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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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양은 331년에 태어난 오호 십육국 시대 인물로, 후조와 동진에서 활약했다. 그는 아버지 요익중의 세자였으며, 후조의 혼란기에 여러 전투에 참여하여 명성을 떨쳤다. 이후 동진에 귀순하여 병주 자사에 임명되었으나, 은호와의 갈등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려다 실패하고 전진과의 전투에서 사망했다. 요양은 용맹하고 지략이 뛰어났으며,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으나, 결국 야망을 이루지 못하고 27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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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익중은 오호십육국시대 강족 수장으로, 유랑민을 규합하여 세력을 키우고 전조와 후조에 복속하며 활약하다가 후조 말기에는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동진에 귀순했으나 곧 병사했으며, 그의 삶은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 강족을 이끌며 생존을 모색했던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며 후대 후진 건국에 영향을 미쳤다. - 창족 사람 - 요익중
요익중은 오호십육국시대 강족 수장으로, 유랑민을 규합하여 세력을 키우고 전조와 후조에 복속하며 활약하다가 후조 말기에는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동진에 귀순했으나 곧 병사했으며, 그의 삶은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 강족을 이끌며 생존을 모색했던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며 후대 후진 건국에 영향을 미쳤다. - 창족 사람 - 미당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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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양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요양 (姚襄) | |
| 주요 정보 | |
| 관직 | |
| 장군 | 평북장군(平北將軍) |
| 임명 시기 | 352년 |
| 퇴임 시기 | 353년 |
| 장군 | 표기장군(驃騎將軍) |
| 칭호 | 대선우(大單于) (자칭) |
| 임명 시기 | 351년 |
| 퇴임 시기 | 351년 |
| 통치 시기 | |
| 통치 시작 | 355년 |
| 통치 종료 | 357년 |
| 가족 관계 | |
| 부친 | 요익중 |
| 형제 | 요약 요약 요장 요서 요음매 요수덕 요소 요경 요황 31명의 이름 없는 형제 |
| 군주 | |
| 섬긴 군주 | 모용준 |
| 섬긴 군주 | 사지 |
| 섬긴 군주 | 진 목제 |
2. 생애
요양은 요익중(姚弋仲)의 다섯째 아들로 331년에 태어났다. 능력과 인품이 뛰어났기 때문에 주위의 추천을 받아 요익중의 세자(世子)가 되었다.
==== 후조(後趙)에서의 활약 ====
349년 후조(後趙)가 혼란에 빠지자 요양은 아버지 요익중의 명을 받아 후조와 염위(冉魏)의 분쟁에 개입하여 여러 전쟁에 참여하였다.[1]
350년 1월, 요익중의 명령에 따라 요양은 5만의 군사를 이끌고 저(氐)족 추장 부홍(苻洪)을 공격했으나, 대패하여 3만 명의 군사가 포로로 잡혔다.
351년 2월, 란민(冉閔)이 업(鄴)에서 후조의 황족을 학살하고 란위(冉魏)를 세우자, 석지(石祗)는 양국(襄國)에서 제위에 올랐다. 요양은 석지로부터 표기장군(驃騎將軍), 예주(豫州)자사(刺史)에 임명되었고, 신창공(新昌公)에 봉해졌다.[3]
351년 2월, 란민이 양국을 백여 일 동안 포위하자, 석지는 요익중에게 구원병을 요청했다. 요익중은 이에 응하여, 요양은 2만 8천의 군사를 이끌고 염두(灄頭)에서 양국 구원을 향해 출발했다. 출발에 앞서 요익중은 “란민은 인(仁)을 버리고 의(義)를 저버리고, 석씨를 학살했다."라고 경고했다.
3월, 요양이 양국에 접근하자, 란민은 거기장군(車騎將軍) 호목(胡睦)을 장로(長蘆)에 파견하여 방어하게 했지만, 요양은 이를 역습하여 그 군사를 거의 전멸시켰다. 란민이 전군을 이끌고 출격하자, 요양은 후조의 석곤(石琨)·전연(前燕)의 열관(悅綰) 등과 함께 삼면에서 란민을 공격하였고, 더욱이 석지가 후방에서 호응했다. 이로 인해 란민은 대패하였고, 사망자는 10만 명을 넘었다. 란위를 격파한 요양은 염두로 돌아왔지만, 란민을 사로잡지 못했기 때문에, 요익중은 노하여 요양에게 백장의 형벌을 내렸다.[4] 4월, 석지는 부하 유현의 배신으로 살해되었고, 후조는 멸망했다.
요양(姚襄)은 17세가 되자 용감하고 위엄이 있었으며, 지략에도 뛰어났다. 그 때문에, 요익중에게 요양을 계승자로 삼아 달라고 요청하였다. 요익중은 요양이 장남이 아니라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이러한 청원이 하루에 수천 건을 넘어서자 요양에게 군대를 주게 되었다.
352년 3월, 요익중이 병을 앓자, 아들 요양 등에게 유언을 남기고 병사하였다.
==== 란민과의 전투 ====
349년에 후조(後趙)가 혼란에 빠지자 요양은 요익중의 명을 받아 후조와 염위(冉魏)의 분쟁에 개입하고 여러 전쟁에 참여하였다.[1]
351년, 석지(石祗)는 향국(襄國)(현재 허베이성(河北省) 싱타이시(邢台市))에서 란민(冉閔)에게 포위되었다. 요익중은 요양을 보내 포위를 해제하려 했지만, 그 전에 아들에게 석씨(石氏) 일족을 학살한 란민을 사로잡겠다고 맹세하라고 말했다.[3] 요상은 석곤(石琨)과 전연(前燕) 장군 월완(岳婉)의 지원을 받아 향국에 도착했다. 요상은 장려(長蘆)(현재 허베이성(河北省) 창저우시(滄州市))에서 란민의 장군 호목(胡睦)을 패퇴시켰다. 세 군대가 접근하자 란민은 전투를 벌이러 나왔다. 요상, 석곤, 월완은 란민을 삼면에서 공격했고, 석지는 뒤에서 공격했다. 란민은 참패했지만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요상은 승리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했기에 요익중은 그를 태형 백대(百杖)로 처벌했다.[4]
아버지 요익중(姚弋仲)은 후조(後趙)에 섬겼으며, 석호(石虎)에게도 인정받는 인물이었다.
