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구
1. 개요
이완구는 1950년 충청남도 청양군 출생으로, 행정고시 합격 후 공직 생활을 시작하여 홍성경찰서 서장, 충북 및 충남지방경찰청장을 역임했다. 1995년 정계에 입문하여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2006년 충청남도지사에 당선되었다. 2013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2014년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역임했다. 2015년 국무총리로 임명되었으나 '성완종 리스트' 연루 의혹으로 사퇴했다. 2021년 혈액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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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이완구 |
|---|---|
| 한자 표기 | 李完九 |
| 로마자 표기 | I Wangu |
| 출생일 | 1950년 7월 16일 |
| 출생지 | 충청남도 청양군 |
| 사망일 | 2021년 10월 14일 |
| 사망지 | 서울특별시 |
| 정당 | 자유한국당 |
| 학력 | 성균관대학교 학사 미시간 주립대학교 석사 단국대학교 박사 |
| 종교 | 가톨릭(세례명: 바오로) |
| 배우자 | 이백연 (1955년생) |
| 제43대 대한민국 국무총리 | 취임일: 2015년 2월 17일 퇴임일: 2015년 4월 27일 대통령: 박근혜 전임: 정홍원 후임: 황교안 |
|---|---|
| 국회의원 | 임기 시작: 2013년 4월 25일 임기 종료: 2016년 5월 29일 지역구: 부여군–청양군 임기 시작: 1996년 5월 30일 임기 종료: 2004년 5월 29일 지역구: 청양군–홍성군 |
| 새누리당 대표 (권한대행) | 임기 시작: 2014년 5월 15일 임기 종료: 2014년 7월 13일 전임: 황우여 후임: 김무성 |
| 충청남도지사 | 임기 시작: 2006년 7월 1일 임기 종료: 2009년 12월 4일 전임: 심대평 후임: 안희정 |
| 자녀 | (정보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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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식 웹사이트 | (정보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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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무고 피해자 -
박진성 (시인)
2001년 《현대시》로 등단한 대한민국의 시인 박진성은 여러 수상 경력과 작품 활동에도 불구하고 미성년자 성희롱 의혹, 명예훼손, 자살 암시 글 게시 등 여러 논란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으며, 특히 성희롱 피해 폭로 여성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법정 구속되었다. -
대한민국의 무고 피해자 -
강은일
강은일은 2012년 뮤지컬 《13》으로 데뷔하여 《뉴시즈》, 《아이다》, 《스모크》, 《랭보》, 《더 캐슬》, 《정글라이프》 등 다양한 작품에 출연한 대한민국의 뮤지컬 배우이다. -
청양군 출신 -
송요찬
송요찬은 일제강점기 일본군 부사관으로 복무하고 대한민국 국군 소위로 임관하여 4·3 사건 진압을 지휘했으며, 5·16 군사정변 이후 요직을 두루 거쳤으나 정치적 갈등으로 구속된 인물이다. -
청양군 출신 -
윤상현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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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 당원 -
이경재 (1941년)
대한민국의 언론인 출신 정치인인 이경재는 동아일보 기자, 대통령비서실 공보수석비서관, 공보처 차관을 거쳐 4선 국회의원과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며 환경 및 방송통신 분야에서 활동했고 한나라당 주요 당직을 맡았다. -
새누리당 당원 -
진영 (정치인)
2. 생애
충청남도 청양군 출신으로, 1974년 제15회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경제기획원 사무관을 거쳐 경찰로 자리를 옮겨 충북지방경찰청장, 충남지방경찰청장 등을 역임했다.
1995년 민주자유당에 입당하며 정계에 입문했고, 제15대 총선(1996년)에서 신한국당 소속으로 충청남도 청양·홍성 지역구에서 당선되어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후 자유민주연합으로 당적을 옮겨 제16대 총선(2000년)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2002년 한나라당에 복당하였다.
2006년 지방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충청남도지사에 당선되었으나, 2009년 이명박 정부의 세종특별자치시 수정안 추진에 반발하며 도지사직을 사퇴했다.
이후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으로 투병 생활을 하기도 했으나, 2013년 재보궐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부여군·청양군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 3선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2014년 5월에는 새누리당 원내대표로 선출되었다.
