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희 (1931년)
1. 개요
이영희는 1931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활동한 언론인, 아동문학가, 국회의원이다. 이화여자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 정치부장, 문화부장 등을 역임했으며, 소천문학상, 대한민국 아동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한국여기자클럽 회장과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을 지냈고, 제11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저서로 《또 하나의 만요슈》 등이 있으며, 만년에 뇌졸중으로 투병하다 2021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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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이영희 |
|---|---|
| 로마자 표기 | I Yeong-hui |
| 출생명 | |
| 출생일 | 1931년 12월 16일 |
| 출생지 | 일본 도쿄부 |
| 사망일 | 2021년 4월 25일 |
| 사망지 | 대한민국 경상남도 남해군 |
| 안장지 | |
| 직업 | 작가 |
| 사용 언어 | 일본어 |
| 국적 | |
| 교육 | |
| 모교 |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
| 활동 기간 | 1989년 - 2021년 |
| 장르 | |
| 주제 | 만요슈, 고대사, 동주사이 샤라쿠 |
| 사조 | |
| 종교 | |
| 대표 작품 | 또 하나의 만요슈 (1989년) |
| 배우자 | |
| 파트너 | |
| 자녀 | |
| 친족 | |
| 영향을 준 작가 | |
| 영향을 받은 작가 | |
| 수상 | 제17회 여성문화상 (2013년) |
| 데뷔 작품 | 또 하나의 만요슈 (1989년) |
| 서명 | |
| 웹사이트 | http://manaho.sarashi.com |
| 각주 |
| 한국어 이름 | 이영희 |
|---|---|
| 중앙일보 기사 | 「만요슈는 고대 한국어로 쓰여졌다」 주장한 저서가 100만부 베스트셀러 이영희 씨가 사망 |
2. 생애
이영희의 본명은 이명자로, 1955년 한국일보 주최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1972년 동화 《별님을 사랑한 이야기》로 소천문학상을, 1979년 《꽃농사 꿈농사》로 제1회 대한민국 아동문학상 문화공보부장관상을 받았다. 1981년 제11대 총선에 민주정의당 전국구로 출마해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화여자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한국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한국여기자클럽 회장,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 포스코 인재개발원 교수를 역임했다.
1989년 일본에서 『또 하나의 만엽집』을 출판, '만엽집은 고대 한국어로 쓰여졌다'고 주장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책은 7권 100만 부 이상 판매되었고, 독자 2000명으로 구성된 후원회와 회보지 『마나호』가 발족되었다.
이영희는 자신을 "두 가지 의미에서 전쟁 중 세대"이며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 비교적 편견이 없는 세대"라고 평가했다. 어린 시절 일본에서 "조센진"이라 놀림받았지만, 나라를 되찾아야겠다는 생각은 했어도 '반일'은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한국 귀국 후에도 "일본인 선생님들이 훌륭한 분들이 많았다"며, "식민지 경험은 삶이기에, 나쁜 일본인도 있었지만 좋은 일본인도 많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1985년 전두환 정권에서 공연윤리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당위성 없는 에로와 폭력, 즉 '벗기기 위한 벗기기'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며 가혹한 검열을 실시, 한국 영화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로 인해 정창화 감독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기도 했다.
1993년 일본 체류 중 황태자 데루히토 친왕(현 일본 천황)과 오와다 마사코(현 일본 황후)의 약혼 기자회견을 보고 "황태자 전하의 너그럽고 따뜻하며, 재치 있는 인품에 감동했다"고 칭찬했고, 마사코에 대해서도 "세계를 둘러봐도 그녀 같은 여성은 없다"고 극찬했다.
대한민국 아동문학상, 대한민국 교육문화상, 마해송동화상 등을 수상했다.
2.1. 초기 생애와 언론 활동
1931년 도쿄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경주 이씨이다. 1944년 부모와 함께 당시 일본 영토였던 한국(일본 강점기)으로 돌아왔다. 1948년 서울에 있는 사립 이화여자중학교 5학년 때, 시 '달을 굴리는'이라는 작품으로 시 전문지 「죽순」을 통해 문단에 데뷔했다.