요양(姚襄)은 17세가 되자 용감하고 위엄이 있었으며, 지략에도 뛰어났다. 그 때문에, 요익중에게 요양을 계승자로 삼아 달라고 요청하였다. 요익중은 요양이 장남이 아니라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이러한 청원이 하루에 수천 건을 넘어서자 요양에게 군대를 주게 되었다.
란민(冉閔)의 난으로 후조가 혼란에 빠지자, 요익중은 관중(關中)에 근거지를 마련하려고 꾀했지만, 저(氐)족 추장 부홍(苻洪)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350년 1월, 요익중의 명령에 따라 요양은 5만의 군사를 이끌고 부홍을 공격했으나, 대패하여 3만 명의 군사가 포로로 잡혔다.
2월, 란민이 업(鄴)에서 후조의 황족을 학살하고 란위(冉魏)를 세우자, 석지(石祗)는 양국(襄國)에서 제위에 올랐다. 요양은 석지로부터 표기장군(驃騎將軍), 예주(豫州)자사(刺史)에 임명되었고, 신창공(新昌公)에 봉해졌다.
351년 2월, 란민이 양국을 백여 일 동안 포위하자, 석지는 요익중에게 구원병을 요청했다. 요익중은 이에 응하여, 요양은 2만 8천의 군사를 이끌고 염두(灄頭)에서 양국 구원을 향해 출발했다. 출발에 앞서 요익중은 “란민은 인(仁)을 버리고 의(義)를 저버리고, 석씨를 학살했다."라고 경고했다.
3월, 요양이 양국에 접근하자, 란민은 거기장군(車騎將軍)호목(胡睦)을 장로(長蘆)에 파견하여 방어하게 했지만, 요양은 이를 역습하여 그 군사를 거의 전멸시켰다. 란민이 전군을 이끌고 출격하자, 요양은 후조의 석곤(石琨)·전연(前燕)의 열관(悅綰) 등과 함께 삼면에서 란민을 공격하였고, 더욱이 석지가 후방에서 호응했다. 이로 인해 란민은 대패하였고, 사망자는 10만 명을 넘었다. 란위를 격파한 요양은 염두로 돌아왔지만, 란민을 사로잡지 못했기 때문에, 요익중은 노하여 요양에게 백장의 형벌을 내렸다. 4월, 석지는 부하 유현의 배신으로 살해되었고, 후조는 멸망했다.
11월, 요익중이 동진(東晋)에 귀순하자, 요양은 동진으로부터 병주(并州) 자사에 임명되었고, 즉구현공(即丘縣公)[29]에 봉해졌다.
352년 3월, 요익중이 병을 앓자, 아들 요양 등에게 유언을 남기고 병사하였다.
==== 동진(東晉)으로의 귀순과 배신 ====
352년 요익중이 죽자 요양은 발상하지 않고 동진(東晉)으로 이동하였다. 그 과정에서 전진(前秦)의 공격을 받아 위기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동진의 구원군이 도착하여 살아남았다.
요양은 강족을 이끌고 동진의 초성(譙城)에 주둔하였다. 은호(殷浩)의 북벌에 종군하여 사상(謝尚)을 구원하는 등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요양은 동진에 배반할 뜻을 품었으며, 그를 의심하는 은호와 대립하였다.
353년, 은호는 요양의 세력이 강성해지는 것을 질투하고 두려워하여 그를 제거하려 했다. 요양의 부하 중 은호에게 귀순하려는 자를 요양이 죽이자, 은호는 요양의 동생들을 잡아 가두고 암살자를 보냈으나 모두 실패했다. 암살자들은 오히려 요양에게 사실을 털어놓았고, 요양은 그들을 잘 대우했다.[30]
은호는 위경(魏憬)에게 5천 명의 군사를 주어 요양을 공격하게 했지만, 요양은 역공하여 위경을 죽이고 그의 군사를 흡수했다. 은호는 유계(劉啓)에게 초(譙)를 지키게 하고, 요양을 양국(梁國)의 려대(蠡台)로 옮겨 양국내사(梁國內史)로 임명했다.[30]
위경의 자손들이 수춘(壽春)을 자주 왕래하자 요양은 은호의 계략을 의심하여 권의(權毅)를 보내 은호와 대화하게 했다. 은호는 권익에게 요양의 잘못을 따졌으나, 권익은 오히려 요양이 동진(東晉)에 귀순한 점과 은호의 의심을 지적하며 맞섰다. 결국 둘의 만남은 서로에 대한 불신만 키웠다.[10]
같은 해 10월, 은호는 7만 군사로 북벌을 감행하며 요양을 선봉에 세웠다. 요양은 호응하는 척하다가 몰래 매복했고, 은호가 산상(山桑)까지 추격해오자 크게 격파했다.[31] 은호는 군수품(輜重)을 버리고 초성(譙城)으로 도망쳤고, 요양은 1만 명이 넘는 적을 사로잡거나 죽이고 물자를 모두 손에 넣었다. 요양은 요익(姚益)에게 산상의 요새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회남(淮南)으로 돌아갔다.[32]
11월, 은호는 왕빈지(王彬之) 등을 보내 산상을 공격했지만, 요양은 회남에서 구원하여 이들을 격파하고 모두 죽였다. 이후 요양은 작파(芍陂)에 주둔했다.[31] 12월, 요양은 회하(淮河)를 건너 구이(盱眙)에 주둔하며 유민을 모아 군사를 7만 명으로 늘렸다. 각 거점에 수재(守宰)를 두고 농업을 장려했으며, 건강으로 사자를 보내 은호의 죄상을 보고하고 혼란을 일으킨 것을 사과했다.[31]
==== 은호와의 갈등 ====
353년, 은호는 요양의 세력이 강성해지는 것을 질투하고 두려워하여 그를 제거하려 했다. 요양의 부하 중 은호에게 귀순하려는 자를 요양이 죽이자, 은호는 요양의 동생들을 잡아 가두고 암살자를 보냈으나 모두 실패했다. 암살자들은 오히려 요양에게 사실을 털어놓았고, 요양은 그들을 잘 대우했다.[30]
은호는 위경(魏憬)에게 5천 명의 군사를 주어 요양을 공격하게 했지만, 요양은 역공하여 위경을 죽이고 그의 군사를 흡수했다. 은호는 유계(劉啓)에게 초(譙)를 지키게 하고, 요양을 양국(梁國)의 려대(蠡台)로 옮겨 양국내사(梁國內史)로 임명했다.[30]