2015년 1월, 박근혜 정부의 두 번째 국무총리로 지명되었다. 병역 기피, 부동산 투기 등 여러 의혹이 제기되어 야당의 강한 반발 속에 인사청문회를 거쳤고, 2015년 2월 17일 제43대 국무총리로 취임했다. 그러나 취임 직후 '성완종 리스트'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정치적 부담으로 인해 취임 70일 만인 2015년 4월 27일 국무총리직에서 사퇴했다. 성완종 관련 뇌물수수 혐의는 이후 재판을 통해 2017년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되었다.
2020년 1월, 제21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사실상 정계를 은퇴했다. 이후 혈액암 투병을 이어가다 2021년 10월 14일 향년 71세로 사망했다.
2.1. 초기 생애 및 공직 생활
본관은 여주이며, 1950년 6월 2일 충청남도 청양군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하고 1982년부터 1984년까지 미국 미시간 주립대학교에서 유학하여 형사사법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74년 제15회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1975년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 사무관이 되었고, 이후 홍성군청 사무관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홍성군청 근무 중 징병 신체검사에서 주상골 부골 장애를 이유로 보충역 소집을 받아 1976년 5월 입영하여 1977년 4월 만기 제대했다.
경제기획원 사무관으로 복귀하여 근무하다 경찰로 자리를 옮겨 홍성경찰서 서장을 지냈다. 이후 1986년부터 1989년까지 로스앤젤레스 주재 대한민국 총영사관 내무영사로 재직했다. 귀국 후 충북지방경찰청장과 충남지방경찰청장을 지내며 치안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다. 1995년 경찰에서 퇴직했다.
2.2. 정치 입문 및 국회의원 시절
1995년 경찰에서 퇴직한 후 민주자유당에 입당하며 정치에 입문했다. 제15대 총선(1996년)에 신한국당 소속으로 충남 청양군·홍성군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 제15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당시 자유민주연합이 강세를 보이던 충남 지역에서 유일하게 신한국당 소속으로 당선된 기록을 세웠다.
1998년 정권 교체 후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잠시 무소속으로 있다가 김종필이 이끌던 자민련에 입당하였다. 자민련에서 사무부총장, 대변인 등을 역임했다.
2000년 총선에서도 자민련 소속으로 같은 지역구에서 재선에 성공하여 제16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같은 해 2000년 남북정상회담 대표단에 포함되어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2002년 자민련을 다시 탈당하고 한나라당에 복당하였다. 국회의원으로 재직 중 경기대학교 교수직을 겸임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2004년 제17대 총선에는 출마하지 않았다.
이후 충청남도지사직(2006-2009)을 거쳐 혈액암 투병 생활을 한 뒤, 2013년 재보궐선거에서 부여군·청양군 지역구에 새누리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 3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2014년 5월에는 새누리당 원내대표로 선출되었다.
2020년 1월, 제21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2.3. 충청남도지사 시절
2006년 지방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하여 제35대 충청남도지사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2009년 12월, 당시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던 세종특별자치시 수정안(행정중심복합도시 계획 축소)에 강하게 반발하며 도지사직을 사퇴하였다. 이 결정은 당시 한나라당 내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우던 박근혜의 신임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2.4. 국회 복귀 및 국무총리 시절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으로 투병 생활을 하기도 했으나, 회복 후 2013년 대한민국 재보궐선거에 새누리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 3선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2014년 5월 8일 새누리당 원내대표로 선출되었다. 충청도 출신 의원이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된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친박근혜계로 분류되었지만 야당과의 관계도 원만하며 폭넓은 인맥을 가진 인물로 평가받았다.
2015년 1월 23일, 박근혜 대통령은 사퇴 의사를 밝힌 정홍원 국무총리의 후임으로 당시 원내대표였던 이완구를 지명했다. 이완구는 지명을 받고 대통령에게 직언하는 총리가 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러나 지명 과정에서 병역 기피 의혹, 부동산 투기 의혹 등이 제기되었고, 새정치민주연합 등 야당은 그의 임명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였다.
여러 논란 속에서 인사청문회가 진행되었고, 2015년 2월 16일 국회 본회의에서 그의 임명동의안이 찬성 148표, 반대 128표, 무효 5표로 통과되었다. 당시 여당 내에서도 반대표가 나온 것으로 분석되었다. 2015년 2월 17일, 박근혜 대통령은 그를 제43대 국무총리로 공식 임명하였고, 같은 날 취임식을 가졌다.
