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하르트만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에리히 하르트만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공군의 전투기 조종사로, 352대의 적기를 격추하여 역사상 가장 많은 격추 기록을 보유한 에이스 파일럿이다. 그는 1922년 독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중국에서 보냈으며, 글라이더 훈련을 통해 비행 경력을 시작했다. 1942년 동부 전선에 투입되어 뛰어난 전투 기술을 발휘했으며, 1944년에는 최고 훈장인 다이아몬드 기사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전쟁 후 서독 공군에 복귀하여 제트기 부대를 지휘했으나, F-104 스타파이터의 안전 문제를 비판하다가 조기 퇴역했다. 하르트만은 1993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삶은 여러 책과 미디어에서 다루어졌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공군 대령 - 콘스탄틴 로자노프
콘스탄틴 로자노프는 러시아 출생으로 프랑스 공군에서 복무하며 프랑스 최초로 음속 장벽을 돌파했고, 시험 비행 중 사고로 사망하여 프랑스 공군 훈장과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았다. - 냉전기 독일의 군인 - 한스 슈파이델
한스 슈파이델은 제1,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고, 서부 전선에서 롬멜 원수의 참모장으로 복무하며 히틀러 암살 계획에 연루되었으며, 전후 서독 재군비에 기여하고 NATO 사령관을 지냈으나, 유대인 학살 연루 의혹과 롬멜 배신 논란 등 비판도 받는 독일 군인이다. - 냉전기 독일의 군인 - 귄터 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공군 에이스 전투기 조종사였던 귄터 랄은 621회 전투 임무에서 275대의 연합군 항공기를 격추하여 역사상 세 번째로 성공적인 에이스로 기록되었으며, 전후 독일 연방 공군에서 요직을 역임했으나 논란으로 불명예 퇴역했다. - 곡엽검금강석 기사십자 철십자장 수훈자 - 알베르트 케셀링
알베르트 케셀링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주요 전선에서 활약한 독일 공군 원수로, 뛰어난 지휘 능력으로 명성을 얻었으나, 전후 전범으로 기소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 곡엽검금강석 기사십자 철십자장 수훈자 - 에르빈 롬멜
에르빈 롬멜은 제1, 2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한 독일 군인으로,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사막의 여우'라는 별칭을 얻으며 뛰어난 전술적 능력과 용맹함을 떨쳤으나, 전쟁 후반기 나치즘에 환멸을 느끼고 히틀러와 결별 후 암살 미수 사건 연루 의혹으로 자살을 강요받았으며, 군사적 재능과 나치 정권과의 관계로 논란이 있는 인물이다.
에리히 하르트만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본명 | 에리히 알프레트 하르트만 |
별칭 | 부비 ("꼬마") 검은 악마 |
출생 | 1922년 4월 19일 |
출생지 | 바이마르 공화국 뷔르템베르크 자유인민주 바이스자흐 |
사망 | 1993년 9월 20일 (71세) |
사망지 |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주 바일임쇤부흐 |
묘지 | 바일임쇤부흐 신 공동묘지 |
군사 경력 | |
소속 | (1940–1945) (1956–1970) |
복무 기간 | 1940–1945 1956–1970 |
최종 계급 | 국방군 소령 연방군 대령 |
지휘 | 제52전투항공단 제1비행대, 제71전투항공단 |
부대 | 제52전투항공단 제53전투항공단 제71전투항공단 "리히트호펜" |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동부 전선 제3제국의 방어 |
수상 | 백엽 검 다이아몬드 기사 철십자 훈장 |
이후 활동 | 민간 항공 비행 교관 |
2. 초기 생애와 경력
에리히 하르트만은 1922년 4월 19일 뷔르템베르크 바이샤흐에서 의사인 아버지 알프레드 에리히 하르트만과 어머니 엘리자베트 빌헬미네 마흐토르프 사이에서 태어났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의 경제 공황으로 인해 하르트만의 아버지는 중화민국에서 직업을 찾아야 했고, 에리히는 어린 시절을 중국에서 보냈다. 1928년, 중국 내전이 발발하면서 가족은 독일로 돌아왔다.[1]
1942년 10월, 하르트만은 동부 전선 소련에 주둔한 제52 전투 비행단(JG 52)에 배속되었다. JG 52는 메서슈미트 Bf 109G를 장비했지만, 하르트만은 처음에 융커스 Ju 87 슈투카를 수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후베르투스 폰 보닌 소령이 이끄는 JG 52의 III. Gruppe에 배속되었고,[1] 에드문트 "파울레" 로스만의 지휘를 받았다. 그는 알프레트 그리슬라브스키, 한스 담머스, 요제프 츠베르네만과 같은 숙련된 조종사들과 함께 비행했다.