위경의 자손들이 수춘(壽春)을 자주 왕래하자 요양은 은호의 계략을 의심하여 권의(權毅)를 보내 은호와 대화하게 했다. 은호는 권익에게 요양의 잘못을 따졌으나, 권익은 오히려 요양이 동진에 귀순한 점과 은호의 의심을 지적하며 맞섰다. 결국 둘의 만남은 서로에 대한 불신만 키웠다.[10]
같은 해 10월, 은호는 7만 군사로 북벌을 감행하며 요양을 선봉에 세웠다. 요양은 호응하는 척하다가 몰래 매복했고, 은호가 산상(山桑)까지 추격해오자 크게 격파했다.[31] 은호는 군수품을 버리고 초성(譙城)으로 도망쳤고, 요양은 1만 명이 넘는 적을 사로잡거나 죽이고 물자를 모두 손에 넣었다. 요양은 요익(姚益)에게 산상의 요새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회남(淮南)으로 돌아갔다.[32]
11월, 은호는 왕빈지(王彬之) 등을 보내 산상을 공격했지만, 요양은 회남에서 구원하여 이들을 격파하고 모두 죽였다. 이후 요양은 작파(芍陂)에 주둔했다.[31] 12월, 요양은 회하(淮河)를 건너 구이(盱眙)에 주둔하며 유민을 모아 군사를 7만 명으로 늘렸다. 각 거점에 수재(守宰)를 두고 농업을 장려했으며, 건강으로 사자를 보내 은호의 죄상을 보고하고 혼란을 일으킨 것을 사과했다.[31]
==== 독자 세력 구축과 전진과의 대립 ====
354년에는 전연(前燕)에 복속하였다.
355년에는 회남을 떠나 허창(許昌)을 점령하고 낙양(洛陽)을 공격하였다.
356년 5월, 요양은 허창을 출발하여 주성(周成)이 점거하고 있던 낙양을 공격했다. 7월, 공격한 지 한 달이 넘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자, 장사(長史) 왕량(王亮)은 후퇴를 건의했다.[35] 그러나 요양은 낙양이 중요한 요새이며, 먼저 낙양에 기반을 두고 대업을 건설하겠다는 생각으로 이를 거절했다. 얼마 후 왕량은 사망했고, 요양은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통곡했다.[36]
동진의 정서대장군 환온은 강릉에서 요양 토벌군을 일으켜 낙양으로 진군했다. 8월, 환온이 이수 상류에 도착하자, 요양은 낙양 포위를 풀고 환온에 대비하여 정예병을 이수 북쪽 숲에 숨겼다. 요양은 사자를 보내 환온에게 복종 의사를 밝히며 군대를 조금 후퇴시켜 줄 것을 요청했으나, 환온은 이를 거절하며 중원 회복의 뜻을 밝히고 요양에게 직접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17]
요양은 이수를 사이에 두고 환온과 전투를 벌였으나, 환온의 독려에 크게 패하여 수천 명의 병사를 잃었다.[18] 부하 장준(張駿), 양응(楊凝) 등은 환온에게 사로잡혔고, 요양은 부하 수천 기를 거느리고 낙양 북망산으로 도주했다. 그날 밤, 5천 명이 넘는 백성들이 처자식을 버리고 요양을 따랐으며, 양향으로 이동하자 4천 호가 넘는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요양이 서쪽으로 도주하자, 환온은 추격했으나 잡지 못했다.
이후 평양에 도착한 요양은 전진의 병주자사 윤적(尹赤)의 귀순을 받아들여 평양을 지배하고 양릉에 근거지를 마련했다.
전진의 대장군이자 기주목이었던 장평(張平)이 평양을 공격하자, 요양은 패배했다. 그러나 이후 장평과 의형제를 맺고 각자 군사를 거두었다.
==== 낙양 공방전과 환온과의 대립 ====
356년 5월, 요양은 허창을 출발하여 주성(周成)이 점거하고 있던 낙양을 공격했다. 7월, 공격한 지 한 달이 넘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자, 장사(長史) 왕량(王亮)은 후퇴를 건의했다.[35] 그러나 요양은 낙양이 중요한 요새이며, 먼저 낙양에 기반을 두고 대업을 건설하겠다는 생각으로 이를 거절했다. 얼마 후 왕량은 사망했고, 요양은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통곡했다.[36]
동진의 정서대장군 환온은 강릉에서 요양 토벌군을 일으켜 낙양으로 진군했다. 8월, 환온이 이수 상류에 도착하자, 요양은 낙양 포위를 풀고 환온에 대비하여 정예병을 이수 북쪽 숲에 숨겼다. 요양은 사자를 보내 환온에게 복종 의사를 밝히며 군대를 조금 후퇴시켜 줄 것을 요청했으나, 환온은 이를 거절하며 중원 회복의 뜻을 밝히고 요양에게 직접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17]
요양은 이수를 사이에 두고 환온과 전투를 벌였으나, 환온의 독려에 크게 패하여 수천 명의 병사를 잃었다.[18] 부하 장준(張駿), 양응(楊凝) 등은 환온에게 사로잡혔고, 요양은 부하 수천 기를 거느리고 낙양 북망산으로 도주했다. 그날 밤, 5천 명이 넘는 백성들이 처자식을 버리고 요양을 따랐으며, 양향으로 이동하자 4천 호가 넘는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요양이 서쪽으로 도주하자, 환온은 추격했으나 잡지 못했다.
이후 평양에 도착한 요양은 전진의 병주자사 윤적(尹赤)의 귀순을 받아들여 평양을 지배하고 양릉에 근거지를 마련했다.