그러나 취임 직후 '성완종 리스트'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사업가 성완종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했다는 혐의였다. 이 의혹과 함께 부정적인 여론이 확산되자, 이완구는 국무총리 임명 후 63일 만인 2015년 4월 20일 사의를 표명했다. 당시 해외 순방 중이던 박근혜 대통령은 사실상 이를 수락했으며, 4월 27일 대통령이 사표를 정식으로 수리하면서 그의 사퇴가 확정되었다. 정부서울청사에서 이임식을 하고 국무총리직에서 물러났으며, 총리 재임 기간은 70일에 불과했다.
성완종 관련 뇌물수수 혐의에 대해서는 2017년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되었다.
2.5. 성완종 리스트 사건 및 이후
이명박 정부 시절 자원 개발 비리 의혹을 수사하던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의 수사선상에 오른 건설회사 회장 성완종이 2015년 4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주머니에서는 불법 정치자금을 건넨 것으로 추정되는 유력 정치인들의 이름과 금액이 적힌 메모,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가 발견되어 한국 정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메모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완구의 경우 이름만 적혀 있었고 금액은 명시되지 않았으며, 리스트에 언급된 8명 모두 금품 수수 사실을 부인했다. 그러나 4월 14일, 성완종 회장의 생전 육성 녹음 파일이 언론을 통해 공개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녹취록에서 성완종은 2013년 4월 재보궐선거에 출마했던 이완구에게 현금 30을 전달했다고 주장했다. 이완구는 금품 수수 의혹을 강력히 부인했으나, 정치적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결국 이완구는 국무총리 취임 63일 만인 2015년 4월 20일, 뇌물 수수 의혹에 따른 정치적 부담으로 사의를 표명했다. 당시 해외 순방 중이던 박근혜 대통령은 사실상 이를 수락했으며, 4월 27일 귀국 후 사표를 공식 수리하여 그의 사퇴가 확정되었다. 이완구는 정부서울청사에서 이임식을 갖고 총리직에서 물러났으며, 총 재임 기간은 70일이었다.
이후 이완구는 2015년 7월 2일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었다. 2016년 1월 29일, 서울중앙지방법원 1심 재판부는 이완구에게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며 유죄를 인정했다. 그러나 2016년 9월 27일, 서울고등법원 항소심 재판부는 1심 판결을 뒤집고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은 상고했으나, 2017년 12월 22일 대법원은 검찰의 상고를 기각하고 2심의 무죄 판결을 확정했다. 무죄 확정 후 이완구는 자신을 기소했던 문무일 당시 검찰총장을 직권남용 혐의 등으로 검찰에 고발하기도 했다.
성완종 리스트 사건 이후 정계 복귀를 모색하는 듯했으나, 2020년 1월 28일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불출마를 선언하며 사실상 정계를 은퇴했다. 이후 혈액암 투병 생활을 이어가다 2021년 10월 14일 향년 71세로 사망했다.
2.6. 사망
혈액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으로 투병 생활을 했다. 2012년 초 다발성 골수종 진단을 받고 골수 이식 후 완치 판정을 받았으나, 이후 암이 재발하여 2021년 10월 14일, 7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는 전 대통령 노태우가 2021년 10월 26일 사망하기 약 2주 전이었다.
3. 경력
1974년 제15회 행정고등고시에 합격하여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경제기획원 사무관으로 근무하다가 경찰로 자리를 옮겨 치안본부 경정으로 근무했으며, 이후 여러 경찰 요직을 거쳤다.
