에 시를 쓰기 시작하여 신고전주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발표했으며, 파리 유학 시절을 거치며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만초니는 낭만주의를 수용하여 기독교 신앙을 노래한 시와 비극 작품을 썼으며, 역사 소설 《약혼자들》을 통해 이탈리아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이탈리아 통일을 지지하며 이탈리아 상원 의원을 지냈으며, 그의 작품은 현대에도 널리 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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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산드로 만초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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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존칭 접두사 | 시뇨레 |
이름 | 알레산드로 만초니 |
존칭 접미사 | OCI, OSG, OSML, PM |
이미지 파일 | Francesco Hayez - Ritratto di Alessandro Manzoni.jpg |
이미지 설명 | 프란체스코 하예츠의 "알레산드로 만초니의 초상" (브레라 미술관, 밀라노, 1841) |
출생 이름 | 알레산드로 프란체스코 토마소 만초니 |
출생일 | 1785년 3월 7일 |
출생지 | 밀라노, 밀라노 공국 |
사망일 | 1873년 5월 22일 |
사망지 | 밀라노, 이탈리아 왕국 |
안장 장소 | 밀라노 기념묘지 |
국적 | 이탈리아 |
배우자 | 엔리케타 블론델(1808년 결혼, 1833년 사별) 테레사 보리(1837년 결혼, 1861년 사별) |
자녀 | 줄리아 클라우디아 (1808–1834) 피에트로 루이지 (1813–1873) 크리스티나 (1815–1841) 소피아 (1817–1845) 엔리코 (1819–1881) 클라라 (1821–1823) 비토리아 (1822–1892) 필리포 (1826–1868) 마틸데 (1830–1856) |
부모 | 피에트로 만초니와 줄리아 베카리아 |
친척 | 체사레 베카리아 (할아버지) 마시모 다젤리오 (사위) |
직업 | 작가, 시인, 극작가 |
정치 활동 | |
직위 | 이탈리아 왕국 상원의원 |
군주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
임기 시작 | 1860년 2월 29일 |
임기 종료 | 1873년 5월 22일 |
문학 활동 | |
활동 시기 | 19세기 |
장르 | 역사 소설, 비극, 시 |
주제 | 종교, 정치, 역사 |
사조 | 계몽주의, 낭만주의 |
주요 작품 | "아델키" (1822) "약혼자" (1827) |
활동 기간 | 1801–1873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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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밀라노의 백작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피에트로 만초니(Pietro Manzoni), 어머니는 계몽주의 사상가 체사레 베카리아의 장녀 줄리아 베카리아(Giulia Beccaria)이다. 두 사람은 1782년에 결혼했고, 1792년에 법적으로 별거했다.([20])
1805년 어머니와 함께 파리로 가서 볼테르와 문학가 클로드 포리에르의 영향을 받았다. 1808년 은행가의 딸 엔리케타 브론델(Enrichetta Blondel)과 결혼하고 함께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그 전까지 만초니는 가톨릭에서 이단으로 간주되는 얀세니즘 신자였고, 엔리케타는 칼뱅파 신자였다. 이러한 합리주의와 무신론으로부터의 회심은 이후 만초니의 행동과 사상을 결정했다고 여겨진다.
1819년, 첫 번째 비극 『카르마뇰라 백작(Il Conte di Carmagnola)』(프란체스코 부쏘네 다 카르마뇰라(Francesco Bussone da Carmagnola))을 발표했는데, 이 작품은 모든 고전적 관습을 과감하게 위반하여 활발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한 분기별 평론지 기사에서 심하게 비판받았지만, 괴테가 이를 옹호하며 반박했다. 1821년 나폴레옹의 죽음은 만초니에게 이탈리아어로 가장 인기 있는 서정시 중 하나인 『5월 5일(Il Cinque maggio)』을 쓰도록 영감을 주었다.[12]
1833년 크리스마스에 아내 엔리케타가 세상을 떠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시인으로서의 활동은 정지된 듯 보였으며, 그 후로는 언어 문제에 몰두하여 이탈리아어 통일에 관심을 쏟았다. 1837년에는 자녀가 있는 테레사 볼리(Teresa Bollis)와 재혼했다. 1840년 마조레 호수 기슭의 레사(Lesa)로 이주하여 저술에 전념했다.
1848년 밀라노에서 일어난 오스트리아에 대한 봉기 때 아들을 바리케이드에 보내 격려하고, 이탈리아 각 군주에게 밀라노 구원을 호소했다. 1860년 이탈리아 왕국이 성립되었을 때 상원의원이 되었다.