전진의 대장군이자 기주목이었던 장평(張平)이 평양을 공격하자, 요양은 패배했다. 그러나 이후 장평과 의형제를 맺고 각자 군사를 거두었다.
==== 전진과의 최후 ====
356년에 환온(桓溫)이 북벌을 시작하여 요양을 공격하자 요양은 크게 패배하여 병주(幷州 : 산시성)의 평양(平陽)으로 도망쳤다.
평양에서 과거의 부하 윤적을 만나 그 세력을 합친 요양은 병주의 군벌 장평과 싸워 패배하였으나 곧 장평과 화해하고 의형제를 맺었다.
357년, 요양은 전진의 관중(關中)을 공격하였다. 관중의 강족이 호응하여 한때 장안을 위협하였으나 곧 토벌군에 패배하고 붙잡혀 살해당했고 요양 휘하의 강족은 동생 요장이 수습하여 전진에 항복하였다.[26]
승평(升平) 원년(357년) 3월, 요양(姚襄)은 북굴로 이동하여 다시 관중(關中) 공략을 계획했다. 4월, 북굴에서 군대를 이끌고 행성(杏城)에 주둔하고, 종질인 보국장군(輔國將軍) 요란(姚蘭)에게 부성(敷城)을 공략하게 하고, 형인 요장(姚曜) 장군 요익(姚益)[32]과 좌장군(左將軍) 왕흠로(王欽盧)에게 각각 군사를 주어 북방의 여러 세력을 초빙했다. 이로 인해, 강호(羌胡)와 전진(前秦) 백성들 중 귀순하는 자가 5만 호(戶)가 넘었다. 전진의 군주 부생(苻生)은 부비룡(苻飛龍)을 파견하여 요란을 공격했고, 요란은 패하여 사로잡혔다.
요양은 군사를 이끌고 황락(黃洛)으로 진격하자, 부생은 위대장군(衛大將軍) 부황미(苻黄眉), 평북장군(平北將軍) 부도(苻道), 용양장군(龍驤將軍) 부견(苻堅), 건절장군(建節將軍) 등강(鄧羌)에게 보병과 기병 1만 5천을 주어 맞서 싸우게 했다. 이에 대해 요양은 해자를 깊게 하고 성벽을 높게 쌓아 방비를 굳히고, 맞서 싸우려 하지 않았다.
5월, 등강은 기병 3천을 이끌고 성문에 바싹 다가가 진을 치고, 요양을 자극했다. 요양이 분노하여 출격하려 하자, 사문(沙門) 지통은 “작년에는 태백(金星)이 진(土星)을 범(犯)했고, 올해는 혜성(彗星)이 관우(關右)를 휩쓸고 있습니다. 출병에는 이롭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군사를 격려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후일에 다시 행동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간곡하게 간했지만, 요양은 “두 영웅이 함께 설 수는 없을 것이다. 하늘이 덕을 버리지 않고 백성을 구원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나의 계획은 이미 결정되었고, 무리를 현혹하는 자는 죽일 것이다.”라고 말하고, 전군을 이끌고 쳐나갔다. 등강은 상대에게 유리한 입장에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군대를 물리고, 요양군을 본진에서 멀리 유인했다. 요양은 이에 속아 맹렬히 추격하여 삼원(三原)에 이르렀으나, 여기서 등강은 기병을 반전시켜 적군을 기습했다. 이를 신호로 부황미와 부견이 이끄는 본대가 나타나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고, 요양은 대패했다. 그는 능미감(黧眉騧)이라는 준마를 타고 있었지만, 그 말이 넘어지는 바람에 전진군에게 잡혀 죽임을 당했다. 향년 27세였다.
동생 요장(姚萇)은 패잔병을 수습하여 부생에게 항복했다. 요양은 아버지인 요익중(姚弋仲)의 관을 군중에 두고 있었는데, 부생은 왕의 예로 요익중을 장사 지냈고, 또한 공의 예로 요양을 장사 지냈다.
건초 원년(386년), 요장이 후진(後秦)을 건국하자, 요양을 위무왕(魏武王)으로 추시(追諡)하고, 손자인 요연정(姚延定)을 동성후(東城侯)에 봉했다.
2. 1. 후조(後趙)에서의 활약
349년 후조가 혼란에 빠지자 요양은 아버지 요익중의 명을 받아 후조와 염위의 분쟁에 개입하여 여러 전쟁에 참여하였다.[1]350년 1월, 요익중의 명령에 따라 요양은 5만의 군사를 이끌고 저(氐)족 추장 부홍(苻洪)을 공격했으나, 대패하여 3만 명의 군사가 포로로 잡혔다.
351년 2월, 란민(冉閔)이 업(鄴)에서 후조의 황족을 학살하고 란위(冉魏)를 세우자, 석지(石祗)는 양국(襄國)에서 제위에 올랐다. 요양은 석지로부터 표기장군(驃騎將軍), 예주(豫州)자사(刺史)에 임명되었고, 신창공(新昌公)에 봉해졌다.[3]
351년 2월, 란민이 양국을 백여 일 동안 포위하자, 석지는 요익중에게 구원병을 요청했다. 요익중은 이에 응하여, 요양은 2만 8천의 군사를 이끌고 염두(灄頭)에서 양국 구원을 향해 출발했다. 출발에 앞서 요익중은 “란민은 인(仁)을 버리고 의(義)를 저버리고, 석씨를 학살했다."라고 경고했다.
3월, 요양이 양국에 접근하자, 란민은 거기장군(車騎將軍) 호목(胡睦)을 장로(長蘆)에 파견하여 방어하게 했지만, 요양은 이를 역습하여 그 군사를 거의 전멸시켰다. 란민이 전군을 이끌고 출격하자, 요양은 후조의 석곤(石琨)·전연(前燕)의 열관(悅綰) 등과 함께 삼면에서 란민을 공격하였고, 더욱이 석지가 후방에서 호응했다. 이로 인해 란민은 대패하였고, 사망자는 10만 명을 넘었다. 란위를 격파한 요양은 염두로 돌아왔지만, 란민을 사로잡지 못했기 때문에, 요익중은 노하여 요양에게 백장의 형벌을 내렸다.[4] 4월, 석지는 부하 유현의 배신으로 살해되었고, 후조는 멸망했다.
