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전투 (19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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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평양 전투 (1950년)는 1950년 10월,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한 이후 평양을 점령하기 위해 벌인 전투이다. 미 제1군단과 국군 제1보병사단이 주공을 맡아 진격했으며, 조선인민군은 대동강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했지만, 유엔군의 공세를 막지 못했다. 국군 제1사단이 10월 19일 평양에 진입하여 주요 기관을 점령하고, 미 제1기병사단과 제7보병사단도 평양에 진입했다. 평양 함락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환영대회가 열렸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해 평양은 다시 북한의 통제 하에 들어갔다. 현재 평양 최초 입성 부대를 두고 논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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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전투 (1950년)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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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분쟁 | 6.25 전쟁 |
날짜 | 1950년 10월 15일 ~ 1950년 10월 19일 |
장소 | 평양 |
결과 | 유엔군의 승리, 평양 함락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대한민국 (1949년) 유엔군 미국 (1912년) |
교전국 2 | 북한 |
지휘관 및 병력 | |
지휘관 1 | 미국 호바트 R. 게이 대한민국 백선엽 |
지휘관 2 | 북한 최용건 |
병력 1 | 제1기병사단 제1보병사단 제7보병사단 8연대 |
병력 2 | 제17사단 제32사단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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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정보 | |
관련 전투 | 평양 전투 (동음이의) |
2. 배경
38선을 돌파한 이후,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 평양을 점령하기 위해 빠른 속도로 북진했다. 10월 17일경, 유엔군은 평양 외곽의 언진 산맥, 마식령 산맥, 멸악산맥 등 산악 지대에서 저항하던 조선인민군을 격파하고 평양을 향해 포위망을 좁혀 들어갔다.
당시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과 월턴 워커 미 제8군 사령관은 평양 탈환을 전쟁 승리의 중요한 분기점으로 여겼다. 이에 따라 미 제1군단을 주력으로 삼아 평양 공략을 계획했으며, 예하 부대들은 평양 선점 경쟁을 벌이며 진격 속도를 높였다.
한편, 조선인민군은 외곽 방어선이 무너지자 최인 소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평양방어사령부를 설치하고 대동강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하며 저항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는 전면적인 방어전이라기보다는, 주력 부대와 기관들이 청천강 이북으로 안전하게 철수할 시간을 벌기 위한 지연전에 가까운 것으로 평가되었다.[5] 유엔군 정보 당국 역시 조선인민군이 평양에서 강력한 저항보다는 상징적인 방어에 그칠 것으로 판단했다.[5] 또한 평양 주변의 평야 지대는 기동력과 화력에서 열세인 조선인민군이 방어전을 펼치기에 불리한 조건이었다.
2. 1. 작전 계획
38선을 돌파한 유엔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 평양을 향해 진격 경쟁을 벌였다. 10월 17일까지 미 제1군단 예하의 대한민국 국군 제1보병사단, 미 제1기병사단, 미 제24보병사단 등은 평양 외곽의 산악지대에서 저항하는 조선인민군을 격파하며 평양으로 접근했다. 국군 제1사단은 율리 일대에, 미 제1기병사단은 황주에 진출하여 평양까지 약 40km 거리로 포위망을 좁혔다.국군이 38선을 돌파할 무렵,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과 월턴 워커 미 제8군 사령관은 평양 탈환 계획을 구상했다. 초기 구상은 미 제1군단이 주공을 맡고, 동해안 원산에 상륙할 예정인 미 제10군단 예하 미 제7사단 등이 서쪽으로 진격하여 평양 동북방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주공 임무를 맡은 프랭크 W. 밀번 미 제1군단장은 기동성이 좋은 미 제1기병사단을 중앙 선두로 내세우고, 국군 제1사단은 그 우측에서 평양을 압박하도록 했다. 미 제1기병사단과 미 제24사단 사이에는 사리원 선점 경쟁이 벌어졌는데, 10월 17일 미 제1기병사단에 배속된 영국 제27여단이 사리원을 먼저 점령하면서 미 제1기병사단이 평양 공격의 선봉에 서게 되었다. 같은 날 밤, 미 제7기병연대는 황주를 탈환하여 평양 남방 40km 지점까지 진출했다.