아내와 자녀들을 차례로 잃고, 1873년 1월 6일 산 페델레 교회를 나서다가 넘어져 머리를 심하게 부딪혔고, 5개월 후 뇌수막염으로 사망했다. 주세페 베르디의 레퀴엠은 그의 추도를 위해 완성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밀라노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 체사레 베카리아는 이탈리아의 법률·경제학자로, 북부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지방의 계몽주의 운동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만초니는 외가 쪽의 성격을 많이 닮았다. 15세 때 신고전주의 영향을 받은 첫 작품 <자유의 승리>(1801)를 썼다. 1805년 어머니가 애인과 파리로 가자 그도 뒤를 쫓았다. 어머니와 함께 파리 지식인들 사이에서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져 콘도르세 후작 부인의 살롱에 출입하였다. 그 사이 중세사 연구가 클로드 포리에르와 오랫동안 친교를 맺었다. 만초니의 역사에 대한 관심은 포리에르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1]1806~1807년 외퇴이에 있을 때, 고전적인 스타일의 작품 ''우라니아''(Urania)로 대중 앞에 처음 등장했는데, 후에 그는 이 스타일의 가장 눈에 띄는 반대자가 되었다. 또 다른 작품은 카를로 임보나티 백작의 죽음을 애도하는 무운시였다. 그는 어머니를 통해 상당한 재산을 상속받았는데, 그중에는 이후 그의 주요 거주지가 된 브루수글리오의 빌라도 있었다.[8]
1808년 엔리케타 블론델과 결혼하고, 그 해에 아내와 어머니를 동반하고 다시 파리로 갔다. 회의론, 인도주의, 감각론, 칸트 철학 등을 섭렵하고, 파스칼 등 호교론자들의 저작과 가톨릭으로 개종한 아내 엔리케타의 영향으로, 피비린내 나는 전 세기의 반동으로 19세기 초 파리를 휩쓴 가톨릭 신앙 분위기 속에서 개종하였다. 그의 개종은 만초니의 인생과 창작 활동에 큰 전기를 가져왔으며, 1812년 이후 그리스도교적 낙원이라는 이상에 자유, 평등, 박애 정신을 결부시킨 작품들이 발표되었다.
2. 2. 파리 시절과 사상적 변화
1805년 어머니가 애인과 파리로 가자 그도 뒤를 좇았다. 어머니와 함께 파리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져 콘도르세 후작 부인의 살롱에 출입하였다. 그 사이 중세사 연구가인 클로드 포리에르를 사귀어 오랫동안 친교를 맺었다. 만초니의 역사에 대한 관심은 포리에르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20]1808년 엔리케타 블론델과 결혼하고, 그 해에 아내와 어머니를 동반하고 다시 파리로 갔다. 회의론, 인도주의, 감각론, 칸트 철학 등을 섭렵하면서 파스칼 등 호교론자들의 저작과 가톨릭으로 개종한 아내 엔리케타의 영향을 받았다. 이는 피비린내 나는 전세기의 반동으로 19세기 초의 파리를 온통 휘감은 가톨릭 신앙의 분위기 속에서 개종한 것이었다. 그전까지 만초니는 가톨릭에서 이단으로 간주되는 얀세니즘 신자였고, 엔리케타는 칼뱅파 신자였다. 이러한 합리주의·무신론으로부터의 회심은 이후 만초니의 행동과 사상을 결정했다고 여겨진다.
그의 개종은 만초니의 인생과 창작 활동에 커다란 전기를 가져왔다. 1812년 이후로는 그리스도교적 낙원이라는 이상에 자유, 평등, 박애의 정신을 결부시킨 작품들이 연이어 발표되었다.
