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우조
1. 개요
양우조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하며 기관지 《한성》을 발행하고 '삼민주의란 무엇인가'를 번역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다양한 보직을 수행했으며, 한국광복군에서 정령을 지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고, 1999년 국가보훈처 선정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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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904년 8월 20일 |
|---|---|
| 사망 | 1964년 7월 2일 |
| 본관 | 청주 양씨 |
| 주요 활동 | 독립운동가 언론인 |
|---|---|
| 주요 경력 | 조선일보 기자 동아일보 기자 상해 임시정부 교통국원 한국독립당 선전위원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 주화대표단 비서 대한민국 건국준비위원회 선전부위원 국민대학교 법정대학장 |
| 독립 운동 | 상해 임시정부 활동 |
|---|---|
| 관련 단체 | 한국독립당 대한민국 건국준비위원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
| 부친 | 양기하 |
|---|---|
| 배우자 | 최선화 |
| 자녀 | 양영철 양완수 양인수 양정수 양희수 |
| 최종 학력 | 중국국민대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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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 양씨 -
양명문
양명문은 평안남도 평양 출신의 시인이자 교육자로, 시집 『화수원』으로 등단하여 〈명태〉 등의 시를 발표하고 여러 대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격동의 시대상을 반영한 작품들을 남겨 한국 문학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
중화 양씨 -
양찬우
양찬우는 대한민국 군인 출신 정치인으로,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한국 전쟁에 참전하고 소장으로 예편하여 경상남도지사와 내무부 장관을 거쳐 민주공화당 소속 4선 국회의원, 문교공보위원장, 내무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정계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
한국 사람에 관한 -
한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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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에 관한 -
김조국
김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2019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
한국의 독립운동가 -
손병희
손병희는 조선 말 동학의 지도자이자 대한제국의 종교인, 독립운동가로서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3·1 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며 인내천 사상을 강조했다. -
한국의 독립운동가 -
이상화 (시인)
이상화는 일제강점기의 저항 시인으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같은 작품을 통해 민족의 저항 의지를 표현했으며, 민족 시인으로서의 고뇌와 헌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그의 작품과 정신은 현재에도 재평가되고 있다.
2. 생애
양우조는 평남 강서군 증산면 취룡리에서 양기영의 6남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조실부모하여 동생 양익조와 함께 이모 박씨 아래서 자라며 한학을 공부하다가, 1915년 강명화 (건국훈장 애족장)의 딸 강영실과 결혼하였다. 강명화는 1905년 아들 영문, 영소, 영상, 영각을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간 지역 유지이자 개화한 지주였다. 이들 부자들은 훗날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강명화와 차남 강영소 (건국훈장 독립장)은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 총회장을 역임했다. 영대, 영문, 영상, 영각도 건국훈장과 건국포장을 받아 이 집안은 아버지, 아들, 사위까지 모두 일곱명이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유공자 가족이다.
1917년 장인 강명화의 주선으로 상해를 거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21세의 나이였으나 인디애나주의 초등학교에서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중학교를 졸업한 뒤 1924년 매사추세츠 공과대학 뉴벳포드 방직학과에 입학하여 방직 기술을 공부했다. 1925년 손위 처남 강영소가 발기인중 하나인 흥사단에 가입 (단우번호 199)했고, 1927년 같은 시기 유학했던 고향 친구 최희송, 오정수와 함께 귀국했다. 일제의 방해로 고향에 방직공장을 세우려던 꿈을 접고, 1930년대 초반 강영대, 강영소, 강영문의 지원으로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 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한국독립당에 가담하여 기관지 《한성(韓聲)》을 발행하고, '삼민주의란 무엇인가'를 최초로 번역하여 독립 후 국가 건설에 대한 고민을 담아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의정원, 생계부, 재무부 등 다양한 보직을 수행했고, 한국광복군 정훈처에서 정령을 지냈다.
1937년, 중국에서 이화여전 출신 독립운동가 최선화(건국훈장 애족장)와 재혼하였다. 1938년 중국에서 딸 양제시를 낳았고, 부인과 함께 1946년 귀국 때까지 육아일기를 겸한 일기장을 작성했는데, 이는 1997년 '제시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2022년 천안 독립기념관에 양우조 어록비가 설치되었다.
