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에른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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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이에른 공국은 6세기부터 1918년까지 존재했던 역사적 지역으로, 다양한 시대를 거치며 정치적, 지리적으로 변화를 겪었다. 551년에서 8세기까지는 부족 공국 시대로, 아기롤핑거 가문이 통치했으며, 프랑크 왕국 시대를 거치며 자치권이 축소되었다. 10세기부터는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로, 비텔스바흐 가문이 1180년부터 통치하며 공작, 선제후, 국왕으로 이어졌다. 지리적으로는 현재 독일 남부와 오스트리아, 헝가리 일부를 포함했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티롤, 잘츠부르크 등이 분리되어 나갔다. 비텔스바흐 가문은 분열과 재통합을 반복하며 종교 개혁과 반종교 개혁 시기를 겪었고, 1918년까지 바이에른을 통치했다.
바이에른 공국의 역사는 6세기경 부족 공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551년에서 555년 사이, 요르다네스의 《게티카》에 따르면, 바이에른인들은 동쪽에, 프랑크족은 서쪽에 거주했다.
중세 바이에른 부족공국은 오늘날의 독일 남부와 도나우강을 따라있는 오스트리아 대부분, 동쪽으로 라이타강 지류를 따라 뻗어있는 헝가리 국경까지에 해당했다. 노르트가우 변경백령 (이후 오버팔츠)과 같이 오늘날 바이에른 주의 알트바이에른이 포함되었으며, 슈바벤과 프랑켄 지역들은 제외되었다. 976년 케른텐 공국의 분리는 오늘날 슬로베니아의 인접한 크란스카 지역 뿐만 아니라 오늘날 오스트리아의 케른텐주와 슈타이어마르크주를 포함한 넓은 동알프스 지역들의 상실을 일으켰다. 동쪽의 오스트리아 변경백국 - 현재의 니더외스터라이히와 대략적 일치 - 역시도 1156년에 자신들만의 권리를 갖고 공국으로 승격했다.
[1]
서적
Henry "The Proud"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11
2. 역사
아기롤핑거 가문 출신의 바이에른의 가리발트 1세는 555년부터 메로빙거 왕조의 봉신으로서 상당한 자치권을 가지고 통치했다.[1] 바이에른은 동쪽으로 엔스강까지, 남쪽으로는 브레너 고개를 넘어 남티롤의 아디제강 상류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743년경, 바이에른의 오딜로는 카란타니야의 슬라브족 군주들을 가신으로 삼았다.[2] 레겐스부르크는 아길롤핑가 공작들의 중심지였다.[2]
기독교화 과정에서, 724년 이전 코르비니아노는 프라이징 교구의 기초를 마련했다. 7세기 성 킬리안은 프랑켄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했고, 보니파시오는 742년 뷔르츠부르크 교구를 설립했다. 739년 파사우 교구가 설립되었고, 남쪽에서는 696년 잘츠부르크 교구가 설립되었다. 798년 교황 레오 3세는 바이에른 교회 관구를 설립했다.[3]
6세기경 바이에른 초기 국가는 레히 강과 엔스 강 사이, 피히텔 산지와 알프스 산맥·트리엔트 지역을 차지했으며, 바이에른의 가리발트 1세 시대에 수도는 레겐스부르크였다.[4] 바이에른의 타실로 1세는 슬라브인과 아바르족에 대해 적대 행위를 했고, 바이에른의 가리발트 2세 통치하에 ‘바이에른 법전’이 도입되었다.[4] 바이에른의 테오도 2세 시대에 기독교가 확산되었다.[4]
카를 마르텔의 사위인 바이에른의 오딜로는 카를로만과 피핀 3세에 의해 실각했다. 성 보니파티우스 대주교에 의해 바이에른 교회는 4개의 주교구로 나뉘고 여러 수도원이 건립되었다.
바이에른의 타실로 3세는 피핀 3세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나, 롬바르디아 왕 데시데리우스와 동맹을 맺고 반프랑크 동맹을 결성했지만 실패했다. 카롤루스 대제는 타실로 3세를 굴복시켰고, 788년 인겔하임 국가 회의에서 타실로 3세는 사형 및 수도원 유폐를 당하고, 바이에른은 프랑크 국가에 통합되었다.
카롤링거 왕조의 프랑크 제국 부흥으로 바이에른 공작들의 자치권은 사라졌다. 716년, 카롤링거 왕조는 튀링겐 공작이 지배하던 북쪽 프랑켄 지역을 합병했다. 타실로 3세는 롬바르디아인과의 동맹을 통해 독립을 유지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788년 바이에른은 프랑크족 행정관의 관리를 받게 되었다.
