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순 (영화 녹음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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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경순은 1921년 평안북도 창성에서 태어난 대한민국의 영화 녹음기사이다. 1930년대 빅터축음기주식회사에서 음향 기술을 배우고, 해방 후 미군 부대 녹음실에서 일하며 영화계에 입문했다. 1962년 한양녹음실을 설립하여 1990년대 후반까지 한양스튜디오를 운영하며 많은 영화의 녹음을 담당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춘향전》, 《지옥화》, 《현해탄은 알고 있다》 등이 있으며, 대종상, 청룡영화상 등에서 여러 차례 수상했다. 2008년 폐암으로 별세했으며, 그의 아들 이영길도 한양스튜디오를 운영하며 영화 녹음 분야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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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이경순은 1921년 평안북도 창성에서 태어나 1934년 창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큰형이 운영하는 춘일악기점에서 축음기 관련 일을 도우며 소리와 인연을 맺었다.[4] 1935년 서울 빅터축음기주식회사에서 음향 지식을 쌓고, 1937년부터 현장 연수를 시작했다. 경성전기학교 야간부를 1941년 졸업하고, 약초영화극장에서 RCA 토키 장치 출장 서비스를 담당하며 조선영화주식회사 영화 녹음 현장을 견학하기도 했다.
해방 후 경성전기회사 통신계에서 일하던 중 주한 미군 502부대 녹음실에서 근무하며 뉴스영화 등을 제작했다. 전쟁 발발 후 주한미국공보원과 진해에서 활동하다 1951년 국방부 다큐멘터리 <정의의 진격> 녹음 시설 대여 요청이 거절되자 퇴직하고, 동료들과 영화협동제작소라는 녹음실을 개설했다.[5]
1962년 한양녹음실을 설립, 1969년 한양스튜디오로 개칭 후 1990년대 후반까지 영화녹음을 담당했다.[5] 2006년 자신의 영화기자재 500여 점을 안성문화원에 기증했고,[6][7][8] 이는 2008년 동아방송예술대학과의 기증 약정을 거쳐 2009년 이경순 소리박물관 개관으로 이어졌다.[9][10][11][12][13] 2008년 5월 22일 폐암으로 별세했으며,[14] 아들 이영길도 영화녹음기사로 활동했다.
2. 1. 어린 시절과 음향 기술과의 만남 (1921~1934)
이경순은 1921년 평안북도 창성에서 태어났다. 1934년 창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큰형이 운영하는 춘일악기점(자전거포 겸 악기점)에서 축음기와 유성기판, 라디오 보급 및 수리 등의 일을 도왔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소리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4]2. 2. 빅터축음기주식회사와 경성전기학교 시절 (1935~1941)
이경순은 1935년 서울의 빅터축음기주식회사 레코드부에서 각종 음향 시설에 대한 지식을 쌓았다.[4] 1937년 빅터축음기주식회사에서 본격적으로 현장 연수 생활을 시작했으며, 경성전기학교 야간부에 들어가 1941년 졸업했다. 이 무렵 스카라극장의 전신인 서울 약초극장에서 RCA 토키 장치의 출장 서비스를 담당하게 되었고, 빅터축음기주식회사에서 알게 된 최칠복을 따라 사단법인 조선영화주식회사의 영화 녹음 현장을 견학하기도 했다.2. 3. 해방 이후 영화계 투신과 좌절 (1945~1951)
