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토 히나스테라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알베르토 히나스테라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작곡가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태어나 유럽과 미국에서 활동했다. 그의 음악은 아르헨티나 민족주의적 요소를 바탕으로 출발하여, 점차 현대적인 기법을 수용하며 세 시기(객관적 민족주의, 주관적 민족주의, 신표현주의)를 거쳐 발전했다. 오페라, 발레, 관현악, 협주곡, 실내악, 피아노곡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남겼으며, 아스토르 피아졸라를 비롯한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아르헨티나의 클래식 작곡가 - 랄로 시프린
랄로 시프린은 아르헨티나 출신의 작곡가로, 재즈, 영화 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그래미상과 아카데미 명예상을 수상했고, 영화 《미션 임파서블》, 《더티 해리》 시리즈 등의 음악을 작곡했다. - 아르헨티나의 클래식 작곡가 - 후안 카스트로
후안 카스트로는 쿠바 음악 전통에 현대적 요소를 융합하여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고, 다양한 오케스트라 지휘와 후진 양성을 통해 쿠바 음악 발전에 기여한 작곡가이자 지휘자이다. - 아르헨티나의 작곡가 - 아틸리오 스탐포네
아틸리오 스탐포네는 아르헨티나의 탱고 피아니스트, 작곡가,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1955년 악단 결성 후 현대적인 탱고 연주로 이름을 알렸으며 "아피체스" 등의 대표작과 탱고 홀 "카뇨 14" 설립, 영화 음악 작곡 등으로 아르헨티나 탱고 음악 발전에 기여한 인물이다. - 아르헨티나의 작곡가 - 프란시스코 카나로
프란시스코 카나로는 우루과이 태생의 아르헨티나 탱고 음악가로, 바이올린 연주, 작곡, 지휘를 통해 탱고 황금기를 이끌었으며, 오데온 레코드 악단 지휘, 700여 곡 작곡, 7000여 타이틀 레코드 발매 등 탱고 음악의 대중화와 국제적 위상 강화에 기여했다. - 피아노 작곡가 - 프란츠 슈베르트
프란츠 슈베르트는 1797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600곡이 넘는 가곡을 포함한 1,200여 곡의 방대한 작품을 남긴 낭만주의 작곡가이다. - 피아노 작곡가 - 세자르 프랑크
세자르 프랑크는 벨기에 출신의 작곡가, 오르가니스트, 피아니스트, 음악 교사로, 파리 음악원에서 교육을 받고 생클로틸드 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하며 D단조 교향곡 등을 작곡하여 프랑스 음악에 영향을 미쳤다.
2. 생애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태어난 아르헨티나의 작곡가이다. 스페인인 아버지와 이탈리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만년에는 자신의 성을 카탈루냐어와 이탈리아어식으로 발음하는 것을 선호했다.[2]
1938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윌리엄스 음악원을 졸업하고, 젊은 시절 교육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45년부터 1947년까지 미국을 방문하여 탱글우드 음악 센터에서 애런 코플런드에게 사사했다.[8] 이후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돌아와 작곡가 협회를 공동 설립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의 제자 중에는 아스토르 피아졸라와 같은 유명 음악가들이 있다.
1968년 미국으로 다시 이주했으며, 1970년부터는 유럽에서 활동했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그곳 왕들의 묘지에 안장되었다.[2]
2. 1. 유년 시절과 교육
알베르토 히나스테라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스페인인 아버지와 이탈리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만년에 자신의 성을 카탈루냐어와 이탈리아어 발음(영어 'George'의 첫소리와 유사한 부드러운 'G' 발음)으로 불리기를 선호했으며, 스페인어식 발음은 사용하지 않았다.[2]히나스테라는 1938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윌리엄스 음악원을 졸업했다. 젊은 시절에는 리세오 밀리타르 헤네랄 산 마르틴에서 가르쳤다. 1945년부터 1947년까지 미국을 방문하여 탱글우드 음악 센터에서 애런 코플런드에게 사사했다. 이후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돌아와 작곡가 협회를 공동으로 설립하고 여러 교육 기관에서 가르쳤다. 1949년에는 오늘날 지랄도 지랄디 음악원으로 불리는 음악·무대 예술원을 설립했다.[8]
그의 유명한 제자로는 아스토르 피아졸라(1941년 사사), 알시데스 란자, 호르헤 안투네스, 왈도 데 로스 리오스, 자클린 노바, 블라스 아테오르투아, 라파엘 아폰테-레데 등이 있다.
