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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라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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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토 라슈는 독일의 법학자, 정치경제학자, 군인으로, 나치 독일 시기에 게슈타포 장관과 아인자츠그루펜 C 사령관을 역임하며 유대인 학살에 관여했다. 그는 두 개의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으며, 나치당에 가입하여 친위대에서 활동했다. 아인자츠그루펜 C의 사령관으로서 약 8만 명의 유대인과 소련군 포로를 살해했으며, 바비 야르 학살을 지휘했다. 전후 뉘른베르크 특수작전집단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건강 문제로 재판에서 제외되었고, 1948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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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라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뉘른베르크 재판에서의 오토 라슈 머그샷 (1947년 7월)
라슈의 뉘른베르크 군사 재판 기소 후 머그샷 (1947년 7월)
본명에밀 오토 라슈
출생1891년 12월 7일
출생지독일 제국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 프리드리히스루
사망1948년 11월 1일
사망지연합군 점령 독일 니더작센주 베르슈테트
별칭(없음)
사망 원인질병
군사 복무
소속독일 제국
나치 독일
복무 기간(알 수 없음)
최종 계급친위대 여단지도자
질서경찰 소장
지휘아인자츠그루페 C
참전(알 수 없음)
수훈(알 수 없음)
경력
직업변호사, 시장
범죄 정보
상태사망
혐의인도에 반한 죄
전쟁 범죄
범죄 조직 가입
동기나치즘
범죄 기간1939년 ~ 1941년
범죄 지역폴란드 및 우크라이나
피해자 수80,000명 이상
주요 범죄바비 야르 학살
재판아인자츠그루펜 재판

2. 생애

오토 라슈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 프리드리히스루 출신으로, 여러 대학에서 법학, 정치경제학, 철학을 공부했다. 1912년 마르부르크 대학1922년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각각 박사 학위를 받아 "쌍박사 라슈"로 불렸다.[9] 제1차 세계 대전 때는 해군 중위로 참전했고, 전후에는 라이프치히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며 여러 회사의 고문을 맡았다.[10]

1931년 나치당에 입당하고, 1933년 돌격대친위대에 가입했다. 나치 정권 수립 후 라데베르크와 비텐베르크 시장을 역임했다.[10] 1938년 프랑크푸르트 게슈타포 장관, 오스트리아 병합 후 오버에스터라이히주 게슈타포 장관, 1939년 체코 보호령 친위대 장관을 거쳐 쾨니히스베르크 친위대 지휘관 및 보안경찰 장관을 겸임했다.[11] 1940년 1월부터 2월에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지시로 졸다우 강제수용소 건설에 관여했다.[12]

독소전쟁 발발 후, 1941년 6월부터 10월까지 아인자츠그루펜 C의 사령관을 맡아 약 8만 명의 유대인 및 소련군 포로 학살을 보고했다. 1941년 9월 29일부터 9월 30일에는 키예프에서 33,771명의 유대인학살 (바비 야르 대학살)했다.[12] 1942년부터 의 이사가 되었다.

전후 1947년 9월, 뉘른베르크 계속 재판의 아인자츠그루펜 재판에서 기소되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1948년 2월 5일 재판에서 제외되었고, 같은 해 11월 1일 사망했다.[12]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 Friedrichsruh|프리드리히스루de 출신인 오토 라슈는 여러 대학에서 법학, 정치경제학, 철학을 공부하여 1912년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22년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9] 2개의 박사학위를 받았기에 그는 "쌍박사 라슈"라고도 불렸다. 제1차 세계 대전 때 해군에 입대해 패전까지 중위로 복무했으며, 패전 후 라이프치히에서 변호사를 개업한 라슈는 몇몇 회사의 고문 변호사를 맡았었다.

2. 2.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및 변호사 활동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 Friedrichsruh|프리드리히스루de 출신인 오토 라슈는 여러 대학에서 법학과 정치경제학, 철학을 공부하여 1912년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22년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9] 2개의 박사학위를 받았기에 "쌍박사 라슈"라고도 불렸다. 제1차 세계 대전 때 해군에 입대해 패전까지 중위로 복무했으며, 패전 후 라이프치히에서 변호사를 개업한 라슈는 몇몇 회사에서 고문을 맡았다.[10] 1931년 9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에 입당해 1933년 돌격대친위대에 입대했다.