817년 상속 협정으로 루도비쿠스 1세 피우스는 제국을 분할했고, 825년부터 루도비쿠스 2세 게르마니쿠스는 바이에른에서 “바이에른의 왕”이라 칭하였다.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바이에른은 동 프랑크 왕국의 일부가 되었고, 876년 카를로마누스에게 왕위가 전해졌다.
아르눌푸스 카린티아에는 887년 동프랑크 왕국의 왕이 되었고, 케른텐과 바이에른은 그의 권력 기반이었다. 899년 바이에른은 루도비쿠스 4세 인판스에게 넘어갔고, 헝가리인들의 약탈이 빈번했다. 907년 프레스부르크 전투에서 바이에른 부족들이 몰살당했다. 루이트폴트는 바이에른 방어를 위해 케른텐 변경백령을 다스렸다.
907년 루이트폴트가 전사한 후, 아르눌프는 911년 바이에른 공작이 되었으며, 바이에른과 케른텐을 통합했다.
신성 로마 제국 시대 (10세기 ~ 19세기)에 911년 루트비히 아동왕이 사망하면서 카롤링거 왕조의 통치가 끝났다. 중앙 권력 약화는 독일의 여러 종가 공국의 세력 강화로 이어졌다. 907년 루이트폴트 바이에른 변경백의 군대는 프레스부르크 전투에서 패배했다. 아르눌프가 공작 작위를 계승하여 루이트폴딩 왕조 출신 최초의 바이에른 공작이 되었다.
바이에른 공작들의 자부심은 독일 왕국에서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에버하르트는 938년 오토 1세에 의해 폐위되었고, 948년 오토 1세는 하인리히 1세를 바이에른 공작으로 임명했다. 952년 하인리히 1세는 베로나 변경백국을 받았다. 955년 레흐펠트 전투에서 헝가리의 위협이 해소되었다. 오토 왕조가 통치했지만, 바이에른 공작들과 독일 궁정과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976년 오토 2세는 하인리히 2세를 폐위시키고 카린티아 공국을 설립했다. 하인리히 2세는 985년 공국을 되찾았지만, 바이에른 공작들의 권력은 약화되었다.
마지막 오토 왕조 공작인 바이에른의 하인리히 4세는 1002년 로마 왕으로 선출되었다. 공국은 여러 시기에 독일 왕들의 통치를 받았다. 1061년, 푸아투의 아그네스는 노르트하임의 오토에게 공국을 봉토로 부여했다. 하인리히 4세는 벨프에게 바이에른을 맡겼다. 벨프 가문은 그 후 110년 동안 간헐적으로 공국을 통치했다.
1070년부터 벨프 가문이 공작으로서 통치를 확립하면서 바이에른 공작의 재등장이 있었다. 이 시기는 서임권 투쟁으로 특징지어진다.
1125년 슈플링겐부르크 가문 출신의 로타르 3세가 왕위에 올랐다. 자랑스러운 하인리히는 로타르 3세의 딸과 결혼했다. 콘라트 3세와 갈등이 발생했고, 1139년 바이에른은 오스트리아 변경백 레오폴트 4세에게 주어졌다.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프리드리히 1세는 1156년 바이에른 공국을 사자 하인리히에게 돌려주었다. 동쪽 변경은 바벤베르크 가문의 손에 남아 오스트리아 공국으로 승격되었다.
사자 하인리히는 뮌헨을 포함한 수많은 도시를 건설했다. 사자 하인리히의 추방과 슈티리아 변경백령의 분리로 이 젊은 부족 공국은 끝을 맞이했다.
막시밀리안 1세는 부채와 무질서로 가득 찬 공국을 발견했지만, 10년간의 통치는 변화를 가져왔다. 30년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고, 선제후의 지위를 획득했다. 바이에른 선제후령은 상바이에른, 하바이에른, 상팔츠 지역 대부분을 포함하게 되었다.
1180년부터 1918년까지 비텔스바흐 가문은 공작, 선제후, 왕으로서 바이에른을 통치했다. 비텔스바흐 가문의 궁정백 오토 6세가 1180년 바이에른 공작 오토 1세가 되었으나, 비텔스바흐 가문의 재산은 부족했다. 그러나 이후 몇 년 동안 매입, 혼인, 상속을 통해 재산이 증가했다.[4] 루트비히 1세는 1214년에 라인 궁정백령을 받았다.
1255년에 팔츠(궁정백령)와 노르트가우가 있는 상바이에른과 하바이에른으로 분열되었다.