1954년 이화여자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일간 신문 한국일보에 입사했다. 한국일보에서 정치부장, 문화부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하고, 1981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한일의원연맹 이사, 공연윤리위원회 위원장,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3. 주요 저서
1989년 일본에서 만요슈가 한국어로 쓰여졌다는 주장이 담긴 책 《또 하나의 만요슈(もう一つの万葉集일본어)》를, 1998년에는 도슈사이 샤라쿠가 김홍도였다는 주장이 담긴 책 《또 한 명의 샤라쿠(もうひとりの写楽일본어)》를 출판했다.
| 제목 | 출판사 | 출판년도 | 비고 |
|---|---|---|---|
| 또 하나의 만엽집 もう一つの万葉集일본어 | 분게이슌주 | 1989년 8월 | |
| 마쿠라코토바의 비밀 枕詞の秘密일본어 | 분게이슌주 | 1990년 4월 | |
| 천무와 지통 - 노래가 밝히는 신문의 난 天武と持統-歌が明かす壬申の乱일본어 | 분게이슌주 | 1990년 10월 | |
| 일본어의 진상 日本語の真相일본어 | 분게이슌주 | 1991년 6월 | |
| 이상한 일본어 おかしな日本語일본어 | 분게이슌주 | 1992년 4월 | |
| 소생하는 만엽집 - 천지 암살의 노래 よみがえる万葉集-天智暗殺の歌일본어 | 분게이슌주 | 1993년 3월 | |
| 무서운 것들의 노래 - 만엽집이 밝히는 수수께끼의 7세기 恐ろしきものたちの歌-万葉集が明かす謎の七世紀일본어 | 분게이슌주 | 1993년 10월 | |
| 또 하나의 샤라쿠 - 바다를 건너온 이조 화가 もうひとりの写楽-海を渡ってきた李朝画家일본어 | 가와데쇼보신샤 | 1998년 6월 | |
| 노래하는 역사 ―― 이영희의 한·일 고대사 이야기 | 조선일보사 | 2001년 6월 | 번역 제목: 『노래하는 역사 이영희의 한·일 고대사 이야기』 |
4. 평가 및 비판
이영희는 일본에서 『또 하나의 만엽집』을 출판하여 '만엽집은 고대 한국어로 쓰여졌다'고 주장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책은 7권이 100만 부 이상 판매되었고, 독자 2000명으로 구성된 후원회와 회보지 『마나호』도 발족했다.
이영희는 자신을 "두 가지 의미에서 전쟁 중 세대"이며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 비교적 편견이 없는 세대"라고 말했다. 어릴 적 '조센진'이라고 놀림을 받았지만, 대한제국과 일본 통치에 이르는 경위를 듣고 나라를 되찾아야겠다고 생각했으나 '반일'은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일본 통치하의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도 "일본인 선생님들이 훌륭한 분들이 많았다"고 한다. "식민지 경험이란 삶이기 때문에, 나쁜 일본인도 있었지만 좋은 일본인도 많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화여자대학교 학생 시절 한국 전쟁을 겪으며, "힘든 시대였기 때문에 여자로서는 강한 세대"라고 말했다.
이영희의 주장은 일반적으로 한국 기원설과 동일시되지만, 이는 《만엽집》을 한국 고대사와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는 관점에서 문화적 영향을 서술한 것일 뿐이다. 오히려 "한일 양국에는 '열등우월감'이라고 할 만한 좋지 않은 이상한 심리"가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인은 역사적, 문화적으로 한국의 영향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 반면, 한국인은 일본 문화의 기원이 모두 한국이라고 하며 우월감에 젖어 있다는 것이다. 한일 관계 개선 방안으로 "정신분석학에서는 이 '열등우월감'이라는 것은 원인을 알면 금방 치유된다고 합니다"라고 언급했다.
이영희는 자신의 저서와 회보지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쳤다.
* 『또 하나의 만엽집』에서 "7세기 무렵의 만엽가나는 원래 고대 한국(고조선)에서 사용된 것이며, 한반도에서 귀화한 사람들에 의해 고안되었다. 이 가나 문자는 후에 한국(조선)에서는 사라졌다"고 주장했다.
* 『또 하나의 우타가와 히로시게 - 바다를 건너온 조선 화가』에서 "히로시게는 조선통신사였다. 그리고 호쿠사이의 아버지 또한 조선의 고관이었다"고 주장했다.