2. 3. 이탈리아 통일 운동과 만년
만초니는 이탈리아 통일을 지지했으며, 이탈리아 상원 의원이었다.[15]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기 전과 후를 통틀어 만초니의 정치 성향은 대체로 자유주의로 묘사될 수 있다. 프랑스 여행 이후 만초니의 자유주의에는 경제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포함되었다. 그는 장바티스트 세와 애덤 스미스와 같은 저술가들과 친분이 있었고, 자신이 읽고 있던 경제 논문과 에세이에 대한 많은 메모를 남겼다.그의 경제학적 이해는 그의 위대한 역사 소설인 ''약혼자''에서, 특히 롬바르디아의 기근을 다룬 12장에서 드러났다. 경제학자이자 이탈리아 공화국 대통령인 루이지 에이나우디는 이 장과 ''약혼자'' 전체를 "지금까지 쓰인 최고의 정치 경제 논문 중 하나"라고 칭찬했다.[8] 경제사학자인 데이드레 N. 매클로스키 역시 이를 "경제학 101 강의"라고 묘사했다.[16]

1833년 만초니의 아내가 사망하기 전후로 여러 자녀들과 어머니가 사망했다. 1830년대 중반 그는 밀라노에서 클라라 마페이(Clara Maffei)가 주최한 사교 모임인 "살로토 마페이(Salotto Maffei)"에 참석했고, 1837년 스탐파 백작(Count Stampa)의 미망인 테레사 보리(Teresa Borri)와 재혼했다. 테레사 또한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고, 두 번의 결혼으로 얻은 아홉 명의 자녀 중 두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보다 먼저 사망했다. 1860년 빅토르 에마뉘엘 2세 국왕은 그를 종신 상원의원으로 임명했다.[17] 1873년 4월 28일 장남 피에르 루이지(Pier Luigi)가 사망한 것이 그의 죽음을 앞당긴 마지막 타격이었다. 그는 이미 1월 6일 산 페델레 교회(San Fedele church)를 나서다 계단에서 머리를 부딪히는 사고를 당해 쇠약해진 상태였으며, 그 충격으로 인한 뇌수막염 합병증으로 5개월 만에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은 밀라노 대성당에서 거의 왕족 수준의 성대한 의식으로 거행되었다.[18] 며칠 동안 그의 시신이 안치된 후, 왕족과 모든 고위 관리들이 포함된 거대한 행렬이 그를 밀라노의 몬주멘탈레 묘지(Cimitero Monumentale)로 따라갔다. 하지만 그의 가장 훌륭한 기념비는 그의 명복을 기리기 위해 작곡된 주세페 베르디의 레퀴엠이었다. 현대에는 두 차례 구글 두들을 통해 그를 기렸다.

3. 작품 활동
만초니는 낭만주의 문학의 대표적인 작가 중 한 명이다. 그의 작품은 기독교 신앙과 이탈리아 통일에 대한 열망을 담고 있으며, 이탈리아 문학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역사상의 인물을 주제로 한 비극 <카르마뇰라 백작>(1820)과 외세의 압제 아래 시달린 이탈리아 국민의 고민을 그린 극작 <아데르키>(1822)를 발표했다. 또한 이탈리아 근대 소설의 선구가 된 <약혼자들>을 발표했다.
1833년 크리스마스에 부인 엔리케타가 세상을 떠나면서 만초니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후 시 창작 활동은 중단하고 언어 문제에 몰두하여 이탈리아어 통일에 관심을 쏟았다.
3. 1. 초기 작품
밀라노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 체사레 베카리아는 북부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지방의 계몽주의 운동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만초니는 외가 쪽의 성격을 많이 닮았다. 처녀작은 15세 때의 시작으로 신고전주의 영향을 받은 <자유의 승리>(1801)였다. 1805년 어머니가 애인과 파리로 나가자 그도 그 뒤를 좇았다. 어머니와 함께 파리의 지식계급 사이에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콘도르세 후작 부인의 살롱에 출입하였다. 그사이 중세사 연구가인 클로드 포리에르를 사귀어 오랫동안 친교관계를 가졌다. 만초니의 역사에 대한 관심은 포리에르의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1808년 엔리케타 블론텔과 결혼, 그해에 처와 어머니를 동반하고 다시 파리로 나갔다. 회의론·인도주의·감각론·칸트 철학 등을 섭렵하면서 또 파스칼, 기타 호교론자의 저작과 가톨릭으로 개종한 자기 처 엔리케타의 영향을 받아 피비린내 나는 전세기의 반동으로 19세기 초 파리를 온통 휘감은 가톨릭 신앙의 분위기 속에서 개종하였다. 그의 개종은 만초니의 인생 창작활동에 커다란 전기를 가져와 1812년 이후로는 그리스도교적 낙원이라는 이상에 자유·평등·박애의 정신을 결부시킨 작품이 발표되었다. 개종한 감격으로 교회의 대제일을 노래한 <성가>(1812-22)가 있다.