루트비히 4세로 새로운 높은 권력을 얻었다. 그러나 브란덴부르크(1323년), 티롤(1342년), 네덜란드의 여러 지역들은 상실된다. 1369년에 티롤은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내주고 만다. 1329년 파비아 조약에서 황제 루트비히는 팔츠 지역을 분할했다. 1275년 바이에른 공작의 제한적인 통치를 인정하던 잘츠부르크는 1328년 독립 국가가 되었다.
14, 15세기에 상, 하바이에른은 반복적으로 분할되었다. 1392년 분열 이후에는 바이에른슈트라우빙, 바이에른란츠후트, 바이에른잉골슈타트, 바이에른뮌헨 등 4개의 공국이 존재했다. 바이에른뮌헨 공작 알브레히트 4세가 전쟁, 장자 상속제를 통해 1503년 바이에른을 통일해냈다. 하지만 티롤의 일부 지역들을 1504년에 상실하였다.
1506년 칙령에도 불구하고, 빌헬름 4세는 1516년에 동생 루트비히 10세에게 통치권의 일부를 양보해야 했으며, 이 합의는 1545년 루트비히가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빌헬름은 1534년 페르디난트 1세(헝가리와 보헤미아의 국왕)와 린츠에서 조약을 체결할 때까지 전통적인 비텔스바흐 가문의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반대 정책을 따랐다. 이러한 관계는 1546년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가 슈말칼덴 동맹 전쟁 중에 공작의 도움을 얻고, 보헤미아 왕위 계승과 라인 팔츠 백작이 가지고 있던 선제후의 지위를 약속함으로써 강화되었다. 빌헬름은 또한 가톨릭을 위해 바이에른을 확보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1] 1541년에 그가 초청한 예수회는 잉골슈타트 예수회 대학을 설립하였다.[1] 1550년 빌헬름이 사망했고, 알브레히트 5세가 그 뒤를 이었다.[1] 알브레히트는 재위 초기에 개혁가들에게 일부 양보를 했지만, 1563년경에는 태도를 바꾸어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을 지지하고 반종교개혁 사업을 추진했다.[1]
빌헬름 5세는 예수회 교육을 받았고 예수회 신조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였다. 1583년에 그의 형제 에른스트를 위해 쾰른 대주교직을 확보했으며, 이 지위는 200년 이상 가문의 소유로 남아 있었다. 1597년 그는 그의 아들 막시밀리안 1세에게 퇴위하였다.[1]
2. 1. 부족 공국 시대 (6세기 ~ 8세기)
옛 바이에른 공국의 기원은 551년/555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연대기 작가 요르다네스는 그의 저서 《게티카》에서 "슈바벤인들의 지역은 동쪽으로는 바르바리이족, 서쪽으로는 프랑크족들이 있다 ..."라고 적고 있다.
바이에른 공국의 초기 통치자들은 모두 아기롤핑거 가문 출신이었다. 바이에른인들은 당시 노르트가우 변경백령에서 나프강을 따라 엔스강까지 동쪽으로, 그리고 남쪽으로는 브레너 고개를 넘어 오늘날 남티롤의 아디제강 상류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최초로 기록에 나타나는 공작은 프랑크족 아기롤핑거 가문 출신인 바이에른의 가리발트 1세로, 555년부터 상당한 자치권을 가진 메로빙거 왕조의 봉신으로 통치했다.[1]
동쪽 국경에서는 568년 롬바르드족이 판노니아 분지에서 이탈리아 북부로 이동하고, 그 뒤를 아바르족이 이어받으면서 변화가 일어났다. 거의 같은 시기에 서슬라브족 체코인들이 보헤미아 숲 너머 인접 지역에 정착했다. 약 743년에 바이에른 공작 바이에른의 오딜로는 침략하는 아바르족들로부터 보호를 요청한 카란타니야 (후에 케른텐 변경백령과 거의 유사)의 슬라브족 군주들을 가신으로 삼았다. 상당한 자치권을 가진 아길롤핑가 공작들의 거주지는 당시 도나우강변에 위치한 전 로마 제국의 '카스트라 레기나'였던 레겐스부르크였다.[2]
