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게 히로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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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시게 히로미치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지도자이다. 고마자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 야구팀 프린스 호텔을 거쳐 1981년 세이부 라이온스에 입단하여 유격수와 3루수로 활약하며 신인왕, MVP, 베스트 나인, 골든 글러브상 등을 수상했다. 1988년 일본 시리즈 MVP를 차지했으며, 통산 200홈런-200도루-200희생타를 기록했다. 1995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 이적 후 1996년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코치, 다이에 2군 감독, 야구 해설위원, 오릭스 블루웨이브 감독을 역임했으며, 시코쿠 아일랜드 리그 설립 및 운영에 참여했다. 현재는 야구 해설가 및 조사이 국제대학 객원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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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게 히로미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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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정보 | |
이름 | 이시게 히로미치 |
원어 이름 | 石毛 宏典 |
로마자 표기 | Hiromichi Ishige |
가나 | いしげ ひろみち |
한자 | 石毛 宏典 |
한국어 표기 | 이시게 히로미치 |
출생일 | 1956년 9월 22일 |
출생지 | 지바현 아사히시 |
신장 | 180 |
체중 | 75 |
포지션 | 내야수 |
타석 | 우타 |
투구 | 우투 |
프로 입단 년도 | 1980년 |
드래프트 순위 | 1순위 |
첫 출장 | 1981년 4월 4일 |
마지막 출장 | 1996년 7월 28일 |
선수 경력 | |
아마추어 | 프린스 호텔 |
프로 | 세이부 라이온스 (1981–1994)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995–1996) |
지도자 경력 | |
감독 및 코치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998) 오릭스 블루웨이브 (2002–2003) 지바 쇼카 대학 부속 고등학교 |
기록 | |
타율 | .283 |
홈런 | 236 |
안타 | 1,833 |
수상 | |
신인왕 | 1981년 퍼시픽 리그 신인왕 |
MVP | 1986년 퍼시픽 리그 MVP |
유튜브 채널 정보 | |
채널 URL | 石毛宏典TV |
활동 기간 | 2020년 7월 15일 - |
장르 | 야구 |
구독자 수 | 9.87만 명 |
조회수 | 35,133,102회 |
네트워크 | ZAK |
통계 업데이트 | 2022년 7월 26일 |
2. 선수 시절
지바현 아사히시 출신으로 조시 시립 조시 고등학교, 고마자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 야구팀인 프린스 호텔을 거쳤다. 1980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세이부 라이온스와 한큐 브레이브스로부터 1순위 지명을 받았고, 세이부가 교섭권을 얻어 입단했다. 아버지로부터 프로 입단 권유를 받고 세이부 그룹의 세이부 라이온스에 지명되면 가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1981년, 신인으로 개막전에 유격수로 선발 출전하여 롯데 오리온스의 오치아이 히로미쓰와 수위타자 타이틀 경쟁을 벌였다. 타율 .311(리그 7위), 21홈런을 기록하며 나가시마 시게오 이후 신인 타자로서 규정 타석을 채우고 타율 3할을 달성, 퍼시픽 리그 신인왕을 차지했다.
1985년 일본 시리즈 3차전 수비 도중 좌익수 가나모리 에이지와 충돌하여 무릎 인대가 크게 손상되었다. 이 부상으로 유격수 수명이 크게 줄었다고 한다.[7][8] 1987년에는 무릎 부상과 팀 사정으로 유격수에서 3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골든 글러브상을 자주 수상했으며, 통산 200홈런, 200도루, 200희생타를 기록하며 주력, 공격, 수비를 모두 갖춘 선수였다. 이시게의 입단과 함께 세이부 라이온스가 황금 시대를 맞이했는데, 팀에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 ‘미스터 레오’(ミスターレオ일본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1994년 시즌 후 모리 마사아키 감독의 후임 감독 요청을 받았지만, 2,000안타 달성 등의 이유로 거절했다. 이후 FA권을 행사하여 1995년에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 이적했고, 1996년 시즌 후 은퇴를 선언했다.
