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지마 사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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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카지마 사토시는 일본 프로 야구 선수로, 1987년부터 2015년까지 포수와 선수 겸 코치로 활동했으며, 2018년에는 닛폰햄의 코치를, 2019년부터 2024년까지 오릭스 버펄로스의 감독을 역임했다. 한큐·오릭스, 세이부, 요코하마, 닛폰햄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며, 강한 어깨와 빠른 발로 "메이저 리그에 가장 가까운 포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오릭스 감독으로 2021년, 2022년, 2023년 퍼시픽 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2022년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2024년 시즌을 끝으로 오릭스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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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지마 사토시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나카지마 사토시 |
로마자 표기 | Nakajima Satoshi |
출생일 | 1969년 3월 27일 |
출생지 | 아키타현 기타아키타시 |
![]() | |
수비 위치 | 포수 |
투구 | 우 |
타석 | 우 |
프로 입단 연도 | 1986년 |
드래프트 순위 | 3순위 |
첫 출장 | 1987년 10월 18일 |
마지막 경기 | 2015년 10월 1일 |
신장 | 182 |
체중 | 82 |
선수 경력 | |
소속 구단 | 한큐 브레이브스 (1987~1990) 오릭스 브레이브스 (1991~1992) 오릭스 블루웨이브 (1993~1997) 세이부 라이온스 (1998~2002)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2003)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2004~2015) |
감독 및 코치 경력 | |
소속팀 |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2007~2018) 오릭스 버펄로스 (2019~2024) |
타격 성적 | |
타율 | 0.232 |
안타 | 804 |
타점 | 349 |
도루 | 27 |
홈런 | 55 |
수상 내역 | |
퍼시픽 리그 베스트 나인 | 1회 (1995년) |
퍼시픽 리그 골든 글러브 | 1회 (1989년) |
NPB 올스타 | 6회 (1989, 1990, 1991, 1995, 1996, 1999) |
일본 시리즈 우승 | 3회 (1996, 2006, 2022) |
쇼리키 마쓰타로 상 | 2022년 |
2. 선수 경력
나카지마 사토시는 강한 어깨와 빠른 발을 가진 포수로, "메이저 리그에 가장 가까운 포수"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7] 선수 경력은 다음과 같다.
- 한큐 브레이브스·오릭스 브레이브스·오릭스 블루웨이브(1987년~1997년)
- 세이부 라이온스(1998년~2002년)
- 요코하마 베이스타스(2003년)
-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2004년~2015년)
1989년 주전 포수가 된 나카지마는 뛰어난 타격 센스와 빠른 발을 바탕으로 공수주 모든 면을 갖춰 "메이저 리그에 가장 가까운 포수"라고 불렸다.[7] 1990년에는 몬다 히로미츠에게 타격 지도를 받아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했다.[8] 1995년과 1996년에는 팀의 퍼시픽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제패에 기여했다.
1997년 시즌 후 자유 계약 선수로 세이부로 이적,[9] 1999년에는 마쓰자카 다이스케 전용 포수로 기용되기도 했다. 2000년에는 와다 가즈히로와 등번호를 교환했다.[10] 2002년 시즌 후에는 트레이드로 요코하마로 이적했지만,[11] 부상과 타격 부진으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12]
2004년, 금전 트레이드로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로 이적하며 닛폰햄에 복귀했다.[12] 2006년에는 팀의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2007년부터 1군 배터리 코치를 겸임했으며, 2012년에는 야마모토 마사(주니치)와 같은 역대 2위(야수 1위) 기록을 달성했다.[13] 2013년에는 야수로서 NPB 1군 실동 연수 최다 기록(27년)을 달성했고,[14] 2015년에는 구도 기미야스가 가진 NPB 1군 실동 연수 기록(29년)과 타이를 이루었다.[16]
2. 1. 한큐·오릭스 시절 (1987년 ~ 1997년)
NPB 드래프트 회의에서 한큐 브레이브스로부터 3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1988년 10월 23일, 더블헤더로 열린 한큐로서의 니시노미야 구장 마지막 경기(대 롯데 26차전)에서 쐐기 3점 홈런을 터뜨려, 동향 출신인 야마다 히사시의 은퇴 경기에 화려함을 더했다.