처음에는 고전적인 시를 지었으나, 곧 낭만주의로 전향하여 우아한 언어로 기독교 신자로서의 심정을 노래한 시 「성스러운 찬가(Inni sacri)」, 「부활(La resurrezione)」, 「오순절(Pentecoste)」 등을 지었다. 또한 나폴레옹을 애도한 시 「5월 5일(Il cinque maggio)」(1821년)은 괴테에 의해 독일어로 번역되었다.[1]
1823년 『낭만주의에 관하여』를 저술하여 새로운 문학 사조의 이론을 상세히 전개하였는데, 그 요지는 신화와 고전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을 배격하고, 수사법칙을 부정하며, 그 대신에 "의도는 유익해야 하고, 주제는 진실해야 하며, 방법은 흥미로워야 한다"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2]
3. 2. 낭만주의 전환과 주요 작품
만초니는 초기에는 신고전주의 영향을 받은 〈자유의 승리〉(1801)와 같은 고전적인 시를 지었으나, 곧 낭만주의로 전향했다.[9]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에는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그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작품으로는 우아한 언어로 기독교 신자로서의 심정을 노래한 성가 연작시인 <성가>(1812-22)가 있으며, 여기에는 「성스러운 찬가(Inni sacri)」, 「부활(La resurrezione)」, 「오순절(Pentecoste)」 등이 포함된다.[12] 또한 나폴레옹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시 〈5월 5일〉(Il Cinque maggio)(1821)은 괴테에 의해 독일어로 번역되기도 했다.만초니는 역사적 사건을 다룬 비극 작품도 남겼는데, 카르마뇰라 백작의 이야기를 다룬 〈카르마뇰라 백작〉(1820)과 샤를마뉴의 롬바르디아 지배 붕괴를 다룬 〈아데르키〉(1822)가 대표적이다. 이 작품들은 부분적으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지만, 무대극으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아데르키〉에는 당시 오스트리아 지배에 대한 은유적 언급이 담겨 있기도 하다.
만초니의 주요 작품은 역사 소설 〈약혼자〉(I promessi sposi) 3권(1825-1826)이다. 1827년에 출판된 초판은 13년 후인 1840년에 언어 수정판이 나왔다. 17세기 에스파냐 지배 하의 북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평범한 연인 렌초와 루치아가 겪는 시련과 신앙을 통한 극복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 근대 소설의 선구로 평가받으며, 토스카나 방언을 기반으로 하는 근대 이탈리아 표준어 완성에 기여했다.
만초니는 1823년 『낭만주의에 관하여』를 저술하여 새로운 문학 사조의 이론을 상세히 전개하였는데, 그 요지는 신화와 고전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을 배격하고, 수사법칙을 부정하며, "의도는 유익해야 하고, 주제는 진실해야 하며, 방법은 흥미로워야 한다"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3. 3. 언어 문제와 만년의 저술
만초니는 1821년에 소설 작업을 시작했지만,[13] 월터 스콧의 소설(주로 프랑스어 번역본)을 읽은 후인 1821년 4월 24일에 『페르모와 루치아(Fermo e Lucia)』의 실제 집필을 시작했다.[14] 역사적으로 베르나르디노 비스콘티(Bernardino Visconti)와 동일시되는 이노미나토(Innominato)의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소설 『약혼자(I promessi sposi)』의 첫 번째 원고가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여 1823년 9월에 완성되었다. 이 작품은 저자에 의해 깊이 수정되고 친구들에 의해 검토된 후 1825년~1827년에 걸쳐 1년에 한 권씩 출판되었으며, 곧바로 만초니를 문학적 명성의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이 작품은 일반적으로 그의 가장 위대한 작품이자 현대 이탈리아어의 전형으로 여겨진다. 1840년에는 역사적 에세이 『악명 높은 기둥의 역사(Storia della colonna infame)』(소설에서 중요한 17세기 밀라노의 역병에 대한 세부 사항)와 함께 수정된 형태로 재발행되었다. 그는 이탈리아어에 관한 소논문도 저술했다.1823년 『낭만주의에 관하여』를 저술하여 새로운 문학 사조의 이론을 상세히 전개하였는데, 그 요지는 신화와 고전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을 배격하고, 수사법칙을 부정하며, 그 대신에 "의도는 유익해야 하고, 주제는 진실해야 하며, 방법은 흥미로워야 한다"는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탈리아어 통일 문제에 관하여 많은 논문을 저술하여 이탈리아어 내에서 토스카나어의 우월성을 옹호하였고, 명작 『약혼자』를 통해 토스카나 방언을 기반으로 하는 근대 이탈리아 표준어를 완성했다고 할 수 있다.
4. 사상
알레산드로 만초니는 밀라노 귀족 가문 출신으로, 롬바르디아 지방 계몽주의 운동의 지도자였던 외할아버지 체사레 베카리아의 영향을 받았다. 15세 때 쓴 처녀작 <자유의 승리>(1801)는 신고전주의적 경향을 보인다.