기독교화 과정에서 주교 코르비니아노는 724년 이전에 후일 프라이징 교구의 기초를 마련했다. 7세기에는 성 킬리안이 북쪽의 프랑켄 지역(당시 튀링겐 공작이 통치)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고, 보니파시오는 742년에 뷔르츠부르크 교구를 설립했다. 레히 강 서쪽의 인접한 알레만니족 (슈바벤인) 지역에는 아우크스부르크가 주교좌가 있었다. 보니파시오가 739년 파사우 교구를 설립할 당시 이미 지역 초기 기독교 전통을 바탕으로 할 수 있었다. 남쪽에서는 성 루프레히트가 696년에 잘츠부르크 교구를 설립했는데, 아마도 레겐스부르크의 궁정에서 바이에른의 테오도 2세 공작에게 세례를 준 후 "바이에른의 사도"가 되었을 것이다. 798년 교황 레오 3세는 잘츠부르크를 대주교구로 하는 바이에른 교회 관구를 설립했고, 레겐스부르크, 파사우, 프라이징, 그리고 제벤(후에 브릭센)을 속주교구로 두었다.[3]
6세기경 바이에른 초기 국가는 레히 강과 엔스 강 사이, 피히텔 산지와 알프스 산맥·트리엔트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바이에른 초기 국가가 역사상 처음 언급되는 것은 아길롤핑가 가문 출신의 바이에른의 가리발트 1세(약 590년 사망) 시대이며, 그의 통치하에 공국의 수도는 레겐스부르크에 있었다. 프랑크 왕국에 대항하기 위한 롬바르디아 왕국과의 동맹은 붕괴되어 강화를 청해야만 했다. 가리발트 1세의 계승자인 바이에른의 타실로 1세(612년 사망)는 슬라브인과 그들의 동맹자인 아바르족에 대해 최초로 적대 행위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타실로 1세의 계승자들은 프랑크 왕국과 동맹을 맺고 점차 그 종속하에 놓이게 되었다. 바이에른의 가리발트 2세(650년 사망)의 통치하에서는 프랑크 왕 다고베르트 1세의 협력 하에 ‘바이에른 법전’이라 불리는 최초의 성문법이 도입되었다. 바이에른의 타실로 2세(719년 사망) 시대에는 바이에른은 프랑크 왕국의 선교사들의 협력 하에 기독교가 확산되기 시작했지만, 기독교 자체는 이미 바이에른의 테오도 2세(716년 사망) 시대에 퍼져 있었다.[4]
프랑크 왕국의 궁재 카를 마르텔의 사위인 바이에른의 오딜로(748년 사망)는 프랑크의 상위 권력을 뒤엎고 왕위를 얻으려 했으나 카를 마르텔의 아들인 카를로만과 피핀 3세에 의해 실각했다. 오딜로의 통치 하에서는 성 보니파티우스 대주교에 의해 바이에른의 교회는 잘츠부르크, 파사우, 레겐스부르크 및 프라이징의 4개의 주교구로 나뉘고 여러 수도원이 건립되었다.
오딜로의 아들인 바이에른의 타실로 3세(741년 - 796년)는 상속권을 얻기 위해 콩피에뉴에서 열린 국가 회의에서 피핀 3세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했다. 후에 프랑크 왕국의 속국에서 벗어나려고 롬바르디아 왕 데시데리우스와 아키텐 공작 ヴァイファル과 공동으로 반프랑크 동맹을 결성했지만 반란은 실패로 끝났다. 데시데리우스 타도 후 카롤루스 대제의 눈은 그 동맹국들에게 향했고, 전투의 위협이 타실로 3세를 폼스에서의 맹세 갱신 및 인질 제공을 강요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타실로 3세는 아바르족과 관계를 맺었다. 이것이 788년 인겔하임에서의 국가 회의를 불러일으켰고, 서약 위반자의 사형 및 그 일족 전체의 수도원 유폐(여기서 일족은 단절된다)에 대해 심의되었다. 바이에른은 프랑크 국가에 통합되었고, 통치하기 위해 백작령이라고 불리는 여러 지역으로 분할되었다.
2. 2. 프랑크 왕국 시대 (8세기 ~ 10세기)
카롤링거 왕조의 프랑크 제국이 부흥하면서, 메로빙거 왕조 시절 바이에른 공작들이 누렸던 자치권은 사라졌다. 716년, 카롤링거 왕조는 튀링겐 공작이 지배하던 북쪽 프랑켄 지역을 합병하여 뷔르츠부르크 주교들이 높은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서쪽에서는 카롤링거 왕조의 궁재 카를로만이 746년 칸슈타트의 피의 재판에서 알레만니인들의 마지막 반란을 진압했다.
타실로 3세는 롬바르디아인과의 동맹을 통해 독립을 유지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788년 바이에른은 마지막으로 통합된 부족 공국이 되었다. 샤를마뉴의 롬바르디아 왕국 정복으로 타실로 3세는 폐위되었고, 이후 바이에른은 프랑크족 행정관의 관리를 받았다.