| 연도 | 직위 | 소속/비고 |
|---|---|---|
| 1974년 5월 | 제15회 행정고등고시 합격 | |
| 1974년 | 홍성군청 사무관 | |
| 1975년~1977년 8월 | 경제기획원 사무관 | |
| 1977년 8월~1981년 11월 | 치안본부 경정 |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파견, 치안본부 수사1과 국제형사담당 등 |
| 1981년 11월~1982년 | 대전지방경찰청 홍성경찰서 서장 | 총경 |
| 1982년 6월~1984년 7월 | 치안본부 경무부 경무과장 | |
| 1984년 7월~1985년 3월 | 치안본부 정보2부 제3과장 | |
| 1985년 3월~1986년 1월 | 치안본부 외사3과장 | |
| 1986년 1월~1989년 3월 | 치안본부 총경 | 미국 LA 한국총영사관 내무영사 (해외주재관 파견) |
| 1989년 3월~1989년 9월 | 치안본부 외사2과장 | |
| 1989년 9월~1991년 1월 | 치안본부 본부장 보좌관 | 경무관 |
| 1991년 1월~1991년 3월 | 경기지방경찰청 제1부장 | |
| 1991년 3월~1992년 4월 | 서울지방경찰청 제3부장 | |
| 1992년 4월~1993년 3월 | 경찰청 감사관 | |
| 1993년 3월~1993년 9월 | 충북지방경찰청 청장 | 치안감 |
| 1993년 9월~1994년 6월 | 경찰청 기획관리관 | |
| 1994년 6월~1995년 2월 | 충남지방경찰청 청장 |
1995년 민주자유당에 입당하며 정계에 입문했다.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소속으로 충남 청양군·홍성군 선거구에서 당선되어 초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후 김종필 총재의 자유민주연합으로 당적을 옮겨 활동했으며,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 연도 | 직위 | 소속/비고 |
|---|---|---|
| 1995년 3월~1995년 12월 | 민주자유당 충남 청양·홍성지구당 위원장 | |
| 1996년 3월~2006년 2월 | 경기대학교 행정대학원 교수 | |
| 1996년 5월~2000년 5월 | 제15대 국회의원 | 충남 청양군·홍성군, 신한국당→한나라당→무소속→자유민주연합, 초선 |
| 1996년 5월~1997년 3월 | 신한국당 이홍구 대표 비서실 실장 | |
| 1996년 7월 | 국회 제도개선특별위원회 위원 | |
| 1996년 7월~1998년 8월 | 제15대 국회 농림수산위원회 위원 | |
| 1996년 7월 | 제15대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 | |
| 1997년 4월 | 신한국당 원내부총무 | |
| 1997년 8월~1997년 10월 | 국회 정치개혁입법특별위원회 위원 | |
| 1997년~1998년 | 국회 운영위원회 위원 | |
| 1997년 9월~1997년 11월 | 신한국당 대선기획단 조직1본부 중부권대책단 단장 | |
| 1997년 9월 |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 | |
| 1998년 3월 |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 | |
| 1998년 6월~1998년 10월 | 자유민주연합 제1사무부총장 | |
| 1998년 7월~1998년 11월 | 자유민주연합 사무총장 대행 | |
| 1998년 8월~2000년 5월 | 국회 농림해양수산위원회 위원, 간사 | |
| 1998년 10월~1999년 4월 | 자유민주연합 대변인 | |
| 2000년 5월~2004년 5월 | 제16대 국회의원 | 충남 청양군·홍성군, 자유민주연합→무소속→한나라당, 재선 |
| 2000년 6월 | 남북정상회담 남측대표단 | |
| 2000년 6월~2002년 6월 | 국회 재정경제위원회 위원 | |
| 2000년 10월 | 한빛은행국정조사특별위원회 위원 | |
| 2001년 1월~2001년 10월 | 자유민주연합 원내총무 | |
| 2001년 | 제16대 국회 운영위원회, 정보위원회 위원 | |
| 2001년 2월~2001년 3월 | 제16대 국회 국제경기대회지원특별위원회 위원장 | |
| 2001년 10월~2002년 10월 | 자유민주연합 지도위원회 위원장 | |
| 2002년 7월 | 제16대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 | |
| 2002년 7월~2004년 5월 | 제16대 국회 재정경제위원회 위원 |
2006년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하여 제35대 충청남도지사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세종특별자치시 수정안에 반발하며 2009년 12월 도지사직을 사퇴했다.
다발성 골수종 투병 후 2013년 4월 재보궐선거에서 충남 부여군·청양군 선거구에 새누리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 3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2014년 5월에는 새누리당 원내대표로 선출되었으며, 국회운영위원장을 겸임했다.
2015년 1월, 정홍원 총리의 후임으로 국무총리에 지명되어 2월 17일 제43대 국무총리로 취임했다. 그러나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 파문으로 인해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이 제기되었고, 결국 취임 70일 만인 4월 27일 사퇴했다. 이후 뇌물수수 혐의에 대해서는 2017년 무죄가 확정되었다.
