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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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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유립은 고려 말 문신 이암의 후손으로, 일제강점기 및 광복 이후 활동한 인물이다. 1907년 평안북도 삭주에서 출생하여 어린 시절부터 한문을 익혔으며, 3.1 운동에 참여하는 등 애국심을 보였다고 주장한다. 삭주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조선총독부 발행 월간지에 시를 게재하고 친일 유교 단체에서 활동하는 등 친일 의혹이 제기되었다. 또한 《환단고기》의 전수자를 자칭했으나, 해당 서적이 위서 논란에 휩싸였으며, 그의 종교 활동과 관련된 논란도 존재한다. 광복 이후에는 단학회 활동을 이어갔으며, 《환단고기》를 출판하는 등 민족 관련 활동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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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립
기본 정보
이유립
1967년의 이유립
본명이유립 (李裕立)
출생1907년 10월 24일
사망1986년 11월 12일 (향년 79세)
국적대한민국
직업철학자, 독립운동가
종교대종교
학력
학력일본 메이지 대학 법학부 졸업
생애
초기 생애1907년 경상북도 의성에서 출생
독립운동 활동만주사변 이후 항일 무장투쟁에 참여
만주에서 독립운동 자금 모집 활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자금 지원
광복 후 대종교 재건에 힘씀
민족사 연구단군 관련 민족주의 사학 연구
고대사 왜곡 비판
말년1986년 11월 12일 사망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안장
저서
주요 저서《환단고기》(1979년)
《역사추적》
《한국상고사》
가족 관계
부친이기찬(李基燦)
모친김용도(金龍道)

2. 생애

이유립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활동한 인물로, 특히 많은 논란을 낳은 역사서 《환단고기》의 편저자 또는 전수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생애는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주장과 함께 친일 행적에 대한 의혹이 공존하여 평가가 엇갈린다.[6][4]

고려 말 문신 이암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으며[3][5], 어린 시절 3.1 운동에 참여하는 등 애국 활동을 했다고 주장하지만[3], 이러한 초기 행적은 대부분 본인의 기록에만 근거하고 있어 교차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6][4] 청년기에는 조선총독부 발행 간행물에 시를 기고하거나 친일 성향으로 평가받는 유교 단체에서 활동했으며, 동아일보 지국장을 지내는 등[7][8] 친일 의혹이 제기되는 행적이 있다.[4][9][10][11]

광복 이후에는 단학회와 이를 계승한 단단학회(檀檀學會) 활동, 국사찾기 협의회 참여 등을 통해 민족주의적 역사 연구 및 활동에 주력했으며, 1979년환단고기》를 간행하여 역사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3][12] 이 책은 내용상의 문제로 위서(僞書) 논란이 끊이지 않으며, 일본 극우 사관에 이용될 수 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4][13][14] 또한, 이유립은 태백교와 같은 소수 종교의 교주로 활동하기도 했다.[15]

2. 1. 초기 생애 (1907년 ~ 1920년대)

고려 말 문신인 이암(李嵒)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이관집(李觀楫)[3], 어머니는 태인 백씨이다.[5] 1907년 평안북도 삭주군 구곡면 안풍동 구령포 청계령산 아래 청계곡에서 이관집의 4남으로 태어났다.[3]

어려서부터 한문을 익혔으며, 1915년 9살 때에는 오동진(吳東振)이 비밀리에 가르치는 구한국군(舊韓國軍)의 노래와 행진 연습을 하였다고 한다. 1919년에는 신안동(新安洞)에서 태극기를 들고 3.1 운동에 참여하는 등 애국심이 강했으며[3], 1921년에는 조선독립소년단(朝鮮獨立少年團)을 조직하고 단장이 되었다고도 주장한다.[3] 그러나 이유립 본인과 아버지 이관집의 독립운동 관련 행적은 대부분 이유립 자신이 쓴 기록에만 근거하고 있어, 다른 자료를 통한 교차 검증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6][4]

1924년 삭주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입학하여 1927년 졸업하였다.

2. 2. 청년기 및 학업 (1920년대 ~ 1930년대)

1924년부터 1927년까지 삭주고등보통학교에 재학하여 졸업했다. 청년기에는 문학 활동에도 참여하여, 1931년 7월과 1933년 8월에는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하던 월간지 《조선》에 각각 시 '사회(寫懷)'와 '삭주(朔州) 을산촌(乙山村)'을 발표하기도 했다.

1933년에는 안순환(安淳煥)이 설립한 명교학원(明敎學院)에 들어가 활동했다. 명교학원은 조선유학회 또는 조선유교회로도 불렸다. 이후 유교 관련 활동을 이어가 1935년에는 삭주유교청년회 지교부장(朔州儒敎靑年會支敎部長)을 맡았고[7], 조선유학회의 기관지였던 《일월시보》의 주필로 활동했다.

언론 및 교육 분야에서도 활동했는데, 1938년에는 동아일보 삭주지국장을 지냈으며[8], 1939년에는 신풍학원(新豊學院)을 직접 설립하고 학감 겸 교사로 일했다.

연도주요 활동
1924년 ~ 1927년삭주고등보통학교 입학 및 졸업
1931년 7월조선총독부 발행 월간지 《조선》에 시 사회(寫懷) 게재
1933년 8월조선총독부 발행 월간지 《조선》에 시 삭주(朔州) 을산촌(乙山村) 게재
1933년안순환(安淳煥) 설립 명교학원(明敎學院, 조선유학회) 입회
1935년삭주유교청년회 지교부장(朔州儒敎靑年會支敎部長) 역임[7], 《일월시보》(조선유학회 기관지) 주필 활동
1938년동아일보 삭주지국장 역임[8]
1939년신풍학원(新豊學院) 설립, 학감 겸 교사로 근무


2. 3. 친일 의혹 및 논란 (1930년대 ~ 1945년)

이유립은 일반적으로 독립운동가 또는 민족운동가로 알려져 있으나, 일제강점기 동안의 행적을 근거로 친일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4]

주요 의혹은 다음과 같다.