817년 상속 협정으로 샤를마뉴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루도비쿠스 1세 피우스는 카롤링거 제국의 통합을 유지하려 했다. 제국의 권위는 그의 맏아들 로타리우스 1세에게 넘겨졌고, 어린 동생들은 제국 아래의 왕국들을 받았다. 825년부터 루도비쿠스 2세 게르마니쿠스는 바이에른에서 “바이에른의 왕”이라 칭하였다.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제국이 분할될 때, 바이에른은 루도비쿠스 2세 게르마니쿠스가 다스리는 동 프랑크 왕국의 일부가 되었고, 그의 사후 바이에른 왕위는 876년 맏아들 카를로마누스에게 전해졌다.
카를로마누스의 친아들 아르눌푸스 카린티아에는 880년 아버지가 사망할 때 케른텐 변경백령을 얻었고, 887년에는 동프랑크 왕국의 왕이 되었다. 케른텐과 바이에른은 그의 권력 기반이었으며, 레겐스부르크가 그의 정부 중심지였다. 바이에른인들의 지원으로 아르눌푸스는 887년 카롤루스를 상대로 승리했고, 다음 해 독일 왕으로 선출되었다.
899년 바이에른은 루도비쿠스 4세 인판스에게 넘어갔고,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헝가리인들의 약탈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907년 7월 5일, 프레스부르크 전투에서 거의 모든 바이에른 부족들이 몰살당했다. 루도비쿠스 4세 인판스 통치 시기, 바이에른의 넓은 영지를 보유한 샤이에른 백작 루이트폴트는 바이에른 방어를 위해 남동쪽 변경에 세워진 케른텐 변경백령을 다스렸다.
907년 루이트폴트가 전사한 후, 그의 아들 아르눌프는 헝가리인들과 동맹을 맺고 남은 바이에른 부족들을 결집하여 911년 바이에른 공작이 되었으며, 바이에른과 케른텐을 통합했다. 독일 왕 콘라두스 1세는 아르눌프가 왕의 우위성을 인정하지 않자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2. 3. 신성 로마 제국 시대 (10세기 ~ 19세기)
911년 아르눌프의 아들인 루트비히 아동왕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동프랑크 왕국에서 카롤링거 왕조의 통치가 끝났다. 중앙 권력의 약화는 독일의 여러 종가 공국의 세력 강화로 이어졌다. 동시에 동프랑크 왕국은 특히 엔스 강 너머 바이에른 오스트리아 변경백국에서 헝가리 침입의 위협에 직면했다. 907년 루이트폴트 바이에른 변경백의 군대는 프레스부르크 전투에서 압도적인 패배를 당했다. 루이트폴트 자신이 전사했고 그의 아들인 아르눌프가 공작 작위를 계승하여 루이트폴딩 왕조 출신 최초의 바이에른 공작이 되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변경백국은 헝가리에 점령된 채 남았고 파노니아 지방은 회복할 수 없이 상실되었다.
바이에른 공작들의 자부심은 새롭게 건설된 독일 왕국에서 끊임없는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아르눌프 공작의 아들인 에버하르트는 938년 오토 1세에 의해 폐위되었고 그의 동생인 베르톨트가 계승했다. 948년 오토 1세는 루이트폴딩가를 실각시키고 자신의 동생인 하인리히 1세를 바이에른 공작으로 임명했다. 베르톨트의 미성년 상속자인 하인리히 3세는 바이에른 궁재백 직위로 쫓겨났다. 루이트폴딩가가 리우돌프 슈바벤 공작의 반란에 가담하여 권력을 되찾으려 한 마지막 시도는 954년에 실패했다.
952년 하인리히 1세 공작은 오토 1세가 베렌가리오 2세로부터 빼앗은 이탈리아의 베로나 변경백국을 받았다. 그는 여전히 헝가리의 위협에 대처해야 했는데, 이 위협은 오토 1세가 955년 레흐펠트 전투에서 승리할 때까지 해소되지 않았다. 마자르인들은 라이타와 모라바 강 너머로 후퇴했고, 오늘날의 오스트리아 하부, 이스트리아, 카르니올라 지역으로 독일인들의 두 번째 동방 식민을 가능하게 했다. 하인리히 1세의 후손인 오토 왕조(작센 왕조의 방계)가 통치했지만, 바이에른 공작들과 독일(962년부터 신성 로마 제국) 궁정과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976년 오토 2세는 반역적인 사촌인 하인리히 2세를 폐위시키고 이전 바이에른 영토에 카린티아 공국을 설립했으며, 이전 루이트폴딩가의 궁재백이었던 하인리히 3세에게 주었고, 그는 베로나 변경백이 되었다. 하인리히 2세는 985년 오토 2세의 미망인인 테오파누와 화해하고 공국을 되찾았지만, 바이에른 공작들의 권력은 오스트리아 변경백(Ostarrichi)으로 통치하며 점점 독립해 가던 프랑켄의 바벤베르크 가문의 부상으로 더욱 약화되었다.