| 연도 | 직위 | 소속/비고 |
|---|---|---|
| 2015년 2월 17일~2015년 4월 27일 | 대한민국 제43대 국무총리 | |
| 2015년 3월 | 광복7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정부위원장 | |
| 2015년 8월 | 제19대 국회 후반기 환경노동위원회 위원 | |
| 2015년 10월 | 제19대 국회 후반기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위원 | |
| - | 서울대학교 총동창회 고문 |
4. 논란 및 의혹
이명박 정부 시절 자원 개발 비리 의혹에 대한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수사 과정에서, 수사 대상이던 건설회사 회장 성완종이 2015년 4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되었다. 그의 주머니에서는 불법 정치 자금을 제공한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의 이름과 금액이 적힌 메모,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가 발견되어 큰 파장을 일으켰다. 리스트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금액/내용 | |
|---|
| 700 | |
| 300 | |
| 200 | |
| 100 | |
| 200 | |
| “2006년 9월 26일”, “독일 베를린” | |
| 이름만 기재 | |
| 이름만 기재 | |
이완구의 경우 이름만 적혀 있었고 금액은 명시되지 않았으며, 리스트에 언급된 8명 모두 금품 수수 사실을 부인했다. 그러나 4월 14일, 성완종이 생전에 남긴 녹음 파일이 공개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녹음 파일에는 성완종이 2013년 4월 재보궐선거에 출마했던 이완구에게 30을 건넸다고 증언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고, 이로 인해 이완구 역시 금품 수수 의혹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이완구는 의혹을 강력히 부인했지만, 정치적 부담감 속에 결국 4월 20일 국무총리직 사의를 표명했고, 남미 순방에서 돌아온 박근혜 대통령이 4월 27일 이를 수리하면서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검찰 수사가 진행되어 이완구는 7월 2일 불구속 상태로 기소되었다. 2016년 1월 5일 열린 공판에서 검찰은 이완구에게 징역 1년을 구형했으며, 1월 29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며 유죄를 인정했다. 그러나 9월 27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항소심에서는 1심 판결을 뒤집고 무죄가 선고되었고, 2017년 12월 22일 대법원이 2심 판결을 확정하면서 최종적으로 무죄가 확정되었다. 무죄 확정 후 이완구는 자신을 기소했던 문무일 당시 검찰총장을 직권 남용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4.1. 병역 관련 의혹
이완구는 주상골 부골 장애로 인해 1년 1개월 만에 군 복무를 마쳤으나,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된 후 일부 언론에서 폐 질환을 사유로 조기 전역했다는 의혹을 보도했다. 또한 그의 차남이 유학 중 축구 경기 도중 전방십자인대 파열이라는 큰 부상을 입고 입영 연기 대상이 된 사실에 대해서도 의혹이 제기되었다. 당시 이완구가 소속된 새누리당은 이러한 의혹들을 부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역 관련 논란이 있는 인물의 국무총리 임명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4.2. 부동산 투기 의혹
국무총리 후보자 지명 이후, 과거 토지 투기 관련 의혹이 다시 불거졌다. 이와 함께 고급 아파트 재산 누락, 논문 표절 등 다른 여러 문제점들도 함께 지적되었다. 특히 자신에게 불리한 보도를 막기 위해 언론에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은 큰 논란을 일으켰다. 2015년 2월 10일 시작된 국회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은 이완구가 언론에 압력을 가했음을 시사하는 녹취록을 공개했고, 이는 상당한 파장을 낳았다. 결국 이완구는 이러한 논란들에 대해 사과해야만 했다.
4.3. 언론 외압 의혹
국무총리 후보자 시절 언론에 압력을 가해 자신에게 불리한 보도를 중단시키려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2015년 2월 10일부터 국회에서 시작된 인사청문회에서는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이 이완구가 언론사에 외압을 행사했다고 주장하며 관련 녹취록을 공개했고, 결국 이완구는 이에 대해 사과했다.
5.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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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계 | 이름 | 출생 연도 | 비고 |
|---|---|---|---|
| 아버지 | 2008년 3월 24일 별세 | ||
| 형 | 이흥구 | 1954년 | |
| 동생 | 이승구 | 1958년 | |
| 배우자 | 이백연 | 1955년 | |
| 장남 | 이병현 | 1989년 | |
| 차남 | 이병인 | 1990년 |
6. 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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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일본과의 관계
2015년 4월 1일 기자회견에서 이완구는 일본이 독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고대사 왜곡 등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거나 왜곡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왜곡된 교과서를 통해 잘못된 역사관을 심어주면서 이웃 국가에 대한 우호와 선린, 국제 사회의 평화에 기여할 수 없다"고 지적하며, 일본이 역사적 사실을 직시하고 한일 관계의 새로운 미래를 열 것을 촉구했다.
같은 해 4월 9일 기자회견에서는 일본 문화청이 웹사이트에 소장 유물을 소개하며 "임나 시대"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두고 "일본의 역사 왜곡은 (한국) 민족혼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또한 "역사적 진실을 보면 일본의 기원은 백제"라고 주장하며, 일본 왕실의 기원이 백제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우려해 일본이 정창원을 의도적으로 공개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