1989년, 구단명이 오릭스 브레이브스로 바뀐 후에는, 주전 포수였던 후지타 히로마사의 부진으로 주전 포수 자리를 꿰찼다. 구계 제일의 강견은 물론, 타격 센스가 뛰어나고 준족으로 도루도 과감하게 시도하여 공수주 모든 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한때 "메이저 리그에 가장 가까운 포수"라고까지 불렸다[7]。4번 타자를 맡은 적도 있다.
1990년 10월 6일 대 롯데 오리온스전에서는, 만루에서 인필드 플라이를 고의로 낙구. 타자에게는 낙구 유무에 관계없이 심판으로부터 자동적으로 아웃이 선언되었기 때문에, 홈에서의 3루 주자의 포스 아웃으로 병살타를 노렸지만, 인필드 플라이 처리에 대한 해석의 오류로 롯데에 득점을 허용하고 말았다. 같은 해 몬다 히로미츠에게 크게 휘두르는 요령을 전수받아 두 자릿수인 12홈런이라는 급성장을 이루었다[8]。
1991년 이후에도 주전 포수 자리를 유지했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타격이 점차 부진했다. 오기 아키라가 감독을 맡았던 시기에는, 후지타와의 트레이드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합류한 다카다 마코토나, 젊은 선수 미와 타카시와 병용되었다.
1995년에는 사토 요시노리의 노히트 노런(당시 NPB 공식전 사상 최고령 기록) 및 11년 만의 퍼시픽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1996년에는 오기 아래에서 리그 2연패와 19년 만의 일본 시리즈 제패도 경험했다.
2. 2. 세이부 시절 (1998년 ~ 2002년)
1997년 시즌 후 자유 계약 선수를 선언하고 세이부 라이온스에 이적했다[9]。1998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부진했던 베테랑 이토 쓰토무를 대신하여 일시적으로 활약했지만, 오랫동안 세이부에서 신뢰를 쌓아온 이토에게서 주전 포수 자리를 빼앗을 수는 없었다.
1999년에는 마쓰자카 다이스케 전용 포수로 기용되어 출전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2001년 이후에는 마쓰자카 등판 시에도 이토가 포수 마스크를 쓰는 기회가 늘었고, 타격 부진에 더해 세이부가 젊은 포수 육성 방침을 취했기 때문에 점차 출전 기회가 줄어들었다.
2000년에는 와다 가즈히로와 등번호를 교환했다(나카지마: 5→22, 와다: 22→5). 나카지마에 따르면 "22가 포수의 이미지가 강하다"는 이유로, 당시에는 포수로 등록되었지만 이미 외야수로서의 출장이 많았던 와다에게 제안한 것이라고 한다[10]。 같은 해 5월 20일에는 나가노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처음 열린 친정 오릭스전에서, 2회 말에 테리 브로우즈를 상대로 동 스타디움 공식전 제1호 홈런을 좌익 스탠드로 날렸다.
2002년에는 대부분을 2군에서 보냈고, 시즌 후 토미오카 히사타카와 함께 이시이 요시토와 호소미 가즈시와의 2대 2 트레이드로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로 이적했다[11]。
2. 3. 요코하마 시절 (2003년)
2002년 시즌 후 주니치 드래곤스로 FA 이적한 다니시게 모토노부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트레이드를 통해 요코하마 베이스타스로 이적했다.[12] 아이카와 료지, 전년도에 다니시게와 교체되어 주니치에서 이적한 나카무라 타케시와의 주전 포수 경쟁에 참전하여 수준 높은 포지션 경쟁이 기대되었다.[12] 개막전에 선발 출장했으나, 부상과 타격 부진으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12] 오프 시즌에 나카무라의 부활과 아이카와의 약진으로 구상에서 제외되어 금전 트레이드로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로 이적하며,[12] 1997년 FA 이후 6년 만에 닛폰햄에 복귀했다.[12]2. 4. 닛폰햄 시절 (2004년 ~ 2015년)
2004년 요코하마 구단의 캠페인 걸이었던 모델 세이노 아이(현재의 나카지마 아이)와 결혼했다.[13]2005년에는 주전 포수 다카하시 신지의 잦은 부상과 지쓰마쓰 가즈나리의 부진으로 포수로서 팀 최다 출장 기회를 얻었다.