한편, 맥아더 사령관이 구상했던 동해안 상륙 부대의 측면 공격 역할은 실제로 제10군단이 상륙하기도 전에 제8군 통제 하의 대한민국 국군 부대들이 수행하게 되었다. 10월 17일 저녁까지 4개의 대한민국 사단이 평양을 향해 빠르게 진격하며 미군 및 영국군 부대와 경쟁했다.
- 대한민국 국군 제1사단: 평양 남동쪽 약 24.14km 지점까지 접근하여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제12연대는 상원 율리 일대, 제11연대는 초귀동-상원 일대에 진출하여 평양 최후 방어선 공격을 시작했고, 제15연대는 율리에서 삼등으로 진격하며 평양 동북방을 우회 공격했다.
- 대한민국 국군 제7사단: 제1사단 우측에서 동쪽으로부터 평양으로 진격 중이었다.
- 대한민국 국군 제8사단: 더 동쪽에서 중앙 산맥의 양덕에 접근하여 평양-원산 간선 도로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전환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 대한민국 국군 제6사단: 양덕 바로 전, 평양 동쪽 약 80.47km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이 부대는 10월 15일 원산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화천 방면 도로를 통해 진격해왔다.
이처럼 미 제1군단은 남쪽과 남동쪽에서, 대한민국 국군 제7사단은 남동쪽에서, 제8사단과 제6사단은 북동쪽에서 평양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약 7개 사단의 유엔군이 평양으로 집결하는 상황에서, 소모되고 혼란에 빠진 조선인민군은 도시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어려웠다.[5]
조선인민군은 멸악산맥 일대의 외곽 방어선이 돌파되자 평양 방어사령부(사령관: 소장 최인)를 설치하고 대동강 남북안과 동평양 일대에 진지를 구축하며 저항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는 유엔군의 진격을 지연시켜 주력 부대와 기관들이 청천강 이북으로 안전하게 철수할 시간을 벌고 후퇴하는 적을 엄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판단되었다. 미 제8군 정보부(G-2)는 조선인민군 주력이 차후 작전을 위해 청천강 이북으로 철수하는 동안, 평양에는 지연 방어 형태의 상징적인 저항만 시도할 것으로 예측했다. 10월 17일 당시 평양 방어를 위해 남은 조선인민군 제17사단과 제32사단의 유효 병력은 8,000명 미만으로 추산되었다.[5] 또한 평양 주변의 평야 지대는 화력과 기동력이 열세인 조선인민군이 방어전을 지속하기에 불리한 지형이었다.
3. 전투 과정
미국 육군 제1기병사단은 영국 제27보병여단을 배속받아 사리원 점령 경쟁에서 승리하며 평양 진격의 선봉에 섰다. 사단장 호바트 R. 게이 소장은 10월 18일 새벽, 제7기병연대에게 평양으로의 진격을 재개하라고 명령했다.[5]
18일, 제7기병연대 제3대대는 황주를 출발하여 북진했으나, 평양 남방 흑교역 부근 고지에서 조선인민군(KPA)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약 800명의 KPA 병력은 전차와 중(重)박격포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고, 미 제70전차대대의 전차 지원에도 불구하고 진격이 지연되었다. 전투 중 노스 아메리칸 P-51 머스탱 전투기 1기가 격추되기도 했다. 프랭크 W. 밀번 미 제1군단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게이 소장은 공격 진행에 불만을 표하며 연대장 제임스 K. 울노프 대령에게 나머지 2개 대대를 투입하여 측면 기동을 명령했다. 또한 다음 날 평양 공격은 제5기병연대가 맡도록 지시했다.[5]