1945년 해방 후 이경순은 경성전기회사 통신계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최칠복의 소개로 주한 미군 502부대 녹음실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는 이필우, 이명우, 김학성 등과 함께 뉴스영화 및 문화영화를 제작했다.[5] 전쟁이 발발하자 주한미국공보원과 함께 진해로 내려가 활동했는데, 1951년 국방부가 제작하던 다큐멘터리 <정의의 진격>의 녹음에 필요한 시설 대여 요청을 미공보원이 거절하자 이에 충격을 받고 퇴직했다.[5] 이후 조백봉, 김형근, 김봉수 등 함께 나온 동료들과 목욕탕을 개조해 영화협동제작소라는 녹음실을 만들었다.[5]2. 4. 영화협동제작소와 한양스튜디오 설립 (1951~1990년대 후반)
1951년 미공보원이 국방부가 제작하던 다큐멘터리 <정의의 진격>의 녹음을 위한 시설 대여 요청을 거절한 것에 충격을 받은 이경순은 퇴직 후 조백봉, 김형근, 김봉수 등 동료들과 함께 목욕탕을 개조해 영화협동제작소라는 녹음실을 개설했다.[5] 이 곳에서 손전의 <내가 넘은 삼팔선>(1951), 신상옥의 <악야>(1952), 정창화의 <최후의 유혹>(1953) 등 젊은 감독들의 데뷔작 녹음을 담당했다. 이후 이규환의 <춘향전>(1955), 홍성기의 <열애>(1955), <춘향전>(1961), 신상옥의 <지옥화>(1958), 김기영의 <현해탄은 알고 있다>(1961) 등 중요한 작품들에 참여했다.1962년에는 한양녹음실을 설립했고, 1969년 한양스튜디오로 개칭한 후 1990년대 후반까지 왕성하게 영화녹음을 담당했다.[5]
2. 5. 영화 기자재 기증과 이경순 소리박물관 개관 (2006~2009)
2006년 4월 18일 이경순은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마둔리에 위치한 자신의 '박물관'에 소장, 전시해오던 영화기자재 500여 점을 안성문화원에 기증하는 약정식을 가졌다.[6][7][8]이후 안성문화원은 자료를 좀 더 체계적으로 전시하고, 교육적인 가치와 활용도를 높일 목적으로 2008년 4월 동아방송예술대학과 이경순 영화관련 기자재 및 자료기증 약정을 체결하였으며, 동아방송예술대학은 종합촬영소 내에 기념관을 건립하기로 하고 2008년 11월 22일 DIMA종합촬영소[9] 및 이경순 소리박물관[10] 착공식을 갖고, 2009년 11월 11일에 이경순 소리박물관을 개관하였다. 현재 소리박물관에는 녹음기, 편집기, 영사기, 각종 대본, 영화관련 기자재, 상장, 트로피 등 이경순의 유품을 비롯하여 국내 영화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의미있는 전시품 2,0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11][12][13]
2. 6. 별세 (2008)
2008년 5월 22일 지병인 폐암으로 별세했다.[14] 슬하에 2남을 두었으며, 장남 이영길도 이경순의 뒤를 이어 한양스튜디오를 운영한 대한민국의 영화녹음기사이다.3. 주요 활동 및 업적
이경순은 1951년 영화협동제작소를 개설하여 여러 젊은 감독들의 데뷔작 녹음을 담당했다. 이규환, 홍성기, 신상옥, 김기영 등 유명 감독들의 주요 작품에 참여하며 한국 영화 녹음 기술 발전에 기여했으며, 서울시 문화상, 1984년 대한민국 보관문화훈장 등을 수여받으며 업적을 인정받았다.[15]
3. 1. 한양스튜디오와 한국 영화 녹음 기술 발전
