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로 오브레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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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바로 오브레곤은 멕시코 혁명기의 군사 전략가이자 정치인으로, 1920년부터 1924년까지 멕시코 대통령을 역임했다. 그는 멕시코 혁명에 참여하여 셀라야 전투에서 승리하며 군사적 명성을 얻었고, 대통령 재임 기간에는 교육 개혁과 문화 발전을 장려했다. 또한, 미국과의 외교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노동 정책과 토지 개혁을 추진했다. 1928년 재선에 성공했지만, 취임 전에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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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로 오브레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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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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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알바로 오브레곤 살리도 |
로마자 표기 | Álvaro Obregón Salido |
출생일 | 1880년 2월 17일 |
출생지 | 나보호아, 소노라주, 시키시바 |
사망일 | 1928년 7월 17일 |
사망지 | 멕시코시티, 산앙헬 |
사망 원인 | 암살 |
배우자 | 마리아 타피아 (1888–1971) |
국적 | 멕시코 |
소속 군대 | 멕시코 육군 |
계급 | 장군 |
참전 전투 | 멕시코 혁명 |
직책 | |
직위 | 멕시코 대통령 |
대통령 임기 시작 (1차) | 1920년 12월 1일 |
대통령 임기 종료 (1차) | 1924년 11월 30일 |
대통령 임기 시작 (2차 당선) | 1928년 7월 1일 |
대통령 임기 종료 (2차 당선) | 1928년 7월 17일 |
이전 대통령 (1차) | 아돌포 데 라 우에르타 |
다음 대통령 (1차) |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카예스 |
다음 대통령 (2차 당선) | 에밀리오 포르테스 길 |
정당 | 노동당 |
노동당 의장 임기 시작 | 1918년 |
노동당 의장 임기 종료 | 1924년 |
노동당 동반 의장 |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카예스 |
노동당 다음 의장 | 루이스 N. 모로네스 |
국방부 장관 임기 시작 | 1916년 3월 13일 |
국방부 장관 임기 종료 | 1917년 5월 1일 |
이전 국방부 장관 | 이그나시오 L. 페스케이라 |
다음 국방부 장관 | 이그나시오 C. 엔리케스 |
우아타밤포 시장 임기 시작 | 1911년 |
우아타밤포 시장 임기 종료 | 1912년 |
이전 우아타밤포 시장 | 호세 티부르시오 오테로 |
다음 우아타밤포 시장 | 베냐민 알마다 |
2. 초기 생애 및 배경 (1880-1911)
알바로 오브레곤은 소노라 주 나보호아 시(Municipality of 나보호아)의 시키시바(Siquisiva)에서 프란시스코 오브레곤과 세노비아 살리도의 열여덟 번째 자녀로 태어났다.[4] 그의 아버지는 한때 상당한 부동산을 소유했으나, 멕시코 제2차 프랑스 개입(1862-1867) 기간 동안 막시밀리안 황제를 지지하여 1867년 자유주의 정부에 의해 재산이 몰수되었다.[5] 오브레곤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해인 1880년에 사망했고, 오브레곤은 어머니와 세 누나에 의해 매우 궁핍한 환경에서 자랐다.[6] 오브레곤 가문은 아시엔다를 소유하며 일부는 포르피리오 디아스 정권에서 정부 직책을 맡는 등 지역에서 유명했다.[7] 오브레곤은 이러한 친척들과의 관계에서 이익을 얻었지만, 고아였기 때문에 매우 가난한 친척이었고 성공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 쪽 사촌인 벤자민 G. 힐은 멕시코 혁명에서 중요한 동맹이 되었다.
오브레곤의 고향인 소노라는 미국과 국경을 접한 고립된 지역으로, 미국과의 교류가 빈번했으며 미국의 투자가 있었다.[8] 소노라의 수도로부터의 거리와 수도로 가는 직통 철도선의 부재는 19세기 후반의 발전과 멕시코 혁명에서의 역할에 영향을 미쳤다. 소노라는 미국과 직접적인 철도 연결이 있었고, 그 경제는 중앙 멕시코보다 미국과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소와 가죽, 특히 병아리콩을 미국에 수출했다. 이러한 가족 환경과 주의 경제 상황은 오브레곤이 젊은 시절에 병아리콩 농사를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방법이 되었다.[8]
어린 시절 오브레곤은 가족 농장에서 일하며 마요 원주민들과 친분을 맺고 그들의 언어를 배웠다. 그의 이중 언어 구사 능력은 훗날 그의 군사 및 정치 경력에 도움이 되었다. 그는 우아타밤포에서 그의 형 호세가 운영하는 학교에 다니며 초등 수준의 정규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활동적이고, 발명적이며, 무엇보다도 실용적"이었다.[9] 1898년, 그는 나볼라토(시날로아주)에 있는 외삼촌 소유의 제당에서 선반 작업자로 정규직을 얻기 전까지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6] 숙련된 노동자로서의 오브레곤의 경험은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그의 태도를 형성했고, "그에게 노동자들의 분노가 얼마나 강력한 정치적 도구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감각을 주었다."[10]
1903년 그는 레후히오 우레아와 결혼했고, 1904년 제당을 떠나 신발을 방문판매하고, 이후 소작농이 되었다. 1906년까지 그는 어머니 가족으로부터 대출을 받아 자신의 작은 농장을 사서 병아리콩을 재배했다. 1907년, 그의 아내와 두 자녀가 사망하여 두 명의 어린 자녀를 둔 홀아비가 되었고, 이후 세 명의 누나가 그들을 키웠다. 1909년, 오브레곤은 병아리콩 수확기를 발명하고 곧 현대식 조립 라인을 갖춘 이 수확기를 제조하는 회사를 설립하여 마요 계곡 전역의 병아리콩 농부들에게 성공적으로 판매했다.[6] 그는 그의 작물을 더 효율적으로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 철도 노선의 연장을 로비했다. 그는 또한 그의 농장의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관개 시설을 로비했다.[11] 오브레곤은 1911년 우아타밤포 마을의 시장으로 선출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2. 1. 가족 배경 및 유년 시절