* 일본 독자 그룹 후원회 발행 회보 「まなほ」에서 "釜石"의 어원은 고대 한국어라고 주장했다.
4.1. 긍정적 평가
이영희는 1993년 일본에 체류하면서 황태자 데루히토 친왕(현 일본 천황)과 오와다 마사코(현 일본 황후)의 약혼 기자회견을 TV로 시청했다. 이영희는 황태자에 대해 "너그럽고 따뜻하며, 재치 있는 인품에 감동했다"라며 훌륭한 남성이라고 평가했다. 마사코에 대해서는 "탄탄한 가정에서 자란 강인하고 개성적인 인상"을 받았다고 하며, "세계를 둘러봐도 그녀 같은 여성은 없다"라고 극찬했다. 나아가 "일본의 미래를 짊어질 여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잘 어울리는 커플입니다"라고 말했다.
4.2. 부정적 평가
이영희는 1985년 전두환 정권의 공연윤리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당위성 없는 에로와 폭력, 즉 '벗기기 위한 벗기기'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에로 영화를 근절시키겠다"고 발언하여 한국 영화계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영화감독 정창화에 따르면, 이영희는 가혹한 검열을 실시했고, 그 독선적인 행동은 한국 영화 관계자들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정창화 감독은 결국 한국 영화계를 떠나 1996년 미국으로 이민을 선택했다.
5. 이영희에 대한 관점
이영희는 한국 민족주의(조선민족주의) 사관에 기초한 주장을 펼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한일 양국 간의 복잡한 감정과 역사 인식을 다루고 있다.
1989년 일본에서 『또 하나의 만엽집』을 출판하여 '만엽집은 고대 한국어로 쓰여졌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 이 책은 일본에서 100만 부 이상 판매되며 큰 반향을 일으켰고, 독자 후원회와 회보지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스스로 "두 가지 의미에서 전쟁 중 세대"이며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 비교적 편견이 없는 세대"라고 말했다. 산케이 신문의 구로다 가쓰히로 서울지국장과의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 일본에서 차별을 경험했지만, '반일' 감정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오히려 "식민지 경험이란 삶이기 때문에, 나쁜 일본인도 있었지만 좋은 일본인도 많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1985년 전두환 정권의 공연윤리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당위성 없는 에로와 폭력"을 용납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이며, 가혹한 검열을 실시하여 한국 영화계를 위축시켰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정창화 감독은 이영희의 독선적인 행동으로 인해 한국 영화계를 떠나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고 증언했다.
한국 기원설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한일 양국에 존재하는 '열등우월감'을 지적하며, 이러한 감정의 원인을 알면 한일 관계가 개선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일본인이 한국의 역사적, 문화적 영향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 반면, 한국인은 일본 문화의 기원이 모두 한국이라고 주장하며 우월감에 젖어 있다고 비판했다.
1993년 일본 체류 중 황태자 데루히토 친왕(현 일본 천황)과 오와다 마사코(현 일본 황후)의 약혼 기자회견을 보고, 두 사람 모두를 극찬하며 "정말 잘 어울리는 커플"이라고 말했다.
기독교 신자이다.
5.1. 한국의 관점
이영희는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 비교적 편견이 없는 세대로 알려져 있다. 어릴 적 도쿄에서 '조센진'이라고 놀림을 받았지만, 대한제국과 일본 통치에 이르는 경위를 듣고 나라를 되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 '반일' 감정은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일본 통치하의 한국에서 학교를 다닐 때도 훌륭한 일본인 선생님들이 많았다고 한다.
1945년 이화여자고등학교 2학년 때 해방을 맞았고, 1950년 이화여자대학교 학생 시절 6.25 전쟁을 겪었다. 힘든 시대를 겪었기에 여자로서는 강한 세대라고 자평하며, 연장자의 반일 세대와 전후 반일 교육을 받은 연하 세대 사이에 있음에도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 비교적 편견을 가지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1985년 전두환 정권의 공연윤리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당위성 없는 에로와 폭력"을 용납할 수 없다고 발언하며 가혹한 검열을 실시해 한국 영화계를 위축시켰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정창화 감독은 이영희의 독선적인 행동 때문에 한국 영화계를 떠나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고 밝혔다.