마지막 오토 왕조 공작인 바이에른의 하인리히 4세는 1002년 로마 왕으로 선출되었다. 공국은 여러 시기에 독일 왕들의 개인 동군연합 통치, 종속 공작들의 통치, 심지어 황제의 아들들의 통치를 받았는데, 이는 하인리히의 살리안 후계자들에 의해 유지된 전통이었다. 이 시기에는 안덱스 백작가와 비텔스바흐 가문과 같은 많은 귀족 가문이 부상했다. 1061년, 황후 미망인인 푸아투의 아그네스는 작센 백작 노르트하임의 오토에게 공국을 봉토로 부여했다. 그러나 그녀의 아들인 하인리히 4세는 허위의 이유로 공국을 빼앗았고, 이는 궁극적으로 1073년의 작센 반란으로 이어졌다. 하인리히는 베로나 변경백 에스테 가문의 후손이자 벨프 왕조의 시조인 벨프에게 바이에른을 맡겼다. 벨프 가문은 그 후 110년 동안 간헐적으로 공국을 통치했다.
하인리히 4세에 의해 1070년부터 벨프 가문이 공작으로서 통치를 확립하면서 바이에른 공작의 재등장이 있었다. 이 시기는 황제와 교황 사이의 서임권 투쟁으로 특징지어지는데, 이는 교황의 입장에 편승함으로써 벨프 가문의 통치를 강화했다.
마지막 살리안 황제인 하인리히 5세가 1125년 사망한 후, 슈플링겐부르크 가문 출신의 로타르 3세가 왕위에 올랐다. 바이에른 공작 자랑스러운 하인리히는 로타르 3세의 딸인 게르트루트와 결혼했고, 따라서 그녀의 상속을 약속받았다. 하인리히 5세의 조카이자 슈바벤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일원인 반왕 콘라트 3세와 갈등이 발생하자, 바이에른 공작은 로타르 3세를 지지했고, 이로써 그의 사회적 자본을 더욱 증가시켰으며 로타르 3세 사후 독일 왕과 작센 공작으로 선출될 가능성을 높였다. 그러나 콘라트 3세는 1138년 독일 왕으로 성공적으로 선출되었다. 콘라트 3세는 하인리히의 권력을 두려워하여 그에게 작센 공국의 서임을 거부하고, 한 공작이 두 개의 공국을 소유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왕위를 거부당한 데 대한 그의 씁쓸함과 더해져 하인리히가 콘라트 3세에게 충성 맹세를 거부하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그의 모든 영토를 몰수당했고, 바이에른은 그의 바벤베르크 이복형제인 오스트리아 변경백 레오폴트 4세에게 1139년에 주어졌다.
슈타우퍼 왕의 통치 기간 동안 슈바벤 공국은 대부분 시골 지역으로 구성되었고, 프랑크니아는 1115년 하인리히 5세에 의해 ''dux Francorum orientalium'' 칭호를 받으면서 슈타우퍼의 권력 중심지가 되었다. 이는 1168년 뷔르츠부르크의 주교가 밤베르크의 주교구를 획득하고 따라서 프랑크니아 공작이 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프리드리히 1세는 벨프 가문과 화해를 시도했고, 1156년 바이에른 공국을 벨프 가문의 사자 하인리히에게 돌려주었다. 그러나 동쪽 변경은 바벤베르크 가문의 손에 남아 있었고, 따라서 바이에른의 손실에 대한 보상으로 오스트리아 공국으로 승격되었다. 바벤베르크 가문 아래 ''Marcha Orientalis''의 공국으로의 승격은 후대의 오스트리아(오스타리히) 국가의 핵심으로서 확립되었다.
사자 하인리히는 뮌헨을 포함한 수많은 도시를 건설했다. 그는 작센과 바이에른 두 공국의 통치자로서 강력한 입지를 통해 프리드리히 1세와 갈등을 빚었다. 사자 하인리히의 추방과 바이에른에서 슈티리아 변경백령의 분리 – 변경백 오토카르 4세 치하 1180년에 슈티리아 공국으로 승격 – 로 이 젊은 부족 공국은 끝을 맞이했다.
막시밀리안 1세는 부채로 압도되고 무질서로 가득 찬 공국을 발견했지만, 10년간의 활발한 통치는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다. 재정과 사법 제도가 재편되었고, 공무원 계급과 민병대가 설립되었으며, 여러 작은 지역이 공작의 권한 아래 들어왔다. 그 결과 공국에는 통일과 질서가 확립되었고, 막시밀리안 1세는 30년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초기 몇 년 동안 그는 매우 성공적이어서 상팔츠와 비텔스바흐 가문의 장자 계열이 1356년 이후로 누려왔던 선제후의 지위를 획득했다. 그 후 바이에른 선제후령은 현대의 상바이에른, 하바이에른 및 상팔츠 지역 대부분을 포함하게 되었다.