알바로 오브레곤은 소노라 주 나보호아 시(Municipality of 나보호아)의 시키시바(Siquisiva)에서 프란시스코 오브레곤과 세노비아 살리도의 열여덟 번째 자녀로 태어났다.[4] 그의 아버지는 한때 상당한 부동산을 소유했으나, 멕시코 제2차 프랑스 개입(1862-1867) 기간 동안 막시밀리안 황제를 지지하여 1867년 자유주의 정부에 의해 재산이 몰수되었다.[5] 오브레곤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해인 1880년에 사망했고, 오브레곤은 어머니와 세 누나에 의해 매우 궁핍한 환경에서 자랐다.[6] 오브레곤 가문은 아시엔다를 소유하며 일부는 포르피리오 디아스 정권에서 정부 직책을 맡는 등 지역에서 유명했다.[7] 오브레곤은 이러한 친척들과의 관계에서 이익을 얻었지만, 고아였기 때문에 매우 가난한 친척이었고 성공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 쪽 사촌인 벤자민 G. 힐은 멕시코 혁명에서 중요한 동맹이 되었다.오브레곤의 고향인 소노라는 미국과 국경을 접한 고립된 지역으로, 미국과의 교류가 빈번했으며 미국의 투자가 있었다.[8] 소노라의 수도로부터의 거리와 수도로 가는 직통 철도선의 부재는 19세기 후반의 발전과 멕시코 혁명에서의 역할에 영향을 미쳤다. 소노라는 미국과 직접적인 철도 연결이 있었고, 그 경제는 중앙 멕시코보다 미국과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소와 가죽, 특히 병아리콩을 미국에 수출했다. 이러한 가족 환경과 주의 경제 상황은 오브레곤이 젊은 시절에 병아리콩 농사를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방법이 되었다.[8]
어린 시절 오브레곤은 가족 농장에서 일하며 마요 원주민들과 친분을 맺고 그들의 언어를 배웠다. 그의 이중 언어 구사 능력은 훗날 그의 군사 및 정치 경력에 도움이 되었다. 그는 우아타밤포에서 그의 형 호세가 운영하는 학교에 다니며 초등 수준의 정규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활동적이고, 발명적이며, 무엇보다도 실용적"이었다.[9] 1898년, 그는 나볼라토(시날로아주)에 있는 외삼촌 소유의 제당에서 선반 작업자로 정규직을 얻기 전까지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6] 숙련된 노동자로서의 오브레곤의 경험은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그의 태도를 형성했고, "그에게 노동자들의 분노가 얼마나 강력한 정치적 도구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감각을 주었다."[10]
1903년 그는 레후히오 우레아와 결혼했고, 1904년 제당을 떠나 신발을 방문판매하고, 이후 소작농이 되었다. 1906년까지 그는 어머니 가족으로부터 대출을 받아 자신의 작은 농장을 사서 병아리콩을 재배했다. 1907년, 그의 아내와 두 자녀가 사망하여 두 명의 어린 자녀를 둔 홀아비가 되었고, 이후 세 명의 누나가 그들을 키웠다. 1909년, 오브레곤은 병아리콩 수확기를 발명하고 곧 현대식 조립 라인을 갖춘 이 수확기를 제조하는 회사를 설립하여 마요 계곡 전역의 병아리콩 농부들에게 성공적으로 판매했다.[6] 그는 그의 작물을 더 효율적으로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 철도 노선의 연장을 로비했다. 그는 또한 그의 농장의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관개 시설을 로비했다.[11] 오브레곤은 1911년 우아타밤포 마을의 시장으로 선출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2. 2. 다양한 직업 경험
2. 3. 병아리콩 사업가로서의 성공
1909년, 오브레곤은 병아리콩 수확기를 발명하고 곧 현대식 조립 라인을 갖춘 이 수확기를 제조하는 회사를 설립했다.[6] 그는 마요 계곡 전역의 병아리콩 농가에 이 수확기를 성공적으로 판매했다.[6] 병아리콩이 수출 작물이었기 때문에 그는 수확물을 시장에 더 효율적으로 운송하기 위해 철도 노선 연장을 로비했다.[11] 또한 농장의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관개 시설을 로비하기도 했다.[11]3. 군사 경력 (1911-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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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소노라주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졸업 후 여러 직업을 경험했다. 1906년 병아리콩 신종을 발견하여 재배하고 수출하여 부를 얻었다. 1911년 주변의 권유로 정계에 진출하여 선거 결과 우아타밤포(Huatabampo) 시장에 취임했다. 1912년이 되자 프란시스코 마데로 대통령 정권에 불만을 품은 파스쿠알 오로스코(Pascual Orozco)가 반란을 일으켰고, 8월 소노라주에서 봉기한 오로스코파에 대해 오브레곤은 평소 지지 기반이었던 마야계 인디오로 구성된 자경단을 지휘하여 이를 진압했다. 1913년 2월 비크토리아노 우에르타의 쿠데타로 소노라주 의회는 반쿠데타를 선언하고 오브레곤을 주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우에르타의 쿠데타에 대해 코아우일라주 주지사 베누스티아노 카란사가 반혁명 세력 타도와 헌법 수호를 내걸고 대항했다. 카란사를 제1총통으로 하는 "헌법 수호군"에 오브레곤이 참가했고, 카란사는 10월 24일 소노라주에서 임시 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전황은 헌법 수호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 1914년 3월에는 국토의 4분의 3을 장악했다. 7월 14일 우에르타는 물러났고 스페인으로 망명했다. 카란사는 잠정 대통령에 취임하고, 8월 15일 오브레곤이 지휘하는 부대와 함께 멕시코시티에 입성했지만, 기존 체제를 유지하려는 구지배층과의 타협을 시도한 카란사에 대해 혁명 세력은 반발했다.
판초 비야가 이끄는 북부군은 12월에 국토를 장악했고, 오브레곤은 카란사를 지지하며 베라크루스를 거점으로 비야와 에밀리아노 사파타에 대한 반격을 가했다. 오브레곤군은 잘 통제되어 있었고 국군 대부분을 흡수했으며, 1915년 1월 사파타파는 패주했고 멕시코시티가 오브레곤군의 손에 떨어졌다. 오브레곤군은 1915년 4월 과나후아토주 셀라야에서 비야군과 격돌했고, 참호와 기관총을 결합한 신전법을 사용한 오브레곤군에 대해 기병 돌격을 반복한 비야군은 대패했으며, 비야군은 치와와주로 패주하여 게릴라전을 벌였다. 그러나 그 사이 비야군의 포격으로 오브레곤은 오른팔이 절단되는 중상을 입었다. 7월에 전토를 거의 평정한 카란사는 대통령에 취임했고, 오브레곤은 국방장관에 임명되었다.
