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쿠마라지바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쿠마라지바는 4~5세기 인도의 승려로, 쿠차국에서 태어나 대승 불교를 배우고 중국으로 건너가 불경 번역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384년 후량의 포로가 되었다가 후진의 요흥에게 국사로 예우받았으며, 여성과 혼인한 뒤 35부 300권의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했다. 그의 유려한 번역은 법화경, 아미타경 등에서 사용되었고, 반야경 연구와 대승 불교 사상을 중국에 소개하는 데 기여했다. 쿠마라지바는 번역 외에도 철학적 저술을 남겼으며, 그의 제자들은 중국 불교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번역은 동아시아 불교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김만중은 그의 번역론을 인용하여 국문학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쿠마라지바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키질 석굴의 쿠차에 있는 쿠마라지바의 동상
키질 석굴 입구 광장에 세워진 쿠마라지바의 동상
이름구마라지바(鳩摩羅什)
로마자 표기Jiumóluóshí
출생344년
출생지쿠차 (현재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쿠차 현)
사망413년
사망지장안 (현재 중국 시안)
직업불교 승려, 학자, 번역가, 철학자
종교
종교불교
종파대승불교
학문
주요 업적산스크리트어로 쓰여진 불교 경전을 중국어로 번역, 삼론종 개창
스승수리야소마
제자도생, 승조, 혜관, 승예
저서《대승대의장(大乘大義章)》
가족
부모아버지: 쿠마라야나(Kumārāyana), 어머니: 지바카(Jīva)
배우자쿠차국의 왕녀 (쿠마라지바 본인의 사촌 여동생)

2. 약력

인도의 명문 귀족인 아버지 쿠마라야나(Kumārāyana, 鳩摩炎)의 아들로 어머니는 쿠차국 왕의 누이동생인 지바카(Jīva)이며, 쿠차국에서 태어난 그는 7세에 어머니를 따라 출가하여 아버지의 고향인 서역(西域) 카슈미르 야르칸드에서 대승(大乘) '''·''' 소승(小乘)을 배우고 고국에 돌아와 열심히 대승을 설파하여 그 명성은 중국 내부에까지 퍼졌다.[60]

384년 쿠차로 쳐들어온 중국 후량(後涼)의 장군 여광의 포로가 되었다. 군사(軍師)의 위치에 있으면서 여광을 돕기도 했지만, 여광은 그를 포로로써 취급했고 달리는 말에서 떨어뜨리거나 함께 포로로 끌려온 쿠차의 왕녀를 강제로 아내로 맞게 하는 등의 잔학한 짓도 했다고 한다. 18년 동안 여광여찬 밑에서 량주(涼州)에서 살던 쿠마라지바는 서기 401년 후진(後秦)의 황제 요흥(姚興)에게 국사(國師)로서 영접되었다. 요흥의 뜻에 따라 여성과 혼인, 환속한 그는 이후 경전 번역에 종사하여 35부 300권의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했다.[60]

쿠마라지바의 역문은 유려하여 《법화경》(法華經)이나 《아미타경》(阿彌陀經)의 역문 등은 현대의 법의(法儀)에서도 사용되고 있다.[60] 그의 번역 사업에 의하여 당시 유행하고 있던 《반야경》(般若經) 연구는 더욱 연구가 깊어졌고 또 대지도론(大智度論) 등의 대승론부(大乘論部)도 처음으로 소개되었다.[60] 그가 《반야경》을 포함한 불교 경전들을 불교 본연의 뜻에 맞게 바르게 번역하면서 당시까지 중국에서 유행하던 격의불교(格義佛敎)의 폐단이 비로소 극복되었다.[61]

쿠마라지바는 413년(409년이라고도) 장안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임종 직전 그는 "내가 전한 것(번역한 불경)에 틀린 것이 없다면, 내 몸이 사라진 뒤에라도 내 혀는 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후 불교의 방식대로 화장되었고, 다 타버린 그의 시신 속에서 혀만은 타지 않고 남아 있었다고 한다(『고승전』권2).

구마라집이 번역한 『묘법연화경』. 그의 한역은 장행(불전의 산문 부분)에서도 사자구를 많이 사용하여 리드미컬하고 유려하다. 사진은 에도 시대의 독송용 경전으로, 경문의 오른쪽에 '진독'(오음 읽기), 왼쪽에 '훈독'(한문 훈독)을 나타내는 '양점본'이다.

  • 350년 인도의 명문 귀족 출신으로 카슈미르[51]에서 태어난 쿠마라야나(쿠마라염[52])을 아버지로, 구자국의 왕족이었던 기바[53](지바[52])를 어머니로 하여 구자국에서 태어났다.
  • 356년 어머니와 함께 출가했다.
  • 360년대 불교 학문의 중심지였던 카슈미르로 유학[54]했다. 초기 경전과 아비달마 불교를 배웠다. 카슈가르에서 12세에 범어 『전법륜경』을 강론하고, 오명을 배웠다[54].
  • 369년 비마라크샤(비마라샤, 비마라크샤)로부터 구족계를 받고, 수리야소마(슈리야소마, 수리야소마)를 만나 대승으로 전향했다. 주로 중관학파의 논서를 연구했다.
  • 384년 구자국을 공략한 전진(前秦)의 여광의 포로가 되었지만, 군사 참모 역할을 하며 여러 번 여광을 도왔다. 이후 18년 동안 후량을 세운 여광, 여찬 아래에서 량주에서 생활했다.
  • 401년 후량을 항복시킨 후진(後秦)의 요흥에 의해 수도 장안(상안)으로 이주했다.
  • 402년 불전의 한역에 종사했다. 이후, 라집 사후의 후계자를 원하는 요흥의 뜻에 따라 승원을 나와 열 명의 기녀를 아내로 맞이하여 처자하고 환속하여 사저에 거주하게 되었다.
  • 409년 사망했다.

: 임종 직전에 "내가 전한(번역한 경전)이 무오하다면(오류가 없다면) 화장 후 혀는 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과연 외국 방식으로 화장했더니, 장작은 다 타고 형체도 없어졌지만, 혀만 타지 않고 남았다고 한다(『고승전』권2).