요양(姚襄)은 17세가 되자 용감하고 위엄이 있었으며, 지략에도 뛰어났다. 그 때문에, 요익중에게 요양을 계승자로 삼아 달라고 요청하였다. 요익중은 요양이 장남이 아니라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이러한 청원이 하루에 수천 건을 넘어서자 요양에게 군대를 주게 되었다.
352년 3월, 요익중이 병을 앓자, 아들 요양 등에게 유언을 남기고 병사하였다.
2. 1. 1. 란민과의 전투
349년에 후조(後趙)가 혼란에 빠지자 요양은 요익중의 명을 받아 후조와 염위(冉魏)의 분쟁에 개입하고 여러 전쟁에 참여하였다.[1]351년, 석지(石祗)는 향국(襄國)(현재 허베이성(河北省) 싱타이시(邢台市))에서 란민(冉閔)에게 포위되었다. 요익중은 요양을 보내 포위를 해제하려 했지만, 그 전에 아들에게 석씨(石氏) 일족을 학살한 란민을 사로잡겠다고 맹세하라고 말했다.[3] 요상은 석곤(石琨)과 전연(前燕) 장군 월완(岳婉)의 지원을 받아 향국에 도착했다. 요상은 장려(長蘆)(현재 허베이성(河北省) 창저우시(滄州市))에서 란민의 장군 호목(胡睦)을 패퇴시켰다. 세 군대가 접근하자 란민은 전투를 벌이러 나왔다. 요상, 석곤, 월완은 란민을 삼면에서 공격했고, 석지는 뒤에서 공격했다. 란민은 참패했지만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요상은 승리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했기에 요익중은 그를 태형 백대(百杖)로 처벌했다.[4]
아버지 요익중(姚弋仲)은 후조(後趙)에 섬겼으며, 석호(石虎)에게도 인정받는 인물이었다.
요양(姚襄)은 17세가 되자 용감하고 위엄이 있었으며, 지략에도 뛰어났다. 그 때문에, 요익중에게 요양을 계승자로 삼아 달라고 요청하였다. 요익중은 요양이 장남이 아니라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이러한 청원이 하루에 수천 건을 넘어서자 요양에게 군대를 주게 되었다.
란민(冉閔)의 난으로 후조가 혼란에 빠지자, 요익중은 관중(關中)에 근거지를 마련하려고 꾀했지만, 저(氐)족 추장 부홍(苻洪)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350년 1월, 요익중의 명령에 따라 요양은 5만의 군사를 이끌고 부홍을 공격했으나, 대패하여 3만 명의 군사가 포로로 잡혔다.
2월, 란민이 업(鄴)에서 후조의 황족을 학살하고 란위(冉魏)를 세우자, 석지(石祗)는 양국(襄國)에서 제위에 올랐다. 요양은 석지로부터 표기장군(驃騎將軍), 예주(豫州)자사(刺史)에 임명되었고, 신창공(新昌公)에 봉해졌다.
351년 2월, 란민이 양국을 백여 일 동안 포위하자, 석지는 요익중에게 구원병을 요청했다. 요익중은 이에 응하여, 요양은 2만 8천의 군사를 이끌고 염두(灄頭)에서 양국 구원을 향해 출발했다. 출발에 앞서 요익중은 “란민은 인(仁)을 버리고 의(義)를 저버리고, 석씨를 학살했다."라고 경고했다.
3월, 요양이 양국에 접근하자, 란민은 거기장군(車騎將軍)호목(胡睦)을 장로(長蘆)에 파견하여 방어하게 했지만, 요양은 이를 역습하여 그 군사를 거의 전멸시켰다. 란민이 전군을 이끌고 출격하자, 요양은 후조의 석곤(石琨)·전연(前燕)의 열관(悅綰) 등과 함께 삼면에서 란민을 공격하였고, 더욱이 석지가 후방에서 호응했다. 이로 인해 란민은 대패하였고, 사망자는 10만 명을 넘었다. 란위를 격파한 요양은 염두로 돌아왔지만, 란민을 사로잡지 못했기 때문에, 요익중은 노하여 요양에게 백장의 형벌을 내렸다. 4월, 석지는 부하 유현의 배신으로 살해되었고, 후조는 멸망했다.
11월, 요익중이 동진(東晋)에 귀순하자, 요양은 동진으로부터 병주(并州) 자사에 임명되었고, 즉구현공(即丘縣公)[29]에 봉해졌다.
352년 3월, 요익중이 병을 앓자, 아들 요양 등에게 유언을 남기고 병사하였다.
