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유선 (의사)
1. 개요
윤유선은 1910년 출생하여 1987년 사망한 대한민국의 의사이다.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도쿄 제국대학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세브란스 의전 강사, 이화여자전문학교 의학부 교수 등을 역임했다. 미군정청 위생국 직원으로 공직에 입문하여 보건후생부 성병과장, 방역과장, 보건부 의정국 방역과장, 만성병과장을 거쳤으며, 존스 홉킨스 대학교에서 공중보건학을 연수했다. 보건부 의정국장 재직 시 의료보험을 포함한 사회보장 제도를 도입을 추진했다. 국립보건원 원장, 국립의료원 원장, 대한공중보건협회 회장 등을 지냈으며,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장을 역임했다. 1974년 미국으로 이민 후 시카고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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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병학자 -
게르하르 아르메우에르 한센
게르하르 아르메우에르 한센은 나균을 발견하여 나병이 전염병임을 밝히고 나병 감소에 기여한 노르웨이의 의사이자 세균학자이다. -
일제강점기의 의학자 -
윤일선
윤일선은 한국 근대 병리학 및 해부학의 선구자이자 서울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교육자로, 한국 의학 교육과 연구 발전에 기여하고 해방 후 서울대학교에서 한국 의학교육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국내외 학술 활동에도 참여하여 한국 과학기술 발전에 헌신하였다. -
일제강점기의 의학자 -
이갑성
이갑성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참여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자 해방 후 정치인으로, 3·1 운동 당시 기독교 대표로 활동하고 해방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여 정치 활동을 전개했으나, 만년에 일제 밀정 활동 의혹으로 논란이 되었다. -
일제강점기의 농구 선수 -
윤택선
일제강점기부터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관료이자 장로교 장로인 윤택선은 윤치소와 이범숙의 아들이자 윤보선 전 대통령의 동생이며 교통부 장관 비서관, 국회 교통체신위원회 전문위원 등을 역임하고 용산교회와 안동교회에서 장로로 활동했다. -
일제강점기의 농구 선수 -
송기우
송기우는 1935년 염정희와 결혼했는데, 결혼식은 견지동 시천교당에서 열렸다.
2. 생애
윤유선은 1910년 9월 3일 충청남도 아산군 둔포면 관대리에서 통정대부 윤치명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산 출신으로, 본가가 있는 둔포면 신항1리 근처인 둔포면 관대리로 분가하여 살았다. 대한제국의 교육자 윤치오와 사헌부감찰을 지낸 윤치소는 그의 숙부였고,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과 서울특별시장,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을 지낸 윤보선과 서울대학교 총장을 지낸 윤일선은 그의 사촌 형이었다.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윤치호는 그의 5촌 당숙이었다.
서울로 상경하여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1년 3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재학 중에는 농구부 부원으로 활동하였다. 1935년 3월 14일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피부비뇨기과 교실 조교로 활동하였다. 1936년까지 세브란스 내과 부수를, 이후에는 세브란스의과전문학교 피부과 및 비뇨기과 조수를 지냈다. 그 뒤 일본으로 유학, 도쿄 제국대학 의학부에서 피부과와 비뇨기과를 전공하고 동 대학원으로 진학하였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모교인 세브란스의전 강사로 재직했다.
1943년 10월 21일 도쿄 제국대학에 '생체호르몬' 논문을 제출, 1944년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해방 후 세브란스의과대학 피부비뇨기과 교수와 이화여자전문학교 의학부 교수를 역임하였다. 1945년 9월 2일 미 군정이 주둔하고 미군정청에서 위생국을 설치한 후 위생국 직원이 되었다. 1946년 록펠러재단의 후원을 받아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 공중보건과정에 선발되어 연수를 다녀왔으며, 공중보건학을 배우고 특별히 성병예방 분야에 관심을 가졌다. 1947년 봄 수료와 동시에 귀국하였다.
1947년 미군정청 보건후생부 성병과장, 1948년 보건후생부 방역과장을 거쳐 8월 15일 정부수립 후 보건부 의정국 방역과장으로 유임되었다. 그 해 보건부 의정국 만성병과장으로 전임되었다가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 공중보건학교를 수료하였다.
1959년 국립보건원(현 국립보건연구원) 제2대 원장이 된 윤유선은 전문의 제도 도입을 주장, 1960년 전문의 시험 시행 방법을 결정하기 위한 제1차 의료업자 전문과목표방허가 심의위원회 위원 및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63년에는 제1차 예방의학 전문의 시험에 합격하여 예방의학 전문의 1호 면허를 취득하였다.