2. 1. 프로 입단 전
지바현 아사히시 출신으로 조시 시립 조시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74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롯데 오리온스로부터 6순위 지명을 받았지만 입단을 거부했다. 그 후 고마자와 대학에 진학하여 도토대학 리그 통산 107경기에 출전해 378타수 114안타, 타율 3할 2리, 7홈런, 57타점을 기록했고 베스트 나인 6회 수상, 4학년 때인 추계 리그에서 수위타자를 차지했다. 통산 114안타는 후지나미 유키오의 133안타, 다카기 유타카의 115안타에 뒤를 이은 리그 3위의 기록이었다.이 시점에서 프로팀 입단에 대한 의지는 없었고 처음에는 교사를 목표로 하고 있었지만 야구와 교직 과정 습득의 병행은 무리라고 판단해 사회인 야구팀에 들어가고 장래에는 고마자와 대학의 야구부 감독이 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야구를 하면서 평상시의 수업은 물론이고 입학식과 졸업식에도 참석할 수는 없었지만 시험을 앞둔 10일간에 주어지는 공부 시간으로 동급생의 도움을 얻는 등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졸업 후 사회인 야구팀인 프린스 호텔을 거쳐 1980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세이부 라이온스와 한큐 브레이브스로부터 1순위 지명을 받았고 세이부가 교섭권을 얻어 입단했다. 드래프트 지명을 앞두고 부친으로부터 “너에게는 다소 대학에 돈을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프로 팀에 가서도 계약금을 받고 조금은 보답해라”라고 말하면서 프로 입단 권유를 받고 “(프린스 호텔과 같은) 세이부 그룹의 세이부 라이온스에 지명되면 가겠다”라고 대답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조시 시립 조시 고등학교에서는 1번 타자, 유격수로서 활약했고, 3학년 때인 1974년 여름 고시엔 예선 지바 대회에서 결승에 진출했다.[1] 그러나 에이스 쓰치야 마사카쓰, 4번 타자 시노즈카 도시오를 보유한 조시 상업 고등학교에 완봉패하여, 고시엔 출전을 놓쳤다.[1] 1년 후배 팀 동료에는 조시 요지(와세다)와 엔도 노부히사 두 투수가 있었다.[1] 같은 해의 드래프트 회의에서 롯데 오리온스로부터 6순위 지명을 받았지만, 입단을 거부하고 진학을 공언했다.[1]
고마자와 대학에 진학하여 도토 대학 야구 리그에서는 3학년까지 5번 우승을 경험했다.[1] 1977년의 전일본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는 결승에서 하라 다쓰노리가 있던 도카이 대학을 연장 10회 끝에 꺾고 우승했다.[1] 4학년 때는 주장을 맡았지만, 오토 후쿠시게, 와타나베 가즈하루 등 공수의 주력이 졸업하면서, 1978년 춘계 리그에서는 갑자기 최하위로 떨어졌다.[1] 니혼 대학과의 승강전에서는 투수가 부족하여, 급히 이시게가 등판하여 승리 투수가 되었다.[1] 같은 해 추계 리그도 4위로 부진했지만, 이시게는 수위 타자를 획득했고, 대학 통산 107경기 출장, 378타수 114안타, 타율 .302, 7홈런, 57타점, 베스트 나인 6회를 기록했다.[1] 통산 114안타는 후지나미 유키오의 133안타, 다카기 유타카의 115안타에 이은 리그 3위이며, 1976년부터 2년 연속으로 미일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 일본 대표로 선출되었다.[1] 고마자와 대학에는 2학년 선배로 모리 시게카즈·오미야 다쓰오, 3학년 선배로 나카하타 기요시·니노미야 사토시·히라타 가오루가 있었다.[1]
대학 졸업 후에는 프린스 호텔에 입사했다.[2] 팀 동료로는 스미토모 가즈야, 나카오 다카요시, 가나모리 에이지 등이 있었다.[2] 1979년의 제50회 도시 대항에 도시바 후추의 보강 선수로 출장하여 첫 경기 첫 타석에서 홈런을 치는 등 활약했지만, 준준결승에서 나카오가 보강되어 있던 구마가이구미에 패했다.[2] 같은 해 제4회 인터 컨티넨탈 컵 일본 대표로 선출되어 일본의 준우승에 기여했다.[2] 1980년에는 프린스 호텔로서는 처음으로 제51회 도시 대항에 출장했지만, 2회전에서 신일본제철 가마이시에 연장 13회 끝에 패퇴했다.[2] 같은 해 제26회 아마추어 야구 세계 선수권 일본 대표로도 선출되었다.[2]
2. 2. 세이부 라이온스 시절 (1981년 ~ 1994년)
고마자와 대학 졸업 후 사회인 야구팀인 프린스 호텔을 거쳐 1980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세이부 라이온스와 한큐 브레이브스로부터 1순위 지명을 받았고 세이부가 교섭권을 얻어 입단했다.[5] 드래프트 지명을 앞두고 부친으로부터 프로 입단 권유를 받고 세이부 그룹의 세이부 라이온스에 지명되면 가겠다고 대답을 주고받았다고 한다.1981년에는 신인으로서 개막전에 유격수로 선발 출전하여 롯데 오리온스의 오치아이 히로미쓰와 수위타자 타이틀을 놓고 경쟁하는 등 맹활약했다. 같은 해 타율 .311(리그 7위), 21홈런을 기록하며 나가시마 시게오 이후 신인 타자로서 규정 타석을 채우고 타율 3할을 달성, 퍼시픽 리그 신인왕을 차지했다.
1982년 세이부 감독으로 취임한 히로오카 타츠로에게 춘계 캠프에서 "너, 그걸로 신인왕을 땄냐?"는 도발을 받았다. 히로오카는 이시게의 타격 능력은 인정했지만, 좀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해 일부러 도발했다고 회고했다.[6] 처음에는 반발했지만, 히로오카가 라이벌 선수들을 가르치는 모습을 보고 가르침을 청하게 되었다.[6] 이후 세이부의 팀 리더로서 활약하며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1983년 일본 시리즈 6차전에서 1점 뒤진 9회말 1사 만루에서 동점 적시타를 때려냈다.