2. 1. 출생과 출가

쿠마라지바는 344년 타림 분지에 위치한 쿠차 왕국에서 태어났다.[4] 아버지는 카슈미르 출신으로 추정되는 인도 승려 쿠마라야나였으며,[4][5] 어머니는 쿠차 왕족 출신인 지바(지바카라고도 알려짐)였다.[4] 인도의 명문 귀족 출신인 아버지 쿠마라야나(鳩摩炎)와 쿠차 국왕의 누이동생인 지바카 사이에서 태어났다.[60]

저명한 불교 승려였던 쿠마라야나는 그의 고향인 카슈미르에서 중국으로 건너가 불교의 가르침을 전파하려 했다. 파미르 고원을 넘어 쿠마라야나는 쿠차에 머물며 왕의 손님으로 지냈다. 쿠차 왕은 쿠마라야나의 사상에 깊은 감명을 받아 그의 여동생인 지바를 쿠마라야나에게 시집보낼 것을 제안했고, 쿠마라야나와 지바는 모두 이 결혼을 받아들였다.[5]

쿠마라지바는 7세에 어머니를 따라 출가하여[60] 쿠차 북쪽에 있는 초리(Tsio-li) 수녀원에 들어갔다.[6] 9세부터 북인도, 카슈미르, 쿠차의 스승들 밑에서 아가마와 설일체유부 아비달마를 공부했다.[7][8] 이 지역들은 모두 설일체유부의 수도원과 학문의 중심지였다.[7] 360년대 불교 학문의 중심지였던 카슈미르로 유학하여 초기 경전과 아비달마 불교를 배웠다.[54]

20세에 쿠차에서 정식 승려가 되었고, 설일체유부 율장과 중관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9] 369년 비마라크샤(비마라샤, 비마라크샤)로부터 구족계를 받고,[54] 수리야소마(슈리야소마, 수리야소마)를 만나 대승으로 전향하여 주로 중관학파의 논서를 연구했다. 그는 나중에 카슈미르 출신인 붓다야사 밑에서 마하야나로 개종하여 카슈가르에서 공부했다.[7] 12세에 카슈가르에서 범어 『전법륜경』을 강론하고, 오명을 배웠다.[54]

어린 시절 동안 쿠마라지바는 광범위한 연구와 토론 실력으로 유명해지면서 불교에서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7]

2. 2. 중국으로의 초빙과 번역 활동

쿠마라지바의 명성은 중국에까지 퍼져, 379년 전진의 황제 부견이 그를 장안으로 초빙하고자 했다.[10] 384년, 부견은 장군 여광에게 쿠차를 정복하고 쿠마라지바를 데려오도록 지시했다.[10] 그러나 부견이 패배하자, 여광은 386년 자신의 국가를 선포하고 쿠마라지바를 사로잡았다.[11] 여광은 쿠마라지바를 포로로 취급하며, 달리는 말에서 떨어뜨리거나 쿠차 왕녀를 강제로 아내로 맞게 하는 등 잔학한 행위를 했다.[60][11] 이 기간 동안 쿠마라지바는 중국어에 익숙해진 것으로 보인다.[11]

18년 동안 여광과 여찬 밑에서 양주에서 살던 쿠마라지바는 401년 후진의 황제 요흥에게 국사(國師)로서 영접되었다.[60][12][13] 요흥은 여씨 가문에게 쿠마라지바를 석방하여 장안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군대를 파견하여 그를 데려왔다. 요흥의 뜻에 따라 여성과 혼인, 환속한 그는 이후 경전 번역에 종사했다.[60]

청나라 시대에 그려진 한나라 장안의 간략한 지도


402년부터 장안에서 쿠마라지바는 산스크리트 불교 경전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조정 지원 번역팀을 이끌었다.[14] 요흥은 그를 자신의 스승으로 여겼고, 많은 승려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몰려들었다.[12] 10여 년 만에 쿠마라지바의 번역국은 약 294권의 35개 경전을 번역했다.[14] 그의 번역은 오늘날에도 중국 불교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격의불교의 폐단을 극복하는 데 기여했다.[60][61] 쿠마라지바는 도생, 승조, 도융, 승예 등 네 명의 주요 제자를 두었다.[14]

2. 3. 사망

쿠마라지바는 413년(409년이라고도) 장안에서 세상을 떠났다.[60] 임종 직전 그는 "내가 전한 것(번역한 불경)에 틀린 것이 없다면, 내 몸이 사라진 뒤에라도 내 혀는 타지 않을 것이다"라고 예언했다.[60] 사후 불교 방식대로 화장되었고, 다 타버린 그의 시신 속에서 혀만은 타지 않고 남아 있었다고 한다(『고승전』권2).

3. 번역

쿠마라지바가 번역한 아미타경


쿠마라지바의 불경 번역은 중국뿐 아니라 동아시아 불교사에 길이 남을 업적이며, 중국에서는 그를 "삼장의 한 사람"이라 일컫는다. 그의 번역은 유려하고 가독성이 높아, 이전의 격의불교의 폐단을 극복하고 불교 본연의 뜻을 정확하게 전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산스크리트어 원전에는 없는 창작이나 의역으로 의심되는 부분도 있으나, 후대 동아시아 불교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극락'과 같은 불교 용어,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같은 유명한 문구는 그의 번역에서 유래했다.

당의 현장에 의해 산스크리트어 불경이 번역된 후에도, 쿠마라지바의 번역은 '구역'이라 불리며 존중되었다. 그의 한역은 장행(불전의 산문 부분)에서도 사자구를 많이 사용하여 리드미컬하고 유려하다는 특징이 있다.