2. 2. 동진(東晉)으로의 귀순과 배신
353년, 은호는 요양의 세력이 강성해지는 것을 질투하고 두려워하여 그를 제거하려 했다. 요양의 부하 중 은호에게 귀순하려는 자를 요양이 죽이자, 은호는 요양의 동생들을 잡아 가두고 암살자를 보냈으나 모두 실패했다. 암살자들은 오히려 요양에게 사실을 털어놓았고, 요양은 그들을 잘 대우했다.[30]은호는 위경(魏憬)에게 5천 명의 군사를 주어 요양을 공격하게 했지만, 요양은 역공하여 위경을 죽이고 그의 군사를 흡수했다. 은호는 유계(劉啓)에게 초(譙)를 지키게 하고, 요양을 양국(梁國)의 려대(蠡台)로 옮겨 양국내사(梁國內史)로 임명했다.[30]
위경의 자손들이 수춘(壽春)을 자주 왕래하자 요양은 은호의 계략을 의심하여 권의(權毅)를 보내 은호와 대화하게 했다. 은호는 권익에게 요양의 잘못을 따졌으나, 권익은 오히려 요양이 동진(東晉)에 귀순한 점과 은호의 의심을 지적하며 맞섰다. 결국 둘의 만남은 서로에 대한 불신만 키웠다.[10]
같은 해 10월, 은호는 7만 군사로 북벌을 감행하며 요양을 선봉에 세웠다. 요양은 호응하는 척하다가 몰래 매복했고, 은호가 산상(山桑)까지 추격해오자 크게 격파했다.[31] 은호는 군수품(輜重)을 버리고 초성(譙城)으로 도망쳤고, 요양은 1만 명이 넘는 적을 사로잡거나 죽이고 물자를 모두 손에 넣었다. 요양은 요익(姚益)에게 산상의 요새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회남(淮南)으로 돌아갔다.[32]
11월, 은호는 왕빈지(王彬之) 등을 보내 산상을 공격했지만, 요양은 회남에서 구원하여 이들을 격파하고 모두 죽였다. 이후 요양은 작파(芍陂)에 주둔했다.[31] 12월, 요양은 회하(淮河)를 건너 구이(盱眙)에 주둔하며 유민을 모아 군사를 7만 명으로 늘렸다. 각 거점에 수재(守宰)를 두고 농업을 장려했으며, 건강으로 사자를 보내 은호의 죄상을 보고하고 혼란을 일으킨 것을 사과했다.[31]
2. 2. 1. 은호와의 갈등
353년, 은호는 요양의 세력이 강성해지는 것을 질투하고 두려워하여 그를 제거하려 했다. 요양의 부하 중 은호에게 귀순하려는 자를 요양이 죽이자, 은호는 요양의 동생들을 잡아 가두고 암살자를 보냈으나 모두 실패했다. 암살자들은 오히려 요양에게 사실을 털어놓았고, 요양은 그들을 잘 대우했다.[30]은호는 위경(魏憬)에게 5천 명의 군사를 주어 요양을 공격하게 했지만, 요양은 역공하여 위경을 죽이고 그의 군사를 흡수했다. 은호는 유계(劉啓)에게 초(譙)를 지키게 하고, 요양을 양국(梁國)의 려대(蠡台)로 옮겨 양국내사(梁國內史)로 임명했다.[30]
위경의 자손들이 수춘(壽春)을 자주 왕래하자 요양은 은호의 계략을 의심하여 권의(權毅)를 보내 은호와 대화하게 했다. 은호는 권익에게 요양의 잘못을 따졌으나, 권익은 오히려 요양이 동진에 귀순한 점과 은호의 의심을 지적하며 맞섰다. 결국 둘의 만남은 서로에 대한 불신만 키웠다.[10]
같은 해 10월, 은호는 7만 군사로 북벌을 감행하며 요양을 선봉에 세웠다. 요양은 호응하는 척하다가 몰래 매복했고, 은호가 산상(山桑)까지 추격해오자 크게 격파했다.[31] 은호는 군수품을 버리고 초성(譙城)으로 도망쳤고, 요양은 1만 명이 넘는 적을 사로잡거나 죽이고 물자를 모두 손에 넣었다. 요양은 요익(姚益)에게 산상의 요새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회남(淮南)으로 돌아갔다.[32]
11월, 은호는 왕빈지(王彬之) 등을 보내 산상을 공격했지만, 요양은 회남에서 구원하여 이들을 격파하고 모두 죽였다. 이후 요양은 작파(芍陂)에 주둔했다.[31] 12월, 요양은 회하(淮河)를 건너 구이(盱眙)에 주둔하며 유민을 모아 군사를 7만 명으로 늘렸다. 각 거점에 수재(守宰)를 두고 농업을 장려했으며, 건강으로 사자를 보내 은호의 죄상을 보고하고 혼란을 일으킨 것을 사과했다.[31]
2. 3. 독자 세력 구축과 전진과의 대립
356년 5월, 요양은 허창을 출발하여 주성(周成)이 점거하고 있던 낙양을 공격했다. 7월, 공격한 지 한 달이 넘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자, 장사(長史) 왕량(王亮)은 후퇴를 건의했다.[35] 그러나 요양은 낙양이 중요한 요새이며, 먼저 낙양에 기반을 두고 대업을 건설하겠다는 생각으로 이를 거절했다. 얼마 후 왕량은 사망했고, 요양은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통곡했다.[36]동진의 정서대장군 환온은 강릉에서 요양 토벌군을 일으켜 낙양으로 진군했다. 8월, 환온이 이수 상류에 도착하자, 요양은 낙양 포위를 풀고 환온에 대비하여 정예병을 이수 북쪽 숲에 숨겼다. 요양은 사자를 보내 환온에게 복종 의사를 밝히며 군대를 조금 후퇴시켜 줄 것을 요청했으나, 환온은 이를 거절하며 중원 회복의 뜻을 밝히고 요양에게 직접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17]
요양은 이수를 사이에 두고 환온과 전투를 벌였으나, 환온의 독려에 크게 패하여 수천 명의 병사를 잃었다.[18] 부하 장준(張駿), 양응(楊凝) 등은 환온에게 사로잡혔고, 요양은 부하 수천 기를 거느리고 낙양 북망산으로 도주했다. 그날 밤, 5천 명이 넘는 백성들이 처자식을 버리고 요양을 따랐으며, 양향으로 이동하자 4천 호가 넘는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요양이 서쪽으로 도주하자, 환온은 추격했으나 잡지 못했다.
이후 평양에 도착한 요양은 전진의 병주자사 윤적(尹赤)의 귀순을 받아들여 평양을 지배하고 양릉에 근거지를 마련했다.
전진의 대장군이자 기주목이었던 장평(張平)이 평양을 공격하자, 요양은 패배했다. 그러나 이후 장평과 의형제를 맺고 각자 군사를 거두었다.
357년, 요양은 전진의 관중(關中)을 공격하였다. 관중의 강족이 호응하여 한때 장안을 위협하였으나 곧 토벌군에 패배하고 붙잡혀 살해당했고 요양 휘하의 강족은 동생 요장이 수습하여 전진에 항복하였다.[26]
승평(升平) 원년(357년) 3월, 요양(姚襄)은 북굴로 이동하여 다시 관중(關中) 공략을 계획했다. 4월, 북굴에서 군대를 이끌고 행성(杏城)에 주둔하고, 종질인 보국장군(輔國將軍) 요란(姚蘭)에게 부성(敷城)을 공략하게 하고, 형인 요장(姚曜) 장군 요익(姚益)[32]과 좌장군(左將軍) 왕흠로(王欽盧)에게 각각 군사를 주어 북방의 여러 세력을 초빙했다. 이로 인해, 강호(羌胡)와 전진(前秦) 백성들 중 귀순하는 자가 5만 호(戶)가 넘었다. 전진의 군주 부생(苻生)은 부비룡(苻飛龍)을 파견하여 요란을 공격했고, 요란은 패하여 사로잡혔다.
