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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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장은 강족의 수장이었던 요익중의 아들로, 384년 전진의 부견에게 반기를 들어 후진을 건국하고 황제에 즉위한 인물이다. 전진의 장군으로 익주 정복 등 공을 세웠으나, 비수대전 이후 부견을 살해하고 후진을 세웠다. 이후 부등과 대립하며 세력을 확장하다가 393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요흥이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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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흥은 오호 십육국 시대 후진의 황제로서, 부등을 격파하고 불교를 장려했으나 말년에 혼란을 겪고 사망했다.
요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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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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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요장 (姚萇) |
묘호 | 태조 (太祖) |
시호 | 무소황제 (武昭皇帝) |
풀네임 | 요장 (姚萇) |
생년 | 331년 |
몰년 | 394년 |
묻힌 곳 | 원릉 (原陵) |
아버지 | 요익중 |
배우자 | 사황후 소선황후 |
통치 정보 | |
직함 | 후진의 황제 |
재위 기간 | 384년 – 394년 |
이전 통치자 | (없음) |
후임 통치자 | 요흥 |
연호 | 백작 (白雀): 384년–386년 건초 (建初): 386년–393년 |
칭호 | 대장군, 대선우, 만년진왕 (大將軍 大單于 萬年秦王, 384–386) 황제 (386년 이후) |
가문 | |
왕조 | 후진 |
2. 생애
요장은 강족 수장 요익중(姚弋仲)의 24번째 아들로, 352년 요익중이 죽자 형 요양(姚襄)을 따라 병법을 익혔다. 요양은 동진(東晉)으로 부족을 이끌고 이동하려다 전진(前秦)의 공격을 받았는데, 요양의 말이 화살에 맞아 죽자 자신의 말을 양보하고 희생하려 했으나 동진의 구원군 덕분에 살아남았다. 이 일로 요장은 형제들보다 요양의 총애를 더 받았다.[1]
357년 요양이 전사하자, 요장은 부족을 이끌고 전진의 부생(苻生)에게 항복했다. 부견(苻堅)의 치세에는 강족 부대를 이끌고 익주(益州)를 정복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워 393년에는 용양장군(龍驤將軍)에 임명되었다. 부견이 비수대전을 일으키자 촉 방면 방어를 맡았고, 비수에서 부견의 군사가 와해되자 장안으로 돌아왔다.
384년, 모용홍(慕容泓)이 반란을 일으키자 요장은 부견의 명을 받아 진압에 나섰으나, 사령관 부예의 섣부른 작전으로 패전했다. 부견이 이 패전의 책임을 요장에게 묻자, 요장은 북지(北地)에서 반란을 일으켜 만년진왕(萬年秦王)을 자칭하며 후진을 건국하였다.
건국 초기 후진은 부견의 공격으로 멸망 직전에 놓이기도 하였으나, 모용홍이 장안을 공격하면서 부견이 퇴각하여 위기를 넘겼다. 요장은 부견과 모용홍, 모용충(慕容沖)이 장안을 중심으로 전쟁을 벌이는 동안 주변 지역을 점령하며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모용충에게 아들을 인질로 보내고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385년 모용충이 장안을 점령하고 부견이 장안을 빠져나오자, 요장은 부견을 포로로 잡았다. 요장은 부견에게 선양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부견을 살해하였다. 386년에는 선비족이 떠난 장안을 차지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요장은 진주(秦州 : 간쑤 성 동부) 지역의 전진계 세력들을 공략하였는데, 386년 말에 부등(苻登)이 황제에 즉위하여 요장에 대항하였다. 이후 진주와 옹주(雍州 : 산시 성 중부) 일대에서 전진의 부등과 후진의 요장은 여러 차례 충돌하였다. 389년에는 수도 안정(安定)을 공격당할 정도로 수세에 몰렸으나, 대계(大界)에 있던 전진군의 치중을 급습하여 큰 피해를 입히면서 위기를 모면하였다. 이후에도 전진군이 후진에 대하여 파상공세를 지속하였으나, 요장은 수비 태세를 굳히면서 세력을 강화시켰다.
393년 12월, 요장은 병으로 사망하였다.