  • 1931년 7월과 1933년 8월, 조선총독부가 발행하던 월간지 《조선》에 각각 시 '사회(寫懷)'와 '삭주(朔州) 을산촌(乙山村)'을 투고했는데, 이 시들의 내용이 일제 치하의 태평성대를 찬양하는 것이라는 비판이 있다.[9]
  • 1933년 안순환이 설립한 명교학원(明敎學院)에 입회하였는데, 이 단체는 친일 유교 단체인 조선유교회(또는 조선유학회)로 알려져 있다.[10]
  • 1935년에는 삭주유교청년회의 지교부장을 맡았으며,[7] 조선유교회의 기관지로 친일 성향을 띤 《일월시보》의 주필을 역임했다.[10]
  • 1939년에는 조선유교회 산하 단체인 신풍학원(新豊學院)을 설립하고 학감 겸 교사로 활동했다.[10]
  • 1938년에는 동아일보 삭주지국장을 맡았는데,[8] 당시 동아일보는 중일 전쟁 이후 친일적인 논조로 변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1]

2. 4. 광복 이후 활동 (1945년 ~ 1986년)

1945년 4월 건국동맹(建國同盟)의 평안북도 삭주책을 맡았다고 주장한다. 같은 해 전봉천(全鳳天)의 '대동아전쟁거부론' 전단 살포 사건에 연루되어 구령포 일본 헌병대의 조사를 받았다. 해방 후인 9월 9일에는 압록강국민학교 교장, 풍민조합장(豊民組合長), 대한근로국민회 문화부장 직에 임명되었다고 주장한다. 10월 3일, 천마산 제전대회에서 독립운동가 이용담(李龍潭)이 주도하여 결성한 단학회(檀學會)의 기관지 《태극(太極)》 주간으로 임명되었다고 한다.[3]

이후 왕정복고를 주장하다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기도 했다.

1963년에는 단학회를 계승한 단단학회(檀檀學會)의 3대 회장으로 취임하여 기관지 《커발한》을 발행했다. 1976년에는 박창암, 안호상, 유봉영, 문정창, 박시인, 임승국 등과 함께 국사찾기 협의회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1979년에는 논란의 중심에 있는 역사서인 환단고기를 100부 한정으로 간행했다.

2. 5. 《환단고기》 위서 논란

이유립은 《환단고기》의 전수자를 자처했으나, 실제로는 그가 직접 쓴 위서(僞書)라는 주장이 지배적이다.[12][4] 《환단고기》는 표면적으로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내용에는 친일적 요소가 강하다는 비판이 제기된다.[4]

이유립은 이 책을 박창암 장군에게 전했고, 박창암은 이를 다시 일본의 역사저술가 鹿島昇|가지마 노보루일본어에게 전달했다.[13] 가지마 노보루는 일선동조론과 같은 황국사학을 주장하는 일본의 극우 인사로 알려져 있으며, 그가 번역 출간한 《환단고기》에는 "일선동조론의 증거가 되는 책을 전달해 준 이유립에게 감사한다"는 서술이 포함되어 있다.[14] 이는 《환단고기》가 일본 극우 세력의 역사관을 뒷받침하는 데 이용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논란에 대해 이유립 본인은 자신이 전달을 허락한 바 없으며 박창암이 무단으로 유출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2. 6. 종교 활동

이유립은 일제강점기 당시부터 단학회나 태백교와 같은 민족단체 또는 민족종교에서 활동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단학회를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단단학회(檀檀學會)나 태백교, 커발한 등은 일종의 소수종교로 분류되고 있으며 이유립은 그 교주로 알려져 있다. 《환단고기》에도 이유립이 교주로 있는 태백교의 교리가 서술된 부분이 많다[15].

3. 저서


  • 《광개토 성릉 비문 역주》, 대동문화사, 1973년
  • 《커발한 문화사상사》1-2, 단단학회, 1976년
  • 환단고기》, 광오이해사, 1979년[16]
  • 《한암당 이유립 사학총서 (천)》, 단단학회 편, 모음출판사 , 1983년[17]
  • 《대배달민족사》1-5, 고려가, 1987년

참조

[1] 뉴스 null http://www.daejeonto[...]
[2] 뉴스 null 한국일보 1986-04-20
[3] 백과사전 이유립 https://terms.naver.[...] 한국학중앙연구원
[4] 서적 만들어진 한국사 파란미디어 2010
[5] 웹사이트 null http://people.aks.ac[...]
[6] 일반
[7] 간행물 靑年諸賢에게 檄함 일월시보 1935
[8] 웹인용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朔州支局設置 ; 李裕岦 任支局長 (昭和12年) http://kuksa.nhcc.go[...] 2007-08-28
[9] 간행물 null 조선 1933-08
[10] 웹사이트 조선유교회 http://search.i815.o[...] 독립기념관
[11] 뉴스 null http://www.mediatoda[...] 동아일보 1937
[12] 논문집 null 역사비평 1990
[13] 뉴스 박창암과 장도빈 - 국사찾기운동 http://www.pressian.[...] 프레시안뉴스 2003-12-13
[14] 서적 환단고기 新國民社 1984
[15] 논문 단군신앙 실태분석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16] 일반
[17]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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