10월 19일 새벽 5시, 폴 클리포드 중령의 제5기병연대 제2대대가 황주에서 북진을 시작하여 흑교리의 제7기병연대를 통과했다. 제임스 H. 벨 중위가 이끄는 F 중대가 선두에서 평양으로 향했고, 오전 11시경 평양 남쪽 외곽의 무진천에 도달하여 저항을 격파하고 평양 남서부에 진입했다. F 중대는 대동강 철도 교량 확보를 시도했으나 일부 경간만 남아 있었고, 그마저도 도하 중 KPA에 의해 파괴되었다. 제2대대의 나머지 부대가 향한 주요 도로 교량 역시 도착 직전 폭파되었다. 거의 동시에 대한민국 제1사단도 평양 동쪽에서 시내로 진입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제1사단은 18일 밤부터 격전을 치르며 평양에 접근했고, 19일 아침 KPA의 강력한 방어 거점을 돌파했다. 백선엽 사단장에 따르면, 제12연대 제2대대는 오전 11시 직전 대동강 남안에 도착하여, 제5기병연대 선두 부대와 거의 동시에 평양 외곽에 도달했다. 제6전차대대 C중대의 지원을 받은 대한민국 제1사단 제11연대는 오후 2시 40분에 평양비행장을 확보했다. 다른 국군 부대는 동쪽의 미림 비행장을 점령했다.[5]
도로 교량이 파괴되자, 제5기병연대 일부는 여울을 찾아 상류로 이동했다. 그러나 평양 출신인 백선엽 사단장의 지휘 아래 대한민국 제1사단 제15연대는 이미 여울을 찾아 도하를 시작했고, 어둠이 내릴 무렵에는 대한민국 제1사단 대부분이 대동강 북쪽 평양 주요 지역에 진입해 있었다. 한편, 대한민국 제7사단 제8연대는 동쪽에서 평양 북쪽으로 진격하여 오후 5시까지 김일성종합대학을 점령했다.[5]
다음 날인 10월 20일, 대한민국 제1사단은 평양 중심부로 진격하여 저항 없이 행정 중심지를 점령했다. KPA 병력은 사기가 저하되어 무기와 진지를 버리고 도주했다. 오전 10시, 대한민국 제1사단은 평양시청, 도 정부 청사 등을 포함한 도시 전체를 확보했다고 보고했다. 대한민국 제8연대는 평양 북서부 지역을 소탕하며 제1사단을 지원했다. 공병 상륙정이 도착하자 미 제5기병연대도 대동강 도하를 시작하여 정오까지 주력이 강을 건넜다.[5]
평양 함락이 임박하자 미 제8군은 10월 16일 '제8군 인디언헤드'라는 특별 임무 부대를 조직했다. 미 제2보병사단의 랄프 L. 포스터 중령이 지휘하는 이 부대는 제38보병연대 K 중대와 제72중전차대대 C 중대 전차 등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평양 진입 후 주요 정부 건물과 외국 시설을 확보하여 적 정보 자료를 수집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 부대는 10월 20일 평양에서 목표 대부분을 확보하고 상당량의 군사 및 정치 정보를 극동사령부 특별팀에 인계했다. 평양 점령 과정에서 20명의 미군 포로가 구출되었으나, 다수의 포로는 이미 북쪽으로 이송된 상태였다.[5]
게이 소장은 제1기병사단 본부를 평양 남서쪽 약 16.09km 지점의 구 북한군 군사 학교 건물에 설치하고 평양의 치안 유지를 담당했다. 10월 23일, 그는 마르셀 크롬베즈 대령을 도시의 민간 지원 책임자로 임명했다. 제5기병연대는 평양 남쪽, 제8기병연대는 북쪽, 제7기병연대는 평양의 항구인 진남포에 배치되었다. 10월 24일, 월턴 워커 미 제8군 사령관은 평양의 구 김일성 사령부 건물에 제8군 전방 지휘소를 개설했다.[5]
3. 1. 10월 17일
38선을 돌파한 대한민국 국군 제1보병사단과 미국 육군 제1기병사단, 미 제24보병사단 등은 10월 17일 현재 평양 외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이들 부대는 언진 산맥, 마식령 산맥 남단, 멸악산맥 등 산악지대에서 저항하는 조선인민군을 격파하며 진격했다. 국군 제1사단은 율리 일대에, 미 제1기병사단은 황주에 각각 진출하여 평양까지 약 40km 거리로 포위망을 압박했다.평양 동남방으로 진격한 국군 제1사단은 제12연대가 상원 율리 일대에, 제11연대가 초귀동-상원 일대에 진출하여 조선인민군의 평양 최후 방어선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제15연대는 조공으로서 율리에서 삼등 방면으로 진격하며 평양 동북방을 우회 공격하기 시작했다.