2. 1. 초기 생애 및 전진(前秦)에서의 활약
331년 강족 수장 요익중(姚弋仲)의 24번째 아들로 태어났다.[1] 요익중은 후조 황제 석륵 휘하의 장군이었다. 요장은 총명하고 신중했지만 세부적인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352년 요익중이 죽자 형 요양(姚襄)이 뒤를 이었고, 요장은 요양을 따라 주요 책략에 참여했다. 요양은 동진(東晉)으로 부족을 이끌고 이동하려 했으나, 전진(前秦)의 공격을 받았다. 요양의 말이 화살에 맞아 죽자 요장은 자신의 말을 요양에게 내주고 희생하려 하였는데, 마침 동진의 구원군이 도착하여 살아남았다. 이 일로 요장은 다른 형제들을 제치고 요양의 총애를 받았다.357년 3월, 요양은 관중에서 자립을 모색하다 삼원에서 전진군에게 대패하여 전사하였다. 요장은 패잔병을 수습하여 여러 아우들을 데리고 전진 부생(苻生)에게 항복하였다. 이후 전진을 섬기며, 부견(苻堅) 치세에 양무장군(揚武將軍)에 임명되어 여러 차례 큰 공적을 세웠다.[2]
366년 7월, 왕맹과 함께 형주 북부 남향군을 시작으로 여러 군에 침공하여 남양군 신야현을 함락시키고 한수 이북의 1만여 호를 사로잡았다. 12월에는 강족 렴기가 약양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367년 2월 왕맹과 함께 렴기를 토벌했다. 요장은 농동군태수에 임명되어 현지 백성들을 위무했다. 이후 좌위장군, 급군, 하동군, 무도군, 무위군, 파서군, 부풍군 태수를 역임하고, 다시 양무장군으로 복귀하여 보병교위를 더했으며, 익도후(益都侯)에 봉해졌다.[2]
371년 3월, 구지 정벌에 참여하여 양찬을 항복시켰다. 373년 9월, 한천 침공에 종군하여 파군전강현 수비를 맡았다. 374년 5월, 촉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진압에 나섰으나 패배하기도 했다. 376년 5월, 전량 정벌에 참여하여 고장을 함락시키고 장천석을 항복시켰다. 378년 2월, 양양 침공에 참여하여 379년 2월 함락시켰다.
383년 5월, 동진 환충이 북벌을 감행하자, 부견의 명으로 부성 구원에 나섰다. 이후 연주자사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8월, 부견이 동진 정벌을 결행하자, 요장은 용양장군(龍驤將軍)・도독익량2주제군사(都督益梁二州諸軍事)에 임명되어 종군했다. 그러나 11월 비수 전투에서 전진군이 대패하면서, 384년 3월 전진 북지군 장사 모용홍이 반란을 일으켰다. 요장은 부견의 명으로 모용홍 토벌에 나섰으나, 사령관 부예의 실책으로 패전했다.
2. 2. 후진(後秦) 건국과 통치
384년, 모용홍이 반란을 일으키자 요장은 부견의 명을 받아 토벌에 나섰으나, 사령관 부예의 섣부른 작전으로 패전하였다. 부견이 이 패전의 책임을 요장에게 묻자, 요장은 북지(北地) 일대에서 반란을 일으켜 만년진왕(萬年秦王)을 자칭하며 후진을 건국하였다.건국 초기 후진은 부견의 공격으로 멸망 직전에 놓이기도 하였으나, 모용홍이 장안을 공격하면서 부견이 퇴각하여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요장은 부견과 모용홍, 모용충이 장안을 중심으로 전쟁을 벌이는 동안 주변 지역을 점령하며 세력을 확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모용충에게 아들을 인질로 보내고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385년 모용충이 장안을 점령하고 부견이 장안을 빠져나오자, 요장은 부견을 포로로 잡았다. 요장은 부견에게 선양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부견을 살해하였다. 386년에는 선비족이 떠난 장안을 차지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요장은 진주(秦州 : 간쑤 성 동부) 지역의 전진계 세력들을 공략하였는데, 386년 말에 부등이 황제에 즉위하여 요장에 대항하였다. 이후 진주와 옹주(雍州 : 산시 성 중부) 일대에서 전진의 부등과 후진의 요장은 여러 차례 충돌하였다. 389년에는 수도인 안정(安定)을 공격당할 정도로 수세에 몰렸으나, 대계(大界)에 있던 전진군의 치중을 급습하여 큰 피해를 입히면서 위기를 모면하였다. 이후에도 전진군이 후진에 대하여 파상공세를 지속하였으나, 요장은 수비 태세를 굳히면서 세력을 강화시켰다.