2006년에는 선발 출전이 2경기로 줄었지만, 마무리 투수 마이클 나카무라와의 호흡이 좋아 경기 후반을 책임지는 '마무리 포수' 역할을 맡았다. 마이클이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한 2008년 시즌 종료까지 마이클의 전담 포수처럼 활약했다. 2006년에는 포수로서 팀 최다인 79경기에 출전하여 팀의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6월 19일 한신 타이거스전 경기 전 스피드건 콘테스트에서 146km/h를 기록, 젊은 선수들을 제치고 우승하며 강한 어깨를 과시했다.
2007년부터 1군 배터리 코치를 겸임했다. 선수로서 1군 등록이 말소될 때는 코치 전임으로 1군에 동행했다. 시즌 초반 1군 등록이 말소되었지만, 컨디션 난조를 겪는 마이클을 지원하기 위해 다시 1군으로 승격되어 시즌 끝까지 마무리 포수로 활약했다. 9월 15일 소프트뱅크전에서 쐐기 3점 홈런을 기록했다.
2008년에는 시즌 후반부터 다시 1군으로 승격되어 마무리 포수를 맡았다. 부진에 빠진 다다노 가즈히토를 지원하기 위해 2년 만에 선발 출장하기도 했다.
2009년에는 오노 쇼타의 입단과 마이클의 요미우리 자이언츠 이적으로 쓰루오카 신야와 오노의 출장이 늘면서 출전 기회가 줄었다. 7월 18일 등록되었지만, 우천 중지로 인해 출장하지 못한 채 등록 말소되었다. 8월 16일 오노가 인플루엔자에 감염되어 급히 1군 등록되어,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전(삿포로 돔) 9회부터 마스크를 쓰고 시즌 첫 출전을 했다. 8월 21일 소프트뱅크전에서는 다르빗슈 유의 선발 포수로 출전하여 안타를 기록했다. 같은 해 일본 시리즈에서도 출전했다.
2010년에는 4월 2일 1군에 등록되어, 세이부전(삿포로 돔) 7회 중간부터 출전하여, 실동 연수가 24년이 되었다. 이는 역대 3위 타이기록이며, 포수로서는 노무라 가쓰야(난카이, 롯데, 세이부)의 26년에 이어 단독 2위 기록이다. 4월 23일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전에서는 바디 칼라일의 선발 포수로 출전했다.
2011년에는 쓰루오카가 개막 직전에 이탈하면서 2007년 이후 4년 만에 개막전부터 선수로 1군에 등록되었다. 4월 13일 세이부 2차전(삿포로 돔) 9회 초부터 출전, 실동 연수가 25년이 되었다.

2012년 5월 9일 1군에 등록되어, 5월 12일 세이부 7차전(하코다테 오션 스타디움) 9회 초에 수비로 출전하여 실동 연수가 26년이 되었다. 이는 노무라, 야마모토 마사(주니치)와 같은 기록으로 역대 2위(야수 1위) 기록이다.[13]
2013년 9월 28일 오릭스전(교세라 돔)에서 처음으로 1군 공식전에 출전, 야수로서 NPB 1군 실동 연수 최다 기록(27년)을 달성했다.[14]
2014년 6월 27일 라쿠텐전(삿포로 돔) 8회 초부터 포수로 출전했다. 이 해 유일한 1군 공식전 출전이었지만, 야수로서의 NPB 1군 실동 연수 기록을 28년으로 갱신함과 동시에 퍼시픽 리그 공식전 실동 연수 기록(27년)을 달성했다.[15]
2015년 4월 15일 롯데전(삿포로 돔) 9회 초에 포수로 출전하며, 구도 기미야스가 가진 (투수를 포함한) NPB 1군 실동 연수 기록(29년)과 타이를 이루었다.[16] 이후 배터리 코치에 전념했지만, 10월 1일 현역에서 은퇴했다. 닛폰햄 구단은 롯데 23차전(삿포로 돔)을 나카지마의 은퇴 경기로 개최했다.[17] 오프에는 본인의 의향으로 배터리 코치도 퇴임했다.[18] 11월 2일 은퇴 회견을 가졌고,[19] 11월 27일 일본 야구 기구(NPB)에서 임의 은퇴 선수로 공시되었다.[20]
3. 지도자 경력
나카지마 사토시일본어는 2016년 일본 햄의 팀 통괄 본부에서 제너럴 매니저 특별 보좌로 취임하여, 일본 햄과 업무 제휴를 맺은 MLB의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 파견되었다.[21] 미국에 머무는 동안 코치로서 마이너 리그 산하 구단을 순회하는 한편, 외국인 선수 스카우트에도 관여했다.[22]