1985년에는 1번 유격수로 출전하여 타율 .280, 27홈런, 76타점으로 팀의 리그 우승에 공헌했다. 그러나 한신 타이거스와의 일본 시리즈 3차전 수비 도중 좌익수 가나모리 에이지와 충돌하여 무릎 인대가 크게 손상되었다. 남은 경기를 강행 출전했지만, 이 부상으로 유격수 수명이 크게 줄었다고 한다.[7][8]
1986년에는 타율 .329(리그 5위), 27홈런, 89타점으로 2년 연속 리그 우승과 3년 만의 일본 시리즈 제패에 기여했다. 그 해 타격 3관왕을 차지한 오치아이 히로미쓰와 고졸 신인 기록을 연거푸 경신한 기요하라 가즈히로 등을 제치고 퍼시픽 리그 MVP를 차지했다.
1987년에는 무릎 부상과 팀 사정으로 유격수에서 3루수로 변환되었지만, 일본 시리즈에서는 지명타자를 채택할 수 없는 경우도 있어 가끔 유격수를 지키는 경우가 있었다.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1988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5경기에 모두 유격수로 출전, 1차전에서 오노 가즈유키에게서 솔로 홈런, 3차전에서 야마모토 마사히로에게서 솔로 홈런과 적시타, 5차전에서는 1회 오노에게서 적시 2루타, 9회말 가쿠 겐지에게서 동점 홈런을 치는 등 맹활약하여 일본 시리즈 MVP를 차지했다. 그 해 퍼시픽 리그 야수 최초로 1억엔 선수가 되었다.
1991년 히로시마와의 1991년 일본 시리즈 1차전 4회에 기토 마코토에게서 만루 홈런을 날렸다.
현역 시절 전반에는 주로 1번 타자로 활약했지만, 쓰지 하쓰히코의 성장과 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의 입단으로 인해 현역 후반에는 3번이나 6번 타순을 맡게 되었다. 골든 글러브상을 자주 수상했으며, 통산 200홈런을 기록하면서 200도루와 200희생타를 기록할 정도로 주력, 공격, 수비를 모두 갖춘 선수였다. 이시게의 입단과 함께 세이부 라이온스가 황금 시대를 맞이한 시기도 있었는데, 그 상징으로서 팀에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 ‘미스터 레오’(ミスターレオ일본어)라는 별명이 붙여지기도 했다.
1993년 타율 .306(리그 3위)를 기록했지만, 1994년에는 같은 3루수인 마이크 파그리아루로가 입단했다. 이시게는 111경기 101안타, 파그리아루로는 80경기 75안타를 기록했다.[9] 요미우리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12타수 1안타에 그쳤고, 팀은 2승 4패로 패했다. 시즌 종료 후, 감독직에서 사임한 모리 마사아키의 후임 감독 요청을 받았지만, 2,000안타 달성 등의 이유를 들어 거절했다.
2. 3.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시절 (1995년 ~ 1996년)
1994년 시즌 후, 모리 마사아키 감독이 사임하면서 감독직을 제안받았지만, 이를 거절하고 FA권을 행사하여 1995년에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 이적했다. 같은 해, 구도 기미야스도 FA로 호크스에 이적하여, 같은 팀의 두 선수가 다른 동일 구단으로 같은 해에 FA 이적한 사상 첫 사례가 되었다.1995년에는 부상으로 인해 타율 2할, 홈런 1개, 11타점으로 자신의 최저 성적을 기록했다. 신인 시절부터 14년간 이어져 온 연간 100경기 출전, 연간 100안타, 규정 타석 기록이 중단되었고, 올스타전 연속 출전 횟수도 14회에서 멈췄다. 시즌 후에는 연봉이 50% 삭감된 1억 엔(추정)으로 계약을 갱신했다.