2. 3. 1. 비텔스바흐 가문 분열과 재통합
1180년부터 1918년까지 비텔스바흐 가문은 공작, 이후에는 선제후, 왕으로서 바이에른을 통치했다. 비텔스바흐 가문의 궁정백 오토 6세가 1180년 바이에른 공작 오토 1세가 되었으나, 비텔스바흐 가문의 재산은 상당히 부족했다. 그러나 이후 몇 년 동안 매입, 혼인, 상속을 통해 재산이 증가했다.[4] 새롭게 획득한 영토는 더 이상 봉토로 주어지지 않고, 하인들에 의해 관리되었다. 또한 안데흐 백작들과 같은 강력한 가문들이 이 시기에 사라졌다. 오토의 아들 루트비히 1세는 1214년에 라인 궁정백령을 받았다.
비텔스바흐 가문은 장자 상속을 선호하지 않았기 때문에, 1255년에 팔츠(궁정백령)와 노르트가우(뮌헨 중심)가 있는 상바이에른과 하바이에른 (란츠후트와 부르크하우젠 위치)으로 분열되었다. 오늘날까지 상, 하바이에른이 구별된다.
잠깐의 재통합을 겪은 후 다시 분열되었음에도 바이에른은 1328년에 비텔스바흐 가문 출신 첫 신성 로마 황제가 된 루트비히 4세로 새로운 높은 권력을 얻었다. 그러나 새롭게 획득한 브란덴부르크(1323년), 티롤(1342년), 네덜란드의 홀란트, 제일란트, 프리슬란트, 에노 지역들은 그의 후임자들 시기에 상실하고 만다. 1369년에 티롤은 셰르딩 조약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내주고 만다. 룩셈부르크 왕가도 1373년에 네덜란드의 백작령들도 1436년에 부르고뉴 공국에게 잃고 만다. 1329년 파비아 조약에서 황제 루트비히는 팔츠 지역을, 라인팔츠와 이후 오버팔츠라고 불리게 될 지역으로 그의 소유권을 분할했다. 그럼에 따라, 궁중백에게 주어지는 선제후 작위를 상실했다. 1275년 바이에른 공작의 제한적인 통치를 인정하던 바이에른의 잘츠부르크는 최종적 단계에 이르렀다. 잘츠부르크 대주교는 1328년 그들만의 법령을 발표했고, 잘츠부르크는 신성 로마 제국 내 넓은 독립 국가가 되었다.
14, 15세기에 상, 하바이에른은 반복적으로 분할되었다. 1392년 분열 이후에는 바이에른슈트라우빙, 바이에른란츠후트, 바이에른잉골슈타트, 바이에른뮌헨 등 4개의 공국이 존재했다. 이 공작들은 서로를 상대로 자주 전쟁을 벌였다. 바이에른뮌헨 공작 알브레히트 4세가 전쟁, 장자 상속제를 통해 1503년 바이에른을 통일해냈다. 하지만 티롤의 쿠프슈타인, 키츠뷔엘, 라텐베르크에 있는 본래 바이에른의 직위들을 1504년에 상실하였다.
1506년 칙령에도 불구하고, 알브레히트의 장자 빌헬름 4세는 1516년에 동생 루트비히에게 바이에른을 공유할 것을 강요받았고, 이 합의는 1545년 루트비히가 사망할 때까지 지속됐다. 빌헬름은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왕 페르디난트 1세와 린츠 조약을 맺은 1534년까지 합스부르크 가문을 적대시하는 비텔스바흐 가문의 전통을 따랐다. 이 관계는 보헤미아 왕위 계승 사태에서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를 지지하며 슈말칼덴 동맹 기간 바이에른 공작의 도움을 얻은 1546년에 더욱 강해졌고, 라인 궁정백이 갖고 있는 선제후권을 누렸다. 빌헬름에게도 바이에른 지역의 가톨릭 교회를 지켜내는데 중요한 시기이기도 했다. 개혁 교리는 공작이 교황으로부터 주교들과 수도원들에 대한 추가 권한을 얻었을 때 공국 내에서 상당한 진척이 있었다. 그후로 그는 신교도들을 억누르를 조치를 취하였고, 많은 신교도들이 추방당했으며, 반면에 1541년에 그가 초청한 예수회 성직자들은 독일 지부의 본부인 잉골슈타트 예수회 학교를 세웠다. 1550년 3월에 빌헬름이 사망했고, 페르디난트 1세의 딸과 혼인한 그의 아들 알브레히트 5세가 그 뒤를 이어받았다. 그의 통치 초기 시절에 여전히 바이에른에서 강력한 이들이던 신교도들에 일부 허가를 했었다. 하지만 1563년에 그는 트리엔트 공의회의 칙령들을 지지하며 자세를 바꾸어, 반종교 개혁 활동을 추진했다. 예수회의 손에서 서서히 교육이 실시되면서, 개신교의 진행은 바이에른에서 효과적으로 멈추었다.