1963년 12월 16일 국립보건원 초대 원장에 임명되었다. 1965년 5월 3일, 1966년 12월 국립보건원 원장에 재임명되었다. 1969년 4월 29일 원장직을 사임하고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같은 해 7월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장 및 대한나협회 회장에 추대되었다. 1971년 12월 한양대 의대 학장에서 정년퇴임하고 한양대 의대 예방의학교실 주임교수로 활동하였다.
1974년 한양대 예방의학교실 교수에서 퇴직하고 미국으로 이민, 1987년 시카고에서 사망했다.
2.1. 초기 활동
윤유선은 1910년 9월 3일 충청남도 아산군 둔포면 관대리에서 통정대부 윤치명의 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자헌대부 육군참장 윤영렬이며, 대한제국의 교육자 윤치오와 사헌부감찰을 지낸 윤치소는 그의 숙부였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 서울특별시장,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을 지낸 윤보선과 서울대학교 총장을 지낸 윤일선은 그의 사촌 형이었다.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윤치호는 그의 5촌 당숙이었다.
서울로 상경하여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1년 3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재학 중에는 농구부 부원으로 활동하였다.
1935년 3월 14일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인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피부비뇨기과 교실 조교로 활동하였다. 1936년까지 세브란스 내과 부수를, 이후에는 세브란스의과전문학교 피부과 및 비뇨기과 조수를 지냈다. 그 뒤 일본으로 유학, 도쿄 제국대학 의학부에서 피부과와 비뇨기과를 전공하고 동 대학원으로 진학하였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모교인 세브란스의전 강사로 재직했다.
1943년 10월 21일 도쿄 제국대학에 '생체호르몬' 논문을 제출, 1944년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2.1.1. 출생과 소년기
윤유선은 1910년(융희 4년) 9월 3일 충청남도 아산군 둔포면 관대리(頓浦面 舘垈里)에서 자헌대부 육군참장 윤영렬의 손자이자 통정대부 윤치명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숙부는 대한제국의 교육자 윤치오와 사헌부감찰을 지낸 윤치소였고,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과 서울특별시장,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을 지낸 윤보선, 서울대학교의 부총장과 총장을 지낸 병리학자 윤일선은 그의 사촌 형이었다.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좌옹 윤치호는 그의 5촌 당숙이었다.
아산 출신인 아버지 윤치명은 본가가 있는 둔포면 신항1리 근처인 둔포면 관대리로 분가하여 살았다. 그 뒤 윤유선은 서울로 상경하여 배재고등보통학교(培材高等普通學校)를 졸업하고 1931년 3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재학 중에는 농구부 부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31년부터 1934년까지 중앙기독교청년회를 비롯한 청년단체에서 주관하는 농구대회에 윤유선은 세브란스의전 농구부 대표선수의 한 사람으로 여러번 출전하였다.
2.1.2. 유학과 연구 활동
1935년 3월 14일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제13기로 졸업하고, 모교인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피부비뇨기과 교실 조교(부수)로 활동하였다. 세브란스의전 피부비뇨기과 교실에 있을 때도 대학 운동부에 참여하여, 세브란스의전 운동부 무도부 부원으로 활동했다.
1936년까지 세브란스 내과 부수를, 1936년부터는 세브란스의과전문학교 피부과 및 비뇨기과 조수를 지냈다. 그 뒤 일본으로 유학, 도쿄 제국대학 의학부에서 피부과와 비뇨기과를 수학하였다. 도쿄 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으로 진학하였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모교인 세브란스의전 강사로 재직했다.
1943년 10월 21일 도쿄 제국대학에 '생체호르몬' 논문을 제출, 1944년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2.2. 보건 연구 활동
윤유선은 해방 후 세브란스의과대학 피부비뇨기과 교수와 이화여자전문학교 의학부 교수를 역임하였다. 1945년 9월 2일 미 군정이 주둔하고 미군정청에서 위생국을 설치한 후 위생국 직원이 되었다. 1946년 록펠러재단의 후원을 받아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 공중보건과정에 선발되어 연수를 다녀왔으며, 공중보건학을 배우고 특별히 성병예방 분야에 관심을 가졌다. 1947년 봄 수료와 동시에 귀국하였다.