1996년에는 출전 기회가 더욱 줄어들었고, 시즌 후 전력 구상에서 제외되어 10월 9일에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3. 은퇴 이후
2004년, 이시게 히로미치는 IBLJ를 설립하고 대표 이사로 취임하여 시코쿠 아일랜드 리그(현 시코쿠 아일랜드 리그 플러스)를 설립했다. 2007년 IBLJ 대표 이사에서 물러나 커미셔너를 맡았으나, 계약 만료와 함께 리그 운영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다만 IBLJ 설립 당시부터 주요 주주 명단에는 계속 이름을 올리고 있다. 커미셔너 퇴임은 리그 측에서 계약을 갱신하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라고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밝혔다.[24]
2008년 1월, 에히메 만다린 파이레이츠 시니어 팀 어드바이저로 취임했지만, 이후 퇴임했다. 같은 해 3월 간사이 독립 리그 구상을 발표했고, 2009년 리그 출범과 함께 최고 고문을 맡았다. 그러나 리그 운영 회사와 구단 간 분배금 미지급 문제가 발생하면서 리그 운영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는 보도가 나왔고, 결국 최고 고문직을 사임했다. 이시게는 "광고탑 같은 느낌"이었다고 말하며, "설립 전 단계에서는 여러 가지 일을 했지만, 감사 인사나 보고, 상담도 없다가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는 말을 듣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악인 취급을 받더라도 독립 리그가 널리 퍼지면 좋겠다"는 바람을 드러냈다.[25]
3. 1. 지도자 경력
이시게 히로미치는 지도자로서 다양한 팀과 리그에서 활동했다.1997년에는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 구단 직원 신분으로 코치 유학을 갔다. 2월에 가족과 함께 도미하여 다저스 산하 마이너 구단에 소속되었고, 4월과 5월에는 메이저 리그 다저스에 동행했다.[10] 노모 히데오와도 가까이 지냈으며, 6월부터는 마이너 3A, 2A, 1A를 돌아다니며, 2A에서는 실제로 타격 지도를 하기도 했다.[10] 시즌 종료 후에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야구 아카데미도 견학하며, "마이너 리그에서 코치를 하지 않겠는가?"라는 제안을 받기도 했다.[10]
2004년, IBLJ를 설립하여 대표 이사에 취임하고, 시코쿠 아일랜드 리그(현 시코쿠 아일랜드 리그 플러스)를 설립했다. 오릭스 감독 해임 후 IBLJ 설립을 떠올린 것에 대해 "3년 계약이었고, 남은 1년 8개월 치 급여는 받을 수 있었다. 어차피 거저 생긴 돈이니 활동 자금이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24]
2007년 3월 10일, IBLJ 대표 이사에서 물러나 커미셔너 전임이 되었고, 12월 31일 계약 만료와 함께 리그 운영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커미셔너 퇴임에 대해, 자신의 블로그에서 "스스로 말한 것이 아니라, 리그 측에서 계약 갱신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2008년 1월, 에히메 만다린 파이레이츠의 시니어 팀 어드바이저에 취임했다(이후 퇴임).
2008년 3월에는 간사이 독립 리그의 구상을 표명했고, 2009년에 간사이 독립 리그 발족 후 최고 고문에 취임했다. 그러나, 같은 해 5월에 발각된 리그에서 구단으로의 분배금 미지급 문제와 관련하여, 리그 발족 후에는 거의 운영에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보도되었다. 리그 운영에서 철수한 주식회사 스텔라를 대신하는 운영 회사의 대표로 취임한 기무라 다케시는 5월 28일에 열린 회의 후 기자 회견에서 "(이시게와의) 관계는 정리되었다고 생각해주시면 된다"고 발언하여, 신 회사 발족 후의 리그 운영에 이시게가 관여하지 않음을 시사했고, 이시게는 최고 고문을 사임했다. 이에 대해 이시게는 "나는 (리그의) 광고탑 같은 느낌으로 참여했다", "(최고 고문인데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는 각 구단의 목소리에) 설립 전 단계에서 여러 가지 일을 했는데, 지금까지 감사 인사도 없고 보고도 상담도 없다가, 이렇게 되고 나서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는 한편, "내가 악인 취급을 받더라도, 존속하여 (독립 리그가) 널리 퍼지면 좋겠다"고도 말했다.[25]
2009년, 세이부 라이온즈가 주최하는 '라이온즈・클래식 2009'의 에그제큐티브 프로듀서로 취임했다. 9월 1일부로, 지바현에 본부를 둔 조사이 국제 대학교의 객원 교수로 취임했다.
2013년에는 FOX SPORTS 재팬에서 프로 야구 중계·정보 프로그램 '베이스볼 센터'의 분석가(전속 해설자)로 취임했다.
2014년 6월 1일부터는 고마자와 대학 시절의 2년 선배인 소메야 키이치가 감독을 맡고 있는 지바 상과대학 부속 고등학교 경식 야구부에서 비상근 테크니컬 어드바이저로서 부원들을 수시로 지도하고 있다. NPB 구단 감독 경험자가 모교 이외의 고등학교에서 본격적으로 야구를 지도하는 것은 이시게가 처음이다.
야구 해설자로서, 2018년부터 세이부 OB로서 분카 방송에 게스트 출연하는 외, 2020년부터는 본수 계약으로 TV 사이타마의 프로 야구 중계에 출연하고 있다.
3. 2. 독립 리그 설립 및 운영
2004년, IBLJ를 설립하여 대표 이사에 취임하고, 시코쿠 아일랜드 리그(현 시코쿠 아일랜드 리그 플러스)를 설립했다. 오릭스 감독 해임 후 IBLJ 설립을 떠올린 것에 대해 "3년 계약이었고, 남은 1년 8개월 치 급여는 받을 수 있었다. 어차피 거저 생긴 돈이니 활동 자금이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24]2007년 3월 10일, IBLJ 대표 이사에서 물러나 커미셔너 전임이 되었고, 12월 31일 계약 만료와 함께 리그 운영에서 완전히 철수했지만, 동사 설립 당시(단독으로 전액 출자)부터 현재까지 주요 주주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커미셔너 퇴임에 대해, 자신의 블로그에서 "스스로 말한 것이 아니라, 리그 측에서 계약 갱신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2008년 1월, 에히메 만다린 파이레이츠의 시니어 팀 어드바이저에 취임했다(이후 퇴임).