2. 3. 나치당 입당 및 친위대 활동

오토 라슈는 1931년 9월에 나치당(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에 입당했고, 1933년에는 돌격대친위대에 입대했다.[10] 그는 나치당 정권 장악 후 라데베르크와 비텐베르크의 시장으로 일했다.[10] 1938년부터는 프랑크푸르트게슈타포 장관이 되었다.[11] 오스트리아 병합 후에는 오버에스터라이히 주의 게슈타포 장관으로 일했으며, 1939년에는 체코 보호령의 친위대 장관이 되었다.[11] 동시에 쾨니히스베르크의 친위대 지휘관 및 보안경찰 장관도 겸임했다. 1940년 1월부터 2월까지는 국가보안본부장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지시로 졸다우 강제수용소 건설에 종사했다.[12]

2. 4. 게슈타포 및 친위대 주요 직책

1931년 9월 나치당에 입당하여 1933년 돌격대친위대에 입대했다. 나치당 정권 장악 후 라데베르크와 비텐베르크의 시장으로 일했다.[10] 1938년부터는 프랑크푸르트게슈타포 장관이 되었다. 오스트리아 병합 후에는 오버에스터라이히 주의 게슈타포 장관으로 일했으며, 1939년에는 체코 보호령의 친위대 장관이 되었다.[11] 동시에 쾨니히스베르크의 친위대 지휘관 및 보안경찰 장관도 겸임했다. 1940년 1월부터 2월까지는 국가보안본부장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지시로 졸다우 강제수용소 건설에 참여했다.

2. 5. 졸다우 강제수용소 건설

1940년 1월부터 2월까지 라슈는 국가보안본부장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지시로 졸다우 강제수용소 건설에 참여했다.[11] 라슈는 하이드리히의 승인을 받아 1939년 겨울에서 1940년 사이에 Soldau 강제 수용소를 ''Durchgangslager'' (''Dulag'') 즉, 총독부로 추방하기 위한 경유지이자 폴란드 지식인을 비밀리에 처형할 수 있는 곳으로 조직하고 설립했다.[2]

3. 아인자츠그루펜 활동

1931년 9월 나치당에 입당하고, 1933년 돌격대친위대에 입대한 오토 라슈는 나치 정권 장악 후 여러 직책을 거쳤다.[10] 1938년 프랑크푸르트 게슈타포 장관,[11] 오스트리아 병합 이후 오버에스터라이히 주 게슈타포 장관, 1939년 체코 보호령의 친위대 장관을 역임했다.[11] 1940년 1월부터 2월에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지시로 졸다우 강제수용소 건설에도 참여했다.[12]

독소전쟁 발발 후, 1941년 6월부터 10월까지 아인자츠그루펜 C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약 8만 명의 유대인 및 소련군 포로를 살해했다고 보고했다.[12] 1941년 9월 29일부터 9월 30일에는 키예프에서 33,771명의 유대인학살바비 야르 학살을 지휘하기도 했다.[12]

3. 1. 아인자츠그루펜 C 사령관 임명

1941년 6월, 독소전쟁 발발 직후, 오토 라슈는 아인자츠그루펜 C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9] 그는 이 직책에서 유대인들을 상대로 한 대량 학살을 자행했다. 라슈는 쿠르트 에버하르트 장군, 파울 블로벨과 함께 33,000명 이상의 유대인이 살해된 바비 야르 학살을 조직했다.[12]

에르빈 슐츠는 전후 진술에서 ''SS 여단지도자'' Dr. 라슈는 특별한 잔혹함으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지휘관들에게도 사격에 직접 참여하도록 명령했다고 증언했다.[3] 라슈는 부하들에게 유대인을 직접 사살하도록 하여, 모든 구성원이 학살에 가담하도록 했다.