3. 1. 닛폰햄 코치 시절 (2018년)
나카지마 사토시일본어는 2018년에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1군 배터리 겸 작전 코치로 3년 만에 현장에 복귀했으나,[23] 시즌 종료 후인 10월 19일에 퇴단했다.3. 2. 오릭스 감독 시절 (2019년 ~ 2024년)
2019년 오릭스 버펄로스의 2군 감독으로 취임했다.[24] 블루웨이브의 포수 시절 배터리를 이뤘던 고바야시 히로시 2군 투수 코치와 함께 사카키바라 츠바사나 K-스즈키 등의 투수를 1군에 정착시켰다.[25] 2020년 니시무라 노리후미를 대신하여 버팔로스의 감독 대행이 되었고,[2] 2021년부터 정식 감독으로 승격되었다.정식 감독 부임 후, 팀을 이끌고 퍼시픽 리그에서 2년 연속 우승, 2번의 일본 시리즈 진출을 달성했으며, 2022년에 우승을 차지했다.[2][3] 버팔로스를 하위권 팀에서 일본 시리즈 챔피언으로 탈바꿈시킨 그의 노력은 2022년 쇼리키 마쓰타로상 수상으로 이어졌다.[4] 2023년에도 팀을 리그 3연패로 이끌었지만, 2023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한신 타이거스에 패했다.
2024년 10월 6일, 4년 연속 리그 우승과 5위 성적을 내는 데 실패한 후 감독직에서 물러날 것을 발표했다.[5]
4. 상세 정보
나카지마 사토시는 아키타현립 다카노스 농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추계 도호쿠 대회 현 예선 준준결승에 진출했지만 아키타 고등학교에 패했고, 이듬해 여름 고시엔 현 예선에서도 준준결승에서 요코테 고등학교에 패했다.
수상 및 타이틀 경력은 다음과 같다.
- 베스트 나인: 1회(1995년, 포수 부문)
- 골든 글러브상: 1회(1989년, 포수 부문)
- 쇼리키 마쓰타로상: 1회(2022년)
- 월간 MVP: 1회(1991년 6월, 야수 부문)
- 최우수 배터리상: 1회(1995년, 투수: 히라이 마사후미)
- 퍼시픽 리그 연맹 특별 수상: 2회(최우수 감독상: 2021년~2023년)
개인 기록은 다음과 같다.
- 통산 1000경기 출장: 1999년 6월 26일, 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5차전(세이부 돔), 8번·포수로서 선발 출장(역대 351번째)[12]
- 통산 1500경기 출장: 2007년 10월 2일, 대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23차전(풀캐스트 스타디움 미야기), 8회말에 쓰루오카 신야를 대신해 포수로서 출장(역대 156번째)[12]
연도 | 소속 | 순위 | 경기 | 승리 | 패전 | 무승부 | 승률 | 승차 | 팀 홈런 | 팀 타율 | 팀 평균자책점 | 연령 |
---|---|---|---|---|---|---|---|---|---|---|---|---|
2020년 | 오릭스 | ※6위 | 67 | 29 | 35 | 3 | .453 | 27.0 | 77 | .247 | 3.97 | 51세 |
2021년 | 1위 | 143 | 70 | 55 | 18 | .560 | - | 133 | .247 | 3.31 | 52세 | |
2022년 | 1위 | 143 | 76 | 65 | 2 | .539 | - | 89 | .246 | 2.84 | 53세 | |
2023년 | 1위 | 143 | 86 | 53 | 4 | .619 | - | 109 | .250 | 2.73 | 54세 | |
2024년 | 5위 | 143 | 63 | 77 | 3 | .450 | 28.0 | 71 | .238 | 2.82 | 55세 | |
통산: 5년 | 639 | 324 | 285 | 30 | .532 | A클래스: 3회, B클래스: 2회 |
- 순위에서 '''굵은 글씨'''는 일본 시리즈 우승.