요장은 군대를 기동적으로 운영하려 했다. 그는 서연의 모용홍 군대가 장안을 포위하여 전진을 멸망시킨 후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예상하여, 큰 전투 없이 장안을 차지하려 했다. 그는 경쟁자들이 싸우는 동안 자신의 세력을 보존하고 키우려 했다. 그는 일시적으로 수도를 북지 (현재 섬서성 동천시)에 두고, 현재 섬서성 북부의 도시들을 점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진과 서연 군대와 주기적으로 전투를 벌였다.[1]
385년, 섬서성 함양시에 위치한 신평(新平)이라는 도시와 관련된 사건은 요장의 명성에 더욱 영향을 주었다. 요장이 384년 말 신평을 처음 포위했을 때, 신평 사람들은 전진을 위해 도시를 지키기 위해 극심하게 싸웠다. 신평이 식량과 군수 물품이 부족해지자, 요장은 신평군 태수 구보에게 도시를 넘겨주면 신평 사람들을 안전하게 장안으로 이끌도록 허락하겠다고 확신했다. 구보는 그를 믿었지만, 5,000명의 남은 사람들과 함께 도시를 나가는 순간 요장은 군대로 그들을 포위하고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학살했다.[2]
385년 가을, 부견은 서연의 오랜 포위 공격을 받던 장안을 버리고 식량을 찾으려 했다. 그가 섬서성 보계시에 있는 오장산(五將山)에 도착했을 때, 요장은 그의 장수 오충(吳忠)을 보내 부견을 포위하게 하여 결국 그를 생포하여 신평으로 보내 그곳에 감금했다. 요장은 그에게 형식적으로 왕위를 넘겨줄 것을 설득하려 했지만, 부견은 거절했다. 그 후 385년에 요장은 병사들을 보내 부견을 교살했다. 후진의 병사들조차 부견을 애도했고, 요장은 부견을 죽이지 않은 것처럼 보이려고 그를 장렬천왕(壯烈天王)으로 추존했다.
모용충이 황제로 있던 서연 군대는 장안을 점령했고, 서연과 후진은 간헐적으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서연 사람들은 모용충이 그들을 동쪽 고향으로 이끌지 않자 불만을 품었고, 386년에 모용충은 쿠데타로 암살당하고 단수이가 그를 대신했지만, 그는 암살당하고 모용의가 그를 대신했다. 모용의 치하에서 서연 사람들은 장안을 버리고 동쪽으로 향했다. 잠시 동안 장안은 노수호 추장 호노(郝奴)가 점령했지만, 요장은 장안으로 진격했고, 호노는 항복했다. 요장은 장안을 수도로 삼고 황제의 칭호를 주장했다. 그는 그의 부인 사씨를 황후로, 그의 아들 요흥을 태자로 삼았다.
이후 몇 년 동안, 요장은 지역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갖지 못했다. 많은 저족, 강족, 흉노, 한족 장군들이 여전히 반독립적인 상태로 지역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386년에는 전진 황족 부씨의 먼 친척인 부등이 현재의 간쑤성 동부에서 그에게 대항하여 일어섰고, 그 해 부견의 아들 부비가 사망한 후 황제를 칭하며 요장의 주요 적수가 되었다. 부등은 요장이 부견을 살해한 것을 훌륭한 선전 효과로 활용했고, 몇 년 동안 요장과의 전투에서 상당히 성공했지만, 그 전투들은 일반적으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며, 부등도 요장도 서로를 결정적으로 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장은 부등의 신중함을 이용하여 점차 이 지역의 다른 전진 장군들을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387년에 전진 장군 부찬(苻纂)이 그의 형제 부사노(苻師奴)에게 살해된 후, 요장은 기회를 잡아 신속하게 부사노를 공격하여 그를 격파하고 그의 군대를 장악했습니다. 그는 또한 동시에 황하 서쪽에 있는 서연이 점유하고 있던 나머지 도시들을 점령했습니다.