1805년 어머니를 따라 파리로 간 만초니는 클로드 포리에르와 교류하며 역사관에 큰 영향을 받았다. 1808년 엔리케타 블론델과 결혼 후, 파스칼 등 호교론자들의 저작과 아내의 영향으로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는 그의 인생과 작품에 큰 전환점이 되어, 이후 기독교적 이상에 자유, 평등, 박애 정신을 결합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대표작은 <성가>(1812-22), 비극 <카르마뇰라 백작>(1820), <아데르키>(1822), 이탈리아 근대 소설의 선구로 평가받는 <약혼자들> 등이 있다.
1833년 아내 사후, 시인으로서의 활동을 중단하고 이탈리아어 통일 문제에 몰두했다.
4. 1. 자유주의와 가톨릭 신앙
밀라노 귀족 집안 출신인 알레산드로 만초니는 외할아버지 체사레 베카리아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1808년 엔리케타 블론델과 결혼한 후 파리에서 파스칼 등 호교론자들의 저작과 아내의 영향으로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였다.[15]만초니는 이탈리아 상원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이탈리아 통일을 지지했다.[15] 그의 정치 성향은 대체로 자유주의로 평가되며, 장-바티스트 세이, 애덤 스미스 등과 교류하며 경제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쌓았다.
그의 경제학적 소양은 소설 ''약혼자'' 12장에 묘사된 롬바르디아 기근 부분에서 잘 드러난다. 루이지 에이나우디는 이 장을 "지금까지 쓰인 최고의 정치 경제 논문 중 하나"라고 극찬했고,[8] 데이드레 N. 매클로스키는 "경제학 101 강의"라고 평가했다.[16]
4. 2. 이탈리아 통일 사상
밀라노 귀족 집안 출신인 알레산드로 만초니는 이탈리아 통일을 지지했으며, 이탈리아 상원 의원을 지냈다.[15] 그는 장-바티스트 세이, 애덤 스미스와 같은 경제학자들과 교류하며 경제 논문에 대한 많은 기록을 남겼다. 그의 경제학적 소양은 소설 ''약혼자''에서 롬바르디아의 기근을 다룬 12장에 잘 나타나 있다. 이탈리아 공화국 대통령을 지낸 루이지 에이나우디는 이 장을 "최고의 정치 경제 논문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8]5. 한국어 번역
6. 평가 및 유산
만초니는 1860년 빅토르 에마뉘엘 2세 국왕에 의해 종신 상원의원으로 임명되었다.[17] 1873년 4월 28일, 장남 피에르 루이지가 사망하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이미 그해 1월 6일 산 페델레 교회를 나서다 계단에서 머리를 부딪히는 사고를 당해 쇠약해진 상태였으며, 이로 인한 뇌수막염 합병증으로 5개월 만에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은 밀라노 대성당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으며,[18] 왕족과 고위 관리들이 포함된 거대한 행렬이 그를 밀라노의 몬주멘탈레 묘지로 운구했다. 주세페 베르디는 그의 명복을 기리기 위해 레퀴엠을 작곡했다. 현대에는 구글 두들을 통해 두 차례 그를 기렸다.
그의 저서 『가톨릭 윤리에 대한 관찰』은 비오 11세 교황이 기독교 교육에 관한 회칙 『그리스도교 교육』에서 다음과 같이 인용되었다.
> “20. 뛰어난 작가이자 동시에 심오하고 양심적인 사상가인 평신도가 이 기본적인 가톨릭 교리들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정확하게 표현했는지 주목할 만하다. '교회는 도덕성이 순전히, 즉 배타적으로 교회에 속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성이 전적으로 교회에 속한다고 말한다. 교회는 교회 밖에서, 그리고 교회의 가르침과는 별도로 인간이 어떤 도덕적 진리에도 도달할 수 없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오히려 교회는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 이러한 견해를 여러 차례 비난해 왔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설립되었고, 아버지께서 그분의 이름으로 성령을 보내주셨기 때문에, 교회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았고 결코 잃을 수 없는 도덕적 진리의 전부, 즉 모든 개별적인 도덕적 진리가 포함된 'omnem veritatem'을 소유한다고 말하며, 앞으로도 계속 말할 것이다. 여기에는 이성의 도움으로 인간이 배울 수 있는 진리와 계시의 일부를 이루거나 그로부터 추론될 수 있는 진리가 모두 포함된다.”[1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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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zoni
[14]
서적
Manzoni
http://opac.sbn.it/b[...]
Dall'Ogl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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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ssandro Manzo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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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Bourgeois Equality: How Ideas, Not Capital or Institutions, Enriched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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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Scheda senatore MANZONI Alessand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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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OF MANZO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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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Divini Illius Magistri (December 31, 1929) – PIUS XI
https://www.vatic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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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犯罪と刑罰
東京大学出版会
2011
관련 사건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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