:*2020년에는 니시무라 노리후미 감독이 팀 성적 부진으로 사임한 후 8월 21일부터 시즌 종료까지 감독 대행을 맡음
첫 기록은 다음과 같다.
- 첫 출장·첫 선발 출장: 1987년 10월 18일, 대 난카이 호크스 26차전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8번·포수로 선발 출장
- 첫 안타: 1988년 4월 30일, 대 롯데 오리온즈 4차전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3회말에 니시나 도키나리로부터
- 첫 홈런·첫 타점: 1988년 6월 22일, 대 세이부 라이온즈 13차전 (세이부 라이온즈 구장), 9회초에 모리 시게카즈로부터 솔로
- 첫 도루: 1988년 7월 4일, 대 니혼햄 파이터스 7차전 (도쿄 돔), 7회초에 2루 도루 (투수: 니시자키 유키히로, 포수: 타무라 후지오)
기타 기록은 다음과 같다.
- 1군 프로 생활 기간: 29년 (1987년~2015년)[16]
- 올스타전 출장: 6회 (1989년~1991년, 1995년, 1996년, 1999년)
- 3개 구단에서 일본 시리즈 출장 및 안타 기록
선수 시절 등번호는 다음과 같다.
연도 | 등번호 |
---|---|
1987년~1988년 | 53 |
1989년~1997년, 2011년~2015년 | 27 |
1998년~1999년 | 5 |
2000년~2002년 | 22 |
2003년 | 35 |
2004년~2010년 | 32 |
2018년 | 72 |
2019년~ | 78 |
2000년에는 와다 가즈히로와 등번호를 교환했는데(나카지마: 5→22, 와다: 22→5), 나카지마에 따르면 "22가 포수의 이미지가 강하다"는 이유로, 당시에는 포수로 등록되었지만 이미 외야수로서의 출장이 많았던 와다에게 제안한 것이라고 한다.[10]
4. 1. 출신 학교
아키타현립 다카노스 농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추계 도호쿠 대회 현 예선 준준결승에 진출했지만 아키타 고등학교에 패했고, 이듬해인 여름 고시엔 현 예선에서도 준준결승에서 요코테 고등학교에 패했다.4. 2. 수상·타이틀 경력
- 베스트 나인: 1회(1995년) ※포수 부문
- 골든 글러브상: 1회(1989년) ※포수 부문
- 쇼리키 마쓰타로상: 1회(2022년)
- 월간 MVP: 1회(1991년 6월) ※야수 부문
- 최우수 배터리상: 1회(1995년) ※투수: 히라이 마사후미
- 퍼시픽 리그 연맹 특별 수상: 2회(최우수 감독상: 2021년~2023년)
4. 3. 개인 기록
- 통산 1000경기 출장: 1999년 6월 26일, 대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5차전(세이부 돔), 8번·포수로서 선발 출장 ※역대 351번째[12]
- 통산 1500경기 출장: 2007년 10월 2일, 대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23차전(풀캐스트 스타디움 미야기), 8회말에 쓰루오카 신야를 대신해 포수로서 출장 ※역대 156번째[12]
연도 | 소속 | 순위 | 경기 | 승리 | 패전 | 무승부 | 승률 | 승차 | 팀 홈런 | 팀 타율 | 팀 평균자책점 | 연령 |
---|---|---|---|---|---|---|---|---|---|---|---|---|
2020년 | 오릭스 | ※6위 | 67 | 29 | 35 | 3 | .453 | 27.0 | 77 | .247 | 3.97 | 51세 |
2021년 | 1위 | 143 | 70 | 55 | 18 | .560 | - | 133 | .247 | 3.31 | 52세 | |
2022년 | 1위 | 143 | 76 | 65 | 2 | .539 | - | 89 | .246 | 2.84 | 53세 | |
2023년 | 1위 | 143 | 86 | 53 | 4 | .619 | - | 109 | .250 | 2.73 | 54세 | |
2024년 | 5위 | 143 | 63 | 77 | 3 | .450 | 28.0 | 71 | .238 | 2.82 | 55세 | |
통산: 5년 | 639 | 324 | 285 | 30 | .532 | A클래스: 3회, B클래스: 2회 |
- 순위에서 '''굵은 글씨'''는 일본 시리즈 우승.
