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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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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홍도는 조선 후기의 화가로, 본관은 김해이며, 현재의 안산시에서 태어났다. 7세에 강세황에게 그림을 배우고, 21세에 궁중 화원으로 등용되어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정조의 명으로 금강산 등 각지의 풍경을 그리거나, 왕족 및 왕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풍속화에도 능하여 '단원풍속도첩'과 같은 작품을 남겼다. 1791년 연풍 현감으로 임명되었으나 파직된 후, 후원자를 잃고 어려운 말년을 보냈다. 정확한 사망 연도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1805년 이후로 추정되며, 아들 김양기 또한 화가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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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 [인물]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단원 김홍도 자화상
단원 김홍도 자화상
이름김홍도
한자金弘道
로마자 표기Gim Hongdo
별칭단원(檀園)
단구(丹邱)
서호(西湖)
고면거사(高眠居士)
첩취옹(輒醉翁)
로마자 표기 (별칭)Danwon
Dan-gu
Seoho
Gomyeon-geosa
Cheopchwiong
자(字)사능(士能)
로마자 표기 (자)Saneung
국적조선
직업서화가 출신 관료
종교유교 (성리학)
출생일1745년
출생지조선 경기도 안산시 안산군 군내면 성고
사망일1806년? ~ 1814년?
부모김석무 (부)
인동 장씨 (모)
자녀김양기 (아들)
대표작풍속화
활동
임기1791년 12월 10일 ~ 1794년 8월 10일
영향 관계
영향 준 인물강세황

2. 생애

김해 김씨인 김홍도는 서울특별시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 현재의 안산에서 성장했다. 7세 때부터 당대 명성이 높았던 강세황에게 그림을 배웠다.[3] 강세황은 김홍도를 "우리나라 금세(今世)의 신필(神筆)"[20]이라 극찬하며 그의 화가로서의 성장에 큰 영향을 주었다.[21]

1766년, 21세에 강세황의 추천으로[4] 궁중 화원으로 발탁되었다. 1771년에는 왕세손(훗날 정조)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1773년에는 영조의 초상화를 그리는 변상벽을 도왔다. 1776년에는 "십구 도사"를 그려 명성을 얻었다.

정조 즉위 후, 김홍도는 왕의 총애를 받으며 왕족과 왕의 초상화를 그리고, 왕명으로 금강산 등 명승지를 방문하여 풍경화를 그렸다. 또한 왕의 행차에 동행하며 기록화를 남겼으며, 용암사의 불화 제작에도 참여했다. 박제가의 『무예도보통지』 삽화, 『송하맹호도』와 같은 동물 그림도 남겼다. 특히 서민들의 일상을 생생하게 담아낸 풍속화는 김홍도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1791년 충청도 연풍현감에 임명되었으나, 1795년 파직된 후 다시 화원으로 활동했다. 1800년 정조 사후, 후원자를 잃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정확한 사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1806년,[7] 1810년,[5] 또는 1814년 이후로 추정된다.[1][4]

2. 1. 유년 시절

김해 김씨인 김홍도는 현재의 안산에서 성장했으며, 7세 때 강세황에게서 그림을 배웠다.[3]

2. 1. 1. 출생과 가계

김홍도는 경기도 안산(현재 안산시)에서 아버지 김석무(金錫武)와 어머니 인동 장씨(仁同 張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해 김씨 삼현파 17세손이며, 탁영 김일손(金馹孫)의 후손이다. 7대조부 김수원(金秀源)은 조선 선조 때 내금위장을, 6대조부 김흥상(金興祥)은 어모장군을, 5대조부 김득남(金得男)은 수문장을, 고조부 김중현(金重鉉)은 별제를, 증조부 김진창(金震昌)은 만호 벼슬을 지냈다. 대대로 하급무관을 지낸 중인 집안이었다.[22] 할아버지 김수성(金壽星)은 벼슬을 하지 않았다. 외아들 김양기(金良驥)도 산수화와 화조도를 잘 그린 화가이다.