한편, 군단 중앙의 미 제1기병사단과 좌익의 미 제24사단 사이에는 사리원 선점 경쟁이 벌어졌다. 군단장 프랭크 W. 밀번 소장은 사리원에 먼저 도착하는 사단이 평양 공격의 선봉에 서도록 지시했다. 10월 17일, 미 제1기병사단에 배속된 영 제27여단이 사리원을 먼저 점령하면서 미 제1기병사단이 평양 공격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고, 재령에서 사리원으로 향하던 미 제24사단의 진격은 중단되었다. 같은 날 밤, 미 제1기병사단 예하 제7기병연대는 서흥에서 북진하여 황주를 탈환함으로써 평양 남방 40km 지점까지 진출했다.
국군 제1사단은 이날 아침부터 진격을 재개했다. 정면 공격 부대는 인민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진격이 부진했으나, 우회 공격 중인 제15연대는 비교적 신속하게 진격을 계속했다.
주공인 국군 제12연대는 미 제6전차대대의 엄호 아래 제2대대와 제3대대가 각각 우익과 좌익을 맡아 대동리를 목표로 공격했다. 대동리 남쪽 반용산과 관음산의 인민군 2개 대대 규모의 저항을 격파하고 오전 10시까지 대동리를 탈환했다. 연대는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던 중, 대동리 북쪽 1km 지점에서 다시 1개 연대 규모의 적과 교전하게 되었다. 인민군은 대동강의 지류인 남강에서 갈라진 상원강변 서북쪽 능선 일대에 6대의 전차, 7문의 곡사포, 16문의 직사포 등의 지원을 받으며 여러 겹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최후 저항을 시도했다. 특히 제1선의 저항이 완강했고 진격로에는 많은 지뢰가 매설되어 있었다. 국군 제12연대는 치열한 공격 끝에 이 방어선을 돌파하고 해가 저문 뒤에야 강변에 도달했는데, 대동리로부터 약 1km 전진하는 데 8시간이 소요되었다.
한편, 동북방을 우회 공격하게 된 국군 제15연대는 전날 율리에서 북진을 시작하여, 이날 인민군 패잔병의 미약한 저항을 격파하면서 삼등에서 송가리 방면으로 서진하여 신장리, 삼청동, 광청리, 승호리 일대까지 진출했다.
- 제1대대는 삼등을 거쳐 신장리 부근에서 전차 4대의 엄호 하에 저항하는 인민군 2개 중대 규모를 격파하고,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광청리 부근까지 진출했다.
- 제2대대는 삼등-덕산 탄광-송가리로 진격하여 이날 오전 11시에 제7중대가 화천리에 진출함으로써 전 대대가 합세했다. 이후 저항하는 인민군 2개 중대 규모를 격퇴하고 운학동 서북방 2km 부근까지 지속적으로 추격했다.
- 제3대대도 삼등을 거쳐 서진하며 도중 인민군 패잔병의 저항을 격파하고 광청리 부근으로 진출했다.
- 연대 직할대는 이날 새벽 인민군 패잔병의 약간의 지연 행동을 물리치고 남강 지류를 건넜으며, 화천리 부근에서 1개 중대 규모의 인민군으로부터 사격을 받자 이를 격퇴한 다음, 오후 5시에 승호리 일대에 진출하여 군화 속의 물을 털었다.
3. 2. 10월 18일
국군 제1사단 제12연대는 전날부터 이어진 상원강 일대 조선인민군 방어선에 대한 공격을 차가운 가을비 속에서 밤새 계속하여 10월 18일 새벽 전에 완료하였다. 진격로에는 대인 및 대전차 지뢰가 많이 매설되어 있어, 사단 참모장 석주암 대령이 지프 이동 중 지뢰 접촉으로 부상을 입기도 했다. 백선엽 사단장은 보병들까지 직접 지뢰 제거에 나서도록 독려해야 했다.평양 외곽 방어선이 무너지자, 제12연대는 미 제6전차대대 C중대 전차를 선두로 평양을 향해 신속히 진격했다. 오전 10시경 평양 교외에 도착했을 때 도로 좌우에서 저항하는 약 2개 대대 규모의 적과 마주쳤으나, 미군 전차와 포병 화력, 그리고 악천후 속에서도 출격한 항공기의 지원에 힘입어 2시간 만에 제2대대와 제3대대가 이를 격파하였다. 연대는 계속 진격을 서둘러, 오전 11시에 제1대대가 먼저 동평양 시가지에 돌입하였다. 이후 각 대대는 선교리 일대로 진출하여 낮 12시 30분에서 45분 사이에 대동교 남북방의 대동강 남안에 부대를 배치하고 본평양 입성을 준비했다.