《금강경》의 한 구절, 장지지가 쓴 필사본으로, 산스크리트어에서 중국어로 번역한 구마라집의 번역본을 토대로 함

3. 1. 주요 번역 경전



쿠마라지바의 불경 번역은 중국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불교사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중국에서는 그를 "삼장의 한 사람"이라 칭한다.[19]

쿠마라지바와 그의 팀이 번역한 주요 경전은 다음과 같다.[20][21][22]

  • 『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 3권
  • 불설 아미타경 1권
  • 마하반야바라밀경 27권(30권)
  • 묘법연화경 8권 (妙法蓮華經중국어) - 천태종에서 학습되었고, 가마쿠라 불교에 큰 영향을 주었다.
  • 유마힐소설경 3권
  • 대지도론 100권
  • 중론 4권


이 외에도 ''금강반야바라밀경(Vajracchedikā Prajñāpāramitā Sūtra)'' (금강경), 불설대보적경 팔천송반야바라밀다분(Aṣṭasāhasrikā Prajñāpāramitā Sūtra), ''이만오천송반야경(Pañcaviṃśatisāhasrikā Prajñāpāramitā Sūtra)'', 수능엄삼매경(Śūraṅgama Samādhi Sūtra), 십지경(Daśabhūmikā Sūtra) (불타야사(Buddhayaśas)와 함께 번역), ''사유보살경(思惟菩薩經)''(Acintyaprabhāsa-nirdeśa-sūtra), ''범천소문경(梵天所問經)''(Viśeṣacintā-brahma-paripṛcchā), ''현겁경(賢劫經)''(Bhadrakalpa), ''보우경(寶雨經)''(Vasudhara-sūtra), ''부루나문경(富樓那問經)''(Pūrṇa-paripṛcchā), ''보망경(寶網經)''(Ratnajāli-paripṛcchā), ''여래불가사유경(如來不可思議經)''(Vidhi-hṛdaya-vyūha), ''보집삼매경(寶集三昧經)''(Sarva-puṇya-samuccaya-samādhi-sūtra), ''미륵성불경(彌勒成佛經)''(Maitreyavyākaraṇa Sūtra)등이 있다.

중관학파의 주요 논서들을 번역했는데, 이는 동아시아 중관 불교의 핵심 저작이 되었다.[23]

  • ''중론''(중론, 병음: ''Zhōnglùn'', T. 1564; 산스크리트어: ''Madhyamakaśāstra''), 나가르주나의 ''물라 마드야마카 카리카''("중도의 근본 송")와 *비말락샤 / *핑갈라의 주석(중국어: 청목, 병음: Qīngmù)으로 구성됨.

  • ''십이문론''(십이문론, 병음: ''Shíèrménlùn,'' T. 1568), 나가르주나의 것으로 추정되는 *''Dvādaśadvāraśāstra'',[24] 또한 *''Dvādaśamukhaśāstra''[25] 또는 *''Dvādaśanikāyaśāstra''로 재구성됨.[26]

  • ''백론''(백론, 병음: ''Bǎilùn'', T. 1569; 산스크리트어: ''Śatakaśāstra'',[27] 또는 ''Śataśāstra''[28]), 아리야데바의 몇몇 게송에 대한 바수라는 스승의 주석으로 구성됨.[29]

  • ''대지도론''(중국어: 大智度論, 병음: ''Dàzhìdùlùn'', T. 1509; 산스크리트어: ''Mahāprajñāpāramitopadeśa''). 나가르주나에게 귀속된 ''반야경''에 대한 주석이지만, 이 귀속은 일부 현대 학자들에 의해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30]
  • ''성실론(Cheng-shih lun)'' – 이 아비달마 텍스트는 중관의 작품은 아니지만, 법의 공(空)을 가르치기 때문에 중국 중관에 영향을 미쳤다.[31]


그의 번역은 후대 동아시아 불교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당(唐)의 현장에 의해 산스크리트어 불경이 중국에 수입되고 번역된 뒤에도 「'''신역'''」(新譯)이라 불린 현장의 번역에 대해 쿠마라지바의 번역은 「'''구역'''」(舊譯)이라 불리며 존중되었다(쿠마라지바 이전의 번역은 고역古訳이라 불림).[19] 중국과 한국, 일본, 베트남 등 한자 문화권에 퍼진 불교 용어, 예를 들어 극락(極樂)이라는 단어는 쿠마라지바가 번역한 그대로 퍼져 쓰이고 있으며, 불교의 교리를 설명하는 유명한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문구도 쿠마라지바에게서 나온 것이다.

다만, 쿠마라지바의 번역은 직역보다는 의역 위주였으며, 일부에서는 창작이나 의도적인 번역어 구분이 있었다는 의혹도 제기된다. 원본이 존재하지 않아 현존하는 산스크리트어 사본과의 차이점 검증은 불가능하다.

3. 2. 번역의 특징과 영향

쿠마라지바의 불경 번역은 중국뿐 아니라 동아시아 불교사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중국에서는 그를 "삼장의 한 사람"이라 부른다. 그의 번역은 정확한 문자적 표현보다는 의미 전달에 중점을 두어 유창하고 부드러운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다.[16] 이러한 특징 덕분에 그의 주요 대승 불교 경전 번역은 현장의 번역보다 더 인기가 많았다.[16]

쿠마라지바는 중국 불교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그의 번역팀은 명확성을 중시하고 이전의 ''격의''(개념 매칭) 번역 시스템을 극복한 것으로 유명하다.[16] 그는 '대승'(大乘, 마하야나)[16], '염처'(念處, smṛtyupasthāna)[16], '보리'(菩提, 보리)[16], '성'(性, dhatū)[16] 등 널리 사용되는 불교 용어를 도입했다.

쿠마라지바의 번역은 공동 작업으로 진행되었다. 쿠마라지바가 텍스트를 읽고 중국어로 해설하면, 중국 승려와 제자들이 토론하여 번역문을 작성하고, 쿠마라지바가 이를 검토하는 방식이었다.[17] 텍스트는 여러 번 기록되고 수정되었으며, 황제 요흥을 포함한 신봉자들도 이 과정에 참여했다.[17]

쿠마라지바는 산스크리트어 용어를 중국어로 표현하기 위한 전사 시스템을 개발하여 병음 로마자 표기법 개발의 기초를 마련했다.[18] 이러한 산스크리트어와의 만남은 불교 용어(예: "찰나")뿐만 아니라 특정 세속적 용어에도 영향을 미쳐 중국어 자체 발전에 기여했다.[18]

쿠마라지바의 번역은 때때로 요약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현존하는 초기 인도어 필사본 조각과 비교했을 때 그의 번역과 일치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쿠마라지바가 확장이 이루어지기 전의 초기 인도 버전을 사용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3. 3. 번역된 텍스트



쿠마라지바의 불경 번역은 중국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불교사에서 길이 남을 공적이며, 중국에서는 그를 중국 "삼장의 한 사람"이라 일컫는다.