요양은 군사를 이끌고 황락(黃洛)으로 진격하자, 부생은 위대장군(衛大將軍) 부황미(苻黄眉), 평북장군(平北將軍) 부도(苻道), 용양장군(龍驤將軍) 부견(苻堅), 건절장군(建節將軍) 등강(鄧羌)에게 보병과 기병 1만 5천을 주어 맞서 싸우게 했다. 이에 대해 요양은 해자를 깊게 하고 성벽을 높게 쌓아 방비를 굳히고, 맞서 싸우려 하지 않았다.
5월, 등강은 기병 3천을 이끌고 성문에 바싹 다가가 진을 치고, 요양을 자극했다. 요양이 분노하여 출격하려 하자, 사문(沙門) 지통은 “작년에는 태백(金星)이 진(土星)을 범(犯)했고, 올해는 혜성(彗星)이 관우(關右)를 휩쓸고 있습니다. 출병에는 이롭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군사를 격려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후일에 다시 행동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간곡하게 간했지만, 요양은 “두 영웅이 함께 설 수는 없을 것이다. 하늘이 덕을 버리지 않고 백성을 구원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나의 계획은 이미 결정되었고, 무리를 현혹하는 자는 죽일 것이다.”라고 말하고, 전군을 이끌고 쳐나갔다. 등강은 상대에게 유리한 입장에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군대를 물리고, 요양군을 본진에서 멀리 유인했다. 요양은 이에 속아 맹렬히 추격하여 삼원(三原)에 이르렀으나, 여기서 등강은 기병을 반전시켜 적군을 기습했다. 이를 신호로 부황미와 부견이 이끄는 본대가 나타나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고, 요양은 대패했다. 그는 능미감(黧眉騧)이라는 준마를 타고 있었지만, 그 말이 넘어지는 바람에 전진군에게 잡혀 죽임을 당했다. 향년 27세였다.
동생 요장(姚萇)은 패잔병을 수습하여 부생에게 항복했다. 요양은 아버지인 요익중(姚弋仲)의 관을 군중에 두고 있었는데, 부생은 왕의 예로 요익중을 장사 지냈고, 또한 공의 예로 요양을 장사 지냈다.
건초 원년(386년), 요장이 후진(後秦)을 건국하자, 요양을 위무왕(魏武王)으로 추시(追諡)하고, 손자인 요연정(姚延定)을 동성후(東城侯)에 봉했다.
2. 3. 1. 낙양 공방전과 환온과의 대립
356년 5월, 요양은 허창을 출발하여 주성(周成)이 점거하고 있던 낙양을 공격했다. 7월, 공격한 지 한 달이 넘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자, 장사(長史) 왕량(王亮)은 후퇴를 건의했다.[35] 그러나 요양은 낙양이 중요한 요새이며, 먼저 낙양에 기반을 두고 대업을 건설하겠다는 생각으로 이를 거절했다. 얼마 후 왕량은 사망했고, 요양은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통곡했다.[36]동진의 정서대장군 환온은 강릉에서 요양 토벌군을 일으켜 낙양으로 진군했다. 8월, 환온이 이수 상류에 도착하자, 요양은 낙양 포위를 풀고 환온에 대비하여 정예병을 이수 북쪽 숲에 숨겼다. 요양은 사자를 보내 환온에게 복종 의사를 밝히며 군대를 조금 후퇴시켜 줄 것을 요청했으나, 환온은 이를 거절하며 중원 회복의 뜻을 밝히고 요양에게 직접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17]
요양은 이수를 사이에 두고 환온과 전투를 벌였으나, 환온의 독려에 크게 패하여 수천 명의 병사를 잃었다.[18] 부하 장준(張駿), 양응(楊凝) 등은 환온에게 사로잡혔고, 요양은 부하 수천 기를 거느리고 낙양 북망산으로 도주했다. 그날 밤, 5천 명이 넘는 백성들이 처자식을 버리고 요양을 따랐으며, 양향으로 이동하자 4천 호가 넘는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요양이 서쪽으로 도주하자, 환온은 추격했으나 잡지 못했다.
이후 평양에 도착한 요양은 전진의 병주자사 윤적(尹赤)의 귀순을 받아들여 평양을 지배하고 양릉에 근거지를 마련했다.
전진의 대장군이자 기주목이었던 장평(張平)이 평양을 공격하자, 요양은 패배했다. 그러나 이후 장평과 의형제를 맺고 각자 군사를 거두었다.
2. 3. 2. 전진과의 최후
357년, 요양은 전진의 관중(關中)을 공격하였다. 관중의 강족이 호응하여 한때 장안을 위협하였으나 곧 토벌군에 패배하고 붙잡혀 살해당했고 요양 휘하의 강족은 동생 요장이 수습하여 전진에 항복하였다.[26]승평(升平) 원년(357년) 3월, 요양(姚襄)은 북굴로 이동하여 다시 관중(關中) 공략을 계획했다. 4월, 북굴에서 군대를 이끌고 행성(杏城)에 주둔하고, 종질인 보국장군(輔國將軍) 요란(姚蘭)에게 부성(敷城)을 공략하게 하고, 형인 요장(姚曜) 장군 요익(姚益)[32]과 좌장군(左將軍) 왕흠로(王欽盧)에게 각각 군사를 주어 북방의 여러 세력을 초빙했다. 이로 인해, 강호(羌胡)와 전진(前秦) 백성들 중 귀순하는 자가 5만 호(戶)가 넘었다. 전진의 군주 부생(苻生)은 부비룡(苻飛龍)을 파견하여 요란을 공격했고, 요란은 패하여 사로잡혔다.
요양은 군사를 이끌고 황락(黃洛)으로 진격하자, 부생은 위대장군(衛大將軍) 부황미(苻黄眉), 평북장군(平北將軍) 부도(苻道), 용양장군(龍驤將軍) 부견(苻堅), 건절장군(建節將軍) 등강(鄧羌)에게 보병과 기병 1만 5천을 주어 맞서 싸우게 했다. 이에 대해 요양은 해자를 깊게 하고 성벽을 높게 쌓아 방비를 굳히고, 맞서 싸우려 하지 않았다.