국군 제12연대가 동평양에 진입할 무렵, 미 제5기병연대의 선두 부대도 남평양으로 돌입했다. 백선엽 사단장은 대동교 남쪽 교차로에서 미 제5기병연대를 따라온 미 제1군단장 밀번 중장과 미 제1기병사단장 게이 소장에게 평양 진입 상황을 보고하였다.
한편, 국군 제1사단 우익을 맡은 제11연대는 이날 평양 점령에 큰 역할을 했다. 선발대인 제3대대(대대장 소령 정영홍)는 낮 12시 25분에 평양비행장을 탈환하였다. 이에 앞서 제11중대장 김봉건 대위는 노획한 군마로 편성한 기마대를 이끌고 오전 10시 30분에서 11시 사이에 비행장에 선두로 돌입하여 남아있던 적들을 소탕했다. 약 1시간 반 뒤에는 제3대대 주력이 비행장에 완전히 진출하였다.
제11연대 주력은 모단봉을 목표로 진격했다. 전날 밤 마산리에서 대동강 북쪽 강을 건너기 시작한 우익 제3대대는 이날 새벽 5시에 도하를 완료했고, 제1대대는 오전 10시 30분에 삼산동에서, 좌익 제2대대는 새벽에 이천리로 진격하여 오전 8시 30분에 하수리에서 각각 강을 건넜다. 제3대대는 도하를 방해하는 적을 격퇴하고 북사리를 지나 동북방에서 모단봉을 공격했다. 제1대대도 오후 2시에 평양에 돌입하여 제3대대 우측에서 모단봉 부근을 공격했고, 제2대대는 제3대대 좌측에서 모단봉 일대를 공격했다. 모단봉 일대에는 연대 규모의 조선인민군이 참호와 동굴에 은거하며 완강히 저항했으나, 국군의 끈질긴 공격 끝에 오후 3시까지 모두 격파되었다.
모단봉을 점령한 제11연대는 즉시 평양 시내로 진격했다. 제3대대는 김일성대학으로 진격하여 오후 3시 30분경 저항하던 1개 대대 규모의 적을 격퇴하고 대학 본관을 점령했다. 제2대대는 서쪽으로 우회하여 시내 중심부로 돌진했고, 제7중대는 대동강변을 따라 진격하여 북한 내각 본부 건물에 가장 먼저 태극기를 게양했다. 비슷한 시각에 도착한 제11중대는 인근의 인민위원회 건물에 태극기를 게양했다. 오후 5시 30분까지 제11연대는 평양 시내의 중요 건물을 대부분 장악했다.
같은 날 미군 제7기병연대는 황주군에서 북진을 시작하여 평양 남쪽 흑교역 부근 고지에서 조선인민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약 800명 규모의 조선인민군은 전차와 중(重)박격포 등으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으며, 미군 제70전차대대 C중대 전차들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전투는 격렬했다. 이 과정에서 미군 노스 아메리칸 P-51 머스탱 전투기 1기가 격추되기도 했다.[5] 게이 사단장은 제임스 K. 울노프 연대장에게 측면 공격을 지시하고, 다음 날 평양 공격은 제5기병연대가 맡도록 조치했다.[5]
3. 3. 10월 19일
10월 19일, 평양 점령 다음 날에도 가을비가 내리는 가운데, 국군 제1사단 예하 제11, 12연대는 평양 시내로 진입하여 북한군 잔당을 소탕하고 방어 시설이 갖춰진 적 기관을 포함한 평양 시가 전역을 오전 10시까지 완전히 점령했다. 같은 날 국군 제7사단 제8연대는 평양 서북방 지역을 평정했다. 미군은 각종 수습 대책을 백선엽 사단장에게 문의하거나 통보한 후 시행했다.오전에는 평양 시청을 수색하던 국군 제15연대 9중대의 박종순 소위가 시청 방공호에서 북한군에 의해 자행된 우익 인사 학살 현장을 발견하는 비극적인 일도 있었다. 한편, 평양상업학교 출신인 같은 연대 11중대의 한 소위는 피난 갔던 부모와 재회하기도 했다.