389년에 전진과의 여러 전투에서 패배한 후, 요장은 부견의 묘를 훼손하고 그의 시신을 채찍질한 후 다시 매장했습니다. 그러나 곧 그는 불안해져서 부견의 혼이 전진을 돕고 있다고 생각했고, 부등의 선례를 따라 부견의 상을 만들어 숭배하며, 그에게 요상(姚襄)을 복수하기 위해 부견을 죽였을 뿐이라고 주장하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 상은 요장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고, 결국 그는 그 상의 머리를 잘라 부등에게 보냈습니다. 그 해 말, 부등이 요장을 압박하자, 요장은 밤에 기습 공격을 가해 부등 군대의 병참 기지인 대계(大界, 현재의 시안시, 산시성)를 점령하고 부등의 아내 모황후를 사로잡았으며, 그의 아들 부변(苻弁)과 부상(苻尚)을 죽였습니다. 그는 처음에 모황후를 후궁으로 삼으려 했지만, 그녀가 그를 저주하자 처형했습니다. 전진과 후진은 다음 몇 년 동안 계속해서 교착 상태에 있었지만, 부등은 이 시점부터 후진의 존립을 다시 위협할 수 없었습니다.
392년에 요장이 병에 걸리자, 부등은 이 소식을 듣고 중요한 후진 도시 안딩(安定, 현재의 핑량시, 간쑤성)을 대대적으로 공격했지만, 병에 걸린 요장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전투를 벌여 부등을 물러나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 교전에서, 요장은 그의 군대를 가지고 깔끔하게 회피 기동을 하여 전투에서 이탈했고, 이는 부등을 놀라게 했습니다. 부등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요장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언제 갈지, 언제 올지 알 수 없군. 모두가 그가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살아남아 싸우네. 이 늙은 강족과 같은 시대에 살게 된 것은 불행이군.''
3. 평가
요장은 총명하고 권모술수에 능했으며, 도량이 크고 자유분방하며 꾸밈없는 성격이었다. 덕행을 쌓거나 학업에 힘쓰는 일은 없었지만, 여러 형제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3. 1. 긍정적 평가
총명하고 권모술수에 능했다. 도량이 크고 자유분방하며 꾸밈없는 성격이었으며, 덕행을 쌓거나 학업에 힘쓰는 일은 없었지만, 여러 형제들에게 존경을 받았다.3. 2. 부정적 평가
요장은 부견을 살해한 것에 대한 훌륭한 선전 효과를 활용한 부등과의 전투에서 여러 차례 어려움을 겪었다. 389년에는 부견의 묘를 훼손하고 시신을 채찍질하는 등의 행동을 보였으나, 이후 부견의 혼이 전진을 돕고 있다고 믿고 부견의 상을 만들어 숭배하며 용서를 구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동은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고, 결국 그는 상의 머리를 잘라 부등에게 보내는 등의 행동을 보였다.392년 요장이 병에 걸렸을 때 부등이 공격해 왔지만, 요장은 병든 몸에도 불구하고 전투에서 승리하여 부등을 놀라게 했다. 부등은 요장을 예측 불가능하고 상대하기 어려운 인물로 평가했다.
진서에는 요장이 꿈속에서 부견의 혼에게 시달려 미쳐갔으며, 경비병의 실수로 과다 출혈로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죽기 전까지 부견에게 용서를 구했다고 한다.