5월, 등강은 기병 3천을 이끌고 성문에 바싹 다가가 진을 치고, 요양을 자극했다. 요양이 분노하여 출격하려 하자, 사문(沙門) 지통은 “작년에는 태백(金星)이 진(土星)을 범(犯)했고, 올해는 혜성(彗星)이 관우(關右)를 휩쓸고 있습니다. 출병에는 이롭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군사를 격려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후일에 다시 행동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간곡하게 간했지만, 요양은 “두 영웅이 함께 설 수는 없을 것이다. 하늘이 덕을 버리지 않고 백성을 구원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나의 계획은 이미 결정되었고, 무리를 현혹하는 자는 죽일 것이다.”라고 말하고, 전군을 이끌고 쳐나갔다. 등강은 상대에게 유리한 입장에 있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군대를 물리고, 요양군을 본진에서 멀리 유인했다. 요양은 이에 속아 맹렬히 추격하여 삼원(三原)에 이르렀으나, 여기서 등강은 기병을 반전시켜 적군을 기습했다. 이를 신호로 부황미와 부견이 이끄는 본대가 나타나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고, 요양은 대패했다. 그는 능미감(黧眉騧)이라는 준마를 타고 있었지만, 그 말이 넘어지는 바람에 전진군에게 잡혀 죽임을 당했다. 향년 27세였다.
동생 요장(姚萇)은 패잔병을 수습하여 부생에게 항복했다. 요양은 아버지인 요익중(姚弋仲)의 관을 군중에 두고 있었는데, 부생은 왕의 예로 요익중을 장사 지냈고, 또한 공의 예로 요양을 장사 지냈다.
건초 원년(386년), 요장이 후진(後秦)을 건국하자, 요양을 위무왕(魏武王)으로 추시(追諡)하고, 손자인 요연정(姚延定)을 동성후(東城侯)에 봉했다.
3. 평가
요양(姚襄)은 젊어서부터 이름을 떨쳤으며, 세상에서 으뜸가는 용맹함을 자랑했다. 학문을 좋아하고 박식했으며, 담론에도 능하여 강동의 선비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용맹함과 자애로움을 겸비하여 여러 차례 패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그의 소재를 알면 노인의 손을 잡고 어린아이를 업고 그의 밑으로 달려왔다고 한다. 낙양에서 패전했을 때, 환온(桓温) 군에서 요양이 전쟁터에서 부상을 입고 죽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환온에게 사로잡혀 있던 허(許)·낙(洛)의 남녀들은 거의 모두 북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을 정도로 인심을 얻었다.
홍농 출신의 양량(楊亮)은 요양에게 귀순했다가 요양이 패하자 환온에게 달아났다. 환온이 양량에게 요양의 인품을 묻자, 양량은 “요襄의 신성하고 위엄 있는 모습은 손책(孫策)에 필적합니다. 용맹함에 있어서는 이를 능가합니다.”라고 대답했다.
3. 1. 긍정적 평가
3. 2. 부정적 평가
4. 가족 관계
요양은 전한의 강족 수령 요이정(姚弋仲)의 아들이다.[32] 형제로는 요익(姚益),[32] 요약(姚若), 후진(後秦)을 건국한 요장(姚萇), 진공(晋公) 요서(姚緒), 롱시공(隴西公) 요석덕(姚碩徳), 요윤매(姚尹買), 요민(姚旻), 요황(姚晃), 노공(魯公) 요소(姚紹), 요정(姚靖), 동성후 요연정, 그리고 요상이 있었다.
5. 기타
2008년, 한나라 말기의 유명한 군벌 조조의 능묘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일부 역사학자들은 그 능묘가 조조의 것이라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했다. 특히 서안 시 당위원회 당교의 역사학 교수인 후 줘자오(胡觉照)는 2010년 한 인터뷰에서 그 능묘는 사실 요 상(姚襄)의 것이라고 주장했다.[27]
참조
[1]
서적
Book of Jin, Volume 116
[2]
서적
Zizhi Tongjian, Volume 98
[3]
서적
Book of Jin, Volume 116
[4]
서적
Book of Jin, Volume 116
[5]
서적
Zizhi Tongjian, Volume 99
[6]
서적
Book of Jin, Volume 116
[7]
서적
Book of Jin, Volume 8
[8]
서적
Zizhi Tongjian, Volume 99
[9]
서적
Book of Jin, Volume 116
[10]
서적
Book of Jin, Volume 116
[11]
서적
Zizhi Tongjian, Volume 99
[12]
서적
Book of Jin, Volume 116
[13]
서적
Book of Northern Wei, Volume 95
[14]
서적
Book of Jin, Volume 116
[15]
서적
Annals of the Sixteen Kingdoms, Volume 5
[16]
서적
Book of Jin, Volume 112
[17]
서적
Zizhi Tongjian, Volume 100
[18]
서적
Book of Jin, Volume 116
[19]
서적
Book of Jin, Volume 116
[20]
서적
Book of Jin, Volume 112
[21]
서적
Zizhi Tongjian, Volume 100
[22]
서적
Book of Jin, Volume 112
[23]
서적
Zizhi Tongjian, Volume 100
[24]
서적
Book of Jin, Volume 112
[25]
서적
Book of Jin, Volume 116
[26]
서적
Book of Jin, Volume 116
[27]
웹사이트
历史专家:安阳"曹操墓"应为军阀姚襄墓_文化频道_凤凰网
http://culture.ifeng[...]
[28]
문서
姚襄と姚萇の年齢に関する矛盾
[29]
문서
姚襄の爵位に関する記述の差異
[30]
문서
殷浩の暗殺未遂に関する記述
[31]
문서
殷浩と姚襄の戦闘に関する記述の差異
[32]
문서
姚益に関する記述の差異
[33]
문서
郭斁に関する記述の差異
[34]
문서
劉仕の官職に関する記述の差異
[35]
문서
姚襄の評判に関する記述の差異
[36]
서적
『晋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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