2008년 3월에는 간사이 독립 리그의 구상을 표명했고, 2009년에 간사이 독립 리그 발족 후 최고 고문에 취임했다. 그러나, 같은 해 5월에 발각된 리그에서 구단으로의 분배금 미지급 문제와 관련하여, 리그 발족 후에는 거의 운영에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보도되었다. 리그 운영에서 철수한 주식회사 스텔라를 대신하는 운영 회사의 대표로 취임한 기무라 다케시는 5월 28일에 열린 회의 후 기자 회견에서 "(이시게와의) 관계는 정리되었다고 생각해주시면 된다"고 발언하여, 신 회사 발족 후의 리그 운영에 이시게가 관여하지 않음을 시사했고, 이시게는 최고 고문을 사임했다. 이에 대해 이시게는 "나는 (리그의) 광고탑 같은 느낌(으로 참여했다)", "(최고 고문인데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는 각 구단의 목소리에) 설립 전 단계에서 여러 가지 일을 했는데, 지금까지 감사 인사도 없고 보고도 상담도 없다가, 이렇게 되고 나서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는 한편, "내가 악인 취급을 받더라도, 존속하여 (독립 리그가) 널리 퍼지면 좋겠다"고도 말했다.[25]
3. 3. 야구 해설가 및 기타 활동
石毛 宏典|이시게 히로미치일본어는 1999년부터 2001년까지 일본방송협회(NHK)와 스포츠 닛폰에서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5] 2004년에는 IBLJ를 설립하여 대표 이사에 취임하고, 시코쿠 아일랜드 리그(현 시코쿠 아일랜드 리그 플러스)를 설립했다.[24]2007년 3월 10일, IBLJ 대표 이사에서 물러나 커미셔너가 되었고, 같은 해 12월 31일 계약 만료와 함께 리그 운영에서 완전히 철수했다.[24] 2008년 1월, 에히메 만다린 파이레이츠의 시니어 팀 어드바이저에 취임했으나 이후 퇴임했다.[24]
2008년 3월에는 간사이 독립 리그 구상을 표명했고, 2009년에 간사이 독립 리그가 발족된 후 최고 고문에 취임했다. 그러나 같은 해 5월, 리그에서 구단으로의 분배금 미지급 문제가 발생했고, 이시게는 리그 발족 후 운영에 거의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보도되었다. 이후 이시게는 최고 고문에서 사임했다.[25]
4. 수상 및 타이틀 경력
- 신인왕 (1981년)
- MVP : 1회 (1986년)
- 베스트 나인 : 8회 (유격수 = 1981년 ~ 1983년, 1985년 ~ 1986년, 3루수 = 1987년, 1992년 ~ 1993년)[31] ※ 복수 부문에 걸쳐 8회 수상은 퍼시픽 리그 최다
- 골든 글러브상 : 10회 (유격수 = 1981년 ~ 1983년, 1985년 ~ 1986년, 3루수 = 1987년 ~ 1988년, 1991년 ~ 1993년)[32] ※ 복수 부문에 걸쳐 10회 수상은 역대 최다 타이기록 (다른 한 명은 미야모토 신야), 퍼시픽 리그 최다
- 월간 MVP : 3회 (1981년 6월, 1986년 6월, 1986년 8월)
- 일본 시리즈 MVP : 1회 (1988년)
- 일본 시리즈 감투상 : 1회 (1985년)
-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상 : 3회 (1986년, 1987년, 1992년)
- 올스타전 MVP : 1회 (1987년 제2전)
5. 개인 기록
이시게 히로미치는 1981년 세이부 라이온즈에 입단하여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신인 시절부터 뛰어난 활약을 펼쳐 신인왕을 수상했고, 이후 팀의 주축 선수로 성장하여 여러 차례 골든 글러브상과 베스트 나인을 수상했다.