3. 1. 멕시코 혁명 참여
알바로 오브레곤은 1908년부터 1909년까지 프란시스코 이. 마데로가 주도한 포르피리오 디아스 대통령 반대 운동에 처음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12] 1910년 부정 선거 이후 마데로가 봉기를 촉구했을 때도, 두 아이를 둔 홀아비로서 농장 운영에 전념하던 오브레곤은 즉각적인 참여를 망설였다.[12]그러나 1911년 마데로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오브레곤은 그의 지지자가 되었다. 1912년 3월, 마데로를 위해 싸웠던 파스쿠알 오로스코 장군이 마데로에 반기를 들자,[12] 오브레곤은 오로스코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소노라의 제4 비정규 대대에 자원 입대했다.[13] 이 부대는 빅토리아노 우에르타가 지휘하는 연방군을 지원했다.[13] 오브레곤은 상관의 명령을 어기면서도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여 적을 함정에 빠뜨리고 기습 공격을 가하는 등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다.[13]
오브레곤은 빠른 속도로 승진하여 1912년 12월 대령 계급에 올랐으며, 오로스코를 미국으로 도피시킨 후 사임했다.[15]
3. 2. 우에르타 정권에 대한 투쟁 (1913-1914)
소노라주 정부는 빅토리아노 우에르타 정권을 인정하지 않고 반란 상태에 들어간 코아우일라주 정부와 접촉하고 있었다. 아돌포 데 라 우에르타가 이끄는 소노라 주 대표단은 몬클로바로 이동하여 코아우일라 주지사 베누스티아노 카란사를 만났다. 소노라 주 정부는 카란사의 과달루페 계획에 서명했고, 이에 따라 카란사는 새로 선포된 헌법군의 "최고 사령관(primer jefe)"이 되었다.[15] 1913년 9월 30일, 카란사는 오브레곤을 북서부 헌법군 사령관으로 임명했으며, 그의 관할권은 소노라, 시날로아주, 두랑고주, 치와와주, 바하칼리포르니아주를 포함했다.[15]left 참모들, ]]
1913년 11월, 오브레곤의 군대는 쿨리아칸을 점령하여 오브레곤의 지휘 아래 있는 멕시코 북서부 지역 전체에서 헌법군의 우위를 확보했다.[15] 오브레곤과 다른 소노라 주 출신 인물들은 카란사의 전쟁장관 펠리페 앙헬레스를 깊이 의심했는데, 그들은 앙헬레스가 옛 디아스 정권의 잔재라고 여겼다. 소노라 주 출신 인물들(오브레곤의 북서부 승리 이후 카란사 연합에서 가장 강력한 집단)의 촉구에 따라, 카란사는 앙헬레스를 전쟁 차관의 직책으로 강등시켰다.[16]

강등에도 불구하고, 앙헬레스는 멕시코시티 남쪽으로의 3개의 전선 공격이라는 반란의 대략적인 전략을 세웠다. (1) 오브레곤은 서쪽 철도를 따라 남쪽으로 진격하고, (2) 판초 비야는 중앙 철도를 따라 남쪽으로 진격하고, (3) 파블로 곤살레스 가르사는 동쪽 철도를 따라 남쪽으로 진격할 것이다.[17]
오브레곤은 1914년 4월 남쪽으로의 행군을 시작했다. 판초 비야가 맹렬한 기병대 돌격을 선호했던 반면, 오브레곤은 다시 한번 신중했다. 비야는 곧 카란사와 불화를 겪었고, 1914년 5월 카란사는 오브레곤에게 비야의 군대보다 먼저 멕시코시티에 도착할 수 있도록 남쪽 원정의 속도를 높이라고 지시했다. 오브레곤은 그의 군대를 시날로아주 토폴로밤포에서 마사틀란을 봉쇄하기 위해 이동시켰고, 그 다음 테픽으로 이동하여 할리스코주 과달라하라에서 콜리마주로 가는 철도를 차단하여 이 두 항구를 고립시켰다.[18]
7월 초, 오브레곤은 할리스코주 오렌다인으로 남쪽으로 이동하여 그의 군대는 연방군을 패배시켰고 8000명의 사망자를 냈으며, 우에르타 정권이 패배했음을 명확히 했다. 오브레곤은 소장으로 진급했다. 그는 남쪽으로의 행군을 계속했다. 멕시코주 테올로유칸에 오브레곤이 도착하자 우에르타가 패배했음이 명백해졌고, 8월 11일 자동차의 머드가드에서 오브레곤은 우에르타 정권을 종식시킨 조약에 서명했다. 1914년 8월 16일, 오브레곤과 그의 군대 18,000명은 멕시코시티에 개선 입성했다. 그는 8월 20일에 멕시코시티에 개선 입성한 카란사와 곧 합류했다.[18]
멕시코시티에서 오브레곤은 자신의 적들에게 복수하기 시작했다. 그는 멕시코 가톨릭 교회가 우에르타 정권을 지원했다고 믿었고, 따라서 인민 지원 혁명 평의회에 지불할 목적으로 교회에 50만 페소의 벌금을 부과했다.[19] 그는 또한 부유한 사람들이 우에르타를 지지했다고 믿었고, 따라서 자본(economics), 부동산, 담보 대출, 물, 포장 도로, 하수도, 마차, 자동차, 자전거 등에 특별세를 부과했다.[20] 외국인에 대해서도 특별 조치가 취해졌다. 그중 일부는 의도적으로 굴욕적이었다. 예를 들어, 그는 외국 사업가들에게 멕시코시티 거리를 청소하도록 강요했다.[21]
3. 3. 판초 비야, 사파타와의 관계 및 갈등 (1914-1915)
카란사와 빌라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던 1914년, 오브레곤은 혁명 연합 유지를 위해 중재 노력을 펼쳤다.[21] 1914년 7월 8일, 양측은 토레온 협정을 체결하여 우에르타 세력 패배 후 혁명 장군들이 모여 국가의 미래를 결정하기로 합의했다.[21] 그러나 카란사는 빌라의 복종 거부, 특히 사카테카스 점령 금지 명령 무시[21]에 분노하여 8월 빌라의 멕시코시티 진격을 불허했다. 오브레곤은 빌라와 카란사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 1914년 8월과 9월 두 차례 치와와를 방문했다.[21] 이 과정에서 오브레곤은 카란사가 대통령직을 유지하기 위해 헌법을 위반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빌라와 함께 토지 개혁, 민간 사법부 설립, 군인의 정치 참여 금지 등 개혁 조항에 합의했다.[22] 그러나 카란사는 이를 거부했다.[22]1914년 10월 5일, 아과스칼리엔테스 협약이 개최되었으나, 카란시스타와 비야 지지자들 간의 의견 대립으로 결렬되었다.[23] 오브레곤은 중립을 유지하려 노력했으나,[23] 결국 카란사 편에 서서 협약을 떠났다.[23]
오브레곤은 카란사를 위해 싸우면서, 1915년 2월 세계 노동자의 집(카사 델 오브레로 문디알)과 협정을 맺어 '적색 대대'를 구성하여 비야와 사파타에 맞서 싸웠다.[23]
1915년, 오브레곤은 셀라야 전투에서 빌라 군대와 네 차례 격돌했다.[25] 오브레곤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참호전과 기관총 전술을 도입하여 빌라에게 승리했다.[26] 그러나 이 과정에서 오브레곤은 오른팔을 잃었다.[25] 그는 거의 죽을 뻔했고 자살을 시도했지만, 부관이 권총에 탄약을 넣지 않아 실패했다.[27][28] 오브레곤은 잃어버린 팔을 찾는 데 대한 익살스러운 이야기를 지어냈으며,[27][28] 이후 그의 팔은 봄빌라 공원 (Parque de la Bombilla)에 전시되었다.[29] 그는 전투에서 팔을 잃은 것을 보여주는 맞춤형 의복을 착용하여 멕시코를 위한 희생을 상징했다.