김홍도의 호로 가장 유명한 "단원"(檀園)은 명나라의 문인화가 단원 이유방(檀園 李琉芳, 1575~1629)의 호를 그대로 따온 것이다.[16] "단로"(檀老)나 "단옹"(檀翁)이라는 호는 모두 "단원"을 응용한 노년 무렵의 호이다.[16] 그의 유년시절은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강세황이 지은 《단원기》(檀園記)에만 김홍도가 젖니를 갈 나이 때부터 강세황의 집에 자주 드나들면서 화법(畵法)을 배웠다고 한다.[18] 김홍도는 7세 때, 당시 안산에서 은둔 생활을 하고 있던 표암 강세황에게서 그림을 배웠다.[3]

2. 1. 2. 미술 세계 입문

김홍도는 김해 김씨로, 현재 대한민국 안산에서 성장했다. 7세 때 당시 안산에서 은둔 생활을 하던 표암 강세황에게서 그림을 배웠다.[3] 21세인 1766년, 강세황의 추천으로[4] 조선 궁중 화원으로 등용되었다. 1771년에는 왕세손(훗날 정조)의 초상화를 그렸다. 1773년에는 영조(1694-1724-1776)의 초상화를 그리는 변상벽을 도왔다.

당시 화원세계는 매우 폐쇄적이었다. 김홍도의 집안에는 화원이나 사자관(寫字官) 출신이 없었다. 그러나 《화사양가보록》(畵寫兩家譜錄)에 따르면, 김홍도의 부친 김석무(金錫武)의 장인이자 김홍도의 외조부인 장필주(張弼周)는 인동 장씨(仁同張氏) 집안 출신으로, 이 집안은 대대로 화원을 배출한 명문가였다. 따라서 김홍도는 외가에 드나들며 자신의 재능을 인정받아 강세황을 비롯한 화원세계에 소개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6]

2. 1. 3. 강세황의 칭찬

강세황은 시(詩), 서(書), 화(畵)에 능했으며 당시 최고의 감식안으로 김홍도의 화업에 많은 도움과 영향을 주었다. 강세황은 정조의 신임을 두텁게 받아 김홍도가 정조의 어진(御瞋)을 제작하는 명예를 누리도록 해주었는데, 이것은 화원으로서 최고의 영광을 누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16] 또한 강세황은 말년에 이르러 김홍도를 가리켜 "우리나라 금세(今世)의 신필(神筆)"[20]이라고 극찬하고 화제(畵題)를 써주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의 관계가 매우 밀접했을 것이라 학자들은 짐작하고 있다.[21]

강세황은 김홍도의 재능을 다음과 같이 칭찬하였다.

단원은 어릴 적부터 그림을 공부하여 못 하는 것이 없었다. 인물, 산수, 신선, 불화, 꽃과 과일, 새와 벌레, 물고기와 게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묘품(妙品)에 해당되어 옛사람과 비교할지라도 그와 대항할 사람이 거의 없었다. 특히 신선과 화조를 잘하여 그것만 가지고도 한 세대를 울리며 후대에까지 전하기에 충분했다. 또 우리나라 인물과 풍속을 잘 그려내어 공부하는 선비, 시장에 가는 장사꾼, 나그네, 규방, 농부, 누에 치는 여자, 이중으로 된 가옥, 겹으로 난 문, 거친 산, 들의 나무 등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를 꼭 닮게 그려서 모양이 틀리는 것이 없으니 옛적에는 이런 솜씨는 없었다. 그림 그리는 사람은 대체로 천과 종이에 그려진 것을 보고 배우고 익혀서 공력을 쌓아야 비로소 비슷하게 할 수 있는데, 단원은 독창적으로 스스로 알아내어 교묘하게 자연의 조화를 빼앗을 수 있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천부적인 소질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지 않고서는 될 수 없는 일이다.|강세황한국어[22]

2. 2. 전기 생애

김홍도는 김해 김씨로, 서울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 안산에서 자랐다. 외가는 궁중 화가를 많이 배출한 가문이었다. 그는 7세 때 안산에서 은둔 생활을 하던 표암 강세황에게서 그림을 배웠다.[3] 강세황은 시서화(詩書畵)에 능했으며 당시 최고의 감식안으로 김홍도의 화업에 많은 도움과 영향을 주었다.[16] 강세황은 김홍도를 "우리나라 금세(今世)의 신필(神筆)"[20]이라고 극찬하며 화제(畵題)를 써주기도 했다.[21]

21세 되던 1766년, 강세황의 추천으로[4] 조선 궁중 화원으로 등용되었다. 1771년에는 왕세손(훗날 정조)의 초상화를 그렸다. 1773년에는 영조의 초상화를 그리는 변상벽을 도왔으며, 같은 해 장원서 별제로 임명되었다. 1774년에는 사포서 별제로 임명받았다.[25]