'''주요 기록'''
상 | 수상 연도 | 비고 |
---|---|---|
최우수 선수 | 1986년 | |
신인왕 | 1981년 | |
베스트 나인 | 1981년 - 1983년, 1985년 - 1986년 (유격수) 1987년, 1992년 - 1993년 (3루수) | 복수 부문 8회 수상 (퍼시픽 리그 최다) |
골든 글러브상 | 1981년 - 1983년, 1985년 - 1986년 (유격수) 1987년 - 1988년, 1991년 - 1993년 (3루수) | 복수 부문 10회 수상 (역대 최다 타이, 퍼시픽 리그 최다) |
월간 MVP | 1981년 6월, 1986년 6월, 1986년 8월 | |
일본 시리즈 MVP | 1988년 | |
일본 시리즈 감투상 | 1985년 | |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상 | 1986년, 1987년, 1992년 | |
올스타전 MVP | 1987년 제2전 |
'''통산 타격 성적'''
연도 | 소속팀 | 경기 | 타수 | 안타 | 홈런 | 타점 | 도루 | 타율 |
---|---|---|---|---|---|---|---|---|
1981 | 세이부 | 121 | 409 | 127 | 21 | 55 | 25 | .311 |
1982 | 124 | 464 | 120 | 15 | 54 | 22 | .259 | |
1983 | 128 | 439 | 133 | 16 | 64 | 29 | .303 | |
1984 | 124 | 452 | 117 | 26 | 71 | 26 | .259 | |
1985 | 130 | 504 | 141 | 27 | 76 | 11 | .280 | |
1986 | 129 | 514 | 169 | 27 | 89 | 19 | .329 | |
1987 | 130 | 525 | 141 | 11 | 41 | 14 | .269 | |
1988 | 130 | 508 | 144 | 21 | 63 | 22 | .283 | |
1989 | 130 | 486 | 131 | 16 | 63 | 28 | .270 | |
1990 | 100 | 359 | 107 | 8 | 47 | 7 | .298 | |
1991 | 122 | 417 | 112 | 13 | 61 | 8 | .269 | |
1992 | 125 | 438 | 130 | 8 | 52 | 11 | .297 | |
1993 | 122 | 434 | 133 | 15 | 53 | 12 | .306 | |
1994 | 111 | 380 | 101 | 11 | 46 | 8 | .266 | |
1995 | 다이에 | 52 | 120 | 24 | 1 | 11 | 0 | .200 |
1996 | 18 | 23 | 3 | 0 | 1 | 1 | .130 | |
통산 | 1796 | 6472 | 1833 | 236 | 847 | 243 | .283 |
5. 1. 첫 기록
- 첫 출장 · 첫 선발 출장: 1981年|1981년일본어 4월 4일, 대 롯데 오리온스 1차전 (가와사키 구장), 1번 · 유격수로 선발 출장[5]
- 첫 타석 · 첫 안타: 같은 날, 1회 초에 무라타 쵸지를 상대로 중전 안타[5]
- 첫 도루: 같은 날, 1회 초에 2루 도루 (투수: 무라타 쵸지, 포수: 도이 겐지)[5]
- 첫 홈런 · 첫 타점: 같은 날, 5회 초에 무라타 쵸지를 상대로 우월 솔로[5]
5. 2. 기타
6. 출신 학교
이시게 히로미치의 출신 학교에 대한 정보는 주어진 원본 자료에 나타나 있지 않다.
7. 선수 경력
이시게 히로미치는 1981년 세이부 라이온스에 입단하여 프로 선수 경력을 시작했다. 신인으로 개막전에 유격수로 선발 출전하여 롯데 오리온스의 오치아이 히로미쓰와 수위 타자 경쟁을 벌이는 등 맹활약하며 그해 신인왕을 차지했다.[5]
이후 세이부의 중심 타자로 활약하며, 1983년 일본 시리즈 6차전에서 1점 차로 지고 있을 때 동점 적시타를 때려냈다. 1986년에는 MVP를 차지했고, 1988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5차전에서 9회말 동점 홈런을 기록하는 등 활약하여 일본 시리즈 MVP를 차지했다. 그해 퍼시픽 리그 야수 최초로 1억 엔 선수가 되었다.
현역 시절 전반에는 주로 1번 타자로 활약했지만, 쓰지 하쓰히코의 성장과 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의 입단 등으로 현역 후반에는 6번 타순을 맡았다. 골든 글러브상을 자주 수상했으며, 통산 200홈런, 200도루, 200희생타를 기록하는 등 주력, 공격, 수비를 겸비한 선수였다. 이시게의 입단과 함께 세이부는 황금 시대를 맞이했고, 팀에 대한 헌신적인 모습으로 '미스터 레오'(ミスターレオ일본어)라는 별명이 붙었다.
1994년 시즌 후 모리 마사아키 감독의 후임 감독 제의를 거절하고 FA권을 행사하여 1995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 이적했다. 이듬해 1996년에 16년간의 현역 생활을 은퇴했다.
7. 1. 사회인 시대
지바현 아사히시 출신으로 조시 시립 조시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74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롯데 오리온스로부터 6순위 지명을 받았지만 입단을 거부했다. 이후 고마자와 대학에 진학하여 도토 대학 야구 리그 통산 107경기에 출전해 378타수 114안타, 타율 3할 2리, 7홈런, 57타점을 기록했고 베스트 나인에 6회 선정되었으며, 4학년 때인 추계 리그에서 수위타자를 차지했다. 통산 114안타는 후지나미 유키오의 133안타, 다카기 유타카의 115안타에 뒤를 이은 리그 3위의 기록이었다.이 시점에서 이시게는 프로팀 입단에 대한 의지가 없었고 처음에는 교사를 목표로 하고 있었지만, 야구와 교직 과정 습득을 병행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여 사회인 야구팀에 들어가고 장래에는 고마자와 대학 야구부 감독이 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야구를 하면서 평상시의 수업은 물론이고 입학식과 졸업식에도 참석할 수는 없었지만, 시험을 앞둔 10일간 주어지는 공부 시간을 활용해 동급생의 도움을 얻는 등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졸업 후 사회인 야구팀인 프린스 호텔을 거쳐 1980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세이부 라이온스와 한큐 브레이브스로부터 1순위 지명을 받았고, 세이부가 교섭권을 얻어 입단했다. 드래프트 지명을 앞두고 부친으로부터 "너에게는 다소 대학에 돈을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프로 팀에 가서도 계약금을 받고 조금은 보답해라"라는 말을 들으며 프로 입단을 권유받았고, "(프린스 호텔과 같은) 세이부 그룹의 세이부 라이온스에 지명되면 가겠다"라고 대답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7. 2. 프로팀 경력
1980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세이부 라이온스와 한큐 브레이브스로부터 1순위 지명을 받았고, 세이부가 교섭권을 얻어 입단했다.[5] 드래프트 지명을 앞두고 부친으로부터 프로 입단 권유를 받았고, 세이부 그룹의 세이부 라이온스에 지명되면 입단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1981년, 신인으로 개막전에 유격수로 선발 출전하여 롯데 오리온스의 오치아이 히로미쓰와 수위 타자 경쟁을 펼치는 등 맹활약했다. 나가시마 시게오 이후 신인 타자로서 규정 타석을 채우고 타율 3할(.311, 리그 7위)과 21홈런을 기록, 신인왕을 차지했다.