4. 초기 정치 경력 (1915-1920)
1915년 5월, 베누스티아노 카란사는 헌법 제정 의회가 소집될 때까지 멕시코를 통치할 "헌법 전(Preconstitutional) 정부"의 수장임을 선포했다.[26] 알바로 오브레곤은 이미 1914년에 카란사에게 임시 대통령직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지만, 카란사는 대통령 선거 출마를 할 수 없게 되므로 거절했다. 오브레곤은 빌라와 사파타와 손을 잡는 대신 카란사에 대한 충성을 선택했고, 카란사는 새로운 내각에서 오브레곤을 국방장관으로 임명했다.[26] 표면적으로는 동맹이었지만, 카란사와 오브레곤의 관계는 긴장 상태였지만, 이 시점에서 공개적으로 결렬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오브레곤은 노동자와 농민 운동, 그리고 고위 정치인들과 힘을 키울 기회를 얻었다.[30] 국방장관으로서 오브레곤은 멕시코 군대를 철저히 현대화하고 전문화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참모 대학과 군 의학교를 설립했다. 또한 항공부와 조종사 양성 학교를 설립했다. 군수품 공장은 군대의 직접 통제하에 놓였다.[26]
1916년 9월, 베누스티아노 카란사는 1857년 멕시코 헌법의 자유주의적 원칙을 존중하면서도 몇몇 결점을 제거하겠다는 선언과 함께 케레타로에서 헌법 제정 의회를 소집했다.[26][31][32] 그러나 헌법 제정 의회에는 카란사의 자유주의에 가까운 보수파와 중도파 85명만이 참석했고, 진보적인 대표 132명은 토지 개혁과 노동자 권리가 헌법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26][31][32]
알바로 오브레곤은 대표는 아니었지만, 진보파의 요청으로 카란사와 결별하고 급진파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안드레스 몰리나 엔리케스를 만나 그들의 핵심 문제를 모두 옹호했다.[26][31][32] 특히 오브레곤은 카란사와 달리 제27조가 규정한 토지 개혁을 지지했으며, 카란사가 반대한 강력한 반교권적인 제3조와 제130조를 지지했다.[26][31][32]
1917년 헌법은 신속하게 작성되고 비준되었다.[33] 오브레곤은 새 헌법에 충성을 맹세한 직후 전쟁 장관직에서 사임하고 후아타밤포로 은퇴하여 병아리콩 농부로서의 삶을 재개했다.[33]
1919년 초, 오브레곤은 1920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정했고, 헌법 자유당(Partido Liberal Constitucionalista, PLC)의 후보로 출마하여 혁명적인 장군 대부분을 통합했다.[34] 오브레곤은 멕시코 지역 노동자 연맹과 합의를 맺고, 당선되면 노동부를 설립하고 노동자 친화적인 산업통상부 장관을 임명하며 새로운 노동법을 제정할 것을 약속했다.[35]
카란사는 오브레곤보다 훨씬 보수적이었고,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1917년 헌법의 혁명적인 요소들을 시행하지 않았다.[37] 카란사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오브레곤 대신 이냐시오 보닐라스를 지지했다.[37] 카란사의 지시에 따라 상원은 오브레곤의 군 계급을 박탈했고, 이는 오브레곤의 인기를 더욱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37] 카란사는 오브레곤이 카란사 정권에 대한 무장 봉기를 계획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음모를 꾸몄고, 오브레곤은 게레로로 도망쳐야 했다.[37]
1920년 4월 20일, 오브레곤은 카란사가 보닐라스의 대통령 후보 지지를 위해 공금을 사용했다고 비난하는 선언을 발표했고, 아돌포 데 라 우에르타에 대한 충성을 선언했다.[39] 4월 23일, 소노라 주민들은 아구아 프리에타 계획을 발표하여 대통령에 대한 군사 반란을 일으켰다.[39] 오브레곤의 군대는 멕시코시티를 점령했고, 카란사는 푸에블라 주에서 로돌포 에레로 장군이 이끄는 매복 공격으로 사망했다.[40]
4. 1. 카란사 정부의 국방장관 (1915-1916)
1915년 5월, 베누스티아노 카란사는 헌법 제정 의회가 소집될 때까지 멕시코를 통치할 "헌법 전(Preconstitutional) 정부"의 수장임을 선포했다. 알바로 오브레곤은 이미 1914년에 카란사에게 임시 대통령직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지만, 카란사는 대통령 선거 출마를 할 수 없게 되므로 거절했다. 오브레곤은 빌라와 사파타와 손을 잡는 대신 카란사에 대한 충성을 선택했고, 카란사는 새로운 내각에서 오브레곤을 국방장관으로 임명했다.[26] 표면적으로는 동맹이었지만, 카란사와 오브레곤의 관계는 긴장 상태였지만, 이 시점에서 공개적으로 결렬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오브레곤은 노동자와 농민 운동, 그리고 고위 정치인들과 힘을 키울 기회를 얻었다.[30]국방장관으로서 오브레곤은 멕시코 군대를 철저히 현대화하고 전문화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참모 대학과 군 의학교를 설립했다. 또한 항공부와 조종사 양성 학교를 설립했다. 군수품 공장은 군대의 직접 통제하에 놓였다.[26]
4. 2. 1917년 헌법 제정과 카란사와의 갈등
1916년 9월, 베누스티아노 카란사는 1857년 멕시코 헌법의 자유주의적 원칙을 존중하면서도 몇몇 결점을 제거하겠다는 선언과 함께 케레타로에서 헌법 제정 의회를 소집했다.[26][31][32] 그러나 헌법 제정 의회에는 카란사의 자유주의에 가까운 보수파와 중도파 85명만이 참석했고, 진보적인 대표 132명은 토지 개혁과 노동자 권리가 헌법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26][31][32]알바로 오브레곤은 대표는 아니었지만, 진보파의 요청으로 카란사와 결별하고 급진파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안드레스 몰리나 엔리케스를 만나 그들의 핵심 문제를 모두 옹호했다.[26][31][32] 특히 오브레곤은 카란사와 달리 제27조가 규정한 토지 개혁을 지지했으며, 카란사가 반대한 강력한 반교권적인 제3조와 제130조를 지지했다.[26][31][32]
1917년 헌법은 신속하게 작성되고 비준되었다.[33] 오브레곤은 새 헌법에 충성을 맹세한 직후 전쟁 장관직에서 사임하고 후아타밤포로 은퇴하여 병아리콩 농부로서의 삶을 재개했다.[33]
1919년 초, 오브레곤은 1920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정했고, 헌법 자유당(Partido Liberal Constitucionalista, PLC)의 후보로 출마하여 혁명적인 장군 대부분을 통합했다.[34] 오브레곤은 멕시코 지역 노동자 연맹과 합의를 맺고, 당선되면 노동부를 설립하고 노동자 친화적인 산업통상부 장관을 임명하며 새로운 노동법을 제정할 것을 약속했다.[35]
카란사는 오브레곤보다 훨씬 보수적이었고,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1917년 헌법의 혁명적인 요소들을 시행하지 않았다.[37] 카란사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오브레곤 대신 이냐시오 보닐라스를 지지했다.[37] 카란사의 지시에 따라 상원은 오브레곤의 군 계급을 박탈했고, 이는 오브레곤의 인기를 더욱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37] 카란사는 오브레곤이 카란사 정권에 대한 무장 봉기를 계획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음모를 꾸몄고, 오브레곤은 게레로로 도망쳐야 했다.[37]
1920년 4월 20일, 오브레곤은 카란사가 보닐라스의 대통령 후보 지지를 위해 공금을 사용했다고 비난하는 선언을 발표했고, 아돌포 데 라 우에르타에 대한 충성을 선언했다.[39] 4월 23일, 소노라 주민들은 아구아 프리에타 계획을 발표하여 대통령에 대한 군사 반란을 일으켰다.[39] 오브레곤의 군대는 멕시코시티를 점령했고, 카란사는 푸에블라 주에서 로돌포 에레로 장군이 이끄는 매복 공격으로 사망했다.[40]
4. 3. 정계 은퇴와 재계 복귀 (1917-1919)
4. 4. 1920년 대선 출마와 카란사 축출