이 무렵 김홍도는 신선도, 군선도, 선동취적, 생황을 부는 신선 등의 신선도와 서원아집도, 평생도 등의 인물화, 그리고 서당, 씨름, 타작, 우물가 등의 풍속화를 많이 그렸다.[22] 그는 궁핍하고 고독하게 생을 마감했으나, 정확한 사망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자료에 따라 1806년,[7] 1810년,[5] 또는 1814년 이후로 추정된다.[1][4]

2. 2. 1. 정조와 김홍도

김홍도는 1773년(영조 49년)경 29세의 나이로 영조 어진 및 왕세손 이산의 초상화 제작에 동참화사로 참여하였다.[24] 정조는 자신의 문집인 《홍재전서》에 "김홍도는 그림에 솜씨 있는 자로서 그 이름을 안 지가 오래다. 삼십 년쯤 전에 나의 초상을 그렸는데, 이로부터 무릇 그림에 관한 일은 모두 홍도를 시켜 주관케 하였다."라고 적었다.[28]

김홍도는 영조 말년에 세손(정조)의 초상화를 제작한 것을 계기로 정조의 배려와 관심을 받았다.[26] 1776년 왕세손이 영조를 이어 정조로 즉위하자, 정조에게 《규장각도》를 바쳤고, 1781년(정조 5년) 어진화사(御眞畵師)로서 정조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 공으로 와서(瓦署) 별제로 임명되었다.[25] 정조는 김홍도에게 금강산 사군(四郡)의 산수를 그리라고 명하고 관용으로 조석(朝夕)을 받들게 하였는데, 이는 이수(異數)의 대접이었다.[27] 정조의 명으로 간행된 《무예도보통지》의 삽화는 김홍도가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23]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삽화

2. 3. 후기 생애

김홍도는 김해 김씨로, 현재 대한민국 안산에서 자랐다. 7세 때 안산에서 은둔 생활을 하던 표암 강세황에게서 그림을 배웠다.[3] 21세인 1766년 강세황의 추천으로[4] 조선 궁중 화원으로 등용되었다. 1771년 왕세손(훗날 정조)의 초상화를 그렸고, 1773년 영조의 초상화를 그리는 변상벽을 도왔다.

1776년 "십구 도사"를 그려 명성을 얻었으며, 새로 즉위한 정조는 그에게 많은 궁중 그림을 의뢰했다. 정조의 총애를 받아 왕족과 왕의 초상화를 그리거나, 왕명으로 금강산 등 각지에 파견되어 풍경화를 그리고, 왕의 행차에 동행하며 풍경화를 그리거나, 용암사의 불화를 그리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풍속화를 많이 남겼으며, 박제가의 『무예도보통지』 삽화, 『송하맹호도』 등의 조수화도 그렸다.

2. 3. 1. 충청도 연풍 현감 시절

1791년 김홍도는 48세의 나이로 충청도 연풍 현감에 임명되었다. 연풍 현감 시절의 경험은 김홍도가 민중들의 삶을 자신만의 개성으로 그려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29] 그러나 1795년 51세 때 충청 위유사 홍대협이 "남의 중매나 일삼으면서 백성을 학대했다"고 보고하여, 김홍도는 3년 만에 파직되었다.[22] 이후 한양으로 돌아와 다시 화원으로 활동하였다.

2. 3. 2. 노년

1800년 정조가 갑작스럽게 승하하고, 그와 교류하던 후원자인 김한태도 별세하여 김홍도는 후원자를 모두 잃고 생활이 어려워졌다.[33]

김홍도의 정확한 사망 연도는 전해지지 않는다. 1805년 12월에 쓴 편지만 전해지고 이후 행적과 작품이 없어 1805년이나 1806년도로 추측될 뿐이다.[22] 그의 아들 김양기도 아버지를 이어 화원이 되었다.

김홍도는 궁핍하고 고독하게 생을 마감했으나, 정확한 사망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자료에 따라 1806년,[7] 1810년,[5] 또는 1814년 이후로 추정된다.[1][4]

3. 김홍도의 교류

김홍도는 매우 폭넓은 사람들과 다양한 교류를 했다. 이를 통해 그림을 그리는 것 외에도 문학, 철학, 음악 등 다방면의 소양을 닦아 화가로서의 성장에 큰 도움을 받았다. 김홍도가 교류한 인물들의 가장 큰 특징은 남인과 중서 출신 문사들과의 교류가 많았다는 점이다.