  • 『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 3권
  • 『불설아미타경』(阿彌陀經) 1권
  • 『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蜜經) 27권(30권)
  •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8권
  • 『유마힐소설경』(維摩經) 3권
  • 대지도론』(大智度論) 100권
  • 중론』(中論) 4권


일부 경전에서 산스크리트어 원전에는 없는 쿠마라지바 본인의 창작(해당 교리를 설명하기 위한)이나 의역으로 의심되는 부분도 있으나, 그의 번역 불경이 후대 동아시아 불교계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중국과 한국, 일본, 베트남 등 한자 문화권에 퍼진 불교 용어, 예를 들어 극락(極樂)이라는 단어는 쿠마라지바가 번역한 그대로 퍼져 쓰이고 있으며, 불교의 교리를 설명하는 유명한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문구도 쿠마라지바에게서 나온 것이다. 당(唐)의 현장에 의해 산스크리트어 불경이 중국에 수입되고 번역된 뒤에도 「'''신역'''」(新譯)이라 불린 현장의 번역에 대해 쿠마라지바의 번역은 「'''구역'''」(舊譯)이라 불리며 존중되었다(쿠마라지바 이전의 번역은 고역古訳이라 불림).

쿠마라지바와 그의 팀이 번역한 가장 중요한 경전은 다음과 같다.

  • 《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 3권
  • 《불설 아미타경》 1권
  • 《마하반야바라밀경》 27권 (30권)
  • 《묘법연화경》 8권
  • 《유마경》 3권
  • 대지도론》 10권
  • 중론》 4권


그의 번역이 후대의 한자 문화권에 미친 영향은 헤아릴 수 없다. 당의 현장에 의한 번역 경전을 "'''신역'''"(新譯)이라고 부르며, 쿠마라지바에서 신역까지의 번역 경전을 "'''구역'''"(舊譯)이라고 부르고, 그 이전의 번역을 고역이라고 부른다.

묘법연화경》은 천태종에서 학습되었고, 거기에서 가마쿠라 불교가 탄생했기 때문에, 일본의 종파의 다수를 차지하는 가마쿠라 불교 계통의 교단에서는 매우 높게 취급받고 있다.

다만, 쿠마라지바의 번역의 특징은 직역보다는 의역이다. 또한 일부에서는 대담한 창작을 하거나 의도적으로 번역어를 구분해서 사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그가 번역한 원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현존하는 산스크리트어 사본과의 차이점에 대해서도 검증이 불가능하다.

3. 3. 1. 경전



쿠마라지바의 불경 번역은 중국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불교사에서 길이 남을 공적이며, 중국에서는 그를 중국 "삼장의 한 사람"이라 일컫는다.

  • 『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 3권
  • 『불설아미타경』(阿彌陀經) 1권
  • 『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蜜經) 27권(30권)
  •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8권
  • 『유마힐소설경』(維摩經) 3권
  • 대지도론』(大智度論) 100권
  • 중론』(中論) 4권


일부 경전에서 산스크리트어 원전에는 없는 쿠마라지바 본인의 창작(해당 교리를 설명하기 위한)이나 의역으로 의심되는 부분도 있으나, 그의 번역 불경이 후대 동아시아 불교계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중국과 한국, 일본, 베트남 등 한자 문화권에 퍼진 불교 용어, 예를 들어 극락(極樂)이라는 단어는 쿠마라지바가 번역한 그대로 퍼져 쓰이고 있으며, 불교의 교리를 설명하는 유명한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문구도 쿠마라지바에게서 나온 것이다. 당(唐)의 현장에 의해 산스크리트어 불경이 중국에 수입되고 번역된 뒤에도 「'''신역'''」(新譯)이라 불린 현장의 번역에 대해 쿠마라지바의 번역은 「'''구역'''」(舊譯)이라 불리며 존중되었다(쿠마라지바 이전의 번역은 고역古訳이라 불림).[20][21][22]

쿠마라지바와 그의 팀이 번역한 가장 중요한 경전은 다음과 같다.

  • ''금강반야바라밀경(Vajracchedikā Prajñāpāramitā Sūtra)'' (금강경)
  • 불설아미타경(Smaller Sukhāvatī-vyūha)
  • 묘법연화경(Saddharma Puṇḍarīka Sūtra) (법화경)
  • 유마힐소설경(Vimalakirti Nirdesa Sutra)
  • 불설대보적경 팔천송반야바라밀다분(Aṣṭasāhasrikā Prajñāpāramitā Sūtra)
  • ''이만오천송반야경(Pañcaviṃśatisāhasrikā Prajñāpāramitā Sūtra)''
  • 수능엄삼매경(Śūraṅgama Samādhi Sūtra)
  • 십지경(Daśabhūmikā Sūtra) (불타야사(Buddhayaśas)와 함께 번역)
  • ''사유보살경(思惟菩薩經)''(Acintyaprabhāsa-nirdeśa-sūtra)
  • ''범천소문경(梵天所問經)''(Viśeṣacintā-brahma-paripṛcchā)
  • ''현겁경(賢劫經)''(Bhadrakalpa)
  • ''보우경(寶雨經)''(Vasudhara-sūtra)
  • ''부루나문경(富樓那問經)''(Pūrṇa-paripṛcchā)
  • ''보망경(寶網經)''(Ratnajāli-paripṛcchā)
  • ''여래불가사유경(如來不可思議經)''(Vidhi-hṛdaya-vyūha)
  • ''보집삼매경(寶集三昧經)''(Sarva-puṇya-samuccaya-samādhi-sūtra)
  • ''미륵성불경(彌勒成佛經)''(Maitreyavyākaraṇa Sūtra)

  • 《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 3권
  • 《불설 아미타경》 1권
  • 《마하반야바라밀경》 27권 (30권)
  • 《묘법연화경》 8권
  • 《유마경》 3권
  • 대지도론》 10권
  • 중론》 4권


그의 번역이 후대의 한자 문화권에 미친 영향은 헤아릴 수 없다. 당의 현장에 의한 번역 경전을 "'''신역'''"(新譯)이라고 부르며, 쿠마라지바에서 신역까지의 번역 경전을 "'''구역'''"(舊譯)이라고 부르고, 그 이전의 번역을 고역이라고 부른다.