1919년 초, 알바로 오브레곤은 1920년에 치러질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정했다.[34] 베누스티아노 카란사는 1920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발표했지만, 오브레곤을 지지하는 대신 무명의 외교관인 이냐시오 보닐라스를 지지했다.[34] 오브레곤은 1919년 6월 자신의 출마를 발표했다. 그는 혁명적인 장군 대부분을 통합한 정당인 '헌법 자유당'(Partido Liberal Constitucionalista, PLC)의 후보로 출마했다.[34] 오브레곤의 사촌이자 동지인 벤하민 힐 장군은 당의 창립 멤버였다.[34] 그는 멕시코시티에서 오브레곤을 지지했고 사파티스타 장군 헤노베보 데 라 오에게 연락했다.[34]오브레곤은 루이스 나폴레옹 모로네스와 멕시코 지역 노동자 연맹과 합의를 맺고, 만약 당선되면 노동부를 설립하고 노동자 친화적인 산업통상부 장관을 임명하고 새로운 노동법을 제정할 것을 약속했다.[35] 오브레곤은 1919년 11월 본격적으로 선거운동을 시작했다.[36]
카란사는 오브레곤보다 훨씬 보수적이었고,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1917년 헌법의 혁명적인 요소들을 시행하지 않았다.[37] 카란사는 권력을 자신의 손에 집중시키려고 했다.[37] 오브레곤은 카란사가 자신이 1920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도록 권유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그에게서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37] 오브레곤은 전보로 카란사에게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것이라고 알렸다.[37] 오브레곤의 공식 발표는 널리 배포되었고, 카란사는 오브레곤이 "카란사 정권의 악행"을 비난하는 것을 보았다.[37] 오브레곤의 거부로 인해 화가 난 카란사는 소노라 주에서 대통령 후보를 찾아 미국 주재 멕시코 대사인 이냐시오 보닐라스를 선택했다.[37] 오브레곤은 그의 동향인이 카란사의 선택된 후보라는 말을 듣고 "훌륭한 사람입니다. 제 동향인 보닐라스. 진지하고 정직하며 성실한 사람입니다. 세상은 훌륭한 회계사를 잃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38]
카란사의 지시에 따라 상원은 오브레곤의 군 계급을 박탈했는데, 이는 오브레곤의 인기를 더욱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39] 그러자 카란사는 한 하급 장교가 오브레곤이 카란사 정권에 대한 무장 봉기를 계획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음모를 꾸몄다.[39] 오브레곤은 철도원으로 변장하고 게레로 주로 도망쳐야 했다.[39]
1920년 4월 20일, 오브레곤은 칠판싱고에서 카란사가 보닐라스의 대통령 후보 지지를 위해 공금을 사용했다고 비난하는 선언을 발표했다.[39] 그는 카란사 정권에 반대하는 혁명에서 소노라 주 주지사인 아돌포 데 라 우에르타에 대한 충성을 선언했다.[39]
4월 23일, 소노라 주민들은 아구아 프리에타 계획을 발표하여 대통령에 대한 군사 반란을 일으켰다.[40] 오브레곤의 소노라군은 힐 장군의 군대와 길다르도 마가냐와 헤노베보 데 라 오가 이끄는 사파티스타에 의해 증강되었다.[40]
반란은 성공적이었고, 1920년 5월 10일 오브레곤의 군대가 멕시코시티를 점령한 후 카란사는 축출되었다.[40] 1920년 5월 20일, 카란사는 멕시코시티에서 베라크루스로 말을 타고 도망치던 중 푸에블라 주에서 로돌포 에레로 장군이 이끄는 매복 공격으로 사망했다.[40]
1920년 6월 1일부터 12월 1일까지 6개월 동안 아돌포 데 라 우에르타가 선거가 치러질 때까지 멕시코의 임시 대통령을 역임했다.[41] 오브레곤이 승리자로 선포되자 데 라 우에르타는 사임하고 새로운 정부에서 재무장관직을 맡았다.
5. 멕시코 대통령 재임 (1920-1924)
호세 바스콘셀로스는 알바로 오브레곤 대통령에 의해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전국적으로 새로운 학교를 건설하는 데 힘썼다.[43] 약 1,000개의 농촌 학교와 2,000개의 공공 도서관이 건립되었다.[44]
바스콘셀로스는 멕시코 역사와 멕시코 혁명을 보여주는 예술적 발전을 장려했다.[45] 오브레곤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디에고 리베라,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 로베르토 몬테네그로 등의 예술가들은 멕시코 전역의 공공 건물 벽에 멕시코 혁명의 정신을 표현하는 벽화를 제작하면서 멕시코 벽화 운동이 시작되었다.[46]
오브레곤은 1921년 멕시코 독립 100주년 기념 행사를 통해 혁명에 대한 대중의 인식과 역사 속에서의 혁명의 위치를 형성하고자 했다.[47] 미구엘 이달고의 봉기 시작을 기념하며 디아스 정권이 1910년에 이미 기념 행사를 치렀지만, 1921년은 오브레곤 정부가 독립과 혁명에 대한 역사적 기억을 형성할 기회였다.[47] 10년간의 혁명 기간 동안의 폭력 이후, 100주년 기념 행사는 멕시코인들에게 역사와 정체성을 되돌아보고 평화 시대에 휴식을 취할 기회를 제공했다. 오브레곤은 100주년을 통해 혁명적 이니셔티브가 역사적 뿌리를 가지고 있으며, 독립과 마찬가지로 혁명이 멕시코인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을 강조했다.[48]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정부에 대한 대중의 지지, 그리고 혁명 자체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려고 했다."[49] 1910년 100주년 기념 행사와 달리 1921년 기념 행사에는 낙성식을 위한 기념비적인 건축물이 없었다.[50]
오브레곤은 1919년 8월 루이스 나폴레온 모로네스(Luis Napoleón Morones)와 멕시코 지역 노동자 연맹(Regional Confederation of Mexican Workers, CROM)과의 합의를 유지하고 노동부를 신설하고 친노동적인 산업통상부 장관을 임명했으며 새로운 노동법을 제정했다.[51]
모로네스와 CROM은 1920년대 초반에 점점 더 강력해졌고 오브레곤이 그들의 세력 확장에 반대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모로네스는 경쟁자들에게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1923년에는 멕시코 노동자 총연맹을 거의 소멸시켰다.[51]
CROM의 성공이 반드시 멕시코 모든 노동자의 성공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고, 멕시코 헌법 제123조는 산발적으로만 시행되었다. CROM의 파업권은 인정되었지만, CROM이 아닌 단체의 파업은 경찰이나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멕시코 노동자 중 일요일 유급 휴일을 얻거나 하루 8시간 근무를 제한할 수 있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51]
오브레곤 시대의 토지 개혁은 베누스티아노 카란사 시대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오브레곤은 헌법에 명시된 토지 재분배 조항을 시행하여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총 921,627헥타르의 토지를 분배했다.[51] 그러나 오브레곤은 소노라 지역의 성공적인 상업용 병아리콩 농부였으며, "사회주의나 토지 개혁을 믿지 않았고"[52] 프란시스코 마데로와 카란사와 마찬가지로 "급진적인 토지 개혁은 멕시코 경제를 파괴하고 자급자족 농업으로의 회귀를 초래할 수 있다"는 데 동의했다.[52]
멕시코의 로마 가톨릭교회 지도자들과 신자들은 1917년 헌법, 특히 학교에서 종교 교육을 금지한 제3조와 극단적인 정교분리를 채택한 제130조를 강하게 비판했다.[51]
알바로 오브레곤은 가톨릭교회를 의심했지만, 후임자인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칼레스만큼 반교회적이지는 않았다. 오브레곤은 1922년 교황 비오 11세의 선출을 축하했고, 교황에게 보낸 비밀 서한에서 가톨릭교회와 멕시코 혁명의 목표의 "상호 보완성"을 강조했다.[51] 칼레스의 정책은 크리스테로 전쟁(1926~1929년)으로 이어졌다.