하르트만은 바일 임 쇤부흐의 국민학교(1928년 4월 – 1932년 4월), 뵘블링겐의 김나지움(1932년 4월 – 1936년 4월), 로트바일의 국립 정치 교육 기관(나치 중등 교육 학교) (1936년 4월 – 1937년 4월), 코른탈의 김나지움 (1937년 4월 – 1940년 4월)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코른탈에서 아비투어를 받고 미래의 아내인 우르술라 "우쉬" 패치를 만났다.[2]
하르트만의 비행 경력은 갓 출범한 공군의 글라이더 훈련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시작되었으며, 그의 어머니는 독일 최초의 여성 글라이더 조종사 중 한 명이었다. 하르트만 가족은 경비행기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1932년 독일 경제가 붕괴되면서 매각해야 했다.[3] 1933년 나치당의 집권은 글라이딩에 대한 정부 지원을 이끌었고, 1936년 엘리자베트 하르트만은 바일 임 쇤부흐에 글라이더 클럽을 설립하고 강사로 활동했다.[4] 14세의 하르트만은 히틀러 유겐트에서 글라이딩 강사가 되었고, 1937년에는 동력 비행기를 조종할 수 있는 조종사 면허를 취득했다.
하르트만은 1940년 10월 1일 칼리닌그라드주 노이쿠렌의 제10 비행 연대에서 군사 훈련을 시작했다. 1941년 3월 1일, 베를린-가토의 Luftkriegsschule 2(공군 전쟁 학교 2)로 진급하여 교관과 함께 첫 비행을 하고, 3주가 채 안 되어 첫 단독 비행을 했다. 1941년 10월에 기본 비행 훈련을 마치고, 1941년 11월 1일 노이슈타트 안 데어 바인슈트라세의 예비 전투기 학교 2에서 고급 비행 훈련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하르트만은 전투 기술과 사격 기술을 배웠다. 그의 고급 조종사 훈련은 1942년 1월 31일에 완료되었고, 1942년 3월 1일부터 1942년 8월 20일 사이에는 Jagdfliegerschule 2(전투기 조종사 학교 2)에서 메서슈미트 Bf 109를 비행하는 법을 배웠다.
훈련 조종사로서 하르트만의 시간은 항상 순조롭게 흘러가지 않았다. 1942년 3월 31일, 사격 훈련 비행 중에 규정을 무시하고 제르브스트 비행장에서 자신의 Bf 109로 곡예 비행을 했다. 그의 처벌은 2/3의 급여를 벌금으로 징수하고 1주일 동안 자택 연금이었다. 하르트만은 나중에 그 사건이 자신의 생명을 구했다고 회상했다.
이후 하르트만은 부지런히 연습했고, 다른 젊은 조종사들에게 "근육이 아닌 머리로 비행하라."는 새로운 신념을 전달했다. 1942년 6월 사격 연습 세션에서 그는 할당된 50발의 기관총 사격 중 24발로 드로그 표적을 명중시켰는데, 이는 달성하기 어려운 업적으로 여겨졌다. 그의 훈련을 통해 17가지 종류의 동력 항공기를 조종할 자격을 얻었고, 졸업 후 1942년 8월 21일 크라쿠프의 ''Ergänzungs-Jagdgruppe Ost''(보충 전투기 그룹, 동부)에 배치되어 1942년 10월 10일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3. 제2차 세계 대전
하르트만은 로스만의 윙맨으로 배치되었는데, 이는 그의 성공 요인 중 하나였다. 그리슬라브스키는 하르트만에게 어디를 조준해야 하는지에 대한 조언도 해주었다. 하르트만은 "보고 – 결정 – 공격 – 이탈" 전술을 채택했다. 이 전술은 로스만에게서 배운 것으로, 그는 한쪽 팔을 다쳐 격렬한 공중전에 참여할 수 없었다. 로스만의 해결책은 상황을 평가한 다음, 회피 기동을 하지 않는 표적을 선택하여 근거리에서 파괴하는 것이었다.