1941년 8월, 아돌프 히틀러는 동부 지역의 전체 인구를 말살하라는 ''Führerbefehl''(지도자의 명령)을 내렸다.[4] 라슈의 지휘를 받는 사령관들은 이 명령을 논의하기 위해 그와 만났다. 파울 블로벨은 라슈가 프리드리히 예켈른이 말한 내용을 인용하며 "유대인에 대한 조치는 더 강화되어야 하며, 지금까지 너무 온건한 방식으로 실행된 방식을 비난한다"고 증언했다. 즉, 더 많은 유대인을 사살하라는 명령이었다.[5] 에르빈 슐츠는 이를 확인하며, 예켈른이 친위대 전국지도자 하인리히 힘러가 유대인에 대해 엄격한 조치를 취하라고 명령했다고 보고했다고 덧붙였다. 또한, 의심되는 모든 유대인은 사살되어야 하며, 노동자로 필요한 경우에만 고려하고, 복수할 사람이 남지 않도록 여성과 아이들도 사살해야 했다고 한다.[5]

라슈는 1941년 10월에 아인자츠그루펜 C 사령관 직에서 해임되었다.[6]

3. 2. 유대인 및 소련군 포로 학살

1941년 6월, 바르바로사 작전 직전에 라슈는 특수작전부대 C를 지휘하게 되었다. 그는 이 지위에서 유대인들을 상대로 한 대량 학살을 자행했다. 라슈는 쿠르트 에버하르트 장군, 파울 블로벨과 함께 33,000명 이상의 유대인이 살해된 바비 야르 학살을 조직했다.[12]

전후 진술서에 따르면, Einsatzkommando 5 (Einsatzgruppe C의 일부)의 지휘관 에르빈 슐츠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SS 여단지도자'' Dr. 라슈는 특별한 잔혹함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지휘관들에게도 사격에 직접 참여하도록 명령했다."[3]

라슈는 모든 특수작전부대 요원, 지휘관을 포함하여, 모든 구성원이 죄를 짓도록 유대인을 직접 사살하도록 했다.

1941년 8월,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 포로의 전후 심문에서) 동부 지역의 전체 인구를 말살하라는 ''Führerbefehl''(지도자의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4] 라슈의 지휘를 받는 사령관들은 이 명령을 논의하기 위해 그와 만났다. 파울 블로벨은 나중에 라슈가 기본적으로 프리드리히 예켈른이 말한 내용을 인용했는데, "유대인에 대한 조치는 더 강화되어야 하며, 지금까지 너무 온건한 방식으로 실행된 방식을 비난한다"고 증언했다. 즉, 더 많은 유대인을 사살하라는 명령이었다. 에르빈 슐츠는 이를 확인했다.

"약 2주 동안 베르디체프에 머물렀던 후, 사령관들은 지토미르로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그곳에는 Dr. 라슈의 참모가 주둔하고 있었다. 여기서 Dr. 라슈는 Obergruppenführer(상급집단지도자) 예켈른이 그곳에 와서 Reichsführer-SS(친위대 전국지도자)가 우리에게 유대인에 대해 엄격한 조치를 취하라고 명령했다고 보고했다고 우리에게 알렸다. 적군이 SS 대원과 나치당 당원을 사살하라고 명령했다는 것이 의심할 여지없이 밝혀졌다. 러시아 측에서 그러한 조치가 취해지고 있었으므로, 우리 측에서도 그렇게 해야 했다. 따라서 의심되는 모든 유대인은 사살되어야 했다. 노동자로 없어서는 안 될 경우에만 고려해야 했다. 복수할 사람이 남지 않도록 여성과 아이들도 사살해야 했다. 우리는 경악하여 이의를 제기했지만, 명령은 복종해야 한다는 말로 일축되었다."[5]

독소전쟁이 발발한 후, 1941년 6월부터 1941년 10월에 걸쳐 아인자츠그루펜 C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라슈는 약 8만명의 유대인 및 소련군 포로를 살해했다고 보고했다. 또 1941년 9월 29일부터 9월 30일엔 자신의 지휘하에 있던 부대가 키예프에서 33,771명의 유대인학살하기도 했다.[12]

3. 3. 잔혹 행위

SS-Brigadeführerde 라슈는 특별한 잔혹함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지휘관들에게도 사격에 직접 참여하도록 명령했다.[3] 라슈는 모든 특수작전부대 요원, 지휘관을 포함하여, 모든 구성원이 죄를 짓도록 유대인을 직접 사살하도록 했다.