이영희는 한국 기원설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한일 양국에 존재하는 '열등우월감'을 지적하며, 이러한 감정의 원인을 알면 한일 관계가 개선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일본인은 한국의 역사적, 문화적 영향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 반면, 한국인은 일본 문화의 기원이 모두 한국이라고 주장하며 우월감에 젖어 있다는 것이다.
이영희는 자신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 『또 하나의 만엽집』에서 "7세기 무렵의 만엽가나는 원래 고조선에서 사용된 것이며, 한반도에서 귀화한 사람들에 의해 고안되었다. 이 가나 문자는 후에 한국(조선)에서는 사라졌다"고 주장했다.
* 『또 하나의 우타가와 히로시게 - 바다를 건너온 조선 화가』에서 "히로시게는 조선통신사였다. 그리고 호쿠사이의 아버지 또한 조선의 고관이었다"고 주장했다.
* 일본 독자 그룹 후원회 발행 회보 「まなほ」에서 "가마이시"의 어원은 고대 한국어라고 주장했다.
5.2. 일본의 관점
이영희는 1989년 일본에서 『또 하나의 만엽집』(문예춘추)을 출판하여 '만엽집은 고대 한국어로 쓰여졌다'고 주장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책은 7권 100만 부 이상 판매되었고, 독자 2000명으로 구성된 후원회와 회보지 『마나호』가 발족되기도 했다.
스스로 "두 가지 의미에서 전쟁 중 세대"이며 "일본과 일본인에 대해 비교적 편견이 없는 세대"라고 밝힌 이영희는, 어린 시절 일본에서 "조센진"이라고 놀림을 받았지만, 친척으로부터 대한제국과 일본 통치에 이르는 경위를 듣고 나라를 되찾아야겠다고 생각했을 뿐 '반일' 감정은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1944년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학교에서는 일본인 선생님들이 훌륭한 분들이 많았다"고 하며, "식민지 경험이란 삶이기 때문에, 나쁜 일본인도 있었지만 좋은 일본인도 많이 있었다"는 것을 실제 생활에서 경험했기 때문에 대일 감정에 대해 "그 사람이 처해진 환경에 따라 다르다"고 설명했다.
이영희는 일본에 체류 중이던 1993년 황태자 데루히토 친왕(현・일본 천황)과 오와다 마사코(현・일본 황후)의 약혼 기자회견을 보고, 황태자에 대해 "너그럽고 따뜻하며, 재치 있는 인품에 감동했다"라고 칭찬했으며, 마사코에 대해서는 "세계를 둘러봐도 그녀 같은 여성은 없다", "일본의 미래를 짊어질 여성"이라고 극찬하며 "정말 잘 어울리는 커플"이라고 말했다.
이영희의 주장은 한국 기원설과 동일시되기도 하지만, 이는 《만엽집》을 한국 고대사와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는 관점에서 문화적 영향을 서술한 것일 뿐이다. 오히려 이영희는 한일 양국에 '열등우월감'이 있다고 지적하며, 일본인은 한국의 역사적, 문화적 영향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 반면, 한국인은 일본 문화의 기원이 모두 한국이라고 주장하며 우월감에 젖어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한일 관계 개선 방안으로 "정신분석학에서는 이 '열등우월감'이라는 것은 원인을 알면 금방 치유된다고 합니다"라고 언급했다.
이영희는 저서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쳤다.
* 『또 하나의 만엽집』에서 "7세기 무렵의 만엽가나는 원래 고대 한국(고조선)에서 사용된 것이며, 한반도에서 귀화한 사람들에 의해 고안되었다. 이 가나 문자는 후에 한국(조선)에서는 사라졌다"고 주장했다.
* 『또 하나의 우타가와 히로시게 - 바다를 건너온 조선 화가』에서 "히로시게는 조선통신사였다. 그리고 호쿠사이의 아버지 또한 조선의 고관이었다" 등을 주장하고 있다.
* 일본 독자 그룹 후원회 발행 회보 「まなほ」에서 “釜石”의 어원은 고대 한국어라고 주장하고 있다.
6. 역대 선거 결과
| 연도 | 선거 종류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순위 | 당락 | 비고 |
|---|---|---|---|---|---|---|
| 1981년 | 총선 | 민주정의당 | 5,776,624표 (35.6%) | 전국구 48번 | 당선 | 초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