:*2020년에는 니시무라 노리후미 감독이 팀 성적 부진으로 사임한 후 8월 21일부터 시즌 종료까지 감독 대행을 맡음
4. 3. 1. 첫 기록
- 첫 출장·첫 선발 출장: 1987년 10월 18일, 대 난카이 호크스 26차전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8번·포수로 선발 출장
- 첫 안타: 1988년 4월 30일, 대 롯데 오리온즈 4차전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3회말에 니시나 도키나리로부터
- 첫 홈런·첫 타점: 1988년 6월 22일, 대 세이부 라이온즈 13차전 (세이부 라이온즈 구장), 9회초에 모리 시게카즈로부터 솔로
- 첫 도루: 1988년 7월 4일, 대 니혼햄 파이터스 7차전 (도쿄 돔), 7회초에 2루 도루 (투수: 니시자키 유키히로, 포수: 타무라 후지오)
4. 3. 2. 기록 달성 경력
4. 3. 3. 기타
- 1군 프로 생활 기간: 29년 (1987년~2015년)[16]
- 올스타전 출장: 6회 (1989년~1991년, 1995년, 1996년, 1999년)
- 3개 구단에서 일본 시리즈 출장 및 안타 기록
- 베스트 나인: 1회 (포수 부문: 1995년)
- 골든 글러브상: 1회 (포수 부문: 1989년)
- 쇼리키 마쓰타로상: 1회 (2022년)
- 월간 MVP: 1회 (야수 부문: 1991년 6월)
- 최우수 배터리상: 1회 (1995년 투수: 히라이 마사시)
- 퍼시픽 리그 연맹 특별 표창: 3회 (최우수 감독상: 2021년 - 2023년)
- 선수 시절 등번호
연도 | 등번호 |
---|---|
1987년 - 1988년 | 53 |
1989년 - 1997년, 2011년 - 2015년 | 27 |
1998년 - 1999년 | 5 |
2000년 - 2002년 | 22 |
2003년 | 35 |
2004년 - 2010년 | 32 |
2018년 | 72 |
2019년 - | 78 |
4. 4. 등번호
연도 | 등번호 |
---|---|
1987년~1988년 | 53 |
1989년~1997년, 2011년~2015년 | 27 |
1998년~1999년 | 5 |
2000년~2002년 | 22 |
2003년 | 35 |
2004년~2010년 | 32 |
2018년 | 72 |
2019년~2024년 | 78 |
2000년에는 와다 가즈히로와 등번호를 교환했는데(나카지마: 5→22, 와다: 22→5), 나카지마에 따르면 "22가 포수의 이미지가 강하다"는 이유로, 당시에는 포수로 등록되었지만 이미 외야수로서의 출장이 많았던 와다에게 제안한 것이라고 한다.[10]
5. 연도별 성적
연도 | 소속 | 순위 | 경기 | 승 | 패 | 무 | 승률 | 비고 |
---|---|---|---|---|---|---|---|---|
2020년 | 오릭스 | 6 | 46 | 18 | 26 | 2 | .409 | 감독 대행[2][3] |
2021년 | 오릭스 | 1 | 143 | 70 | 55 | 18 | .560 | |
2022년 | 오릭스 | 1 | 143 | 76 | 65 | 2 | .539 | 일본 시리즈 우승,[2][3] 쇼리키 마쓰타로상 수상[4] |
2023년 | 오릭스 | 1 | 143 | 86 | 53 | 4 | .619 | |
2024년 | 오릭스 | 5 | - | - | - | - | - | 시즌 도중 사임[5] |
통산 | 475+ | 250+ | 199+ | 26+ | .557+ |
나카지마 사토시는 2020년 니시무라 노리후미를 대신하여 오릭스의 감독 대행을 맡았고,[2][3] 2021년부터 정식 감독으로 취임했다. 오릭스를 이끌고 퍼시픽 리그 2년 연속 우승(2022~2023)과 2022년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2][3] 하위권 팀이었던 오릭스를 일본 시리즈 챔피언으로 탈바꿈시킨 공로로 2022년 쇼리키 마쓰타로상을 수상했다.[4] 그러나 2024년, 성적 부진을 이유로 감독직에서 물러났다.[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