오브레곤의 온건한 접근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가톨릭 신자들과 멕시코 혁명 지지자들 사이의 충돌이 시작되었다. 일부 주교들은 토지 개혁과 세속적인 노동조합으로의 노동자 조직에 적극적으로 반대했다.[53] 비오 11세의 1922년 회칙인 ''Ubi arcano Dei consilio''에 따라 멕시코에서 가톨릭 행동 운동이 시작되었고, 젊은 멕시코 가톨릭 행동 지지자들은 곧 CROM 회원들과 격렬한 갈등을 겪게 되었다.[53]
1923년에는 멕시코 교황대사인 에르네스토 필리피가 교회 밖에서 종교 의식을 거행하는 것이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야외 종교 의식을 거행하여, 정부가 헌법 제33조를 적용하여 필리피를 멕시코에서 추방하는 외교적 사건이 발생했다.[54]
알바로 오브레곤 대통령의 최우선 과제 중 하나는 멕시코-미국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미국으로부터 외교 승인을 얻는 것이었다.[55] 오브레곤은 멕시코 헌법 제27조를 폐지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거부했지만, 1923년 8월 부카렐리 조약을 체결하여 미국의 외교 승인을 얻기 위해 일부 양보했다.[55] 멕시코 대법원이 텍사스 오일이 제기한 소송에서 제27조가 소급 적용되지 않는다고 판결한 것은 조약 체결에 도움이 되었다.[55] 멕시코-미국 일반 청구 위원회는 오브레곤이 미국 및 기타 외국 정부와의 문제를 해결한 또 다른 중요한 영역이었다.[56] 아돌포 데 라 우에르타 재무장관은 멕시코가 국제 은행가들에게 145만 1천 달러의 부채를 인정하는 계약에 서명했다. 부카렐리 회담에서 오브레곤은 멕시코가 외국 석유 회사를 몰수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요구에 동의했고, 그 대가로 미국은 오브레곤 정부를 승인했다. 아돌포 데 라 우에르타를 포함한 많은 멕시코인들은 부카렐리 회담에서의 오브레곤의 행동을 매국노(''entreguista'')라고 비난했다.[54]
1923년, 알바로 오브레곤은 자신이 출마할 수 없었던 1924년 대선에서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칼레스를 대통령 후보로 지지했다.[57] 1920년 오브레곤 당선 후 임시 대통령을 역임했던 재무장관 아돌포 데 라 우에르타는 오브레곤과 칼레스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57] 드 라 우에르타는 오브레곤이 베누스티아노 카란사의 실수를 반복하여 자신의 후보를 국가에 강요하고 있다고 믿고 협동조합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아들였다.[57]
군대의 절반 이상이 드 라 우에르타의 반란에 가담했고, 오브레곤의 전 동지들 중 많은 수가 그에게 등을 돌렸다. 반군은 베라크루스와 할리스코에 집결했다.[57] 할리스코주 오코틀란에서 벌어진 결정적인 전투에서 오브레곤의 군대는 반군을 궤멸시켰다.[57] 1923년 부카렐리 조약 체결 후 미국의 외교 승인은 오브레곤의 반란 진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국은 오브레곤에게 무기를 공급했고, 할리스코의 반군을 폭격하기 위해 17대의 미군 항공기를 파견했다.[2] 오브레곤은 살바도르 알바라도 장군과 포르투나토 마이코테를 포함한 많은 전 동지를 추적하여 처형했다.[58][59] 드 라 우에르타는 망명길에 올랐다. 반란 진압 후 칼레스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오브레곤은 물러났다.
5. 1. 교육 개혁과 문화 발전
호세 바스콘셀로스는 알바로 오브레곤 대통령에 의해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전국적으로 새로운 학교를 건설하는 데 힘썼다.[43] 약 1,000개의 농촌 학교와 2,000개의 공공 도서관이 건립되었다.[44]바스콘셀로스는 멕시코 역사와 멕시코 혁명을 보여주는 예술적 발전을 장려했다.[45] 오브레곤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디에고 리베라,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 로베르토 몬테네그로 등의 예술가들은 멕시코 전역의 공공 건물 벽에 멕시코 혁명의 정신을 표현하는 벽화를 제작하면서 멕시코 벽화 운동이 시작되었다.[46]
오브레곤은 1921년 멕시코 독립 100주년 기념 행사를 통해 혁명에 대한 대중의 인식과 역사 속에서의 혁명의 위치를 형성하고자 했다.[47] 미구엘 이달고의 봉기 시작을 기념하며 디아스 정권이 1910년에 이미 기념 행사를 치렀지만, 1921년은 오브레곤 정부가 독립과 혁명에 대한 역사적 기억을 형성할 기회였다.[47] 10년간의 혁명 기간 동안의 폭력 이후, 100주년 기념 행사는 멕시코인들에게 역사와 정체성을 되돌아보고 평화 시대에 휴식을 취할 기회를 제공했다. 오브레곤은 100주년을 통해 혁명적 이니셔티브가 역사적 뿌리를 가지고 있으며, 독립과 마찬가지로 혁명이 멕시코인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을 강조했다.[48]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정부에 대한 대중의 지지, 그리고 혁명 자체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려고 했다."[49] 1910년 100주년 기념 행사와 달리 1921년 기념 행사에는 낙성식을 위한 기념비적인 건축물이 없었다.[50]
5. 2. 노동 정책
오브레곤은 1919년 8월 루이스 나폴레온 모로네스(Luis Napoleón Morones)와 멕시코 지역 노동자 연맹(Regional Confederation of Mexican Workers, CROM)과의 합의를 유지하고 노동부를 신설하고 친노동적인 산업통상부 장관을 임명했으며 새로운 노동법을 제정했다.[51]모로네스와 CROM은 1920년대 초반에 점점 더 강력해졌고 오브레곤이 그들의 세력 확장에 반대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모로네스는 경쟁자들에게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1923년에는 멕시코 노동자 총연맹을 거의 소멸시켰다.[51]
CROM의 성공이 반드시 멕시코 모든 노동자의 성공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고, 멕시코 헌법 제123조는 산발적으로만 시행되었다. CROM의 파업권은 인정되었지만, CROM이 아닌 단체의 파업은 경찰이나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멕시코 노동자 중 일요일 유급 휴일을 얻거나 하루 8시간 근무를 제한할 수 있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51]
5. 3. 토지 개혁
오브레곤 시대의 토지 개혁은 베누스티아노 카란사 시대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오브레곤은 헌법에 명시된 토지 재분배 조항을 시행하여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총 921,627헥타르의 토지를 분배했다.[51] 그러나 오브레곤은 소노라 지역의 성공적인 상업용 병아리콩 농부였으며, "사회주의나 토지 개혁을 믿지 않았고"[52] 프란시스코 마데로와 카란사와 마찬가지로 "급진적인 토지 개혁은 멕시코 경제를 파괴하고 자급자족 농업으로의 회귀를 초래할 수 있다"는 데 동의했다.[52]5. 4. 종교 정책
멕시코의 로마 가톨릭교회 지도자들과 신자들은 1917년 헌법, 특히 학교에서 종교 교육을 금지한 제3조와 극단적인 정교분리를 채택한 제130조를 강하게 비판했다.[51]알바로 오브레곤은 가톨릭교회를 의심했지만, 후임자인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칼레스만큼 반교회적이지는 않았다. 오브레곤은 1922년 교황 비오 11세의 선출을 축하했고, 교황에게 보낸 비밀 서한에서 가톨릭교회와 멕시코 혁명의 목표의 "상호 보완성"을 강조했다.[51] 칼레스의 정책은 크리스테로 전쟁(1926~1929년)으로 이어졌다.