묘법연화경》은 천태종에서 학습되었고, 거기에서 가마쿠라 불교가 탄생했기 때문에, 일본의 종파의 다수를 차지하는 가마쿠라 불교 계통의 교단에서는 매우 높게 취급받고 있다.

다만, 쿠마라지바의 번역의 특징은 직역보다는 의역이다. 또한 일부에서는 대담한 창작을 하거나 의도적으로 번역어를 구분해서 사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그가 번역한 원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현존하는 산스크리트어 사본과의 차이점에 대해서도 검증이 불가능하다.

3. 3. 2. 논서


  • 나가르주나의 ''물라 마드야마카 카리카''("중도의 근본 송")와 *비말락샤 / *핑갈라의 주석으로 구성된 ''중론''(중론, 병음: ''Zhōnglùn'', T. 1564).[23]
  • 나가르주나의 것으로 추정되는 *''Dvādaśadvāraśāstra''*드바다샤드바라샤스트라/*Dvādaśadvāraśāstrasa인 ''십이문론''(십이문론, 병음: ''Shíèrménlùn,'' T. 1568).[24] 또한 *''Dvādaśamukhaśāstra''[25] 또는 *''Dvādaśanikāyaśāstra''로 재구성됨.[26]
  • 아리야데바의 몇몇 게송에 대한 바수라는 스승의 주석으로 구성된 ''백론''(백론, 병음: ''Bǎilùn'', T. 1569; 샤타카샤스트라/Śatakaśāstrasa[27] 또는 샤타샤스트라/Śataśāstrasa[28]).[29]
  • 나가르주나에게 귀속된 ''반야경''에 대한 주석인 ''대지도론''(중국어: 大智度論, 병음: ''Dàzhìdùlùn'', T. 1509; 마하프라즈나파라미토파데샤/Mahāprajñāpāramitopadeśasa). 이 귀속은 일부 현대 학자들에 의해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30]
  • 법의 공(空)을 가르쳐 중국 중관에 영향을 미친 ''성실론(Cheng-shih lun)''.[31]
  • 나가르주나에게 귀속된 ''Daśabhūmikā Sūtra''에 대한 주석인 ''십지비바사론''(T. 1521)과 ''발보리심론''(T. 1659).[32]

3. 3. 3. 명상 텍스트


  • 《선비요법경》(禪祕要法經) (T. 613)
  • 《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 (T. 614), ZSJ (또는 《보살선법경》(菩薩禪法經) 또는 《아란약습선법경》(阿蘭若習禪法經)이라고도 불림)
  • 《보살하색욕법경》(菩薩訶色欲法經) (T. 615)
  • 《선법요해》(禪法要解) (T. 616)
  • 《사유략요법》(思惟略要法) (T. 617)

학자들은 이 중 쿠마라지바가 실제로 작업한 작품이 몇 개인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T. 613과 T. 614는 초기 목록과 서문에서 잘 입증되었지만).[33][34] 더욱이, 중국 자료에 따르면 이 작품들은 인도 자료를 편집, 요약 및 발췌한 것이다. 에릭 그린은 T. 614에서 가르치는 주요 명상 방법은 "북서 인도의 소위 요가차라와 관련된" "5문선"(五門禪)이며, "명상에 관한 후기 저술에서 표준적인 배열이 되었다"고 설명하며 다음과 같다:

  • 탐욕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위한 불정관(不淨觀) (아수바-바바나/aśubha-bhāvanāsa),
  • 혐오감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자심(慈心) (네 가지 무량심 명상),
  • 무지한 사람들을 위한 연기(因 緣) 관찰 (프라티트야삼무트파다/pratītyasamutpādasa),
  • "과도한 생각"(多思覺人, 비타르카/vitarkasa)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수식관(念息, 아나파나-스므르티/ānāpāna-smṛtisa), 그리고
  • "균등하게 분배된"(等分) 번뇌를 가진 사람들을 위한 염불(念佛, 붓다누스므르티/buddhānusmṛtisa).


이러한 방법을 통해 마음을 진정시키고 선(禪)에 들어간 후, 명상 수행자는 네 가지 "사념처"(思念處, smṛtyupasthānasa)를 수행하여 지혜(프라즈나/prajñāsa)를 개발한다. 그린에 따르면, "이어서, 사르바스띠바딘 시스템에서 세속적인 성취의 최고 수준인, 소위 네 가지 니르베다-바기야-쿠샬라물라/nirvedha-bhāgīya-kuśalamūlasa (四善根), 즉 "해탈로 이끄는 선근"을 거친다. 이는 차례로 소위 "견도"(다르샤나-마라가/darśana-maragasa), 즉 사성제에 대한 통찰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16가지 마음의 순간으로 이어진다."

T. 614는 또한 히나야나의 길과 보살의 길을 논의하지만, 실제 명상 수행은 다르지 않으며, 단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뿐이다. 예를 들어, 보살은 성문(스라바카/sravakasa)과 같은 불정관을 수행하지만, 또한 세상을 너무 혐오하여 즉각적인 열반을 추구하지 않도록 경고받는다. 대신, 보살은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신을 완성하려는 소망을 가지고 항상 이러한 명상을 수행해야 한다. 이처럼, 쿠마라지바는 보살의 수행이 스라바카-야나/śrāvaka-yānasa 자료에서 발견되는 동일한 명상 방법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이해한 것으로 보이며, 유일한 차이점은 보살들이 다른 동기와 다른 목표(부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3. 3. 4. 기타

아슈바고샤(아슈바고샤/Aśvaghoṣasa)의 《대장엄경론》(Mahālaṃkāra-sūtra-śāstra)과 《합부경(Samyukta avadana sutra)》이 있다.[35]