양우조는 광복 후 1946년에 귀국하여 3.1동지회 회장 등을 지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고, 1999년 국가보훈처 선정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2.1. 초기 생애 및 미국 유학 (1897년 ~ 1927년)
양우조는 평남 강서군 증산면 취룡리에서 양기영의 6남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조실부모하여 동생 양익조와 함께 이모 박씨 아래서 자라며 한학을 공부하다가, 1915년 강명화 (건국훈장 애족장)의 딸 강영실과 결혼하였다. 강명화는 1905년 아들 영문, 영소, 영상, 영각을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간 지역 유지이자 개화한 지주였다. 이들 부자들은 훗날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강명화와 차남 강영소 (건국훈장 독립장)은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 총회장을 역임했다. 영대, 영문, 영상, 영각도 건국훈장과 건국포장을 받아 이 집안은 아버지, 아들, 사위까지 모두 일곱명이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유공자 가족이다.
1917년 장인 강명화의 주선으로 상해를 거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21세의 나이였으나 인디애나주의 초등학교에서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중학교를 졸업한 뒤 1924년 매사추세츠 공과대학 뉴벳포드 방직학과에 입학하여 방직 기술을 공부했다. 1925년 손위 처남 강영소가 발기인중 하나인 흥사단에 가입 (단우번호 199)했고, 1927년 같은 시기 유학했던 고향 친구 최희송, 오정수와 함께 귀국했다. 일제의 방해로 고향에 방직공장을 세우려던 꿈을 접고, 1930년대 초반 강영대, 강영소, 강영문의 지원으로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 운동에 뛰어들었다.
2.2. 독립운동 투신 (1927년 ~ 1945년)
양우조는 평남 강서군 증산면 취룡리에서 태어나 조실부모하여 이모 박씨 아래서 자랐다. 한학을 공부하다가 1915년 강명화의 딸 강영실과 결혼하였다. 강명화는 1905년 아들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간 개화한 지주였으며,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 총회장을 역임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양우조는 1917년 장인의 주선으로 상해를 거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21세의 늦은 나이였으나 인디애나 주의 초등학교에서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중학교를 졸업하고, 1924년 매사추세츠 공과대학 뉴벳포드 방직학과에 입학하여 방직 기술을 공부했다.
1925년에는 손위 처남 강영소가 발기인 중 하나인 흥사단에 가입(단우번호 199)했다. 1927년, 고향 친구 최희송, 오정수와 함께 귀국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고향에 방직공장을 세우려던 꿈은 좌절되었다. 1930년대 초반, 강영대, 강영소, 강영문의 지원으로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 운동에 투신하였다.
이후 한국독립당에 가담하여 기관지 《한성(韓聲)》을 발행하고, '삼민주의란 무엇인가'를 최초로 번역하여 독립 후 국가 건설에 대한 고민을 담아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의정원, 생계부, 재무부 등 다양한 보직을 수행했고, 한국광복군 정훈처에서 정령을 지냈다.
1937년, 중국에서 이화여전 출신 독립운동가 최선화(건국훈장 애족장)와 재혼하였다. 1938년 중국에서 딸 양제시를 낳았고, 부인과 함께 1946년 귀국 때까지 육아일기를 겸한 일기장을 작성했는데, 이는 1997년 '제시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2022년 천안 독립기념관에 양우조 어록비가 설치되었다.
2.3. 광복 이후 활동 (1945년 ~ 1964년)
양우조는 광복 후 1946년에 귀국하여 3.1동지회 회장 등을 지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고, 1999년 국가보훈처 선정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1937년 중국에서 이화여전 출신 최선화(건국훈장 애족장)를 만나 재혼하였다. 1938년 중국에서 딸 양제시를 낳으면서 부인과 함께 육아일기를 겸한 일기장을 1946년 귀국 때까지 작성했는데, 이 내용은 1997년 '제시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2022년 천안 독립기념관에 양우조 어록비가 설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