미 제1기병사단은 황주에서 북쪽으로 진격을 재개했다. 호바트 R. 게이 사단장은 제5기병연대가 제7기병연대를 통과하여 평양 공격을 주도하도록 명령했다. 19일 오전 5시, 폴 클리포드 중령이 이끄는 제5기병연대 제2대대가 황주를 출발해 북진했다. 흑교역 남쪽 고지에서 북한군의 저항에 부딪혔으나, 이를 격파하고 진격을 계속했다. 특히 제임스 H. 벨 중위가 이끄는 F 중대는 전차, 공병 등의 지원을 받아 선두에서 평양으로 향했다. 오전 11시 2분, 벨 중대는 평양 남쪽 외곽의 대동강 지류인 약 18.29m 폭의 무진천에 도착하여 다리를 방어하던 북한군을 제압하고 평양 남서쪽으로 진입했다. 이후 F 중대는 대동강 철도 교량 확보를 시도했으나, 북한군이 교량 일부를 파괴했다. 제2대대의 나머지 부대는 대동강의 주요 도로 교량으로 향했지만, 이 역시 도착 직전 북한군에 의해 폭파되었다.[5]
국군 제1사단은 미 제1기병사단과 거의 동시에 평양으로 진입했다. 18일 밤부터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평양으로 접근했으며, 19일 아침에는 북한군의 강력한 방어 거점을 돌파했다. 약 약 9.66km 떨어진 고조동 부근에서 다시 북한군의 저항에 부딪혔으나, 제6전차대대 C 중대의 지원으로 북한군 진지를 돌파했다. 이 과정에서 전차들이 약 300명의 북한군을 사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백선엽 사단장에 따르면, 제12연대 제2대대는 오전 11시 직전에 대동강 남쪽 둑에 도달했으며, 제5기병연대 제2대대 선두 부대는 고속도로 다리에서 동쪽으로 약 91.44m 떨어진 로터리에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 제11연대는 오후 2시 40분에 평양비행장을 확보했다. 다른 국군 부대는 동쪽의 미림 비행장을 확보했었다.[5]
북한군이 대동강 도로 교량을 폭파하자, 국군 제1사단 제15연대는 평양 출신인 백선엽 사단장의 지리에 대한 해박함 덕분에 신속하게 여울을 찾아 도하를 시작했다. 어둠이 내릴 무렵에는 국군 제1사단 대부분이 대동강 북쪽의 평양 주요 지역으로 진입했다. 한편, 국군 제7사단 제8연대는 동쪽에서 평양 북쪽으로 진격하여 오후 5시까지 김일성종합대학을 점령했다.[5]
평양 탈환의 공로로 국군 제1사단 장병들에 대한 포상이 이루어졌다. 전 부사관과 병[8] 698명이 1계급 특별 진급했으며[9], 각 대대장들은 중령으로 진급했다. 김점곤 중령과 제15연대장 조재미 중령은 이날 부로 대령으로 진급했으며, 백선엽 사단장은 프랭크 W. 밀번 미 제1군단장으로부터 미국의 은성 훈장을 수여받았다.
같은 날, 더글라스 맥아더 유엔군 최고사령관 원수는 월턴 워커 미 제8군 사령관에게 "한국군을 조속히 국경에 도달케 하라"고 명령했다. 다음 날인 10월 20일, 미 제187공수연대는 북한군 수뇌부 생포, 퇴로 차단, 유엔군 포로 구출을 목적으로 평양 북방 숙천과 순천 지역에서 공수 작전을 개시했다.[6]
4. 결과 및 영향
대한민국이 서울을 수복할 때부터 이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부, 기관, 부대, 수뇌부는 평양에서 철수 준비를 하고 있었다. 10월 9일부터 평양 철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일부 인민군은 만주의 하얼빈이나 중국 국경으로 이동했다. 김일성 역시 10월 12일 평양을 떠나 덕천을 거쳐 강계 근처로 피신하여, 평양은 사실상 비어있는 상태였다.