1982년, 세이부의 히로오카 타츠로 감독은 춘계 캠프에서 이시게에게 "너, 그걸로 신인왕을 땄냐?"라며 도발했다. 히로오카는 이시게의 타격 능력은 인정했지만, 더 발전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일부러 자극한 것이었다. 또한, 당시 "센트럴 리그의 하라 다쓰노리냐 퍼시픽 리그의 이시게냐"라는 이야기가 있었기에, 히로오카는 이시게에게 "지금 인기는 하라가 위지만, 실력으로는 이길 수 없다. 더 공부하라"고 말했다고 회고했다.[6]
처음에는 반발했지만, 히로오카가 라이벌 선수들을 가르치는 모습을 보고 이시게는 히로오카에게 가르침을 청했다.[6] 이후, 이시게는 세이부의 팀 리더로서 1983년 일본 시리즈 6차전에서 1점 뒤진 9회말 1사 만루에서 동점타를 치는 등 활약했다.
1985년, 시즌 내내 1번 유격수로 출전하여 타율 .280, 27홈런, 76타점을 기록하며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그러나 한신 타이거스와의 일본 시리즈 3차전 수비 도중 가나모리 에이지와 충돌하여 무릎 인대가 크게 손상되었다. 이 부상으로 유격수 수명이 단축되었다고 한다.[7][8]
1986년, 모리 마사아키 감독 체제에서 타율 .329(리그 5위), 27홈런, 89타점을 기록, 2년 연속 리그 우승과 3년 만의 일본 시리즈 제패에 공헌했다. 2년 연속 타격 3관왕을 차지한 오치아이 히로미쓰와 고졸 신인 기록을 경신한 기요하라 가즈히로를 제치고 퍼시픽 리그 MVP를 차지했다.
1987년, 무릎 부상과 팀 사정으로 3루수로 전향했지만, 1987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지명타자를 사용할 수 없는 경우도 있어 유격수를 맡기도 했다.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1988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전 경기에 유격수로 출전, 5차전에서 9회말 가쿠 겐지로부터 동점 홈런을 치는 등 활약하며 일본 시리즈 MVP를 차지했다. 그 해 퍼시픽 리그 야수 최초로 1억엔 선수가 되었다.
1991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1991년 일본 시리즈 1차전에서 기토 마코토로부터 만루 홈런을 쳤다.
현역 시절 전반에는 주로 1번 타자로 활약했지만, 쓰지 하쓰히코의 성장, 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의 입단 등으로 현역 후반에는 6번 타순을 맡았다. 골든 글러브상을 자주 수상했으며, 통산 200홈런, 200도루, 200희생타를 기록하는 등 주력, 공격, 수비를 겸비한 선수였다. 이시게의 입단과 함께 세이부는 황금 시대를 맞이했고, 팀에 대한 헌신적인 모습으로 '미스터 레오'(ミスターレオ일본어)라는 별명이 붙었다.
1993년 타율 .306(리그 3위)를 기록했지만, 1994년 마이크 파그리아루로의 입단으로 출전 기회가 줄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1994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12타수 1안타에 그쳤다. 시즌 후, 모리 마사아키 감독의 후임 감독 제의를 거절하고, FA권을 행사하여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 이적했다. 이시게는 은퇴 후 감독이 되는 것보다 현역 생활을 연장하고 2,000안타를 달성하고 싶어했다.
1995년, 부상으로 타율 2할, 1홈런, 11타점으로 부진했고, 신인 시절부터 이어온 100경기 출전, 100안타, 규정 타석 기록이 중단되었다. 올스타전 연속 출전 횟수도 14회에서 멈췄다.
1996년, 출전 기회가 더욱 줄어들어 시즌 후 은퇴를 표명했다.