4. 연표
연도 | 사건 |
---|---|
352년 | 강족의 수장 요익중이 죽고 형인 요양이 뒤를 이음. 요장은 동진으로 부족을 이끌고 이동하려다 전진의 공격을 받아 전멸당할 위기에 처했으나, 동진의 구원군 덕에 살아남음. |
357년 | 요양이 전사하자 요장은 부족을 이끌고 전진의 부생에게 항복. |
384년 | 모용홍이 반란을 일으키자 요장은 부견의 명을 받아 토벌에 나섰으나 패배. 부견이 책임을 묻자 북지(北地)에서 반란을 일으켜 만년진왕(萬年秦王)을 자칭하며 후진을 건국. |
385년 | 모용충이 장안을 점령하고 부견이 탈출하자 요장은 부견을 포로로 잡고 선양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자 살해. |
386년 | 선비족이 떠난 장안을 차지하고 황제에 즉위. |
389년 | 수도 안정(安定)이 공격당할 정도로 수세에 몰렸으나 대계(大界)에 있던 전진군의 치중을 급습하여 큰 피해를 입히면서 위기를 모면. |
393년 | 12월에 병사. |
5.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요익중 | 351년 사망, 경원황제로 추존됨 |
부인 | 사황후 | 386년 책봉, 397년 사망 |
주요 후궁 | 손비 | 추존 황태후, 태자 요흥의 생모로 추정 |
자녀 | colspan="2" | | |
장남 | 요흥 | 태자(386년 책봉), 후일 황제 |
요숭 | 안성후 및 사공, 416년 전투 중 사망 | |
요평 | 의양공, 402년 전투 중 사망 | |
요충 (음조에 주의) | 제공, 395년 책봉 | |
요현 | 창산공, 395년 책봉 | |
요옹 | 지난공 | |
요충 (음조에 주의) | 409년 자결 강요 | |
남안공주 |
6. 기타
385년 1월, 요장은 여러 장수들에게 신평 공격을 계속하게 하고, 스스로 군을 이끌고 안정으로 침공하여 영북의 여러 성들을 모두 항복시켰다.[1]
같은 해 4월, 신평에서는 군량이 고갈되고 화살도 다 떨어졌으며, 외부로부터의 구원도 오지 않았다. 요장은 사자를 보내 신평군 태수 구보에게 항복을 권유하며 "나는 의로써 천하를 얻으려 한다. 어찌 충신에게 해를 가하겠는가! 경은 단지 성안의 사람들을 이끌고 장안으로 돌아가면 된다. 나는 단지 이 성을 얻고 싶을 뿐이다"라고 설득했다. 구보는 이에 동의하고 5천 호의 백성을 이끌고 성을 나섰지만, 요장은 이들을 포위하여 생매장했고, 남녀 모두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 다만, 풍걸의 아들인 풍종만이 탈출하여 장안으로 도망쳤다.[1]
10월, 서연 군주 모용충이 장안으로의 공세를 시작했다는 보고를 받은 요장은 신하들과 향후 방침을 논의했다. 신하들은 연이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병사들을 이끌고 있어 관중 지역을 오래 지키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요장은 춘추 시대 노나라의 변장자 고사를 인용하며, 전진이 쇠퇴하고 연이 돌아가기를 기다려 병사들의 희생 없이 장안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1]
이 시기에, 전진의 영삭장군 송방이 운중군에서 장안 구원에 나섰지만, 요장은 이현에서 출격하여 이를 격파했다. 송방은 단기로 패주했지만, 그의 사마 전황은 무리를 이끌고 항복했다.[1]
이후 요장은 장남 요흥에게 북지의 수비를 맡기고, 영북장군 요목에게 동관천을 지키게 한 뒤,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평군으로 침공했다. 신평군 태수 구보 등은 농성하며 저항했고, 후진군은 산을 만들고 지하도를 파 성을 공격했지만, 구보는 성내 병사들을 지휘하여 맞섰다. 구보는 거짓 항복으로 후진군을 유인하여 요장이 신평성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도중에 의심을 품고 되돌아갔다. 구보는 병사를 내어 공격했고, 요장은 도망쳤지만 1만 명 이상이 죽었다.[1]
386년 4월, 요장은 안정에서 출병하여 왕린을 공격해 한중으로 패주시켰다. 나아가 학다도 공격하여 사로잡고, 장안으로 진격했다. 학노는 항복했고, 요장은 그를 진북장군·육곡대도독에 임명하여 장안을 통치하게 했다.
같은 해, 전진의 익주자사 왕광은 하주 자사 모흥과 대립했으나 패배하여 진주로 달아났다. 농서 지역의 선비족 출신 필란은 도주하던 왕광을 사로잡아 후진으로 압송했다.