1942년 10월 14일 첫 실전 임무를 수행했지만, 공중전 규칙을 위반하고 연료 부족으로 추락했다.[1] 이후 그는 매복 및 기습 전술의 대가로 성장했으며, 공중전보다는 기습하여 근거리에서 사격하는 것을 선호했다.[3] 발터 크루핀스키에게서 배운 기술로, 20m 이하의 거리에서 짧게 일제 사격을 가했다.[3]
1944년 8월 24일, 하르트만은 두 번의 전투 임무에서 11대의 항공기를 격추시켜 300승을 돌파했다. 이는 그의 역대 최고 하루 격추 비율("하루에 더블 에이스")을 기록하며 공중전 승리 횟수를 301승으로 만들었다.[1] 그는 검, 잎사귀, 다이아몬드 기사 철십자 훈장을 받은 27명의 독일 군인 중 한 명이었다.[1] 아돌프 히틀러로부터 직접 훈장을 받았다.[1]
1945년 5월 8일, 하르트만은 1,405번째이자 마지막 출격을 했다. 이날 소련군 Yak-1 전투기를 격추하고 연기에 휩싸여 이탈했다. 한편, 격추당한 소련기 편대는 근처를 비행하던 미군기 편대를 공격하여 미군과 소련군 간의 아군 오사를 일으켰다는 일화가 있다.[3] 같은 날, 독일이 연합국에 항복하면서 하르트만은 최종 격추수 352기, 피격 16회로 종전을 맞았다.[3]
3. 1. 첫 공중전 승리
1942년 10월, 하르트만은 동부 전선 소련에 주둔한 제52 전투 비행단(JG 52)에 배속되었다.[1] 1942년 10월 14일, 에드문트 "파울레" 로스만의 편대원으로 첫 실전 임무를 수행했다. 하르트만은 아래에서 적기 10대를 만났을 때, 참을성이 부족하여 전속력으로 기체를 몰아 로스만과 떨어졌다. 적 전투기와 교전했으나 명중탄을 기록하지 못하고 충돌할 뻔했다. 이후 낮은 구름 속으로 숨어 들어갔고, 결국 연료가 떨어져 추락하면서 임무가 종료되었다. 하르트만은 공중전의 거의 모든 규칙을 위반하여 3일 지상 근무 형을 선고받았다.[1]
1942년 11월 5일, 하르트만은 제7근위 지상 공격 항공 연대의 일리우신 Il-2 ''슈토르모빅''을 격추하며 첫 승리를 기록했다.[1] 그러나 Il-2 파편으로 인해 Bf 109 G-2 엔진이 손상되어 강제 착륙해야 했다.[1]
1943년 4월 1일, 하르트만의 비행단은 쿠반 교두보 전투 지역으로 이동하여 타만에 있는 비행장에 주둔했다.[1] 하르트만의 젊은 외모는 "Bubi"(독일어로 "어린 소년"의 애칭)라는 별명을 얻게 했고,[1] 발터 크루핀스키는 "이봐, Bubi, 더 가까이 붙어!"라고 끊임없이 재촉했다.[1] 1943년 5월 25일, 소련 전투기와 충돌했지만, 꾸준히 실력을 향상시켰다.[1]
3. 2. 쿠르스크 전투와 에이스 등극