로빈슨에 따르면, 구마라집은 중국 불교 경전의 율장 부분에 《사바다율(Sarvāstivāda-vinaya)》(T. 1435), 《설일체유부 파라티목샤경(Sarvāstivāda-prātimokṣa-sutra)》(T. 1436)을 추가했으며, 전통에 따르면 《보살계본(菩薩戒本)》(bodhisattva-prātimokṣa)을 추가했는데, 이는 현재 《범망경(Brahmajala-sutra)》(T. 1484)의 후반부일 것이다.[36]

4. 철학 및 저술



쿠마라지바는 스스로 정통 순수주의중관파임을 밝혔으며, 아비달마의 권위를 거부하고 아함경을 대승적인 방식으로 해석했다.[41] 그는 부처의 말씀은 순전히 실용적이며 어떤 실체도 의미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41] 또한, 실체는 발생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a) 원인에서 결과의 내재와 비내재 모두 용납될 수 없고, (b) 원인과 결과의 동시적이고 순차적인 발생 모두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41] 그는 현실이 사구법의 네 가지 양식을 초월한다고 주장하며, 나가르주나의 부정 개념을 따랐다.[41]

쿠마라지바의 철학은 모든 법의 공(심지어 '공의 공'조차)과 모든 것과 가르침에 대한 보살의 무집착을 강조하는 나가르주나와 다른 중관파의 견해와 거의 동일하다.[42] 반야경과 중관파 주석서와 마찬가지로, 쿠마라지바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궁극적으로 단어와 생각 너머의 수준에서 오고 우리를 그 수준으로 이끈다고 말한다.[42] 불교 텍스트의 명백한 모순과 혼란은 중생을 진리로 이끄는 방편 때문이며, 우리는 완전히 순수한 '''반야'''를 얻을 때 비로소 법을 진정으로 이해한다고 설명한다. 쿠마라지바에 따르면, '''반야'''는 모든 장애물과 방해, 모든 집착, 심지어 그 자체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는 수단이다.[42]

이러한 사상은 ''대지도론'' (T. 1509; Skt. ''Mahāprajñāpāramitopadeśa'')에서 발견된다.[43] 여러 현대 학자들은 ''대지도론''이 나가르주나의 저작이 아니라 쿠마라지바와 그의 팀, 또는 그의 제자 승예의 편집물이라고 주장한다.[44][45]

둔황 백마탑에는 쿠마라지바를 묘사한 그림이 있다.

둔황 백마탑에서 쿠마라지바의 그림


쿠마라지바는 몇몇 독창적인 저작물을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여기에는 ''유마경주''(Zhu Weimojie Jing, 대정장 번호 1775)와 현재는 유실된 ''십상론''(Tattva에 관한 논문)이 포함된다.[37][38] 또한, 쿠마라지바와 그의 팀은 나가르주나의 전기(T. 2047)를 저술했는데, 이는 쿠마라지바가 제자들에게 한 설명에 기초했을 가능성이 있다.[39]

쿠마라지바의 독창적인 가르침이 담긴 또 다른 텍스트는 ''구마라십법사대의''(구마라지바 법사의 위대한 가르침, T. no. 1856)인데, 이는 쿠마라지바와 루산 혜원(334–416) 사이의 편지 모음으로, 몇 가지 기본적인 대승 불교 주제에 대해 논의한다.[40]

쿠마라지바는 스스로 정통 순수주의중관파임을 드러내며, 아비달마의 권위를 거부하고, 아함경을 대승적인 방식으로 해석하고, 부처의 말씀은 순전히 실용적이며 어떤 실체도 의미하지 않으며, 실체는 발생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41] 그는 현실이 사구법의 네 가지 양식을 초월한다고 주장하며, 나가르주나의 부정 개념을 따른다.[41]

쿠마라지바의 설명에서 나타나는 철학은 "모든 법(심지어 '공의 공'조차)의 공과 모든 것과 가르침에 대한 보살의 무집착을 강조하는 나가르주나와 다른 중관파의 견해와 거의 동일하다".[42]

쿠마라지바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궁극적으로 단어와 생각 너머의 수준에서 오고 우리를 그 수준으로 이끈다고 말한다. 불교 텍스트의 명백한 모순과 혼란은 그들의 방편 때문인데, 이는 청중의 수준에 맞춰 그들을 진리로 이끈다. 쿠마라지바는 심지어 경전의 가르침이 준비되지 않은 자, 즉 낮은 수준의 이해를 가진 자를 현혹시킬 수 있다고 제안한다. 쿠마라지바에 따르면, 우리는 완전히 순수한 '''반야'''를 얻을 때 비로소 법을 진정으로 이해한다.[42]

이러한 생각들은 ''대지도론'' (T. 1509; Skt. ''Mahāprajñāpāramitopadeśa'')에서 발견된다. 다양한 현대 학자들은 전통적으로 나가르주나의 독창적인 저작으로 여겨졌으며 쿠마라지바 팀이 번역한 ''대지도론''이 실제로 쿠마라지바와 그의 팀에 의해 많은 내용이 추가되었거나, 실제로 쿠마라지바의 제자인 승예의 편집물이라고 주장한다.[43][44][45]

『대승대의장』 3권은 노산의 혜원과의 문답집이다.

4. 1. 철학

쿠마라지바는 스스로 정통 순수주의중관파임을 밝혔으며, 아비달마의 권위를 거부하고 아함경을 대승적인 방식으로 해석했다.[41] 그는 부처의 말씀은 순전히 실용적이며 어떤 실체도 의미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41] 또한, 실체는 발생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a) 원인에서 결과의 내재와 비내재 모두 용납될 수 없고, (b) 원인과 결과의 동시적이고 순차적인 발생 모두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41] 그는 현실이 사구법의 네 가지 양식을 초월한다고 주장하며, 나가르주나의 부정 개념을 따랐다.[41]

쿠마라지바의 철학은 모든 법의 공(심지어 '공의 공'조차)과 모든 것과 가르침에 대한 보살의 무집착을 강조하는 나가르주나와 다른 중관파의 견해와 거의 동일하다.[42] 반야경과 중관파 주석서와 마찬가지로, 쿠마라지바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궁극적으로 단어와 생각 너머의 수준에서 오고 우리를 그 수준으로 이끈다고 말한다.[42] 불교 텍스트의 명백한 모순과 혼란은 중생을 진리로 이끄는 방편 때문이며, 우리는 완전히 순수한 '''반야'''를 얻을 때 비로소 법을 진정으로 이해한다고 설명한다. 쿠마라지바에 따르면, '''반야'''는 모든 장애물과 방해, 모든 집착, 심지어 그 자체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는 수단이다.[42]

이러한 사상은 ''대지도론'' (T. 1509; Skt. ''Mahāprajñāpāramitopadeśa'')에서 발견된다.[43] 여러 현대 학자들은 ''대지도론''이 나가르주나의 저작이 아니라 쿠마라지바와 그의 팀, 또는 그의 제자 승예의 편집물이라고 주장한다.[44][45]

둔황 백마탑에는 쿠마라지바를 묘사한 그림이 있다.