2. 2. 미국 유학 및 귀국
히나스테라는 1945년부터 1947년까지 미국을 방문하여 탱글우드에서 애런 코플런드에게 사사했다. 이후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돌아와 작곡가 협회를 공동으로 설립했다.[8] 그는 귀국 후 리세오 밀리타르 헤네랄 산 마르틴 등 여러 곳에서 교육 활동을 펼쳤다.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 중에는 탱고 음악의 거장으로 성장한 아스토르 피아졸라(1941년 사사)를 비롯하여 알시데스 란자, 호르헤 안투네스, 왈도 데 로스 리오스, 자클린 노바, 블라스 아테오르투아, 라파엘 아폰테-레데 등이 있다. 1949년에는 오늘날 지랄도 지랄디 음악원으로 불리는 음악·무대 예술원을 설립하기도 했다.[8]2. 3. 유럽 이주와 사망
1968년 미국으로 다시 이주했으며, 1970년에는 유럽으로 건너갔다. 그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그곳 왕들의 묘지에 안장되었다.3. 음악적 특징
히나스테라는 자신의 음악 세계를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설명했다. 이는 "객관적 민족주의"(1934–1948), "주관적 민족주의"(1948–1958), 그리고 "신표현주의"(1958–1983) 시기이다. 이 시기 구분은 특히 아르헨티나 전통 음악 요소를 활용하는 방식의 변화를 보여준다. 초기 작품에서는 아르헨티나 민속 주제를 직접적으로 사용했지만, 후기로 갈수록 이러한 요소들을 점차 추상적인 형태로 작품에 통합시켰다.
그의 많은 작품은 아르헨티나의 상징적 존재인 평원의 기마병 가우초를 다루는 ''가우체스코'' 전통에서 영감을 받았다.[3] 초기에는 오스티나토 기법을 풍부하게 사용한 명쾌한 작풍을 보였으나, 점차 원시주의적이고 무조적인 경향으로 나아갔으며, 후기에는 12음 기법이나 미분음 같은 현대적인 작곡 기법도 사용했다.
히나스테라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작곡했는데, 여러 편의 오페라, 피아노 협주곡 2곡, 첼로 협주곡 2곡, 바이올린 협주곡 1곡, 하프 협주곡 1곡 등이 있다. 특히 "하프 협주곡 작품 25"는 수가 많지 않은 하프를 위한 협주곡 중 하나로 종종 연주된다. 이 외에도 발레 음악, 실내악, 피아노 독주곡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는 미국 방문 중 탱글우드 음악 센터에서 애런 코플랜드에게 사사했으며, 탱고 음악의 거장 아스토르 피아졸라는 그의 초기 제자 중 한 명이다.
3. 1. 객관적 민족주의 (1934-1948)
히나스테라는 자신의 음악을 세 시기로 나누어 설명했다. 첫 번째 시기는 1934년부터 1948년까지 해당하는 객관적 민족주의(nacionalismo objetivoes) 시기이다. 이 시기는 이후의 "주관적 민족주의"(1948–1958)와 "신표현주의"(1958–1983) 시기와 구분되는데, 특히 아르헨티나 전통 음악 요소를 활용하는 방식에서 차이를 보인다.객관적 민족주의 시기 작품들의 가장 큰 특징은 아르헨티나 민속 음악의 주제나 리듬을 직접적으로 작품에 통합했다는 점이다. 히나스테라 본인은 이 시기를 "객관적 애국심"이라고도 표현하며, 아르헨티나 민요를 직접 사용한 곡이 많다고 언급했다. 그의 많은 작품들은 아르헨티나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평원의 기마병 가우초를 다루는 ''가우체스코'' 전통에서 영감을 받기도 했다.[3]
3. 2. 주관적 민족주의 (1948-1958)
히나스테라 본인은 자신의 음악 세계를 세 시기로 나누어 설명했는데, 그중 두 번째 시기는 "주관적 민족주의" (1948년 ~ 1958년)에 해당한다.[3] 이 시기의 가장 큰 특징은 아르헨티나 민속 음악의 요소를 이전 시기처럼 직접적으로 가져와 사용하기보다는, 그 느낌이나 특징만을 보다 추상적인 형태로 작품 속에 담아냈다는 점이다. 즉, 민요 가락을 그대로 쓰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아르헨티나 음악 특유의 개성과 색깔은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작곡했다. 이는 첫 번째 시기인 "객관적 민족주의"에서 아르헨티나 민속 주제를 직접적으로 활용했던 것과는 차이를 보이는 접근 방식이다.3. 3. 신표현주의 (1958-1983)
히나스테라 본인이 분류한 세 번째 음악 시기는 "신표현주의"로, 1958년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1983년까지 해당한다. 이 시기 그의 음악은 이전 시기와 비교하여 아르헨티나 전통 음악 요소를 사용하는 방식에 변화를 보인다. 민족적 요소들은 직접적으로 드러나기보다는 점점 더 추상적인 형태로 작품에 통합되었으며, 민요의 요소는 연속 기법을 사용하여 보다 현대적인 작풍으로 나타났다.이 시기 히나스테라는 원시주의적이고 무조적인 작풍으로 나아갔으며, 12음 기법이나 미분음 등을 사용하는 등 더욱 현대적인 음악 어법을 탐구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고대 콜럼버스 이전의 전설을 바탕으로 극적인 소프라노와 53개의 타악기를 위해 작곡된 Cantata para América Mágica|칸타타 파라 아메리카 마히카es (1960)가 있다. 이 곡은 1963년 로스앤젤레스 타악기 앙상블에 의해 앙리 테미앙카와 윌리엄 크라프트의 지휘로 UCLA에서 미국 서부 해안 초연을 가졌다.[3]
1968년 미국으로 다시 건너갔고, 1970년부터는 유럽으로 이주하여 활동했다. 1978년에는 제네바 국제 음악 콩쿠르 지휘 부문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는데, 이때 쓰쓰미 슌사쿠가 최고상을 수상했다. 쓰쓰미는 후에 히나스테라의 발레 음악 『에스탄시아』의 일본 초연을 지휘했다.