시타델 작전을 준비하기 위해, 에리히 하르트만의 제3비행단(III. ''Gruppe'')은 동부 전선의 중앙 지역으로 이동했다. 제3비행단은 먼저 자포로제로 이동한 다음 7월 3일 우그림으로 이동했다.[1] 그곳에서 제4 항공군의 지휘 아래, 돌출부 남쪽 측면에서 남부 집단군을 지원했다.[1] 7월 5일 하르트만은 쿠르스크 전투 동안 벌어진 대규모 공중전에서 4대의 항공기를 격추했다.[2] 7월 7일, 그는 처음으로 "하루 에이스"가 되어, 3대의 Il-2 지상 공격기와 4대의 라보킨 LaGG 전투기를 포함하여 총 7대의 항공기를 격추했다.[3]
1943년 8월 초, 그의 격추 수는 42대였지만, 8월 말에는 두 배 이상 증가했다.[4] 붉은 군대는 독일군의 작전을 저지하고 병력을 파괴하기 위해 쿠투조프 작전과 폴코보데츠 루먄체프 작전을 개시하며 반격을 시작했다.[4] JG 52는 그 달 내내 방어 작전에 참여했다. 8월 1일, 하르트만은 LaGG 전투기를 상대로 5대를 격추하며 다시 "하루 에이스"가 되었다. 8월 5일, 제3비행단은 하르코프 동쪽 10km 떨어진 하르코프-로간 비행장으로 이동하여 소련의 벨고로드-하르코프 공세 작전에 맞서 싸웠다. 8월 20일, Il-2와의 교전에서 그의 Bf 109 G-6 (''Werknummer'' 20485—공장 번호)가 잔해에 손상되어 아르테미우스크 근처에서 오전 6시 20분에 소련군 후방에 강제 착륙했다. 하르트만은 이후 탈출하여 8월 23일 부대로 돌아왔다.
9월 2일, 그는 9./JG 52의 ''Staffelkapitän''(비행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8월 29일에 실종된 베르톨트 코르츠 중위를 대신했다. 1943년 9월 20일, 하르트만은 100번째 공중전 승리를 기록했는데, 이날 4대를 격추하여 총 101대를 기록했다. 그는 100번째 격추를 달성한 54번째 루프트바페 조종사였다. 10월 29일, 148번째 격추를 기록하며 철십자 기사 십자 훈장(Ritterkreuz des Eisernen Kreuzesde)을 받았다.
3. 3. 전투 기술
하르트만은 매복 및 기습 전술의 대가였으며, 공중전보다는 기습하여 근거리에서 사격하는 것을 선호했다.[3] 그는 전 지휘관인 발터 크루핀스키에게서 배운 기술로, 20m 이하의 극도로 가까운 거리까지 사격을 참았다가 짧게 일제 사격을 가했다.[3] 이 전술은 장거리 사격과 달리 다음과 같은 이점을 제공했다.
하르트만의 접근 방식은 "보고-결정-공격-반전"으로 묘사되었다.[3] 즉, 적을 관찰하고, 공격 방법을 결정하고, 공격을 수행한 다음, 상황을 재평가하기 위해 이탈하는 것이다. 공격받을 경우, 하르트만은 직선 비행을 하고, [요] 방향타를 사용하여 Bf 109를 약간 다른 방향으로 향하게 하여 공격자가 필요한 편향 사격의 양에 대해 오해하게 했다.