1947년 미군정청 보건후생부 성병과장, 1948년 보건후생부 방역과장을 거쳐 8월 15일 정부수립 후 보건부 의정국 방역과장으로 유임되었다. 그 해 보건부 의정국 만성병과장으로 전임되었다가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 공중보건학교를 수료하였다.
1959년 10월부터 보건사회부 공무원들을 중심으로 매주 목요일 오후 '의료보험제도 도입을 위한 연구회'를 열었다. 손창달, 양재모, 엄장현 등이 참석한 이 모임은 목요회라는 보건사회부 내 연구모임으로 발전했다. 목요회 연구에 자극을 받아 보건사회부에서는 의료보험은 의정국에서, 실업 및 노동재해보험은 노동국에서, 공공부조는 사회국에서 각기 연구를 시작하였다.
1959년 국립보건원(현 국립보건연구원) 제2대 원장이 된 윤유선은 전문의 제도 도입을 주장, 1960년 전문의 시험 시행 방법을 결정하기 위한 제1차 의료업자 전문과목표방허가 심의위원회 위원 및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63년에는 제1차 예방의학 전문의 시험에 합격하여 예방의학 전문의 1호 면허를 취득하였다.
2.2.1. 교육, 공직 활동
해방 후 세브란스의과대학 피부비뇨기과 교수와 이화여자전문학교 의학부 교수를 역임하였다. 1945년 9월 2일 미 군정이 주둔하고 미군정청에서 위생국을 설치한 후 위생국 직원이 되었다. 1946년 록펠러재단의 후원을 받아 10인의 의사를 선발하여 미국의 3개 보건대학원인 존스 홉킨스 대학(최제창, 백행인, 윤유선), 미시간 대학(최창순, 김동철, 주인호, 한범석), 하버드 대학교(황용운, 송형래, 최명룡)에 보내 공중위생 및 보건행정을 연수시켰다. 윤유선은 이때 존스 홉킨스 대학의 공중보건과정에 선발되어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에 연수를 다녀왔다. 미국에서 연수 중에는 공중보건학을 배우고 특별히 성병예방 분야에도 관심을 가지고 수학하였다. 1947년 봄 수료와 동시에 귀국하였다.
1947년 공직에 올라 미군정청 보건후생부 성병과장(性病課長), 1948년 보건후생부 방역과장이 되었으며, 8월 15일 정부수립 후 보건부 의정국 방역과장으로 유임되었다. 그 해 보건부 의정국 만성병과장으로 전임되었다가 같은 해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 공중보건학교를 수료하였다.
2.2.2. 사회복지 보장제도 도입
그는 보건부 의정국장 재직 당시 대한민국 정부 차원에서 의료보험을 포함한 사회보장 제도를 도입할 것을 주장했고, 이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1959년 10월부터 그는 보건사회부 공무원들을 중심으로 매주 목요일 오후에 '의료보험제도 도입을 위한 연구회'를 열기 시작하였다. 손창달, 양재모(梁在謨), 엄장현(嚴章鉉) 등이 참석했고 참석자는 모두 8명이었다고 한다. 이 모임은 목요회라는 보건사회부 내의 연구모임으로 발전했다. 그의 목요회 연구에 자극을 받아 당시 보건사회부에서는 의료보험은 의정국에서, 실업 및 노동재해보험은 노동국에서, 공공부조는 사회국에서 각기 연구를 하기 시작하였다.
2.2.3. 전문의 제도 도입
1959년 윤유선은 국립보건원(현 국립보건연구원) 제2대 원장이 되었다. 이때 그는 전문의 제도의 도입을 주장, 1960년에 시행할 전문의 시험의 시행 방법을 결정하기 위하여 1959년 11월에 개최한 제1차 의료업자 전문과목표방허가 심의위원회의 위원이 되고, 곧 의료업자 전문과목표방허가 심의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63년에는 제1차 예방의학 전문의 시험에 합격하여 예방의학 전문의 1호 면허를 취득하였다.
2.3. 생애 후반
1963년 12월 16일 국립보건원 초대 원장에 임명되었다. 1965년 5월 3일, 1966년 12월 국립보건원 원장에 재임명되었다. 1969년 4월 29일 원장직을 사임하고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같은 해 7월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학장 및 대한나협회 회장에 추대되었다. 1971년 12월 한양대 의대 학장에서 정년퇴임하고 한양대 의대 예방의학교실 주임교수로 활동하였다.
1974년 한양대 예방의학교실 교수에서 퇴직하고 미국으로 이민, 1987년 시카고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