그는 남인들 중 스승이 되어준 강세황과, 문단의 지도자 이용휴, 정범조(丁範祖: 1723~1801), 정란(鄭瀾: 1725~1791) 등과 많은 교류를 했는데, 이들은 전기 김홍도의 성장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중서인으로는 홍신유(洪愼猷, 1724~?)와 같은 위항 시인들과 연암 박지원 같은 북학파 문인들이 있다. 남인들이나 위항 시인, 그리고 북학파의 사실적 문학이론은 당대의 시대적 풍조를 형성한 동시에 김홍도의 풍속화나 진경산수에 큰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6]

4. 회화적 성과와 영향

김홍도는 김응환에게 그림을 배웠으나, 강렬한 개성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경지를 개척하여 한국적인 풍토와 감각을 잘 표현하였다. 풍경화에서는 해와 풍차를 조화시켜 서민적인 분위기를 그렸고, 채색의 짙고 옅음을 이용하여 형체의 원근감과 높낮이를 표현하기도 했다. 당시 화단에 고착된 중국 그림 양식을 벗어나 대담하게 남화 양식을 시도하여 신선한 조형미를 완성했다.

오늘날 김홍도는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과 함께 '조선의 3원'으로, 오원 장승업, 안견과 함께 조선의 3대 화가 중 한 명으로 꼽힌다.[6]

산수화, 인물화, 화조화에도 뛰어났지만, 오늘날 그의 이름이 알려진 것은 「단원풍속도첩」 등 당시 화가들이 드물게 다루었던 민중의 일상생활을 그린 풍속화 때문이다. 김홍도는 신윤복, 김득신과 함께 "조선 3대 풍속화가"로 불리기도 한다.

또한, 서양화의 명암 기법을 조선에서 가장 먼저 시도한 화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서당


활쏘기


무동


농경


씨름


주막


군선도병(한국 국보)

5. 작품

김홍도는 군선도병풍, 풍속화첩, 《투견도》, 《소림명월도》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과 함께 '조선의 3원' 중 한 명으로, 안견과 함께 조선 3대 화가로 꼽히기도 한다.[6]

안산시단원구라는 지명, '단원미술제' 등을 통해 김홍도를 기리고 있다.[6] 김홍도의 '10대 명작' 목록은 자료마다 다르지만,[7][5] 다양한 그림 유형에서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는 점이 중요하다.

한국저작권위원회는 김홍도의 작품으로 그림 757점, 서예 7점, 조각 4점을 기록하고 있다.[9]


  • 김홍도의 명성을 쌓은 그림들

군선도 (1776)

  • 문인화

청석정


고양이와 나비
황묘농접도


송하맹호도
소나무 아래 호랑이


죽하맹호도
대나무 아래 호랑이

  • 공식 초상화

  • 왕의 지정 화가

  • 1800년 이후 및 정조의 죽음 이후
  • -]


김홍도는 산수화, 인물화, 화조화에도 뛰어났지만, 특히 민중의 일상생활을 그린 풍속화로 유명하다. 신윤복, 김득신과 함께 "조선 3대 풍속화가"로 불리며, 서양화의 명암 기법을 조선에 처음 도입한 화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5. 1. 군선도


5. 2. 풍속화

김홍도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풍속화는 대부분 30대에 그린 것이다. 34세인 1778년에 그린 8폭의 〈행려풍속도〉 병풍과 30대 중후반에 그린 25점의 〈풍속화첩〉(모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이 대표적이다. 〈행려풍속도〉는 김홍도가 풍속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초기 작품으로, 강세황이 각 폭마다 그림에 대한 설명을 썼다. 비단 위에 연한 담채와 수묵으로 농어촌의 모습을 섬세하게 묘사했으며, 흑립을 쓴 선비와 관료, 머슴과 농어부들의 생활상 등 일상 속 소재를 현장감 있게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행려풍속도〉보다 더 완성된 인물 묘사력을 보여주는 작품은 〈풍속화첩〉이다. 이 화첩은 27cm x 22.7cm 크기의 25점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확한 연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인물 묘사 기법과 필치로 볼 때 30대 후반 작품으로 추정된다. 〈풍속화첩〉은 배경을 생략하고 소묘풍에 약간의 담채를 가해 종이에 그린 것으로, 본격적인 풍속화라기보다는 풍속화 스케치북 형태이다.

타작


기와 이기


어장


빨래터, 위쪽 옆에 몰래 숨어서 지켜보는 사내가 있다.