6. 1. 일화
요장은 총명하고 신중했지만, 세부적인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묘사된다. 352년 전투에서 요상의 말이 죽자 요장은 자신의 말을 요상에게 내주며 요상이 살아있는 한 적들이 요장을 감히 건드리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들은 그들의 군대에 의해 구출되었다.[1]385년 가을, 부견(苻堅)이 서연의 오랜 포위 공격을 받던 장안을 버리고 식량을 찾으려 했다. 그가 섬서성 보계시에 있는 오장산(五將山)에 도착했을 때, 요장은 그의 장수 오충을 보내 부견을 포위하게 하여 결국 그를 생포하여 신평으로 보내 그곳에 감금했다. 요장은 그에게 형식적으로 왕위를 넘겨줄 것을 설득하려 했지만, 요장의 배신에 분노한 부견은 거절했다. 그 후 385년에 요장은 병사들을 보내 부견을 교살했다. 심지어 후진의 병사들조차 부견을 애도했고, 요장은 부견을 죽이지 않은 것처럼 보이려고 그를 장렬천왕(壯烈天王)으로 추존했다.[1]
요장(姚萇)이 양안의 촉 정벌에 종군했을 때, 물가에서 낮잠을 자고 있던 중, 하늘에서 신광이 환하게 쏟아져 내렸다. 이것을 지켜본 측근들은 모두 요장(姚萇)에게 특별한 뭔가가 있다고 느꼈다고 한다.[1]
389년에 전진과의 여러 전투에서 패배한 후, 요장은 부견의 묘를 훼손하고 그의 시신을 채찍질한 후 다시 매장했다. 그러나 곧 그는 불안해져서 부견의 혼이 전진을 돕고 있다고 생각했고, 부등의 선례를 따라 부견의 상을 만들어 숭배하며, 그에게 요상을 복수하기 위해 부견을 죽였을 뿐이라고 주장하며 용서를 구했다. 그 상은 요장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고, 결국 그는 그 상의 머리를 잘라 부등에게 보냈다.[1]
392년에 요장이 병에 걸리자, 부등은 이 소식을 듣고 중요한 후진 도시 안딩(安定, 현재의 핑량시, 간쑤성)을 대대적으로 공격했지만, 병에 걸린 요장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전투를 벌여 부등을 물러나게 했다. 그리고 이 교전에서, 요장은 그의 군대를 가지고 깔끔하게 회피 기동을 하여 전투에서 이탈했고, 이는 부등을 놀라게 했다.[1]
394년 새해 즈음에 요장이 사망했다. 진서에는 그가 꿈속에서 부견의 혼에게 시달리며 미쳐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경비병이 그를 도우려 했지만 실수로 그의 사타구니를 다치게 하여 과다 출혈로 사망하게 했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계속해서 부견에게 용서를 구했다.[1]
6. 2. 대중문화
386년 1월, 요장은 안정으로 갔다. 같은 해 2월, 서연의 군주 모용충은 장안을 점령하고도 관동으로 돌아가지 않아 부하 선비족들의 불만을 사 살해되었다. 3월, 모용개는 장안을 버리고 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장안은 비어있게 되었다.이러한 틈을 타서, 전진에서 형양군 태수를 지냈던 조곡 등은 행성에 할거하고 있던 노수호의 학노를 장안으로 초청했다. 학노는 4천 호를 거느리고 장안에 들어와 제위를 칭했고, 위북 지역의 세력들은 모두 그를 따랐다. 당시 부풍 출신의 왕린은 마외(시평군 괴리현에 있는 성)에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학노는 동생 학다에게 왕린을 토벌하도록 명령했다. 4월, 요장은 안정에서 출병하여 왕린을 공격해 한중으로 패주시켰다. 나아가 학다도 공격하여 사로잡고, 장안으로 진격했다. 학노는 항복했고, 요장은 그를 진북장군·육곡대도독에 임명하여 장안을 통치하게 했다.
같은 해, 전진의 익주자사 왕광은 하주 자사 모흥과 대립했으나 패배하여 진주로 달아났다. 농서 지역의 선비족 출신 필란은 도주하던 왕광을 사로잡아 후진으로 압송했다.
참조
[1]
서적
Jin Shu, vol. 116
[2]
서적
十六国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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