오브레곤의 온건한 접근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가톨릭 신자들과 멕시코 혁명 지지자들 사이의 충돌이 시작되었다. 일부 주교들은 토지 개혁과 세속적인 노동조합으로의 노동자 조직에 적극적으로 반대했다.[53] 비오 11세의 1922년 회칙인 ''Ubi arcano Dei consilio''에 따라 멕시코에서 가톨릭 행동 운동이 시작되었고, 젊은 멕시코 가톨릭 행동 지지자들은 곧 CROM 회원들과 격렬한 갈등을 겪게 되었다.[53]
1923년에는 멕시코 교황대사인 에르네스토 필리피가 교회 밖에서 종교 의식을 거행하는 것이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야외 종교 의식을 거행하여, 정부가 헌법 제33조를 적용하여 필리피를 멕시코에서 추방하는 외교적 사건이 발생했다.[54]
5. 5. 미국과의 관계
알바로 오브레곤 대통령의 최우선 과제 중 하나는 멕시코-미국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미국으로부터 외교 승인을 얻는 것이었다.[55] 오브레곤은 멕시코 헌법 제27조를 폐지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거부했지만, 1923년 8월 부카렐리 조약을 체결하여 미국의 외교 승인을 얻기 위해 일부 양보했다.[55] 멕시코 대법원이 텍사스 오일이 제기한 소송에서 제27조가 소급 적용되지 않는다고 판결한 것은 조약 체결에 도움이 되었다.[55] 멕시코-미국 일반 청구 위원회는 오브레곤이 미국 및 기타 외국 정부와의 문제를 해결한 또 다른 중요한 영역이었다.[56] 아돌포 데 라 우에르타 재무장관은 멕시코가 국제 은행가들에게 145만 1천 달러의 부채를 인정하는 계약에 서명했다. 부카렐리 회담에서 오브레곤은 멕시코가 외국 석유 회사를 몰수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요구에 동의했고, 그 대가로 미국은 오브레곤 정부를 승인했다. 아돌포 데 라 우에르타를 포함한 많은 멕시코인들은 부카렐리 회담에서의 오브레곤의 행동을 매국노(''entreguista'')라고 비난했다.[54]5. 6. 데 라 우에르타 반란 (1923-1924)
1923년, 알바로 오브레곤은 자신이 출마할 수 없었던 1924년 대선에서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칼레스를 대통령 후보로 지지했다.[57] 1920년 오브레곤 당선 후 임시 대통령을 역임했던 재무장관 아돌포 데 라 우에르타는 오브레곤과 칼레스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57] 드 라 우에르타는 오브레곤이 베누스티아노 카란사의 실수를 반복하여 자신의 후보를 국가에 강요하고 있다고 믿고 협동조합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아들였다.[57]군대의 절반 이상이 드 라 우에르타의 반란에 가담했고, 오브레곤의 전 동지들 중 많은 수가 그에게 등을 돌렸다. 반군은 베라크루스와 할리스코에 집결했다.[57] 할리스코주 오코틀란에서 벌어진 결정적인 전투에서 오브레곤의 군대는 반군을 궤멸시켰다.[57] 1923년 부카렐리 조약 체결 후 미국의 외교 승인은 오브레곤의 반란 진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국은 오브레곤에게 무기를 공급했고, 할리스코의 반군을 폭격하기 위해 17대의 미군 항공기를 파견했다.[2] 오브레곤은 살바도르 알바라도 장군과 포르투나토 마이코테를 포함한 많은 전 동지를 추적하여 처형했다.[58][59] 드 라 우에르타는 망명길에 올랐다. 반란 진압 후 칼레스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오브레곤은 물러났다.
6. 대통령 퇴임 이후 (1924-1928)
카예스가 대통령으로 선출된 후, 오브레곤은 농사를 짓기 위해 소노라주로 돌아왔다.[60] 그는 현대식 관개 시설을 도입한 야키 계곡에서 "농업 혁명"을 이끌었다.[60] 오브레곤은 카헤메의 미곡 공장, 해산물 어류 가공 공장, 비누 공장, 토마토 밭, 렌터카 사업, 그리고 황마 자루 공장을 포함하여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60]
오브레곤은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했던 카예스 대통령과 긴밀한 접촉을 유지했으며, 차풀테펙 성에서 카예스의 단골 손님이었다.[60] 이는 오브레곤이 포르피리오 디아스의 발자취를 따르려 하고 카예스가 단지 마누엘 곤잘레스와 같은 꼭두각시일 뿐이라는 우려를 불러일으켰다.[60] 1926년 10월 멕시코 의회가 임기 제한을 폐지하여 1928년 대통령 선거에 오브레곤이 출마할 길을 열어줌에 따라 이러한 우려는 극에 달했다.[60]
오브레곤은 1926년 10월부터 1927년 4월까지 야키족이 주도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다시 전장으로 돌아왔다.[61] 오브레곤이 처음 군사적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야키 부대를 지휘하면서 그들에게 토지를 약속했던 것인데, 1926년에서 1927년 사이에 일어난 야키 반란은 토지 개혁을 요구하는 것이었으므로 이는 아이러니한 일이었다.[61] 오브레곤은 아마도 카예스 정부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하고, 군부에 대한 지속적인 영향력을 보여주고, 점점 더 심해지는 지역의 폭력으로 인해 피해를 입기 시작한 야키 계곡의 상업적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이 캠페인에 참여했을 것이다.[61]
1926년이 되자 칼레스는 헌법을 개정하여 재선 규정을 연속 재선 금지로 변경하고 임기를 6년으로 연장하여 오브레곤의 대통령 선거 재출마를 가능하게 했다. 1927년 오브레곤의 재선에 반대하는 세력은 반대당을 결성하고 아르눌포 고메스(Arnulfo R. Gómez) 장군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프란시스코 세라노(Francisco R. Serrano) 장군도 혁명당으로부터 출마를 표명했지만, 10월 세라노는 반란을 모의하여 군에 의해 사살되었고, 11월 고메스 장군의 반란도 진압되어 고메스도 총살되었다.
모든 경쟁 후보를 제거한 오브레곤은 이듬해 1928년 7월 다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6. 1. 소노라 주에서의 활동
6. 2. 카예스와의 관계 및 재선 시도
7. 암살 (1928)
오브레곤은 1928년 멕시코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취임 몇 달 전 암살당했다. 모든 경쟁 후보를 제거한 오브레곤은 1928년 7월에 다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멕시코시티로 돌아왔지만, 1928년 7월 17일, 대통령 취임 파티 중에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칼레스 정권의 교권 반대 강령에 불만을 품은 가톨릭 과격파 신학생 호세 데 레온 토랄(José de León Toral)에 의해 얼굴에 5발의 총탄을 맞고 암살당했다.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칼레스의 가혹한 로마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처우는 1926년에 발발한 크리스테로 전쟁으로 알려진 반란으로 이어졌다.[64]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칼레스의 동맹이었던 오브레곤은 가톨릭 신자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멕시코시티로 돌아온 직후인 1928년 7월 17일 라 봄비야 카페에서[63] 정부의 반가톨릭 정책에 반대한 로마 가톨릭 신자 호세 데 레온 토랄에 의해 암살당했다.[64] 오브레곤은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칼레스만큼 강력한 반교권주의자는 아니었고, 대통령이었을 때 1917년 헌법의 반교권 조항을 시행하지 않았다.