귄터 랄은 에리히 하르트만의 업적이 단 하나의 예외적인 재능에 기반하지 않는다며, 뛰어난 비행술, 시력, 공격성을 냉철한 정신으로 제어하는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3]
3. 4. 기사 철십자 훈장 수여
1944년 1월, 하르트만은 50대 이상의 소련 항공기를 격추했다고 주장했다. 2월 26일에는 10대를 더 격추하여 총 202대가 되었다. 그의 놀라운 성공률은 루프트바페 고위 사령부에서도 몇몇 의문을 제기했지만, 그의 주장은 이중 및 삼중으로 확인되었다. 1944년 3월, 하르트만, 게르하르트 바르크호른, 발터 크루핀스키, 요하네스 비제는 아돌프 히틀러의 베르크호프 (베르히테스가덴)로 소환되었다. 바르크호른은 검을 수여받고, 하르트만, 크루핀스키, 비제는 철십자 기사 십자 훈장, 참나무 잎(Ritterkreuz des Eisernen Kreuzes mit Eichenlaubde)을 수여받았다.[1]
3. 5. 다이아몬드 기사 철십자 훈장
1944년 8월 24일, 하르트만은 두 번의 전투 임무에서 11대의 항공기를 격추시켜 300승을 돌파했다. 이는 그의 역대 최고 하루 격추 비율("하루에 더블 에이스")을 기록하며 공중전 승리 횟수를 전례 없는 301승으로 만들었다.[1] 하르트만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검, 잎사귀, 다이아몬드 기사 철십자 훈장을 받은 27명의 독일 군인 중 한 명이었다.[1] 그는 아돌프 히틀러로부터 직접 훈장을 받았다.[1]
하르트만은 아돌프 갈란트의 Me 262 시험 프로그램 전출 요청을 거절하고 JG 52에 남았다.[1]
3. 6. 마지막 전투 임무
1945년 1월, 하르트만은 Me 262 터보 제트 엔진 전투기 전환 훈련을 받았으나, 한 달 만에 JG 52에 복귀했다.[3] 1945년 2월, 제52 전투 항공단 제I 비행대장에 임명되었다.[3] 1945년 4월 4일, 350번째 격추를 기록했다.[3]
1945년 5월 8일, 하르트만은 1,405번째이자 마지막 출격을 감행했다. 이날 소련군 Yak-1 전투기를 기습하여 격추하고 연기에 휩싸여 이탈했다. 한편, 누구에게 격추당했는지 알 수 없었던 소련기 편대는 우연히 근처를 비행하던 미군기 편대를 공격하여 미군과 소련군 간의 아군 오사를 일으켰다는 일화가 전해진다.[3] 같은 날, 독일이 연합국에 항복하면서 하르트만은 최종 격추수 352기, 피격 16회로 종전을 맞았다.[3]
3. 7. 서독 공군 복귀
하르트만은 오랜 수감 생활을 마치고 서독으로 돌아와 서독 공군에 복귀하여 장교가 되었다. 1959년 6월 6일부터 1962년 5월 29일까지 서독 최초의 제트기 부대인 제71 전투비행단 "리히트호펜"을 지휘했다.[1] 이 부대는 처음에는 캐나데어 세이버로 장비되었고, 이후 록히드 F-104 스타파이터로 교체되었다.[1]
하르트만은 여러 차례 미국을 방문하여 미국 공군 장비를 훈련받았다.[1] 1957년, 하르트만은 미국 교관들과 함께 애리조나 주 루크 공군 기지에서 훈련을 받았다. Republic F-84 썬더제트 전투기 과정은 60일간 진행되었으며, 록히드 T-33에서 33시간, Republic F-84F 썬더스트릭에서 47시간의 비행 시간을 가졌다.[2]
하르트만은 F-104를 결함이 있고 안전하지 않은 항공기로 여겼으며, 독일 공군의 채택에 강력히 반대했다.[3] 1957년에 이미 캄후버에게 새로운 항공기를 공군에 투입하기 전에 먼저 몇 대를 구매하여 평가할 것을 권고했다.[3] 그러나 그의 솔직한 비판은 상관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1970년에 조기 퇴직을 강요받았다.[3] 실제로 서독에서는 F-104의 사고가 다발하여, "미망인 제조기"라고 조롱당할 정도의 사태가 발생했고, 하르트만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1971년부터 1974년까지 하르트만은 본 근처 행겔라에서 비행 교관으로 일했으며, 다른 전쟁 시기 조종사들과 함께 비행 행사에 참여했다.[3]
4. 유산과 대중 문화