그의 음악은 클래식계를 넘어 대중음악에도 영향을 미쳤다. 영국의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EL&P는 히나스테라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 4악장을 편곡하여 ''Toccata''라는 제목으로 자신들의 앨범 ''Brain Salad Surgery''에 수록했다. 편곡 허가를 받으러 온 키보디스트 키스 에머슨에 대해, 히나스테라는 그 솜씨를 절찬했다고 한다.
히나스테라는 1983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6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4. 주요 작품
히나스테라는 자신의 음악 세계를 세 시기로 나누어 설명했다. 첫 번째는 "객관적 민족주의"(1934–1948) 시기로, 이 시기에는 아르헨티나 민속 음악의 주제를 직접적으로 작품에 통합하는 경향을 보였다. 두 번째는 "주관적 민족주의"(1948–1958) 시기이며, 마지막은 "신표현주의"(1958–1983) 시기이다. 후기로 갈수록 그는 전통적인 음악 요소들을 더욱 추상적인 형태로 사용하였다.
히나스테라의 많은 작품은 아르헨티나의 상징적인 존재로 여겨지는 가우초(평원의 원주민 기마병)의 전통, 즉 '가우체스코' 전통에서 깊은 영감을 받았다.[3]
그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인 Cantata para América Mágica|칸타타 파라 아메리카 마히카es(1960)는 극적인 소프라노와 53개의 타악기를 위한 곡으로, 콜럼버스 이전 시대의 고대 전설을 바탕으로 작곡되었다. 이 곡은 1963년 로스앤젤레스 타악기 앙상블에 의해 앙리 테미앙카와 윌리엄 크라프트의 지휘 아래 UCLA에서 미국 서부 해안 초연을 가졌다.
히나스테라의 주요 작품들은 아래 하위 섹션에서 다루는 바와 같이 오페라, 발레, 관현악곡, 협주곡, 실내악, 피아노곡, 가곡, 합창곡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있다.
4. 1. 오페라
- ''돈 로드리고'', Op. 31 (1963–64)
- ''보마르초'', Op. 34 (1966–67) - 1972년까지 아르헨티나에서 상연이 금지되었다.
- ''베아트리스 첸치'', Op. 38 (1971) - 퍼시 비시 셸리의 희곡 ''The Cenci'' (1819)를 기반으로 한다.
4. 2. 발레
4. 3. 관현악곡
- 관현악 모음곡, 작품 1a (1937)
- 발레곡 ''에스탄시아'' 중 춤, 작품 8a (1943)[4]
- 크리오요 파우스트 서곡 (Obertura para el "Fausto" Criollospa), 작품 9 (1943)
- 오얀타이 (Ollantayspa): 3개의 교향 악장, 작품 17 (1947)
- 협주 변주곡 (Variaciones Concertantesspa), 작품 23 (1953)
- 팜페아나 제3번 (교향적 파스토랄), 작품 24 (1954)
- 현악 협주곡, 작품 33 (1965)
- 교향 연습곡, 작품 35 (1967)
- 포폴 부흐, 작품 44 (1975–1983, 미완성)
-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파우 카잘스 주제에 대한 주석, 작품 46 (1976)
- 풀 오케스트라를 위한 파우 카잘스 주제에 대한 주석, 작품 48 (1976–77)
- 이우빌룸 (소리침), 작품 51 (1979–8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