4. 2. 저서

쿠마라지바는 몇몇 독창적인 저작물을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여기에는 ''유마경주''(Zhu Weimojie Jing, 대정장 번호 1775)와 현재는 유실된 ''십상론''(Tattva에 관한 논문)이 포함된다.[37][38] 또한, 쿠마라지바와 그의 팀은 나가르주나의 전기(T. 2047)를 저술했는데, 이는 쿠마라지바가 제자들에게 한 설명에 기초했을 가능성이 있다.[39]

쿠마라지바의 독창적인 가르침이 담긴 또 다른 텍스트는 ''구마라십법사대의''(구마라지바 법사의 위대한 가르침, T. no. 1856)인데, 이는 쿠마라지바와 루산 혜원(334–416) 사이의 편지 모음으로, 몇 가지 기본적인 대승 불교 주제에 대해 논의한다.[40]

쿠마라지바는 스스로 정통 순수주의중관파임을 드러내며, 아비달마의 권위를 거부하고, 아함경을 대승적인 방식으로 해석하고, 부처의 말씀은 순전히 실용적이며 어떤 실체도 의미하지 않으며, 실체는 발생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41] 그는 현실이 사구법의 네 가지 양식을 초월한다고 주장하며, 나가르주나의 부정 개념을 따른다.[41]

쿠마라지바의 설명에서 나타나는 철학은 "모든 법(심지어 '공의 공'조차)의 공과 모든 것과 가르침에 대한 보살의 무집착을 강조하는 나가르주나와 다른 중관파의 견해와 거의 동일하다".[42]

쿠마라지바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궁극적으로 단어와 생각 너머의 수준에서 오고 우리를 그 수준으로 이끈다고 말한다. 불교 텍스트의 명백한 모순과 혼란은 그들의 방편 때문인데, 이는 청중의 수준에 맞춰 그들을 진리로 이끈다. 쿠마라지바는 심지어 경전의 가르침이 준비되지 않은 자, 즉 낮은 수준의 이해를 가진 자를 현혹시킬 수 있다고 제안한다. 쿠마라지바에 따르면, 우리는 완전히 순수한 '''반야'''를 얻을 때 비로소 법을 진정으로 이해한다.[42]

이러한 생각들은 ''대지도론'' (T. 1509; Skt. ''Mahāprajñāpāramitopadeśa'')에서 발견된다. 다양한 현대 학자들은 전통적으로 나가르주나의 독창적인 저작으로 여겨졌으며 쿠마라지바 팀이 번역한 ''대지도론''이 실제로 쿠마라지바와 그의 팀에 의해 많은 내용이 추가되었거나, 실제로 쿠마라지바의 제자인 승예의 편집물이라고 주장한다.[43][44][45]

『대승대의장』 3권은 노산의 혜원과의 문답집이다.

5. 영향

라팔 펠버에 따르면, "쿠마라지바의 이름과 관련된 번역은 프라크리트어(산스크리트어의 방언)와 초기 불교 산스크리트어에서 고전 중국어로 이루어졌으며, 한자 문화권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 성공은 매우 커서, 이후 몇 세기에 걸쳐 다른 학자들이 동일한 텍스트의 새롭고 더 개선된 번역본을 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동아시아의 신앙, 주석 및 문학 생활에서 사용되어 온 것은 '쿠마라지바 번역'이었습니다. 20세기와 21세기에는 한자 불교 전통이 뚜렷한 세계적 근대 불교의 등장에 기여하면서, 5세기 초 쿠마라지바의 번역 저작은 암묵적인 주요 존재가 되었습니다."[47] 쿠마라지바의 번역 작업은 언어적, 용어적 영향 외에도 중국에서 불교에 대한 철학적 이해에도 영향을 미쳤다. 판 무요에 따르면, 쿠마라지바 이전에는 많은 중국 불교 신자들이 공(空)과 무아(無我)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그들이 신도교의 현학 철학의 영향을 받아 공을 일종의 무(無) 또는 실제적이고 절대적인 실체(이는 모두 'śūnyatā'와 ''anatman'' 개념에 대한 잘못된 해석)로 간주했기 때문이다.[48] 쿠마라지바와 승조, 승예와 같은 그의 제자들은 이러한 오류를 인식하고, 인도 중관 철학에 기반한 적절한 해석을 도입하여 이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다.[48]

6. 제자

도생, 승조, 혜관, 승예를 사철이라 칭한다. 도융, 담영, 혜엄, 도항, 도상 등을 더하여 십철이라고 칭하기도 하지만, 서적에 따라 이설이 있어 일치하지 않는다.

7. 평가 및 기타

7. 1. 김만중의 평가

조선 중기 문인 김만중은 쿠마라지바의 번역론을 인용해 국문학의 가치를 긍정했다. 김만중은 한글로 쓰여진 정철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같은 작품을 굳이 칠언고시 같은 중국식으로 번역하려는 것에 대해 자기(조선) 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중국)의 말을 배워서 표현해 봤자 앵무새가 사람 말을 따라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부질없는 짓이라 비판했다. 또한 당시 민간에서 부르는 노래(즉 한자로 적지 않은 순수한 모국어)가 소위 학자나 사대부가 말하는 시문(詩文)보다 형식이 저속할지는 모르지만 표현의 진솔함에 있어서는 오히려 그들이 감히 따라올 수도 없다고 하였다. 김만중의 이 비평은 한문이 아닌 국문으로 제작된 시문학의 가치를 긍정하는 것으로 한국문학사에서 높게 평가받는다.