1941년 8월, 아돌프 히틀러는 동부 지역의 전체 인구를 말살하라는 Führerbefehlde(지도자의 명령)을 내렸다.[4] 라슈의 지휘를 받는 사령관들은 이 명령을 논의하기 위해 그와 만났다. 파울 블로벨은 라슈가 프리드리히 예켈른이 말한 내용을 인용했는데, "유대인에 대한 조치는 더 강화되어야 하며, 지금까지 너무 온건한 방식으로 실행된 방식을 비난한다"고 증언했다. 즉, 더 많은 유대인을 사살하라는 명령이었다. 에르빈 슐츠는 이를 확인했다.

1941년 6월, 바르바로사 작전 직전에 라슈는 Einsatzgruppe C(특수작전부대 C)를 지휘하게 되었다. 그는 이 지위에서 유대인들을 상대로 한 대량 학살을 자행했다. 라슈는 쿠르트 에버하르트 장군, 파울 블로벨과 함께 33,000명 이상의 유대인이 살해된 바비 야르 학살을 조직했다.

3. 4. 히틀러의 명령 수행

1941년 6월, 바르바로사 작전 직전에 라슈는 특수작전부대 C를 지휘하게 되었다. 그는 이 지위에서 유대인들을 상대로 한 대량 학살 "행위"를 자행했다. 라슈는 쿠르트 에버하르트 장군, 파울 블로벨과 함께 33,000명 이상의 유대인이 살해된 바비 야르 학살을 조직했다.[3]

전후 진술서에 따르면, Einsatzkommando 5 (특수작전부대 C의 일부)의 지휘관 에르빈 슐츠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라슈는 모든 특수작전부대 요원, 지휘관을 포함하여, 모든 구성원이 죄를 짓도록 유대인을 직접 사살하도록 했다.

1941년 8월,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 포로의 전후 심문에서) 동부 지역의 전체 인구를 말살하라는 ''Führerbefehl''(지도자의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4] 라슈의 지휘를 받는 사령관들은 이 명령을 논의하기 위해 그와 만났다. 파울 블로벨은 나중에 라슈가 기본적으로 프리드리히 예켈른이 말한 내용을 인용했는데, "유대인에 대한 조치는 더 강화되어야 하며, 지금까지 너무 온건한 방식으로 실행된 방식을 비난한다"고 증언했다. 즉, 더 많은 유대인을 사살하라는 명령이었다. 에르빈 슐츠는 이를 확인했다.

4. 전쟁 이후

오토 라슈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1947년 9월 뉘른베르크 특수작전집단 재판에 회부되었으나,[12] 심각한 건강 문제로 1948년 2월 5일 재판에서 제외되었고, 같은 해 11월 1일 사망했다.[12]

4. 1. 대륙 석유 주식회사 이사

1942년부터 Kontinentale Öl|대륙 석유 주식회사de의 이사가 되었다.

4. 2. 아인자츠그루펜 재판 기소 및 사망

전후 1947년 9월에 뉘른베르크 특수작전집단 재판에 회부된 라슈는 심각한 건강상의 이유로 1948년 2월 5일에 재판에서 제외되었는데, 그 해 11월 1일에 사망했다.[12]

5. 대중문화

라슈는 조너선 리텔의 소설 《관대한 여인들》에 등장한다. 그는 군대가 볼셰비즘과 싸우는 데 집중해야 하며, 이를 유대인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기록을 남겼다. 또한 유대인들을 처형 전에 공개적으로 행진시켜 '우크라이나 농민들의 눈에서 유대인 권력의 신화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1]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4] 문서 Rhodes
[5] 서적
[6] 서적 Encyclopedia of the Third Reich Macmillan
[7] 서적
[8] 웹사이트 Otto Rasch question - Axis History Forum https://forum.axishi[...] 2023-05-10
[9] 서적
[10] 서적
[11] 서적 Encyclopedia of the Third Reich Macmillan
[1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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