하르트만은 미국의 작가 트레버 J. 콘스터블과 레이먼드 F. 톨리버가 쓴 전기 독일의 금발 기사(The Blond Knight of Germany)의 주인공이었다. 1970년 미국에서 처음 출간되었고, 이듬해 독일에서 ''Holt Hartmann vom Himmel!'' ("하르트만을 격추하라!")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금발 기사''는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으며 미국과 독일 대중에게 널리 읽혔다. 이 책은 최근 미국과 독일의 역사 기술에서 비역사적이고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로널드 스멜서와 에드워드 J. 데이비스는 저서 동부 전선의 신화(The Myth of the Eastern Front)에서 이 책을 "깨끗한 국방군" 신화를 조장한 주요 작품 중 하나로 묘사했다.[1]
역사학자 옌스 베너는 독일어판 책이 독일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지만 역사적 현실을 제시하는 데 심각한 결함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여기에는 나치 독일의 선전에서 가져온 ''플리에가세'' (에이스)의 요소를 무비판적으로 차용하고 소련에 대한 고정관념이 포함되었다. 베너에 따르면 후자는 냉전 시대의 지배적인 태도에서 비롯될 수 있었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의 정치적, 사회적 결과는 완전히 무시되었다.[2]
5. 주요 전과
훈장 | 수여 날짜 | 비고 |
---|---|---|
공군 전선 비행 죔쇠 금장, "1300" 깃발 포함 | ||
조종사/관측사 배지 금장, 다이아몬드 포함 | 1944년 8월 25일 | |
동부 전선 훈장 | ||
철십자 훈장 (1939) 2급 | 1942년 12월 17일 | |
철십자 훈장 (1939) 1급 | 1943년 3월 7일 | |
공군 명예 잔 | 1943년 9월 13일 | 소위이자 조종사 자격으로 수여 |
독일 십자 훈장 금장 | 1943년 10월 17일 | 제III./제52 전투비행단의 소위 자격으로 수여 |
기사 철십자 훈장, 오크 잎, 검 및 다이아몬드 포함 | ||
기사 철십자 훈장 | 1943년 10월 29일 | 제9대대/제52 전투비행단의 소위이자 조종사 자격으로 수여[1] |
420번째 오크 잎 | 1944년 3월 2일 | 제9대대/제52 전투비행단의 소위이자 대대장 자격으로 수여[2] |
75번째 검 | 1944년 7월 2일 | 제9대대/제52 전투비행단의 대위이자 비행대장 자격으로 수여[2] |
18번째 다이아몬드 | 1944년 8월 25일 | 제9대대/제52 전투비행단의 대위이자 비행대장 자격으로 수여[2] |
하르트만은 전쟁 포로로 잡혀있는 동안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숨기고 버렸다고 주장했다. 숨겨진 장소는 작은 개울이었다. 그의 동료인 한스 "아시" 한은 기사 십자 훈장을 담배 케이스 이중 바닥에 숨겨서 석방될 때 독일로 밀반입했다.[3]
6. 계급
시기 | 계급 | 비고 |
---|---|---|
1942년 4월 1일 | 소위 | 국방군 공군 |
1944년 5월 1일 | 대위 | 국방군 공군 |
1944년 9월 1일 | 대위 | 국방군 공군 |
1945년 5월 8일 | 소령 | 국방군 공군[1] |
1960년 12월 12일 | 중령 | 연방군 공군 |
1967년 7월 26일 | 대령 | 연방군 공군 |
참조
[1]
문서
Organization of the Luftwaffe during World War II
[2]
웹사이트
The Final Interview with Erich Hartmann
https://migflug.com/[...]
[3]
문서
初撃墜から150機撃墜までの記録が残っている。352機までの記録も存在したが、こちらは終戦時に米軍あるいはチェコスロバキア軍により接収され行方不明
[4]
문서
但し一度だけ僚機が撃墜された事がある。戦争末期戦闘機パイロットの補充のため爆撃機パイロットであったギュンター・カピト少佐が機種転換訓練も受けずにハルトマンの戦隊に配属された。ハルトマンは出撃しても生き残れないと考え彼の出撃を制限していたが、10歳以上年長でかつ階級も上の彼の出撃を認めよとの催促に負けて僚機として出撃を許可した。しかし、彼はソ連のエースパイロット機に撃墜されてしまう。幸い不時着し事無きを得た。なお、戦後ハルトマンと一緒に捕虜となり10年抑留生活を送ったが、彼はハルトマンに対してこの時のことについて感謝の意を示している。事実、ハルトマンの僚機を務めた者で彼と行動中に戦死した者はいない。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