1951년 영화협동제작소라는 녹음실을 개설한 후 손전의 <내가 넘은 삼팔선>(1951), 신상옥의 <악야>(1952), 정창화의 <최후의 유혹>(1953) 등 젊은 감독들의 데뷔작 녹음을 담당했다. 이후 이규환의 <춘향전>(1955), 홍성기의 <열애>(1955), <춘향전>(1961), 신상옥의 <지옥화>(1958), 김기영의 <현해탄은 알고 있다>(1961) 등 중요한 작품들에 참여했으며, 1962년에 한양녹음실을 설립했다. 1969년 한양스튜디오로 이름을 바꾼 자신의 녹음스튜디오를 통해 1990년대 후반까지 왕성하게 영화녹음을 담당했다.[15]3. 2. 주요 수상 내역
4. 작품 목록
이경순은 1951년 영화협동제작소라는 녹음실을 개설하여 손전의 〈내가 넘은 삼팔선〉(1951), 신상옥의 〈악야〉(1952), 정창화의 〈최후의 유혹〉(1953) 등 젊은 감독들의 데뷔작 녹음을 담당했다. 이후 이규환의 〈춘향전〉(1955), 홍성기의 〈열애〉(1955), 〈춘향전〉(1961), 신상옥의 〈지옥화〉(1958), 김기영의 〈현해탄은 알고 있다〉(1961) 등 중요한 작품들에 참여했다. 1962년에는 한양녹음실을 설립했고, 1969년 한양스튜디오로 개칭하여 1990년대 후반까지 왕성하게 영화녹음을 담당했다.[15]
4. 1. 동시녹음 작품
1951년 영화협동제작소라는 녹음실을 개설한 후 손전의 〈내가 넘은 삼팔선〉(1951), 신상옥의 〈악야〉(1952), 정창화의 〈최후의 유혹〉(1953) 등 젊은 감독들의 데뷔작 녹음을 담당했다. 이후 이규환의 〈춘향전〉(1955), 홍성기의 〈열애〉(1955), 〈춘향전〉(1961), 신상옥의 〈지옥화〉(1958), 김기영의 〈현해탄은 알고 있다〉(1961) 등 중요한 작품들에 참여했으며, 1962년에 한양녹음실을 설립했다. 1969년에 한양스튜디오로 개칭한 자신의 녹음스튜디오를 통해 1990년대 후반까지 왕성하게 영화녹음을 담당했다.[15]4. 2. 사운드(음향) 담당 작품
5. 가족 관계
6. 학력
- 창성고등보통학교
- 경성전기학교
참조
[1]
웹사이트
한국영화 데이터베이스 이경순
http://www.kmdb.or.k[...]
[2]
뉴스
소리의 藝術家 李敬淳씨
https://newslibrary.[...]
동아일보
1962-12-01
[3]
웹인용
"마이크 하나로 대사, 음악, 효과음을 한꺼번에 녹음했어”"
http://www.cine21.co[...]
2017-05-19
[4]
웹사이트
씨네21 50년대에서 90년대까지 한국영화 80% 녹음한 한양스튜디오 창립자인 초대 녹음기사 - 이경순
http://www.cine21.co[...]
[5]
웹사이트
한국영화 데이터베이스 이경순
http://www.kmdb.or.k[...]
[6]
웹인용
영화음향의 산증인 이경순씨, 안성시에 장비·자료 1000점 기증
http://www.chosun.co[...]
2015-05-27
[7]
웹사이트
영화인 이경순 옹, 기자재·소품 500여 점 기증
http://www.assm.co.k[...]
[8]
웹사이트
영화 유산 500여점 기증
http://www.kgnews.co[...]
[9]
웹사이트
DIMA종합촬영소
http://www.dimastudi[...]
[10]
웹인용
소리박물관
http://www.dimastudi[...]
2015-05-27
[11]
웹인용
동아방송예술대학 소리박물관
http://www.dimastudi[...]
2015-05-27
[12]
웹인용
이경순 소리박물관
http://tour.anseong.[...]
2015-05-27
[13]
웹사이트
한국관광공사 경기도 안성시 이경순 소리박물관
http://korean.visitk[...]
[14]
웹사이트
'영화 녹음분야 개척자' 이경순 前한양스튜디오 대표 별세
http://media.daum.ne[...]
[15]
웹사이트
우리나라 ‘녹음 1세대’, 영화녹음의 개척자 이경순
http://www.newsmaker[...]
[16]
웹사이트
한국영화 데이터베이스 이경순 수상정보
http://www.kmdb.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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