고누놀이, 단원풍속도첩(檀園風俗畵帖)에서 종이에 담채, x , 국립 중앙박물관 소장


행상


장터길


자리짜기


점괘


점심


대장간


담배 썰기, 담배잎을 썰고 있는 모습


길쌈


나룻배


노상파안(路上破顔)


김홍도는 산수화, 인물화, 화조화에도 뛰어났지만, 오늘날 그의 이름이 알려진 것은 「단원풍속도첩」 등 당시 화가들이 드물게 다루었던 민중의 일상생활을 그린 풍속화 때문이다. 김홍도는 뒤를 이은 신윤복, 김득신과 함께 “조선 3대 풍속화가”로 불리기도 한다. 또한, 서양화의 명암 기법을 조선에서 가장 먼저 시도한 화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6. 김홍도가 등장한 작품

이정명의 소설 《바람의 화원[10]은 김홍도와 신윤복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며, 신윤복은 여장 남자로 묘사된다. 김홍도는 임금의 총애를 받은 뛰어난 화가이면서도 서민 생활에 대한 애정을 담은 그림을 그렸고, 그의 업적에 불분명한 부분이 많아 후대에 많은 전승이 생겨났다. 대한민국에서는 그의 생애를 소재로 한 소설, 드라마, 영화가 많이 제작되어 엔터테인먼트로 소비되고 있다.

6. 1. 텔레비전

6. 2. 영화

7.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증조부김진창(金震昌)1662년 ~ 1722년
증조모전주 이씨(全州 李氏)이진성(李震馨)의 딸
큰할아버지김수견(金壽堅)
할아버지김수성(金壽星)1686년 ~ 1750년
할머니밀양 박씨(密陽 朴氏)박등(朴登)의 딸
백부김석추(金錫秋)
사촌이경설(李景說)에게 출가
아버지김석무(金錫武)1711년 ~ 1780년
어머니인동 장씨(仁同 張氏)장필주(張弼周)의 딸
아들김양기(金良驥)1763년 ~ 1833년, 화가


참조

[1] 논문
[2] 웹사이트 Kim Hong-do's portrait https://www.ehistory[...]
[3] 웹사이트 Kim Hong-do, a Distinguished Painter of Joseon Dynasty https://web.archive.[...] 2013-12-02
[4] 논문
[5] 웹사이트 Encyclopaedia Britannica: 김홍도 https://web.archive.[...] 2013-11-22
[6] 웹사이트 Danwon-gu https://terms.naver.[...]
[7] 웹사이트 김홍도 https://terms.naver.[...] 2022-12-03
[8] 논문
[9] 논문
[10] 서적 Painter of the Wind Million House
[11] 뉴스 Mysterious Artist Resurfaces on Modern Culture Scene https://www.koreatim[...] Korea Times 2008-10-09
[12] 웹사이트 김홍도(金弘道) http://encykorea.aks[...] 2022-07-18
[13] 웹사이트 김홍도(金弘道) 한국역대인물정보시스템 - 김홍도 http://people.aks.ac[...]
[14] 서적 단원 김홍도에 관한 연구 : 풍속화첩을 중심으로 계명대 교육대학원
[15] 논문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연구 단국대학교
[16] 서적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연구 : 풍속화첩을 중심으로 계명대 교육대학원
[17] 서적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 시공사
[18] 서적 화인열전(2) 역사비평사
[19] 서적 단원 김홍도 한국민속미술연구소
[20] 문서 덕수궁 소장, 서원아집병풍화평
[21] 서적 우리나라 옛 그림 학고재
[22] 웹사이트 네이버캐스트-〈가장 한국적인 그림을 그린 천재화가- 김홍도〉 http://navercast.nav[...] 2010-12-31
[23] 서적 단원 김홍도 열화당
[24] 서적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연구 : 풍속화첩을 중심으로 계명대 교육대학원
[25] 서적 단원 김홍도 연구 일지사
[26] 서적 단원 김홍도 연구 일지사
[27] 서적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연구 : 풍속화첩을 중심으로 계명대 교육대학원
[28] 서적 단원 김홍도 열화당
[29] 논문 단원 김홍도의 현실인식에 대한 고찰 홍익대학교 대학원 동양학과
[30] 문서 지금의 역장과 우체국장을 합친 것과 비슷하나 거느리는 인원이 1,300여 명이나 되었다.
[31] 서적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연구 : 풍속화첩을 중심으로 계명대 교육대학원
[32] 서적 근역서화징 시공사
[33] 서적 단원 김홍도 열화당
[34] 서적 단원 김홍도 열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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