8. 지도자·기타 경력
NHK·스포츠 닛폰 야구 해설위원(1999년 ~ 2001년)을 거쳐, 오릭스 블루웨이브 감독(2002년 ~ 2003년)을 역임했다.[24] 2004년에는 IBLJ를 설립하여 대표 이사에 취임하고, 시코쿠 아일랜드 리그(현 시코쿠 아일랜드 리그 플러스)를 설립했다.[24] 오릭스 감독 해임 후 IBLJ 설립을 떠올린 것에 대해 "3년 계약이었고, 남은 1년 8개월 치 급여는 받을 수 있었다. 어차피 거저 생긴 돈이니 활동 자금이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24]
2007년 3월 10일, IBLJ 대표 이사에서 물러나 커미셔너 전임이 되었고, 12월 31일 계약 만료와 함께 리그 운영에서 완전히 철수했다.[24] 2008년 1월, 에히메 만다린 파이레이츠의 시니어 팀 어드바이저에 취임했다(이후 퇴임).
2008년 3월에는 간사이 독립 리그의 구상을 표명했고, 2009년에 간사이 독립 리그 발족 후 최고 고문에 취임했다.[25] 그러나, 같은 해 5월에 발각된 리그에서 구단으로의 분배금 미지급 문제와 관련하여, 리그 발족 후에는 거의 운영에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보도되었다.[25] 이시게는 최고 고문을 사임했다.[25]
2009년, 세이부 라이온즈가 주최하는 '라이온즈・클래식 2009'의 에그제큐티브 프로듀서로 취임함과 동시에 시구식에도 등장했다. 9월 1일부로, 조사이 국제 대학교의 객원 교수로 취임했다.
2010년 12월 7일, 야구 명예의 전당 입성 후보자 명단·플레이어 부문에 게재되었다.[26]
2013년, FOX SPORTS 재팬에 의한 NPB 경기 중계 참가를 계기로, 분석가(전속 해설자)로 취임했다.[27]
2014년, 1월 20일부로, 일본 학생 야구 협회로부터 학생 야구 자격 회복을 인정받았다.[28] 6월 1일부터는, 지바 상과대학 부속 고등학교 경식 야구부에서, 비상근 테크니컬 어드바이저로서 부원들을 수시로 지도하고 있다.
야구 해설자로서, 2018년부터 세이부 OB로서 분카 방송에 게스트 출연하는 외, 2020년부터는 본수 계약으로 TV 사이타마의 프로 야구 중계에 출연하고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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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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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
Greenwood Publishing Group
2005-02
[3]
뉴스
【球界風雲児デーブ】森監督から嫌われ飼い殺しに…引退後に気付いた力のなさ - スポーツ - ZAKZAK
https://www.zakzak.c[...]
[4]
뉴스
石毛氏が高校生指導へ 元プロ監督では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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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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読売新聞
1980-11-2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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私の履歴書
日本経済新聞
2010-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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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元西武・石毛氏、広岡監督の命令に「野球人生狂った」 遊撃でのプレーが絶望的に、大怪我直後の“強攻策”を明かす | リアルライ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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巨人坂本勇人の身体に起こってる事【プロ野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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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毛宏典、広岡・森野球を語る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20-0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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根本陸夫伝 プロ野球のすべてを知っていた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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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毛宏典の我が道㉕ 建設的な意見が「球団批判」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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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毛、前掲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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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毛宏典の「独立リーグ」奮闘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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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革命捕手」中尾孝義が見たプロ野球プリンスホテルから「補強選手」として熊谷組へ 銀座ありWボーナスありの助っ人扱いだ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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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刊ゲンダ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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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左腕がまさかの“タイトル辞退” 投手コーチも仰天、登板拒否の裏にあった思いや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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株式会社Creativ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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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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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鈴木平コラム】野村監督や仰木監督とは大違い…めちゃ怖かった〝星野ドラゴン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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週刊プロ野球セ・パ誕生60年 第40号 2003年(平成15年)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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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大谷MVP無理”で炎上の石毛元監督、見る目の無さは昔から? オリ監督時代に物議を醸した助っ人の処遇とは
https://www.excite.c[...]
リアルライブ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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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監督の指導が合わず“成績急降下” バント指令に激怒…約束を反故にされた2軍落ち
https://full-count.j[...]
Full-Count. 株式会社Creativ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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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週刊プロ野球セ・パ誕生60年 第36号 2003年(平成15年)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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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尾孝義の我が道㉗、湘南、オリックスから阪神へ
スポーツニッポン
2023-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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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明日へ 地域独立リーグ 1
読売新聞大阪版
2008-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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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関西独立リーグ立ち上げに尽力・石毛宏典氏(上)
http://www.zakzak.co[...]
2011-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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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平成23年 第51回競技者表彰委員会 野球殿堂入り候補者名簿」発表
http://www.npb.or.jp[...]
日本野球機構オフィシャルサイ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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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古葉氏、石毛氏らが第2回研修会受講 高校野球指導者に意欲
https://www.sponichi[...]
2014-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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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学生野球資格回復に関する規則第4条による適性認定者
http://www.student-b[...]
2014-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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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中村晃、銀次らの「デビュー戦」を振り返る
https://column.sp.ba[...]
2015-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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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윗
【記録メモ(30日)】
2024-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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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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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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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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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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