토랄은 이듬해 2월 9일 사형당했다. 토랄의 이후 재판은 사형 선고와 총살형 집행으로 이어졌다. 마리아 콘셉시온 아세베도 데 라야타 수녀("마드레 콘치타")가 이 사건에 연루되었고 오브레곤 암살의 배후로 여겨졌다.[65] 레온 토랄은 1년 전 오브레곤 암살을 기도한 혐의로 잘못 유죄 판결을 받은 미겔 프로의 처형에 대한 보복을 추구했다.
오브레곤의 죽음으로 에밀리오 포르테스 길(Emilio Portes Gil)이 잠정 대통령에 취임했지만 사실상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칼레스의 꼭두각시였고,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칼레스는 6년 동안 꼭두각시 대통령을 세워 막후에서 지배했다(막시마토).
7. 1. 암살 사건과 배경
오브레곤은 1928년 멕시코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취임 몇 달 전 암살당했다. 칼레스의 가혹한 로마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처우는 1926년에 발발한 크리스테로 전쟁으로 알려진 반란으로 이어졌다.[64] 칼레스의 동맹이었던 오브레곤은 가톨릭 신자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멕시코시티로 돌아온 직후인 1928년 7월 17일 라 봄비야 카페에서 정부의 반가톨릭 정책에 반대한 로마 가톨릭 신자 호세 데 레온 토랄에 의해 암살당했다.[63][64] 오브레곤은 칼레스만큼 강력한 반교권주의자는 아니었고, 대통령이었을 때 1917년 헌법의 반교권 조항을 시행하지 않았다. 토랄의 이후 재판은 사형 선고와 총살형 집행으로 이어졌다. 마리아 콘셉시온 아세베도 데 라야타 수녀("마드레 콘치타")가 이 사건에 연루되었고 오브레곤 암살의 배후로 여겨졌다.[65] 레온 토랄은 1년 전 오브레곤 암살을 기도한 혐의로 잘못 유죄 판결을 받은 미겔 프로의 처형에 대한 보복을 추구했다.7. 2. 암살 이후 멕시코 정치 상황
오브레곤은 1928년 멕시코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취임 몇 달 전 암살당했다. 그의 오랜 동지였던 아르눌포 R. 고메스 장군과 프란시스코 세라노 장군은 그의 재선에 반대했다. 세라노는 오브레곤 반대 봉기를 일으켰다가 암살당했고, 고메스는 오브레곤에 대한 폭동을 촉구했다가 살해당했다.[62]칼레스의 가혹한 로마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처우는 1926년에 발발한 크리스테로 전쟁으로 이어졌다. 칼레스의 동맹이었던 오브레곤은 가톨릭 신자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멕시코시티로 돌아온 직후인 1928년 7월 17일 라 봄비야 카페에서[63] 정부의 반가톨릭 정책에 반대한 로마 가톨릭 신자 호세 데 레온 토랄에 의해 암살당했다.[64] 오브레곤은 칼레스만큼 강력한 반교권주의자는 아니었고, 대통령이었을 때 1917년 헌법의 반교권 조항을 시행하지 않았다.
토랄의 이후 재판은 사형 선고와 총살형 집행으로 이어졌다. 마리아 콘셉시온 아세베도 데 라야타 수녀("마드레 콘치타")가 이 사건에 연루되었고 오브레곤 암살의 배후로 여겨졌다.[65] 레온 토랄은 1년 전 오브레곤 암살을 기도한 혐의로 잘못 유죄 판결을 받은 미겔 프로의 처형에 대한 보복을 추구했다.
8. 유산과 평가
알바로 오브레곤은 멕시코 혁명에서 뛰어난 군사 전략가로 활약했으며, 셀라야 전투에서 판초 비야의 북부 사단을 결정적으로 패퇴시키고 멕시코 대통령이 되었다.[67] 대통령으로서 그는 1923년 미국으로부터 인정을 받았고, 부카렐리 조약을 통해 미국과의 유전 분쟁을 일시적으로 해결했다.[67] 또한 교육 장관 호세 바스콘셀로스에게 전권을 부여하여 학교 건설을 통해 멕시코인들의 교육 기회를 확대하고, 멕시코 벽화가들의 공공 미술을 통해 교육을 확대했다.[67]
오브레곤은 자신이 국가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고 생각했고, 1917년 헌법을 개정하여 멕시코 대통령에 재출마할 수 있도록 했다.[67] 이러한 행위는 "재선 금지"라는 혁명의 원칙을 위반하는 것이었다.[67] 오브레곤은 1928년에 재선되었으나,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 암살당했다.[67] 그의 암살은 멕시코에 큰 정치적 위기를 초래했고, 그의 동료이자 전 대통령인 플루타르코 엘리아스 칼레스가 국민혁명당을 창당함으로써 해결되었다.[67]
그의 사후 명성과 혁명 영웅으로서의 위상은 비야나 에밀리아노 사파타에 비할 바가 못 되며, 이 두 패배한 혁명 지도자들에게는 존재하는 사후적 추종자 집단이 오브레곤에게는 없다.[67] 1945년 오브레곤 암살 기념식에는 참석자가 거의 없었다.[67]
멕시코시티 남부 산 안헬 지역의 파르케 데 라 봄비야에는 오브레곤을 위한 기념비가 있다.[68] 이것은 멕시코에서 단일 혁명가를 위한 가장 큰 기념비이며, 오브레곤이 암살된 장소에 서 있다.[68] 이 기념비에는 1915년에 잃은 오브레곤의 잘린 오른팔이 보관되어 있었으나, 1989년 팔 자체가 소각된 후 현재는 대리석 조각이 전시되어 있다. 오브레곤의 시신은 소노라주 와타밤포에 묻혀 있으며, 소노라에서는 그를 기리는 기마상이 세워져 있다.[68]
소노라의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시우다드 오브레곤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69] 그의 아들 알바로 오브레곤 타피아는 제도혁명당 후보로 소노라 주지사를 역임했다. 시우다드 오브레곤 근처에 건설된 알바로 오브레곤 댐은 오브레곤 아들의 주지사 임기 동안 가동되었다. 오브레곤은 멕시코 원산의 작은 선인장 속 – ''Obregonia denegrii''의 이름으로 기념되고 있다.[69]
9. 역대 선거 결과
선거명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 결과 | 당락 |
---|---|---|---|---|---|---|---|
1917년 대선 | 멕시코의 대통령 | 37대 | 무소속 | 0.5% | 4,008표 | 3위 | 낙선 |
1920년 대선 | 멕시코의 대통령 | 39대 | 멕시코 노동당 | 95.8% | 1,131,751표 | 1위 | |
1928년 대선 | 멕시코의 대통령 | 41대 | 멕시코 노동당 | 100.00% | 1,670,453표 | 1위 | [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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