7. 2. 현대의 평가

8. 전기 자료

출삼장기집』 권14, 『고승전』 권 제2, 『진서』 "열전" 등에 전기 자료가 전해지고 있다.

참조

[1] 서적 Investigating Translation: Selected Papers from the 4th International Congress on Translation, Barcelona, 1998 John Benjamins Publishing
[2] 서적 March of Central Asia Indus Publishing
[3] 논문 Tao Sheng's Theory of Sudden Enlightenment Re-examined Motilal Banarsidass Publishers Private Limited
[4] 웹사이트 The Silk Road: A New History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15
[5] 서적 The Flower of Chinese Buddhism Middleway Press
[6] 서적 The Silk Road: A New History Oxford University Press
[7] 문서
[8] 서적 Early Madhyamika in China and India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9] 서적 Early Madhyamika in China and India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0] 서적 Dunhuang Art: Through the Eyes of Duan Wenjie.
[11] 문서
[12] 서적 A History of Sino-Indian Relations: 1st Century A.D. to 7th Century A.D. : Movement of Peoples and Ideas Between India and China from Kasyapa Matanga to Yi Jing APH Publishing
[13] 서적 Understanding Prajñā: Sengzhao's "wild Words" and the Search for Wisdom
[14] 서적 Chinese Lives: The People Who Made a Civilization Thames & Hudson
[15] 서적 Buddhist Thought: A Complete Introduction to the Indian Tradition
[16] 서적 Early Madhyāmika in China and India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7] 서적 Understanding Prajñā: Sengzhao's "wild Words" and the Search for Wisdom
[18] 서적 The Silk Road: A New History Oxford University Press
[19] 서적 Understanding Prajñā: Sengzhao's "wild Words" and the Search for Wisdom
[20] 서적 Chinese Buddhism and Traditional Culture Routledge
[21] 서적 Nāgārjuna's Philosophy: As Presented in the Mahā-Prajñāparamitā-Sastra Motilal Banarsidass Publ.
[22] 서적 Early Madhyāmika in China and India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23] 서적 Basic Buddhism: Exploring Buddhism and Zen.
[24] 서적 Nagarjuna's Twelve Gate Treatise Translated With Introductory Essays, Comments, and Notes Springer
[25] 서적 Madhyamaka thought in China E.J. Brill
[26] 서적 The Literature of the Madhyamaka School of Philosophy in India, Volume 7
[27] 서적 Surangamasamadhisutra
[28] 서적 Madhyamaka thought in China E.J. Brill
[29] 서적 Madhyamaka thought in China E.J. Brill
[30] 서적 Madhyamaka thought in China E.J. Brill
[31] 서적 The Classification of Buddhism
[32] 서적 Early Madhyamika in China and India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33] 서적 The sutra on the concentration of sitting meditation (Taishō Volume 15, Number 614) Numata Center for Buddhist Translation and Research
[34] 서적 Buddhism Across Asia: Networks of Material, Intellectual and Cultural Exchange, volume 1 Institute of Southeast Asian Studies
[35] 서적 A History of Sino-Indian Relations: 1st Century A.D. to 7th Century A.D. : Movement of Peoples and Ideas Between India and China from Kasyapa Matanga to Yi Jing APH Publishing
[36] 서적 Early Madhyamika in China and India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67
[37] 논문 "Persuasion and entertainment at once: Kumārajīva's Buddhist storytelling in his commentary on the Vimalakīrti sutra," 2002
[38] 서적 Understanding Prajñā: Sengzhao's "wild Words" and the Search for Wisdom 2008
[39] 서적 Early Madhyamika in China and India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67
[40] 간행물 A Reexamination of the Influence of Kumarajiva's Thought on His Translation of the Vimalakirtinirdesa The Eastern Buddhist Society 2018
[41] 서적 Early Madhyamika in China and India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67
[42] 서적 Understanding Prajñā: Sengzhao's "wild Words" and the Search for Wisdom 2008
[43] 서적 Suvikrāntavikrāmi-pariprcchā Prajñāpāramitā-Sūtra Kyushu University Press 1958
[44] 논문 The Problem of the Authorship of the Mahāprajñāpāramitopadeśa: A Re-examination 2004
[45] 서적 Early Madhyamika in China and India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67
[46] 서적 'The Treatise on the Great Virtue of Wisdom of Nagarjuna - Mahāprajñāpāramitāśāstra'
[47] 웹사이트 Kumarajiva “Great Man” and Cultural Event. https://openphilolog[...]
[48] 간행물 A Reexamination of the Influence of Kumārajīva's Thought on His Translation of the Vimalakīrtinirdeśa The Eastern Buddhist Society 2018
[49] 문서 世界大百科事典 第2版 平凡社 2006
[50] 서적 中国史重要人物101 新書館 2005
[51] 문서 Chinese religions
[52] 서적 仏典はどう漢訳されたのか - スートラが経典になるとき 岩波書店 2013
[53] 문서
[54] 서적 仏教、本当の教え 中央公論新社 2012
[55] 논문 絶妙だった鳩摩羅什訳 ―サンスクリット語から『法華経』『維摩経』を翻訳して― https://hdl.handle.n[...] 創価大学創価教育研究所 2014-03
[56] 웹사이트 浄土真宗 無量寿山光明寺の社会貢献|鳩摩羅什師記念館建設事業 https://www.komyoji.[...]
[57] 웹사이트 妙法蓮華経序品第一 https://www.kosaiji.[...] 広済寺
[58] 논문 『妙法華』における「小乗」の語について羅什の法華経改竄 https://doi.org/10.4[...] 日本印度学仏教学会 1991
[59] 문서
[60] 웹사이트 동양사상 > 동양의 사상 > 중국의 사상 > 한·당의 사상 > 구마라습 https://ko.wikisourc[...]
[61] 웹사이트 종교·철학 > 세계의 종교 > 불 교 > 불교의 역사 > 교학연구의 발달 > 격의불교 https://ko.wikisourc[...]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