평양 점령 이후, 미국은 평양에 대한 통치권을 주장했다. 이는 당시 트루먼 행정부가 38선 이남만 대한민국 통치 지역으로 간주하고 평양은 별개로 보았기 때문이다. 유엔군사령부는 평양에 군정을 실시할 준비를 했으며, 10월 21일 맥아더 원수는 평양비행장에 도착하여 평양에 가장 먼저 진입한 미 제5기병연대 F중대 등을 사열했다.
유엔군은 계속 북진하여 미 제1군단은 신의주-수풍댐 지역으로 진격을 이어갔다. 이에 따라 제1사단은 수풍댐을, 미 제24사단은 선천을 목표로 진격했다. 새로 군단에 편입된 제7사단은 예비대로, 미 제1기병사단은 평양 경비를 맡았다.
10월 30일, 평양시청 앞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방문을 기념하는 대규모 환영대회가 열렸다. 환호하는 평양 시민들 앞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약 70여 분간 연설하며 남북통일과 자유, 독립의 의지를 강조하고 민족의 단결을 호소했다.
:우리는 단군의 후손으로 모두 형제요, 한 핏줄이니 다시는 서로 헤어지지 말자. 한 덩어리로 굳게 뭉쳐서 공산당을 몰아내고 기어이 남북통일을 완수하여 우리 삼천리 강토에서 영원무궁토록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힘을 합해 살아가자.
:
:우리는 고대로부터 독립된 나라이니 완전무결한 독립을 찾아야하며, 죽을 수는 있어도 자유권을 포기할 수 없으며, 더욱이 우리 민권의 자유만은 아무도 막을 수 없다.
:
:우리는 피를 흘리며 싸워서 자유 독립국을 세운 것이니 어떤 나라든 들어와서 우리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는 못할 것이며, 또한 우리가 간섭받을 이유도 없고 받지도 않을 것이다. 남북 동포가 오직 한 덩어리가 되어 통일된 민족의 기상과 의지로 내 나라를 만들어 새 생활을 하자.
:
:모두가 함께 생사를 같이하며 이 강토를 우리끼리 지켜야 할 것이니 과거의 잘못은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자. 이제는 한마음 한 뜻으로 뭉치고 또 뭉쳐서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
:
:4천년을 이어 내려온 한 혈족으로서 아무리 어렵고 가난해도 있는 것은 서로 나누어 쓰고 나누어 먹으며 서로 돕고 양보하여 하나로 굳게 뭉치자.[10]
평양 전투 이후, 유엔군은 후퇴하는 북한군 부대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미국 제187보병연대를 평양 북쪽 약 40.23km 지점에 투입하는 공수 작전을 펼쳤다.[6]
그러나 평양 탈환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급변하면서, 평양은 12월 5일 다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통제 하에 들어갔다.[7]
5. 논란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평양 최초 입성 부대는 1사단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7사단 8연대가 최초 입성 부대라는 이견이 존재하여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11][12]
참조
[1]
서적
The Korean War: An Encyclopedia
Garland Publishing
[2]
웹사이트
5th Cavalry enters Pyongyang
http://www.koreanwar[...]
2017-08-16
[3]
서적
United States Army in the Korean War: Ebb and Flow November 1950 – July 1951
University Press of the Pacific
[4]
서적
A Short History of the Korean War
Harper Perennial
[5]
서적
United States Army in the Korean War: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June–November 1950
https://history.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United States Army
[6]
웹사이트
Out in the Cold: Australia's involvement in the Korean War {{!}} The Australian War Memorial
https://www.awm.gov.[...]
2017-08-16
[7]
뉴스
BBC On This Day 1950: Pyongyang taken as UN retreats
http://news.bbc.co.u[...]
2017-07-27
[8]
문서
대한민국 국군에서는 사병이란 단어 대신 이들을 구별하여 부른다.
[9]
문서
대한민국 국군에서는 사병이란 단어 대신 이들을 구별하여 부른다.
[10]
문서
평양에 동행한 경무대 김광섭 비서가 프란체스카에게 전달한 이승만의 평양시청 연설문의 일부분. 『6.25와 이승만 :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p. 242.
[11]
웹사이트
평양 ‘1번 入城’의 주역은 국군 1사단인가, 7사단인가? - ③
http://www.chogabje.[...]
[12]
뉴스
6·25 ‘평양 최초 입성' 백선엽 아니었어?
https://www.nocutn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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