다음 공작이자 알브레히트의 아들 빌헬름 5세는 예수회의 교육을 받았고 예수회 교리에 열중한 관심을 보여주었다. 그는 1583년에 형제 에른스트를 위해 쾰른 대주교직을 마련해주었고, 이 직위는 200년 가까이 그의 가문에 유지되었다. 1597년 그는 아들 막시밀리안 1세를 위해 퇴위하였다.
막시밀리안 1세는 바이에른 공국이 빚과 혼란으로 가득차 있음을 발견하고, 그의 강력한 통치 10년간은 눈에 띄울 만한 변화를 가져왔다. 재정과 사법 체계가 재조직되었고, 몇몇 작은 지역들은 공작의 권한 하에 들어갔다. 이에 대한 결과는 공국 내 통합과 질서였고 이것은 막시밀리안 1세가 30년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게 했다. 30년 전쟁 초기에 그는 1356년 이래로 비텔스바흐 본가가 누리던 선제후 직위와 오버팔츠를 차지하며 큰 성공을 거뒀다. 그렇게 세워진 바이에른 선제후령은 오늘날의 오버바이에른, 니더바이에른, 오버팔츠의 대부분으로 구성되었다.
2. 3. 2. 종교 개혁과 반종교 개혁
1506년 칙령에도 불구하고, 알브레히트의 장남 빌헬름 4세는 1516년에 그의 동생 루트비히 10세에게 통치권의 일부를 양보해야 했으며, 이 합의는 1545년 루트비히가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빌헬름은 1534년 페르디난트 1세(헝가리와 보헤미아의 국왕)와 린츠에서 조약을 체결할 때까지 전통적인 비텔스바흐 가문의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반대 정책을 따랐다. 이러한 관계는 1546년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가 슈말칼덴 동맹 전쟁 중에 공작의 도움을 얻고, 보헤미아 왕위 계승과 라인 팔츠 백작이 가지고 있던 선제후의 지위를 약속함으로써 강화되었다. 빌헬름은 또한 가톨릭을 위해 바이에른을 확보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1] 공작이 교황으로부터 주교좌와 수도원에 대한 광범위한 권한을 얻었을 때 개혁 사상이 공국에서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지만, 그는 개혁가들을 탄압하는 조치를 취했고, 그중 많은 사람들이 추방되었다.[1] 그가 1541년 공국에 초청한 예수회는 독일 본부인 잉골슈타트 예수회 대학을 설립하였다.[1] 1550년 3월 빌헬름이 사망했고, 페르디난트 1세의 딸과 결혼한 그의 아들 알브레히트 5세가 그 뒤를 이었다.[1] 알브레히트는 재위 초기에 바이에른에서 여전히 강력했던 개혁가들에게 일부 양보를 했지만, 1563년경에는 태도를 바꾸어 트리엔트 공의회의 결정을 지지하고 반종교개혁 사업을 추진했다.[1] 교육이 점차 예수회의 손에 넘어감에 따라 바이에른에서의 프로테스탄티즘의 발전은 효과적으로 저지되었다.[1]
알브레히트의 아들인 빌헬름 5세는 예수회 교육을 받았고 예수회 신조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였다. 그는 1583년에 그의 형제 에른스트를 위해 쾰른 대주교직을 확보했으며, 이 지위는 200년 이상 가문의 소유로 남아 있었다. 1597년 그는 그의 아들 막시밀리안 1세에게 퇴위하였다.[1]
3. 지리
수 세기가 흘러, 옛 부족공국에 있던 지역에서 티롤 백작령 또는 잘츠부르크 대주교령등이 제국 칙령을 얻어 분리독립을 하였다. 1500년부터 이 제국의 제후국들은 바이에른 관구의 회원국이다.
참조
[2]
서적
Die Staufer. Herrscher und Reich.
Munich
2006
[3]
서적
Key Figures in Medieval Europe: An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3
[4]
서적
Die Staufer. Herrscher und Reich.
Munich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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